너무도 쓸쓸한 당신
박완서 지음 / 창비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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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최근에 읽은 이상문학상 단편집과 박완서의 단편집을 비교해서 읽으면, 어쩐지 낯설다. 전자가 차가운 웃음을 담고 있다면, 후자는 따뜻한 해학으로 인간을 비춘다. 두 책에 수록된 작품들 모두 현대사의 단면을 드러내지만, 박완서의 소설집은 조금 더 개인의 심리에 집중한다. 그래서 조금 더 친숙하고, 보편적인 이야기는 『너무도 쓸쓸한 당신』에 있다고 본다. 문학에서 우열을 가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선호도라던가. 일단 나에게는 박완서 소설가의 토닥거림이 꽤 괜찮았다.


 등장인물과 다루는 내용이 다른 이 단편집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바로 관찰자의 밀도 있는 심리 묘사다. 때로는 1인칭으로, 때로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읽혀지는 인물의 심경 변화는 실로 극적이다. 사건은 미약할지라도 그것이 인물의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그 안에는 일반적인 사랑과 욕망도 포함되어 있지만,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다른 유형의 마음이다. 차마 남들에게는 고하지 못하는 악의요, 입밖으로 꺼내지도 못할 탐욕이요, 다소 부끄러운 과거들이다. 누구나 마음 한 켠에 품고 있는 이면들이 수면 위에 떠올라 독자의 마음을 찌른다. 작가의 솔직한 고백이 곧 읽는 이의 감정을 동요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낯부끄러운 존재들을 익살을 담아 표현하는 작가의 수완이 대단하다. 그래서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기보다는 쓴웃음을 짓는다. 그래, 우리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혹은, 나도 저렇게 될지도 몰라. 조금은 초조하지만 그래도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어쩌면 소설가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위가 아닐까 싶다.

 

 인상적인 단편들을 몇 가지 꼽으라고 하면, 「참을 수 없는 비밀」,「그 여자네 집」,「J-1 비자」가 아닐까 싶다. 다른 단편들도 모두 빼어나지만, 박완서가 펼쳐놓은 언어의 망을 나의 방식으로 풀어놓기에는 역부족이다. 단순히 줄거리를 요약하거나 주제를 한 줄로 적어놓기에는 그녀의 단편에 서린 느낌을 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분명한 인상으로 남은 것만 나의 언어로 설명하고자 한다. 첫 번째 단편은 책 전체에서 보기 드문 스무 살의 기억을 다룬다.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각인된 불행과, 그 사건의 진실을 품고 있는 한 명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생의 전반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어찌 보면 비운의 인물이다. 관찰자는 그녀의 마음을 구석구석 후비며 내면의 욕망과 아쉬움 등을 낱낱이 내비친다. 그리하여 독자는 하영의 비밀에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 여자네 집」은 위에 언급한 단편소설과 대척점에 있다고 본다. 하영의 이야기가 개인의 서사에 집중했다면, 이 작품의 서사는 현대사와 다양한 지점에서 접한다. 소설은 만득이와 곱단이의 교제를 가로지르는 일제강점기, 분단과 전쟁, 그리고 위안부까지 맞닿는다. 그동안 인물의 심리 묘사에 초점을 맞춘 작가는 이번에 자신의 능력을 한껏 제한하여, 철저히 관찰자의 시점에 놓인다. 그렇게 해야 역사를 조명할 수 있기 때문이요, 마지막 부분의 반전이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장만득의 호소는 어찌 보면 박완서가 추구하는 글쓰기와 어긋난다. 요지는, 나의 역사를 안다고 나에 대해 안다고 자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제야 만득이와 기구한 현대사를 동시에 보고 난 후, 그를 이해했다고 생각한 독자들은 그 허무맹랑한 상상에서 벗어난다. 이것이 박완서 특유의 해학임을 느꼈다.


 「J-1 비자」는 이창구라는 소설가 겸 고등학교 국어 선생을 하고 있는 중년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소재는 J-1 비자를 얻기 위해 벌이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여정과 끝내 좌절되어 드러내는 속좁음이지만, 그 안에도 현대사의 단면이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도 몇 번 언급한, 한국인이 품고 있는 막연한 아메리카 드림을 풍자한다. 박완서는 소설가가 느끼는 미묘한 욕망을 한껏 드러내어 해학스러운 어조를 유지한다. 그것과는 별개로, 얼마 전까지 J-1 비자를 유지했고 실제로 미국에 갔던 경험이 떠올라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단편이기도 한다.


 서론의 첫 줄부터, 꽁뜨에 이르기까지 박완서는 그녀 특유의 해학을 놓치지 않았다. 더욱이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이는 작가가 세상을 그저 아름답게 보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야말로 현대사의 산 증인이었고, 그 사이에 있었던 물리적, 정신적 충격에 함께 했다. 폭풍이 모두 지나고 나서, 그녀는 초연하게 미소를 짓는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거리를 적당히 조절하며. 때로는 기꺼이 소설 속의 세계로 참여하고, 때로는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해학과 따뜻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는 그 능숙함에 감탄이 나온다. 다 읽고 나면 알싸한 느낌이 조용히 머릿속에 남는다. 처음에는 웃음 지을지라도, 후에는 표정이 달라진다. 전혀 낡지 않은 박완서의 소설들을 조용히 품는다.

극진히 사랑하던 애인을 바다에서 잃은 청년이 있었다나. 그가 남은 생애 동안 돈을 버는 대로 오로지 뛰어난 아콰마린만 사모은 게 늙어 죽을 때는 드디어 커다란 마대자루 하나 가득하더라는 것이었다. 깊은 바다에 애인을 빼앗긴 청년이 따라 죽는 대신 바다 빛깔 결정체에다 자신의 혼을 수없이 던진 이야기를 친구는 왠지 심드렁하고 간략하게 말했다. 그런 무기교야말로 극상의 기교였을까. - P13

강도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얼떨결에 십층에서 뛰어내려 죽었다고 강도는 죄가 없고 자살이 되나요? 삼천기 강산 방방곡곡에서 사랑의 기쁨, 그 향기로운 숨결을 모조리 질식시켜버리니 그 천인공노할 범죄를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사람도 아니죠. 당한 자의 한에다가 면한 자의 분노까지 보태고 싶은 내 마음 알겠어요? - P203

"난다 긴다 하는 급수 딴 타자수도 얼마나 많은데 할머니한테까지 돌아올 일거리가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청년이 7000원짜리 수리비 청구서를 내밀며 정말로 안됐다는 듯이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신기했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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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1987년 제1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이문열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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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그러니까 정확한 연도도 기억나지 않았던 초등학교 시절, 다림출판사에서 간행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단행본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한병태의 시점에서 진행되었던 탓일까, 엄석대의 부정과 몰락이 통쾌하게 다가왔다. 그러다 불현듯 집에 꽂혀 있는 제1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의 이름으로 실린 이문열의 중편소설을 다시 읽게 되었다. 두 번째 독서에서는 조금 다르게 책이 읽혔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한병태의 내면에 잠재한 엘리트주의, 남들과는 다르다고 여기는 자의식이 만들어 낸 변명처럼 느껴졌다. 공동체의 상태를 파악하지 않고 혼자 모든 것을 바꾸겠다는 무모한 시도들, 패배한 이후 무섭도록 체제에 순응하고 거기서 살아남는 모습, 그리고 엄석대의 몰락이 시작된 이후 그것을 내심 아쉬워하는 태도 등이 새로운 해석을 열어놓았다. 


 문학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수록된 작품들이 1980년대 내지는 한국 현대사의 일면을 담고 있음을 여실히 느꼈다. 시대간의 간격이 조금 크게 느껴졌다. 다만 대부분의 소설들이 낡은 느낌이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리한 수상소감을 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이문열의 소설 외에 인상적으로 읽혔던 것은 <문신의 땅>이었다. 심사위원도 지적했듯이 이야기의 맺음보다 전달하는 메세지가 워낙 강렬한 탓이기도 하다. 그 마무리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나, 잦은 시점의 변화가 혼란을 야기한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노마리아의 문신이 한국 현대사의 상흔을 상징하는 느낌이라 각인된 듯 하다. 


 각 해의 이상문학상 수상작들은 일관된 흐름이 있다. 매년 요구하는 문학의 정신이 다른 것도 있고, 작가의 고투와 평단의 차이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이것이 시대를 막론하고 이상문학상 수상작들을 찾아서 보는 매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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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필로만 적어놓았는데, 어디서든 볼 수 있게 미리 등록을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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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균형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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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독서 - 그림으로 고전 읽기, 문학으로 인생 읽기
문소영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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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신문에서 그녀가 쓴 칼럼을 여러 개 스크랩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신문에 투고했던 글들에 몇 가지 글들을 추가해서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기억을 저장하는 용도로 이 리뷰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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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여행
다나베 세이코 지음, 신유희 옮김 / 북스토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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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나는 어떠한 흥미 없이, 사전 정보 없이 작품 속에 들이닥치곤 한다. 영화든, 소설이든 그러한 경험은 예상 밖의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감상 여행』의 두께는 얇았고, 나는 시도해 볼만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작가가 꽤 오래 전부터 활동했던 작가였으며, 수록된 단편들(단편집인지도 몰랐다)이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반영임을 뒤늦게 알았다. 일본 문학에 대한 나의 무관심 때문인지 몰라도, 세 편의 이야기는 꽤 현대적으로 다가왔다. 


 다나베 세이코가 펼치는 이야기들은 다분히 일상적이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고, 주로 남녀의 대화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 일상의 조각들 속에서 독자는 피식 웃음을 짓고, 가끔은 송곳처럼 돋아난 씁쓸한 현실을 직시한다. 요지는 이런 것이다. 「감상 여행」속 유이코와 히로시는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지만, 결국 방안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발견한 부조리함을 느꼈다. 다만 그들의 정체는 가야 할 곳을 모르는 것이 아닌, 무기력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활자 너머로 먼지가 잠겨 있었고, 끝에 가서야 그들은 겨우 먼지를 털어낼 뿐이다. 


 「당신이 대장」은 작가의 특성이 가장 잘 표현된 단편이 아닐까 싶었다. 다츠노의 시선으로 본 에이코의 다소 우스꽝스러운 변화와, 서서히 드러나는 다츠노의 무기력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작가는 어떤 한쪽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 가족이 미처 인지하지 못한 타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유쾌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평생 직장이라 믿었던 파트 타임에서 잘리고 난 후 울고 있는 아내를 향해 "이번엔 아내가 이성을 잃고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설마 아내가 야구 선수가 되고 싶은 건 아니겠지."라니. 제3자인 독자가 보기에는 한 편의 희극이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그렇게 세상을 배웠겠거니 자부한 다츠노를 비웃듯 더 나은 직장에 채용된 에이코의 모습을 보여주며 두 현대인의 달콤씁쓸한 생활기를 마무리짓는다. 


 마지막 단편 「시클라멘이 놓인 창가」는 상당히 자조적으로 변한 작가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독신으로 늙어갈 각오를 하고, 실제로 그렇게 늙은 루리의 생활을 보여주고, 츠카다를 만나 마음을 여는 과정은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하다. 무기력함과 블랙 유머를 거쳐 건조한 겨울의 시선으로 작품집을 끝내는 구성은 독자들에게 감상 여행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남의 이야기처럼 보이면서도 곳곳에 보이는 달콤씁쓸한 일상의 파편들이 우리에게 쏟아진다. 일상의 기록은 대중문학과 순문학 중 어디에 있는가? 여전히 그 경계는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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