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대표하는 여럿 중에 호쿠사이가 있다. 호쿠사이는 또 드뷔시와도 접점이 있다. 이 이야기로 접어들려면 예전의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잠깐 해야지 하며 시작했는데 그만 8개월인가, 9개월인가를 해버렸다. 야간에 일을 했는데 친구 몇이 와서 밤새도록 게임을 했다. 덕분에 월급을 못 받는 달도 있었는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주인에게 친구들은 밤새도록 무료로 게임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고 주인은 오케이 했다. 피시방은 대학교 앞이라 방학이면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밤새도록 피시방에서 일을 하니 피곤해서 새벽에 골방에서 잠이 드는 경우가 있었다. 나에게는 독일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비교적 늦게 피아노 공부에 뛰어들어 독일로 유학길에 올랐다. 새벽에 냄새나는 골방에서 어렵게 잠이 들면 그녀에게 전화가 온다. 으 하는 좀비 소리를 내며 휴대전화를 귀에 올려놓으면, 오늘 피아노를 치다가 손톱이 빠졌다느니, 독일 아줌마는 어쩌니, 레슨을 마치고 접시를 닦는데 힘들다느니, 같은 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쏟아내는 그녀였지만 이쪽에서는 몽롱한 새벽에 어렵게 잠이 들다 깨니 어쩔 수 없이 좀비처럼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다닌 쾰른 음대는 학비가 없다. 대신 입학은 바늘구멍 통과하기고 졸업은 더 혹독하다. 넉넉한 친구들은 그저 피아노만 열심히 치면 되지만 그녀는 어려운 유학생이라 생활비에 집세까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했다. 그녀는 절박했고 필사적으로 건반을 두드렸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어서 새벽에 잠결에 전화를 받아도 잠 오니 끊으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잠과 졸음의 경계에서 가물가물했다. 그녀는 베토벤에 심취해있었다. 베토벤을 다 독파하려고 연습에 또 연습이었다. 그녀는 베토벤, 베를리오즈, 슈베르트의 피아노 연주는 잘했지만 음악가들의 이야기는 아직 잘 모를 때였다. 나는 그녀에게 음악가들의 생활고? 같은 이야기를 주렁주렁해주었다.


바흐는 말이야 닥치는 대로 음악을 만들어야 했지. 자신이 만들고 싶은 곡이 있었지만 교회의 음악을 만들어야만 했다고. 성가대도 가르쳐야 했고, 예배 악곡도 작곡해야 했지. 그러다 보니 궁정 예배당의 관현악단의 악장이 되었고 거기에 맞는 음악도 작곡해야 했지. 지가 하고 싶은 음악이 있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바흐의 자식이 몇 명이나 되었을까? 자그마치 스무 명이나 되었어. 스무 명을 먹여 살리려니까 나 좋아라, 하며 원하는 음악만 작곡해서는 살 수가 없었던 거지. 닥치는 대로 작곡을 해야 그 많은 자식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고. 그러다 보니 그 유명한 칸타타도 만들어냈고 말이야. 그러니 너무 힘들어도 어떻게든 견뎌 봐. 독일에 가기 전에도 이런 말을 해주면 그녀는 밀사의 눈초리로 꽤나 집중해서 듣곤 했다. 하지만 그녀의 고단한 일상을 듣기엔 새벽은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너 내 말 듣고 있어?


그래, 듣고 있다고. 베토벤이 말이야 한 번은 비가 오고 난 후 일층의 천장으로 물이 계속 떨어져서 일층에 살고 있는 주인이 화가 난 거야. 그래서 2층으로 올라가 보니 피아노를 치다가 손가락에 통증이 오면 통에 떨어진 빗물에 손을 넣어 통증을 식혀가면서 노력을 하고 있어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고.


그녀에게 한 번은 드뷔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겨울이었다. 날이 너무 추워서 손을 꼼지락거리는 것도 싫은 날, 골방에서 잠이 들어 있는데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주인집 아주머니가 먹으라고 준 조각 케이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프랑스 사조에 대해서는 시큰둥했는데 드뷔시의 아라베스크에 대해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하는데, 너 호쿠사이라고 알아?라고 물으니 모른다고 했다. 드뷔시는 몹시 오래전 사람 같지만 1910년대까지 살다 죽었다.


호쿠사이의 그림 중에 파도라는 그림이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유명한 그림이다. 호쿠사이의 파도는 각종 굿즈와 게임 캐릭터로도 사용이 된다. 문신으로 새기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 그림을 드뷔시가 보게 되었다. 드뷔시는 살아생전 바다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호쿠사이의 파도 그림을 보고 그만 마음을 빼앗겨 버리고 만다. 드뷔시는 호쿠사이의 파도 그림을 보고 20분이 넘는 ‘라메르’라는 곡을 만든다.

https://youtu.be/SgSNgzA37To 


라메르를 들어보면 정말 바다 위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그러다가 클라이맥스에는 파도가 휘몰아치는 것처럼 연주가 들린다. 하지만 가장 기묘한 건 클래식으로 연주를 하는데 마치 일. 본.이라는 풍의 기저가 깔린 느낌이 온몸을 감싼다. 이게 정말 신기하다. 그런 것을 보면 드뷔시는 정말 천재가 아닐까. 드뷔시는 여성 편력이 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만난 여자 중에는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는다며 총을 들고 자살을 하려고 한 여성도 있다. 드뷔시의 곡 중에는 영화 ‘판의 미로’에 나오는 판, 블란서어로 포느가 나오는 봄날의 나른한 곡도 있고, 자신의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장난기 가득한 곡 ‘골리워크의 케잌워크’도 있다.


호쿠사이는 춘화를 그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파도만큼 유명한 그림이 문어가 여성의 몸에 밀착해있는 그림이다. 문어의 촉수가 여성을 건드리는 이 그림 이후 일본은 수많은 아류작들이 탄생했다.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촉수가 육체를 탐하는 이 형태는 세계로 뻗아 나가기 시작했다.

중국도 춘화가 있고 한국에도 춘화가 있다. 비교해서 보면 특징이 뚜렷해서 재미가 있다. 탐미에 있어서는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대단한 관심거리였다. 우리나라에도 춘화가 성행을 했다. 풍속화를 제대로 그렸던 신윤복의 춘화가 유명하다. 신윤복의 춘화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르다. 좀 더 은유적이고 해학적이다. 신윤복의 ‘사시장춘’이라는 그림이 있다. 바로 이 그림이다.

그 사시장춘이 춘화로 분류되고 있다. 누군가는 어딜 봐서 이게 춘화야? 도대체 어디가 야한거야?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신윤복의 사시장춘은 몹시 은유적이다. 사시장춘은 그림 한 장으로 여러 이야기가 떠오른다. 신윤복은 사시장춘을 통해서 봄날의 춘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림을 보면 일본이나 중국처럼 직설적인 것은 없으나 천천히 그림을 보면 또 직설이게 보이는 은유가 가득하다. 그걸 찾아서 보는 재미가 있다. 여러분도 과연 찾아내셨습니까.


독일에서 피아노를 공부했던 그녀는 두 딸과 함께 지금은 부산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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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 하면 말이에요.라고 그녀는 내 눈을 보면서 말한다. 추운 겨울 아침에, 싫구나, 일어나고 싶지 않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커피 향기와, 햄에그를 굽는 지글거리는 냄새와 토스터 작동이 멈추며 내는 탁 소리에 그만 참을 수가 없어서, 과감하게 침대를 박차고 나오는 일이에요.

하루키의 소설 ‘댄스 댄스 댄스’를 보면 이렇게 초반에 시작을 한다. 맛있는 냄새에 더 자길 포기하고 이불을 박차고 나오는, 그 전경이 눈앞에 홀로그램이 되어 나타나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아침에, 겨울의 아침에 눈뜨자마자 몸을 일으켜 바로 맛있는 떡국을 먹는 것만큼 행복한 것은 없다. 봉 감독의 영화 ‘괴물’ 마지막 장면이 그렇다. 현서를 잃은 대신 세주를 얻은 강두는 하얗게 눈 덮인 한강변의 아침에 밥상을 차리고 세주를 깨운다. 세주는 쿨쿨 자다가 그대로 일어나서 맛있게 밥을 먹는다. 세주가 하수구 같은 곳을 돌며 그토록 원하던 것이었다. 이 장면은 세대를 관통해서 보는 이들에게 마지막까지 각인시킨다.


겨울의 일요일, 잠은 더 자고 싶은데, 일어나기는 싫은데 맛있는 떡국의 냄새가 잠의 세계로 파고든다. 엄마가 밥 먹어라고 말하며 아빠가 나의 등을 슬슬 문지르며 몸을 일으킨다. 바로 일어나서 뜨거운 떡국을 퍼 먹었던 기억. 단칸방이어서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기억은 겨울이 되면 주기적으로 오는 손님처럼 똑똑 노크를 하며 찾아온다. 마치 세주가 되어서 눈 뜨자마자 눈곱도 떼지 않고 따뜻한 방 안에 앉아서 밥을 먹었던 기억.


아마 봉 감독도 그런 기억이 있어서 그 장면을 넣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디자인을 좋아하는데, 걸어 다니며 간판 디자인을 보는 것 때문에 일행에게 핀잔을 들은 경우도 있고, 책 표지 디자인도 꽤나 유심히 보는 편이다. 올리는 소설의 표지도 마우스로 다 디자인을 한 것이다. 책 표지 하면 칩 키드의 디자인을 좋아한다. 칩 키드는 너무나 유명하기에 간결하면서 눈을 확 사로잡는 디자인을 해 버린다. 미래의 세상은 디자인의 세계가 되지 않을까.

사진: 펜톤미술학원 본원 공식 블로그 발췌


간판이나 과자의 글씨체도 전부 디자인인데 특히 좋아하는 글씨체가 ‘코카 콜라’다. 병에 딱 한글로 ‘코, 카, 콜, 라’라고 박힌 그 까만 글씨체의 디자인이 아주 좋다. 요즘에야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지만 우리에겐 친숙한 코카콜라 이 글씨체 디자인은 68년에 등록이 되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계속 이 디자인의 코카콜라로 쓰이고 있다.

이 글씨체 디자인을 만든 디자이너가 2017년에 작고하신 봉상균 화가다. 바로 봉 감독의 아버지다. 1세대 그래픽 디자이너 봉상균. 검색을 하면 그의 다양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봉 감독의 외할아버지도 시대의 이름을 남긴 소설가였다. 그는 김해경(이상), 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 활동을 했고 그의 가장 유명한 소설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었다.


봉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은 외롭고 힘든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아카데미에서도 쾌거를 이뤄낼 수 있었다. 봉 감독은 아마도 아버지 봉상균 화가의 작품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꿈을 가지게 되었나 보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맛있게 겨울의 아침을 후루룩 같이 먹었던 추억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추억은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내내 기억의 저편에 붙어서 겨울이 오면 손님처럼 찾아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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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좋은 그것은 체강이 강하고 하얀,

튼튼한 뱀이 되어 좁은 마음속의 어딘가에 똬리를 틀었다.

그리고 설원처럼 순수하고 사랑의 맛을 알아버린 청춘처럼 노골적으로 속도를 유지하며 영역을 넓혀갔다.


소설 렛 미인의 문구를 빌려 생태교란종 베스를 한 번 표현해봤다. 베스는 잡아 없애야 하는 물고기로 인식되고 있다. 적어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렇다.


그동안 늘 그렇게 알고 있던 베스,

그런데 정말 베스는 나쁜 어종일까.


렛 미인은 추운 나라에 나타난 뱀파이어의 이야기로- 스웨덴 영화로도, 그리고 할리우드 리메이크작도 성공했을 정도로 영화가 좋았다. 그간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뱀파이어의 내용이 아니었다. 원작 소설은 영화보다 훨씬 어둡고 깊은 내용이었다. 소설은 너무 하얗고 시리고 아픈데 그 아픔을 봐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정말 좋다.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 오른손으로 들어와 버린 기생수 ‘오른쪽이’는 말한다. 기생 생물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기생 생물 입장에서는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사람일 뿐이라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몹시 이상하고 무서울지 몰라도 기생 생물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생태인 샘이다. 먹을 수 있는 것만 먹기 때문에다.


그런데 기생 생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너무 이상한 것이다. 인간은 단지 살기 위해서 인간을 죽이지도 않는다. 그저 재미로 인간을 죽이기도 한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인간이 인간을 가지고 놀고, 그러다 싫증 나면 죽이기도 한다. 가장 비도덕적이고 생존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 기생 생물의 입장에서 보는 인간은 지구에서 가장 잘못된 생활방식으로 지내고 있는 것이다.


차인표가 쓴 소설(차인표는 두 권의 장편소설을 펴냈다. 나는 그 두 권을 다 읽었는데 정말 재미있다. 글을 아주 잘 쓴다. 그중에 한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오늘 예보’를 읽어보면, 우리들 인간은 살아가면서 뱀에게 물려 본 적이 없음에도 그저 뱀이니까, 뱀의 모습이니까, 뱀을 보면 죽이려 든다.

고단아 뱀 좋아하니

뱀 먹는 거?

아니 그냥 뱀 좋아하냐고

아니 싫어하는데

혹시 뱀한테 물린 적 있냐?

아니 없는데

그런데 왜 싫어해?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냥 싫지?

남들이 싫다고 하니까 무조건 싫지?




영화 렛 미인에서 이엘리는 오스카에게 내가 왜 인간의 피를 마셔야 하는지, 나의 모습이 잠시 동안만 되어 보라고 말을 한다, 렛 미인을 봤다면 그 장면이 마음을 찌릿하게 한다. 이엘리는 그저 장난으로 죽고 싶을 정도로 오스카를 괴롭히는 애들을 멸살시킨다.

2000년도 중반에 미국의 강으로 흘러들어 간 가물치는 미국에서 괴물 어종으로 법으로 정해놓아 살아있는 가물치는 거래가 불가능하며 적발되면 법적 조치도 심하게 받는다. 가물치는 미국의 토종 어종에게 피해를 주며 심지어 육지까지 기어 올라와 아이들도 물어 버린다는 공포가 가득해서 미국인들에게 가물치는 그야말로 지독한 외래어종으로 낙인찍혔다.


우리나라에서 가물치는 인간에게 맛과 영양으로 도움을 주는 어종이지만 미국에서는 퇴치되어야 할 어종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가물치가 미국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것이라 여기고 가물치를 인정했다.


베스가 토종어종을 먹는 것은 베스 입장에서는 그것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 베스는 결국 우리가 우리의 가슴으로 끌고 온 것이다. 베스가 나쁜 게 아니라 그 베스를 무분별하게 들고 온 인간들이 나쁜 것이다. 이미 베스를 낚는 낚시꾼들은 베스가 퇴치되어야 할 어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줄여가야 하겠지만 인식의 문제다. 베스가 정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쁜 어종은 아니다.


매트릭스 다들 재미있게 보셨는지. 매트릭스는 1편과 2편 사이에 애니 매트릭스가 나왔다. 여러 단편이 매트릭스 세계관을 말해주는데 그중에 한 편인 '두 번째 르네상스'가 매트릭스 세계관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https://youtu.be/XbOWalLcHR4

유튜브 강남뽀대지존 - 애니 매트릭스 - Supermoves


애니 메트릭스 ‘두 번째 르네상스’ 속 세상은 2090년이고 인간들은 더 이상 힘들게 일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인간들은 인간과 비슷한 휴먼 안드로이드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는 절대 불평, 불만을 해서도 안 되고 하지도 않았다. 안드로이드가 태어난 이유는 바로 인간이 편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로봇인 안드로이드는 인류의 편리한 도구, 그리고 가장 말을 잘 듣는 충직한 노예였다.


그런데 어느 날 B1-66ER라 불리는 로봇이 주인을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그 로봇의 살해 동기는 아주 단순하게 살고 싶어서, 로봇인 자신이 죽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날 로봇은 폐기될 운명이었고 로봇은 살기 위해서 주인을 죽인 것이다. 안드로이드에게도 감정이라는 게 생긴 것에 대한 놀라운 발견이었지만 인간을 죽인 로봇에겐 자신을 변호할 기회나 권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B1-66ER에겐 그렇게 사형선고, 즉 페기처분이 내려졌고 B1-66ER 로봇은 ‘죽고 싶지 않아’라는 말을 남긴 채 폐기된다. B1-66ER가 남긴 마지막 말은 세상에 남은 로봇들에게 어떤 동기부여가 되었다. 마음속에 불씨를 일으켰다.


인류는 B1-66ER 로봇과 비슷한 불량품은 전부 폐기하기로 결정하는데 이에 반발하는 안드로이드들과 자유 옹호론자들이 집단적으로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시위는 점점 불어나서 엄청난 규모의 안드로이드들이 자신의 로봇 권리를 주장했지만 인간들에 의해 무참하게 폐기 처분되었다. 탱크로 휴먼 안드로이드들을 짓밟고 지나갔고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여자 안드로이드들의 옷을 벗기고 그대로 무참히 죽이고 만다. 안드로이드들에 대한 혐오는 극대화해져 갔다.


안드로이드들은 인간의 사회에서 추방당해서 인류문명의 발생지였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제로원이라는 기계 세계를 건설하게 된다. 제로원이란 0과 1로 이루어진 세계. 즉 이진법의 세계, 기계들의 세계를 말한다. 제로원에서는 더욱 정밀하고 신속하게 물품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고 로봇들은 고도화된 기술력으로 인간에게 수출을 했다. 하지만 인간에게서 수입은 극도로 제한했다. 안드로이드, 제로원의 세계에서는 필요 없기 때문이었다. 제로원에서 만든 모든 제품들은 뛰어난 품질에 합리적인 가격으로 인간들의 시장에 공급되었다. 그리고 인류의 시장 경제의 패권이 제로원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이에 인류는 해상을 봉쇄하고 경제제재를 가해 제로원을 견제하고 고립시키려 했다. 제로원은 인간과 공존하기를 바랐다. 이에 제로원에서는 인간을 닮은,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안드로이드 사절단을 인간에게 보낸다. 하지만 인간은 안드로이드 특사를 거절하고 기계와 전쟁을 선포한다. 인류는 제로원에 핵을 퍼붓지만 기계들을 막을 수 없었다. 인류와 공존할 수 없다 여긴 기계들은 중동을 기점으로 세계 각지로 인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인류의 영토는 기계들에 의해 점점 점령당한다. 이에 인류는 기계들의 주 에너지원인 태양광을 완전히 차단해버린다. 암흑 폭풍 직후 잠시 인류는 전세를 역전시켰다.


신형 전자펄스와 엘에스디 같은 약에 취해 두려움이 사라진 군인들은 무력해진 기계들을 공격하며 승리의 기쁨에 젖어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계는 핵융합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전에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던 기계들은 핵융합 이후 완전하게 오직 기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그 기계는 오로지 인간을 죽이기 위해 발전한 형태가 되었고 매트릭스에 나오는 꼬리가 달린 그 기계가 된다. 그렇게 기계는 인류에게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기계들의 핵융합 에너지는 영원하지 않았다. 기계들은 다른 에너지원을 찾아야 했다.


그게 바로 인간의 몸에서 발생하는 열 에너지였다. 인간은 감정 변이에 따라 열에너지와 전기에너지를 발생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기계는 두 번째로 UN을 찾아 특사를 보낸다. 첫 번째에 비해 두 번째 기계의 특사는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바로 기계 그 자체의 모습으로 온 것이다. “너희들의 육체는 무가치한 껍데기다. 육신을 바치면 신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요구다.” 그리고 기계는 인간을 배양하기 시작하고 인간은 기계에 의해 '재배'되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기계가 만든 가상공간 매트릭스 안에서 꿈을 꾸며 죽을 때까지 기계의 에너지원이 되며 살아간다. 이것이 매트릭스의 세계가 펼치지는 시작점이다. 바로 인간의 오류가 어떤 희생을 감당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보여준다. 그저 영화 속 이야기?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일까?


별개의 이야기지만 지금 인공지능은 어디까지 인간 생활에 들어와 있을까. 지금 현재 세계 최고의 기업인 아마존은 인공지능 채용 시스템으로 지원서를 검토한다. 전 세계에서 어마어마하게 지원서를 넣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일이 검토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100개의 지원서 중에 5개를 추려서 추천한다고 한다. 인공지능의 상위 5개의 추천서를 채용담당자가 검토를 하는 방식이다. 인공지능의 장점은 혈연, 학연, 지연을 떠나 오로지 지원자의 데이터만으로 검토한다는 점이다. 이제 대부분의 기업이 이렇게 인공지능의 기술을 빌릴 것이다.


매트릭스라는 건 데카르트가 소환한 ‘악마’라는 말이다. 전지전능한 악마가 우리가 알고 있는 알고리즘을 그렇게 알게 끔, 믿게 끔 만들어 버린 것. 1 더하기 1은 원래 3인데 그 전능한 악마가 2라고 믿게 끔 만들어 버린 세계. 그것이 데카르트가 말하는 매트릭스다. 데카르트는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아주 교활하고 전지전능한 악마가 나를 속이고 있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가능성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도대체 어떤 악마가 베스가 생태교란종으로 나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 것일까. 메트릭스 세계에서 결국 인간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인간은 멸망하고 만다.


최근 넷플의 고요의 바다를 보면 무엇이 잘못인지, 누가 잘못인지 알 수 있다. 마지막 송 박사는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절박하고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하죠. 그 선택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구요. 같은 실수는 반복할 수 없잖아요."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그게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일이며 과제다.


1월부터 생태교란종을 때려잡는다는 방송이 기획 중이다. 생태교란종이라는 명칭을 붙여 방송의 재미를 위해 '때려 잡아가며' 시청률을 올리려 한다. 정말 때려잡아야 할 주체가 누구인지, 그저 자신은 자신의 생활을 할 뿐인데 인간들에 의해 생태계 교란종이라는 낙인이 붙은 채 머리가 깨져 잡히지나 않을지 벌벌 떠는 생물을 잘못되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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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sMro6_1BqA

엽천문-천취일생. 유튜브 진이삼춘 채널



첩혈쌍웅은 제니와 아쏭의 안타까운 누아르 영화였다. 누구나 다 킬러와 형사의, 남자들의 이야기라고 소개를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사랑 이야기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실명을 한 여자 가수를 지켜주는 한 킬러의 이야기.

제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버려버린 아쏭의 아픈 이야기.

비싼 가격에 사람을 죽여 실명한 제니의 눈을 수술해 주고픈 한 남자, 아쏭의 이야기.

그리고 그를 쫓는 한 형사의 또 다른 이야기.


아쏭은 제니를 떠올리며 하모니카를 분다.

하모니카는 바이올린만큼 슬픈 영혼의 소리를 실처럼 뽑아낸다.

제니는 눈이 멀어도 계속 노래를 부른다.

자신의 노래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들릴 수 있도록.

서글프고 구슬픈 노래지만 제니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통해 나오는 노래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픔을 말한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제니.

자신의 눈을 그렇게 만든 사람을 위한 노래를.


이 이야기는 슬프고 슬픈 사랑 이야기다.

자신을 위해 노래를 부르는 제니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아쏭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사람을 죽이고 또 죽이는 것뿐.

두 사람은 너무나 가까이 있는데 찾지 못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큰 눈에

만화에서 갓 나온 듯한 표정을 짓는,

곁에 있어 줘야만 할 것 같은 제니.


박정대 시인의 '삶이라는 직업'이라는 시집에서,

예뻐서 늘 쳐다보는 달력 속의 여자가 제니 같은 여자가 아닐까.

제니는 사랑해선 안 되는 남자를 사랑하기에 오늘도 노래를 부른다.





유체 이탈자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 사랑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했으면 강이안은 자신의 잠든 육체를 벗어나 다른 이의 몸으로 들어가 사랑하는 진아를 구하려고 했을까. 그 사랑의 깊이가 바닷속만큼 깊어서 강이안은 사랑하는 이가 죽음으로 가는 걸 막아야 했다.


유체를 이탈해가면서까지 진아를 지키고 싶었던 이안을 보면 예전의 고스트가 된 샘이 떠오른다. 그렇게나 사랑하는 몰리를 두고 죽어버린 샘은 몰리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쓴다.


몰리는 크게 두 번 눈물을 흘린다. 동전이 공중 부유하여 손에 쥐어질 때 샘의 존재를 확인하고 눈물을 흘리고 마지막 샘과 헤어질 때 눈물을 흘린다.

말도 안 되는 사랑 이야기. 황당하고 당황스러운 이야기. 이상하고 또 이상하고 그저 이상한 이야기. 하지만 사랑이란 그렇다. 답답하고 미칠 것 같다가 평온하고 빡치고 애타고 죽을 것처럼 보고 싶고, 설명할 수 없이 황당한 게 사랑이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고 뚜렷한 답도 없어서 갑갑하다. 비난을 각오하고서라도, 사회에서 매장이 될지언정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모래성처럼 무너트려 버린다. 당황스럽고 이상하고 미쳤고 말도 안 되는 것이 불같은 사랑이다. 사랑 그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다.


몰리는 사랑하는 샘에게서 정말 사랑받았다는 그 느낌,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샘이 없는 이 험한 세상에서 아마도 다른 이들에 비해 잘 헤쳐가리라. 그런 몰리를 지켜주지 못해서 샘은 죽은 뒤에도 끊임없이 노력을 한다. 사랑은 노력이 필요하다. 두 사람이 마지막 헤어질 때 몰리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리고 마지막 대사가 영화를 말해준다.

사랑해 몰리, 언제나 사랑했어.

동감이야,라고 몰리는 대답 한다.


유체 이탈자의 이안과 진아도 그런 과정을 지나 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려는데 그만 죽음 직전으로 내몰리고 만다. 몰리가 샘에게 사랑받았다는 그 느낌을 이안과 진아에게서도 봤다. 영화는 분명 액션인데 내 눈에는 너무나 애틋한 사랑 이야기로 보였다.


윤재근 감독이 스토리보드와 스트립터로 참여한 영화 ‘선물’을 나는 좋아한다. 얼마 전에도 봤다. 죽어가는 아내를 두고도 공연에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줘야 하는 삼류 개그면의 처절한 이야기. 너무나 예쁜 이영애와 너무나 일반인처럼 나오는 이정재의 너무나 아픈 사랑 이야기. 나는 그래서 유체 이탈자가 액션 영화가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는, 사랑이 깊어 절대 지키고픈 한 남자의 이야기로 보였다.


그래서 오늘은 선곡은 장국영의 최애. 최고의 사랑이다.


https://youtu.be/W9jq62-MIUE



학창 시절 사진부 암실에서 선배들에게 허벅지를 난도질당하고 아픈 다리를 주무르고 있을 때 한 선배가 장국영을 들어보라며 주고 갔다. 겨우 일어나 암실 창가에 앉았다. 햇살이 창을 투과해 다리에 녹아 내려앉았다. 욱신거리는 다리 위에서 햇살에 비친 먼지들이 춤을 추었다. 앨범을 그 위에 올리고 ‘최애’를 들었다.


노래를 듣고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가 있을까 생각했다. 넋을 놓고 듣고 또 들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하얀 눈이 떠올랐고 그 속에서 빛처럼 부서지는 내 몸도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정말 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초라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나를 스쳐갔던 소중한 사람들과 소중한 시간들. 지나간 것들을 기억하고 추억한다는 건 그 순간을 눈물을 흘리며 몇 백번이나 떠올렸을까.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도 나에게는 최고의 순간이었을 그 어느 때. 그때를 기억하는 건 나에겐 찬란하고 빛나는 자산이다.


그때 맞이했던 포근한 온도와 나른한 햇살과 아카시아 꽃과 같은 향을 앞으로 만나지 못할지라도 나의 추억 속에서는 그 장소, 그 공간 그 시간이 그대로 우뚝 서서 나를 타이른다. 그리고 그곳에는 장국영이 열심히 무대 위에서 땀을 흘리며 ‘최애’를 부르고 있다. 넌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면서, 너 자체가 사랑이라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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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는 노버트슈완카우스키의 그림을 카피



사랑하는 잠자, 그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 중 ‘사랑하는 잠자’ 그 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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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집을 나서려고 했다. 오겠다던 시계공 꼽추 아가씨가 한 달이 지나도록 오지 않아서 잠자는 시계공 아가씨를 찾아 나서려고 했다. 잠자는 아가씨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은 심장의 문제가 아니라 머리가 사고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보고 싶다고 계속 생각하면 언젠가는 틀림없이 다시 만날 수 있어요.라고 말한 것이 잠자의 뇌의 한편에 곱게 쌓인 먼지처럼 머물러 있었다.


시계공 아가씨가 말한 세계의 난리가 더 깊어졌는지 크르르하는 소리가 등을 훑고 지나갔다. 잠자는 가운에서 벗어난 옷을 입고 계단을 내려왔다. 매일 한 시간씩 계단을 오르고 내려갔다. 몸의 총체적 균형을 잡고 걷는 것에 집중을 한 덕분에 이제는 계단을 잘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몸이라는 것이 적응을 하니 이렇게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고 움직인다는 것이 신기했다. 잠자가 그녀를 만나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시계공 꼽추 아가씨와 헤어지면서 그녀가 굼실굼실 입체적으로 몸을 뒤틀며 브래지어를 바로잡는 동작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고 싶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온 세상의 여러 계단을 둘이서 나란히 오르내리고 싶었다. 원하면 된다는 그녀의 말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머리에 새겨졌다.


어쩌면 누군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또는 누군가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그 누군가는 여전히 자신이겠지) 못으로 판자 몇 장으로 창문을 막아 놓은 방에서 모든 것을 치우고 그녀와 같이 잠이 들고 판자를 치운 창으로 들이치는 빈약한 햇살을 받으며 같이 일어나는 상상을 했다.


이봐 잠자, 지금 나가면 안 돼.


잠자는 자신에게 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삐걱거리는 복도의 저편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에게 말을 하는 건 누구지? 이 집에 나 말고 누가 또 있었어?


잠자는 소리 쪽으로 삐죽 나온 귀로 최대한 소리를 들으려고 확실하게 고개를 삐딱하게 돌렸다. 이제 처음 눈을 떠서 움직일 때처럼 관절과 근육의 사용이 미성숙하지 않았다. 만약 공격성을 띠고 새가 날아온다고 해도 지팡이와 쟁반 같은 것으로 방어를 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이봐 잠자, 잘 들어보라고. 나는 자네가 눈을 떴을 때부터 죽 자네를 지켜봐왔어. 자네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도 알았지.라고 복도 어딘가에서 소리는 잠자를 보고 말했다.


사랑,라고 잠자는 조용하게 말했다.


그래, 사랑 말이야. 하지만 잠자 자네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확실하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 내 말이 맞지?


소리는 음폭의 변화가 없었다. 반드시 잠자에게 무엇인가를 말해야 하겠다는 노력이 없어 보이는 동시에 소리는 반드시 잠자에게 소리를 전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누구십니까?


잠자는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류하고 복도를 걸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끼익 끼익하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 수리를 한다며 자물쇠를 들고 가버려 뻥 뚫린 문의 공백이 눈에 들어왔다.


잠자는 잠깐 만났던 그녀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브래지어라는 것을 움직여 가슴을 고정하는 굼실굼실한 동작을 떠올리니 바지의 앞섶이 부풀어 올랐다. 잠자는 다시 당황스러웠다.


당신, 머리가 좀 모자란 모양이네. 그래도 고추만은 여전히 씩씩하시고.라는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이봐, 잠자. 그래 그녀와 퍽이 하고 싶은가?


복도 저 끝에서 소리는 말했다.


그녀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퍽이 뭔지 모릅니다. 당신도 퍽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 것 같군요.


잠자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금씩 걸으며 말했다. 오른손에는 인간 잠자로서 다시 걸음을 걸을 때 도움을 받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잠자는 지팡이를 꼭 쥐었다.


당연하지, 나는 퍽이 뭔지 알고 있지. 아마 잠자 자네만 빼고 어린아이라도 퍽이 뭔지 알고 있을 거야.


저기, 부탁이 있습니다.


잠자가 말했다.


부탁이 뭐냐고 소리는 되물었다.


제가 당신 곁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 당신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잠자는 소리를 만나서 시계공 아가씨를 만나는 도움을 받기로 했다. 잠자는 소리의 정체를 몰라 두려웠지만 시계공 아가씨를 만날 수 있다면 두려움 같은 건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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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갑충이로 변해 죽었던 그레고르 잠자를 되살렸다. 하루키의 단편 집 ‘여자 없는 남자들’의 모든 이야기가 좋지만 나는 특히 이 단편 ‘사랑하는 잠자’가 너무 좋다. 갑충이로 변해서 죽어 버린 그레고르 잠자를 되살렸기 때문이다. 그래고르 잠자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었다. 아마도 카프카가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살아난, 아무것도 모르는 잠자 잎에 시계공 아가씨가 나타나지만 아가씨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끝이난다. 여러 하루키의 소설처럼 칼로 두부를 자르듯 아쉽게 끝나고 만다. 그래서 그 뒤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서 이어서 한 번 적어 보았다.


이 표지는 카프카의 ‘변신’ 초판의 표지다. 1914년인가 카프카가 표지를 만드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부탁해서 만들어진 책 표지이다. ‘변신’이라는 소설은 안 읽어본 사람도 어떤 내용인지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한 고전 명작이다. 소설이란 본디 답이 확실하게 있지 않아서 ‘대답’보다는 ‘질문’이 많아야 한다. 카프카의 ‘변신’은 어쩌면 확실한 답보다는 책을 덮고 난 후 던지는 질문이 더 많은 소설이다.​


이 ‘변신’이라는 소설을 읽은 사람 중에 제대로 읽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중에는 변신을 다시 책으로 만들어내는 출판사도 그중 하나다. 문지혁 작가도 말했지만 특히 책 표지에 벌레나 해충을 그림으로 일러스트 해놓은 카프카의 ‘변신’은 제대로 그 소설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최초 카프카의 1914년 초판 표지를 만들 때 카프카는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절대로 표지에 벌레를 그리면 안 된다고 했다. 벌레가 어디에도 나와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왜 그랬을까​. 백석의 시를 알려면 백석을 알면 시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 것처럼 카프카의 ‘변신’을 잘 읽으려면, 그러니까 제대로 읽으려면 카프카를 알고 나서 소설을 읽으면 좀 더 이 소설을 읽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카프카는 독일계 유태인으로 이 소설을 독일어로 썼는데 그레고르 잠자를 ‘운거지퍼’라고 표현을 했다. 해충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가리켜 운거지퍼라고 했다고 한다. 카프카는 잘 알겠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살아있는 동안 꽤 고심을 했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그 중심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카프카의 정체성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마치 운거지퍼를 보듯이​.


카프카는 그로 인해 세 번이나 파혼을 하는 등 정신적으로 고초를 겪었다. 카프카의 변신이나 여타 소설을 읽어보면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쓴 소설이 아니다. 대부분의 작가 내지는 소설가는 나 이외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쓴다. 하지만 카프카는 오로지 소설을 쓰는 것은 하나의 유희로서, 자신이 쓴 소설을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즐기는 것으로 썼다. 그리하여 친구였던 막스 부르트에게 내가 죽으면 소설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했다. 카프카는 자신의 선택이 없이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일을 하고 생활을 했다​.


소설의 첫 문장은 뭐 이렇다.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참대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신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며 시작한다​.


학자들은 벌레나 동물이 되는 소설을 비커밍언에니멀이라고 하는데 이 동물로의 변신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자아가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진 자아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이라는 정체성에서 벌레라는 정체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각각의 기능이 있다. 그것은 교육이나 환경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인격체의 한 부분인데 카프카의 변신에서는 그 ‘기능’을 잃어버린 정체성을 말한다. 그 ‘기능’을 잃어버린 사람을 ‘호모 사케르’라고 한다​.


인간도 짐승도 아닌 정체성을 ‘호모 사케르’라고 하는데 소설 ‘변신’에 나오는 그레고르 잠자는 호모 사케르를 말한다. 영화로 친다면 봉준호의 영화에 이 호모 사케르가 잘 나온다. 생명은 가지고 있지만 기능을 잃어버려 사회적으로 유효한 생명을 가진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레고르 잠자 같은 호모 사케르 같은 사람은 인간사회에 가득하다. 그리고 그들을 만드는 것 또한 사람들이다. 현대 사회는 엄청난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요컨대 치매환자, 노숙자, 장애를 가진 사람을 기능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치부하고 벌레 보듯 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변신이란, 변신이 이루어진 그것이 확실하게 어떤 무엇이라고 딱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람은 아니다. 호모 사케르는 자신의 집과 자신의 사람들 또는 자신을 모르는 이들과 과거와 현재로부터 추방된 자이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의 정체성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집을 청소해주는 아주머니다. 그레고르를 보자마자 벌레라고 한다.

우리는 호모 사케르를 보고 청소부 아주머니처럼 벌레 보듯 한다. 내가 사회에서 소외당하면서도 누군가를 호모 사케르 취급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는 아주 끔찍하다. 돈 잘 벌어오던 잠자가 죽고 난 후 가족은 아무 일 없는 듯이 소풍을 간다. 딸을 바라보며 다 컸구나, 이제 시집만 가면 되겠어. 라며 운거지퍼였던 그레고르 잠자가 없어진 자리에 또 다른 호모 사케르가 들어옴으로 사회는 유지가 된다. 카프카의 말처럼 책은 우리 내면에 얼어붙은 바다에 던져지는 한 자루 도끼여야 한다고 했는데 변신은 참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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