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누가미 일족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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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탐정 김전일이라고 들어 봤는가? 평범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그가 가는 곳엔 언제나 피와 살육이 넘쳐 흐른다. 그가 서있는 곳은 언제나 밀실로 변하고 바로 그 곳에서 김전일 소년과 그의 여자친구 미유키, 그리고 몇몇 인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살해 당한다. 소년 탐정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지만 실상은 가는 곳마다 죽음을 몰고 다니는 저주받은 인간. 언제나 모든 사람이 죽고 난 뒤에야 '범인은 이 안에 있어'라고 외치는 소년. 그런데 이 소년이 도저히 풀기 힘든 트릭을 만날 때 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는 말 한 마디가 있었다. 바로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것. 도대체 할아버지가 누구길래? 당시에는 이 만화의 숨막히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 이런 의문을 가질 여력도 없었다. 짐작하겠지만 지금 내가 하려는 얘기는 소년 탐정 김전일(원제: 킨다이치 소년의 사건 수첩)이 아니다. 바로 그의 할아버지 킨다이치 코스케에 대한 얘기다. 

 

 

킨다이치 코스케는 1948년, 일본의 추리 소설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가 탄생시킨 가상의 탐정으로 신장은 다섯 자 네 치(163.3cm 정도), 체중은 십 사관(52.5kg)이라고 한다. 외모는 평범 중에 평범, 차림새는 주로 더벅머리에 중절모를 쓰고 기성복 하카마에 게다를 신은 모습이다. 흥분하면 더벅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못생긴 외모에 지저분한 습관까지, 그리 인상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추리 능력 만큼은 보통이 아니다. 1948년 '혼징 살인 사건'을 해결했다. 그 후로 '옥문도', '팔묘촌'을 거쳐 '이누가미 일족'에 이르러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한다. 이 글은 '이누가미 일족'에 대한 리뷰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일본 제 일의 재벌, 생사왕 이누가미 사헤이가 8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자 이누가미 일족의 대저택에 팽팽한 긴장감이 조여들고 있었다. 문제는 역시 유산이었다. 

이누가미 사헤이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어머니가 모두 달랐다. 그래서인지 자매들끼리 사이가 좋지 않다. 자매들은 각기 아들을 한 명 씩 두고 있었는데, 징집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않는 장손 스케키요를 비롯해 둘째 딸의 아들 스케타케, 셋째의 자식 스케토모가 그들이었다. 짐작하다시피 이들의 사이도 그리 좋은 편은 못된다. 사이가 나쁜 어머니들 밑에서 자랐으니 가족의 끈끈한 정 같은걸 배웠을리 만무하다. 이들은 명목만 가족이었을 뿐 실제로는 남남과 다름없었다.  

더욱이 이들은 일본 최고 재벌가의 손자들 아닌가. 아무리 유산이 많더라도 세 명이 나눠 갖는다면 뒷맛이 개운치 않다. 그러니 그들에게 형제란 차라리 없어져 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누가미 사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리 없는 이 비밀스러운 남자는 마지막까지 요상한 유서를 남겨 일족을 질투와 욕망의 화산 밑으로 던져 넣는다. 

 

 

이누가미 일족에게는 식객이 한명 있었다. 다마요. 절세의 미녀였다. 다마요는 이누가미 사헤이가 빈털털이 고아일 때 그를 거둬 들인 나스 신사의 신주 노노미야 다이니의 손녀였다. 노노미야 다이니는 이누가미 사헤이를 먹이고 입혔을 뿐 아니라 그가 사업을 시작할 무렵 결정적인 자본을 빌려준 사람이기도 하다. 일본 제 일의 부자가 된 뒤에도 그 은혜를 잊지 않았는지 이누가미 사헤이는 노노미야 가문의 식구들을 극진이 보살폈다고 한다. 다마요의 어머니 노리코 그러니까 노노미야 다이니의 외동딸이 죽고 나자 다마요는 이누가미 일족에 들어와 식객이 된다. 그러나 이누가미 사헤이의 유서가 공개되자 이 식객은 열 두칸 다다미 방을 가득 채운 긴장과 기대감이 순간 질투와 시기, 경멸과 증오로 변해 자신을 찔러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누가미 사헤이가 자신의 모든 유산을 다마요에게 물려줬던 것이다.   

이누가미 일족의 번영에 있어 노노미야 다이니의 역할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누가미 사헤이 보은은 어딘가 이상한 생각이 들 정도로 지나친 것도 사실이다. 아니, 단순히 지나치다고 평하고 그칠일은 아닌게 이 유서가 공개된 이후로 이누가미 가문은 누가 누구를 죽여도 이상할게 없을 정도로 증오와 욕망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고아로 태어났음에도 일본 재계를 제패할 정도로 신묘한 남자였던 이누가미 사헤이, 그러나 그도 죽음을 앞에 두고서는 역시 냉철한 판단력을 잃고 말았던 걸까? 한가지 다행인건 다마요가 이누가미 사헤이의 세 손자중 한 사람과 결혼을 해야만 일족의 모든 것을 상속 받을 수 있었다는 거다. 그러나 이 '다행'이란 과연 누구에게 해당하는 말일까? 다마요의 마음만 얻으면 일족의 모든걸 차지할 수 있는 세 손자들인가? 아니면 그들만 사라지고 나면 부와 권력을 독식할 수 있는 다마요인가? 

 

  

 

나는 지난 수 개월 동안 제대로 읽을만한 장르 소설을 찾아 방황했지만 수확은 신통치 않았다. 베스트셀러 목록의 단골 손님이라는 일본 현대 작가들의 소설은 대개가 왜 읽는지 모를만큼 절망적이었다. 앞으로도 일본 현대 문학은 무라카미 류의 'Sixty Nine'을 능가하는 소설을 내놓진 못할 것 같다는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요코미조 세이시의 '이누가미 일족'은 간만에 읽는 즐거움을 만끽한 장르 소설이었다. 연쇄 살인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듯한 소설의 분위기 탓에 끔찍한 사건의 긴장감이 약화된다는 점, 그리고 뻔한 트릭과 지나친 우연이 겹쳐 추리의 밀도가 다소 떨어진다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게 바로 장르 문학의 멋과 맛인 것을.  

 

<요코미조 세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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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포로 아크파크 2 : 사...
마르크-앙투안 마티외 글 그림, 이세진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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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기원'에서 작가가 마지막 페이지를 태워 버린 것을 기억할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아크파크와 그의 세계는 완전히 산산조각나 우주로 우주로 뻗어 나갔다. 마치 태초의 빅뱅처럼.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세계는 다시 한 곳으로 수렴하여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곳은 '기원'의 마지막 페이지를 태우고 있는 작가의 작업실이다. 타들어가는 페이지, 늘어 놓은 종이와 잉크, 지우개와 붓통, 그리고 커피가 가득 담긴 찻잔. 아크파크는 중력에 이끌려 작가 옆에 놓인 커피잔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우주의 기원은 깜깜한 커피?  







 

탕! 탕! 탕!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아크파크는 잠에서 깬다. 역시 꿈이었다. 아크파크를 찾아온 사람들은 '생활 공간 검사관'. 아크파크의 아파트를 철저히 측량해 그가 공간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검사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측량이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싶었는데, 아크파크가 열어 놓은 장롱 서랍이 문제였다. 이것은 아크파크가 열어 놓은 서랍의 크기만큼 공간을 낭비하고 있었다는 걸 명백히 증명하는 장면이었다. 다급해진 아크파크는 검사관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장롱 서랍을 닫으려 하지만 이게 바로 검사관들의 함정. 아크파크는 '측량도구훼손죄'에 '잘 닫히지 않은 서랍 은닉죄'를 저지른 현행범으로 긴급 체포된다. 세상에!




 


 

재판부는 아크파크에게 따귀 두 대를 선고했다. 형은 예정대로 집행됐고 아크파크는 성 밖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추방된다. 그 곳을 지키던 문지기는 아크파크가 남쪽에 보이는 역으로 가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누군가 
아크파크의 인생을 갖고 심한 장난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 역시 짜여진 각본일까?

이 만화는 언제나 꿈과 꿈 사이에 중요한 사건들이 배치되므로 도대체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서 부터 현실인지 알길이 없다. 이런 와중에 아크파크는 또 한 번 꿈 속으로 빠져든다. 그 곳에서 아크파크는 자신이 연극 '미션'의 주연 배우로 선정됐음을 통보 받는다.

연극을 주재하는 사람들은 주연 배우가 모든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길 원하지만 아크파크는 '도대체 왜 접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자기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 그리고 회의. 하지만 정해진 궤도를 달려가는 기차에게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은 덜컹거리는 바퀴일 뿐이다. 주재자들은 당장에 이 바퀴를 뽑아 버리려 하지만 때마침 울린 자명종이 아크파크를 꿈의 세계에서 건져낸다. 눈을 뜬 아크파크의 앞에는 역이 도착해 있었다. 



 




역에는 수 많은 코인로커가 닭장처럼 세워져 있었다. 코인로커는 아크파크처럼 독립된 공간을 할당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주거 공간이었다. 플랫폼으로 나가보니 상황은 더 심했다. 개미떼처럼 모여든 사람들은 플랫폼 바닥에 선을 긋고 저마다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이 진짜 자기 집인것처럼 행동했지만 가구와 창문은 땅바닥에 네모를 그린 뒤 '침대', '창문'이라고 써 놓은게 다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인간은 신과 마찬가지로 존재에 목적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인간은 편안하게 잠들기'위해', 그리고 비바람을 피하기'위해' 침대와 창문의 존재를 창조한다. 즉 침대와 집은 존재보다 목적이 앞선 즉자물인 것이다. 그러나 플랫폼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침대와 창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빈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어쩌면 이 곳은 제대로된 존재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람들, 즉 위대한 창조의 힘을 잃어 버린 사람들이 도착한 일종의 유배지가 아닐까? 열차가 도착했을 때 아크파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열차를 탈 수 없었다. 창조의 힘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겐 세상의 비밀을 목격할 자격이 없었을 것이다.

열차는 아무것도 아닌 곳을 지나, 이 세상의 지붕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줄곧 흑백으로만 그려졌던 만화는 아크파크가 세상의 지붕에 도착해 비밀스런 뚜껑을 열자 곧 컬러로 변해 버린다. 이 순간 예외없이 아크파크는 꿈에서 깨어난다. 정확히 '사도인쇄'로 칠해진 세상은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현실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하지만 당신,

혹시 컬러로 된 꿈을 꿔 본적은 없는가?  

 

 

 

 

 

 

이야기는 3권에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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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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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지금껏 내가 봐온 글쓰기 지침서는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그리고 이 책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이 세 권이 전부다. 

'유혹하는 글쓰기'가 창작법 강의를 가장한 스티븐 킹의 성장기라면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는 글을 쓰려고 마음 먹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봐야 할 교과서 중의 교과서라 부를 만한 책이었다. 그리고 이 책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가 있다. 그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근원적 욕망과 마음가짐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좀 더 자세한 비교를 위해 세 책의 목차를 살펴보자. 서문 등을 제외하면 뼛속의 첫째 장이라 부를만한 것은 '초심자의 마음, 종이와 연필'이라는 챕터다. '글쓰기 만보'의 첫째 장은 '단어에서 단락까지'다. '유혹하는 글쓰기'는 
'이력서'라는 챕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서막을 올린다. 어떤 차이가 느껴지는가?

앞에서 말했듯이 '글쓰기 만보'는 교과서 중의 교과서다. 그러다 보니 좀 더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내용으로 시작한다. 처음 글을 쓰는 사람이든 장편 수십권을 출간한 베테랑 작가든 그들이 다루는 것은 결국 백지 위에 줄줄이 늘어선 단어다. 그리고 그 단어가 모여 단락을 이룬다. 그러니 선생님 안정효가 처음으로 가르쳐야 할 게 '단어와 단락'말고 무엇이겠는가.

반면 '뼛속'은 초심자의 '마음'으로 시작한다. 이게 바로 두 책의 큰 차이다. 오랜기간 선(禪)수련과 명상을 해왔던 작가 답게 그의 시작은 '마음'이다. 마음이 갖춰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된다. 좋은 단어를 고르고 올바른 문장을 만드는 법? 그건 글을 쓰려는 마음만 확실하면 결국 갖춰지게 되있다. 문제는 역시 글쓰기의 고통을 견디고 그 욕망을 평생토록 유지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다지는 것이다. 물론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써보라거나 이야기 모임을 만들어 보라거나 '그냥 꽃이 아니라 그꽃의 이름을 불러 주라'는 등 실천적 글쓰기로서의 충고도 다수 등장하지만 역시 '부사를 빼라'(스티븐 킹)거나 '있을 수 있는 것을 삭제하라'(안정효)는 말 보다는 덜 구체적인 것이 사실이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이 책을 살까 말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뼛 속'은 좋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오랜시간 동안 글쓰기와 씨름해온 작가의 소소한 고백이 담백하게 울려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나탈리 골드버그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소설가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대단한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 오히려 우리에겐 큰 공감이 된다. 그는 우리와 같은 연약한 인간으로서 오늘도 어김없이 글쓰기의 고통과 욕망을 통제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가 해낼 수 있었다면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 책이 왜 좋은지 하나만 더 말해보라면, 나는 이 책이 '어떻게 쓰는가'라는 질문 밑에 '왜 쓰는가'에 대한 대답을 깔아두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세상은 이미 'How'에 대한 지침서로 가득차 있지 않은가? 어떤 일에 목숨을 걸고 정진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어떻게'가 아니라 '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 책을 읽는 다는 것은, 그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내 마음을 다부잡는, 그런 일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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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 강의 프로이트 전집 1
프로이트 지음, 임홍빈.홍혜경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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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

다음은 인터넷 정신분석 카페에서 찾은 어느 직장인에 대한 얘기다. 

나는 내 상사가 지시하는 일들을 자주 까먹곤 한다. 아침에 직접 불러 지시한 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퇴근 쯤에 일의 결과를 확인하려는 질문을 받고 화들짝 놀라 당황한다. 

한편 이런 일도 있다. 나는 내가 담당하고 있는 
제품의 시료를 자주 잃어버린다. 잘 챙겨야지 챙겨야지 하면서도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시료는 사라져 버린 뒤다. 이 모든게 꼼꼼하지 못하고 게으른 천성 탓이다. 반복되는 실수를 설명하는데는 이 만한 근거가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실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지시한 일은 반드시 수첩에 적었다. 수첩을 하루 종일 내 노트북 앞에 펼쳐 놓았다. 시료에는 이름을 적었다. 시료를 관리하는 바구니도 만들었다. 

몇일 
뒤 나는 내 시료가 또다시 사라져 버린걸 깨달았다. 잃어버린 시료를 찾아 사무실을 헤매는데 상사가 나를 불러 유럽향 모델의 진행 상황을 물어 보았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동시에 멋적은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 질문이 이미 몇일 전부터 계속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내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글을 올린 남자는 그 날 이후로 정신과를 찾았다고 한다. 그는 몇 주에 걸쳐 진료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하루종일 눈 앞에 펼쳐둔 수첩을 두고도 지시한 일을 까먹은 이유는 내가 격무에 시달려 주의가 흩으러졌기 때문이 아니다. 시료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기어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시료 분실의 이유 또한 
잘못된 관리 방법에 있는게 아니다.

상사의 업무 스타일은 어지간히 나와 맞지 않았다. 일거수일투족을 마이크로 매니징하는 꼼꼼함이 답답했고 말랑말랑 유연한 상황에서도 기어이 딱딱한 논리적 체계를 세우고마는 강박이 나는 지독히도 싫었다. 내가 매번 시료를 잃어버리고 상사의 지시를 잊은 이유는, 

내가 그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반복된 실수는 잠재 의식 속에 깊이 뿌리 내린 상사에 대한 증오 때문이었다. 내가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할 때 마다 내 마음은 '당신이 시킨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실수는 심리행위다. 심리란 '마음의 작용과 의식의 상태', 행위란 '의지를 가지고 하는 짓'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실수는 심리행위다'라는 말에는 실수가 결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즉 그 속엔 명백한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위 이야기는 실수가 심리행위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전형적 사례다. 



<꿈>

나는 한 때 핵폭탄이 떨어져 주변의 모든 것들이 먼지로 사라져 버리는 꿈을 반복해서 꾼 적이 있다. 나는 눈 앞에 떨어지는 핵폭탄을 보고 미친듯이 도망쳤지만 결과는 언제나 매한가지, 먼지가 되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이런 꿈을 해석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당시 나는 취업 준비생이었다. 한창 낙방을 거듭하고 있었다. 나는 골방에 쳐박혀 지겨운 영어 공부와 자기 소개서 쓰기를 반복했지만 취업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초조와 불안이 꿈 속에서 핵폭탄과 지구 멸망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은 프로이트를 꿈 해몽가 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그가 집중한 것은 꿈의 '해석'이 아니라 꿈의 '원인'이었다. 프로이트 이전의 사람들은 꿈을 뇌의 경련, 혹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해프닝 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실수 행위의 탐구에서 보여줬듯 프로이트는 꿈에도 명백한 의도와 기능이 있다고 믿었다.

프로이트는 꿈이 인간의 '소망 충족'을 위해 존재한다고 봤다. 그것은 꿈이 잠재된 욕망을 실현하는 수단이라는 주장인데, 우리는 매일 밤 꿈을 꿈으로써 현실 세계에서 도저히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내 꿈 얘기로 돌아가 보자. 나는 핵폭탄이 떨어져 사람들이 죽는 꿈을 반복해서 꿨다. 그것은 분명 취업에 대한 불안과 초조가 원인이었다. 하지만 난 이 꿈 얘기에서 몇 가지 언급하지 않은 사실이 있다. 내 꿈은 반복될 때 마다 완전히 동일한 모습으로 재현됐지만 거기서 딱 한 가지 매번 변화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나와 함께 죽는 친구들이었다. 모든 것이 똑같았음에도 유독 이 부분만이 달랐던 이유는 뭘까? 나는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방법에 따라 차분히 나의 내면에 집중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내 친구들을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걸 고백하는 건 쉽지 않다. 만일 당신의 정신과 의사가 당신의 꿈 얘기를 듣고 이런 해석을 내렸다면 십중팔구 책상을 뒤엎고 병원을 뛰쳐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모두 열고 내면 깊숙이 
들어가 보자. 

처음 꿈에서 나와 함께 죽은 건 20년 가까이 사귄 죽마고우였다. 둘도 없는 내 친구지만 난 한 때 이 친구에게 심각한 컴플렉스를 느낀 적이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그 컴플렉스는 죽을만큼 괴로운 것이었고 
'이 친구가 사라져 버렸으면'하는 소망을 품곤 했다. 두 번째로 죽은 친구 또한 절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언젠가 일을 하다 심하게 다툰 적이 있었다. 다른 친구들의 도움으로 화해하고 그 후로는 더욱 친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나는 앞으로 이 친구와는 절대 같이 일을 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의 일을 모두 잊었고 지금도 여전히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무의식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무의식은 그 때의 감정을 생생하게 보존하고 있다 나의 이성이 잠드는 시간을 틈타 당시의 불쾌한 감정을 꿈 속으로 밀어넣어 친구들을 살해하는 기쁨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과격한 얘기라고 생각하는가? 프로이트의 꿈 해석은 언제나 이 같은 욕망들을 전제로 한다. 꿈의 내용으로만 봐서는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도 그 속에 잠재된 욕망들을 파해치고 나면 어김없이 본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꿈은 도대체 왜 우리의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 걸까? 그건 우리의 꿈이 검열을 당하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많이 느슨해지긴 하지만 우리의 윤리, 도덕, 욕망을 억압하는 이성들은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꿈은 자신의 의도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욕망을 상징하는 대체물을 만들고, 그것의 일부를 과장하고, 또 삭제하고 때때로 하나의 상징물로 압축하여 자신의 본 모습을 완전히 지워 버린다. 

꿈의 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이처럼 왜곡된 상징의 필름들을 오리고 붙여 숨겨진 욕망을 현상해 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경증에 관한 일반 이론>

프로이트가 실수와 꿈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것이 신경증과 매우 유사한 매커니즘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신경증에 관한 일반 이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글자는 분명 한글인데 봐도 봐도 미궁이다(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내가 이 책을 반이나 차지하는 주제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채 이런 리뷰를 쓰고 있다면 그건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를 모독하는 일일까? 하지만 모르는건 모르는거다.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이 책에 대한 나의 얘기가 여기까지라는 거다.

p.s - 누가 이 책을 쉽다고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꿈의 해석'전에 이 책을 보라는 사람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꿈의 해석'을 봤기 때문이다. 조만간 그 책에 대해 써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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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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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에는, 실로 모래를 마셔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현실감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은 건 대학 시절, 일본의 카프카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정녕 '부조리'라는 말을 이해하고 싶었고 도서관으로 달려가 아무도 빌려보지 않는 이 책을 손에 넣었다. 꽤나 진지하게 책장을 넘겼지만 끝내, 부조리가 무엇인지는 깨닫지 못했다. 이십 삼세의 일이다.

나는 이십 팔세에 처음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 이 곳에서 타인의 시선이 권력이 될 수 있음을 목격한다. 나는 먹이를 미끼로 포획된, 거대한 개미굴의 일개미에 불과함을 경험한다. 어느날 나는 나에게 날개 한 쌍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작은 날개를 위태롭게 퍼덕이며 개미굴을 탈출한다. 도착한 곳은 벌들이 우아하게 날아다니는 달콤한 벌집이었다. 나는 그곳에 정착해 새로운 나를 꿈꾼다. 붕붕 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고 우아하게 날아다니는 법을 터득한 뒤 아름다운 꿀을 얻는 법을 익힌다.  

 

달콤한 꿀에 취해 비틀거리기를 몇 년, 어느날 혼미한 정신으로 날개를 퍼덕여 하늘로 날아 오르려는데 갑자기 천장에 부딪혀 떨어지고 만다. 여기에 이런 벽이 있었나?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곳은 또 하나의 개미굴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우스는 케익의 맛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맛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부조리를 안다는 것? 그게 지끈지끈 짜증을 유발하는 편두통이라면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 그건 마치 폐차장의 압착기 속에 들어가 형체도 없이 짜부러지는 것과 같다. 그 안에서 인간은 비명을 지를 수도, 숨을 쉴 수도 없다. 
인간의 의지는 압착기의 암흑 속에서, 완전히 무력해진다.








성명 니키 준페이. 31세. 신장 1미터 58센티미터, 몸무게 54킬로그램. 딱히 나쁜 짓을 한 남자는 아니다. 곤충 채집을 좋아했다. 여지껏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종을 찾아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으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 모래 위를 기어다니는 길앞잡이속 좀길앞잡이를 잡으러 나왔다가 정작 자신이 모래 구덩이에 포획되어 영영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된다.

니키 준페이를 함정에 빠뜨린건 모래 마을의 촌장이었다. 하룻밤 묵어 갈 장소를 마련해 준다며 할머니 혼자 사는 집으로 안내했다. 흔들리는 새끼줄을 타고 깊고 깊은 모래 구덩이 밑으로 내려가자 할머니가 다소 흥분한 듯한 기분으로 
저녁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필요 이상으로 달뜬 모습이 뭔가 수상하기도 하지만, 아마 오랜만에 손님을 맞아 그럴게다. 가난한 마을. 내일 아침 수고료로 내밀고 가는 약간의 돈으로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집은 누추하기 짝이 없지만 섭섭치 않게 사례할 생각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등잔 위로 묘령의 여자가 얼굴을 들이민다. 할머니가 아니었다. 피부가 탱탱하게 하얀 여자. 흔들리는 등불 위로 어색한 미소가 떠오른다. 아무래도 일부러 보조개를 보여주려는 것 같아,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다. (p. 34) 

 




 


다음날, 새끼줄 사다리가 사라졌다.  

 

집으로 뛰어 들어가 잠들어있는 여자를 깨워 다그친다. 진상은 대충 이렇다. 

이 마을에는 끊임없이 모래 바람이 불어온다. 팔분의 일 미리미터의 작은 모래 알갱이는 밤에도 결코 쉬는 법 없이 모래 구덩이를 덮쳐온다. 그대로 놔뒀다간 구덩이 안의 집이 무너지고 사람이 파묻힌다. 이렇게 하나의 구덩이가 매몰되고 나면 다음은 옆 구덩이다. 물론 옆 구덩이 사람들은 이 때문에 두 배의 괴롭힘을 받는다. 그래서 이 곳 사람들은 절대 도망칠 수 없도록 감시당하며 오로지 모래를 치우기 위해서 살아간다.

준페이가 잡혀 들어간 모래 구덩이는 오랫동안 여자 혼자 감당해온 곳이다. 힘이 많이 부쳤다. 그러던 중 때마침, 여행객 차림의 젊은 남자가 마을에 나타난 것이다.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요즘 세상엔 엄연히 법과 질서와 이성과 언론이라는 게 존재한다. 이런 식으로 무고한 사람을 납치해 놓고 무사할 리 없다. 그러나 마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좋아, 그렇다면 파업이다. 내가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머지않아 이 마을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너희들이 지키고 있는 그 빈약한 풍경도 영원히 안녕이다. 

그런데 웬걸,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물과 식량을 배급해 주지 않는다. 아무리 기어 올라가 봐도 모래 언덕은 끊임없이 무너져 내릴 뿐이다. 바람에 섞인 모래가 입안과 몸 위에 성을 쌓는다. 푹푹 찌는 바다의 대기가 뽑아 낸 뜨거운 땀들이 그 위에 엉킨다. 딱 한 잔, 물 한 모금이 절실하다. 정신보다 육체가 먼저 붕괴된다. 남자의 파업은, 끝내 탈진에 굴복하고 만다.



 



한동안은 탈출을 시도해 보기도했다. 모래벽을 넘어서는데 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추격을 피해 들어간 장소가 모래 지옥이었다. 한 번 빠지고 나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이봐 이런덴 동네 개도 얼씬하지 않는다고'

조롱이 감춰져 있는 마을 사람의 친근한 말투가 남자의 자존심을 바닥까지 떨어뜨린다. 준페이는 눈물로, 목숨을 구걸한다. 그 후로는 열심히 모래를 퍼날랐다. 신선한 공기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는 구역질 나는 모래 구멍에서 열심히 삽을 움직였다.

준페이는 처음에 여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 부당한 처사를 당하면서도 아무런 불만없이 살아갈 수 있다니... 그러나 이제는 준페이가 더 열심이다. 어느새 여자와는 사실혼 관계가 되버렸다.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모래 위로 벌거 벗은 나체를 드러내는 여자. 그리고 그녀와 함께 추는 욕망의 춤. 심지어 준페이에게는 취미도 생겼다. 바늘에 물고기 반찬을 꿰어 까마귀를 잡는 함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희망에서는 썩은 반찬 냄새가 났다.

산다는건 원래 이런건가? 인간의 망각과 적응력에는 참을 수 없는 악취가 난다. 탈출을 시도하던 용기는 어디 갔나? 뜨거운 모래를 씹으며 파업을 선언하던 인내는 어디로 갔나? 밤새 모래를 치우고 작열하는 낮 아래서 짧은 휴식을 취하는 두 마리 동물. 배급된 담배와 소주에 안식을 찾는 사람들. 

이렇게 살아가는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잘난척 하지마. 사실 이곳에서 나간들 당신같이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삶이 뭐 그리 달라지겠어. 애초에 이 모래 마을을 찾은건 너 자신이었잖아. 당신은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나 은밀한 꿈을 쫓아 이곳에 왔지. 그런데 이제 와서 탈출이라니? 도대체 얼마나 착각을 하고 있는거야?




 



느날 모래의 여자는 자궁에서 피를 쏟으며 이불에 둘둘 말린채 모래벽 위로 올려진다. 친척이 수의사라는, 부락의 누군가가 자궁외 임신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여자가 떠난 뒤에도 새끼줄 사다리는 여전히 매달려 있었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사다리 위를 올랐다. 이윽고 지상에 도착하자 준페이는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대한 맛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인간이란, 앞에 유리창이 가로막고 있는줄도 모르고 끝없이 얼굴을 꼬라박는, 더럽고 악취나는 똥파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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