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수육을 먹을 때 찍먹이냐 부먹이냐, 이걸 가지고 상반된 두 의견이 대립을 한다. 짜장이냐 짬뽕이냐, 산이냐 바다냐, 대실이냐 숙박이냐 하는 문제처럼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힘든 문제라고 한다. 탕수육을 일 년에 한 번 정도 먹을까 말까 한 나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는 힘드나 받아들일 수는 있다. 그건 기호의 문제고 상반된 두 사람이라면 대립이 가능하다. 그런데 탕수육을 주문해서 반은 찍어 먹고, 반은 부어 먹으면 되지 않을까.


찍먹이냐 부먹이냐는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하는 문제와는 좀 다른 것 같다. 보통 택시를 잡아서 타는 사람들은 평소에 택시비가 너무 아깝다. 악착 같이 택시비에 집착을 한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전혀 아까워하지 않고 택시를 타는 것처럼 아주 간단한 문제일 수 있다. 별거 아닌데 이 별거 아닌 게 별거 아닌 게 아닌 것이다. 그게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스파게티를 먹을까 피자를 먹을까, 같은 고민이 아니다. 탕수육은 반으로, 또는 삼분의 일로 분할이 가능하기에 부먹, 찍먹의 고민은 매체를 통한 언어유희로 끝나야 한다.


많은 책과 명언에서 아침에 눈 뜨면 오늘은 어떤 재미있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에 차서 하루를 보내자고 하지만 이벤트가 일어나는 하루는 거의 없다. 오늘 하루는 어제와 다를 바 없고 내일은 오늘처럼 흘러가리라는 걸 우리는 안다. 오히려 호러블 하게 보내지 않으면 다행인 것이다. 그러니 아침에 눈 뜨면 오늘은 또 재미라고는 1도 없는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라고 시작하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전혀 기대가 없는 가운데 어떤 작은 이벤트가 일어나면 그건 정말 행운을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희망 고문 같은 낙관보다는 낙관적이지 않은 비관에 가까운 의식을 가지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탕수육을 작년에는 한 번도 안 먹었고 올해도 아직 한 번도 안 먹었는데 딱히 이유가 있어서이기보다는 그저 손이 가지 않아서 먹지 않았을 뿐이다. 나에게 부먹이냐 찍먹이냐고 물어보면 나는 부먹 쪽에 가깝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김밥이다. 김밥으로 하루 세 끼 꼬박 먹어라고 해도, 일주일을 김밥으로 때우라고 해도 나는 큰 소리로 넵, 하며 대답할 수 있다.


김밥이라는 음식을 먹을 때 전혀 귀찮지 않다. 가시를 발라 먹을 필요도 없고, 구워야 하는 수고도 필요 없다. 쌈 싸 먹을 필요도 없고, 부글부글 끓여 먹을 필요도 없다. 그저 집어서 입에 넣으면 끝이다. 게다가 칼로리도 높아서 한 줄만 먹어도 몸에 필요한 칼로리는 다 찬다고 한다.


한 손으로 김밥을 뜯어먹는다면 다른 한 손은 놀기 때문에 책이 있다면 소설을 보면서 김밥을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음식인가. 그래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은 귀찮은 음식들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지져먹고, 구워 먹고, 발라먹고 하는 음식들은 전부 귀찮다. 남들이 죽고 못 사는 ‘게’ 요리는 아주 질색이다. 열 손가락을 다 사용해서 발라 먹어야 하는 삶은 게 요리는 맛을 떠나 너무 귀찮다. 남들은 그 재미로 먹는다는데 나는 도통 그 재미에 도달하지를 못 한다. 주문하면 숟가락 들고 그냥 딱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좋다. 주문하면 탁 나오는 치킨, 족발, 수육, 카레, 칼국수, 스파게티, 빵, 삼계탕 이런 음식이 좋다.


그래서 탕수육을 먹을 때 굳이 찍어 먹기보다는 한 번에 부어 놓고 먹는 게 나는 더 낫다. 사람들은 탕수육을 바삭하게 먹어야 한다, 소스 맛을 즐겨야 한다, 같은 말들을 하는데 나는 다 거기서 거기다. 눅눅해도 탕수육은 맛있고 바삭해도 탕수육은 맛있다. 그래서 탕수육을 먹을 때 소스가 없어서 그냥 간장에 찍어 먹어도 좋고, 간장이 없어도 상관없다.


맛으로 따진다면 눅눅해지면 탕수육 맛이 떨어진다는데, 그리하여 찍먹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눅눅해도 맛있는 탕수육이 맛있는 탕수육이 아닐까. 눅눅해졌다고 해서 맛이 떨어지면 그 집 탕수육은 맛이 없는 게 아닌가. 갓 나온 탕수육이 맛있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갓 나온 음식이 맛이 없을 수 있나. 오죽하면 튀기면 신발도, 지우개도 맛있다는 소리가 나올까. 시간이 지나 식어도 맛있는 탕수육이 진짜 맛있는 탕수육이다. 커피도 그렇다. 식어도 맛있는 커피가 있다. 그런 커피가 맛있는 커피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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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듣고 있는 카세트테이프


요즘, 폭염 직전부터 해서 죽 듣고 있는 음악들이다.

미스터 빅은 아마도 2집이고,

알라니스 모리셋은 아이로닉이 들어있는 앨범,

마이클 잭슨은 가장 많이 좋아한 데인져러스 앨범 두 장 중에 첫 번째 앨범이고,

나탈리 임부를리아의 앨범에는 아직도 인기가 많은 노래 ‘톤’이 있고,

본 조비는 물기로 미끄러운 앨범과 존 본 조비 1집 - 영화 영건 2 주제곡 앨범,

유투의 베스트 앨범,

신해철의 넥스트 1집,

이승환 2집,

마돈나(는 마다나로 발음하는 게 훨씬 좋은데 마돈나라고 해야 한다니, 스칼렛 조핸슨도 스칼렛 요한슨으로 불러야 한다니) 레이 오브 라잇 앨범,

노 다우트 앨범은 돈 스피크가 들어있는 앨범이다.

휘트니 휴스턴은 i wanna dance with somebody가 들어 있는 앨범이다. 정말 신나는 노래다. 제목부터가 신남 신남이 가득하다.

장국영,라고 써 놓은 카세트테이프는 장국영의 앨범인데 레벨을 잃어버려 볼펜으로 장. 국. 영. 적었다.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이 앨범에 없다.

그리고 슈만의 소품집이 하나 있고,

시나위 앨범인데 몇 집인지는 모르겠고 김바다가 보컬을 할 때다. 김바다의 목소리에 빠져서 엄청나게 들었다. 그런데도 테이프가 늘어지거나 그런 문제는 없다.


테이프는 한 삼백 개 정도 있었는데 이사하면서 대부분 잃어버리고 백개 정도 남았다. 게 중에 요만큼 들고 와서 듣고 있다. 아 저기 장국영 밑에 있는 테이프는 라디오 헤드의 더 밴드즈 앨범이다. 역시 미친 듯 듣다 보니 테이프 두 개, 시디 한 장을 구입했다. 라디오 헤드의 이 앨범은 시디로 테이프로 번갈아가며 듣고 있다.


마돈나의 일화 중 하나는 싸이가 한창 인기가 많아서 월드투어를 할 때 마돈나와 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때 두 사람은 연습을 하면서 굉장한 에너지를 소모했다. 쉴 때 공연 바닥에 누워서 숨을 할딱 거리고 있는데 마돈나가 싸이에게 말했다. 이따 공연할 때에는 리허설과 다르게 내 몸의 어떤 곳에서도 터치를 해도 되니 진심으로 춤을 추라고 했다.


노 다우트의 그웬 스테파니는 돈 스피크를 부른 이후 굉장한 세계적 인기를 얻었다. 노 다우트는 사실 엄청난 펑크 록 밴드인데 조용한 돈 스피크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인기를 얻으니까 다른 좋은 노래들은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웬은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광고 모델부터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인기가 식을 줄 몰랐다. 그웬은 아무튼 대저택에 살며 어째 늘 그 모습으로 늙지도 않는 것 같다. 몇 해 전에 우리나라에 와서 공연을 했는데 떼창 할 줄 알았는데 어째 기운 빠지는 돈 스피크 따라 부르기.


본 조비가 독집으로 존 본 조비 1집을 냈을 때 같이 본 조비 그룹을 만들었던 기타리스트 리치 샘보라에게 말 안 하고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리치 샘보라도 열 받아서 자신도 노래를 불러 앨범을 내기도 했다. 당시에 본 조비도 잘 생겼지만 리치 샘보라는 섹시의 아이콘이었다. 본 조비보다 더 잘생긴 얼굴로 온 몸이 섹시 섹시했고 기타를 무지막지하게 쳤다. 세상의 여자들이 리치 샘보라에게 목을 맸다. 기타리스트라 노래는 못 부를 생각하겠지만 노래도 엄청 잘 불렀다. 그러니 독집까지 내지. 본 조비의 노래는 대부분 본 조비와 리치 샘보라 둘이서 만들었다. 만난 여자들도 엄청 유명한 여자들인데 그 이야기는 패스. 본 조비에서 존 본 조비가 단연 인기일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루피들은 대거 리치에게 몰리기도 했다. 아무튼 그 잘생긴 얼굴과 기타 실력으로도 모자라 옷에도 관심이 어찌나 많았던지 몇 해 전에는 어랍쇼, 일본의 한 홈쇼핑에서 나와서 옷을 팔고 있더라. 새삼 놀라고 웃겼음.


유투는 좋은 노래들이 너무 많다. 어떻게 이렇게나 좋은 노래들을 이렇게나 많이 부를까,라고 생각이 들다가 사진 속 가수들이 대부분 좋은 노래들이 많구나. 유투는 현재 지구 상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슈퍼밴드가 되었다. 유투가 공연을 하기 위해 한 번 움직이려면 어마어마한 물량이 따라가야 한다. 유튜는 어느 시점을 지나고 나서는 돈으로만 움직이지는 않는다. 명분이 있어야 한다. 기근이나 전쟁으로 고통받는 곳으로 가서 노래로 기금을 모은다거나 희망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분단국가라서 오래전부터 섭외를 했는데 늘 실패였는데 19년에 드디어 한국 공연을 했다. 76년에 데뷔한 이래 43년 만에 내한해서 공연을 했다. 유튜브로 찾아보면 정말 감동적이다. 유투의 보노는 눈에 문제가 있어 해가 비치는 공연장에서는 항상 색이 진한 안경을 쓰고 노래를 부른다. 모든 노래들이 작살나지만 메리제이 블라이즈와 같이 부른 ‘원’을 보면 둘 다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른다. 감동적이다.


세계 공연하면 마이클 잭슨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이클 잭슨은 두 대의 유조선만큼 큰 배에 물량을 실어서 한 대는 현재 공연할 나라로 가서 설치를 하고 공연을 한다. 그렇게 마이클이 공연을 할 때 다른 한 척의 배가 다음 나라로 가서 무대 설치를 했다. 그 규모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인원과 물량을 자본으로 따져 놓은 정보가 있는데 궁금하면 검색해 보기 바람요.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영화 ‘디스 이즈 잇’을 찍는 도중에 죽은 것으로 안다. 그래서 후반 작업을 마이클이 없는 와중에 완성했다. 디스 이즈 잇이 후에 극장에서 했을 때 맨 마지막 날 맨 마지막 시간에 봤던 기억이 있다. 마이클이 얼마나 음악에 진심인지 알게 되는 영화였다.


이런 슈퍼밴드의 가십은 이제 유튜브에서 아주 정확한 정보로 알려주는 채널이 많다. 몹시 전문적이고 아주 정확하다. 나처럼 어딘가에서 주서(주워) 들어서 큭큭거리면서 하는 이야기와 차원이 다르다. 저 카세트테이프를 구입할 때에는 슈만 빼고 저기 있는 가수들이 전부 살아있었는데, 장국영도 죽었고, 미스터 빅의 기타 펫 토페이도 죽었고, 마이클 잭슨도 죽었고, 신해철도 죽었고 휘트니 휴스턴도 죽었다. 누구나 다 죽는데 죽음이라는 게 왜 이렇게 멀게 만 느껴지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처럼 느껴질까. 분명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죽음이라는 건 사람에게 늘 달라붙어 있는 터부 같다.


그런데 이 음악들보다 더 많이 듣는 노래가 요즘 '넥스트 레벨'이다. 노래가 정말 너어어무 좋다. 원곡 때 정말 많이 들었다. 묵직하고 톤의 움직임이 덜 하면서 늪으로 빠질 듯한 원곡의 넥스트 레벨. 그러다가 이번에 에스파가 조금 발랄하게, 찐뜩찐뜩하게, 청명하게 넥스트 레벨을 불렀다. 특히 닝닝의 목소리는 토란잎에 맺힌 물방울처럼 청량해서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원곡을 많이 들어서 이제 그만 들어야지 할 때 에스파의 광야 세계관 '넥스트 레벨'이 나와 버린 것이다. 원곡도 영혼을 갈아 넣어서 만들었는데 원곡은 19년 홉스 앤 쇼에 삽입되어서 영화를 보다가 뭐야 이거? 너무 좋잖아. 하게 되었는데 운전할 때 들어야'만' 하는 노래다. 운전할 때 들으면 정말 끝내준다. 그럼 오늘은 내 마음대로 선곡으로 원곡 '넥스트 레벨' 한 번 듣자. 매력을 넘어 마력으로 뭉친 해티가 등장할 때 넥스트 레벨이 나온다.

https://youtu.be/JRZtD3VdlWQ

그나저나 SM에서 수만이 형 이제 손 땐다는데 이제 그럼 뭐 어떻게 돌아가? 유영진이 수장이 되고 뭐 강타가 이 인자가 되고 뭐 그런건가, 아 김민종도 있었지. 뭐 그렇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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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8-15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사진 보니, 갑자기 신해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교관 2021-08-16 12:43   좋아요 0 | URL
중독성있는 마왕의 목소리 ㅋㅋ 그립네요 :)
 

이 글은 폭염으로 아스콘에 계란을 터트리면 그대로 익어버릴 일주일 정도 전에 써 놓은 글인데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다. 시간은 절대 여지를 두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시간이라는 건 몹시 좋아하는 사람과 아주 싫어하는 사람으로 갈라놓기도 한다. 오늘 오전 바닷가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생각난 건데, 어제 밤새 비가 왔다. 태풍의 영향으로. 그래서 창에 빗물이 붙었다. 다다닥 하며 밤새 세차게 비가 와서 창에 붙었다. 창에 붙은 비는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비가 다시 내려 물방울에 붙으면 무게 때문에 밑으로 떨어져 소멸하고 만다. 창에 붙는 물방울을 떨어트리려는 비와 악착같이 창에 붙으려는 물방울을 보며 마치 아등바등 악착같이 인생을 부여잡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악착같이 부여잡고 있지만 무게가 무거워지면 밑으로 떨어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소멸해 버릴 텐데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생을 참으로 아등바등하며 보낸다. 아무리 이렇게 지낸다고 해도 시간은 손을 내밀거나 여지를 두지 않는다. 좀비처럼 의지만으로 앞으로 앞으로 갈뿐이다. 그런 생각이 오전에 잠시 들었다.  


조깅을 하다가 몸을 푸는 곳에 가면 늘 그 시간에 나와서 책을 읽는 한 아버님을 본다. 폭염이라 밖이 더울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오후 6시가 지난 시간 강변의 그늘이 진 곳은 시원하다. 바람까지 불어서 정말 책 보기에는 딱이다. 아버님은 매일 비슷한 시간에 나와서 책을 본다. 볼펜으로 줄을 그어 가며, 옆에 필기를 해 가며 읽기 때문에 몹시 집중한다. 그 모습이 아주 멋있어 보인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할아버지 나이가 되어서 책을 읽는다는 게 의미 없어 보이고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어릴 때는 했는데 노인이 되면 사실 생산적인 활동으로 시간을 보내지는 않는다. 대부분 시간을 멍하게 보내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모여서 한 곳을 바라보며 있거나 돌아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


그게 아니라면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틀어 놓고 본다. 그에 비해 저 아버님은 매일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곳에 나와서 책을 읽는다. 나이가 들어 책을 읽은 게 삶에 무슨 도움이 될까,라고 생각했던 어린 날들을 반성한다. 책을 읽어 상상하고 공부를 하는 것만큼 하루하루를 충족하게 보낼 수 있는 건 나이 들어 없는 것 같다. 좀 떨어진 곳에서 몸을 풀고 있을 때 아버님이 와서 자리를 잡고 책을 읽은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면 꽤나 마음이 안정된다. 아버님의 자세도 아주 안정적이다.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여 균형된 자세를 잡는다. 흐트러짐도 없다.


이런 아버님이 있는가 하면 작년부터 거의 매일 나오는 영감님이 있는데 노 마스크다. 정말 꼴 보기 싫다. 마치 이 공간이 자신의 집인양 생수를 받아서 입을 헹군 다음 카악 하며 가래를 뱉는다. 딱 꼴 보기 싫다. 작년에는 어두워지니 집에서 생수통 가장 큰 통을 가져와서 숨겨 놨다가 사람들이 뜸해지니 생수를 받아서 갔다. 나는 그걸 동영상으로 찍었다. 물통이 어찌나 무거운지 영감도 잘 들지도 못하는데 욕심 때문에 어떻게든 들고 간다. 며칠 전에는 5분만 걸어가면 공중화장실에 있는데 책 읽는 아버님 옆의 풀숲 맞은편에서 소변을 봤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계속 그 영감을 쳐다봤다. 영감이 나의 시선을 피했다. 영감은 그 나이에 비해 몸이 좋고 건강하게 보인다. 매일 근력 운동을 하니 근육이 아직 발달해있다. 그렇다고 해서 시니어 헬창 같은 몸은 아니다. 걸음걸이는 거만하다. 늘 아주 천천히 거만하게 걸으며 팔 운동을 하면 입을 헹구고 가래를 뱉고 다리 운동을 하면 거만하게 좀 걸어서 물이 있는 곳에 가서 입을 헹구고 가래를 뱉는다. 어제는 영감이 타는 자전거를 세우다가 잘 못 발을 디더 옆으로 넘어졌는데 누군가에게, 자신을 이렇게 넘어지게 만들 게 했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에게, 그러니까 허공에 대고 욕설을 심하게 했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만약 나에게 무슨 말이라도 한다면, 요컨대 왜 쳐다보느냐? 같은 말을 하면 나는 주머니에 항상 폰이 두 개라, 하나는 대 놓고 영상을 찍으며, 영감님 마스크 왜 안 씁니까, 여기 마스크 안 쓴 사람이 있습니까, 마스크 쓰고 싶어 쓴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섯 샐 동안 마스크 쓰세요, 안 그럼 신고할 겁니다. 1, 2, 3, 한 다음 다른 폰으로 바로 신고를 할 요량이다. 영감은 마스크를 가지고 다니지 않기 때문에 다섯 샐 동안 마스크를 쓸 수 없다. 아무튼 꼴 보기 싫은 영감이다.

그리고 매일 나오는 초딩들이 있다. 두 명의 초딩으로 6학년으로 보인다. 둘 다 통통하다. 이 녀석들 늘 저기에서 논다. 매일 저기에서 빗물이 빠지는 하수구에서 뭔가를 늘 찾고 있다. 어느 날 보니 메뚜기 중에 방아깨비를 잡는 것이었다. 방아깨비가 저기에 있는 모양이다. 요즘은 메뚜기를 거의 볼 수 없는데 초딩들이 메뚜기를 매일 저기서 잡는 것이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방아깨비의 다리를 하나씩 뜯어서 죽이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곤충을 죽이는 재미 때문에 매일 저기에서 메뚜기를 찾고 있었다. 초딩 때 벌레 죽이는 재미를 알게 되면 걷잡을 수 없다. 잠자리는 날개를 떼서 서서히 죽인다거나, 좀 큰 개미는 더듬이를 떼어 낸다거나. 하지만 요즘은 곤충이 드물어서 곤충을 찾기도 힘든데 녀석들 잘도 찾아내서 다리를 뜯어 죽이는 재미를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방아깨비의 다리를 하나씩 떼서 바닥에 버린 다음 몸통만 남은 방아깨비를 버리고 다시 메뚜기를 잡으러 다녔다.

시커멓게 탄 내가 그 앞에 딱 가서 버티고 서서 초딩놈들을 봤다.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 메뚜기를 잡아서 죽이는 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지만 대 놓고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법으로 정해놓은 것도 아니고. 그저 약간 무서운 얼굴을 하고 사지가 분리된 채 버려진 방아깨비 앞에 서서 저 녀석들을 노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눈치를 슬슬 본다. 내가 발을 탁 구르며 웍! 하는 큰 소리를 내면 호다닥 도망갈 것만 같다. 초등학생 녀석들도 내가 가면 늘 있으니 올여름에는 거의 매일 나왔다. 매일 나와서 방아깨비를 잡아서 다리를 하나씩 떼서 죽였다. 하루에 방아깨비의 세계가 하나씩 죽어갔다. 이 좁은 공간에도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오고 가는데 이 넓은 세계에는 얼마나 많은 호러블 한 인간들이 있을까. 태양에 익은 풀냄새가 나고 메뚜기가 초딩들에게 죽어가고, 땀을 흘리는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한 아버님은 그늘에서 책을 읽었다. 여름인 것이다.


조깅을 하면서 고개를 들어 보면 자연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

굳이 제목을 붙이자면 '바람이 그린 그림'


빗질하는 하늘


여름에만 볼 수 있는 금빛 하늘


붉은 구름의 역습


조깅 후 포토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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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 하는 영화 이야기,라고 쓰고 그냥 영화 리뷰라고 하고 싶지만 그냥저냥 떠들어대는 영화 이야기. 영화는 일상 중에서 일탈을 맛볼 수 있는 예술의 한 부분이며,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림, 사진, 의상, 미술, 건축, 자동차를 보는 재미가 있어서 그런지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동안은 그야말로 이 세계를 떠나가 있는 기분이 든다. 



1. 킹덤: 아신전

https://youtu.be/rO3gF04G-2I

생사초를 먹은 노루를 호랑이가 먹고 그 호랑이가 사람들을 좀비로 만든다. 먹이사슬의 가장 밑바닥이었던 생사초가 먹이사슬의 가장 위에 존재하는 인간을 위협한다. 그 중간에 아신이 있다.


킹덤 시즌 1, 2에서는 가장 권력을 쥔 자들이 가장 밑바닥의 서민들을 학살한다. 이제 그 반대를 통해 모순과 역설을 말한다. 킹덤 아신전 첫 장면에서 화면은 밑에서 나무가 빼곡한 하늘이 반영된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조선, 평온한 세상을 말한다. 그러나 생사초를 먹은 노루가 그 물에 빠지며 세상은 흐트러진다. 그렇게 킹덤 아신전은 시작한다.


아신은 악착같이 살아간다. 조선인도, 여진족도 아닌 아신은 처절하리만치 돼지우리 속에서 실낱 같은 희망으로 하루를 살아낸다. 그런 아신이 분노를 넘어 감정이 완전히 결여된 표정으로 바뀐다.


아신의 얼굴에서, 그 표정에서 분노, 희망, 그리고 절망의 한 올까지, 모든 감정이 한순간 확 걷히는 표정이 눈빛에 나타난다. 그건 바로 체념이었다. 일종의 안정된 코마 상태. 마치 말기 환자가 모든 것을 체념한 후 나타나는 온후한 표정. 아신은 그렇게 체념의 상태가 되어 인간 그 이상의 인간이 된다.


그 체념의 표정을 지은 전지현의 연기가 아주 좋았다. 킹덤 아신전은 한국판 왕좌의 게임을 보는 것 같았다. 손톱의 더러움, 누런 이빨, 해에 그을린 볼살 등 마치 다큐를 보는 것 같은 미장센과 몰입할 수밖에 없는 극본의 힘이 굉장했다.


앞으로 킹덤이 더욱 기대되는.




2. 정글 크루즈 

https://youtu.be/OMFHBSz0Nk8

정글 크루저가 시작할 때와 프랭크가 회상할 때 메탈리카의 ‘낫띵 엘스 메럴’이 나온다. 정말 학창 시절에 메탈리카를 미친 듯이 들었던 나로서는 도입 음악이 너무 마음에 들어 옆에 앉은 일행에게 야, 메탈리카 야!라고 했지만 일행은 그게 뭐? 같은 표정으로 영화만 관람.


영화 속에서 낫띵 엘스 메럴은 노래는 없이 연주만 흘러나온다. 메탈리카의 메탈리카 앨범에 있는 곡으로, 대체로 암울하고 우울하지만 믿음과 함께 있음을 말하는 노래다. 암튼 요즘의 넥스트 레벨보다 더 좋아했음. 넥스트 레벨 커버 치는 영상도 재미있음. 런던, 파리, 러샤, 브라질은 남자 녀석들이 제껴라 제껴라 하고, 일본, 중국 재미있음. 그나저나 에스엠은 도대체 광야는 왜 포기 못함?


여하튼, 정글 크루저는 구니스, 인디애나 존스, 커스롯트 아일랜드, 피터 잭슨의 킹콩을 거쳐 도달한 느낌. 모험과 모험이 모험으로 모험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미! 국!이라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영화라 생각된다. 앞서 말한 심각하지 않고 자본이 충만한, 재미와 볼거리를 제공하는 할리우드 식 판타지 영화를 이어받았다.


그간 에밀리 블론트의 영화들 중에서 이 영화의 에밀리가 제일 러블리하다. 몹시 사랑스럽다. 치켜뜬 눈동자며, 나만 살면 되지만 동물들을 구하는 모습이며, 똑똑한데 멍청하며, 안 그런 척 그런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게 나온다. 러블리의 끝판이다. 실제로도 그런 모습인데 영화 유튜버 천재 이승국과 비대면 인터뷰하는 모습을 봐도 아주 장난기 넘치는 사랑스러움으로 대화를 한다. 한 번 보시길.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며 낫띵 엘스 메럴은 정말 우주 최고로 좋은 노래다.




3. 래치드

https://youtu.be/CE1KOhXX2no

래치드는 오래전, 1940년대의 정신병원에서 일어나는 아주 기묘하고 난해하고 무서운 이야기 시리즈다. 밀드레드 래치드라는, 어떤 단어로 지정할 수 없는 간호사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이어진다.


샤론스톤도 나오고 신시아 닉도 나오고 주디 데이비스 등 유명한 배우들이 와장창 나온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라 폴슨의 의문스러운 간호사 연기가 좋다. 사라 폴슨은 꼭 우리나라의 조여정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사라 폴슨도 꽤나 많은 영화에 나왔다. 아마도 이대로 필모를 이어간다면 줄리안 무어처럼 되지 않을까. 한 50대가 되어서 완전한 두각을 드러내는 배우. 뭐 그런.


사라 폴슨의 최근의 화제작은 ‘런’이었다. 아무튼 넷플 미드 ‘래치드’는 정말 재미있다. 스토리, 호러, 고어,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딱인 영화다. 잔인한 듯 아닌듯한데 몹시 고어적인 장면도 많다. 요컨대 팔이 잘린다거나, 다리가 총에 맞아 터진 모습 같은 장면은 쏘우처럼 드러내 놓고 고어적인 영화보다 더 끔찍하다.


또 19금 장면 역시 그렇지 않은데 몹시 야하다. 드러내는 장면은 없지만 간호사가 남자 환자의 자위를 해주는 장면은 대화와 두 사람의 얼굴만 보여주는데 대 놓고 보여주는 영화보다 더 야하다.


시리즈는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면서 점점 무섭고 호러에 가깝게 흘러간다. 미쟝센이 아주 좋다. 배경과 정신병원의 내부 색감은 박찬욱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재미가 많다. 예고편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미술이 죽인다.




4. 보스 베이비 2

어릴 때도 만화 본다고 엄청 혼났었는데 어른이 되어서 더 보는 것 같네. 귀여움과 귀여움으로 심장어택 당하다가 감동의 풀 스윙을 먹어 버렸다. 더위 먹는 것보다 낫지.


닌자 베베 귀염둥이를 나올 때 어쩔 뻔. 티나의 막 나가는 귀여움과 타바타의 노래는 또 왜 그렇게 좋을까. 이 영화는 보는 내내 신나고 귀여워서 죽을 것 같지만 어린이보다 으른이가 보면 더 좋을 영화가 아닐까 싶다.


내 아이들이 나와 점점 멀어진다고 느낄 때(싫지만 분명 그런 시기가 오기 때문에) 보스 베이비 2를 보라. 돈이 좋고 돈을 버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 돈을 많이 벌었어도 지나고 보면 꼭대기는 외롭다.


정신없이 보다가 정신 차리고 난 후에는 뭉클한 영화 보스 베베 2였다.




5. 스페이스 잼: 새로운 시대  

https://youtu.be/58mGvTiQ4Yg

영화 ‘스페이스 잼: 새로운 시대‘는 26년 전에 마이클 조던이 벅스 바니와 손잡고 외계 종족들과 농구 한 게임을 해서 지구를 구하는 스페이스 잼의 후속 편이다. 학생들과 어른들의 우상 마이클 조던과 아이들의 우상인 벅스 바니가 만나서 농구로 빌런들을 무찌른다는 이야기.


마이클 잭슨의 노래 ‘잼’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마이클 조던이 나와서 농구를 한다. 거기서는 마이클 잭슨도 살아서 마이클 조던과 같이 농구를 하면서 노는 모습이 마치 꿈처럼 몽글몽글하다. 랩 하는 부분에는 크리스 크로스도 나온다. 걔네들이 누구냐면 미국의 량현 량하 같은 애들인데 빌보드 찍었었다. 랑현 량하를 크리스 크로스를 보고 따라 만들었을 것이다 박진영이.


당시 흑인 음악에 빠져 있었으니까 박진영이. 그래서 빌보드 찍고 세계 난리 난 크리스 크로스 같은 어린 노무 세키들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크리스 크로스의 점프는 지금 들어도 신난다. 하하하하하 학교를 안 갔어, 와는 다르다. 박진영이 너는 이번에 '잇지' 노래 가사도 똥망이야 알지. 프로듀서나 하란 말이야. 크리스 크로스 형제 중에 한 명은 얼마 전에 죽은 것으로 안다.


여하튼 그래서 스페이스 잼: 새로운 시대는 근간의 농구 천재 릅신이라 불리는 르브론 제임스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인 에이아이 같은 돈 치들에게 빼앗긴 아들을 찾기 위해 벅스 바니와 농구팀을 이루어서 대결을 한다. 마이클 조던처럼 연기할 엄두가 안 났던지 온전하게 만화가 되어 벅스 바니와 투니버스 캐릭터들과 한 팀을 이루는데 그 과정이 나는 너무 재미있었다.


빌런으로 워 머신 돈 치들이 나오는데 돈 치들은 첫 연기가 30년 전인데 그때 모습이 마치 지금 돈 치들의 1초 전의 모습 같다. 돈 치들은 날 때부터 저런 얼굴로 태어난 것 같다. 이 영화의 재미있는 점은 워너 브라더스의 작품들이 그대로 나오고 그 안으로 벅스 바니와 릅신이 만화가 되어 들어간다는 점이다.


매트릭스에서도, 매드 맥스의 그 장면에서도, 킹콩과 해리포터에도, 그리고 왕좌의 게임에서도 똑같이 용을 타고 나온다.  이런 장면 너무 재미있고 좋았음. 다시 실사로 돌아온 릅신. 실사, 2D, 3D의 완벽 조화. 시청 고고고.




6. 발신제한

https://youtu.be/WSmgHodVqDk

영화 발신제한을 보면서 든 생각은 빌런에게 제발 사연을 주지 말았으면 한다. 그냥, 그저 돈이 좋은 똘아이가 폭탄 설치하고 끝으로 치달았으면 한다. 빌런에게 딱한 사정을 주고 복수를 위해 이런 일을 펼치지 말고 그냥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사이코패스라서 그냥 돈이 필요해서 재미로 폭탄을 설치하고 사람을 죽여줬으면 한다.


발신제한의 연기들을 보면서 호평이 가득한데 나만 보면서 답답했는지 모르겠다. 경찰들이 미운 건 알겠는데 정말 너어어어어무 무능하고 답답하게 연출을 했다. 왜 이러는지 당최 모르겠네.


제네시스 광고하는 김에 버튼을 누르면 창의 한 편에 홀로그램으로 아내와 대화를 하고 다른 버튼을 누르면 비상약 상자가 튀어나오고, 또 다른 버튼을 누르면 수륙양용차가 되어서 바다가 있는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질주를 하다가 바다에 뛰어들어 붕 하며 바다 위를 달려가고, 어떤 버튼은 날개가 나와서 그만하자.


아무튼 자산어보 한 번 더 봤는데 조우진 역시 대박임. 아 진정 연기는 이렇게 하는 거라.




7. 노바디

https://youtu.be/zeWm0Snl-Fo

질질 끌지 않는다. 답답함이 없는 테이크의 향연. A급 바로 밑까지 바짝 다가온 B+급의 액션이라 더 마음에 들었던 영화.


일상에서 늘 보던 중년 아저씨의 이유 불문 악당을 향한 차별이 없는 통쾌한 타격을 영화 마지막까지 보여준다. 존 윅의 스핀 오프라고 까지 소개하는 ‘노바디’의 빌런들은 어쩌면 존 윅에게 깔끔하게 당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카타르시스가 오랜만에 팍팍 터져 나왔던, 존 윅이 이성을 잃게 만든 게 기르던 반려견이었다면 하치에겐 딸이 아끼던 반려묘의 팔찌가 사라지면서 폭발하게 된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조깅을 하고 분리수거를 하며 출근 후에 책상에 앉아 엑셀이나 하는 반복의 매일을 보내는 허치. 어느 날 밤 집에 강도가 들어와 아들 대치를 하지만 허치는 저항 없이, 저기 돈 있으니 가져가라면서 그저 강도를 보내준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또 주위 모든 이들에게 무능하고 나약한 아버지로 낙인찍힌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는 허치의 선택을 손뼉 쳐주고 싶다. 그렇잖아, 영화지만 현실과 타협을 한 장면이었다. 아버지로서 어쩌면 가장 바람직하고 멋진 모습이 아닐까. 생활을 ‘유지만 하고 있다’고 속상했던 때가 그리운 지금은 ‘유지만 하면 좋겠어’가 된 요즘이다. 살도 계속 찌는 사람들이 늘어나 ‘유지만 되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허치가 인내를 가지며 일상을 유지하는 모습은 삶이든 살이든 유지하기 힘든 요즘에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잘 흘러가나 싶지만 끔찍이 사랑하는 딸의 고양이 팔찌가 사라지며 허치는 코만도가 된다. 일반형 히어로가 되어 펼치는 허치 이야기. 맨손 격투는 물론이며 총기며 일상의 생활 도구의  무기화, 부비트랩을 사용하는 것까지 막힘없이 흘러간다. 에이 특공대처럼 만드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점점 허치에게 우리는 빠져든다. 이 아저씨 도대체 뭐야!


그리고 귀를 너무나 즐겁게 해주는 음악이다. 라이프 이즈 비치를 시작으로 왓 어 원더풀 월드나 하트브레이크 등,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산타 에스메랄다 버전으로만 알고 있던 ‘돈 렛 미 미스 언더스투드’가 니나 시몬의 버전으로 나올 때는 와아 음악들이 리발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동네 아저씨의 빡침으로 시작하는, 내용을 떠나 신나고 통쾌한 액션과 그에 어울리는 음악들로 버무려져 90분이 즐거웠던 영화. 나 같은 인간이 좋아할 만한 영화 ‘노바디’였다.


*

지난주 할리우드 소식에 노바디의 밥 오덴커크가 영화를 찍다가 의식이 없어서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 있었다. 




8. 괴기맨숀

https://youtu.be/y8ZT2xXp414

괴기맨숀은 올해 나온, 괴기맨숀 이전의 한국 공포 영화보다는 훨씬 좋았다. 한국 공포물로써 한국 공포가 지니는 민담, 설화를 무서운 이야기로 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놀래는 점프 스퀘어도 없고, 랑종처럼 굉장히 징그러운 장면도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꼭 손이 쓱 나올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의 영화다.


다섯 가지의 이야기가 옴니버스로 이어진다. 각기 다른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한 장면에서 한 번씩 만나거나 교차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일단 제목에서 흥미롭다. 괴기맨숀. 제목이 올해 나온 한국 공포 영화 중에서는 가장 궁금하다. ‘괴기’라는 단어가 던지는 기기묘묘하고 안갯속에 가려진 식인 하는 생물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의문을 자아낸다.


나는 모든 에피소드가 다 재미있었는데 마지막 김보라가 그 아파트 관리실에서 선배를 보고 선배! 하며 반가워하다가 선배의 뭔가를 보고 얼굴 표정이 굳어진다. 그 뭔가가 뭔지 모르겠네. 하도 금방 지나가버려서. 그리고 선배의 눈동자가 전부 검게 변하는 장면이 0.1초 나온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다.


이 영화의 장점은 빠르다. 질질 끌지 않는다. 그리고 공포를 다양하게 느낄 수 있다. 그게 장점이다. 또 아주 별거 아닌데 그게 별거 아닌 게 아니라서 무섭다. 요컨대 “자기야 나 여기서 목욕한다고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라는 말을 계속하면 그게 공포다.


평소에도 가까이 있는 사람이 정신적인 문제로 계속 같은 말을 한다면 그게 정말 무섭다. 또 이제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데 우리 사랑했었잖아, 우리 사랑하는 사이였잖아, 라며 계속 그러면 굉장히 두렵다. 현실에서도 공포의 질과 종류는 다양하다.


마지막 그 뭔가가 뭘까.




9. 블랙위도우

https://youtu.be/BOEVQSprNv4

이 영화의 포지션은 어벤져스 2를 지나 시빌 워와 어벤져스 인피니트 워 중간에 있다. 그래서 나타샤는 동생에게 받은 그 조끼를 엔드게임에서 죽기 직전, 인피니트 워에서 줄곧 입고 나온다.


초반의 반딧불은 마지막의 반딧불로, 초반의 어린 나타샤와 어린 옐레나가 우리는 거꾸로 보인다고 했나? 아무튼 거꾸로 대사는 마지막에도 한다. 그렇게 블랙 위도우는 가족이라는 것에 뭔가를 보여주고 있다.


마블의 영화답게 코믹한 부분을 곳곳에 배치했다. 그걸 찾아내는 재미 또한 관객의 몫이다. 데드풀 2에서 슈퍼파워들의 착지를 꼬집는 부분을 옐레나도 꼬집었다. 그리고 한 번 따라 한다. 그건 마치 엘사가 처음 나왔을 때 모두가 엘사엘사하며 렛 잇 고를 부를 때 흥, 하며 유행은 따라가기 싫어! 하지만 혼자일 때 레 잇 고,를 한 번 몰래 불러본다. 그런 심리와 비슷하다.


만약 스탠 리가 살아있었다면 어느 장면에 깜짝 등장했을까. 아마 나타샤와 옐레나 둘이서 작은 슈퍼에 들어가서 내가 옳니, 네가 나빠, 같은 대사를 할 때 계산하는 점원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 둘의 대화가 레드룸의 비밀스러운 이야기였으니까.


나타샤에게 여권을 스무 개씩 만들어 주던 친구에게 이런 이름은 강아지 이름 같잖아?라고 하는데 쿠키에서 나타샤는 죽고 옐레나가 차에서 강아지를 데리고 내리는데 그 이름을 부른다.


마블 시리즈는 이제 그만 나와도 될 것 같은데 또 나오면 보게 된다. 당연하지만. 아직 완다 비전이나 로키 시리즈도 못 봤는데 세계관이 넓어도 넓어도 너무하네.


이 영화에서 좀 재미있는 건 레이첼 와이즈의 얼굴은 플로랜스 퓨의 얼굴과 스칼렛 요한슨의 얼굴을 다 섞어 놓은 것처럼 닮았다. 또 나타샤를 잡으려는 로스 대령인가 로스 장관은 아주 오래전, 에드워드 노튼의 헐크 시절의 로스 대령이었는데 마블 시리즈에 줄곧 나온다. 그때 딸로 리브 타일러가 나왔는데 그동안 리브 타일러는 왜 소모되지 않았을까.


아무튼 마블 영화는 보고 나면 영화 이외에도 할 이야기가 많음.




10. 리플리

https://youtu.be/oo9UHZp3V2A

코로나 확진자로 극장에도 갈 수 없고 요즘 영화에 지칠 때는 예전의 영화를 보면 된다. 다시 봐도 재미있는, 아니 다시 보면 더 재미있는 영화 ‘리플리’다.


우선 이 영화에서 주드 로의 미모는 가히 천만 불 짜리다. 영화에는 가장 예쁠 때의 케이트 블란쳇과 귀넷 풸퉈뤄우가 나오지만 주드 로가 다 이겨버릴 정도다.


맷 데이먼의 리플리가 디키(주드로)를 죽이면서 점점 걷잡을 수 없는 곳으로 치닫는다. 야망을 위해 점점 거짓을 확대시키고 또 확대시킨다. 상대방 앞에서 디키인 척 행동하는 리플리와 혼자 있을 때 괴로워하는 리플리의 사이코패스적인 모습에서 우리는 또 몰입된다.


피아노 조율사로 호텔 보이로 미래가 캄캄한 리플리는 이 지옥 같은 뉴욕을 떠나고 싶다. 별 볼일 없는 리플리가 선박 재벌의 제안을 받으며 달콤한 유혹 속으로 들어간다. 사람을 죽였지만 거짓을 늘어놓을수록 아름다운 여인과 자유와 쾌락과 바닥이 보이지 않는 돈이 달콤한 인생을 살게끔 한다.


무엇보다 디키의 친구로 나오는 프레디 역의 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의 연기가 압권이다. 리플리를 경멸하듯 쳐다보는 눈빛, 멸시하는 말투, 가난한 자와 선을 긋는 행동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프레디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결국 리플리에게 조각상의 머리로 프레디 머리는 작살이 나고 만다.


1999년 ‘리플리’의 원작은 훨씬 이전에 알랭 드롱의 ‘태양은 가득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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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에 먹는 송이의 맛은 좋다. 일품이라는 맛이 어울린다. 송이는 제철이 아니더라도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나 같은 인간에게는 맛있다. 송이는 정말 희한한 음식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의 버섯은 어딘가 음식에 곁들여서 굽거나 삶겨서 옵서버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런데 송이는 도대체 뭔가? 송이는 왜 그런지 굽거나 삶아서 먹기보다 생으로 죽 찢어서 먹는 게 더 좋다. 송이가 밥상 위에 오르는 순간 다른 모든 음식이 송이를 위한 곁들인 밑반찬이 된다.


죽 찢어서 입에 넣으면 아침에 바로 구입한 초초한 두부처럼 아무것도 가미하지 않은 채 오로지 송이가 간직하고 있는 그 맛을 전부 느낄 수 있다. 정말 희한하고 대책 없이 귀하고 맛이 좋다. 송이의 맛을 굳이 따지자면 ‘맛있다' 보다는 ‘맛이 좋다’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어떤 무엇인가가 가미되어서 단맛, 짠맛, 매콤한 맛이 어우러져 아아 정말 맛있어가 아닌 참 맛이 좋네, 라는 말이 나오게 하는 것이 송이다. 그렇게 생으로 먹다가 참기름 장에 살짝 찍어서 먹으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건 아무래도 음식이 가지는 기묘한 힘인 것이다.


송이의, 송이 만의 향과 맛이 마치 뇌를 깨끗하게 청소를 해 줄 것만 같다. 최상급 자연산 송이는 비싸다. 자주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송이가 택배로 날아오면 고기와 함께 먹어서 그런지 송이는 육류와 잘 어울린다. 송이에는 기묘한 흐름이 존재한다. 송이를 먹고 나면 건강해진다는 알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송이와 함께면 고기도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을 걸,라고 하는 것만 같다. 아주 나쁘면서 절대 놓치기 싫은 그 사람과 비슷하다. 그리하여 송이를 먹고 나면 괜히 힘이 들어가고 막 달리고 싶어 진다.


그런 기류를 형성하는 여러 음식이 있다. 그런 식재료에는 플라세보가 강하게 작용한다. 먹고 나면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마치 뽀빠이가 된 것만 같다. 게다가 누가 그러던데 이거 먹고 그러니까,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면 더 그렇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버섯은 음식에 들어가 음식의 풍미를 살리는 역할을 하는데 송이는 당당하다. 송이 자체로 맛을 내고 사람들이 찾기 때문이다. 자태 또한 도도하며 색감 역시 깊고 진하다. 송이가 가지는 저 색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맑은 산속의 공기를 그대로 입안으로 들이는 기분을 송이는 느끼게 한다. 먹는 순간 온후하고 웅숭깊은 자연의 맛을 송이는 보여준다. 자연의 온전한 물산이 코를 어루만지고 혀를 주무른다. 환절기에 먹는다면 버석거리는 코 속이 송이의 향으로 촉촉해지는 기분도 든다.


송이는 거개 구워 먹어도 맛이 좋지만 역시 생으로 죽죽 찢어서 향을 듬뿍 느끼며 먹는 맛이 좋다. 향으로 한 번, 입으로 한 번 먹을 수 있는 게 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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