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열기에 묻혀 좋은 영화가 사장되는 건 드문 일은 아니다. 러닝 스케어드, 친구로부터 “재밌다.”는 말을 들은 지 3일 후,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용산 ‘랜드시네마’에 홀연히 찾아가서 본 영화. 좋은 영화라고 할 것까진 없지만 충분히, 웬만한 축구보단 재미있는 그런 영화.
‘겁에 질려 달리다’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경찰을 죽이는 데 쓰인 은색 총의 행방을 찾아다니는 주인공들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소년(올렉)에 의해 빼돌려진 총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그 과정에서 많은 이가 죽는다. 좀 잔인하긴 해도 사건이 어떻게 되는지가 궁금해 마음을 졸여야 하는 전형적인 서스펜스 영화다. 인상적인 것은 주인공인 ‘올렉’이란 소년의 연기, 놀라는 표정을 퍽이나 다양하게 짓던 소년의 능력에 시종 감탄했었다.
내가 느낀 서스펜스를 그대로 전달할 능력이 없기에, 두시간 동안 벌어진 숱한 사건들 중 가장 무서웠던 한가지를 소개하는 것으로 감상문을 대신하고자 한다. 도망을 치던 소년이 우연히 몸을 숨긴 곳은 봉고차 안, 거기에는 다른 두명의 아이가 타고 있다. 잠시 뒤 자비로운 미소를 짓는 남녀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나타나 그들을 집으로 데려간다.
“아이스크림이 하나 더 필요하겠네요, 여보.”
그 집은 디즈니랜드를 연상케 할만큼 잘 꾸며진 곳이었고, 아이들은 널린 장난감들과 더불어 마음껏 뛰어논다. 여인은 예의 미소를 지으며 캠코더로 아이들을 찍는데, 우리의 올렉은 화장실에 간다며 그곳을 나가고, 거기 놓인 핸드백을 뒤진다. 난 혀를 찼다.
“저 놈은 잘해주는 사람에게 저런 식으로 보답하나?”
때맞춰 나타난 여인에 이끌려 결국 화장실에 간 올렉, 핸드백에서 꺼낸 휴대폰을 이용해 전화를 건다.
“아줌마(올렉에겐 옆집 아줌마인데, 이하 알파라고 부른다), 저 올렉인데요, 이 집 주인이 저를 죽이려고 해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듯 여인은 “왜 안나오냐?”며 문을 두드리고, 그제서야 난 여인이 애들을 캠코더로 찍은 게 죽이기 전단계임을 깨닫는다.
스포일러임을 밝히고 그 이후의 상황을 말해본다. 주소를 묻는 알파의 지시대로 올렉은 화장실 찬장에 들어있는 약병을 찾아내고, 알파는 잠시 뒤 거기 적힌 주소로 들이닥친다. 아까 본 두 아이는 이미 수면제에 취해 잠이 든 상태이며, 여자는 “그런 애는 없다.”며 올렉의 존재를 부인한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집안을 뒤지던 알파는 할 수 없이 철수를 하는데, 문을 닫기 전 여자가 한 말에서 단서를 찾는다.
“우리 애들도 자야 하니 이제 그만 가주세요.”
다시 집안으로 들어서며 알파는 소리친다. “사진, 사진이 왜 하나도 없어?”
그녀가 깨달은 것은 집안에 애들 사진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
알파가 비닐에 싸여 질식 직전인 올렉을 찾아낸 건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지만, 놀라운 반전이 또하나 있다. 벽장을 보니 그 남녀가 죽인 아이들의 명단이 캠코터로 찍은 자료와 더불어 보관되어 있는데, 그 숫자가 장난이 아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알파가 분노한 것 이상으로 나 역시 증오심이 끓어오를 무렵, 총으로 남녀를 위협하던 알파는 그들에게 휴대폰을 달라고 한다. ‘왜? 신고하려면 자기 휴대폰으로 하지.’
머리 나쁜 내가 의아해하데 알파가 전화에 대고 말한다.
“여기 무슨 아파트 몇동 몇혼데요, 옆집에서 총소리가 들려서요.”
이 말을 듣고도 난 뭐가 뭔지 몰랐지만, 남자의 얼굴은 사색이 된다.
“설마, 진짜로 그렇게 하진 않으실 거죠?”
남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알파는 방아쇠를 당긴다. 탕탕탕. 한 사람당 세발씩. 영화 속이지만 어찌나 속이 후련하던지.
꼭 귀신이 나와야만 무서운 건 아니다. 아이를 유괴해 살해하는 악마가 그걸 위장하기 위해 짓는 자비로운 미소는 그 자체로 소름이 끼친다. 아이를 괴롭히는 범죄자는 엄벌에 처해야 한다. 영화 속이나 밖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