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 감는 새를 꺼내서 이렇게 사진을 찍으니 꼭 마크 로스코 그림 같았다.  


마우스로 마크 로스코의 그림 몇 개를 오마주 했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 형태는 없다. 형태가 아닌데 형태가 있다.


그건 바로 풍부한 색감이다.


흘러넘치는 색감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새 매료되어 초현실 세계에 빠져들고 만다.


글을 쓴다면 이런 초현실을 경험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발끝부터 지우개로 지우듯 어둠 속에 조금씩 내 몸이 융해되어 사라지는 기쁨을 느끼며 풍부하고 아름다운 색감으로 나는 남는다.


이처럼 풍부함이 가득한 색감도 사라지고 만다.


따스하면서도 늙어가는 햇살이 아련하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젖어드는 것이다.


그렇게 형태는 사라지고 명상만이 남는다.


태엽 감는 새는 형태는 없지만 형태를 이룬다.


경험으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터프한 세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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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집의 초딩이 이무진의 신호등 노래를 제법 이무진스럽게 부르고 있다. 이무진의 그 특유의 음색을 비슷하게 따라 불렀다. 듣고 있으니 아니 참 잘 따라 부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딩들에게 이무진의 신호등은 인기 노래라고 한다. 노래도 좋다. 목소리도 좋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다. 노래는 자고로 그래야 한다. 가사도 참 좋다.


건반처럼 생긴 도로 위 수많은 동그라미들 모두가 멈췄다 굴렀다 하는 모습이 정말 우리 일상을 잘 보여준다. 붉은색과 푸른색 그 사이의 짧은 시간 속에는 그간 인간이 살아온 긴 시간이 들어가 있는 것만 같다.


라디오를 매일 들으니까 이무진의 노래들이 주룩주룩 나온다. 가을 타나 봐, 한영애의 누구 없소 등 이곳저곳에서 거의 매일 들을 수 있다. 대단하다.


이무진을 보면, 이무진의 노래를 들으면 예전의 장재인이 떠오른다. 장재인도 특유의 음색과 싱어송라이트 같은 음악성과 무엇보다 노래를 아주 잘 불러 나오자마자 수면 그 위로 빵 떠버렸다. 장재인은 지금도 꾸준하게 공연으로 활동을 하고 있지만 뭐랄까 사람들의 시선 밖으로 나가버렸다. 요즘은 미술전시회도 하는 것 같고, 그간 남자 문제도 있고, 그래서 어쩐지 분위기가 달라졌지만 일반적인 대중은 장재인을 거의 잊어버린 것처럼 되었다.


그건 김예림도 그렇다. 물론 꾸준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근래에는 림킴으로 이름을 바꾸고 음악 스타일이 확 달라져서 활동을 하지만 역시 찐팬들이 아니고서는 대중은 받아들이기 꽤 힘든 음악과 스타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거리가 멀어졌다.


이들이 대중의 지대한 관심 밖에서 활동하며 자기 하고 싶은 예술을 하는 것에 만족하면 괜찮지만 소속사와 이해관계 때문인지 어떤지 몰라도 수순은 복면가왕을 한 번씩 거치게 된다. 그 짝에 몸을 담고 있지 않는 한 어떤 이해관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무진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 단물을 빨아먹듯 물 빠지고 나면 대로에서 벗어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들은 대부분 경쟁을 통해서 음악성을 인정받은 아티스트다. 발탁이 되어서 연습생활을 거쳐 가수로 데뷔하는 이들과는 좀 다르다. 아티스트는 말 그대로 직접 작사 작곡을 하여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멘토들, 이미 유명한 프로듀서들은 그런 점들을 높이 사고 또 언론으로 노출을 시킨다. 굉장한 신인이다, 엄청난 실력을 가졌다. 같은 말들을 많이 한다. 그래서 음악 씬에서, 아니 대중의 눈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꾸준하게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말들을 한다. 그리고 대중도 이런 아티스트의 면모를 갖춘 신인들을 좋아하며 그들이 꾸준하게 음악을 만들어서 직접 부르기를 내심 기대를 하고 있다. 마치 그래야 한다는 분위기를 가진다.


좀 벗어난 얘기로 마돈나를 보면 철저하게 타인의 곡을 받아서 노래를 부른다. 작곡된 곡을 받아서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마돈나는 타인의 곡이지만 자신이 소화를 할 수 있고 곡이 좋으면 소화하는 자세를 취했다. 자신의 곡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게 힘들 수 있으나 마돈나는 아마도 그걸 극복한 것 같다. 마돈나는 지금도 노래를 발표하면 그 노래는 톱을 차지한다.


예전 마돈나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를 두고 브리트니와 키스를 하며 마치 브리트니가 나의 후계자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 브리트니와 아길레라는 우리나라로 친다면 에스엠 뽀뽀뽀 같은, 디즈니 채널에서 꼬꼬마 때부터 같이 연예인 활동을 해왔다. 그 사이에는 저스틴 팀버레이크도 있다. 그러다가 커서 다 가수가 되었는데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철저하게 싱어송 라이트 길을 걸었다. 폭발적인 성량을 살려 자신의 곡으로 대중을 맞이했고 브리트니는 마돈나처럼 타인의 곡을 받아서 노래를 불렀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를 유명하게 만든 노래가 뷰티플인데 그 노래는 린다 페리의 자전적인 곡을 받아서 부른 곡이다. 린다 페리는 포 넌 블론즈의 그녀다. 벗어난 얘기였지만 꼭 싱어송 라이터가 마치 모든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중심에 있는 것 같은 분위기는 별로다. 왜냐하면 대중은 싱어송 라이터도 좋아하지만 그저 대중가수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현장에서 지속성을 가진다는 건 무척이나 힘들다는 건 안다. 좀 더 넓게 보면 우리처럼 일반인들도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죽을 만큼 있는 힘을 다해서 버티고 있다. 하물며 예술의 세계에서는 더 힘이 들겠지.


서서히 오르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산 정상으로 케이블카를 타고 빨리 오른다면 그 자리를 감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 짝에서 관리를 하는 사람들이 자본회수에 눈이 돌아가 있다면 이무진도 어쩌면 다음을 준비한다며 곡을 쓰러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러나저러나 이무진의 곡들은 지금도 흘러나오고 있고, 이무진을 보면 장재인이 떠오른다. 이런 나의 생각이 모두 기우였으면 좋겠다. 모두 후회 없는 예술 활동으로 자신도, 그리고 대중도 사로잡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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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0-09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고 옆집 초딩님 노래좀, 들어보고 싶네요. 10세 언저리의 아이가 얼마나 이무진스럽게 부를지^^ 좋아하는 노래인데 교관님은 노래하나로 이런 멋진 글을 뽑아내시네요. ^^

교관 2021-10-10 11:56   좋아요 0 | URL
요즘 초딩들은, 아니 유딩들마저 동요를 부르지는 않아요 ㅋㅋㅋ 전부 트롯이나 가요를 열심히 부르고 있네요 :(
 

백신을 맞고 심한 운동을 하지 말라고 해서 맞은 그날은 좀 걷고 그다음 날부터는 평소대로 죽 달렸다. 2021년에도 착살하게 달렸다. 백신 맞은 그날 걷는 정도를 친다면 올해는 2월 구정에 이틀을 빼고 다 달렸다.


꾸준하게 달린 것이다. 하루키는 하루에 10킬로씩 달린 것에 비한다면 나는 6킬로에서 7킬로 정도를 달렸다. 그런데도 보통 2시간 정도 걸린다. 이유는 정해놓은 코스에 계단이나 오르막길, 산쓰장 같은 곳을 넣어서 그곳에서 근력 운동을 40분 정도 하기 때문이다.


근력운동을 하던, 조깅을 하던 시작할 때와 끝날 때는 달라진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팔 굽혀 펴기를 할 때에는 더 이상 못 하겠다 싶을 때 몇 개를 더 하고, 마지막 코스에 오르막길을 오를 때는 다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파도처럼 몰려올 때 더 이를 앙 다문다.


이런 고통은 기분이 상쾌하다. 기분 좋은 고통이다. 그리고 달리기가 끝났을 때는 모든 걸 다 털어 내버린 듯한 상쾌함이 거기에 남아돈다. 그래서 달리기 전까지는 달리기 싫은 이유 99가지가 나를 붙잡지만 이 즐거운 고통 뒤에 따라오는 상쾌함을 느끼는 이유 1가지 때문에 진지하게 달리게 된다.


매일 ‘착실하게’ 달리다 보면 ‘진지하게’ 달리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스러운 표정이 비교적 평안한 얼굴로 바뀌게 된다. 이는 생활 전반에 걸쳐 있는 태도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 특히 의자에 엉덩이를 오래 붙이고 작업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그렇다.


한 개인에 있어서 매일 조깅을 하는 것은 나쁘지는 않지만 흔해빠진 얘기잖아,라고 할 수 있지만 흔해빠진 이야기가 모여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스토리가 되기도 한다. 오징어 게임처럼.


쓸데없을 수 있으나 쓸모없지 않은 흔해빠진 우리들만의 이야기를 오늘도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 간다는 건, 마지막까지 소명을 다하는 일광의 흔적과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밤의 시작이 마주하면 코스모스 오렌지빛이 대기에 물감을 쏟은 것처럼 퍼지는 모습을 보며 달린다는 건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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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검은 버섯을 보니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이 생각난다. 음식은 인간 생존에 밀접하게 닿아있고 거기서 사람들은 몽상을 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성취감을 느끼기도 한다.


여림 시인은 시만 쓰다가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생계가 아닌 생존에 부딪히면서 하루를 견디다가 죽고 말았다. 그의 찬란한 시들을 친구인 시인이자 대학 교수인 ###이 여림 시인의 시들을 묶어서 시집으로 출판을 했다.


코로나 이전에는 마스크를 쓰는 것은 미세먼지 때문이었다. 미세먼지는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지금 내가 타인에게 받은 상처는 내가 누군가에게 준 상처보다 덜 하기 때문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글을 신형철의 글에서 본 것 같다. 신형철의 평론을 읽으면 평론도 문학이 된다는 것을 느낀다. 신형철 이전에 먼저 평론이 문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람이 있었다.


89년 문지에서 나온 ‘입 속의 검은 잎’라는 시집이 있다. 바로 기형도의 시집이다. 이 시집의 제목은 기형도가 지은 것이 아니다. 다 알겠지만 기형도는 자신이 적은 시를 아기처럼 안고 출판의 길로 가던 도중 제목도 짓지 못하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기형도의 이 시집의 제목은 문지에서 활동하는 평론가 김현 선생이 지었다. 이 김현 평론가의 평론을 듣던 80년대 대학생들은 딱딱할 줄로만 알았던 평론이 문학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기형도가 파고다극장인가 종로의 심야 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을 당시 김현 평론가가 기형도의 가방을 보니 시집을 내기 위한 시들이 있었다. 그때 그 시들을 보고 김현 선생이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제목을 붙여 시집을 출간했다.


잎은 혀를 말하며 그 혀는 이미 검게 되었고 그 입은 죽은 자의 입속을 말하는 것이다. 기형도와 기형도의 시를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와 그의 시를 말하자면,


두터운 모호함, 이성의 손길로도 잡히지 않는 무의식의 신호, 예측 불가의 미지를 향한 구애, 두려움의 대상인 낯선 것들에 대한 애정, 우리는 어둠 속 미아로 헤매는 존재, 죽음과 상실을 미치도록 탐닉했던 시인과 시였다. 유난히 기형도의 젊은 죽음은 비극적이다.


기형도의 시는 기형도의 몽상과 심연에서 나온다. 고 생각이 든다. 김현 평론가가 이런 기형도의 내면을 들어가 본 것처럼 알고 제목을 ‘입 속의 검은 잎’으로 지은 것은 김현 평론가 역시 기형도와 같은 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기형도의 시가 세상에 나온 그다음 해 김현 평론가도 기형도를 따라갔다. 김현 선생은 기형도를 무척 좋아했다.


기형도의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읽으면 인간은 사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존재 같은 기분이 든다.


인간은 어떤 극단적인 일을 당하지만 조금 지나면 허기짐을 참지 못하고 배를 채우는 것에 달려드는 존재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망각으로 인해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다는, 피해를 주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특히 요즘 뉴스를 보면 그런 사람들이 잔뜩 나온다. 우리는 대체로 우주의 중심은 ‘나’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강하다.


‘나’가 중심이 아니라 ‘우리’라고 느낄 수 있게 시는 그 길을 인도해준다. 기형도의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읽으면서 어디에 와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갈 곳이 없음에도 버스에는 계속 사람들이 올라타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하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작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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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0-07 14: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얼마전 치과 치료를 받으며 혀에 대한 생각을 새삼 다시 하게 되었어요.
제 혀가 제 말을 안 들으니 정말 난감했지요. 기형도의 시를 생각하며...
페이퍼 잘 읽고 갑니다.

교관 2021-10-08 13:0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전복 같은 이런 해산물을 보면 백석의 시가 생각난다. 백석의 시가 사람들에게 칭송받고 그의 시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 중에는 백석의 시 속에는 미각이 살아있어서 이기도 하다. 백석의 시에는 많은 향토 음식이 나오며 그 향토 음식은 어머니의 추억이기도 하다.


백석의 시에는 오감이 다 열려있다. 백석의 시 ‘통영 1‘에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라는 문구가 나온다. ‘조개가 울을’이라는 말은, 지금은 그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지만 백석이 있던 시기의 바다와 바닷가에서 조개가 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조개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유월이 되면 달과 지구의 거리가 일 년 중에 가장 가까워진다. 그렇게 되면 조수간만의 차라든가, 바다 수면의 높낮이가 달라진다. 유월에 해가 저물어 바닷물이 빠져나가고 드러나는 바위에 수 천, 수 만 마리의 따개비를 비롯한 조개가 붙어 있다. 이들이 숨을 쉬기 위해 아가리를 쩍 벌리는데 그 수가 어마어마하니 입이 벌어지는 소리가 마치 조개가 월광을 받아 우는 소리처럼 백석은 표현했다.


저런 표현을 보면 백석은 영어, 러시아어, 일어 같은 언어에도 능통했지만 과학적으로도 비상한 사람이었다. 현재는 그런 조개의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유는 사람들이 전부 다 따먹었기 때문이다. 요리사 고 임지호는 자연에서 늘 식재료를 구하지만 그는 자연에서 조금 신세를 진다는 마음을 가지고 소량으로 채취를 한다. 배부르게 먹기보다 허기를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먹기를 바랐다.


사람은 자연에게 늘 미안한 마음으로 지내야 하는데 이미 인간의 마음은 욕심으로 충만해졌다.


전복은 양식이 가능해져 자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가격도 예전만큼 비싸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 전복을 먹지는 않는다. 뭐든 과하면 득 보다 실이 많다. 육류의 남용으로 지구촌 인간들의 생명에 견제가 들어오게 되었다. 전복 역시 어디에 곁들여 먹어도 맛있다.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하고 라면을 끓여 먹을 때 전복을 넣으면 라면 맛이 배가 된다.


전복장은 전복을 홀라당 먹은 후에 남은 양념장에 밥을 비벼 먹는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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