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포로 아크파크 1 : 기원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마르크-앙투안 마티외 글 그림, 이세진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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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파크 시리즈의 1권 '기원'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유머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유들을 아나니'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들은 아직 이성의 족쇄에 풀려나지 못하는 나를 비웃으려는 듯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들로 견고한 성벽을 만들어 낸다.

이 수수께끼의 주인공은 물론 쥘리우스 코랑탱 아크파크다. 줄여서 J.C. 아크파크, 아니 그냥 아크파크라 부르자. 그의 직업은 공무원이다. 유머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행정고시를 통과한 고위직인지 9급 말단에서 시작해 여전히 말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행색과 주거형태를 봤을 때 말단직일 거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혹시 말단직이든 고위직이든 매일매일 공평하게 감내해야 하는 사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그건 누구나 아침을 맞이해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이 말은 누구나 '출근'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람쥐와 쳇바퀴? 뿡야!  

 

 

 

쥘리우스 코랑탱 아크파크, 아니 아크파크도 일어나자마자 출근을 준비한다. 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넘실거리는 인간의 파도 위로 아크파크도 겨우겨우 몸을 섞는다. 백과 흑으로만 그려진 건물과 사람들이 숨통을 조여오듯 컷들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다. 시각적 질식을 위한 완벽한 시도! 

 

 

 

 가까스로 사무실에 도착해 보니 편지 한 통이 와 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는게 인간의 운명이다. 아크파크도 이 편지를 열어 버린다. 편지 안에는 아크파크의 아침을 그대로 묘사하는 만화가 들어 있다. 그 만화의 제목은 '기원'.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자신의 과거를 그대로 묘사하는 만화를 그 날 하루 동안 두 번이나 받은 아크파크는 이 기묘한 사실을 파헤치기 위해 해결사 달랑베르 형제를 찾아간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속수무책. 심지어 기원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아무도 파악하지 못했다. 아크파크의 세계에서 '기원'이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아크파크가 편지 봉투에 들어있던 나머지 페이지들을 발견한다. 이 역시 '기원'이라는 만화책에서 찢어낸 것이 확실했으나 그것은 아크파크의 과거를 그대로 묘사해 놓은 페이지와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아크파크의 미래를 얘기하고 있었다.

여기서 아크파크는 실존에 대한 철학적 문제에 직면한다.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쳇바퀴를 돌리던 다람쥐가 잠시 멈춰선다. '나'는 점점 익숙한 세계로부터 추방된다. 

 

 

 

살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같은 인식의 전환기를 맞이한다.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뿌리째 뽑혀나가는 자아의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옮겨 심으려 한다. 이런 이식의 방법으로는 단연코 종교에로의 귀의가 압도적이다. 신께서 우리를 만드셨다. 우리는 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이렇게 외치고 나면 삶이 나가야 할 길은 명확해진다. 인간의 뇌에서 고민이 사라진다. 인식의 전환기, 세계와 존재의 근원으로 내려갈 수 있었던 일생일대의 기회가, 이렇게 맥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아크파크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다행히 종교를 찾지는 않았다. 아크파크는 나그네가 되기를 원했고 봉투에서 나온 자신의 미래를 부정했다. 하지만 '그 만화가 예언이라면 아크파크의 이러한 거부 또한 예견되었을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p. 25). 그리하여 그는 만화에서 예언된 27 페이지를 기다려 과연 예언대로 되는지 확인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예언은 곧 현실이 됐다. 

 

 

 

예언대로 따라 들어간 서점에서 아크파크는 이 기묘한 세계를 연구하고 있는 연구청을 발견한다. 연구원들은 그곳에서 이 세계가(만화 '기원'의 세계) 사실은 어떤 만화(만화 속에서 파크의 과거와 미래를 보여줬던 그 만화)와 똑 닮았을 거라는 가정을 증명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크파크의 '예정된' 방문은 이 같은 가정을 사실로 만드는데 완벽한 근거가 될 수 있었다. 대발견을 앞에 둔 연구청장 이고르 우프는 아크파크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누군가 보낸 사절과 같소, 아크파크 씨! 당신이 없었다면 이 이야기도 아마 존재할 수 없었겠지... 배경, 인물, 아무것도 없었을 거요.' (p. 34)

 

<기원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내 리뷰는 원래 이렇게 시작했다.

'난해한 책이다. 구매를 충동질하는 문장들로 글을 가득채우고 에둘러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쉽지 않다. 이 책을 읽는 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것만큼 힘든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화를 반복해서 '읽을' 수록 이 책에 난해한 낙인을 찍어 서가 구석으로 밀어 넣는 건 부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성급한 판단으로 이 책의 미래를 결정짓기에는 만화가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을 함축하고 있었다.

꿈의 포로 아크파크는 그 시작에서부터 다양한 철학적 해석의 여지를 남기며 미래를 향해 수상한 걸음을 내딛는다. 이미 한번 본 컷들이지만 이들과 다시 마주칠 때마다 하고싶은 이야기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게다가 불현듯 등장하는 실험적인 컷 구성은 독자의 뇌수를 파고드는 찌릿한 자극이 되기까지 한다. 

 

 

<구멍난 시간축을 통해 만화는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본다> 

 

 아크파크 시리즈 1권 '기원'은 원래 43 페이지까지 있었던 듯 보이나 42 페이지에서 그 43페이지를 태워 버리는 바람에 만화는 42페이지에서 끝나고 만다. 이어지는 새카만 페이지 위로 백색의 몇 글자가 도발적으로 떠오른다.  

 

 

 

아시다시피 2권은,
내 서가에 얌전히 꽂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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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지도 - 동양과 서양, 세상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선
리처드 니스벳 지음, 최인철 옮김 / 김영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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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동양 역사상 최초의 근대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가 된 일본은 함대를 구성해 당시 무적이라 불리던 러시아 발틱 함대를 쳐부쉈다. 그리고는 제로센 비행기를 만들어 진주만을 습격했다. 이 일로 일본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 최강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이 있은지 70년 만의 일이다.

이걸로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근대 자본주의 국가란 것의 위력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공자왈 맹자왈로는 굶주린 백성을 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막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로써 수 천년간 지배해오던 사고방식과 전통은 근대화의 쓰나미에 휩쓸려 폐허의 잔해가 되어 버렸다. 대한민국을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한강의 기적으로 만든것도 이 근대화의 쓰나미 덕분이었다.  



  



문제는 이 근대화라는 것이 사실상 서구화와 동의어라는 것이다. 근대화를 이룬답시고 받아들인 서구 문명은 동양인의 생활과 사고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이 과정에서 동양적인 것=틀린 것, 서양적인 것=옳은 것 이라는 잘못된 공식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서구 문명의 잔인성과 복잡한 세계를 단순하게만 이해하려는 성급함이 수 천년간 쌓아 온 전통과 지식 체계를 완전히 짓밟아 버린 것이다.

이렇게 넝마가 된 '동양식 사고방식'을 다시 주목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외국인이었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니스벳은 동양식 사고방식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다름'이란 각각의 고대 문명이 형성되는데 영향을 미친 생태, 정치, 경제적 환경의 차이에서 유래한다고 본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동원된 방법은 서양을 고대 그리스로 동양을 고대 중국으로 치환하여 비교하는 것이다. 
물론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단순히 고대 중국과 고대 그리스의 차이로 단순화하는데는 많은 위험이 있겠지만 이 두 문명이 각각의 대륙에 끼친 막대한 영향을 고려해 볼 때, 이는 완전히 잘못된 비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경제의 차이>

알다시피 고대 그리스는 수 많은 도시 국가가 모여 형성된 섬나라였다. 사방이 바다. 경작지는 매우 적다. 이런 곳에서 먹고 살려면 사냥, 수렵, 목축 그리고 무역업이 적합했다. 이런 일들은 농업에 비해 사람들의 협동력을 
덜 필요로 했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이 희생을 감수하면서라도 다른 사람들과 화목을 유지하며 살아갈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개인적 의사와 욕구를 표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이런 욕구들이 충돌했을 때는 적극적인 논쟁을 통해 해결하려는 방식이 선호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논리학과 수사학이 발달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반면 고대 중국은 사방이 땅이었다. 경작할 땅은 차고 넘친다. 그러다 보니 고대 그리스 보다 무려 2,000년이나 먼저 농경 정착 생활이라는 것이 등장했다. 농사라는건 단순히 따져봐도 타인의 손길이 절실한 일이지만 관개 시설의 구축이라던가 재해 복구, 방지를 위한 대규모 토목 공사를 두고 봤을 땐 중앙 권력의 통제와 지역 사회의 단결 없이는 절대로 불가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대 중국인에게는 이웃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논쟁을 피하고 화합을 꾀하는 것)은 단순히 예의문제가 아니라 생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중요한 생활 방식이었던 것이다.


<정치의 차이>


두 나라의 정치 체제 차이는 위에서 언급한 사고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이런 차이를 더욱 강화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리스는 수 많은 폴리스가 독립 국가 형태로 존재하는 일종의 공통 문화권이었지 하나의 통일 국가가 아니었다. 따라서 아테네가 싫은 사람은 얼마든지 다른 도시로 옮겨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죽기 전 망명 길을 떠나라는 제자들의 권유가 있었지만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끝내 독배를 삼키고 말았다). 

이처럼 정치적 망명이 쉬운 사회에서는 국가 권력의 눈치를 보지않고 마음껏 발언할 수 있는 저항적 지식인들이 많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나라. 심지어 통치자라 할 지라도 도편추방제의 공포에 떨어야 했던 인류 최초의 민주 공화국. 이 같은 자유의 보장은, 비록 흩어졌다 합쳐졌다 하기는 했지만 역사의 대부분을 통일된 전제국가의 지배로 채웠던 아시아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경제, 정치의 차이에서 비롯된 형이상학적 신념 차이>

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보자. 고대 중국인들이 경제적, 정치적 활동을 하기 위해선 밖으로 주의를 돌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야 했고, 한편으로는 위로 눈을 돌려 권력자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이처럼 끊임없이 사회적 상황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생활 습관은 '전체 맥락' 속에서 '나'를 파악하는 경향을 만들었으며 이것은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이같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신'을 사회적 의무와 인간 관계들로 이루어진 커다란 네트워크 속에서 파악하면, 당연히 이 우주는 독립적이고 불연속적인 원자들의 결합이 아니라 연속적인 관계들의 유기체로 인식된다. 따라서 어떤 현상의 원인을 설명할 때에도, 개별적인 개체들의 내부 속성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그 개체가 속한 전체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p.192)

반면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활은 이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들의 주 산업은 농업이 아니었으므로 다른 사람과의 협의를 거치지 않고도 스스로 가축을 칠 곳을 계획하고 어떤 상품을 어디에다 팔 것인지 결정할 수 있었다. 주로 서양인들의 강점으로 분류되곤하는 분석적, 논리적 사고의 발달은 바로 이런 생활 습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분석적 사고의 특징은 현상을 파악함에 있어 사물 자체의 속성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년 마을을 찾아오던 학이 더이상 오지 않았을 때를 가정해 보자. 이때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인들은 '마을 사람들이 부덕한 탓', 즉 학과 인간의 정서적 관계에서 이유를 찾는 반면 서양인들은 '학의 생태'를 파악하고 '마을의 환경 변화'를 고려하여 논리적 이유를 유추해낼 것이다. 둘중 어떤 문명이 더 '과학적'으로 발달할 가능성이 있겠는가? 이같은 형이상학적 신념의 차이가 서양 문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는 건 두 말할 필요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누가 옳은가?>

그래서 누가 옳냐고? 이런 질문에는 역시 둘다 옳다는, 다소 맥빠지는 대답만이 정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인들이 과학이라는 불도저를 이끌고 문명의 발전에 압도적인 힘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논리적, 분석적 사고를 앞세워 과학의 초석을 세웠고, 그 뒤로는 탄탄대로였다. 그런데 이제와서 그들이 동양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똑똑한 머리로 만들어 놓은게 문명의 충돌, 종교 전쟁, 인종 청소라는 사실에 그 자신들도 질려버렸기 때문이리라. 발전은 더뎠지만 타인과 심지어 무생물까지도 존중하는 동양인들의 사고 방식에 찌릿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이 책은 동서양의 사고 방식 차이를 인종의 태생적 문제로 한계 짓지 않고 다양한 환경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그 차이에 대한 근본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을 보여준다. 책 내용 또한 쉽고 흥미로운 심리 실험들이 포함되어 있으니 글로벌 시대에 남과 더불어 살아갈 사람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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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이 된 철학교수
프랭크 맥클러스키 지음, 이종철 옮김 / 북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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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프랭크 맥클러스키는 철학과 교수다. 그는 그 곳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을 가르쳤다. 그 시대의 철학은 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할 덕목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다. 

논리적으로 다듬어진 답들은 교과서에 빼곡히 적혀 있지만 아무래도 피부에 와 닿지는 않는다. 희생과 용기를 이해하는 건 머리지만 차도로 뛰어드는 아이를 가로채는 건  두 팔과 다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의 
철학 교수라면 누구나 앎과 실천을 통일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강의는 압도적인 위엄을 갖추게 될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철학교수가 소방관이 된데는 아마도 이런 계산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Fireman이라고 하면 엄청난 존경을 받는다고 한다. 아이들은 크롬 도금으로 번쩍이는 소방차를 보면 오줌을 지릴 정도로 흥분한다. 그래서인지 의용소방대원이라는 것이 끊이지 않고 모집되는 모양이다. 

의용소방대란 자원봉사의 성격이 짙지만 지자체의 보조금과 각종 기부금을 받아 월급, 보험가입, 교육 심지어 퇴직금까지 지급하는 일종의 정부 기관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곳의 구성원들은 월급과 퇴직금을 바라고 모여든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엄연히 생업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희생하는 대가로 위험한 삶을 넘겨받은 고귀한 시민들이다. 미국의 경우 1,148,850명의 소방관 중(2008년 기준) 무려 72%에 달하는 827,150명이 이렇게 바보같은 거래를 한 사람들이라고 한다. 


 

 

 <출처: Flickr,  ricardomakyn

 

길에서 만나면 평범하고 온순해 보이는 사람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글거리는 불 속으로 뛰어드는 이유가 뭘까? 그저 어릴적 추억을 잊지 못하는 어른들의 로망인 걸까? 아니면 Xsports마저 싫증난 사람들의 철없는 취미인 걸까? 마호팩 펄스의 소방대원들은 거의 대부분이 마호팩 펄스 출신의 부모나 형제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불 냄새를 맡으며 자라왔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순간 Fireman이 되어 있었다. 이건 의무나 사명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들은 그저 되야할 것이 된 것 뿐이다.

프랭크 맥클러스키 또한 이런 운명에따라 마호팩 펄스의 소방서에 발을 디뎠다. 머시 대학의 철학 교수는 결코 지식과 실천을 통합하기 위해서라든가 존경받는 아버지, 용감한 시민이 되기 위해 Fireman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소방관이 됐고 출동한 화재 현장에서 주변의 모든 것들을 무로 돌리는 오렌지 빛 신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런데 그 순간 프랭크 맥클러스키는는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지 깨달았다. 여지껏 살아왔던 모든 시간들이 바로 그 화재 현장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출동을 마치고 돌아온 소방관들은 여느때처럼 농담을 주고 받으며 피자를 먹고 맥주를 마셨다. 소방서 뒤뜰의 잔디밭에는 따스한 햇빛이 비추고 있었다. 그는 그 속에 섞여 조용히 울려오는 가슴의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자신이 왜 소방관이 됐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살다보면 때로 길을 잃는 경우가 있다. 내가 나일 수 있게 해주는 오래된 신념과 내가 진짜 바라는게 무엇인지 속삭여주던 마음의 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럴 때 시간을 멈춰두고 지난날을 돌아본다. 이 시간 여행 속에서 사람들은 올바른 길을 되찾을 때도 있지만, 오히려 더 캄캄한 미로 속에 갇히곤 한다. 탈출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보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제자리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피운
불빛은 어느새 어둠의 일부가 된다. 애타게 기다려 보지만, 잊혀진 소리는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저자는 머리말에 이 책을 '고향으로 가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라고 썼다. 본문 중에는 '우리 모두는 올바른 길을 알기 어려운 인생에서 전기를 맞게 된다'라고도 썼다. 길을 잃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큰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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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 지적 망국론 + 현대 교양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정환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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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대학생들은 대체로 똑똑하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스터디를 구성해 취업을 포함, 각종 시험에 대비하며 최대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강연회를 찾아 듣고 자기계발을 위해 TV와 인터넷을 끈다. 이 다음에 꼭 성공할 것 같은 대학생들을 보라. 그들은 쓸데 없는 일에 질색한다. 그들은 효율과 합리의 화신이다.

효율과 합리의 기본 규칙은 필요 없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선 좋은 학점을 받아야 한다.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선 시험을 잘봐야 한다.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선 시험에 나올 법한 것들만 공부해야 한다. 고액의 쪽집게 과외!

하지만 이렇게 공부한 학생들은 고작 A라는 질문에 A'를 내놓을 뿐이다. 해답이 제법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것은 획일화 되어있고 따분하기 그지 없다. 그들은 결코 B나 C라는
답안을 생각해 내지 못한다. 그나마 예상했던 A가 나왔기에 망정이지 D나 Z같은 문제가 나오면 그들은 아예 대답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위 공무원이나 판검사라고 하면 웬지 모르게 딱딱하고 답답한 느낌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정답을 내는데는 도통해 있다. 그들은 선례와 규칙을 따르는 것만큼은 귀신같이 해낸다. 하지만 이러한 범주에 들지 않은 사건을 마주했을 때는 커다란 당혹감을 느낀다. 그들은 게임의 규칙에 지배당할 뿐, 결코 게임 자체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대학은 어떠한가? 국가와 기업에 인재를 공급하는 최대 납품처인 대학이 실무 교육의 광풍에 휘말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회는 해당 전공을 몇 년씩 공부한 학생들이 정작 실무에는 젬병인 사실에 볼멘 소리를 해댔고, 기업 총수의 주머니 돈으로 연명하는 정치인과 교육자들은 하나같이 대학 교육의 허와실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인 교육이란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믿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사원을 겨우 쓸만한 부품으로 키워내는데 1인당 몇 억씩이나 든다며 한탄한다. 언론은 이렇게 재교육에 낭비하다간 국가 기간 사업의 경쟁력이 약화될까 두렵다며 설레발을 친다. 그들이 대학에 원하는건 이런거다.

'공학인증을 받고 복수전공을 하지 않은 컴공과 졸업생 20개 추가요.' 

그래서 오늘날 잘나가는 대학이 갖춰야할 건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줄줄이 뽑아내는 대량 공급처로서의 역량과 시스템이다. 공학도도 문학을 알아야 하고 경제, 경영학과 학생들이 철학과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은 
구한말 대한민국을 말아먹었다고 비난받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비유된다. 

바야흐로 대학에는 교양 교육이 사라진다. 심지어 입시 교육에서 조차 기초 과학의 과목수가 줄어들고 역사와 문화가 사라진다. 세계 최고의 인재가 입학한다는 동경대조차 생물을 배우지 않은 의대생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모르는 인문대생이 있을 정도니 이 세계가 전반적인 교양 결핍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교양은 단순히 지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르네 데카르트가 몇 년도에 태어났고 리처드 파인만이 무슨 법칙을 발견했는지 줄줄 외우는 것이 교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KBS 퀴즈 대한민국'에 출연해 오천만원의 상금을 놓고 다투는 것 외에 그다지 할 일이 없다.

교양은 보다 광범위하고 근원적인 지식이다. 학문의 계보를 흔히 나무에 비유하는데, 그 뿌리에 해당하는게 바로 교양이다. 그래서 교양을 모르면 원리를 모르고 원리를 모르면

A의 답이 A'고 B의 답이 B'라는걸 일일이 알려줘야 한다. 원리를 모르고서는 A와 B를 통해 C를 추론해 내고 A와 C를 합해 D를 만들어 내는 일을 하지 못한다. 

교양의 부재가 단순히 창의력의 부재만으로 끝나면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교양의 부재는 반드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오늘날 자신이 하는 일에만 고도로 집중한 나머지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을 보라! 
그들은 3.5파운드의 잘나빠진 뇌를 이용하여 비효율적인 관료제와 무한경쟁과 타인에대한 무관심과 이기주의와 배금주의, 그리고 모럴해저드를 만들어냈다! 

 

 

 

이 세상에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이 세계의 지배자들이 자기가 하고 있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전문가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통 남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문제가 발생하면 뚫어져라 각자의 나무만 쳐다본다. 숲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느새 소통이 사라지고 시끄러운 소음만이 남으면, 하늘에서 불폭탄이 떨어져 문제가 되는 숲 전체를 날려 버린다. 

21세기에 분쟁이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해결된다.
오늘날 세계 최고라고 손꼽히는 많은 대학에서는 이런 바보들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대개 이런 바보들이 지구를 지배한다.


P.S - 나는 최첨단 전자기기를 만드는 굴지의 회사에서 니체와 실존주의와 커트 보네거트와 찰스 디킨스에 대해 논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저 떨리는 마음으로, 매우 감명 깊게 읽은 소설 한 권을 추천하는 CEO를 단 한 명이라도 보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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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다치바나 식 독서론, 독서술, 서재론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이언숙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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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치바나 다카시는 1940년에 태어나 도쿄대학 불문과를 졸업한 수재로 졸업 후 주간문춘이라는 잡지사를 다니다 2년 만에 퇴사, 그 해 도쿄대학 철학과에 재입학한, 딱 봐도 괴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천재타입의 인간이다. 좀 더 황당한 얘기를 해주자면, 이 사람은 책을 너무 많이 읽어 책으로 가득 채운 빌딩 한 채를 갖고 있다. 벽면에 커다란 검은 고양이가 그려져 있어 고양이 빌딩이라고 불리는 이 곳은 지하 1층, 지상 3층 총 4층에 걸쳐 타치바나 다카시가 읽은 책 수만 권이 보관되어 있다.

이 사람에 대한 감탄은 읽은 책이 많다는 걸로는 끝나지 않는다. 그의 저작들을 살펴보면, '일본공산당연구', '원숭이학의 현재', '뇌사', '거악 vs 언론',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 '우주로부터의 귀환' 등 역사, 사회, 철학에서 생물학, 뇌과학 그리고 우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써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분야들은 단순히 한 분야를 파해치다 보면 그 주변의 것들도 자연스레 알게 되는, 이른바 '연계 학문'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완전히 독립된 분야여서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전 인생을 걸고 공부해야만 하는 것들, 그 중에서도 최첨단을 달리는 난해하고 까다로운 전문 분야인 것이다. 


 

 

 

한 인간이 이 모든 지식을 섭렵하는 게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가능하다면 거기에는 두 가지 가정이 필요하다. 천체물리, 고전역학, 분자생물학, 열역학, 역사, 철학, 사회, 교육, 법학, 의학, 인류학 등 세상의 모든 지식을 그 밑바닥에서부터 추론해 터득할 수 있는 기초 학문을 각각 A4 다섯 매 이내로 요약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태어날 때 부터 갖고 있었거나, 보통 사람보다 열 배는 느린 시공간에 살고 있다는 가정 말이다. 얼굴이 심하게 못생겼다는 점을 감안할 때 외계인이나 괴물 따위를 가정해 볼 수도 있지만 대체로 인간의 형태와 비슷하기에 이 같은 가정은 제외 하겠다. 대신 그의 지식 탐구 과정을 조금 더 살펴 보기로 하자. 

 

 

 

이 남자는 자기가 맡은 일이라면 어떤 분야이든 상관없이 먼저 그와 관련된 책 수십권을 읽고 시작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원숭이학의 전문가와 대담이 잡혀 있다면 원숭이학 자체는 물론 생물학, 동물학 등 관련된 분야를 적어도 큰 그림만큼은 정확히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선행 학습을 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읽는 책을 쌓아 올리면 1~2m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그것도 시작할 때니까 그 정도지 본격적으로 일이 진행되어 책이라도 쓰게되면 하나 둘 씩 쌓인 자료와 책이 산을 이뤄 매번 그 자료를 보관할 아파트를 새로 임대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도쿄 한 복판에 우뚝 솟은 고양이 빌딩은 지식을 과시하고 싶은 어느 괴짜의 허영이 아니라 오직 필요에 의한, 필요를 위한, 필요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이 많은 책들을 모두 읽을 수 있을까라고 의아해할 것이다. 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 일부는 '전부 읽었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우리가 '읽었다'라는 말에 대한 정의를 각각 다르게 내리는 한 이러한 논쟁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목차, 도입부의 수십 페이지 혹은 각 단락의 첫 문장만 읽는 것만으로도 그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사실상 서문에 전부 써있으며 각 단락의 중심 주제는 주로 첫 문장에 제시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책 한 권을 십분만에 읽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책 뒤 쪽의 색인만 있으면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단순 정보를 읽는데 수 시간을 할애하거나 더 이상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을 꾸역 꾸역 읽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단 하루 만에도 우리가 공들여 읽어야 할 보물같은 책들은 수천 권씩 생겨난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이렇게 진화하는 지식의 속도를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러니 될수 있는 한 몸을 가볍게 해 광범위한 지식 세계를 두루두루 탐험해 가자는 것이 타치바나 다카시 독서의 핵심인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역시 '이래도 되나?'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된다. 핵심은 지식이 형성하고 있는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지 지식 자체가 아니다. 예전에는 어느 내용이 어떤 책 몇 페이지에 나오는지 기억하는 게 지식인의 척도로 여겨졌지만 요즘같은 인터넷 시대에 암기란 구시대적 착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그 두껍고 지루한 책을 덮어 버리는데 주저하지 말라. 머뭇거리기엔, 우리가 가야할 길이 너무나도 멀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는 저자의 독서사(史)를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에세이가 아니다. 이 책에서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나 장정일의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적잖이 실망할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저자가 '독서'에 관해 여기저기 기고했던 글, 혹은 강의 기록의 모음이다. 그래서인지 형식과 주제가 다소 산만한 면이 있다. 정작 듣고 싶은,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 대한 대답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인터뷰로 수록되어 있지만, 그의 독서법을 받아들여 후루룩 읽어 치웠으니 그 내용은 스스로 상상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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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4: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깨짱 2011-05-11 21:05   좋아요 0 | URL
와! 코맥매카시 책을 출간하고 있는 민음사분이 댓글을 남겨주시다니! 영광도 이런 영광이 없네요! 메일 주소는 wired@huskycode.com 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네요.

2013-07-11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깨짱 2013-07-11 19:31   좋아요 0 | URL
와 영광이에요! 현대미학 강의는 쓰면서도 제대로 쓴건지 헷갈리는 리뷰였는데, 좋게 보셨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열심히 쓸테니 종종 놀러오세요. 저도 자주 놀러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