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개성상인과 인삼업 한국 근대 산업의 형성 2
양정필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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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은 조선 제1의 수출품이었다. 요즘 인삼 하면 다들 재배 인삼을 떠올리지만 당시에는 삼남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인삼을 재배하는 곳이 없었다. 거의 산삼을 캐다 팔았는데, 그 약효가 죽은 사람도 살린다고 알려져 중국과 일본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18세기 전후 조선의 인삼은 중국의 비단, 일본의 은과 함께 동아시아 삼각무역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인삼은 일본의 은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그러나 그 삼각무역의 대호황으로 산삼은 씨가 마르게 된다. 상인들은 조선 제1의 수출품을 되살리기 위해 대규모 인삼 재배를 계획한다.


인삼 재배는 많은 자본이 필요한 일이었다. 적어도 1년에 한 번 수확하여 매출로 생산 비용을 메꿀 수 있는 다른 곡물들과 달리 인삼은 최대 6년은 길러야 하는 작물이었기 때문이다. 한번 시작하면 6년 동안 내리 비용만 투입되는 농사. 비록 이문이 다른 작물과는 비교 불가할 정도로 컸지만 이토록 긴 시간 동안 농사를 짓기 위해선 많은 투자가 이뤄져야 했다. 게다가 돈이 들어갈 구석은 또 얼마나 많은지. 1년을 키운 모종을 구입하고, 밭마다 해가림막을 설치하고, 적어도 4년 근부터는 몰래 캐가는 도둑들을 막기 위해 매일 밤 순찰을 돌아야 했다. 삼업은 웬만한 자본으로는 시작 자체가 불가한 고난도 농사였다.


따라서 당시 조선에서 삼포를 경영할 수 있는 건 장사로 대자본을 축적한 상인들 밖에 없었다. 조선의 상인이라 하면 우선 수도 한양의 경강상인, 평양의 유상, 의주의 만상, 동래의 내상, 그리고 개성의 송상을 꼽을 수 있다. 경강상인은 수도 서울이라는 조선 최대의 수요처를 등에 업었고 평양은 뱃길로 중국과 가까워 예부터 무역로의 중심이었다. 의주의 만상은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점을, 동래는 일본과 가깝다는 이점을 활용했다.


이처럼 자본과 경험을 소유한 상인 집단은 꽤 있었는데 어째서 송상이 조선의 인삼 무역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 개성은 고려시대부터 국제 무역의 중심지였으나 선초에 개성 주민들 상당수를 한양으로 강제 이주시켰고, 이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신왕조에 충성하지 않는 자들로 찍혀 상당한 불이익을 받았다. 지역 수요만으로는 성장이 어려웠던 이들은 당연 해외로 눈길을 돌렸고 일부는 전국을 떠돌며 장사를 하는 행상으로 활약했다. 조선의 차별정책 때문이었는지 이들의 내부 결속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본의 규모만으로는 첫 손에 꼽기 어렵지만 조직력만큼은 다른 지역 상인들과 궤를 달리하는 송상이었다.


송상의 힘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차변과 대변을 함께 적어 외상거래를 가능하게 한 복식부기를 서양보다 200년이나 앞서 계발한 뛰어난 상인이었다. 또 반드시 다른 점포에서 수년간 수습을 마친 뒤 가업을 잇거나 유능한 점원을 전문경영인으로 발탁하는 차인제도를 운영했다. 이는 경영과 소유를 분리하는 근대적 경영 방식이다. 그러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신용만으로 돈을 꾸고 갚을 수 있는 시변제도가 아니었나 싶다. 시변제도는 중개인을 통해 거래하기 때문에 돈을 빌리는 사람과 빌려주는 사람이 서로를 전혀 몰랐다. 금전거래가 인정에 따라 이뤄지면 자본은 비효율적으로 분배되기 마련이다. 개성상인들은 이처럼 일찍부터 근대적인 경영, 금융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었다. 일본의 식민사관은 스스로 근대화를 이룰 수 없었던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배가 도왔다고 주장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근거들을 송상의 역사에서 찾는다.


송상의 현대적 상업 제도는 삼포 경영을 위한 일종의 플랫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어딘가에 돈이 있는 사람은 있다. 어딘가에는 인삼을 재배할 줄 아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돈이 있으면서 인삼을 재배할 줄 아는 사람은 적다. 송상은 이 둘을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소비자의 needs도 파악할 줄 알았다. 송상은 인삼을 쪄 홍삼으로 가공했다. 이는 습도가 높은 지역에서 보관이 힘들었던 인삼의 단점을 메꿈으로써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근대와 현대 상업을 가르는 차이가 수요를 따르느냐, 그것을 창출하느냐에 있다고 생각한다. 조선 후기와 일제를 거쳐 홍삼은 전매제도가 실시됐고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해 국가에서는 일 년에 생산할 수 있는 홍삼의 양을 조절했다. 장사치에게는 더 벌 수 있는데 못 버는 것만큼 답답한 상황이 없을 것이다. 송상은 그동안 쩌리 취급을 당해오던 백삼에 주목했다. 홍삼에 비해 질 낮은 제품으로 인식되던 백삼을 팔기 위해 송상이 시도한 브랜딩, 마케팅 기법들은 현대의 기술들을 무색해할 정도로 화려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돈을 벌기 위한 욕망만큼 인간의 창의력을 자극하는 요인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근대 개성상인과 인삼업>은 논문이다. 남보다 부족한 조건을 타고난 개성인이 굴레를 박살내고 날아오르는 모습을 뜨거운 마음으로 그리기보다는 수치와 사료로 걸러 차갑게 식힌 말들을 주된 서술 방식으로 취한다. 건조하고 지루한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만큼 객관적이라는 장점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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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수학 - 수학에 미치는 6가지 이유
나가노 히로유키 지음, 김찬현 옮김 / 동아시아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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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은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 사용한 언어다. 실험 결과를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고안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한 말이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면, 그는 "우주는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여있다." 고 말했다.


세상에 단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수단만 남기라면 나는 수학을 고를 것이다. 말이나 글에는 늘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다양한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숨어 있다. '밥 좀 먹어라!'라는 말의 '밥'은 지금 당장의 한 끼를 의미할 수도, 음식 전체를 뜻하는 걸 수도 있다. 그러나 1, 1, 2, 3, 5, 8, 13으로 이어지는 수열에는(피보나치) 다른 의미가 끼어들 틈이 없다. 심지어 중간의 여러 수를 빼버려도 보는 사람은 그 공백을 완전히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수학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 안에 추상성과 구체성이 동시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수학은 실재를 극도로 추상화된 기호로 표시하지만 그 기호들을 풀어내면 늘 같은 실재가 도출된다. 수학은 이 세상을 추상화하는 수단인데 그 수단의 해가 우리가 듣고, 보고, 만질 수 있는 구체적 현실이라는 게 늘 놀랍다.


이런 알쏭달쏭한 이야기가 질색이라면 수학이 가진 실용성에 초점을 두는 것도 좋다. 인간이 최초로, 수학을 실생활에 대규모로 적용한 사례는 건축이 아니었을까 싶다. 높은 수준의 수학 개념이 없었다면 고대의 그 위대한 건축물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이 수학은 점점 더 중요해져 우리 실생활 곳곳에 끼어들지 않은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최근에 등장한 AI 기술들은 최신 수학으로 무장해 이 세상을 송두리째 바꿀 준비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수학은 인터넷에 종종 돌아다니는 구글 입사 시험 따위를 풀어내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하루에 몇 번이나 겹칠까?', '서울에 이발사는 몇 명이나 존재할까?', '대한민국에는 머리카락 개수가 정확히 같은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나는 사실 이런 류의 퀴즈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추론 능력을 평가하려는 의도와는 다르게, 사실 이런 문제는 한 번이라도 풀어본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를 나타낼 뿐이기 때문이다. 한국 학생들이라면 구글 입사시험 모음집 같은 걸 구해 달달달 외운 뒤 대단히 높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진정 수학적 사고가 발달한 사람이라면 아주 작은 가정들을 조금씩 포개어 결국 진실에 가까운 답을 낼 거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마어마한 수학>은 이 같은 수학의 가치와 매력을 쉽게 전달하려 노력한다. 유명한 수식이 탄생한 계기부터 천재라 불린 수학자들, 수학에 담긴 예술성과 영향력,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계산력까지. 나는 학창 시절 수학이 너무 어려웠고, 그 때문에 결국 입시도 망쳤는데, 이렇게 수학을 좋아하는 걸 보면 우리나라의 수학 교육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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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미술관 - 양정무의 미술 에세이
양정무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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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미술관>은 나영석 PD의 예능에 출연했던 미술사학자 양정무 교수의 에세이다. 내용의 깊이가 남달라 이 책을 그냥 에세이로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데, 아마 유구한 예술의 역사를 4개의 스냅숏으로 짧게 풀어내 겸손한 표현을 붙인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다른 진지한 인문서보다도 훨씬 재미있고 참신했다.


1장에서 저자는 '벗은 몸'과 '고전'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적한다. 미술이란 거칠게 말해 한낱 장식품, 즉 물건에 불과하고 예술가 또한 오늘날처럼 고고한 지위가 아니라 시장에서 자기가 만든 것을 파는 장인에 불과했다. 물론 장인의 정신과 기술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은 예술이 그 자체로 목적이었던 시절은 인류사를 통틀어 매우 짧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고 이전까지의 예술은 모두 무언가를 '위해' 창조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은 당시의 시대상, 윤리의식, 정치, 혹은 그 예술품을 주문한 사람의 의도와 기호가 반영되어 있다. 이 말이 무엇이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보편적 미의 기준이 사실은 그 시대의 특수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기나긴 중세 암흑기 동안 미의 기준은 누가 신의 위대함을 가장 잘 표현했는가로 정해졌다. 원근을 살펴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건 어불성설. 신은 항상 정가운데에, 누구보다 크게 그려져야 했다. 15세기 피렌체인들은 이 기준을 과거로 돌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들이다. 훗날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이 시대는 '고대의 부활', 쉽게 말해 복고의 시대였다. 이를 인류 미학의 절대 기준으로 확립하는데 일조한 사람이 독일의 고전주의자 빙켈만이다. 그러나 그가 찬양해 마지않던 대부분의 그리스 예술품들은 아주 놀랍게도, 로마 시대에 복제한 짝퉁으로 알려져 있다.


2장은 미술사에 드러난 '웃음'을 탐구하는 장이다. 미술과 웃음이라,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참신한 관점이 흥미롭다. 오늘날 단체 사진을 찍을 때 우리는 모두 김치와 치즈를 한다. 억지로라도 미소를 만들어내려는 건데, 왜 미술관에서 접하는 그 많은 초상화들에는 웃는 얼굴이 거의 없는 걸까? 오랜 시간 광대라는 직업이 차지해온 낮은 지위를 생각하면 웃음이 가진 의미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유명한 추리 소설 <장미의 이름>에는 이를 주제로 설전을 벌이는 두 수도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미술사가 다시 웃음을 되찾게 된 건 세상에 인본주의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3장은 박물관의 역사를 다룬다. 프랑스혁명으로 촉발된 공공 박물관의 탄생. 약탈품 창고 노릇을 하며 확장해가던 제국주의 시대의 박물관. 이 장에서 우리는 각 시대의 정치상을 반영하며 성장해가던 박물관의 역사를 볼 수 있다.


나폴레옹 집권 시기 그가 이탈리아에서 약탈해온 고전미술의 대표작들이 루브르에 진열되면서 박물관의 무게 중심이 진귀한 물건들에서 순수미술로 옮겨가는 계기가 만들어진다. 요즘에는 확실히 박물관보다는 미술관의 힘이 센 것 같다(리그 오브 레전드의 캐릭터 이즈리얼은 상대를 향해 "넌 박물관에나 어울리는 구닥다리야"라고 외친다!). 인스타그램에 미술관에 갔던 사진을 올리는 건 본 적이 있어도 박물관에 간 걸 본 적은 없으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나라에는 873개의 박물관과 281개의 미술관이 있다고 한다. 미술관과 박물관은 모두 엄격한 자격을 갖춰야 그 이름을 달 수 있다고 하니 난립하는 허접한 시설들도 아니다. 역시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4장은 팬데믹 시대의 미술을 이야기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팬데믹은 역시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일 것이다. 흑사병은 유럽의 사회 구조를 바꿀 만큼 엄청난 규모의 역병이었다. 이런 시대의 미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미술이라는 게 보편적, 절대적 형태를 지키며 인간에게 늘 같은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었다면 세상이 흑사병으로 망하든 말든 여전히 똑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은 팬데믹으로 인해 존재 양식이 바뀔 정도로 큰 변화를 맞는다. 이런 걸 보면 예술이란 역시 인간과 외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욕망과 바람을 철저히 반영해 생존해가는 생활 밀착형 행동양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벌거벗은 미술관>은 저자의 참신한 관점과 안목이 돋보이는 책이다. 거기다 강연체로 굉장히 쉽게 쓰여 가독성이 높다는 장점까지 있다. 그림은 당연 풀컬러. 페이지 곳곳을 차지한 사진들 덕에 274 페이지라는 쪽수도 시원시원하게 넘어가니 올여름 휴가철에 들고 갈 책으로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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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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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최고의 소설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은 최고의 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과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낙원 같은 소설이다.


남은 5개월 동안 별다른 일이 없다면 이 책은 올해 최고의 소설이 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7개월을 곰곰이 돌아보니, 최고의 소설이 아니라 최고의 책으로 꼽게 될 것 같다. 내용 자체는 특별할 게 없다. 이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과학자와 수학자들이 바로 그 위대한 발견을 하는 순간을 소설로 옮긴 것이다. 지금부터 그 주인공을 호명하겠다.


1. 공기 중에서 질소를 추출하여 인류를 기아에서 해방시킨 프리츠 하버

식량의 산술급수적 증가가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를 따라잡지 못해 인류가 굶어 죽게 될 거라는 맬서스의 저주를 극복한 건 하버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질소를 이용한 합성 비료는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인구의 폭발적 증가에 죄책감을 느꼈는지 애국자였던 하버는 독일을 위해 염소 가스를 활용한 생화학전을 창시하기도 했다. 염소 가스의 피해 규모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인 독일마저 생화학전의 금지를 결의하는 세계 조약을 체결할 만큼 크고 치명적이었다. 훗날 그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쓰인 염료 프러시안 블루를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한 시안화물을 이용하여 치클론 B를 개발하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동안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기체로 선정됐다.


프리츠 하버는 유대인이었다.



2. 블랙홀의 어머니 슈바르츠 실트

프리츠 하버의 염소 가스가 전장을 휘덮는 동안 참호 구석에 박혀 아인슈타인이 고안한 일반상대성 이론의 방정식을 풀어낸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 책의 두 번째 주인공 슈바르츠 실트다. 방정식을 만들어낸 당사자조차 그 '해'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고 못 박은 일을, 편안한 별장도 아닌 전장에서, 전자계산기나 애플 실리콘이 탑재된 맥북 프로, 대량의 계산을 처리할 클라우드 서비스도 이용하지 않고 해냈으니 그 천재성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조차 없다. 그는 자신이 찾아낸 해가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블랙홀의 존재를 예견하는데 놀라 이후에는 자신의 해가 잘못됐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슈바르츠 실트는 위대한 업적을 이룬 지 얼마 안돼 전장에서 숨을 거둔다. 이 책은 사실을 토대로 전개되는 '소설'이다. 내가 만약 작가였다면 천재 화학자 하버가 살포한 염소 가스를 슈바르츠 실트 살해의 유력한 용의자로 암시하고 싶은 강력한 유혹에 빠졌을 것이다.



3. 진정한 천재 수학자 그로텐디크

필즈상 수상자 몇 명이 달라붙어도 해결할 수 없던 난제를 몇 주 만에 홀로 해결할 정도로 천재였던 그로텐디크는 그 압도적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수학자다. 심지어 어린 시절 유대인 수용소를 전전하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 그가 이룩한 업적들에 놀랍다고 말하는 건 지극히 소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끔찍한 유년 시절 덕분에 그는 평화와 무정부주의를 지향하는 정치관을 갖게 됐는데 이 탓에 반전-반핵-환경 보호-생태계 보전을 핵심으로 하는 사상운동에 전념하게 된다. 수학과는 관계없는 수많은 기행을 벌이다 생활고로 80년대에 학계로 돌아왔지만 그가 제출한 연구 결과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로텐디크는 80년대 말에 완전히 수학계를 떠나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서 숨어 지냈다. 너무 똑똑해도 문제라는 건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나 떠올릴만한 말이다. 그러나 그로텐디크를 보면 이 외에 어떤 말을 떠올려야 할지 모르겠다.


4. a+b=c, 모치즈키 신이치

그로텐디크의 인생은 모치즈키 신이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모치즈키 신이치는 a+b=c라는, 일명 abc가설을 증명했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수학자이다. 그는 증명 과정에서 스킴과 에탈 코호몰로지 이론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데 이것이 바로 그로텐디크가 창안한 이론이었다. 그가 abc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기술한 논문은 수백 페이지에 달해 아직까지도 검증이 끝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론에 담긴 심각한 오류를 지적하며 웬만한 수정으로는 회생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반면 모치즈키 신이치의 교토 대학 동료들은 그의 증명이 완벽하게 끝났다고 주장한다.



5. 서로를 혐오했던 라이벌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

양자역학을 창시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하이젠베르크는 그 업적과 비례할 정도로 복잡한 행렬 역학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행렬은 순수 수학에 속해 물리학자들에게는 대단히 생소했다고 한다. 논문 역시 엄청 난해해서 전자기력과 약한 핵력을 통합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한 스티븐 와인버그 조차 "마법 그 자체"라 언급했는 데, 나는 이 말이 '솔직히 이해는 못 하겠지만 뭔가 해낸 것 같으니 적당한 선에서 인정해 주자'는 의도로 말해진 대단히 지적이고 사회적인 표현이라 생각한다.


하버의 업적이 인류의 기아 해결과 대량 학살에 모두 기여하고, 아인슈타인의 발견이 에너지의 실체와 파괴를(E=MC스퀘어) 동시에 밝혀냈듯, 과학의 역사는 수많은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나는 여기에 하이젠베르크의 끔찍한 이론이 만들어낸 최악의 라이벌 슈뢰딩거의 이야기를 추가하고자 한다.


슈뢰딩거는 다른 물리학자와 마찬가지로 본인만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 그걸 어려워하는 다른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는 저 오만하고 어린 독일 놈을 증오했다. 슈뢰딩거는 양자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보다 쉬운 방법을 찾는데 몰두해 그 유명한 '파동함수'를 만들어낸다. 파동함수는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에게 익숙한 미분방정식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에 학계의 환영을 받았다.


파동함수의 탄생 이후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을 거들떠보는 물리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훗날 양자역학의 창시자로 호명되는 천재 물리학자지만 당시에는 잊혀가는 명성을 두려워하는 어린 독일 놈에 불과했던 하이젠베르크. 그는 슈뢰딩거의 강연장에 허락도 없이 올라가 이 모든 것이 엉터리라며 칠판 가득 자신의 행렬을 써 내려가다 관중의 야유를 받고 경비원에게 끌려나가는 추태까지 보인다. 하이젠베르크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어떻게 해서든 혐오스러운 오스트리아 바람둥이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절치부심 연구에 몰두한다. 그러다 자신이 똥처럼 여기던 바로 그 파동함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에피파니를 경험한다. 모든 역사의 아이러니가 말해주듯, 그것이 바로 하이젠베르크가 펼친 대역전극의 서막이었다.


한편 슈뢰딩거가 파동함수를 고안해낸 곳은 크리스마스 휴가로 떠난 스위스 아로사로 알려져 있다. 동행한 여자는 부인이 아니었다고 한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는 역사적 사실 사이사이 비어있는 간극을 이야기로 채워 넣은 픽션이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서로 다르지만 연작 소설로 읽어도 될 만큼 교묘하게 엮여있다. 명심해야 할 건 이 소설이 사실을 바탕으로 썼다고 해도 결코 사실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 벵하민 라바투트는 <프러시안 블루>에는 지어낸 문장이 단 하나밖에 없는 반면 다른 소설들은 좀 더 자유분방하게 썼다고 말한다. 자유분방을 어느 대목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두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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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패로
메리 도리아 러셀 지음, 정대단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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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외계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포착하여 우주로 모험을 떠나는 이 소설은 360페이지에 이를 때까지도 외계인이 등장하지 않는 인내심 강한 소설이다. 넷플릭스로 드라마화가 됐다면, 총 두 시즌으로 기획했다 치고 시즌1의 마지막 회, 엔딩에 가서야 슬쩍 외계인의 얼굴이 등장하는 셈이다. 나는 간질간질 떡밥만 흘리고 핵심 줄거리는 나무늘보처럼 전개하는 이야기들을 진심으로 혐오한다. 더블 제이의 <LOST>나 스페인판 <종이의 집> 같은 거 말이다.


그러나 이런 걸 소설로 읽고 있으면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이 위대한 작가들이 추구하는 건 외계인이 발견됐다는 가십이 아니라 그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보는 지적 탐구이기 때문이다. 어슐러 K. 르귄의 작품들이 SF를 넘어 일종의 사회과학 소설로 읽히는 것처럼, 이 소설 <스패로>는 정확히 같은 길을 지향한다.


나는 늘 외계 생명체가 발견됐을 때 이 세계의 종교가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생각해왔다. 신은 여섯째 날에 인간을 창조했는데 외계인은 언제 만든 걸까? 설마 안식일에 특근을 하지는 않았겠지? 물론 종교인들이 새로운 대륙과 인종을 마주할 때마다 써 내려간 잔인한 합리화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러나 외계인이 우리만큼, 혹은 우리보다 우수한 문명을 보유하고 있을 땐 얘기가 좀 다를 것이다. 종교는 그 숭고한 의미와는 다르게 늘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로 봉사해왔는데, 저 먼 우주의 이웃이 우리보다 훨씬 강해 도저히 지배가 불가능해 보일 때는 어떤 교리를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하다. 역사상 처음으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득세할지, 아니면 그들을 사탄의 군대로 간주해 성전을 촉구할지. 뭐가됐든 우리 삶의 불안과 공포를 이용하고 폭력을 조장해온 종교들은 한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높은 콧대가 폭삭 주저앉아 골머리를 썩을 걸 상상하면 마음이 날아갈 것처럼 즐겁다.


이 혐오와는 별개로 나는 종교의 탄생이 인간 역사의 필연이라고 믿는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공포가 설명 가능한 이야기로 대체됐을 때 인간이 느끼는 안도를 생각해보자. 이 믿음이 결국 인간을 하나로 결집시켰고, 도시가 만들어졌고, 집단생활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과학 기술이 발달하게 됐다. 종교가 없었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평화로웠을까 생각하다가도 내가 누리는 문명의 이기들이 결국 그걸 계기로 발명됐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어 마음이 착잡하다. 종교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신은 인간이 종교를 만들 수밖에 없도록 세상을 창조한 셈.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부처님 손바닥 위의 원숭이처럼. 나는 이것이 지구인으로서 갖는 내 인식의 한계임을 바란다.


<스패로>는 예수회 신부 에밀리오 산도즈가 외계 문명의 존재에 담긴 신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소설이다. 나는 간질간질 떡밥만 흘리고 핵심 줄거리는 나무늘보처럼 전개하는, 내가 혐오해 마지않는 이야기처럼 이 글을 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모쪼록 내 의도가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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