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를 안나온 사람이 의대대학원을 다니면, 의대생들이 배우는 과목 몇개를 필수적으로

수강해야 하는 제도가 있다. 서울대가 먼저 시작했고, 단대도 하고 있다. 난 꼭 그래야하나 싶은

것이, 생화학을 하러 들어온 사람이 힘든 조교 일을 해가면서 해부학이나 병리학 같은 걸

마스터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데다, 알아도 인생에 도움될 게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조교를 할 때의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우리 과목을 수강하는 비의대 대학원생들은 공부는 거의

안한 채 내 도움을 받아 시험만 치곤 했다.



생화학 조교 중 두명이 이번학기 우리 과목을 신청했다. 그들에게 물었다.
나: 오픈 북으로 시험 볼래요?
그들: 아니요
나: 그럼...제가 내주는 테마로 리포트 낼래요?
그들: 아니요
나: 그럼 뭐하고 싶어요?
그들 중 하나: 영화 감상문 쓰면 안되요?
그들 중 나머지: 네, 그럴께요



그래서 그들은 이번학기 동안 두편의 영화 감상문을 써 내기로 약속을 했다. 내라고 채근한 끝에,

내가 데드라인으로 설정했던 오늘사 리포트를 받았고, 시험감독을 하면서 감상문을 읽었다.

조교 중 한명은 <클래식>과 <장화홍련>을 썼는데, <클래식>의 감상문은 거의 초등생

수준이었다.
[이러이러해서...이러이러하니...(줄거리만 잔뜩 나열한 뒤) 참 재미있었다]
난 혀를 끌끌 찼다. "이게이게 뭐야...B-!"


큰 기대를 안하고 본 두번째 리포트를 읽다가, 난 숨이 넘어갈 뻔했다. 영화를 보고서도 몰랐던

핵심을 그 리포트는 정확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화면에 등장하는 시간은 별로 많지 않을지라도, 사건의 중심은 갑수이다(김갑수). 그는 자신이

사건의 중심이며 모든 원인의 제공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이 모든 무시무시한 일련의

사건은, 갑수의 자그마한, '단순한 무관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갑수는 젊고

아름다운 정화가 병약한 아내와 사춘기의 두 딸에게 얼마나 위협이 될만한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하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니 세 여자들(엄마와 두 딸, 편집자 주)에게도 그럴거라

쉽게 생각해버리는 거다. 자신에게 극진한 계모를 보며 두 딸에게도 그럴거라 쉽게 믿어버린

장화의 아버지처럼.



가족들 간의 악의없는 단순하고 자그마한 무관심이 가끔 다른 가족구성원에게 굉장히 아픈

상처를 남기곤 한다...가족은, 때론 참 무섭고 아픈 것인가보다]



이걸 읽으면서, 난 비로소 그 영화가 뜻하는 바를 이해했다. 난 다른 교실에서 시험감독을 하는

조교를 찾아가 칭찬을 했다. "정말 잘 썼어요...근데 왜 하나는 저렇게 수준이 낮죠?"

그녀는 웃기만 했다. 난 이 잘쓴 영화평을 내 홈피에 싣고 싶어서, 내게 메일로 보내달라고

했다. 별 생각없이 한 말이었지만, 당황해하던 그녀는 곧 모든 것을 실토한다. 사실은...인터넷에

뜬 감상문을 베꼈노라고. 그녀는 내 홈피에 오는 사람 중 누군가를 통해 그 비밀이 폭로될까

두려웠던 거다.



아, 그러면 그렇지. 전혀 다른 사람이 쓴 듯한, 천지차이가 나는 리포트를 한사람이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녀를 의심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무 순진해서일까? 귀여운 외모를

봐서 불이익을 주지 않고 넘어가기로-A0 정도로-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인터넷이 이렇듯

악의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진부한 결론을 나로서는 처음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비록 베낀 리포트지만, <장화홍련>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그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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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탈 때마다 느낀 거지만, 오늘 서울행 버스를 타고 떠나기를 기다리는데 남자 하나가

버스에 올라탔다. 근데 두개로 된 좌석마다 사람이 하나씩 타고 있는 거다. 그러니 그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일해야 했다. 시외버스니 정해진 자리는 없는 거니깐. 여기저기 둘러본 끝에-난

내 옆자리 앉을까봐 긴장했다. 약간 살이 찐 사람이라...-그는 한 남자의 옆에 앉았고, 버스가

떠나 더이상의 비극은 없었다.



필경 그는, 여자 옆에 앉고 싶었을 거다. 여자는 일단 몸집이 작으니 편하기도 하지만, 여자랑

같이 앉으면 좋지 않은가? 말은 이렇게 해도, 내가 만일 그였다면 여자 옆에 자신있게 앉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배짱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지라-박카스 선전하는 그놈만 빼고-버스에

앉을 때 여자는 여자 옆에, 남자는 남자 옆에 앉는다. 여자는 남자가 싫어서, 혹은 불편해서

여자 옆에 앉지만, 남자는 여자 옆에 앉고픈 마음이 간절하지만 이상하게 보일까봐, 용기가

없어서 남자 옆에 앉는다. 기차나 버스에서 여자가 내 옆에 앉으면 난 '오늘은 재수가 좋군'

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내 옆에 앉는 여자는 '오늘도... 텄군!'이라며 한숨을 지을 거다.

남자는 낯설건 아니건 여자를 좋아하지만, 여자는 낯선 남자는 특히 싫어한다.



언젠가 주부가 고교생과 원조교제를 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원조교제'라는 게 꼭

중년 남성이 어린 여성과 저지르는 것만은 아니며, 그 역도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그때야

알았는데, 그렇긴 해도 난 그 여자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지 않는다. 정황증거로 볼 때

둘은 서로 좋아했던 건 확실했던 것 같고, 돈을 준 건 성행위에 대한 대가는 아니었다.

난 기본적으로 미성년자 남자에 대한 성착취라는 게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청소년 여자애들은

성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아무리 세태가 바뀌었다 해도 경험이 있다는 것에

죄의식을 갖는다. 반면 남자는 청소년기가 성에 대한 욕구가 가장 왕성할 때인지라 중년이고

뭐고 여자가 하자고만 한다면, 하늘에서 내려온 축복으로 생각한다. ('바람난 가족'의 봉태규를 보라!)


남자가 동정을 잃는 것은 여자가 순결을 잃는 것과는 달리 어른으로 성숙하는 과정으로

치부되며, 경험이 많은 여자가 '걸레'라는 과히 자랑스럽지 못한 호칭을 얻는 반면,

많이 해본 남자들은 애들에게 둘러싸인 채 자신의 무용담을 떠벌이곤 한다.

결정적으로 여자애들은 돈을 위해 옷을 벗기도 하지만, 남자들이 돈 때문에 그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남성의 성욕은 주머니 속의 못과 같아 삐져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그래서인지 <광수생각>을 그린 박광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남자의 외도는 급해서 다른 화장실을 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매매춘 업소는 존재의 정당성을 얻고, 그런 곳이 없으면 강간사건이 급증할 것이라는

말도 설득력을 가진다. 써놓고 보니까, 여자가 남자를, 특히 낯선 남자를 멀리하는 게

매우 당연해 보인다. 성욕으로 충만한 인간이 옆에 있는데 어찌 불안하지 않겠는가?

성욕을 좀만 줄이고 사이좋게 지내면...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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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6-07-14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좋게 지내요^^
 

 

 

 

김학수가 쓴 <스크린 밖에서본 한국영화사>란 책을 보면, 상명대 영상학부 교수로 있는 조희문에 대한 비난이 여러 차례 나온다. 권력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최소한의 일관성도 없이 행동하는 그를 보면 자연스럽게 욕을 하게 될수밖에 없다. "이자식, 정말 나쁜 놈이잖아!"

정성일 씨가 한겨레에 의 영화평을 썼는데, 끝부분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역사는 기록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은 (이 영화를 14초 잘라 내야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영화등급분류 위원님들의 명단이다. ...조문진, 조희문, 옥선희, 이종님, 권은선. 당신들은 당신들의 혀끝으로 다시는 ‘표현의 자유’라는 말을 하면 안 된다. 사람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면 안 된다]
그럼, 한입으로 두말하면 안되지. 이 명단에도 어김없이 조희문이 들어있다. 달리 나쁜 놈인가.

스크린쿼터에 관한 토론이 있을 때마다, 그는 폐지 쪽의 패널로 등장해 말도 안되는 궤변을 늘어놓곤 한다. 나쁜 놈 같으니. 그가 나쁜 것은, 스크린쿼터가 없어지면 한국 영화가 궤멸될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알지도 모르면서, 즉 무식해서 스크린쿼터 폐지에 동참하는 사람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옛 말에 이르기를, 무식하면 가만히나 있으라고 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그러니까 범죄다.

오늘자 중앙일보에 김영봉이란 사람의 시론이 실렸다. <스크린쿼터 논리에 문제있다>! 김씨의 직업이 중앙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그가 어떤 글을 썼을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평소 한편의 영화도 보지 않는 듯한, 문화에 문맹인 사람에게 스크린쿼터에 관한 글을 쓰라고 하면 십중팔구 이런 글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의 말이다.
[이런 제도를 도입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한복은 윌 민족의 전통 복식...그러나 외국 유명패션이 국내시장을 지배해 국익의 손실이 크고 문화주권 유린도 심각하다. 그러므로 앞으로 전국의 모든 패션 관련 사업장에서는 연 1백 46일간 한복을 팔아야 한다]
이런 말을 써놓고 그는 스스로에게 감탄했을 거다. "정말 멋진 비유야!'" 이래가면서. 이 인간에게는 한복과 우리 영화가 별 차이가 없겠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난 그가 왜 이따위 비유를 했는지 이해가 안간다. 한복 업자들이 한복을 만드는 이유는 한복집에서 자신이 만든 한복이 팔릴 것이라는 확신을 해서다. 평소 한복을 입는 사람은 드물지만, 결혼을 할 때 필수로 한복을 해가지 않는가. 영화 제작자들이 비싼 돈을 들여 우리 영화를 만드는 것은 그것이 극장에 걸려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확신을 해서다. 그걸 확신하게 해주는 장치는 바로 스크린쿼터제. 한복집처럼 한국영화만 일년내내 틀어주는 곳이 도처에 있다면, 굳이 스크린쿼터제를 할 필요가 없는 거다.

그는 말한다. "영화계는 한국영화 점유율이 40%가 될 때까지 스크린쿼터를 유지하자는 데 합의했다. 이제는 50%에 근접해 세계최고 수준이 됐으나 언제 다시 추락할지 모를 위험이 있기 때문에...줄일 수 없다고 한다. 세상에 죽을 때까지 실패할 걱정 없는 사업이 있겠는가"
그당시, 우리 영화계의 현실에서 40%는 그야말로 꿈이었다. 그게 현실로 나타난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스크린쿼터를 "제대로" 시행한 까닭인데, 이 시점에서 스크린쿼터가 없어지면 예전의 한자리 수 점유율로 돌아갈 것이 뻔한 일 아닌가. 이런 건 전혀 안중에 없다는 듯, 김씨는 외쳐댄다.
[영화계가 정말로 헐리우드 영화를 대적할 국제 경쟁력을 원한다면 그들 스스로 보호막을 떨치고 나와 진검승부를 벌일 것을 자청해야 한다]
우리 영화계가 언제 헐리우드를 이기겠다고 했나? 영화 한편에 수억불을 쏟아붓는 그들과 우리의 경쟁은, 치타와 사람이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불공평한 게임이다. 경제학에도 독과점을 제도적으로 금지하는 것처럼, 헐리우드가 대부분을 휩쓸어 가더라도 우리 먹을 것은 조금 남겨 달라는 게 스크린쿼터의 취지다. 치타를 이기기 위해서는 티뷰론을 타고 달려야 하듯, 헐리우드 영화들과 그래도 경쟁 비슷한 것을 하려면 스크린쿼터가 있어야 한다.

그의 헛소리는 계속된다. [누가 영화인들에게 대한민국 문화 수호의 성직을 맡겼는가...필자는 국내에 몇개의 조폭영화가 떴다고 해서 한국 문화가 우수해졌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 경제의 어려움이 거듭되는 것은 이런 사람이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말대로 문화는 "우리의 삶의 형태이며, 국민 모두가 창조하는 것"이라고 해도, 영화는 영화인과 관객들의 것이며, 영화 제작은 영화인들에게 맡겨야 하는 거 아닌가? 자신들이 만든 영화의 판로를 확보해 달라는 몸부림에 왜 딴지를 거는지 모르겠다. 누가 "문화수호의 성직을 맡겼"냐고? 그럼 니가 맡을래? 영화에 무관심한 김씨는 몇몇 조폭영화밖에 아는 게 없겠지만, <파이란>이나 <고양이를 부탁해>같은 우리 영화계의 소중한 성과들은 모두 스크린쿼터의 정착에 의해 탄생한 거다. 이렇게 묻겠다. "그럼 헐리우드 영화는 졸라 우수한 영화냐?"고. 아무리 조폭영화가 판친다고 해도, 최소한 우리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들보다 훨씬 인간적이며, 그건 우리의 정서. 삶. 꿈이 거기 묻어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 중국, 파키스탄... 그는 이상한 통계를 들이대며 스크린쿼터 폐지를 주장하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스크린쿼터를 폐지한 나라들에서는 자국 영화산업이 거의 다 박살났다. 한번 무너지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것이 문화산업의 속성인데, 도대체 어쩌자는 걸까. 그는 "한미 BIT는...그 손익은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인정한다. 그래, 누구도 알 수 없는 BIT를 위해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황폐화되도 상관없다는 거니?
스크린쿼터는 사실 BIT와는 별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스크린쿼터의 축소 내지 폐지를 BIT를 체결하는 조건으로 내건 것은 무엇 때문일까? 김영봉이 미국 내 메이져 영화사들의 대변인이 아니라면, 미국이 그런 요구를 하는 배경을 제발 좀 헤아리길 바란다. 'BIT 체결하는 대신 제주도 내놔' 이런다고 해서 '그래, BIT가 중요하니까 줄께'라고 할 사람은 없을 거다. 김영봉처럼 고매한 사람은 영화인들을 딴따라로만 생각할테고, 영화 한편의 의미에 대해 전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우리 영화산업이 제주도보다 더 중요하다. 그는 말한다.
[어려운 한국 사회에서 그래도 제일 잘나가는 집단이 영화인들이다. 이들의 집단이기주의가 통하는 나라에서 어떤 사회적 갈등이 풀릴 수 있겠는가]

김씨는 마지막에야 본심을 드러낸다. 이 칼럼의 핵심은 이거다. 영화인들이 잘나가는 게,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차를 타는 게, 고매한 교수로서 기분 졸라 나쁘다는 것. 스크린쿼터의 사수에는 이기주의적인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 뿐만은 아니다. 영화판에 가면 정말 헐값에 착취당하면서 고생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영화계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긴 하다. 그런데, 그렇게 고생하면서 왜 영화판에 있을까? 나중에 크게 되려고?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과 문화 창조의 역꾼이라는 자부심이 없다면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일년에 영화를 보는 관객은 줄잡아 1억명, 그 중 4천만이 한국영화를 본다. 그 사람들에게 두시간 정도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 경제학자인 김씨는 아무 생각이 없겠지만, 난 그것도 우리 삶에서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니까. 스크린쿼터의 폐지는 그 4천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빼앗는 일, 이걸 어찌 집단 이기주의의 발로로만 생각을 할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 미국이 BIT를 체결하는 전제조건으로 각 대학의 경제학과를 다 없애라고 한다면, 김영봉 니는 "어, 그래" 하면서 수용할 건가? 거기에 반발한다면 그것도 '집단 이기주의'일까? 아마도 김씨는 경제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김씨에게 경제학이 중요한 만큼, 영화인들에게도 스크린쿼터는 중요하다. 내게도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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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치>라는 책을 많이 참조했습니다.

[클린턴 부부가 차를 몰고 길을 가다가 주유소에 들렀는데, 거기서 힐러리의 고교시절

남자친구를 만났다. 클린턴이 말했다.

"당신이 저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지금은 주유소 직원의 마누라가 되어 있을걸"

힐러리의 답변이다. "아니, 그랬으면 저 사람이 대통령이겠지"]

이 얘기가 널리 퍼진 걸 보면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임창렬 경기지사의 부인 주혜란씨를 '경기도 힐러리'라고 부르듯이 말이다.

그런 그녀가 뉴욕 시장인 줄리아나를 꺾고 상원의원이 되었고, 대선후보로도 거론되는 걸

보면, 배후의 역할에 싫증을 느끼고 전면에 나서기로 한 모양이다. 미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나온다면 그건 힐러리일 거라고 누가 그랬다나. 참고로 말하면 힐러리는 부통령 직을 매우

우습게 봤는지,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난 남의 나라 장례식에나 참가하는 것엔 관심이 없거든요"

그러니, 그녀의 야망은 상원의원은 아닐 것이다.



힐러리의 외모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난 사실 힐러리가 매력적인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힐러리와 예일법대 동기인 마이클 메드비드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데이트 상대로는 생각지 않을 여자였어요. 살도 좀 쪘고, 외모도...허허,

다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엄청난 상상력을 동원한다 해도 절대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죠. 힐러리는 그저 우리의 좋은 친구일 뿐이었습니다"

이 친구 말고 다른 동창들도 힐러리와 자고 싶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 걸 보면, 나만 그녀를

매력적으로 생각하는가보다. <비치>의 저자는 한술 더 떠서, 힐러리를 이렇게 표현한다.

"애를 몇이나 낳은 것같은 펑퍼짐한 엉덩이에, 튼실한 근육질의 다리하며, 오늘 아이 하나

낳고 내일 당장 옥수수 포대를 나를 수 있을 것만 같은 건장한 어깨..."

이렇게까지? 영부인이 그정도면 이쁜 편 아닌가 싶은데...



그런데....클린턴은 달랐다. 빌은 힐러리를 처음 본 순간, "그 여신 같은 모습에 압도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면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는 표현까지 동원하고 있다. 웰즐리

대학-여자대학으로 최고 명문-시절 '냉장고 언니'로 알려진 힐러리도 빌에게 녹아내려,

힐러리는 빌과 같이 졸업하기 위해 1년을 쉬었다. 둘이 서로 반했는데 왜 빌은 바람을

폈을까? 힐러이야 이견이 있을지 몰라도, 클린턴은 참 잘생겼다. 정치인의 뒤에는 여자들이

많이 꼬인다는데, 클린턴의 경우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거다. 수많은 스캔들을 일으킨 것은

그의 잘못이지만, 미국 정치판이 워낙 그런 곳이고, 그 유혹을 이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12년간 클린턴의 정부였던 제니퍼 플라워즈를 비롯한 숱한 여자들과의

스캔들을 힐러리는 잘 참아냈고, 인터뷰에서 이렇게 멋진 말을 하기도 했다.

"기자 너는 어떻게 살아왔나요. 사람들은 고통스러워하고, 투쟁하고, 미친 시절을 통과하기

마련이죠. 그래요. 우리에게도 어려운 시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이 자리에

함께 있습니다. 내 남편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많은 난관을 헤쳐나갈 겁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이 나라 국민을 위해...열심히 뛰어다닐 것입니다"

하여간, 인물은 인물이다.



하여간, 제니퍼 플라워즈의 폭로는 정말이지 너무 노골적이다. "빌의 가랑이 사이에 붙어

있는 물건 자체는 그리 훌륭한 것은 못되었지만, 이를 그녀를 만족시키고야 말겠다는 열정으로

만회해 왔다...." 그녀의 폭로엔 이런 말도 들어있다. 제니퍼가 클린턴에게 힐러리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을 들었다고 하자, 빌은 관심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힐러리는 아마 나보다 더

많은 여자들을 먹었을 거야"

제니퍼는 이런 얘기들을 여러 잡지에 팔아먹으면서 돈을 챙겼는데, 그래서 폴라 존스같은

이상한 애들까지 그와의 스캔들을 폭로하면서 한몫 벌려고 했다. 우리나라의 배우 J모는

언제쯤 전두환에게 당했던 고난의 나날을 책으로 쓸까?



저자는 말한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나쁜 책인 것은, "사흘 동안의 불륜의 사람은

진정한 것이고,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함께 수십년 동안 지속된 착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은

허구라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라고. "사랑이란 축적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양이

질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질보다는 양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저자는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증조부 등도 "닥쳐 온 위기와 지속적으로 타협하며 살아왔다는 느낌을 갖는다"고 말한다.

참을만 하니까 그런 건지, 아니면 정치적 야망 때문인지 힐러리는 클린턴의 온갖 바람을

참아 냈고, 그래서 지금까지 멋진 커플로 우리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부부의 앞날에 정답은

없지만, 이들 부부는 온갖 풍파를 이겨내고 살아남은 부부의 좋은 예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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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대학동창 사이트에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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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날 안쓰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우리 사이트를 살리고자 안간힘을 쓰는 모습 때문이 아닐까 싶다. 2년 전만 해도 활황세를 유지하던 우리 사이트가, 이젠 잎이 다 떨어진 은행나무같이 글 한편에 의존해서 주황색의 불을 켜곤 한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더 끌어갈 수 있을까 우려하는 친구도 있겠지만, 내 특기가 원래 무에서 유를 만들고, 별거 아닌 것도 긴 글 한편으로 우려먹는 것인지라 마음만 독하게 먹는다면 몇년이고 주황색 불이 켜있게 할 수는 있다 (게다가 다른 친구들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하지만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다. 이 사이트에 불이 꺼진 걸 보고도 글을 안쓸 때가 있다면, 그건 글을 쓸 소재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회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맞을거다. 너무 극단적인 비유 같지만, 우리 사이트의 현재 모습은 산소호흡기를 단 환자같은 생각이 든다. 소생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해, 호흡기를 떼는 동시에 숨을 거두는 그런 환자.

난 지금, 다른 이들이 글을 안쓴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이트에 가입하고 있는 사람은 알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게시판들이 황무지가 되어가는 판에, 우리 게시판은 그래도 꽤 잘나간, 그리고 오래 버틴 곳이다. 내가 거기에 보탬이 된 것은 스스로도 인정하지만, 그건 내 힘만으로 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난 그들에게 고맙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했다. "세일이가 만든 건데, 왜 내가 (이곳의) 책임을 져야 하는거야!"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 뿐이고, 난 이곳을 개설해 준 세일이에게 감사하는 편이다. 이 사이트 덕분에 학생 때 마이너리티에 속해 있던 내가 친구들로 하여금 "쟤도 잘하는 게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해줬고, 학생 때 말도 한마디 나누어 보지 않았던 친구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여기서의 만남이 없었던들, 난 권정혜나 이란, 김지영 등과 말 한마디 못해본 체로 일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이트가 없었다면, 비록 동창이라 하더라도,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내 친구의 이름이 박힌 병원에 감히 놀러갈 생각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의 포항은 동준이와 준태, 상호, 윤근이 등-한명이 빠졌는데...누구더라?-이 근무하는 반가운 곳이지만, 이곳이 없었다면 포항은 그저 포항제철과 포항공대만이 존재하는 삭막한 도시였을 거다. 이곳은 그러니까 내게 커다란 혜택을 준 고마운 곳, 내가 여기다 열심히 글을 쓰는 건 그 은혜를 갚고자 함이다.

예전 얘기를 잠깐만 한다. 몇몇 친구들끼리 사이트를 만든 적이 있다. 지금 그곳은 일주에 한편 정도의 글이 올라오는 곳이 되었는데, 모든 사이트가 그렇듯이 초창기에는 꽤 잘나가기도 했다. 그런데 두달이 채 못지나서 보니까 나 혼자만 글을 쓰고 있다. 그래서 이런 글을 썼다.
"니들끼리 잘해봐!"
그리고 거의 한달간 글을 안쓰고, 들어가보지도 않았다. 그랬더니 친구들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화 풀어"라고. 놀랍게도 그 한달간, 친구들은 정말 많은 글을 올려 놓았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계속 삐질 수 있나 싶어서 다시금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달도 안되어 친구들은 다시 빠져나가고, 글을 쓰는 것은 여전히 나였다.

난 이렇게 생각한다. 아까 말했듯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별 말도 안되는 것을 가지고도 긴 글을 쓰는 재주는 아무나 갖는 게 아니라고. 남이 쓰든 안쓰든, 힘이 닿는 데까지 이 사이트를 지킴으로써 내가 받은 은혜를 갚겠다고. 결심은 이럴지언정, 이 글을 보고나면 단 몇명이라도 이곳을 가꾸는 걸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은 한다. 너무 얍삽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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