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2)

그가 문득 어떤 물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그 바람은 말로 꺼내기도 전에 이루어졌다. 그것도 아주 세심하고 눈에 띄지 않게 이루어져서 고마움을 표현할 기회조차 없었다. 가령 어느 날 그는 귀중한 판화 작품집을 훑어보며 램브란트 판화에 경탄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 이미 그 판화 복사본이 그의 책상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또한 친구에게 어떤 책을 추천받았다고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하기만 해도, 며칠 뒤 그 책이 책장이 꽂혀 있었다. 무의식중에 그는 방이 마음에 들며 편안해졌다.

 

(42-43)

그는 스스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지내다 보니 그의 내부에 있는 치밀한 열정의 그물이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추억만으로 살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색이 바래지 않고 꽃이 시들지 않으려면 땅의 영양분은 물론, 하늘의 새로운 빛이 늘 필요하다. 식물이나 모든 구성물이 그렇듯, 우리가 꾸는 꿈도 마찬가지이다. 얼핏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꿈조차도 모종의 감각적 양분의 필요하다. 섬세하고 구체적인 감각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본연의 특징과 광채도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50-51)

그러나 그날 밤, 낯선 호텔 방에 홀로 있게 된 그는 가슴속 심장이 옆에서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보다 더 격렬하게 뛰는 바람에 전혀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그러고는 다시 끄고 자리에 누웠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녀의 입술만 떠올랐다. 그 입술은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친밀함과는 다르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자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둘 사이에 이렇게 느긋하게 담소만 나누는 것은 거짓이라는 걸. 그들 사이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풀리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결국 그는 예민함과 산만함, 불안과 열정으로 혼란스러운 얼굴 위에 우정이라는 가면이 가식적으로 씌워져 있었음을 깨달았다.

 

(71)

둘은 말없이 언덕길을 올라갔다. 벌써 그들 아래 보이는 집들이 희미한 빛 속에 잠겨버렸고, 황혼의 빛을 받아 가물거리는 계곡의 출렁이는 강물은 둥글게 휘어져 흐르며 점점 더 밝아졌다. 그러는 사이 언덕 위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윙윙 소리를 냈다. 두 사람 머리 어둠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들과 마주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림자만이 말없이 그들을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가로등이 그들을 비스듬히 비출 때면 언제나 앞서가던 그림자는 마치 서로 포옹이라도 하듯이 합쳐졌다. 길어진 그림자는 서로를 바라보고, 하나로 합쳐졌다가 떨어지고는 또다시 포옹하려 했다. 한편 그 옆에 선 그녀는 힘없이 긴 숨을 내쉬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74)

저 그림자는 길 위에 늘어뜨린 그들의 그림자였다. 그것은 그들만의 고유한 말을 다루면서 그 이상의 뭔가를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몸을 떨면서 그 인식의 두렵고 참된 뜻을 깨달았다. 시는 예언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두 그림자는 과거를 찾아 헤매던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더는 현실이 아닌 과거를 향해 애매모호한 질문을 던지던 그림자, 살아남으려고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는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그녀와 그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니었지만, 끊임없이 과거의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던 것은 아니었을까? 발아래 드리워진 저 검은 유령처럼 그들은 헛된 노력에 힘을 탕진하며, 달아나고 멈추는 유희를 계속한 것은 아니었을까?

 

(87-88)

이 말에 나는 상당히 불쾌해졌다. 게다가 독일인 부인도 남자들의 주장을 거들었다. 그녀는 한편으로는 여자다운 여자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춘부들이 있을 수 있는데, 자기가 볼 때 앙리에트 부인은 분명히 후자의 부류에 속할 것이라며 나를 훈계하려 들었다. 이런 식의 아전인수 격 발언에 나의 인내심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나는 즉시 공격적인 태도로 반격에 나섰다. 나는 여러분이 그렇게 주장한다면 여자가 한동안 살아오면서 자신의 의지나 지식과는 상관없이 신비로운 힘에 사로잡히기도 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그런 여자는 자신의 본능, 인간의 천성에 내재한 악마적 요소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고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쉽게 유혹당하는 사람들보다 자신이 더 강하고 도덕적이며 순결하다고 느끼면서 만족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남편의 품에 안긴 채 눈을 질끈 감고 남편을 속이는 그런 여자보다는 열정적으로 본능에 충실한 여자가 더 정직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90)

나는 그녀의 명료하고 쾌활한 말투에 매우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그녀의 사무적인 어조를 따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했다. “국가의 사법기관은 이 사태를 저보다는 당연히 더 엄격하게 결정하지요. 사법기관은 동정심에 흔들리지 않고 보편적인 윤리와 관습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으며, 따라서 용서하는 대신에 판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으로서 검사의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고는 개인적으로 인간을 판단하기보다 이해하는 것이 제 마음에 더 들기 때문입니다.”

 

(140-141)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고마워하는 마음을 잘 알아차리지 못할 때가 많은 법입니다. 고마운 마음을 가슴에 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니까요. 그들은 당황해하며 침묵하거나 부끄러워하고, 때로는 이런 감정을 숨기려 무뚝뚝한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비로운 조작가와도 같은 신은 감정의 모든 동작을 감각적이면서도 아름답고 조형적으로 빚어냈나 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사람의 감사함의 표현은 마치 열정적인 몸짓처럼 육체의 깊은 곳에서부터 환한 빛을 냈습니다. 그는 제 손등 위로 고개를 속였습니다. 그러더니 소년처럼 갸름한 머리를 겸손하게 낮춘 후, 거의 1분 동안이나 그렇게 있다가 제 손가락에 정중히 가벼운 입맞춤을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다시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제 안부를 묻고는, 감동 어린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147)

폭풍우가 요란하게 퍼붓는 사나운 밤이 지난 후 이런 감동적인 날이 밝아왔습니다. 깨끗하게 씻긴 거리와 파란 하늘이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수액을 머금은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수액을 머금은 초록 덤불이 횃불처럼 붉은 꽃송이를 빨갛게 피워내고, 햇살에 습기가 날아가 가벼워진 대기 속에서 먼 곳의 산들이 갑자기 우리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산들이 깨끗이 씻겨 반짝이는 도시를 향해 사방에서 모여들었습니다. 둘러보는 곳곳마다 자연은 사람들을 격려하고 북돋우며 다가와서는, 슬며시 그들의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이때 저는 그에게 마차를 타고 코르니시 해변을 달려볼까요?”라고 말했습니다.

 

(172)

한순간 뼈마디가 욱신거리는 고통으로 인해 저는 벤치로 몸을 던졌습니다. 벤치에서 가쁜 숨을 내쉬며 멍하니 있자니 죽음에 대한 예감에 사로잡혀 오히려 황홀감마저 느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방금 말했듯이 고통은 비굴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통은 삶을 향한 요구는 우리의 정신에 내재한 죽음의 열망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의 육체에 근거를 두고 있는 듯합니다. 감정이 부서져 나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저도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벤치에서 일어섰습니다. 물론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174-175)

하지만 결국 시간은 심오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생에서 나이는 모든 감정의 골을 희석하는 특이한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낄 때면, 그 그림자가 길 위에 어둡게 드리울 때면 사물들은 눈부시게 빛나는 힘을 잃고, 더는 우리에게 내적인 감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사물들은 그것은 지닌 위험천만한 위력을 대부분 상실하게 됩니다. 저는 천천히 그 충격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175)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어느 모임에서 저는 오스트리아 공사관의 주재원인 폴란드 청년을 만나게 되어 그의 가족에 대해 물은 적이 있습니다. 청년은 자기 친척의 아들인 한 남자가 10년 전 몬테카를로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고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거의 고통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저의 이기주의가 작용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그를 만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간직한 기억 외에 제게 불리한 증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저는 더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늙어간다는 과거에 대해 더는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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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프릴다 칼로는 다다이즘 작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1927년이라면 새로운 미술 사조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올 때였고, 장래에 화가가 되기로 한 프리다 칼로는 그런 것들을 유심히 보고 따라 하려 했죠. 그중 하나가 이 실험 작품(미구엘 리라의 초상)입니다.

먼저 다다이즘이 무엇인지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다다이즘은 설명하기가 까다로운 미술 사조입니다. 설명을 확실히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다다이즘이 아닙니다. 알쏭달쏭하시죠? 다다이스트들이 한 말을 보시죠.

우리가 다다라고 부르는 것은 공허에서 비롯된 엉뚱한 짓거리다.” – 후고 발

다다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 리하르트 웰젠베크

                     

(45)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순간과 사람이 있습니다. 프리다 칼로 역시 그랬습니다. 그녀의 경우는 좀 독특합니다.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그 순간을 함께했던 유일한 사람이 그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프리다 칼로 하면 떠오르는 그 사고의 순간에 그 사람이 없었다면, 그녀는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던 그 사고에서 프리다 칼로를 처음 목격한 의사는 그녀의 치명적인 부상을 보고 그녀를 포기하려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말렸던 사람도 그 사람입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입니다.


(102)

프리다 칼로는 평생 엄청난 육체적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렇게 아파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남자든 여자든 육체적 관계를 통해 고통을 위로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그녀는 건강이 악화되면서 더 많은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고 합니다.


(119-120)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 칼로를 무척 자랑스러워했고, 상상 이상으로 사랑했습니다. 프리다 칼로의 사랑도 그 이상이었고요. 그것은 둘의 행동이나 편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디에고 리베라의 여성 편력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이런 생각까지 한 것입니다. 자신과 디에고 리베라를 아예 반씩 잘라 붙여 하나로 만드는 것이죠. 한순간도 떨어지지 못하게 말입니다.


(126-127)

이런 모든 상황에도 프리다 칼로는 남편을 비하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참으면서 묵묵히 기다릴 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기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디에고 리베라. 시작

           디에고 리베라. 창조자

           디에고 리베라. 내 아이

           디에고 리베라. 내 남자 친구

           디에고 리베라. 화가

           디에고 리베라. 내 연인

           디에고 리베라. 내 남편

           디에고 리베라. 내 친구

           디에고 리베라. 내 어머니

           디에고 리베라. 내 아들

           디에고 리베라.

           디에고 리베라. 우주

           통합의 다양성

           왜 나는 그를 디에고 리베라라고 부르는가?

           그는 결코 내 것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자신의 것이다.


(204-205)

트로츠키가 일반인이었다면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던 연인의 작품을 걸어놓을 수 없었겠죠. 하지만 그는 러시아의 국민 영웅이며,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과 더불어 소련 공산주의 혁명의 3대 거물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걸어놓는다면 비난할 사람이 없었죠. 추종자들이 워낙 많았으니까요. 프리다 칼로가 이 그림을 준 것은 어쩌면 그를 존경하던 디에고 리베라를 향한 보복 심리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무시하고 배신했던 남편 디에고 리베라가 가장 존경하던 인물을 자신이 차버림으로써 남편을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죠. 남편은 트로츠키를 대단한 혁명가로 평가했고, 그가 소련에서 축출당해 갈 곳이 없을 때 멕시코로 망명하는데 큰 힘을 쏟았습니다. 디에고 리베라도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부인이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부인의 불륜 상대가 자신이 존경하던 인물이었으니까요.


(211)

<도르시 헤일의 자살>이 이렇게 그려진 것은 프리다 칼로 입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녀에게 고통은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것을 잊기 위해서는 오히려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다음 시간을 두고 희석시키는 것이죠. 하지만 죽음을 대하는 프리다 칼로의 방식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양편에 오해를 낳았던 이 그림은 한동안 모습을 감추었다가 현재는 익명으로 기증되어 피닉스 아트 뮤지엄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216)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 색깔에 관해 쓴 적이 있습니다.

 . 녹색 : 따뜻하고 좋은 빛

 . 붉은 보라색 : 아즈텍. Tlapali(그림과 그림 그리기에 사용되는 색상을 뜻하는 아즈텍어), 붉은 선인장의 오래된 피, 가장 오래되고 가장 살아 있는

 . 갈색 : 점의 색깔, 썩어가는 잎의 색깔, 지구

 . 노란색 : 광기, 질병, 두려움, 태양과 기쁨의 일부

 . 코발트블루 : 전기와 순수, 사랑

 . 검은색 : 없다, 정말로 없다

 . 잎의 녹색 : 나뭇잎, 슬픔, 과학, 독일 전체가 이 색깔이다

 . 연두색 : 더 많은 광기와 미스터리, 모든 유령들은 이 색상의 옷을 입는다. 최소한 속옷이라도

 . 다크그린 : 나쁜 소식과 좋은 사업의 색깔

 . 네이비블루 : 거리감, 부드러움도 이 파란색일 수 있다

 . 마젠타 : ? 글쎄, 누가 알겠어!


(281)

조금 아프다고 해서 수술을 받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쩔 수 없으니까 받는 것이죠. 또 한 번의 수술로 모든 증상이 해결된다면 다시 받을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안 되니까 자꾸 받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프리다 칼로는 사고 이후 32번 이상 수술을 받았습니다. 39살이 되던 1945년에도 프리다 칼로는 또 한 차례 척추 수술을 받게 됩니다. ‘혹시나 좋아지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죠. 물론 잘못 되면 지금보다 더 나빠질 위험도 있었지만, 이전 수술 이후 증상이 나아지지 않았고, 아직은 젊으니 기대를 해본 것이죠.


(302)

1944년 프리다 칼로는 한 평론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 가지 이유로 나는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었다. 하나는 어린 시절 사고 당시 몸에 흐르던 피를 보았던 생생한 기억이고, 또 하나는 탄생, 죽음, 그리고 생명을 이끄는 끈에 관한 나름의 생각이다. 마지막 한 가지는 엄마가 되고 싶은 바람이다.”


(345)

죽기 얼마 전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난 건강하게 잘 탈출했다. 나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절대 어기지 않을 생각이다. 디에고 리베라에게 감사하고, 나의 테레에게 감사하고, 그라시 엘리타, 그리고 딸에게 감사하고, 주디스에게 감사하고, 이사우아 미노에게 감사하고, 루피타 주니에게 감사하고, 파릴 박사와 폴로 박사와 아르만도 나바로 박사와 바르가스 박사에게 감사한다. 나 자신에게도 감사한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를 위해 삶을 지탱하려는 나의 엄청난 의지에도 감사한다.

기쁨, 인생 만세. 디에고 리베라 만세. 테레 만세. 나의 주디스 그리고 내게 놀라우리만치 잘해주었던 모든 간호사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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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내 생각 속에서 너를 지운다고! 너는 내 존재의 일부야. 나 자신의 일부야. 내가 상스럽고 비천한 꼬마의 모습으로 (너는 그때도 그런 아이의 불쌍한 가슴에 상처를 입혔어) 이 곳에 처음 왔던 날 이후로, 너는 내가 읽어 왔던 모든 책의 한 줄 한 줄 속에 있었어. 넌 그때 이후로 내가 보와 왔던 모든 풍경들 속에 강물 위에, 배의 돛들 위에, 습지대에, 구름 속에, 햇살 속에, 어둠 속에, 바람 속에, 숲 속에, 바다에, 길거리들 위에 있었어. 넌 그동안 내 마음이 알게 된 모든 우아한 공상이 구체화된 존재였어. 런던에서 가장 튼튼한 건물들을 짓는 데 쓰인 돌덩이들조차도, 런던이든 어디든 모든 곳에서 내게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네 존재와 영향력보다는 덜 구체화된 존재들일 거야. 네 손으로 옮기기 덜 힘든 것들일 테고, 너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는 존재로 일부로, 내 안에 있는 얼마 안 되는 선한 면의 일부로, 또 악한 면의 일부로 남아 있을 거야. 하지만 이렇게 이별하게 되었으니 이제부턴 너를 오직 내 선한 면하고만 결부시킬게. 그리고 앞으로는 충직하게 늘 그런 면만 붙들고 있을게. 지금은 비록 너무나 쓰라린 고통을 느끼게 하고 있지만. 너는 그동안 분명히 내게 해보다는 이로운 도움을 더 많이 주어 왔어!”


(227-228)

내가 살았던 삶은 불행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산맥의 수많은 산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고산처럼 그 모든 걱정거리들을 지배하듯 굽어보고 있던 한 가지 걱정거리는 내 시야에서 결코 사라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새로운 원인지 아직은 생겨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가 발각되었다는 공포감이 새롭게 찾아오는 바람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곤 했고, 밤이 되어 허버트가 귀가하는 발소리가 평소보다 더 빨라지면 두려움에 떨면서 혹시 그가 나쁜 소식이라는 날개를 달고 오는 건 아닌지 잔뜩 귀 기울이며 앉아 있곤 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이라든가 그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그보다 더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계속 그대로 돌며 지속되었다.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고, 끊임없이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에 빠져 사는 선고를 받은 셈이나 마찬가지였던 나는 보트의 노를 저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안간힘을 다해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256-257)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그녀가 감수성 예민한 아이를 양녀로 데려와서, 자신의 미칠 듯한 분노와 퇴짜 맞은 애정과 상처 입은 자존심에 대한 복수의 수단으로 주조해 내는 가혹한 짓을 저질렀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밝은 대낮의 햇빛을 차단함으로써 무한정 더 많은 것들을 차단시켜 버렸다는 것, 격리된 은둔 생활을 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치유의 힘을 지닌 많은 영향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켜 버렸다는 것, 고독한 수심에 빠진 그녀의 정신이, 창조주께서 정한 질서에 역행하는 모든 정신이 반드시 그리고 으레 그러하듯 병들어 왔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파멸에 빠져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심히 부적합한 자의 모습으로, 헛된 참회와 헛된 후회와 헛된 자기 비하,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저주가 되어 버린 다른 모든 헛된 망상들처럼 지배적인 광증(狂症)이 되어 버린 헛된 슬픔에 사로잡힌 그녀를 내가 어찌 동정심 없이 바라볼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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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8)

양심이란 어른이든 아이이든 그것에 비난이 가해지면 끔찍한 존재가 되는 법이다. 그러나 아이의 경우, 양심이라는 그 비밀스러운 짐이 바짓가랑이 아래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은밀한 짐 덩어리와 더해지면 엄청난 벌이 되는 법이다(내가 증언할 수 있다). 조 부인에게서 나는 집안 살림 중 어느 것도 조의 재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서 도둑질한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 도둑질을 한다는 사실로 인한 죄책감에다, 앉아 있을 때나 부엌 주변에 자잘한 심부름을 하러 갔다 오라는 지시를 받을 때마다 불가피하게 한 손을 바짓가랑이 속 빵 조각에 대고 있어야 하는 상황까지 더해지자,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습지대에서 불어온 바람이 난롯불을 타오르게 하고 불길을 너울거리게 만들던 그때, 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가 내게 비밀을 지키라고 겁맹하고, 다리에 쇠사슬 족쇄를 찬 죄수가 내일까지 마냥 기다리다 굶어 죽을 수 없으니 당장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외치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후 여러 번 젊은이가 나를 잡아먹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겠다는 걸 죄수가 어렵사리 말렸지만, 그 젊은이가 타고난 조급함에 굴복하거나 시간을 잘못 알아서 다음 날이 아니라 바로 그날 밤 내 심장과 간을 빼 먹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고 오해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어떤 사람의 머리카락이 공포감으로 쭈뼛 곤두서는 일이 있다는, 아마 그날 밤 내 머리카락이 틀림없이 바로 그 상태였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정도로 머리칼이 쭈뼛 곤두서는 일은 여태껏 없지 않았을까?


(127)

그날은 내게 기억할 만한 날이었다. 내게 큰 변화를 만들어 준 날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그건 어떤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인생에서 하루를 선택하여 삭제한다고 상상해 보고, 그러고 난 후 그 인생항로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생각해 보라. 이 글을 읽는 독자여, 글 읽기를 멈추고 쇠로 만들어졌던 황금으로 만들어졌건 가시로 만들어졌건 꽃으로 만들어졌건 간에, 당신을 얽어매고 있는 긴 사슬이 만약 그 제일 첫 번째 연결 고리가 어떤 기억할 만한 날 맨 처음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결코 당신을 꽁꽁 얽어매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잠시 생각해 보라.


(382)

, 사랑하는 내 단짝. 인생이란 너무나도 많은 부분들이 하나로 용접되어 결합된 구성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대장장이, 어떤 사람은 양철공, 어떤 사람은 금세공업자, 어떤 사람은 구리 세공업자인 거야. 그런 식의 구분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고 그런 게 생기면 반드시 만족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란다. 혹시 오늘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했다면 그건 다 내 잘못이야. 너와 나는 런던에 같이 있으면 안 될 사람들이다. 또한 사적이고 친구들 사이에서만 알려지고 이해되는 장소 말고, 다른 곳에서 만나면 안 되는 사람들이지. 이런 말은 내가 거만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올바른 처신을 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야. 이제부터 넌 이런 복장을 한 마를 결코 더 이상 보지 못할 거다. 나는 이렇게 차려입으면 거북해. 나는 대장간과 부엌을 벗어나거나 습지대만 떠나면 실수를 저질러. 손에 망치를 들고 있거나 파이프를 들고 있을지언정, 대장정이 작업복을 입은 나를 떠올려본다면 넌 내가 저지른 실수의 절반도 찾아낼 수 없을 거야. 혹시 조금이라도 나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네가 내 집을 찾아와 대장간 창문으로 머리를 쑥 들이밀고 거기서 대장장이 조가 불에 그슬린 낡은 작업복 앞치마를 입고 그리운 모루질을 하며 옛날부터 해오던 익숙한 노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넌 내가 저지른 실수의 절반도 찾아낼 수 없을 거야. 나는 끔찍할 정도로 우둔한 사람이란다. 그래도 올바른 생각에 가까운 이런 최종적인 생각을 망치로 두드려 펴듯 생각해 낸 것이길 바란다. 그리고 하느님의 가호가 너와 함께하길 빌게, 사랑하는 친구야. , 어이 내 친구,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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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나의 덩치를 보고 언제나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를 차지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인해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저렇게 커다란 동물을 무엇에다 쓸까? 태초부터 인간은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인간이 처음 바다로 다가왔을 때부터 쭉 그를 관찰해 왔다. 그 결과 인간의 몸은 깊은 바다 밑을 알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물에 뜨는 것을 이용해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와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36-37)

인간들이 바다에서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만 미심쩍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작은 정어리도 다른 정어리를 공격하지 않는다. 느림보 거북이도 다른 거북이도 공격하지 않는다. 탐욕스러운 상어도 다른 상어를 공격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에서 자기와 비슷한 이들을 공격하는 종은 인간밖에 없는 것 같다. 인간들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알고 나니 영 기분이 언짢았다.


(60)

내 이야기가 믿기지 않니? 할아버지 향유고래는 눈으로 계속 말했다. 너는 까마득히 먼 옛날 고래들과 라프켄체 사람들이 바다에서 약속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해. 우리 고래들은 크고 강한 반면, 인간들은 작고 연약하지. 우리 고래들은 먼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지만 인간들은 우리가 안전하게 머물게 될 그 장소에 이르는 길만 알고 있어.


(76-77)

꿈속에 나타난 장소는 우리 고래들이 모두 라프켄체 사람들을 따라가게 될 바로 그곳이었다. 해님의 보금자리를 둘러싼 바다는 언제나 투명할 정도로 맑고 고요했다. 오징어들이 새까맣게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데다, 거센 파도로 일지 않아 짝짓기하기에 안성맞춤인 듯 보였다. 게다가 주변에 어떤 위협도 없어서 참고래, 향우고래, 그리고 남방긴수염고래가 아주 작은 밍크고래 옆에서 자신의 웅장한 몸을 한껏 과시하기에 딱 좋았다. 그리고 바다에는 작은 생물체들이 풍부해서 대왕고래와 혹등고래, 그리고 모든 종류의 수염고래들이 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 같았다. 고래들이 입만 벌리고 있으면 엄청난 양의 물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데, 물을 다시 뿜어낼 때 수염이 맛있는 크릴새우만 걸러 내 목구멍에 남겨 주기 때문이다. 등이 은빛인 돌고래와 일각돌고래는 바다 밑 모래 속에 숨어사는 넙치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였지만, 볼썽사납게 싸우지는 않았다.


(108-109)

인간들은 아주 먼 곳에서 오는 거야. 하지만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그들의 탐욕과 야망을 막을 수 없어. 그들은 우리가 본 적도 없고 보지도 못할 지역에서 오는 거야. 그들은 오르노스곶이라고 부르는 곳에 오기 위해 여기처럼 엄청나게 큰 바다를 건너오고 있는 거지. 거기에 가면 배와 난파선의 잔해들이 해안에 잔뜩 쌓여 있단다. 그것들은 말은 못 하지만 인간들이 얼마나 무모한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끈질기고 집요한지, 자기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셈이지.


(116)

그래서 나는 등에 아홉 개의 작살이 꽂힌 채, 다른 고래잡이배를 찾으러 넓은 바다를 나갔다. 인간들이 무서워 벌벌 떨며 모차 딕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달빛 향유고래인 나의 임무는 그들을 쫓아 바다에서 몰아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 인간들을 계속 쫓아다녀야 할 저주받은 운명.

,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이들의 힘.

, 바다의 가차 없는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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