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걸 만들어 먹으면 오래전 도시락을 싸 다녔을 때가 떠오른다. 도시락을 싸오면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이미 동이 난다. 김치 빼고 반찬 통을 여는 순간 수많은 젓가락을 취권으로 다 방어해야 한다. 하지만 밑으로 위로, 옆으로 고수의 젓가락들이 와장창 들어왔다. 그래서 2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은 대환장파티였다. 도시락 반찬이란 게 김치를 비롯해 다 엇비슷 비슷한 반찬들이다. 대부분 거기서 거긴데 감자와 어묵을 양념에 볶아 오면 순삭이었다. 우당탕탕 한 바탕 폭풍이 지나가면 도시락 반찬은 바닥에 깔린 양념만 남았다.


도시락이라는 건 아주 묘해서 무슨 반찬을 넣든 맛있었다. 도시락은 도시락만의 맛이 있었다. 반찬통을 열면 꾹꾹 갇혀 있다가 퍼지는 냄새와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먹는 도시락은 그만이 가지는 맛이 확실하게 있었다.


감자와 어묵은 뜨거울 때 먹으면 맛있지만 도시락은 뜨겁게 먹을 수 없었다. 그저 식어빠진 감자 어묵볶음이지만 맛있었다. 뜨거운 감자만큼 맛이 있었겠냐마는 아마도 도시락 반찬이라는 건 친구들을 끌어 모으는 어떤 장력이 있었다. 그 힘 때문에 다 같이 도시락 반찬에 우르르 몰려 집어 먹는 맛이 있었다.


코로나가 끝나도 이제 더 이상은 도시락 반찬에 여러 젓가락이 한꺼번에 몰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도시락 자체가 없어졌다. 당시를 생각해보면 독한 놈은 자신의 반찬을 뺏기기 싫어서 침을 막 뱉었다. 하지만 더 독한 놈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젓가락질을 했다. 이제는 그럴 수도,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집에서 감자와 어묵을 넣고 지글지글 볶았다. 간장이 조려지는 냄새가 좋다. 도시락 먹을 때만큼 맛은 안 나지만 뜨겁게 먹을 수 있어서 또 맛있다. 반찬통에 담아서 도시락 싸들고 집 앞 바닷가라도 나가자고 해야 할까 보다.

사실 집에서 음식을 해 먹기가 어려운 요즘이다. 살림만 하는 가정주부나 집안일을 하는 남자라도 매일 음식을 해 먹는 건 만만찮은 일이다. 8월 24일 자 신문기사에 이런 내용이 실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00806


이제 집에서 음식을 하는 건, 음식을 해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제는 집에서 밥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넘어가고 있다. 지금 부모세대가 사라지면 집에서 밥을 해 먹는 건 어쩌면 행사가 있거나 추억의 음식이 생각이 났을 때 해 먹는 정도가 될지도 모른다.


현재 집에서 해 먹을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음식이 빠르게 배달이 된다. 해 먹는 수준만큼 맛을 내며, 뜨거울 때 배달이 된다. 기사에서 처럼 요리가 아니라 조리해서 먹을 맛있는 음식도 마트에 가면 속속 나온다. 음식 유튜버들은 편의점이나 마트에 매달 새로 나오는 음식에 대해서 리뷰를 해준다. 정보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며 들어온다. 요즘 편의점 어플을 깔면 냉장고 기능이 있어서 1 플러스 1이나, 2 플러스 1을 하는 식품을 구입했을 을 경우 전부 다 들고 나올 필요 없이 하나만 들고 나오고 나머지 2개는 편의점에 넣어두고 어플의 냉장고 기능을 사용하면 같은 계열의 어떤 편의점에서든 나머지 식품을 꺼내서 먹을 수 있다. 정보라는 게 하루하루 변하고 있다.


이제 도시락은 학교에서 싹 사라졌다. 도시락을 아침마다 쌀 수가 없다. 게다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도시락의 맛있는 반찬에는 여러 젓가락이 한꺼번에 들어온다. 위생에 문제가 있다. 그렇기에 급식을 하면 두 가지의 문제가 싹 해결된다. 이제 코로나 시대에 접어들면서 식당에서 음식을 사 먹는 빈도도 낮아졌다. 집에서 음식을 해 먹는 것도 힘들어졌다. 더 나아가 집에 음식 할 때 나는 냄새가 배기는 것도 싫어졌다. 음식쓰레기가 나오는 것 역시 싫어졌다.


그러면서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엄마의 집밥 콘셉트의 식당은 성행할지도 모른다. 아직 한국사람들은 집밥에 대한 추억이 강하고 추억의 맛을 찾아서 본능적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미국 영화를 보면 집밥, 엄마가 해주는 음식, 같은 대사는 없다. 그런 분위기는 없다. 오래전 영화를 봐도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사랑이 떨어지거나 뒤쳐지지는 않는다.


에이 그게 뭐야? 밥은 집에서 갓 지은 밥에 찌개 끓여서 김치 척척 걸쳐 먹어야지.라고 말하는 AZ가 있지만 그 음식을 따로 하는 사람이 있고, 먹는 사람이 따로 있다면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은 음식을 얻어먹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도시락과 집밥은 늘 그리운 음식이다. 추억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다. 하지만 집밥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엄마의 모든 밥이 몸에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도시락 반찬으로 그만이었던 감자어묵볶음을 한 국자 퍼서 맛있게 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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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단편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는 후에 한 권짜리 ‘이상한 도서관’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길이와 깊이가 늘어나거나 길어진 건 아니다. 단지 시대에 맞게 표현이 되었고 독일의 삽화가와 함께 두꺼운 양장본으로 출판된 것뿐이다.


지난번의 소설 ‘잠’과 ‘빵가게 습격’ 그리고 ‘버스데이 소녀’가 이렇게 독자적인 단행본으로 출판이 되었다. 뭐 다 상술이긴 하지만 독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이벤트 같은 것으로 간주하면 편하다.


삽화가 있어서 판타지 이야기의 집중에 방해가 되는지 더 빠져드는지 그건 나는 알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삽화가 있어서 나쁘지는 않았다. 삽화가 없는 버전을 먼저 읽고 재미있어서 꽤 여러 번 읽고 난 후 삽화 버전을 읽었는데 삽화 이전의 상상했던 그림을 비교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이 소설은 지극히 초현실이며 지극히 판타지다. 그래서 언제 읽으면 좋으냐 하면 지금 읽으면 좋다. 라면은 언제 먹으면 맛있을까? 바로 지금이다. 요즘처럼 감염병 때문에 어딘가에 가지 못하고 방구석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하는 지금 이때 읽으면 딱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소설을 아주 싫어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하지만 소설은 다 허구다. 기본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렇기에 허구를 비틀어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다. 러브 크래프트의 소설들은 현재 그래픽의 발전으로 영화로 다시 재탄생되고 있다. 생각해보면 말이 되는 이야기만 한다면 한 번 사는 인생이 정말 재미가 없을 것이다.


하루키에게는 이런 초현실 중의 초현실 소설이 많다. 해변의 카프카에서는 하늘에서 전갱이들이 우르르 쏟아지고,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그림자와 분리된 채 살아가는 마을이 있고, 일큐팔사에는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가 있고, 심지어 노르웨이 숲에서 나오코가 요양하는 병원도 초현실 공간처럼 느껴진다. 그곳에 온 환자들은 자신의 문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려 한다.

여기에도 양사나이가 나오지만 장편 소설에 나온 양사나이와는 조금 다르다. 그 점을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위의 소개 문구처럼 하루키만의 매력이 묻어나는 마법 같은 소설이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장편소설이나 에세이에 대해서 이야기는 해도 이렇게 완전히 초현실 소설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다. 하루키는 어떤 인터뷰에서 시나가와 원숭이에 대해서도 술술 인터뷰를 했다. 시나가와 원숭이는 말을 하는 원숭이로 인간의 이름을 훔치며 살다가 시나가와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후, 늙어 버린 시나가와 원숭이가 이번 단편집에 다시 나온다. 15년 전에 단편으로 1편이 나왔고 15년이 지난 현재 일인칭 단수 단편집에 2편이 실려 있다. 단순하게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설 같지만 이름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이름을 잃어버리고 배역 속에서 평생 살지도 모른다.


사르트르나 데리다의 책을 보면 인간은 배역 속에서 살고 있다. 인간은 어차피 배역이라는 것이다. 회사에서 주어진 배역을 하고 학교에서도 배역이며 가정에서 조차 배역을 할 뿐이다. 배역의 옷을 오랫동안 입고 있다 보면 마치 그것이 내 인생인 듯 흘러간다.


엄마는 아이에게 맞춰 배역을 하고, 아이는 엄마에게 칭찬을 들으려 배역을 한다. 회사에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고 싶지만 된다고 하는 대답을 하는 배역을 한다. 가기 싫어도 애인이 가자고 하면 가야 하는 배역을 하고, 가족이 먹고 싶다면 먹기 싫어도 먹게 되는 배역을 한다.


하루키의 기이한 도서관, 같은 초현실 소설을 읽으면 이런 배역에 대해서 엷게나, 깊게 생각을 한 번 하게 된다. 소설의 장점이라면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내가 조금 달라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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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오마이스가 짧고 굵게 지나갔다. 새벽 두 시쯤에 아파트 창문을 강하게 때리는 비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겁이 나는 소리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작년에 온 태풍보다는 괜찮았다. 왜냐하면 작년에는 베란다의 창문틀에 젖은 신문지를 전부 끼웠는데 이번에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태풍이 오기 전에 계속 비가 왔다. 7월까지 내내 폭염이다가 8월이 되니 느닷없이 날이 계속 흐리고 연일 비가 오는 날의 반복이었다. 태풍이 오기 전에도 비 때문에 대지가 축축해있었기 때문에 소형 태풍이라지만-두, 세 시간 태풍이 왔지만 피해를 본 곳은 공멸 수준이다. 피해가 난 곳은 5년 전에 차바가 왔을 때에도 모두 침수가 되었다.

태풍이 온 후에 강물은 그야말로 거침없이 흐르는 흙탕물이다. 물이 조깅코스까지 찰랑찰랑할 정도로 올라왔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면 강 속에 사는 물고기들은 어디로 몸을 피할까. 강물 속에서도 우르르 콰쾅하며 휘몰아치는 엄청난 소용돌이의 물소리 때문에 물고기들도 긴장을 할 텐데 다 어디에서 이 소용돌이 같은 물결을 피할까. 더불어 태풍이 오면 새들과 곤충들은 어디로 태풍을 피하는지 궁금하다. 보통의 맑은 날 강변에 나오면 메뚜기들과 민물게와 각종 새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본다. 하지만 비가 쏴아 쏟아지면, 태풍이 몰아치면 그들은 어디에서 몸을 숨길까.


이렇게 흙탕물이 흘러가는 소리도 가까이에서 들으면 대단하다. 보통은 강물이 흐르는지도 알 수 없다. 호수처럼 물이 고여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태풍이 오고 난 후에는 강물이 쏴아아아 하며 흐른다. 소리가 크다. 소리로 겁을 집어 먹는다. 시각적인 두려움만큼 청각적인 공포도 크다.


태풍 때문에 강물이 조깅코스까지 뒤덮고 난 후에는 모든 풀들이 쓰러져있다. 왜가리 한 마리가 마치 자신의 집이 떠내려가 버려 망연자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신기한 건 태풍이 바로 지나가면 강변은 진흙과 냄새와 쓰레기와 대환장파티인데 태풍이 물러가자마자 낚시꾼들은 바로바로 나와서 낚싯대를 강에 던져 놓는다. 그리고 옆에는 팔뚝만 한 물고기들이 가득가득 담겨 있다. 여기 강은 바다와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완전 민물에 사는 붕어보다는 숭어나 전어 같은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 그래서 손질해서 먹기 까다로운 붕어보다 먹기가 수월해서 그런지 낚시꾼들이 매일매일 자리를 잡고 낚시를 한다.

그리고 또 열심히 달린다. 비가 내리고 있어도 달리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 여름인데 한여름이 아닌 이런 날에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면 아주 굽 굽 해서 땀이 엄청나게 난다. 양말이 땀에 젖을 정도로 난다. 그래서 꿉꿉한 날에는 오히려 땀을 옴팡지게 흘려주는 게 상쾌하다.


이 하천의 길로 가야 하지만 역시 여기도 물이 올라와서 다른 길로 가야 했다. 이 길로 가는 이유는 이 하천에는 오리들이 아주 많이 산다. 오리들이 물 위를 떠다니는 모습과 오리가족이 노는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다.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리고 이 장면은 풀숲 오른쪽은 강이고 풀숲이 끝나는 바닥은 조깅 코스로 자전거가 많이 다닌다. 그리고 왼쪽 편, 풀숲의 반대편은 주택가다. 그런데 풀숲에서 빠져나온 민물게 한 마리가 자전거가 싱싱 달리는데 도로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운동화로 오지 말라고 했더니 한 번 날을 세워 해 보겠다며 나에게 덤비는 민물게 녀석을 찍은 사진이다. 얌마, 이쪽으로 가면 저 자전거 바퀴에 깔려 박살 난다고.

너 인간 녀석 내가 상대해 주마! 어흥냐홍!

또 달려간다. 열심히 달릴 것 까지는 없지만 어차피 반환점을 돌아와야 하니까 거기까지는 달려서 가야 한다. 조깅을 하다 보면 돌아와야 하는 지점이 있다는 게 좋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다. 일전에 영화 ‘용길이네 곱창집’을 봤는데 잘 나가는 일본 배우들과 한국 배우들이 전부 한국인으로 나온다. 60년대 오사카 판자촌에서 곱창집을 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연극으로 꽤나 유명한데 영화가 되었다. 일본 배우들은 영화 속에서 재일교포로 한국인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같은 대사를 한다. 그들은 한국인이면서 한국말이 서툴고 일본인은 아니지만 일본말을 하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끼지 못하는 세대다. 그들은 돌아갈 곳에 없다. 아무튼 재미있게 본 영화였다.

태풍에, 비를 맞아서 그런지 힘이 없는 듯 보이는 비둘기.

그간 닭둘기라고 멸시했는데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가는 모습을 보니 역시 넌 평화의 상징. 아무 때나 똥만 싸지 말자.

인공광과 자연광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누가 더 예쁘고 아름답고 가 없다. 둘은 인간을 위해 어두운 밤을 밝게 비춰준다. 밝음과 맑음을 준다.

이틀이 지났음에도 비는 추적추적 계속 내리고 강가에는 역시 낚시꾼들이 있다. 예전에는 보통 낚시꾼이 낚싯대 한 두 개를 들고 나왔는데 근래에는(코로나 이후로는) 대여섯 개씩 낚싯대를 들고 와서 낚시를 한다.

비가 오고 흐린 와중에도 무지개가 하늘에 그림을 그렸다. 은주야 보남파초노주빨 무지개 노래를 부르자.

이 녀석은 이틀이 지났음에도 뭔가를 기다리는 듯, 무엇을 잃어버린 것처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멍하다. 태풍에 짝을 잃은 걸까.

이쪽 하늘과 저쪽 하늘의 분위기가 달랐다, 나를 경계로 흐린 하늘과 좀 더 흐린 하늘이 같은 하늘에 있었다.

태풍이 와서 무섭고 죽을 것 같지만 지나가고 나면 어떻게든 다시 원 상태로 되돌아가려 한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기계나, 모든 것들이 다 그렇다. 망가진 것들은 사람들이 뭉쳐 영차영차 되돌려 놓는다.


저 멀리 구름이 꼭 마그리트의 구름 같다. 우리는 마그리트의 그림 속에서 오밀조밀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제의 아픈 일들을 내일이면 다 잊고 다시 춤을 춘다. 오늘도 달릴 수 있을 만큼 열심히 달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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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어머니가 아버지가 죽기 전에 담가 놓은 술이라며 썩지 않았는지 먹어보라고 했다. 술은 한 15년은 되었다. 닫아 놓은 뚜껑도 잘 따지지 않았다. 겨우 딴 술을 마셔보니 보통 집구석에 오랫동안 처박아놓은 술의 그 맛이다. 탁 쏘는 맛이 있지만 버섯으로 담가 놓은 술이라 술과 버섯이 섞인 기묘하고 마시면 얼굴이 찌푸려지는 맛이었다.


술은 그저 슈퍼에서 바로 구입한 술이 맛있다. 소주도, 막걸리도, 맥주도, 위스키도 바로 구입해서 마시는 술이 맛있지 이렇게 오랫동안 묵힌 술은 그 알 수 없는 기묘한 맛 때문인지 맛도 없다.


아버지들은 왜 그렇게 술을 만들어서 집구석에 꼭꼭 숨겨 두었을까. 내가 어릴 때 마당이 있던 집에 살 때 거기 주인집 형과 매일 재미있게 놀았다. 자전거 타고 놀고, 공을 차고, 특히 나는 장난감을 좋아해서 장난감 하나만 손에 쥐어 주면 군말하지 않고 하루 종일 잘 놀았다. 매일이 대환장 파티였다. 그 주인집 아주머니와 어머니는 너무나 친해서 친구 먹고 할머니가 된 지금도 같이 계중을 하고 있다. 인연이란 알 수 없는 곳에서 꽃을 피운다.


그때 주인집 아저씨가 오랫동안 담가놓은 술을 뜯은 적이 있었다. 그게 자두주였는데 유리로 된 큰 항아리 같은 곳에 담가놔서 양이 많았다. 아저씨는 그 안에 있는 자두를 전부 꺼내왔는데 주인집 형과 그 자두를 홀짝홀짝 집어 먹었다. 달달하니 즙이 죽 나오는 게 너무 맛있었다. 그때 형과 몇 개 집어 먹고 난 후에 기억이 없다.


마치 우물 속에 들어가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틀 뒤에 나온 것 같았다. 기억 속 자두주를 담근 자두는 맛있는데 어른이 되어 마시는 버섯주는 참 맛없다. 요즘도 집에 술을 담그는 사람들이 있다. 놀러 가보면 작년에 뭐를 넣었네, 재작년에 담가 놓은 술이네, 라면서 한 잔 줄까.라고 하는데 나는 늘 싫다. 맛이 일단 없다. 게다가 혀로 느껴지는 술맛이 다 독하다. 집에서 돼지고기를 삶으면 소주나 맥주가 어울리지 담가놓은 술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당이 있던 그 오래전 집이 생각난다. 옥상이 있어서 옥상에 올라가 빨래를 걷곤 했다. 빨래는 옥상의 빨랫줄에 걸려 하루 동안 묻은 시름을 털어낸다. 고민과 고뇌가 새까맣게 껴 있으면 엄마는 빨래를 해서 옥상에 늘어놓았다. 바람이 불러와 빨래에게 ‘괜찮아’라고 말해 주면 빨래는 좋아서 빨랫줄에서 춤을 추었다. 빨래는 같은 모습이 없다. 꼭 인간들 같았다. 축축했던 빨래는 옥상에서 아름답게 말라갔다. 비가 오면 빨래집게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바람이 불면 빨래집게들이 파르르 빨랫줄에서 떨었다. 물방울이 빨래집게 끝에 맺혀 있을 때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밑으로 툭 떨어졌다. 그 장면이 마치 영화의 슬로 테이크처럼 지금 지나간다. 따스하면서도 늙어가는 햇살이 아련하다. 아름다웠다.


아버지는 어딘가에 술을 담가놨다. 담가놓은 술은 누군가와 함께 마시기 위함이다. 아버지는 그랬다. 누군가, 친분이 있는 사람이 집에 오면 약간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 이건 말이야, 라며 담가 놓은 술을 뜯었다. 귀한 술을 받아먹는다며 우리에겐 용돈을 쥐어 주던 아버지 친구들. 과거에 머문 시간은 늘 아름답다.  


아버지가 담가 놓은 술은 참 맛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법 때문인지 기분 좋게 마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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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오마이스가 온다고 한다. 태풍 하면 가장 생각나는 영화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였다. 정말 재미있게 봐서 주제가도 좋아했고 사쿠와 아키의 사랑이야기가 남긴 여운이 잔존물처럼 마음속에 남아있기도 했다. 후에 우리나라에서 차태현과 송혜교가 ‘파랑주의보’로 리메이크를 했는데 원작에 반도 못 미친다. 감독을 혼내고 싶었는데 요즘 다시 보면 좀 괜찮으려나.


바닷가에 태풍이 오면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당연하지만 긴장을 한다. 태풍이 오면 파도를 평소보다 몇 배는 거대하게 만들기 때문에 태풍이 오면 악착같이 나가서 사진을 찍었던 적이 있었다.


그 사진들을 꺼내려고 보니 전부 시디로 구워놨는데 컴퓨터는 시디롬이 없다. 뭔가를 해서 시디에 있는 방대한 사진들을 옮겨와야 하는데 너무 귀찮다. 태풍이 오면 바닷가에 나가서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대부분 위험해서 안 된다고 하는데 사실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 만약 카메라에 망원렌즈가 달려있다면 그저 어딘가에 몸을 웅크린 채 줌으로 주욱 당겨서 찍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


오히려 태풍이 오면 건물 주위가 위험하다. 간판이 대역죄인처럼 춤을 추듯 마구 날아다니기 때문이다. 테트라포드는 어지간한 태풍에는 끄덕하지 않기 때문에 테트라포드에 부딪힌 파도는 온몸으로 부서져 엄청난 포말이 된다.


예전에는 사진을 하는 선배들과 같이 나와서 전부 스나이퍼처럼 파도가 치면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댔다. 그 와중에도 나는 렌즈찰탁식이 아닌 그저 똑딱이나 폰으로 틱틱 찍었다. 그래서 렌즈에 줌 기능이 없기 때문에 피사체를 크게 담으려면 내가 피사체 가까이 가야 한다.


이 날은 태풍 18호 차바가 온 날이다. 카메라는 없고 폰만 가지고 있었다. 몇 년 만에 오는 태풍 치고는 바람이 엄청나다. 소형급 태풍이라고 하지만 시간당 100밀리미터의 비를 퍼붓고 있다.


차바 이전, 매년 태풍이 오면 바다로 나가서 사진을 찍었다. 평소에 보지 못하는 광경을 바다와 하늘은 만들어낸다. 바람을 맞으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좀 우습지만 굉장히 아름답다고 느낀다. 파도의 파고를 보면 마치 바닷속 포세이돈의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무실에 앉아있거나 관심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나처럼 게으르고 모든 걸 귀찮아하는 사람에게 태풍은 기묘한 기류를 형성한다.


차 문을 열어 놓으면 차 문이 꺾일 것 같고 차 안으로 비바람이 한꺼번에 우악스럽게 밀려올 것만 같다. 앞으로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불었다. 오직 태풍만이 이런 바람을 만들어낸다. 비가 위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당연한 법칙도 태풍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술하게 달아놓은 간판은 어김없이 뱅그르르 도로를 굴러다닌다. 뭣도 모르고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온통 공포 영화의 화면 속 엑스트라 같은 몰골로 바뀐다. 그렇지만, 역시, 무엇보다 바다의 모습이 눈에 가장 들어왔다. 거부할 수 없는 이 기분. 바다는 파도의 포말을 거침없이 뱉어내며 포효한다. 고오오오오옹하며 거대하게 울부짖었다.


나는 이 모습에 도취되었다. 태풍이 노래를 부른다. 그래 ‘태풍의 노래’를 적어보자. 태풍을 좋아한 한 소년이 태풍의 노래에 청력을 빼앗겨 버리지만 매년 오는 태풍의 소리만은 들을 수 있는 이야기.


차바가 빠르게 동해상으로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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