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을 쫓는 모험 - 상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신태영 옮김 / 문학사상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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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을 쫓는 모험>은 1982년에 출간한 하루키의 첫 장편 소설이다. 군조신인문학상을 수상한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단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장편으로 분류하기엔 양적으로 모자란 면이 있다. 못다 한 얘기가 아쉬웠는지 하루키는 데뷔작의 주인공들을 이 책에 다시 불러 모은다.


그러나 분위기는 한결 다르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뿌리 없이 떠도는 젊은 청년들의 빈 곳을 스케치하듯 훑었다면 이 소설은 미스터리와 모험을 담았다. 제목 그대로, 양을 쫓는 모험이다.


이 이야기에는 이후 하루키 장편에서 등장하는 테마의 씨앗들이 보인다. 여기서 모험을 확장하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되고 악의 실체를 좀 더 명확히 하면 <1Q84>가 된다. 초기작인 만큼 강도는 좀 떨어진다. 어쨌든 첫 모험 아닌가. 인물들도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좀 쭈뼛거리고 이야기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작위적 우연을 겹겹이 포개어 놓는다. 나는 이 유명한 소설가의 작품들을 거슬러 오르고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이 좀 더 눈에 띄는 게 아닌가 싶다. 솔직히, 그렇게 재미는 없었다.


하루키가 일본 사람인 걸 감안하면 그는 매우 특이한 사람이다. 일본인은 과거보다는 현재에 집중한다. 사상과 이론보다는 감각과 경험이 중요하다. 아마 내세가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신앙(신도)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경제 발전 시기에는 이런 것들이 장점이 되어 압도적인 제품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러나 찢기고 짓밟힌 과거를 기억하는 우리 입장에서 저들의 현실 지향적인 태도가 분노의 응어리를 만들어낸다.


그들에겐 반성이 없다. 자꾸만 과거를 물고 늘어지는 한국인이 참 못나고 지긋지긋해 보인다. 유력 정치인들은 여전히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TV에 나와 왜곡된 역사를 공표한다. 이런 태도가 지배적인 일본 사회에서 자꾸만 거울을 들이대는 하루키는 변태, 변종에 속한다. 난징 대학살을 다뤘다고 여겨지는 <기사단장 죽이기>는 출간 이후 테러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지적 토양이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른바 68혁명 세대에 속하고, 학창 시절엔 그 강력한 투쟁에 꽤 깊숙이 관여했을 듯한데, 잡담이 난무하는 그 수많은 에세이 속에서도 당시의 일만큼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마침내 결심을 맺었으나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으로 희망을 잃은 우리처럼 일본의 68세대도 완전히 패배해 이후 깊은 허무에 빠져버린다. 하루키의 초기작에서 자주 등장하는 목적 없는 인간들은 이 상처의 결과물인지 모른다. 그러나 하루키는 이후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고,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기 세계를 지배하는 권력과 그 폭력성을 고발하려 한다. <양을 쫓는 모험>이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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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06-12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기로는 대학생 때 운동권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관찰자였던 것 같아요. 바람의노래를들어라 읽고 이 작품은 안 읽었는데 리뷰 잘 봤습니다~

한깨짱 2022-06-17 15:36   좋아요 1 | URL
아, 운동권은 아니었군요. 생각해보면 역시 그게 어울리는거 같기도 하고요. 저는 아무래도 후기작들이 좀 더 마음에 드네요.
 
근본 없는 월드 클래스 안전가옥 쇼-트 9
류연웅 지음 / 안전가옥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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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 없는 월드 클래스>는 제목 그대로 전통문학의 근본을 단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문도! 가고 싶은 대로 간다' 식의 줄거리에 인터넷 밈을 적절히 버무린 소설로, 작가는 이야기 안팎을 오가며 독자와 소통하는 포스트 모던한 형식을 취한다. 작은 판본에 쪽수도 170페이지가 채 안돼 출판사는 경장편이라 부르는데 스압이 좀 있는 인터넷 사연 정도로 봐줘도 될 것 같다. 이 글을 읽고 <근본 없는 월드 클래스>를 선택할 독자들을 위해 줄거리를 12줄로 정리해보겠다.


1. 주인공 한채연은 '미디어 제작 실습'이라는 대학교 수업에서 불곡고등학교 3학년 1반 김덕배를 인터뷰하게 된다.


2. 김덕배, 그는 축구 경력이 전무했지만 월드컵 예선 최종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극적인 결승골을 넣어 국가의 영웅이 된 고딩이다.


3. 그가 한국 대표팀에 선발된 계기는 '이따위로 할 거면 너네 불곡고등학교 3학년 1반 김덕배나 뽑아라'라는 어느 네티즌의 악플.


4. 우여곡절 예선은 통과했으나 당연히 본선에서 참패 참패 참참패한 한국 대표팀에 국민적 분노는 하늘을 찌른다.


5. 시민들은 대표팀이 입국하자마자 공항에서 선수들과 패싸움을 벌이고 인근은 준 폭동 상태가 되어 상당한 피해가 발생한다.


6. 국가는 가정폭력, 성폭력, 불량 식품, 학교 폭력과 함께 축구를 5대 사회악으로 지정해 프로팀 폐지를 비롯 한국 땅에서 축구 행위를 완전히 근절한다.


7. 김덕배는 사라졌다.


8. 한채연은 김덕배를 찾지 못한다.


9. 하지만 그녀는 김덕배를 인터뷰해야만 한다. 친구들에게 인당 50만 원씩 받고 과제를 전담했기 때문이다. 위약금은 200배.


10. 한채연은 스스로 김덕배로 변해 가짜 인터뷰를 제작한다.


11. 감동한 교수가 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한다.


12. 세상이 다시 김덕배로 들썩인다.


줄거리는 대략 이 정도다. 나름 곳곳에 반전이 숨어있고 실제로 읽어보면 나의 요약본 보다 훨씬 어이없는 전개가 펼쳐진다.


안전가옥의 쇼트 시리즈는 작고 귀여운 소설들을 출판한다. 엉덩이 한쪽이 불룩해지는 걸 각오하면 청바지 뒷주머니에 들어갈 정도다. 읽기가 빠르면 출근-퇴근 한 쌍으로 박살 낼 수도 있다. 호불호는 꽤 갈릴 거라 예상한다. 쇼트 시리즈가 원래 실험적이긴 한데, 걔 중에도 이 책은 톱클래스에 위치한다.


근본을 따지는 사람은 뇌절을 각오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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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산고 -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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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주인 박경리 작가는 1926년에 태어났다. 자기 인생의 첫 20년을 오로지 일제 강점기하에서 보낸 것이다. 그 시절을 직접 체험한 작가가 하는 말은, 그때는 이러저러했다고 들어서 아는 사람이 하는 말과는 차원이 다른 박력이 느껴진다. 물론 그 역사가 너무 옛날이야기가 된 사람들과, 그것을 배워서 아는 사람들에겐 피를 토하는 작가의 심경이 피상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때문에 종종 피해자들은 가해자뿐만 아니라 심지어 같은 민족에게서도 이해할 수 없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당한 건 알겠는데 너무 옛날 얘기잖아. 이제는 미래를 봐야지.'혹은 '뺏기고 짓밟힌 게 뭐 자랑이라고 떠들어. 창피한 줄을 알아.' 같은.


가해자의 입장은 이해한다. 시인하고 사죄하기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일 테니까. 솔직히 상상조차 안 될 수도 있다. 설마 우리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저렇게 말도 안 되는 걸? 역시 한국인들은 과장이 심하고 감정만 앞세운다. 그러나 유린된 역사 앞에서 감정이 아니면 무엇을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일본의 신도에는 스사노오라는 신이 등장한다. 폭풍과 바다를 다스리는 신인데, 한반도 이주민을 신화화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일본인들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는 단면이다. 바다처럼 변덕이 심하고 폭풍처럼 거침없이 분노를 쏟아내는, 통제와 예측이 불가한 민족. 이상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 있다. 툭하면 감정 운운하는 그들의 이면에는 실상 자기 인간성의 부재를 숨기려는 속내가 담겨있는 것이다. 할복자살을 고유한 미의식으로 포장하는 민족. 수치를 겪고 두려워 목숨을 끊지 못하는 자식을 부모가 목을 졸라 살해하는 걸 명예를 지켰다고 칭송하는 민족. 그들의 뿌리에는 인간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문화가 자리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건 이러한 일본의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우리 겨레에도 많다는 사실이다. 위안부 문제가 처음으로 부각됐을 때 그 역사를 지우려고 가장 노력한 것은 바로 대한민국 정부와 시민이었다. 힘이 없어 뺏긴 주제에. 어떻게든 그 수치를 숨기려 자신의 동생과 누나와 언니를 강간의 피해자가 아닌 매춘부로 둔갑시킨 졸렬함. 이 졸렬한 민족은 자신의 형제에게 가해자의 올가미를 그대로 씌워 졸라맸다. 이것이 36년 간 뿌리내린 식민사관의 잔재인지 일본인의 교묘한 언론 전략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 민족의 근본적 결함 때문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됐고,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일본산고>는 오래된 작가의 오래된 글이다. 어법과 단어가 예스러워 의미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 문장도 많다. 때로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향한 무차별적 비난도 등장한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일 관계를 소 닭 보듯 받아들이게 되는 우리의 가슴에 뜨끔한 일침을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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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한국사 - 동아시아를 뒤흔든 냉전과 열전의 순간들
안정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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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몇 가지 문제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특히 학창 시절 주입된 역사 관점이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는 게 문제다. 이런 걸 보면 사람들이 왜 역사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는지, 왜곡된 역사 교과서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것 같아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국사가 자국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쓰이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이 한쪽으로 기울어져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이 단군왕검 이래 반만년을 이어온 단일 민족이라는 신화를 주입받았다. 이 탓에 이방인을 배척하고 하대하는 풍조가 만연한데, 특히 혼혈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얼마 전 발생한 9급 공무원 욕설 사건이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았나 싶다. 외국인을 그렇게 무시하는 민족이 반대로 외국에 나가 인종차별을 당할 땐 그토록 분노하는 게 참 웃긴 일이다.


인류의 기원을 따져봤을 때 단일민족이라는 건 유니콘, 불사조, 해태와 같이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개념이다. 환웅이 단군을 낳아 나라를 일으킨 시점부터 배달민족은 끊임없이 사는 곳을 옮겨왔는데, 그 과정에서 다른 민족과 섞이지 않았다면 유전적 결함으로 민족이 소멸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환웅과 웅녀의 만남 자체가 이민족과 열심히 합쳐 화목하게 살라는 상징이 아니었나 싶다. 전 세계적으로 순혈 신화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민족은 히틀러 치하의 게르만인이나 유대인 정도가 있는데, 그들이 겪었던 환란을 떠올리면 단일민족이라는 신화가 정녕 우리의 삶에 행복을 더할 수 있는지 의심이 간다.


우리가 패왕이라 여기는 고구려도 역사 교과서가 심어놓은 왜곡된 이미지의 전형적인 사례 중 하나다. 고구려는 시작부터 멸망까지 엄청나게 많은 나라와 국경을 마주하던 복잡한 나라였다. 주변국을 오로지 무력으로 제압하는 철기병의 이미지는 가슴을 웅장하게 만들지만 오히려 고구려인들의 실력을 폄하하는 일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고구려인들은 동아시아 역사를 통틀어도 보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외교 감각의 소유자였다. 때로는 어르고 달래고,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이도 저도 안되면 실력 행사를 통해 원하는 바를 쟁취한 똑똑이들.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장수왕 시절에도 싸움은 최후의 수단일 뿐이었다.


고려시대 삼별초의 항쟁도 비슷하다. 우리는 그들을 반몽 민족주의자로 기억하지만 고려를 망친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이 그 시작이었다는 사실은 거의 알지 못한다. 긍정적 성과가 없지는 않다 하더라도 애초에 특정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군사 조직에 불과했던 그들이 명분으로 내세운 대몽 투쟁을 민족의 자부심으로 여기는 건 대단한 착각 아닐까? 그렇게 따지면 섬나라에서 나와 조선과 함께 명나라를 치자고 제안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차 동아시아의 혁명가로 재평가가 필요하다. 김정은은 어떤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핵무기를 만들어 자주국방을 외친 그를 미래의 후손들이 대단한 민족 영웅으로 기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역사적 맥락과 주체의 속내를 따지지 않는다면 역사책에 나쁜 사람으로 기록될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사실 이 모든 문제의 시작과 끝에는 '국뽕'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뛰어난 민족이며 세계의 주인공이었다는 자부심.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묻고 싶다. 우리가 왜 세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가? 이런 생각은 세상에 중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암묵적 차별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가 중국보다 먼저 한자를 만들었으면 우리가 더 뛰어난 민족이 되는가? 구텐베르크보다 200년이나 앞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게 우리가 서양인들의 지적 능력을 압도한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남보다 훌륭하다는 걸 증명해서 도대체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걸까?


학창 시절 드림시어터라는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를 무척 좋아했다. 특히 멤버 중에 존 명이라는 한국계 베이시스트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가 어떤 인터뷰에서 '나는 미국에서 태어났고, 미국인이다.'라고 한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나는 그 인터뷰 때문에 드림시어터가 싫어지기까지 했다.


나는 대한민국인이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나라에도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세계의 주인공, 우주의 주인공이 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주인공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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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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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 교수는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이다. 말투나 표정에선 오만함이 그득한데, 하는 얘기가 틀린 말이 하나도 없고 주어진 제약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창의력이란 원래 밑도 끝도 없이 상상력을 펼치는 게 아니라 한계를 돌파하여 재정의하는 능력이다. 저자가 하는 얘기들에 무리 없이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선언이 아닌 제안. 충분히 실현 가능한 해결책.


저자가 건축을 통해 추구하려는 사회적 가치는 다양성과 소통이다. 아파트가 문제인가? 가끔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될 때도 있지만 진짜 문제는 모두가 '똑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것이다. 똑같아서 이득이 되는 경우는 닭장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양계장에서는 독수리가 나오지 않는다.


얼핏 소통과 건축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2,000년도 전에 민주주의를 실현했던 그리스를 떠올려보자. 그리스에는 모든 시민이 나와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아고라가 있었다. 아고라는 애초에 민주적 이상을 갖고 있던 그리스인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만든 건축물일까, 아니면 아고라라는 '공간'이 그리스인들을 민주적으로 만든 걸까?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아파트 단지의 아이들이 연립주택단지의 아이들을 만나 노는 걸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분리된 공간은 소통의 단절을 낳는다. 소통의 부재는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의 씨앗이 된다.


오늘날 SNS와 메타버스, 게임 같은 가상공간의 힘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혹자는 이런 세태가 우리가 우려하는 소통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망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교류가 네트워크로 한정되는 바람에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인터넷에서 우리는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의견을 주고받는다. 내 의견에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은 친구고 비판하면 안티다. 20년 지기와 손절하기? 버튼을 한번 누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모여 의견을 나누면 그 생각이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하기 쉽다. 자신의 생각이 '정상'이고 그 외는 전부 '비정상'이 되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의 익명성은 사람들의 폭력성을 극단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유튜브, 라이브 방송, 인터넷 기사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고 있으면 가상공간이 소통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란 생각에 헛웃음이 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반목은 사실상 인터넷에서 시작해 성장한다.


도시는 원래 다양한 삶과 생각이 모여 융합하는 용광로였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생각의 교류가 많아졌고 그로 인해 혁신적인 발전과 발명이 가능했던 것이다. 창조는 같은 생각이 충분히 많이 모였을 때 탄생하는 게 아니라 다른 생각이 충돌하면서 발생한다. 그러나 현대의 도시들은 이러한 장점을 대부분 상실했다.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똑같이 생긴 학교에 다니고 똑같은 옷을 입는다. 그러다 보니 가격과 브랜드, 동네가 중요해진다. 사람들은 똑같다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담장을 세우고 차별을 한다.


도시의 주인이 자동차가 된 것도 문제다. 도로는 점점 넓어져 먼 곳을 가는 것은 쉬워졌지만 바로 옆의 단지와는 더욱 단절되었다. 심지어 인터넷 상거래의 폭발적 성장은 이러한 단절을 심화시키는 주범이 됐다. 사람들은 상업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할 기회가 생기는데 걸을 일이 없고, 집 앞 마트에서 양파를 살 일이 없으니 다른 생각들끼리 만나 충돌하고 융합하는 기회 자체가 소멸한 것이다.


우리가 생각을 바꿔야 세상이 바뀌는 걸까?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의지만으로 바뀌는 게 아니다. 인간의 정신은 공간의 영향을 받는다. 생각이 물질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물질이 생각을 지배하는 경우가 더 많다. 유현준 교수가 활약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건축은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바꿔 우리의 사회를 변화시키는가.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세상을 바꾸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p.s -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은 그가 최근에 시작한 유튜브에도 동일하게 소개된다. 책 읽기가 부담이라면 그쪽을 정주행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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