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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야상곡으로 알려진 '녹턴'이라는 장르의 피아노를 매우 좋아한다. 밤의 차분하고도 적막의 흐름속에서 고독한 자의 심금을 울리는 녹턴은 언제 들어도 아련하고 가슴깊이 파고드는 마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밤의 심상을 아름다운 선율로 바꾸어 놓았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특히 이 추운 겨울 밤이면 더욱 녹턴은 고독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고독을 아는 자 만이...' 라는 어느 시구처럼...



흔히 '녹턴'하면 대부분 쇼팡을 떠올릴 것이다.  녹턴은 곧 쇼팡이라는 공식처럼, 아름다운 피아노로 청자를 매료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녹턴을 조금 더 알고보면 낭만주의자 쇼팡에게 깊은 감동을 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일랜드 출신의 '존필드'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존필드라는 분은 녹턴을 창안해냈다. 존필드는 녹턴의 창시자인 것이다.


 녹턴의 창시자라는 점 만이 존필드가 존중받을 유일한 이유는 결코아니다. 그의 녹턴을 들어보신 분들은 아실 것이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지...오죽했으면 존오코너는 존필드의 녹턴으로 일생을 사시는 분 중 한 분이 되었을까...존 오코너의 연주를 들어보신 분은 과연 그 이유를 아실 만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피아노의 시인이라 칭할만큼 존 오코너는 깊은 내적 표현을 건반으로 드러내는 피아니스트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베토벤 해석의 1인자로 손색 없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어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존오코너의 연주입니다.  오우르크의 연주를 포으팅하고 싶었지만 그의 연주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존필드의 대가는 존 오코너 외에 한 분이 더 있다. 음반을 연주한 분으로 오우르크이다.  오우르크는 존필드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부심으로 녹턴을 연주하는 분이다. '존필드의 녹턴에 관한한 오직 한 사람 바로 나'이다...이러한 자부심은 오쩌면 오만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주를 들어보신 분이라면 수긍할 것이다. 존필드가 살아있다면 오우르크에게 경의를 표할지도 모른다. 존필드의 녹턴은 오우르크에 의하여 새롭게 세상에 재탄생 하게된다.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오우르크의 연주를 들어볼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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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1-10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페이퍼를 읽고 존 필드라는 작곡가의 곡이 마침 궁금했습니다.
저는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항상 그냥 듣기만 해서 작곡가와 곡명, 그리고 만들어진 과정이나 역사, 에피소드 관련해서 완전 문외한이랍니다. 참 좋네요.

네, 저도 왜 존 필드의 곡만 치는 분들이 계신지 조금이나마 공감할거 같습니다.

차트랑 2012-01-12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필드가 적접 연주한 연주를 포스팅하고 싶었는데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존오코너와 존필드의 연주는 또한 확연한 차이가 있답니다.
한 번 만 들어봐도 금방 구별할 수 있을정도로 말이죠.
음악은 그냥 좋아하면 되고요
그 이상 알지 않아도 된답니다.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처음이라는 것은 후에 알고 보면 별것 아니다라는 생각을 흔히하게된다. 그래서 따라하기가 매우 쉽다. 그러나 ‘처음’ 혹은 ‘최초’라는 것은 위대함이라는 수식어구를 동반한다. 또한 ‘처음’이라는 말은, 그 처음을 이루어낸 사람은 그만한 가치를 인정받게 마련이다. 왜냐면 처음은 늘 있어온 것이지만 ‘최초’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기네스북이 인기가 있는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은 아닌런지...


잭슨 폴록은 그림을 붓을 잡고 손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물감을 아예 통째로 부어댔다. 물론 최초의 일이다. 그런데 비평가들은 이 폴록의 행위를 프랙탈이론을 가져다가 설명하려했고 ‘폴록이 뿌려댄 물감속의 질서를 발견해냈다’면서 카오스이론을 투영시켰다. 폴록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뻔한 일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타미츠는 3악장의 교향곡에 하나의 악장을 덭댄 최초의 사람이라고 한다. 이는 후에 베토벤으로 하여금 마지막 악장에 최초로 성악 파트를 덪붙이게 한다. 물론 베토벤은 독창 4인을 중심으로 각 성부별로 독창과 합창을 교향곡에 사용 한다. 물론 베토벤이 처음으로 이러한 음악적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만으로 악성이라고 불리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렇다면 청력을 잃고도 위대한 교향곡을 작곡해 낸 최초의 인물이 베토벤이기에 베토벤은 더더욱 위대한 것은 아닐까...

 

 

 

영화를 안보신 분이 거의 없으실 듯 합니다. 위 영상물의 1분 46초 경, 맥주병 나발을 부는 관객을 잠시보여줍니다. 음악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음을 암시하면서 동시에 낭만주의 시대의 공연분위기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입장권의 금액에 따라 때로는 서서 공연을 감상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8분 23초에 공연장으로 들어오면서 감동의 눈물을 머금고 있는 사람은 아직 술에 쩔어있는 베토벤의 조카 '칼 판 베토벤'입니다. 공연장 분위기는 아닙니다 ㅋ. 절대로 공연을 안 볼것이라고 다짐을하며 어디에선가 술을 마시다 결국 공연장에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알콜 기운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랐습니다.

 

베토벤이 작곡할 당시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는 일화를 아는 사람들은 애호가 뿐만이 아니다. 베토벤의 곡을 자주 듣는 사람이던 아니던 간에 너무도 유명한 일화이므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바로 교향곡 9번을 작곡할 당시에 그는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작곡가들은 흔히 자신이 구상한 악보를 악기로 확인해가면서 곡을 쓰게 마련이다. 악기로 연주해본 후 필요에따라서 수정작업을 거치게 된다. 이는 모차르트도 그랬을 것이고 쇼팽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베토벤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들을 수 없는 작곡가의 심정을 과연 누가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인가... 사람들은 이제 베토벤도 한물간 사람이라고들 했다. 귀머거리 작곡가가 더이상 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무려 12년간이라는 긴 세월을 교향곡 9번을 위해 보내게된다. 곡에 대한 구상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해오던 것이었으므로 사실은 12년보다 훨씬 더 긴 나날들을 9번을 위해 보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교향곡 9번을 완성하는 데는 치명적인 청력의 문제도 있었지만 쉴러의 시를 교향곡에 버무려 넣는 것도 큰 장애물이었다. 애초에 작곡의 구상 자체가 쉴러의 시를 버무리는 것이었다. 베토벤 이전에는 그 누구도 교향곡에 성악을 삽입한 작곡가는 없었다. 최초로 베토벤은 교향곡에 성악을 버무려 넣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를 실행한 인물이었다. '처음'이란 늘 있는 것어온 것이지만 그렇게 힘든 일이기도 한 것이다.  

 

드디어 1824년 빈에서 초연에 이르른다. 그러나 청력을 잃은 베토벤이 과연 오케스트라를 이끌 수 있을까?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는 한 여성이 베토벤을 위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도록 돕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사실에 입각한 설정이다. 실제로 초연당시  극장의 음악감독 미카엘 움라우프는 연주자와 성각가들에게 자신의 지휘를 따르도록 당부해둔다. 그리고 교향곡 9번의 초연이 시작되었다. 


곡을 잘 아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 얼마나 장엄하고 위대한 곡이던가...초연은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곡이 끝나고 청중들의 기립박수가 터지는 순간에도 그 박수소리와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베토벤은 지휘를 계속하고 있었다..곡의 연주가 이미 끝났는데도 말이다. 자신의 곡을 자신이 지휘하고 그 연주를 들을 수 있었더라면...그날 베토벤은 5번의 기립박수를 받는영광을 가진다. (참고로 황제 부부가 공연장에 나타날 때는 세번의 기립박수를 받던 시대였다)  연주가 끝난 후에도 지휘를 계속 할 수 밖에 없었던 베토벤을 생각하면 너무나 큰 안타까움과 위대한 순간이 오버랩되어 슬프다. 슬프지만 그는 정녕 위대하다. (과거의 페이퍼를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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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10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보긴 했는데 끝에 조금 못 봤어요.
베토벤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대단한 사람 같아요.
왜 그토록 불행했는지 안타깝기도 하구요.
내친김에 다시 찾아 봐야겠습니다.

저더러 리뷰 잘 쓴다 하시더니 차트랑공님도 잘 쓰시는군요.
그래서 추천하고 가요.히히

차트랑 2012-01-12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이곳에는 막상 답을 드리지 못했군요.
제가 추천 버튼을 누르는 버릇이 아직 들지 않았던 거죠.
나중애 생각해보니 좋은 글을 읽고도 추천하는 것을 깜박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안좋은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아요^^
추천하는 것은 마음의 크기와 같은 것 같아서
애써 써주신 페이퍼를 적극 추천하는 중입니다^^
추천은 오히려 제 마음을 훨씬 더 넓게 해준다는 사실을 깨달아가는 중입니다
추천은 결국 자신을 위한 행위가 되더라는 말씀^^
고맙습니다 스텔라님~
 

 

놀랍고도 감동적인 기능입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2악장


연주 : Helene GRIMAUD

지휘 : Paarvo Jarvi

협연: Frankfurt Radio Symphony Orchestra

장소: Suntory Hall.Tokyo

날짜: June 3-2008 이라고 합니다.


 

 

더이상 나는 말 할이 없다.

베토벤, 그에게 다만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전 할 수 있을 뿐이다.

 

오직 떠오르는 영감이 하나 있다면...
그 누구의 연주에서도, 심지어 가장 빼어난 연주를 해주었다고, 이보다 더 완벽한 협연은 없을 것이라고, 두 사람이 보여준 조화와 탄성은 협연의 정의를 보여준 연주라고,  조화로움의 극치를 주는 아름다움이라고, 그렇게 스스로 평가했던 짐머만과 번스타인의 협연도 그리모와 예르비의 협연이 주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바로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성.스.러.움. 바로 그것이다. 혹자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2악장을 가장 아름다운 악장이라고 했다. 그 말을 나는 '그리모와 예르비는 베토벤의 음악을 아름다움을 넘어 신성함의 경지에 도달하게 했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의 다른 표현일 것이라고 자의적인 해석을 하곤한다. 그리모와 예르비는 절제된 동작과 연주로 신성한 연주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연주 내내 그리모와 예르비의 표정을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음악의 신성함과 경건함을 자신들의 몸짖하나에도 담아내려고 한다. 얼굴 표정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모와 예르비의 눈 동작 하나에도 배어있는 그 무엇이 있어 그 것을 놓치지 않게한다. 베토벤 자신이 이 곡을 이렇게 연주해주기를 바랬을지 나는 모른다. 이 곡을 이렇게 해석한 사람은 그리모인가 예르비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종교음악이 아니면서 이토록 경건하고 성스러운 연주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알라딘에서 제공한 한 해의 통계표를 봤습니다.

그동안 제가 박하게도 좋은 글을 읽고도

추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알라딘의 통계표는 자성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글을 써주시는 몇몇분들의 서재를 방문하고 댓글도 달았습니다.

그분들께서는 댓글을 달아주시고 저를 반겨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다음 음악 포스팅은 여러분께 드리겠습니다.

 

페이퍼에 영상물을 포스팅해보고 싶었는데

방법을 몰라서 하지 못하고 아쉬움만 남기고 있었습니다.

나비님의 서재에는 영상물이 올려져있었고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나비님께 방법을 여쭈었습니다.

친절하시게도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어쩌면 저도 포스팅에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척 기쁨니다.


저의 첫 음악 포스팅 영상물이며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중 

가장 경건하고 성스럽다고 여기는 그리모와 예르비의 연주를  '나비'님께 드립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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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2-01-05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감동적이에요. 음악이나 님의 마음이나....

[특별한수업]의 작가인 그 그리모군요!!
리허설을 하는 모습을 찍은 것 같은데,,리허설도 저렇게 정성을 들여 간절히 하는 군요!!
많은 것을 느끼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는 다른 많은 알라디너님들과 함께 하시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차트랑 2012-01-05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가 음악 한 곡을 포스팅하고 감동하고 있답니다 ㅠ.ㅠ
저는 연주에만 감동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네, 특별한 수업의 그리모입니다.
늑대에게 물리고도 보복하지 않은 엘렌 그리모입니다^^
오히려 늑대 보호센터를 만들었다는 그 그리모에요^

'마음을 데려가는 분'의 서재에는 저를 슬프게하는 사연이 하나 올라있습니다.
'울리지 않는 전화기'의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보복하지 않은 그리모'라고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이렇게 나비님께서 제가 포스팅한 음악을 보고 가시니 많이 기쁨니다...

순오기 2012-01-07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올린 날 음악감상만 하고 댓글을 못 남겨서 다시 왔어요.
전에는 음악도 올렸는데 오랫동안 안 올렸더니 잊었어요.ㅜㅜ
나비님한테 배운 걸 저한테 가르쳐주시면 안 잊어버릴거에요.
쉽게 설명해주세요~ ^^

순오기 2012-01-07 01:11   좋아요 0 | URL
역시 베토벤은 듣고 듣고 또 들어도 좋아요~~~^^

차트랑 2012-01-07 0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순오기님,
저의 서재를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나비님께 영상을 포스팅하는 방법을 여쭈어봤을 때
나비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런 질문을 저에게 해 주셔서 감사드려요"라구요

저 역시
"이런 질문을 제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포스팅하는 방법은 순오기님의 서재에 댓글로 달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순오기님~


순오기 2012-01-07 16:56   좋아요 0 | URL
친절한 답변, 저도 고맙습니다~^^
베토벤 들으러 또 왔습니다.
아예 창을 하나 더 띄워서 듣고 있습니다.
설명해주신대로 멋진 음악 골라서 올려보렵니다.^^

차트랑 2012-01-08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순오기님~
 

베토벤을 일컬어 흔히 '악성'이라고 한다. 음악으로 일생을 보낸이에게는 아마도 최고의 찬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애호가들 중에는 베토벤이 더 훌륭하다느니, 모차르트가 더 훌륭하다느니 서로 입씨름을 곧잘 하곤한다. 그만큼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며 고전파의 거두이자 낭만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베토벤의 음악은 세상을 아름다운 곳으로 변화시키는 그야말로, 진정한 대서사시를 장식한 인물이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녹음한 음반들의 수를 헤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줄잡아 150종 을 넘어서지 않을까...또한 교향곡 전곡을 녹음한 전집으로도 단연 압도적이리라. 여러모로 베토벤의 교향곡은 가장 많은 음반을 가진 곡이면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곡이기도하다. 특히 연말에 국내 교향악단들의 2부 연주 레퍼토리를 대부분 베토벤 교향곡 9번으로 한다. 4악장의 합창이 있어 관객의 입장에서는 연주와 노래을 동시에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하다.    

'악성 베토벤', 이는 베토벤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라 생각한다. 그는 교향곡으로 고전주의를 최고조에 올려놓았고, 낭만주의의 태동을 일으킨 장본이이다. 애호가들은 재미삼아 베토벤이 더 위대하느니, 모차르트가 더 위대하다느니 입씨름을 하곤한다. 이는 물론 결론을 내리자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런 입씨름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베토벤이 작곡할 당시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는 일화를 아는 사람들은 애호가 뿐만이 아니다. 베토벤의 곡을 자주 듣는 사람이던 아니던간에 너무도 유명한 일화이므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바로 교향곡 9번을 작곡할 당시에 그는 청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흔히 자신이 구상한 악보를 악기로 확인해가면서 곡을 쓰게 마련이다. 악기로 연주해본 후 필요에따라서 수정작업을 거치게 된다.  이는 모차르트도 그랬을 것이고 쇼팽도  그랬을 것이다. 물론 베토벤도 예외는 아니었지만...들을 수 없는 작곡가의 심정을 과연 누가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인가... 당시 사람들은 이제 베토벤도 한물간 사람이라고들 했다. 귀머거리 작곡가가 더이상 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려 12년간이라는 긴 세월을 교향곡 9번을 위해 보내게된다. 곡에 대한 구상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해오던 것이었으므로 사실은 12년보다 훨씬 더 긴 나날들을 9번을 위해 보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교향곡 9번을 완성하는데는 치명적인 청력의 문제도 있었지만 쉴러의 시를 교향곡에 버무려 넣는 것도 큰 어려움 중 하나였다. 애초에 작곡의 구상 자체가 쉴러의 시를 버무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베토벤 이전에는 그 누구도 교향곡에 성악을 삽입한 작곡가는 없었다. 최초로 베토벤은 교향곡에 성악을 버무려 넣겠다는 창조적인 생각을 했고 이를 실행한 인물이었다. '처음'이란 늘 있는 것어온 것이지만 그렇게 힘든 일이기도한 것이다.   

드디어 1824년 빈에서 초연에 이르른다. 그러나 청력을 잃은 베토벤이 과연 오케스트라를 이끌 수 있을까?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는 한 여성이 베토벤을 위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도록 돕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실제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설정이다. 초연 당시 극장의 음악감독 미카엘 움라우프는 연주자와 성악가들에게 자신의 지휘를 따르도록 당부해둔다. 베토벤은 베토벤대로 지위를 한다. 좀 보기드문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그렇게 교향곡 9번의 초연이 시작되었다.  

곡을 잘 아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 얼마나 장엄하고 위대한 곡이던가...초연은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곡이 끝나고 청중들의 기립박수가 터지는 순간에도 그 박수소리와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베토벤은 지휘를 계속하고 있었다..곡의 연주가 이미 끝났는데도 말이다. 베토벤은 연주가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자신의 곡을 자신이 지휘하고 그 연주를 들을 수 있었더라면...그날 베토벤은 5번의 기립박수를 받는 영광을 가진다. (참고로 황제 부부가 공연장에 나타날 때는 세번의 기립박수를 받던 시대였다)  연주가 끝난 후에도 지휘를 계속 할 수 밖에 없었던 베토벤을 생각하면 너무나 큰 안타까움과 위대한 순간이 오버랩되어 슬프다. 슬프지만 그는 정녕 위대하다.  

 오른쪽의 책은 최근 출판된 베토벤 관련 도서이다. 저자 이덕희씨는 음악에 대단한 열정을 가진 분같다. 불멸의 명 연주가들에관한 책은 물론, 불멸의 지휘자 토스카니니와 악성 베토벤에 관한 서적들을 저술했다. 저서는 베토벤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것이다. 천재 베토벤보다는 자신의 운명에 굴하지 않은 용기있는 한 인간으로서 베토벤을 바라보고 있다. 이책을 통하여 삶의 의지가 무엇이고 운명에 굴하지 않는 인간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으리라. 베토벤은 불멸의 음악가이다. 천재 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지만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자신이 해야할 음악적 능력에 온 영혼을 불살랐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묘지

 오스트리아 빈의 중앙묘지에 베토벤은 잠들어 있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슈베르트도 베토벤의 곁에 함께 누워있다. 평생 베토벤을 존경했지만 너무나도 수줍음이 많았던 슈베르트는 가까이에 살고 있는 베토벤을 찾아뵙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베토벤이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존경하는 베토벤을 문병한다. '자네가 슈베르트로군...' 베토벤은 그렇게 슈베르트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베토벤은 일주일 후에 생을 마감한다.  

베토벤의 장례 행렬은 무려 20,000명의 추모객들이 뒤따랐다. 슈베르트는 장례 행렬 맨 앞에서 횃불을 들고 베토벤을 안내한다. 베토벤의 제자 체르니도 함께였다. 묘비에는 단 한 글자만이 써있었다. '베토벤' 이라고...그 어떤 말로도 '베토벤'이라는 말을 대신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중앙 묘지는 모차르트, 브람스, 요한 시트라우스 등도 함께 안치된 곳이다) 

 

 교향곡 9번  

1악장: Allegro 소나타 형식  

주제가 제시되고 반복은 한 번으로 줄인 후 새로운 모티브를 끌어와 2주제로 연결시켠다. 1주제 보다 2주제가 좀더 밝은 톤이지만 1주제를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니다. 기존의 교향곡들은 소나타 형식을 취하여 제시부가 좀더 반복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베토벤은 이를 생략했다. 포함시킬 주제가 많았고 베토벤은 주제를 매우 명료하게 표현했다고 판단한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다. 1악장이지만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많고 악기들의 소리가 매우 또렷하면서도 장엄하여 다음에 펼쳐질 악장들을 한껏 기대하게 만드는 명곡이다.  

 

 

 

 

 

 

2악장:  Molto vivace  스케르초 

당대 교향곡들은  2악장이 주로 Adagio 이다. 주로가 아니라 그냥 Adagio molto e cantabile 인 것이다. 그런데 베토벤은 Molto를 2악장에 배치하고  3악장에서 사용하는 Molto vivace 를 2악장으로 끌어온다. 왜냐구? 그건 알수가 없다. 베토벤이 그렇게 순서를 바꾸었고 이유는 말해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측해보건데 4악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4악장의 장엄, 웅장한 연주와 4악장 후반부의 치열하면서도 뜨거운 환희의 송가를 최대한 끌어 올려 절정으로 치다르려면 강약의 균형을 2악장에서 주는 것이 맞다. 그러니까 1악장보다 2악장에 좀더 강한 포인트를 주고, 3악장을 아다지오로 바꾸게되면 강약이 조절되면서 4악장에서 피날레를 휘몰아치며 최고조로 끌어올릴 수 있는 전체적으로 매우 조화로운 균형감이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조화란 다른 것과 다른 것의 긍정적 결합이니까 말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다보니 2악장이 강렬해야하고 결과적으로 팀파니의 속도를 느껴보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2악장에서 팀파니의 작렬하는 멋스러짐을 감상하실 수가 있다. 이 팀파니를 꽤나 좋아하는 애호가들도 있다. 오로지 팀파니 ㅋ.

3악장:  Adagio molto e cantabile   

3악장을 무척 좋아하는 애호가들이 있다. 2악장에 배치되어야할 아다지오가 3악장으로 간 탓에 그 아름답고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한 베토벤을 우리는 3악장에 가서 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뜻밖의 아름다운 선율을 만나기라도 한듯, 그렇게 반갑게 애호가의 마음을 녹여버린다. 바이올린과 목관의 상호 교감은 곡의 변주를 따라 주제를 오가며 4악장을 향해 유영한다. 3악장은 정녕 유려함이 반짝반짝 빚나는 곡이다.

 

베토벤의 데드 마스크이다. 베토벤이 사망한지 하루가 지나서 석고를 뜬 모습이라고 한다. 그가 남긴 교향곡 9번을 완성한 후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는 듯이 평온해보인다.  

그러나 정말 많이 여윈 모습이다. 얼마나 허약하고 병약한 상태였는지...그동안 베토벤이 겪어온 온갖 고통이 데드 마스크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 하다. 데드마스크와 교향곡 9번을 오버랩하니, 마음이 많이 아프다. 그토록 고되고 질긴 병을 달고 살면서 그는 오직 교향곡 9번의 완성과 연주만을 생각했을 테니...   

 

4악장: Presto 

애호가들이 예상하고 있듯이 Presto이다. 가장 인기있는 4악장이며 환희의 송가가 포함되어있는 악장인 것이다. 4악장은 송가에 들어가기 전에 우여 곡절을 겪는다. 마치 대화를 나누듯이 악기들의 문답이 이루어진다. 지금까지의 긴 여정을 상기하기라도 하듯이 1, 2, 3악장의 요소들을 총 동원시키면서 베토벤은 곡의 반복되는 갈등을 만들어 낸다. 갈등이 없는 화합은 없는 것인가... 

베토벤이 살던 시대의 상황은 열악했다. 베토벤 자신도 귀는 귀대로 안들리고, 위장은 위장대로 빵꾸가 나서 육체적으로 매우 지치고 힘들고 병약해진 상태였다. 생활할 돈도 여의치 못해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30여년 동안 고뇌하던 곡을 비로소 완성했다. 이 모든 열학한 환경속에서 자신의 꽃을 피워올렸다. 베토벤의 일생은 그렇게 갈등과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그러한 과정이 없이는 아름다움은 피어나지 못하는가...4악장의 도입부에서 시작하는 악기들의 대화는 이러한 갈등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들은 파괴로 가는 갈등이 아니다. 쉴러의 시가 베토벤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베토벤은 온갖 갈등의 고난을 넘어 서서히 화합의 길로 접어든다. 환희의 송가가 시작되는 것이다.     

베토벤의 장례식 장면을 그린 그림

 

오! 벗이여~ .... 

더욱 기쁘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지 않으련가..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되리..  

중략...  

즐겁게, 태양들이 빛나는 하늘의 공간을 날아다니는 것처럼, 


달려라 형제들이여, 그대의 길을. 승리로 향하는 영웅처럼 즐겁게

중략... 

백만의 사람들이여, 껴안아라  

환희여, 신들의 빛이여... 

이러한 내용들이다. 온세상을 비추는 자연과 신 앞에서 형제들은 우리는 함께 서로를 껴안고 사랑하며 화합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베토벤이 쉴러의 시를 음악에 버무린 이유를 우리는 알게된다. 베토벤은 온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원했던 것이다. 베토벤이 더더욱 위대해보이는 대목이며 9번 교햑곡이 더욱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노래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뜨거운 인류의 형제애를 곰감하면서 뜨겁게 끓어오르며 평화와 화합을 갈망하는 합창은 온 세상에 울려퍼진다.  

베토벤은 흔히 괴팍한 사람이라고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그만의 벽이 있어 한성질하는 성질 드러운 사람중 하나가 베토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베토벤의 성질은 새발의 피인 사람이 최근에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는 다름아닌 미국의 어느 주지사를 지냈던 아놀드 슈눠제네거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그동안 얼마나 멋진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던가...그러던 그가...여하튼 이런 사람이 정말 성질 드러운 사람인 것이다. 베토벤은 그런 치사한 짖은 절대로 하지 않은 사람이다. 화가나면 화를 냈고 나름대로 이유있는 분노였다. 자신을 믿어주는 그 누군가를 영원한 배신으로 되갚은 그런 사람이 절대로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토록 아름답고 위대한 음악의 유산을 우리들에게 물려주었다....   

  

애호가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선호하는 음반들...(2)으로...

                               

                                     수입반                         라이센스반 

     

 

 

 

 

 

 

 

 

 

 

 

 

 

 

 

 

 

 

 

 

 

  

 

 

 

 

 

 

          

 

이상은 많은 애호가들의 손을 곧잘 거치는 음반들이고 특별한 순서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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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은 한국의 애호가들에게 애우 잘 알려진 곡이다. 1악장 도입부의 강렬한 피아노 타건이 무척이나 인상적일 뿐더러 협연도 매우 유려하면서도 장쾌하게 시작하는 대표적 피아노 협주곡이다. 비록 처음 듣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선율은 귓가를 맴돌며 떠나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한마디로 장쾌하고 아름답고, 유려하면서도 화사한 피아노 협주곡인 셈이다.  

물론 음악계에서도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빈번한 연주 레퍼토리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은 대중들의 인기도를 반영하기도 하겠지만 그만큼 곡 자체가 빼어나고 좋은 곡이라는 의미 일 것이다.  여기에서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음반은 다음의 것이다.

                                        

                                                      명연주 명음반

흔히 아르헤리치의 연주나 리히테르의 연주를 애호하던 나와 같은 사람들은 다른 음반에 크게 매료되지 않는 듯 보인다. 왜냐면 그 두 음반 만으로도 상당한 만족감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아르헤리치의 뜨겁고도 열정적인 연주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애호가는 없을 것이고, 리히테르와 카라얀의 폭풍이 몰아치는 연주에서 느낄 수 있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이 주는 황홀함은 물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음반들은 아래와 같다. 

          

과연 그 어느 애호가가 위의 음반에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이미 널리 정평이 나있는 음반인지라 음반 평이고 뭐고 생각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아르헤리치와 아바도의 협연은 협주곡이 그 얼마나 아름다운 화음을 낳을 수 있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명연이다. 이 둘의 연주는 그야말로 균형이 무엇인지를 또렷하게 보여주고있다. 서로의 역할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조화로운 협연을 어떻게 이끌어야하는 것인지를 깨닫게해준다. 협연은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색체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선명한 이미지를 구축해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대방을 위해 연주하면서 스스로의 위치를 구축하는 일이 그 얼마나 어려우면서도 아름다운 행위인지를 보여준다.   

이 둘은 서로 호응한다. 상대방의 부름에 적절히 답한다. 아바도의 이러한 협연은 아르헤리치의 프레이징을 투명하고 맑게 해준다. 더불어 아바도 자신이 이끄는 오케스트라의 탄성을 그 안에 함께 버무려 넣는다. 아바도와 아르헤리치의 협연은 그렇게 연주를 달구어 간다. 아르헤리치는 정렬의 화신이 된다. 연주는 가슴을 벅차오르게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연주던가...세상은 이처럼 상대방의 조화로운 도움을 필요로한다... 나는 이 두사람의 연주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를 배운다. 이는 이 두사람의 연주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된다. 음악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교훈을 배울 수 있도록 연주를 해낸다는 것이 그 얼마나 장한 일이던가... 

리헤테르와 카라얀의 연주는 온 세상의 애호가들이 갈채를 보내는 명연 중의 명연이다. 둘의 연주는 압력이 매우 높다.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공격적인 연주로 들릴 수 있다. 아르헤리치와 아바도의 협연과 매우 대조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연주인 것이다. 리히테르와 카라얀은 연주하는 내내 자신들의 색체를 강하게 주입시킨다. 리히테르는 리히테르대로, 카라얀은 카라얀대로 자신들의 장점을 살려내려고 힘을 쏟는다. 흔히 불꽂의 연주라 불리는 이유이다. 그렇게 자신들의 장점을 하나의 연주 안에 주입하는 과정에서 빚어내는 개성들은 자칫 협연을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하는 요인이 될 수가 있다. 그런 불상사가 발생하는 순간 협연는 망가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이 둘의 연주는 이상하게도 그런 엉뚱한 연주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 둘의 음악적 능력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리히테르와 카라얀이 누구던가. 그들은 각각의 연주에서 내노라하는 최고의 능력자들이다. 이 최고의 능력자들이 협연장에서 만나 자신들이 이루어낼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을 각자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들은 음악을 망가트릴 정도로 밀어붙이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곧 폭풍우가 일고 음악이 혼란스러워지는 최악의 상황을 모면한 것은 그들이 끝내 연주를 위해 해야하는 자신들의 그 목적을 온전히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가장 치열하면서도 가장 긴장되는 연주를 만들어냈다. 협연의 핵심은 조화를 끝내 고수한 그들의 연주는 그러므로 각자의 개성이 강렬하게 드러나면서도 균형을 유지한 음만으로 남아있게된다. 

명연주를 생략한다면 너무나도 서운해 할 음반들이 남아있다.   

  

 이러한 빼어난 연주들이 즐비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조명하고 싶은 연주가 바로 반 클라이번의 연주인 것이다. 

   

바로 아래의 음반인데 좌측의 음반이 우측의 음반으로 재발매가 되서 그런지 알라딘의 상품에서 이미지를 찾아볼 수가 없다. 검색을 잘 못했나...

      

 여하튼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애호가라면 꼭 들어보시기를 권하고 싶은 음반이다. 아르헤리치 여사와 아바도의 협연과 리히테르와 카라얀의 연주에 코드가 연결된 애호가들은 어쩌면 마음에 들지 않는 연주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연주의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금방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 연주에서 듣던 차이코프스키의 음색이 클라이번과 콘트라신느의 연주에서는 어느 정도 정제된 느낌을 감지하게된다. 콘트라신느의 협연은 기능성 연주처럼 들린다. 이를 약간 다르게 생각해보면 클라이번의 연주에 콘트라신느의 연주가 온전히 희생되는 느낌이다. 즉, 피아노의 연주를 위해서 헌신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밋밋하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도 있다. 물론 콘트라신느의 특색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트라신느의 연주가 아바도나 카라얀의 연주와 상대적인 비교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선입견을 애호가들이 간과할 수가 있다는 점도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다.  

녹음의 질적 열세는 논외로하더라도 연주의 완성도를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할 수 있는 여지는 주로 아르헤리치와 리히테르 덕분일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클라이번의 피아노는 매우 또렷하다. 협연의 악기들도 매우 돗보인다. 이것이 어쩌면 약점인 듯 보일 수도 있다. 너무나 또렷하게 구별되다보니 협연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3악장에서는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특성을 살려내지 못한 피아노를 들려주기도 한다. 물론 이는 차이코프스키의 곡을 기타의 연주와 상대적인 비교를 했을 때의 일이다.  

기타의 연주와 비교 감상도 좋지만 편견을 버리고 오직 두 사람의 연주에 귀를 기울여보시라...반클라이번과 콘트리신느의 연주는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단점으로 여겨지던 요소들은 장점으로 화하기 시작한다. 연주는 이제 자신들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연주로 변모한다. 내내 희생할 것만 같은 콘트라신느의 연주는 결코 개성을 죽이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다. 3악장의 필요한 부분에서 매우 또렷한 힘과 조화로움을 발산 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서야할 때 확실하게 나서주는 협연인 것이다. 두 사람의 협연은 협연으로서 매우 질높은 하나의 궤적을 그려가는 뚜렷한 특징을 가진 연주로 새로 태어난다.  

 팀파니와 트럼펫의 울림은 매우 명료하게 다가온다. 협연을 잘 살려주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내고 있음을 직접 귀로 확인해보기를...마지막으로, 클라이번의 연주를 듣다보면 그의 인성을 짐작케하는 부분이 있다. 클라이번은 믿음직한 사람이다. 신뢰를 아는 사람이다. 정직한 사람이다 라는 느낌을 받게된다. 마치 켐페의 연주에서 듣던 그 느낌을 클라이번의 연주에서도 느낄 수 있다. 켐페의 연주는 정직하다. 그의 성격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리하여 과도한 기교스러움에서 오는 화려함을 전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담백한 켐페의 연주를 과연 누가 홀대할 수 있을 것인가...바로 이와 같은 정직함이 클라이번의 연주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 둘은 결코 홀대해서도 홀대 할 수도 없는 명연을 합작해냈다.  

왜 클라이번의 연주가 아름답고 콘트라쉰느의 협연이 그리도 고마운지...나는 그들의 정직합과 자신들의 일을 명료하게 해내려는 노력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 두 사람의 연주는 비록 아르헤리치 아바도나 리히테르 카라얀의 연주를 고려할 때 그에 버금간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들어내는 그 의미를 깊이 되새기는 것은 애호가가 음악을 통해서 얻어낼 수 있는 최상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반 클라이번과 콘트라신느의 연주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그들의 연주를 명연주 명음반이라 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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