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속 고구려 왕국, 제 - 중국 역사책에는 있지만 우리 국사책에는 없는
지배선 지음 / 더불어책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최근 중국의 역사 왜국이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  

만리 장성은 서쪽 감숙성의 가욕관에서  동쪽 산해관까지 이르는 약 6.350km의 길이로 1만 2천 7백리로 알려져 있었다. 동쪽 산해관으로 나 있는 장성은 바다를 만나 그곳에서 막을 내리고 있다.  만리장성은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 아니라 중국 사학자들의 실록이며 중국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최근 그 만리장성이 살아났다. 지난해(2009년 4월) 중국은 그 성의 길이를 죽죽 늘여서 랴오닝성의 호산산성까지로 잡았고 2.500km가 더 늘어난 8.800km 이상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만리 장성이 동물도 아닌데 그 길이가 자란 것이었다. 그러면 호산 선성은 어디인가... 바로 고구려의 박작성이 있는 곳이라고 한다. 만리장성 늘려멱기 전 그곳에서 중국 사학자들이 발굴한 결과 발표문에 따르면 '고구려의 축성법으로 쌓은 성이다'라는 기록하고 있던 곳이라는 이야기다.  

고구려의 축성법과 중국의 축성법은 그 방법이 판이하게 달라 약간의 설명만 듣는다면 어느 것이 고구려의 城이고 어느 것이 중국의 城인지 일반인들고 쉽게 구별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중국은 만리정성의 길이를 과거 고구려의 영토까지 늘리고 늘려먹고 있다. 뻔한 중국 사서의 기록도 무시하고 늘려먹는 저의는 간단 명료하다. 우리의 역사 역사를 중국에 편입시켜 고구려 옛 영토 분쟁을 미연에 차단하고자 함이다.   

이런 시점에서 "중국 속 고구려 왕국, 제"라는 도서에 관심이 갔다. 저자는 중국 역사서에는 있지만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없는 나라가 바로 제나라라고 했다. 그렇다면 중국의 역사서에서도 기록하고 있는 제나라를 우리는 아예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이유는 두가지 일 것이다. 

 

첫 번 째 이유:   

고구려의 유민들로 이루어졌던 齊가 존재했던 시대는 당나라 때였다. 게다가 제나라의 위치는 중국 대륙의 한 복판이나 다름없었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당시의 '고구려'를 '고려'라고 칭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도 고려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왕건도 나라를 고려라 칭했다. 문제는 중국과 고려의 국제적 관계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왕건이 창건한 고려의 왕들은 중국의 재가를 받아야만 그 권위가 섰기 때문에 중국 혼란의 시대였던 5대 10국 시대에도 제가를 받으러 중국으로 사신을 보냈던 것이다. (5대 10국으로 찢어진 중국의 어디로가서 제가를 받아야 하나....듣도 보도 못한 후주라는 나라에서 받았다고 한다...) 하여튼 고구려는 당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고구려의 유민들이 이룩한 제(齊)나라에 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려사를 쓴 조선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성계는 죽을 때 까지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이성계가 중국 황제의 서명이 있는 허가서를 받지 못한 탓이었다. 이성계에게 내려진 호칭은 왕이 아니라 '권지국사'라는 타이틀이었다. 잠시 국사를 돌보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3대 임금 태종 때나 되어서야 이방원이 겨우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이때  이방원이 얼마나 기뻤던지 가뜩이나 부족한 국내산 말을 죄다 가져다 중국에 바치는 바람에 말을 타고 출퇴근하던 조선의 정승들도 걸어서 다녔을정도 였다고 한다. 조선의 말이 이때 잠시 씨가 말라버렸다. 이런 젠장....)  

조선도 입장은 마찬가지 였으니 고구려의 유민들이 이룩했던 齊나라에 관해서는 입을 꾹 다물어야 했던 것이다. 감쪽같이 뭍혀진 제나라...슬프다.... 

 

두 번째 이유: 

고구려의 유민 이정기가 일군 제나라의 역사가 고스란히 파뭍힌 보다 실질적인 이유는 현대의 우리 역사가들이라고 본다.  고려나 조선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이해할만하다. 왕의 자리를 허락받아 오르는 그 딱한 사정을 이해하고 싶다 슬프지만 말이다...(알고보면 치가 떨릴정도로 조선의 왕들은 중국에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다.중국의 신하에게 절을 올리는 것도 모자라 왕에게 호통을 치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차치하고...

현재 우리 사가들의 역할은 무엇일까...우리의 역사를 우리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는 것이 이들이 할 일이 아닐까...국제적으로 우리 역사를 떠들어 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제발...우리 역사를 우리 역사가들이 왜곡하지만 말았으면 좋겠고, 우리가 오히려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바로 잡아주고, 더 알아야할 우리들의 역사를 공부해서 제대로 알려주기만해도 좋겠다. 그것이 역사가로서 최소한의 역할이 아닐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그런 역사가들이 너무 게으른 것인가. 아니면 그어떤 말 못할 이유라도 있는 것인다....  

 고구려의 유민들을 모아 제나라를 세우고, 당나라을 위태로운 지경까지 몰고갔던 이정기와 그 후손인 이사고, 이사도를 우리가 드라마를 통해서 알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중국은 자신들의 선조 역사가들이 남긴 실록을 왜곡하기를 서슴치 않고 있다. 조만간 '만리장성'이 '2만리 장성'이 될 판이다.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부정하면서까지 우리 역사를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와중에 그나마 이 책은 실존했던 우리 역사의 일부인 제나라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지금은 비록 중국의 영토에 속해있지만 제나라도 우리 역사의 일부인 것을 부인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던가...저자의 제나라 알리기는 이런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고 본다. 제나라는 나에게 안타까운 우리의 역사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역사를 돌이켜 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덧 붙이자면, 齊나라는 당나라에 조세를 내지 않았던 자주적이며 독립적인 꼿꼿한 나라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징비록 - 국역 정본
유성룡 지음, 이재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임진란에 국토수호 지휘부 수장의 생생한 현장과 장계 기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징비록 - 국역 정본
유성룡 지음, 이재호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겪으며 그 빛을 발한 우리의 선조 서애 유성룡선생님이 쓴 개인 기록이다. 서애 선생님은 그 인품이 남다르게 훌륭하고 임란 당시 나라를 구하는데 그 공로가 지대했던 인물이었기에 개인적으로도 평소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분이다. 조선의 5대 명재상 중의 한 분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조선의 선비로서 서애선생님은 흔히 동인으로 분류되고 있지만 서인으로 분류되어 고생하신 율곡선생님과 마찬가지로 당파를 넘어섰던 보기 드문 인물이기에 지극히 존경스럽다. 

당시 당파를 넘어선다는 것은 오히려 불리한 입장을 자처했다는 뜻이며 동시에 개인 적인 정치 사상이 애민과 위민을 지항하지 않고는 택하기 어려운 행동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 점 하나만으로도 서애선생님께서 독자에게 더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램이 크다. 

 서애 유성룡성생님의 당파를 뛰어넘는 정치적 입장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내용들은 당쟁을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도서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서애선생님은 성리학의 대가로 학문적으로도 뛰어날 뿐 아니라 병법에서도 매우 능력있는 분이었다. 갖가지 병서들을 익혔으며,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 그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이 빛을 발하고 있는데 이는 이 책이 아닌 다른 책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국난에 대비 했던 것은 여러가지 업적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유성룡은 율곡 이이의 십만 양병설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역사 공부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하여 생겨난 소설인지 대부분 아실 것이다. 조선의 선비로서 청렴하기로는 그 어느 선비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았다. 조선의 선비로서 남명 조식 선생님과 서애 유성룡 선생님을 꼽지 않을 수 없는 이유들은 징비록과는 관계없이 여러 역사서에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 선생님의 훌륭함에 미치지 못한다. 

왜 유성룡선생님이 걸맞는 지명도를 갖고 있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점 역시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 징비록의 가치... 

징비록은 개인 적인 기록물이기도 하지만 임진왜란전 일본과의 관계, 임진 왜란의 발발및 전개, 명나라의 파견과 그들의 행적, 이순신 장군의 해상 장악 활약상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전쟁을 지휘한 지휘부의 총책임자로서 왜란의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던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 그 사료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이다. 나라에서는 징비록을 국보 132호로 지정했다고 한다. 

 

2) 이 책을 선택한 이유 

징비록을 번역하여 출간한 도서가 몇 종류 있다.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선생님께서 쓰신 원문을 함께 수록했다는 데 있었다. 한문에 관심이 없는 경우라면 굳이 이 책을 선택할 필요는 없을 것이지만 관심이 있는 나로서는 이 책을 선택하게된 계기였다. 선생께서 쓰신 한문을 활자판으로 인쇄했지만 아는 만큼 한자를 함께 읽어볼 수 있는 점이 개인적으로 좋았다. 

 

3) 선생의 인품 

무엇보다도 서애선생님이 매력적인 것은 유학의 대가라는 점도, 임진란을 진두 지휘하여 나라를 구하는데 결정적인 업적을 남겼다는 것도 아니다. 바로 선생님의 인품이다.  

선생님은 퇴계 이황선생님의 후학이다. 자연히 동인의 계열에 분류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애선생님은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소인배적인 사고를 하지 않았던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서인으로 분류된 율곡 이이선생님과는 늘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며 사심없는 토론을 하였고, 오로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 애쓴 인물이었다. 당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고 행동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송강 정철에 대한 처벌 문제였다. 송강의 동인 숙청에 복수를 함과 동시에 정적을 죽임으로서 당파의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동인들에 반대했다. 비록 송강의 죄가 크다고는  하지만 죽음은 또다른 죽음을 불러온다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같은 동인의 이산해와 결별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같은 당의 의견일지라도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찬성하지 않았던 분이 바로 서애선생님이었다. 

 중용을 지키며, 백성을 위한 올바른 정치를 하려는 의지를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서애선생님은 요즘의 시대에 더더욱 절실히 필요한 덕목을 가지셨던 분이었다. 여러모로 보아 징비록은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생생한 기록이며 그의 고백록이다. 이 징비록을 통해 독자는 임진란의 진실을 올바른 창으로 바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임진란의 현장감 있는 기록을 보시고  싶은 분이나, 선생님을 알고 싶은 분께는 더없이 소중한 기회가 되리라 맏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 석필 / 1997년 6월
평점 :
품절


당쟁으로인해 왕은 죽어주기도하고 살아주기도 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 석필 / 1997년 6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조선사를 지배하고 있는 당쟁의 점철된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 고려 말에 깊이 패였던 권문세족들의 수탈.  

. 불가피한 듯 보이는 변화와 그에 상응하는 신흥사대부의 등장.  

. 그 신흥 사대부들간의 갈등과 권력을 중심으로 한 당파의 갈림, 조선이 제국주의의 힘 앞에서 무너질 때까지 계속되어온 일련의 과정.   

당쟁을 빠트린 조선사는 의미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는 핵심이 당쟁과 연결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점에서 당쟁의 이해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분열은 당쟁의 출발점 

당쟁의 출발점을 이해하면 조선 초기의 권력을 이해할 수 있다. 초기의 분열은 태종 이방원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공신들에게 공신전을 나누어 주면서 부터이다. 그 공신들도 고려의 권문 세족들처럼 부패하기 시작한다. 부패와 수탈의 절정에 달했던 권문세족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역성혁명을 통하여 자신들이 권력과 부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이에 사림이 반발하고 나선다. 마치 권문 세족에 대항하여 신흥 사대부들이 일어서듯...  사람의 조광조는 이러한 훈구세력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기득권층인 훈구세력의 반발이 거세다. 결국 조광조는 개혁에 실패하고 사약을 마실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어쩌면 당쟁의 출발이랄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사소한 듯 보이는 이조 전랑의 자리는 조선의 권력의 구조를 의미하고 있기에 그 중요성은 대단히 크다. 이는 실질적인 당쟁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소장파 김효원과 노장파 심의겸의 갈등에서 시작하는, 학통을 중심으로 한 분열이 그 실질적인 단추역할을 했던 것이다. 또한 당파의 갈등은 학통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저자는 그 학통의 계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그려 넣었다. 당쟁을 읽으며 내내 회의적인 부분은 아래와 같다.  

퇴계 이황, 율곡 이이, 남명 조식등은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들이요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훌륭한 분들이었다. 대한민국의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대학자들이다. 오죽하면 화폐의 도안에서도 퇴계 선생님이나 율곡선생님을 만나 볼수 있겠는가. 그만큼 조선을 대표하는 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퇴계와 율곡의 제자들은 스승님들의 뜻을 제대로 이어받지 않았다는 생각을 자꾸만 하게된다. 대스승님들께서 그리 분열하여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서로 싸우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율곡께서 동서인으로 분열하여 다투는 정치인들 사이에서 그 화합을 위해 동분서주 하는 보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자신의 뜻과 달리 동인에의하여 서인으로 지목되는 율곡과 동인으로 지목된 유성룡에게서 남다른 애민과 위민, 보국의 정신을 본 받을 수 있었건만 당대의 파벌은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을 향한 집념 뿐이었다. 대스승님의 가르침은 안중에도 없었던 당파의 갈등이 골이 깊어질 수록 백성들은 굶주리고 질병에 쓰러져갔다.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남명 조식 선생님의 제자들은 오히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의병을 일으켜 조선을 구하고자 자신들의 재산을 내어쓰고,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이는 그 스승님께서 실천을 강조한 덕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못지 않은 대스승님의 계보를 잊는 두 학파의 제자들은 어떠했던가...서로를 죽여 권력을 유지했고, 또 상대방을 죽여 피의 복수를 했다. 오죽했으면 현종께서는 송시열을 불러들여 울음으로 독대하시며 제발 화합해달라고 부탁을 했겠는가...임금이 신하 앞에서 울면서 부탁 했다하니....도대체 정치의 목적은 무엇이고 그 속성은 무엇인가...송시열은 현종께서 눈물을 흘리며 하는 그 부탁을 결국 거절했다고 한다... 송시열은 서인의 거두이며 율곡 이이의 계보이다... 저승에서  선생님을 어찌 뵈었을꼬....    

끊임없이 이어지는 당쟁은 300여년을 지속했고 그런 과정에서 경제 발전의 기회들은 하나 둘 씩 사라져 갔다. 정치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자신들을 위한 것이었다. 세종 이후 조선의 국력 또한 그렇게 서서히 쇠약해져 간다. 당쟁이 역사를 피로 얼룩지게 하던 기축옥사 이후 임진 왜란이 일어나 나라는 사단이 난다. 임진 왜란으로 경제와 국방에 신경을 써도 벌써 써야 했을 상황에서 또 한 번 당파의 싸움은 성공해서는 안될 쿠데타인 인조 반정을 일으킨다. 두차례의 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은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른다. 

당쟁는 점점 접임가경이 되어간다.  

서인, 동인, 북인, 남인, 산당, 한당, 대북, 소북, 골북, 육북, 중북, 청소북, 탁소북, 청남, 탁남, 소론, 노론, 시파, 벽파, 청서, 공서, 노서, 원당, 낙당 ...이름도 다 외기 어려운 분열의 분열을 계속한다. 무슨 세포 분열도 아니고...생물 시간으로 착각할 지경이다. (이러한 분열을 저자는 책 안에 표로 잘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신은 조선에 마지막 기회를 한 번 더 준다..  

영정조가 왕위에 오른 것이 그것이다. 영조 또한 당파의 철저한 수혜자이면서도 피해자였다. 수혜는 영조가 임금이 된 것이고, 피해는 권좌에 올려놓고 한없이 흔들어 대서 좋은 위민 정치를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왕은 당파의 이익과 권력에따라 죽어주기도하고 살아주기도 했다. 그런 폐단을 없애려 끊임없이 노력했던 임금이 영조였다. 그 일을 다못하고 영조는 정조에게 그 힘을 넘긴다. 정조 또한 당파의 수혜자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대신 왕에 올랐으니 말이다. 또한 당파의 피해자였다. 당파로 아버지를 잃었고 어린 시절 부터 끊임없는 살수(자객)들이 밤이면 밤마다 찾아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조선은 그 기회를 마저 잃어버리고 만다. 의문의 정조 사후, 정순왕후는 정조가 일생을 노력해 개혁해 놓았던 모든 것들을 '도루묵'으로 만들어버린다. 이 또한 당파의 손익에 따른 처사였다. 권력과 이익이 도대체 무엇이길래...조선은 그토록 마지막 기회마저 영영 상실하게 만들었던다... 

권력의 힘겨루기는 조선이 멸망하는 그 날까지 계속된다. 아니 어쩌면 지금의 사학계와 정계도 그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우리 조선의 정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처 서서히....종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은 좋은 기회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좋은 기회들을 잘 살려내지 못한 것의 결과가 통한의 강제 병합을 만들어 냈다고 본다... 혹자는 중국도, 일본도 서양의 무력 앞에서 어쩔 수 없었던 세계의 흐름이 그러했고, 조선도 마찬가지 였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조선사를 잘 살펴보면 얼마든지 그런식으로 개방당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좋은 기회들이 있었던 것을 알수가 있을 것이다. 집안싸움 하느라고 국제 정세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역사는 후대에게 좋은 교훈을 남긴다. 그래서 배울 필요가 있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우리 역사를 통하여 배워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설계하는데 활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조선의 당쟁을 일목요연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매우 만족스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