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신당동을 처음 간 것은 92년이다. 중.고교 때 학교와 집만 왔다갔다했던 탓에 교보문고를 가본 것도 대학에 온 이후니, 신당동을 스물여섯에 간 건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한창 나를 따라다니던 여자애에게 이끌려 간 건데, 유명한 곳이라는 여자애의 말과 달리 맛에서 어떤 감동도 받지 못한터라 그 이후에는 한번도 간 적이 없다. 나중에 알고보니 신당동이 떡볶이로 유명한 곳이라던데, 내가 객관적이지 못해서 그런지 우리집 근처 떡볶이집이 그곳보다 훨씬 맛있는 것 같았다.
어제, 십여년만에 다시 신당동을 찾았다. 갑자기 거길 간 이유는 솔직히 말하면 돈이 별로 없었던 때문인데, 둘이서 먹는 떡볶이 세트-만두와 계란, 라면, 오뎅과 떡볶이를 찌게처럼 담아놓은 것-가 8,100원밖에 안했으니 내 계략은 성공한 셈이다. 맛은? 물론 끝장이었다. 한창 먹을 나이인 20대에도 맛이 없던 떡볶이가 성장기를 지낸, 이미 미식가로 변해버린 나한테 무슨 맛이 있었겠는가. 먹는 내내 투덜댔다. 우리집 근처 포장마차로 갈 것을. 어제가 마침 '신당동 떡볶이 축제'일이라 20%가 할인되어 1600원을 벌지 않았다면 그 후회의 깊이가 더 컸을 거다. 축제, 그렇다. 어젠 '떡볶이 축제'라고, 무대를 만들어 한바탕 축제가 벌어졌다. 떡볶이집 주인들이 내건 경품엔 자전거 등 탐나는 것들이 많았고 사회자가 구경꾼들을 여러차례 즐겁게 해줬지만, 신당동 떡볶이가 우리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은, 그런 떠들썩한 무대보다는 맛있는 떡볶이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게 아닐까.
물론 한집만 가봤으니 다른 집은 맛있을 수도 있겠다. 내 입맛이 워낙 까다로울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우리가 간 곳은 사람이 가장 많은 집이었고, 같이 간 사람 역시 "맛이 없다"는 내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으니, 신당동 떡볶이가 별 특별한 게 없다고 주장해도 되지 않을까? 한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그 집의 벽면에 유명 연예인들의 싸인이 잔뜩 걸려 있었다는 거다. "맛이 가게 맛있네요"라는 표인봉의 글귀를 필두로 하지원, 지오디 등 나도 알만한 연예인들이 입을 모아 그집의 맛을 칭찬하고 있다. 연예인들이 맛의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그들의 말이
무시할 수 없는 신뢰성을 손님들에게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별로 맛도 없는 떡볶이를 잔뜩 과대포장해 놓은 그들에게 '인간이 되라'고 말하고 싶었다.
거기 써놓은 말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그들이 쓰는 언어가 빈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너무 맛있어요" "정말 죽이네요" 대충 이런 식이다. 하기사, TV에 나오는 맛집 탐방을 갔을 때도 그들은 그런 말밖에 쓰지 못했다. 1등한 소감을 물으면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라고, 마지막으로 할말이 없냐면 "팬 여러분, 사랑해요!"라는 천편일률적인 말을 쓰는 그들이, 맛집에 간들 얼마나 멋진 표현을 하겠는가. 이건 사실 교육의 문제다. 고등학교를 나와서 자기 의사를 그 정도밖에 표현하지 못한다는 건, 말하기와 글쓰기 교육이 잘못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니던가. 그럼 너는 우리집 근처서 파는 맛있은 떡볶이의 맛을 어떻게 표현할 건데, 라고 물을거다. 그래서.... 생각해 봤다.
-몇년간 묵은 귓밥을 한큐에 파내는 느낌...
-보름만에 머리를 감은 기분...
-떡볶이가 갈비나 생선회보다 우월한 음식임을 증명해주는 쾌거
-더운 여름날, 달리는 말 위에 앉아 강가를 거니는 그런 맛
-파도가 치는 해변에서 꿈에 그리던 미녀를 만난 느낌
갑자기 생각하려니 이런 것밖에 떠오르는 게 없지만, 그래도 천편일률적인 표현보다는 낫지 않는가. 우리 국민의 64%가 하루 50단어 이하만 쓰고 살아간다는 통계를 상기하면서, 당연한 말보다는 가급적이면 아름다운 문장을 쓰도록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