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니의 소설이 인터넷에서 인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직접 본 바로는 특별한 독창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모티콘을 마구 쏟아내며 아이들 장난처럼 쓴 인터넷 소설이 특례입학 이유라면 다시한번 재고해 봐야하지 않을까? (김미선, 20. 대학생)"

"신세대 트렌드만을 쫓는 귀여니 소설에서 문학성이나 작가정신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뼈를 깎는 듯한 창작 노력을 하는 기존 작가들이 이번 일에 자괴감을 느낄까 걱정이다(이선영, 29. 학원강사)

<그놈은 멋있었다>를 비롯해 몇권의 소설을 베스트셀러로 만든 귀여니(본명은 이윤세란다), 그가 성대에 특례입학한 것에 대해 여론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특히나 그의 소설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20대 이상에서는 지지율이 훨씬 더 낮아진다. 난 그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하지만 꼭 애를 낳아봐야 출산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아는 것은 아니듯(진중권의 표현에서 베꼈다) 책을 다 읽어야 그 책이 후지다는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편의점에 있는 귀여니의 책을 떠들어 보다보니, 한숨이 나왔다. 인터넷 채팅을 책으로 옮겨놓은 듯한 책. "이런 책이...베스트셀러라니"


철없던 시절, 나 역시 그보다 더한 책을 낸 적이 있지만, 그게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면 두고두고 부끄러울 뻔했다. 그건 나의 수준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자 우리 독서시장의 수치로 남았을 테니까. 다행히도 내 책은 망했고, 팔린 것의 대부분은 내가 산 거다. 마찬가지로 귀여니의 책이 문제인 것은 그게 책으로 나왔다는 게 아니라, 그게 중고생들이 탐독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데 있다. 내 책처럼 몇백권 팔리다 말았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그녀를 악의 화신으로 보지 않았을 텐데.

그 명성을 이용해 대학까지 특례입학하자, 더더욱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소설은 우리 애도 쓰겠는데, 그런 실력으로 어떻게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담? 실력으로 대학에 들어간 사람이나, 점수가 모자라 못들어간 사람이나 화가 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난 이번 일에 사람들이 과도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명인이 대학의 홍보 차원에서 특례입학하는 것은 벌써 오래된 일이다. SES의 멤버는 고대에 갔고, 강타는 중앙대에 갔다. 일일이 기억을 못하겠지만 다른 연예인들도 다 버젓이 대학에 갔다. SES가 음악성이 있는가? 아니다. 귀여니의 소설이 문학이 아니듯, SES의 노래도 음악이 아닌 것이다. 대학에서 귀여니를 특례입학 시킨 것은 그가 인터넷 소설을 썼기 때문이 아니라,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수준이야 어떻든 귀여니의 명성이 학교의 성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했을 테니까. 연기를 못하는 배우들, 노래를 못하는 가수들도 그 명성을 발판으로 줄줄이 대학에 가는 와중에, 귀여니에 대해서만 유독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는 이유는 뭘까? 그건 문학에 대한 지나친 엄숙주의 탓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모름지기 책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생각.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나 역시 책은 이러이러한 게 좋다고 생각을 하지만, 저러저러한 책도 필요한 법이다. 귀여니의 책을 읽고 "너무 감동했다"고 울먹이는 수많은 애들이 있는 한, 귀여니는 무죄다.

* 난 그것보다는 김진명이 세명대학교 교수로 간 게 더더욱 웃긴다.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문학성도 담보할 수 없는 그가 특례입학을 한 것도 아니고 교수로 가서,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의 밑에서 또 얼마나 반일주의자들이 쏟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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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몬교라는 게 있다. 모르몬교는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는 교로, 조지프 스미스라는 인간이 창설했다. 그는 그 교리에 솔선하려는 듯 50명의 여성과 결혼했다. 너무 심하다 싶었는지 내부에서도 일부다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모르몬교는 일부다처를 허용하는 교와 그렇지 않은 교로 분열되게 된다. 브리검 영(?)인가 하는 인간이 일부다처를 허용하자는 파의 대표였는데, 조지프 스미스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역시 27명의 여자와 결혼했다고 하니, 그저 입이 벌어질 뿐이다. 미국의 유타 주는 쭉 빠진 미녀들이 아주 많은데, 그게 유타에서 모르몬교가 성행한다는 사실과 모종의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일부일처제는 인간에게 잔인한 제도다.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호르몬의 수명이 석달인가 밖에 안된다는 연구결과로 미루어 볼 때, 몇년을 지나 수십년간을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산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거기서 발생한다. 바람, 혼외정사, 간통, 외도(다 같은 말이잖아!)가 일어나고 성을 매개로 한 각종 향락산업이 번창하는 것도 따지고보면 일부일처제 탓이다. 의자왕처럼 부인 외에 3천궁녀를 거느린다면, 왜 외도를 할 것이며 룸살롱에 가겠는가?
 
그래서 뜻있는-바꿔말해 아무 생각없는-사람들은 "아랍에 가서 살고싶다"고 말한다. 아랍에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기 때문이다. 실상을 알고보면 아랍애들이 여자를 밝혀서 그런 것도 아니며, 그럴 수밖에 없는 문화적 배경이 있다지만, 겉으로 비추어지는 아랍은 우리  남자들에게 엘도라도가 아닐까 싶다. 일부다처,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는가?
 
일부다처가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생각은 그러나 엄청난 착각에 불과하다. 부인 하나도 먹여살리기 힘든 처지에 서넛의 부인을 거느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20대 80의 법칙은 여기서도 적용된다. 즉, 상위 20%에 속하는 사람들이 80%의 여자를 차지하고, 나머지 80%는 20%의 여자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 나같이 못생기고 배까지 나온 사람은 당연히 못가진 80%에 속할 것이며, 그 80의 대부분은 수도승같은 금욕생활을 해야 할거다. 약간은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띤 일부일처가 그런 면에서는 합리적인 제도이며, 대부분의 남성에게 만족스러운 제도인 것이다. 

 굳이 아랍에 가고 말고 하지 않아도, 한국 남자들은 할 거 다하고 산다. 우리 사회는 가부장 사회이며, 남성들에게 무지하게 유리하다. 경제적 부담이 되긴 하지만, 눈을 조금만 돌리면 남자들을 위한 각종 향응이 즐비하다. 천하의 나쁜 여자가 되어 온갖 비난을 받기 마련인 여자의 외도에 비해, 남자의 바람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오히려 아랍 남자들이 한국에 오고싶어하지 않을런지?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적어도 남자들한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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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천국.com 2011-05-21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50명도 경악스러운데 200명 부인둔 어느 부족 할아뱅도 있던데요? 공포스러웠음 근데 일부다처제하면 여자도 여자지만 남자가 허리가 휠듯.ㅋㅋㅋ

하렘천국 2011-05-21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런데 일반적인 사고를 가진 여자들이라면 아무리 상대가 재벌이라도 미치지 않고서야 과연 스스로 두세번째 부인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ㅋㅋ 있으니까 저게 현실이 되는거겠지만 두쪽 다 골빈거 같음.
 

 

 

 

내 후배가 기독교에 귀의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착하며, 평소에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그가 왜 갑자기 하느님을 믿기로 한걸까? 그는 "제가 미처 모르고 저지르는 죄를 깨닫게 해줄 수도 있잖아요"라고 말하지만, 글쎄다. 그가 죄 축에도 못끼는 쥐꼬리만한 죄를 고해하는 동안, 남들은 굵직굵직한 범죄를 아무 거리낌 없이 저지른다. 별로 죄가 없는 그가 자기 가슴을 치면서 "내탓이요"를 읊조리는 동안, 밖에서는 잘못을 저지른 이들이 뻔뻔스럽게 "니탓이야!"를 외친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악한 사람은 악한대로, 착한 사람은 착한대로. 


 교회는 언제나 내탓을 강조한다. "내탓이요, 내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우리가 IMF를 맞은 것도, 조국이 분단된 것도 모두 내탓이다. 그건 또한 하느님의 뜻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내려주는 시련. 그 말이 맞다면 하느님은 새디스트실까? 그렇지 않다면 수백만이 죽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만드실 리가 없지 않는가? 광주에서 수천명을 학살한 전두환의 등장도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느님의 뜻"이다. 그래서였을까. 5공 시절 많은 교인들이 전두환을 위해서 "조찬기도회"를 열었던 이유가. 
 
어머님이 아는 분 중 교회에 전재산을 바치고 천막 비슷한 곳에서 사는 사람이 있었다. 태풍이 불던 어느날, 천막을 고정하려고 놓아둔 돌이 태풍에 날라가 아들의 가슴에 명중했다. 어린 아들은 결국 죽었지만, 그분은 "내가 죄가 많아서 아들이 죽었다"고, 그리고 "모든 게 하느님의 뜻"이라면서 더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겠단다. 물론 그분이 나같은 사람은 따를 수 없는 깊은 믿음을 지닌 건 틀림없지만, 한가지는 확실히 하자. 아들이 죽은 건 그분이 죄가 많아서가 아니라 태풍 때문에 돌이 날라가서고, 더 근본적인 원인은 집을 팔아서 교회에 갖다바친 때문이다. 죄가 많아서 아들이 죽는다면, 전두환의 아들이 경영하는 시공사가 그렇게 잘나갈 수 있을까? 수많은 시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섬긴 욥의 얘기는 분명 아름답지만, 그건 "착한 사람은 살아생전 고생만 한다"는 기존의 생각을 더더욱 굳히는 역할을 할 뿐이다.  

 
성경에선 이렇게 말한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더 어렵다"고. 재산이 있으면 다 교회에 바치고, 가난하게 살라는 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점점 부유해지고, 돈없는 신자는 교회에서 무시를 당한다. 신도수 세계 1위인 순복음 교회는 넘치는 돈을 주체못해 스포츠 투데이를 만들었고, 송파에 있는 모 교회-엠마뉴엘 교회던가?- 는 은빛 찬란한 궁전을 지어놓고는 교회라고 우긴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건대 하느님이 가난한 사람의 편인 건 확실하지만, 아무래도 하느님은 너무 바쁘신 것같다. 그래, 아마 그럴 것이다. 관장하시는 별이 너무 많아 우리 지구를 돌볼 여력이 없으시겠지.


노아의 방주를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관심은 다른 별에 가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의 나라를 참칭하는 미국이 악행을 저지르는 걸 그냥 놔둘 리가 없고, 나쁜 짓을  할수록 더 잘사는 걸 묵인하시지는 않으리라.  모든 걸 내탓, 그리고 하느님의 뜻으로 돌리는 한, 사회의 진보는 없다. 내탓만을 주장하는 속세의 종교들은 이제껏 민중의 아픔은 외면한 채 체제 유지에 기여해 왔다. 하느님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신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유감스럽게도 하느님은 너무 바쁘시다. 그러니 지금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상당수가 하느님의 원래 의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 맹목적으로 "주님의 뜻"만을 외치기보다는 이 땅에 정의를 세우는 데 기여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러다 번개라도 맞는 건 아닌지, 약간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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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라는 소녀가 쓴 일기로 구성된 <인상주의, 빛나는 색채의 나날들>를 읽다보면 드레퓌스 사건이 자주 언급된다.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프랑스 공화국의 기틀을 만들었던 그 사건이 귀족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춰졌을까. 줄리의 일기다.

[드레퓌스 사건이 화제가 되었다. 요즘은 어디서나 이 사건이 화제가 되어 시끄럽다. 만일 그 남자-드레퓌스-가 무죄임에도 벌을 받는다면 매우 무서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152쪽)]

20세의 소녀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는 까닭은 기득권층을 옹호하고 반유대 정서에 빠져있던 당시의 언론들이 진실을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신문이라고 해서 얼토당토 않게 반유대 감정을 조장하지는 않는 법,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반유대정서가 자리잡고 있었다. 유명한 화가였던 르느와르의 말이다.
"(유대인들이) 여러 나라에서 쫓겨난 것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니까. 그들이 프랑스에서 어떠한 지위도 가지지 못하도록 해야 해. 드레퓌스 재판을 백일하에 드러내라고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공개할 수 없는 경우도 많고,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 (157쪽)"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측에서 재판결과를 밝히라고 요구한 건, 드레퓌스가 유죄라는 증거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명백한 진실에 귀를 막고, 이렇게 말한다.
"알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고.

다시 줄리의 일기다. [르느와르 아저씨는 유대인의 특성은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다. 확실히 그렇다(168쪽)]
스무살짜리 여자애가 이런 잘못된 편견에 빠져있는 건, 우리나라에서 호남인에
대해 갖고있는 편견을 연상케 한다. 그런 편견은 확대재생산되어 움직일 수 없 는 사실이 되며, 그 사실은 다시금 호남 사람들을 옥죈다. 내 친구의 말이다.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돈을 안주더라. 그래서 알아봤더니 호남사람이야. 이런 경험이 꽤 많아"
호남 차별론자들의 한정된 경험은 기존의 편견을 고착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전두환 정권에 저항했던 광주항쟁도 그들의 눈에는 "공산집단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의 반란" 에 지나지 않는다. 

[어제 루베-프랑스 대통령으로 드레퓌스파다-가 달걀세례를 받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드디어 사람들이 국가원수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에 대해 반발하기 시작했다. 드레퓌스파 신문은 '귀족계급의 봉기, 왕당파의 음모'라고 썼다. 이런 식으로 얼토당토 않은 사실을....어쩌고.... 공화국 대통령이 이런 모욕을 당했다니 창피한 일이다. 그러나 루베는 유대인 동료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모욕을 당해도 결코 사임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정도 모욕에 사임을 할 사람이라면, 당선 한시간도 지나기 전에 그만두었을 것이다(222쪽)]

유대인을 옹호하는 대통령에 대한 경멸의 감정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지금 우리 나라 대통령에게 그러는 것처럼. 잘난 보수 층으로서는 대학도 안나온, 그리고 말투가 천박한 대통령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집권한 지 불과 몇개월이 지났지만 벌써 이런 말들이 나온다.
"군사 쿠테타를 해야 한다" "임기를 못채우고 물러날 수도 있다"
물론 이건 그들의 희망 사항이다. 도대체 왜 그들은 노무현이 못마땅한 걸까. 조선희에 따르면 디제이 정권 5년은 3김 청산도 하고, 그간 독재 때 당한 애들이 한풀이를 하는 기간이라고 넘어갔지만, 당연히 자기들 것이 되어야 할 정권이 또다시, 그것도 품위라곤 없는 노무현에게 패배를 하자 인내의 한계에 달한 거란다. 그래서 그들은 대통령의 한마디 한마디를 물고 늘어지며, 국가 위기를 부채질한다. 정권이 몰락하기만 한다면 나라야 망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그들의 결의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드레퓌스 사건 때 프랑스 언론들이 진실을 보도하지 않았듯, 지금의 언론들은 북핵 위기를 고조시키고, 경제위기설을 퍼뜨려 경제 침체를 더더욱 부채질한다. 100년 전의 프랑스와 2003년의 한국은 너무도 똑같다. 하지만 프랑스에는 지식인의 위상을 새로  정립했던 에밀 졸라가 있었던 반면,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미 보수언론의 품안에서  허우적대며 자신의 학문적 양심에 반하는 글들을 써재낀다. 드레퓌스가 결국 무죄를 선고받으며 프랑스에 정의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보여 준 쾌거를 우리나라에서 재현할 것 같지 않다는 게 바로 그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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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교보 사이트에 가 봤다. 내가 교보를 배신하고 알라딘에 갈 때와 똑같이 인터넷교보는
여전히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는 듯했다. 교보에도 인터넷교보라는 팀이 꾸려져 있지만,
교보라는 곳이 원래 오프라인 서점으로 출발한 탓에 인터넷에서는 알라딘의 적수가 되기는
어려운 걸까? 오프라인의 우세를 온라인으로 확장시키는 건 불가능한 것일까.
지금이야 교보가 최강이지만, 인터넷서점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추세라는 걸 교보는
모르는 듯하다.

모니터요원을 하면서 난 독자서평의 중요성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같은 모니터요원 한명이
"독자서평이 뭐가 중요하냐"고 했지만, 난 인터넷에 자기 이름으로 된 서평을 남기고 싶어하는
독자들의 심리를 십분 이해한다. 서평들이 정리가 전혀 안되어 있는 교보에 비해, 알라딘의 서평
시스템은 정말 기가 막히다. 서평을 쓴 사람의 이름을 클릭하면 그 사람이 썼던 서평이 몽땅
나오는데, 최근에는 아예 '나의 서재'가 만들어져 그가 알라딘에서 한 모든 것들을 담을 수 있다.
그 서재를 통해 독자들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광경은 서점이 사회적 소통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옛날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알라딘은 최근 서재에다
게시판의 기능까지 추가해, 소통 기능을 훨씬 업그레이드했다.

교보가 아무 것도 안한 건 아니다. 쥐꼬리만한 예산을 투자해 교보가 준비한 것은
'쩜책 이벤트'다. 인터넷 URL에다 '박완서.책'이라고 한글로 쳐 넣으면, 바로 교보 사이트로
연결되며 박완서의 책이 몽땅 불려진다. 매우 획기적으로 생각되는 이 서비스를 그러나 사람들은
별로 모르는 듯. 그도 그럴것이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즐겨찾기를 통해 사이트에 접속하지
일일이 URL에 주소를 쳐 넣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즉, 교보는 괜한 일에 돈만 썼을 뿐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두 서점의 차이는 독자서평에서 드러난다. 베르베르가 쓴 <나무> 한권을 놓고
볼 때, 교보에 올라온 서평은, 신설된 30자 서평까지 합친다 해도 70개를 넘지 못하는 반면,
알라딘에는 188개의 서평이 올라와 있다. 교보는 서평의 갯수를 가지고 시상을 하지만, 알라딘은
서평의 질을 따진다. 교보에 실린 서평 중 <이회창 대통령은 없다>는 책에 어떤 이가 이런 서평이
달렸다.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저같은 말없는 다수는 이회창님을 응원합니다. 화이팅!"
이런 서평은 교보에는 실리지만 서평을 심사한 후 게재를 결정하는 알라딘에는 실릴 수 없다.
서평 10편당 5천원의 상품권을 주는 것도, 좋은 서평을 많이 쓴 사람에게 '명예의 전당' 회원증을
주는 것도 독자들의 욕구를 부채질한다. 참고로 내가 서점을 하게 되면 고액에스카우트하고픈
분인 '서울의 평범한 여대생'은 현재까지 쓴 서평이 400개가 넘는다(서평 하나하나의 문학성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다).

좋은 배송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것도 알라딘이다. 지하철 역마다 모닝 365의 해피샵이
만들어졌을 때, 난 정말 좋은 의견이라고 감탄한 적이 있다. 그때 교보 측에 이런 글을 남겼다.
"교보도 저런 아이디어를 내야하지 않겠습니까. 뭐가 좋을까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알라딘에서 집근처 편의점을 통한 배송서비스를 시작했을 때, 난 더더욱 감탄했다.
언제 어느때고 찾을 수 있는 것도 그렇고, 배송시 천원을 깎아준다니! 집에 아무도 없는 시간이
많아 그간 다른 집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던 그간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그저 환호작약할만한
일이 아닌가. 다 같은 머리일텐데 알라딘은 되고, 교보는 안된다. 지금이야 교보가 최강이고,
당분간은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재미를 포기할 수야 없겠지만, 공짜로 책을 읽고파하는
사람들을 노골적으로 박대하는 교보 강남점을 보면서 교보가 일등할 날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하겠구나 하는 것을 느낀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 공짜 책을 읽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서점이
어찌 잘될 수가 있겠는가. 공룡이 왜 멸망했는지 그 이유를 교보는 곰곰히 새겨야 할 것같지만,
별로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한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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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리릿 2003-11-26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가끔.. 마태우스님의 서재에 들리는 찌리릿이라고 합니다. ^^ 첨에.. 홍세화선생의 <빨간신호등>의 리뷰를 통해 들어오게되었습니다. 리뷰를 보고 `아... 코드가 맞는 사람 만났네...`했습니다. 요즘 제 취미가 제가 좋아하는 사회.인문학 서적을 통해 서재를 즐겨찾기 해놓는거거든요.

저는 알라딘 웹기획팀에서 나의서재와 같은 웹서비스나 페이지, 이벤트 기획 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교보는 알라딘은 이길 수 없다`는 제목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건 오늘도 그랬지만.. `어떻게 하면 "의미있는" 인터넷서점이 될 수 있을까?`, 좀더 처절한 의미에서는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고 고민을 하고 있는 터여서 더욱 와닿았습니다.

인터넷서점으로서의 `알라딘`은 각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매출로 따지면야 예스24가 1등이고, 교보가 2등입니다. 알라딘은 그 뒤지요. 그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알라딘은 그래도 `서비스 최고`를 실현하겠다는 자부심과 꿈을 가지고 5년을 일해왔습니다.(사실 그저께가 5주년 기념이었답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경제 전반이 그렇겠지만.. 매우 시장 상황이 좋지않고, 인터넷서점은 더더욱 힘든 때입니다.

그런 시점에서 알라딘을 제대로 이해해주시는 분을 만나 너무 고마웠습니다. ^^ (칭찬해주면 좋아하고.. ) 저희가 인터넷교보나 예스24에 배울점이 참 많습니다. 사실은 `왜 우리는 그들처럼 못할까..` 라는 생각을 하루에 열두번도 더 한답니다. ^^

알라딘에 장점을 느끼시는 분들이 오히려 더 겁이 납니다. 실망시키지 않는 것 이상으로 더 좋은 서비스를 해드려야하니까요.

그러고 보면 알라딘에 각별함을 느끼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예스24나 교보문고에도 그런점을 느끼시는 분들이 있겠지요.(수적으로 따지면 더 많을지도..) 하지만 알라딘은 `알라딘이 없어지면 어떻하지?`라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각별한` 서비스를 하는 인터넷서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진정으로 최고의 인터넷서점이 되어야겠지요.

푸념과 희망이 교차하는 회사동료들과의 술자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서재를 돌아보면서... 만난 글이 저에게 용기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몇자 적어봤습니다. 그럼.. 종종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싸이런스 2006-07-14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서재 첫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