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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의 글은 1년도 더 된 어느 날, 어느 곳의 홈페이지에 음악과 관련하여 제가 섰던 글을 이곳의 페이퍼로 작성하는 것입니다.  

다음의 사진은 우리가 잘 알고있는 바흐선생님의 막내아들께서 작곡한 'Endimone'이라는 음반의 겉 표지가되는 원작입니다. 

 

 

 

 

 

 

 

 

 지로데 트리오종 作   The Sleep of Endymion 

 

몇 년 전 어느 날....
0 0 0 의 “새음반 소식”란의 입고 예정 음반을 살펴보던 나는 내내 시선을 이끄는 매력적인 이미지와 마주하게 된다. 그림이 시선을 끌었던 이유는 오래 전 읽은 적이 있는 어느 책에서 묘사 해 놓은 것과 똑같은 장면이지 않은가!

처음에는 “이것 참 신기하구나” 생각하며 자세히 들여다 보게되는 데, 그 그림은 다름 아닌 그리스 신화의 어느 내용을 한 장면의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이었다. 그림에 대해 잘 아는 바도 아니고, 그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내 자신이 다만 뻘쭘 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아...내가 그림에 너무 무지하구나” 하고 한탄을 하고 말았다.   


 음반 정보 

J. C. Bach -Endimione
Vasilijka Jezovsek (soprano) Diana
Ann Monoyios (soprano) Nike
Jorg Waschinski (male soprano) Amore
Jorg Hering (tenor) Endimione; Vokal Ensemble Köln
Cappella Coloniensis/ Bruno Weil
Deutsche Harmonia Mundi 05472 88525-2 (two discs, full price, 1 hour 46 minutes) 1999  


cf) 위 음반이 워낙 인기가 없는 음반인지라 검색이 되다가 안되다가 그럽니다. 분명히 처음에는 검색이 되었는데,  다시 알라딘 상품 넣기를 하려고하니 검색이 안되어 이미지로 대신합니다.

 

페이퍼 글의 구성과 순서    

1) 화가  

2) 그림 속 주인공   

3) 그림 속 이야기  

4) 그림의 미스터리

1) 화가, 트리오종

그림의 이름은 ‘ The Sleep of Endymion’ 이고, 프랑스의 지로데(Anne-Louis Girodet, 또는, 지로데 트리오종 Anne-Louis Girodet-Trioson, 1767~1824 )가 그렸으며,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 지로데의 1791년 작품인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화가 지로데 트리오종은 낭만적 반항아(romantic Rebel)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붓 끝에서 시작한 달빛은 정말로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어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그는 많은 그림에서 저렇게 눈부신 달 빛과 햇 빛을 사용하고 있는데 모두 매우 아름답다). 트리오종은 자신만의 기법을 이 그림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림을 그린 후에 광택제를 칠 하는 방식이 아니라 혼합재의 질을 바꾸어 표면의 빛 반사에 대한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효과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이는 ‘지로데 트리오종’만의 독특한 기법이라고 한다. 그런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2) 그림 속 주인공
① 셀레네(Selene):
티탄족(거인족)인 하이페리온(Hyperion)과 테이아(Theia)의 딸이자 태양의 神 ‘헬리오스(Helios)’와 새벽의 神 에오스(Eos)의 자매로, 달의 女神’일 뿐만 아니라 사냥, 야생 동물, 처녀성의 여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 Artemis)와 동일시 된다.

로마 신화에서는 다이아나( Diana)와 동일시되는 神인데, 그렇게 되면 제우스와 레토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아폴론과 남매지간이며 올림포스 12신의 두 번째 세대가 된다.
예로부터 달은 동식물의 번식이나 마술과 관계 있는 것으로 여겨져 헬레니즘시대에는 영혼의 거처로 생각되었다.

② 엔디미온(Emdymion):
엔디미온에 대한 주장들은 서로 상반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그는 양을 치는 목동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떤 이는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에 있는 Elis 의 첫 번째 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불멸의 생명을 준 자는 셀레네가 아니라 제우스라는 상반되는 설도 있는 실정이다. 또한 그가 양을 치던 ‘Mount Latmus’는 흔히 그리스의 해안 부근인 Caria 로 알려져 있는 반면 어떤 이는 Troy의 어느 곳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들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이야기 꾼들이 각기 이야기를 보태고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생겨난 혼란스러움이라 할 수 있다.  

 

(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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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협주곡을 생각하면 보통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과 서부부터 강력한 타건으로 비평가들을 놀라게했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등이 떠오른다. 아, 물론 대학생들이라면 단연 라흐마니노프를 호명할 것이다. 리스트라고 말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더해서 20여분의 1악장이 순식간에 흘러가 버리는 연주도 있다. 이는 간단한 단상으로 살펴보고 싶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중의 1악장이 그러하다. 또한 나머지 2, 3악장 역시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기 어렵도록 청자를 서로잡는 연주의 연속이다.  

이른바, '황제'라는 닉네임을 후세에 갖게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은 아마 우리나라에 가장 널리 알려진 피아노 협주곡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리 고전음악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그 주선율을 기억하고 있는 분들이 매우 많으리라 짐작한다. 

 [폴리니_칼 뵘_빈필_DG 2002 : 과연 누가 이 음반에 흠집을 낼수 있으랴. 다만 나는 폴리니의 또랑거리는 연주가 마음에 든다고 밖에는... 흠집을 잡으려거든 길을 걸을 땐 늘 주의를 요망한다. 어디서 돌팔매가 날아올지도 모르니...그러나 내게는 최고는 아니다...휙~ 돌~]   

  

애초에 베토벤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5번에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워낙 곡의 품위와 연주가 들려주는 장엄함 혹은 세련됨 등등 여타의 모든 요인들이 만들어 낸 느낌이 마치 '황제'의 그것과 같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그런 닉네임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피아노 협주곡 5번을 1770년 생인 베토벤이 1809에 작곡했다고 하니 그의 나이 39세였다. 베토벤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작곡생활을 하게되는데,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의 무력 앞에 힘을 쓰지 못하던 시기였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후 스스로 황제가되어 절대 권력을 잡고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던 시기였던 것이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음악활동을 하고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베토벤이 이 곡을 완성한 시기는 베토벤보다 24세가 많았던 모차르트가 3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지 18년째가 되는 해이고, 1797년 생인 귀염둥이 슈베르트가 12살의 나이로 빈의 궁정 예배당에서 어린이로서 합창단원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이다. (슈베르트는 베토벤보다 27세 아래였다. 그러나 슈베르트를 어린아이로 보면 절대 안되신다. 슈베르트는 13세에 이미 작곡을 시작하고 16세에 교향곡을 썼으며 18세에는 이르러서는 엄청난 수의 가곡을 쓴 고전파의 마지막 주자였다.)   

닉네임으로 보건데 1악장은 아마도 정녕 '황제'다운 기품이 배어있는 듯 하다. 어쩌면 베토벤은 일필에 악장을 끝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토록 힘있고 탄력적이며 우아한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매끄러운 악장을 전달하고 있기에 그런 생각이 들기도한다. 또 아니면 어떠랴... 대략 20분 정도의 1악장을 듣는 이가 전혀 20분으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매끄러운 곡이다. 현악과 관악의 상호 교감은 뚜렷하고 피아노는 또 피아노대로 개성이 강하게 드러난다. 각 악기들의 호응은 완연한 일체감을 주도록 되어있어 처음 피아노 협주곡을 듣는 분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대표곡이다. 아마도 단박에 매료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것이다.

 [박하우스_빈필  : 사실 별도의 소개가 필요하지 않은 음반이다. 박하우스가 황제의 연주에서 가지는 위치를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실례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박하우스의 연주를 단연 으뜸으로 마음에 두고 있는 애호가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아니다. 우선은 2악장의 연주 속도가 내게는 너무 빠르게 전해오고, 전체적 연주의 느낌이 통일성이 있고 유려하여 듣는 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기지만 악기들 상호간의 디테일한 섬세함을 기대하는 나에게는 만족스런 연주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맥락이 핵심인 박하우스의 연주는 황제에서 빠질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폴리니-칼뵘반과 더불어 필수 소장반] 

 2 악장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다지오이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곡이 또 어디에 있을까...과연 베토벤이 작곡한 음악이 맞단 말인가...의심이 들지모르겠지만 분명 베토벤의 곡이 맞다. 고집불통에 성질더러운 인간으로 알려져있는 베토벤의 음악을 숭고하고 세상에서 아름답고 애수를 품은 곡이라 말하려는가...곡을 들어본다면 이 곡을 써준 베토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악장은 듣는 모든 이의 시름을 어루만진다. 때로는 청자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연약하면서도 아름답다. 마치 손으로 건드리면 다칠 것만 같은 가려리고 푸르른 음악이 온 몸을 감싸게된다. 이런 아늑하고도 솜털같은 포근함은 애수라는 상대적인 감성을 자극하면서 우리를 스스로 딜레마에 빠트린다. 가녀림에 대한 연민과, 애수의 슬픔과 따사로움의 아늑함과 맑은 세상의 공기를 보여준다. 마치 상처를 어루만져 주어야 할 것 같은 2악장을 듣고 있노라면 불현듯 베토벤이 나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무슨 딜레마란 말인가. 온갖 해물이 섞인 짬뽕도 아니고...여하튼 2악장을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너무 버거운 일이다 내게는... 

그렇게 꿈처럼 2악장이 끝나갈 무렵.... 뜻밖에 전혀 공백이 없는 상태로 3악장으로 넘어간다. 베토벤은 그렇게 2악장에서 3악장으로 쉼없이 넘어가도록 곡을 붙여버린다. 그러나 쉼이 없다고 해서 악장이 구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렷한 연주로 분리되어있다. 이런 형태은 베토벤 이후로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 그 전에도.... 

미켈란젤리_첼리비다케: [ 오늘 쪽의 두 연주자를 기억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지휘의 구도자인 첼리비타케와 피아노의 구도자인 미켈란젤리가 만나 음악의 구도자라 칭하고 싶은 베토벤을 협연하였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들의 연주는 음악으로서의 가치 뿐만아니라 음악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구도에 이르는 하나의 방법을 재현해 놓은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한다. 어쩌면 그들은 연주하는 그 순간 구도자였을 지도 모른다. 

음질은 좀 떨어진다. 그런 점에서는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토스카니니의 연주로 듣는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그들의 연주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쉼없이 바로 넘어가는 3악장은 Rondo의 주제를 연주해가면서 협주곡의 절정을 이룬다. 피아니스트는 장 3도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찝어주어야 곡이 빛을 발하며 살아날 것이다. 오케스트라의 Rondo는 시원스럽고도 악기들이 가진 기운을 쭉쭉~내 뿜어주어야 할 것이다. 모든 악기들의 명징성이 뚜렷 할 수록 곡은 청자의 심금을 울릴 것이다. 피아노는 역동적이면서도 구김이 없어야하고 오케스트라는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일사 분란한 연주로 피아노를 살려주어야 할 것이다. 오케스트라는 악보의 치밀함을 구현해내어야 할 것이다. 협연은 피아노의 감정을 살려주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완수해야 한다. 그렇게 피아노와 협연은 완벽한 마무리를 해내야 한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런 연주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이정도에서 애호가들은 이미 눈치를 챘을 것이다. 바로 짐머만과 번스타인이 그 주인공들이다.      

Krystian Zimerman_Leonard Bernstein 의 영상물과 음반

 [짐머만의 피아노와 번스타인의 협연은 완벽함 그 자체이다. 그들이 베토벤을 의도한 그대로 가장 훌륭한 연주를 해냈다. 자켓의 뒷편으로 보이는 연주자들의 표정을 보시라...번스타인의 만족한 표정과 짐머만의 의연한 모습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곡을 가장 아름답고 멋지게 연주해냈다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둣 하다. 베토벤이 살아있다면 그들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대들이 나의 곡을 연주 해주었노라...라고... 베토벤을 가장 완벽하게 재현해낸 연주라고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왠지 그랬을 것만 같다... 이 둘은 이 연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이 두사람의 연주를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조화롭고, 이토록 모든 악기들이 피아노와 협연의 개성들을 모두 살려낸 연주를 또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있으랴...왼쪽의 DVD는 완벽한 황제의 연주를 우리의 눈으로 확인하도록 해준다.] 

  이 외에도 빼어난 연주들이 매우 많다. 그만큼 연주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는 곡이라는 뜻일 것이다. 꼭 이 곡을 완벽하게 연주 해내야만 좋은 연주는 아니다. 연주자 자신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피아노와 협연자들의 상호 노력은 이에 못지 않은 아름다운 완성도를 가진 연주를 들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애호가들의 취향과 선호도가 서로 달라 입맞이 제각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음악에 하나의 고정된 틀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해석과 연주의 차이는 제각각 좋은 점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 이런 특징들을 가진 매우 좋은 연주들이 수없이 많으나 다음의 몇가지만 열거해본다.  

   

 

 

  

 

 

1.앙세르메이                              2.제르킨                              3. 아쉬케나지  

1. 앙세르메이의 지휘는 베토벤의 교향곡 연주로도 그 이름이 드높을 뿐더러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지휘자 중 하나이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과 교향곡 9번이 커플링되어있어 앙세르메이의 9번에 대한 해석도 감상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준다. 2. 제르킨과 번스타인의 협연을 애호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그들의 빼어난 수연을 아직도 제르킨의 거침없이 뿜어대는 연주를 번스타인은 무리없이 서포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뜨거운 연주를 원하고 폭풍같은 느낌을 받고 싶은 사람은 제르킨과 번스타인으로 감상 할 수 있을 것이다. 3. 아쉬케나지를 좋아하는 애호가들도 매우 많다. 

신호도에 따라 다음의 음반들은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것이다. 

 

  

 

 

 

위 모두 절대로 후회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음반들이라 생각한다. 모두 그 나름대로의 연주로 첮자들의 기호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루빈시타인을 애써 거론 할 필요는 없다. 20세기 여성 피아니스트의 전설로 남아있는 유디나는 창조적인 예술가요 따듯한 가슴을 가진 휴머니스트였다.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애호가는 없을 것이다. 아쉬케나지는 지휘와 연주를 모두 그 이름이 높다. 아쉬케나지의 라흐마니 노프를 들어보신 분이라면 분명 그의 팬이되고야 말것이다.  

 에밀 길레스_권터 반트: 이 둘의 연주를 빼놓으려니 아무래도 서운한 감이 몰려온다. 길레스의 러시아적 타건은 역사에 족적을 남긴 연주일 것이다. 길레스의 강인한 타건에 흠뻑 매료된 팬들이 매우 많은 것으로 알고있다. 어디 강인함 뿐이련가. 2악장의 영롱한 터치는 듣는 사람을 충분히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과연 길레스라는 감동과 함께...여러가지 측면에서 호연으로 생략할 수 없는 음 반 중 하나일 것이다. 권터 반트가 슈베르트 교향곡 미완성에서 보여주는 연주를 들어보신 분들은 또 이내 매료되지 않을 수 없는 지휘자임에 틀림이 없다.    

  미켈란젤리-줄리니이 두사람이 호흡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줄리니 역시 지휘에 관한한 그 어느 지휘자 못지 않은 철학을 지닌 사람이다. 미켈란젤리를 구도자라고 말 할 수 있다면 줄리니 역시 그에 걸맞는 구도자일 것이다. 카라얀보다 적은 연주를 남겼지만 결코 카라얀보다 덜 해서가 아니었다. 보다 철저하고 보다 심오한 심연을 꿰뚫어내는 줄리니의 연주는 그 어느 음반 하나도 소홀함이 없는 대 지휘자이다. 정명훈의 스승으로 이탈리아의 지휘 계보를 이어받은 줄리니는 그 어마어마한 선배들의 이름을 더욱 빛내주는 정통 계보임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그 어느 지휘자보다 진중하며 배려깊은 분으로 정녕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세계적인 지휘자이다. 

 한가지 덧 붙이자면 애청반은 곧 명반이다 라는 공식은 아니라고 본다. 각 음반에는 곡 자체의 이야기 뿐 아니라 연주 자체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연주가의 이야기가 가미된다면 그 어느 음반을 사랑하기에 충분한 요인들을 갖추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꼭 명반이 아니어도 애호가 나름대로 애착이 가는 음반들은 서로 다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굳이 연주에 점수를 매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두 각자의 기호와 사연이 다르니 애청반도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이 음반은 이런 점에서 애호하고 저음 반은 저런 점에서 애청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외에도 좋은 음반들이 수없이 많으나 지면상 모두 소개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제르킨과 발터의 음반도 소개하고 싶었으나 알라딘에서 그 이미지를 찾지 못해 서운하기 이를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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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수놓는 녹턴...  

우리는 야상곡으로 알려진 '녹턴'이라는 장르의 피아노를 매우 좋아한다. 밤의 차분하고도 적막의 흐름속에서 고독한 자의 심금을 울리는 녹턴은 언제 들어도 아련하고 가슴깊이 파고드는 마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야상의 심상을 아름다운 선율로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흔히 '녹턴'하면 대부분 쇼팡을 떠올릴 것이다.  녹턴은 곧 쇼팡이라는 공식처럼 아름다운 피아노로 청자를 매료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녹턴을 조금 더 알고보면 낭만주의자 쇼팡에게 깊은 감동을 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일랜드 출신의 '존필드'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존필드라는 분은 녹턴을 창안해냈다. 존필드는 녹턴의 창시자인 것이다. 

     존오코너        

 녹턴의 창시자라는 점 만이 존필드가 존중받을 유일한 이유는 결코아니다. 그의 녹턴을 들어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지...오죽했으면 존오코너는 존필드의 녹턴으로 일생을 사시는 분 중 한 분이 되었을까...존 오코너의 연주를 들어보신 분은 과연 그 이유를 아실 만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피아노의 시인이라 칭할만큼 존 오코너는 깊은 내적 표현을 건반으로 드러내는 피아니스트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베토벤 해석의 1인자로 손색 없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어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존필드의 대가는 존 오코너 외에 한 분이 더 있다. 음반을 연주한 분으로 오우르크이다.  오우르크는 존필드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부심으로 녹턴을 연주하는 분이다. '존필드의 녹턴에 관한한 오직 한 사람 바로 나'이다...이러한 자부심은 오쩌면 오만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주를 들어보신 분이라면 수긍할 것이다. 존필드가 살아있다면 오우르크에게 경의를 표할지도 모른다. 존필드의 녹턴은 오우르크에 의하여 새롭게 세상에 재탄생 하게된다.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오우르크의 연주를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오우르크   

             쇼팡의 녹턴...

 쇼팡은 존필드의 녹턴을 듣는 순간, 전기에 감전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존필드의 녹턴에 경도 되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쇼팡이 작곡한 녹턴의 시작부분을 들어보시면 바로 아실 것이다. 존필드의 오마주를 느낄 수 있다... 자신에게 그 얼마나 감동적인 곡이었기에 쇼팡은 자신의 곡에서 존필드의 오마주를 보여주는 것일까...쇼팡의 존필드에 대한 감동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흔히들 쇼팡의 녹턴 첫 부분에서 보여주는 존필드의 음영을 존필드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쇼팡이 누구이던가. 비록 존필드의 작곡에 경도되었다고는 하지만 분명히 쇼팡은 자신의 녹턴에서 존필드의 그림자를 충분히 지우고도 남음이 있는 작곡가가 아니던가. 피아노라면 쇼팡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는 피아노 작품의 거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쇼팡의 작품에서 볼수 있는 존필드의 그림자를 오마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해석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쇼팡은 존필드의 음영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녹턴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쇼팡을 조르주상드가 과연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그녀의 쇼팡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은 세기의 염문을 뿌리며 유럽을 뒤흔들었지만 그들의 공감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의 음반들은 가장 애호받는 쇼팡의 녹턴들이다. 물론 이외에도 많고 좋은 연주들이 있다. 그러나 지면상 모두 소개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몇종류만 선택할 수 밖에는 없다.  

                                                                                                                     

  

 

 

 

  

루빈시타인                          페라이어                       아라우

  어떤 이는 가장 마음에드는 1순위에 올려놓고도 남음이 있을 만한 연주를 루빈시타인으로 꼽을 수도있다. 이 음반 저 음반 녹턴을 찾에 헤매다가는 결국 루빈시타인으로 되돌아 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니 기교파로 세상에 알려진 루빈시타인의 피아니즘은 빼놓을 수 없는 연주임에 반박할 이 드물 것이다. 기교파였던 이유로 루빈시타인이 한창 젊었던 시절의 연주와 나이가들어 세월이 더욱 내면을 성숙시킨 후의 연주는 많이 다르지만 그 어느 것이 더 좋은 연주라고 따지기는 어려운 면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루빈시타인의 연주는 나이와 관련없이 모두 빼어난 연주이기 때문이다. 

페라이어를 빠트리면 서운해 할 팬들이 많다. 페라이어 역시 쇼팽의 연주에서 확고한 팬들을 가지고 있다. 워낙 지명도가 있는 분이므로 쇼팽의 연주에서 큰 우위를 가지고 있는 분이다. 아라우의 연주를 듣지 않고 쇼팽의 녹턴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라우의 연주 역시 그냥 믿고 구입하는 팬들을 확보할 정도로 연주의 신뢰도를 가진 분이다. '녹턴하면 아라우죠'라고 말하는 수많은 팬을 가진 아라우... 쇼팽 왈츠의 연주에서도 아라우를 빼놓을 수 없다. 정녕 아름다운 연주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라우....   

     

 

 

 

 

      

   김대진                              폴리니                         프랑수와

우리나라의 김대진님도 녹턴의 연주를 남겼다. 현재 한국 종합예술학교의 교수로 있는 김대진님은 줄리어드 음대를 나와 클리브랜드 국제 콩쿠르 1위를 따낸 실력파 피아니스트이다. 존필드의 녹턴을 음반으로 내기도했던 김교수는 존필드는 담백한 아름다움이 있는 반면 쇼팡은 화음진행이나 선율진행 등 너무도 세련되게 내면의 정경을 그려냈다고 토로했다.

다음으로 폴리니는 개성이 매우 강한 연주가이다. 개인적으로는 폴리니의 쇼팡 연주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폴리니 특유의 개성이 표현해내는 건조함은 이성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킨 느낌이들기 때문이다. 금속성 연주라면 어느정도 근접한 표현일지...여하튼 애호가는 무지 애호하는 것으로 알고있다. 왜냐 ,그는 폴리니니까^ 

프랑수와는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의 녹턴 연주가일 것이다. 색체감이 강한 프랑스와는 애호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곤하는 연주가이다. 청중을 자신의 연주로 끌어들이는 인력을 가진 매력적인 연주를 해낸다. 한 번 팬이되면 죽을때까지 그의 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연주를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과연 어떻게 연주하길래...^

    

 

 

 

 

    

  마리아 조앙 피레스            예브게니 키씬~               이반 모라벡

녹턴의 부드러움과 낭만적인 서정성을 생각하면 여성의 연주자를 떠올릴만도 하다. 여성의 그 섬세한 감수성이라면 충분히 다수의 애호가들을 몰고 다닐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녹턴을 연주한 음반에 대한 선호도는 여성연주가들이 많지 않은 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리아 조앙 피레스의 쇼팽 연주는 무척 환영할만한 일이다.  

피레스의 연주는 현대적 감성을 살린 연주라고 호평을 받고있다. 물론 여성인 관계로 그 셈세함을 논한다면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피레스의 연주는 이미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에서 감명 을 크게 먹은 바 있어 그녀의 연주라면 무조건 믿는 편이다. 나이가들면서 훨씬 더 사색적인 연주를 들려주는 피레스는 폴투갈의 연인이나 마찬가지이다. 폴투갈이 자랑하는 그들의 연인 페레스가 들려주는 연주는 빼놓을 수 없는 감성과 깊은 사색의 길로 안내한다. 

예브네브 키씬~ 이 친구는 두말할 나위없는 러시아의 타건을 자랑한다. 러시아의 거장 에밀 길레스나 리히테르를 사랑하시는 분들은 아실 것이다. 면밀한 악보에 대한 분석을 마친 후 이를 피아노로 표현해 내려 노력하는 러시아인들의 연주는 때로는 거친 사자들의 향연과도 같은 느낌을 준다. 그들의 피아노는 가슴보다는 머리로 듣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연주에 익숙해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들의 연주가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나면 키씬의 서정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빛을 발견하기 전에 리히테르나 키씬의 연주에 몰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마치 깊고 깊은 광산에서 다이아몬드를 꺼내내는 작업과도 같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나에게 가장 깊은 감동을 주는 연주가가 있으니 바로 이반 모라벡이다. 어떤 이는 모락벡의 연주를 들어 이랗게 표현했다. "쇼팽의 녹턴을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거장의 반열에 올라있다" 라고.. 그렇다. 이반 모라벡이 녹턴을 연주하기 전과 그 이후의 녹턴은 확연히 다르다. 녹턴의 감상에 획을 그은 연주임을 느낄 수 있는 연주이다. 마치 녹턴의 역사에 한 획을 긋듯이 그는 작품을 구현해내고 있다. 이는 감상자의 눈과 귀를 의심스럽게 만드는 연주이다. 믿어지지 않는 연주...나는 모라벡의 연주를 그렇게 칭하고 싶다. 믿을 수 없는 연주를 들려주는 사람이라고..... 음반을 들어보지 않고는 사실상 이야기할 수가 없는 연주이다...이반 모라벡...그의 연주를 한번 들을 수 있다면 세상에 여한이 없을 지도 모른다.... 

다음은 미처 언급하지는 못했지만 매우 훌륭한 연주인 녹턴들이다...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연주를 들려준 다음의 음반들을 또한 소개한다... 

  

 

 

 

 

 

윤디리                          아쉬케나지                            치콜리니  

   

 

 

 

 

 

 

디누 리파티                         호로비츠                     요우라 궐라  

윤디리의 팬들도 무척 많을 것이다. 아쉬케나지는 또 어떤가. 치콜리니의 연주에 반하면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디누 리파티와 호로비츠 그리고 궐라여사의 연주을 어느 팬들이 잊을 수 있을까. 궐라 여사를 잊지 못하는 팬들이 아직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다. 특히 디누 리파티의 쇼팽연주는 브장송 고별연주로 세계인들의 마음을 너무나도 슬프고 애석하게 한적이 있다. 그의 불멸의 연주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음악의 애호란 세상을 그리고 인생을 알아가는 또 다른 좋은 방법인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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