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 & 라캉 - 무의식의 초대 지식인마을 34
김석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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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이드, 자아, 초자아로 구분되는 프로이트의 2차 정신 기구 모델은 후계자들의 격렬한 의견 대립을 통해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분화된다. 하나는 생명의 본질을 이드에서 찾으며 인간이란 이드, 자아, 초자아가 끊임없이 대립하고 상호작용하는 역동적 실체라는 주장이다. 나머지 하나는 자아의 자율성과 방어 기능을 강조하는 흐름으로 정신분석은 결국 자아의 강화와 이를 통한 현실 적응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후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프로이트의 여섯 번째 딸 안나 프로이트고 전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자크 라캉이다. 

 

상계 

라캉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를 상상계로 지칭하는데, 이는 이 세계가 가상이라는 말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식이 이미지를 매개로 이뤄진다는 말이다. 라캉은 이를 '거울 단계'의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거울을 처음 본 어린 아이는 거울 속의 이미지가 '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는 '나'를 알아본다. 이 때가 바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최초로 인식하는, 즉 자아가 발견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나'라는 정체성이 나를 비춘 '대상'을 통해 밝혀진다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 한낱 이미지에 불과한 대상을 통해 나를 인지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진짜 나'의 소외를 초래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코 진정한 '나'를 알지 못한다. 우리의 자아는 대상화된 '나'를 통해 인지되기 때문에 그것은 근본적으로 타자이며 수 많은 오해의 씨앗이 심어진 불완전의 토양이다. 

 

한편 '나'의 이미지에 매료되는 거울 단계의 매커니즘은 나르시즘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자아의 발견은 안정된 자기 인식의 시작이 아니라 '진짜 나'와 '나를 비추는 이미지' 사이의 분열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를 비추는 이미지'는 그 특성상 완벽한 이상향을 지향하면서 실제의 '나'와의 괴리를 가속화 하는데 그 이유는 거울 단계에서 지각되는 신체적 미숙함이 원인이다.  

실제로 생후 6개월~1년 된 아이는 운동 신경의 발달이 미숙해 아직 자신의 몸을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하며 몸이 주는 감각들도 파편화된 형태로 느낀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모습은 이상화된 전체로 나타나기 때문에 아이는 자신의 몸이 보여주는 완벽한 조화에 환호하면서 끌리게 된다. 그러나 아이가 이미지에 끌리면 끌릴수록 아이가 느끼는 실제 몸의 현실은 완벽한 자아의 상에 균열을 낳는다. 이렇듯 실제 몸의 불완전성과 이미지의 완벽함이 최초의 분열과 불안을 낳으면서 자아의 일체감을 위협하는 게 거울 단계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때 불완전한 육체와 이상적 이미지를 봉합하는 것이 바로 나르시즘이다. 나르시즘은 '완전'에 대한 욕망으로 철저히 이상화된 자아를 만들어내지만 대상화된 자아의 불완전함은 엄연한 현실이다. 나르시즘은 우리를 환상 속에 가둬두려는 마술의 집이다. 환상은 컴컴한 암막이 되어 현실을 가려 보지만 실제와 환상 사이의 균열은 점점 커져만 가고 그 안에선 썩은 내가 풍겨 나온다.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결국 연못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신화는 썩은 내를 풍기는 나르시즘의 불길한 묵시록이다. 

상징계 

대상화된 자아가 속하는 곳이 상상계라면 실제 주체가 거하는 곳이 바로 상징계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란 곧 '말하는 주체'다. 따라서 상징계는 언어에 의해 구조화되는데 라캉은 소쉬르의 기호론을 차용하여 이를 설명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여기서 부터 두 손을 들었다. 소쉬르의 기호론이라는게(시니피에-시니피앙의 관계를 설명하는) 절대 쉬운 개념이 아닌데 여기다 라캉의 새로운 생각까지 덧붙여 지니 이건 완전히 암흑이다. 중요한건 시니피앙(기표: 말해지는 것. 단어를 발음과 의미로 나눌 수 있다면 그 중 발음에 해당하는 것이 시니피앙이다.)이 자율적, 독자적으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정해지는 방식은 결국 상상계에 의존하기 떄문에 결국 주체는 소외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좀 더 들어가보자. 

라캉의 언어론에서 시니피앙은 시니피에보다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라캉은 둘 사이에 거대한 가로막 하나를 질러 놓고 위에는 시니피앙을 아래에는 시니피에를 위치시키는데 시니피에는 이 가로막에 막혀 끝없이 침잠한다. 이때 시니피앙은 시니피앙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연쇄 사슬을 구성하는데 이 연쇄사슬이 바로 언어의 체계다. 이 때문에 언어의 체계는 그 자체로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니피앙 간의 구분은 단순히 말(발음)의 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자'라는 시니피앙은 '남자'라는 시니피앙을 만나 서로 구분된다. '여자'를 '여자'이게 만드는 것은 '남자'를 포함한 다른 모든 시니피앙들이 '여자'와는 다르게 발음되기 때문이다. 시니피앙은 이렇게 상호 구분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립한다.  

하지만 소리만 가지고는 의사소통이란 것이 이뤄질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가 발생시키는 소리의 다름을 통해 의미의 다름을 인지하는데 이는 소리가 특정 의미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캉의 이론에서 이 소리와(시니피앙) 의미(시니피에)의 만남을 주재하는 것이 바로 '주체'다. 문제는 이 주체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자'라는 단어가 사전적으로 생물학적인 여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만약 수 십차례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경험한 남자라면 여자를 '인정머리 없는 냉혈한'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우리가 여자라는 단어에서 어머니의 풍요로움과 따뜻함을 느낄 때 이 남자는 가슴을 찌르는 한기를 느낄 것이다.  

이처럼 시니피앙은 시니피에와 일대 다 심지어 다대 다로 결합하면서 고정된 실체를 형성하지 못한다. 확실한 '나', '절대적인 기준'의 부재는 '이것이 진짜 주체인가?'라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다. 이것은 상징계의 구성 조차 상상계의 근본적 결함인 오인 구조를 - 대상화된 자아를 진짜 나로 착각하는 -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주체는(진짜 주체) 상징계에서조차 소외 당한다.  

사실 상징계에 대한 설명은 이후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 책은 상징계를 '선험적 질서로서 주체를 벗어나는 타자의 영역'이라고 설명하고 '이를 상상계의 소타자와 구별하여 대타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며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라는 라캉의 핵심 이론이 전개되는데, 나는 '선험적 질서로서 주체를 벗어나는'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 시니피앙와 시니피에의 관계 - 그것이 왜 '타자의 영역'이 되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어 결국 줄줄이 사탕으로 이어지는 핵심 이론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말았다.  

이렇듯 알쏭달쏭 장님 문고리 잡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 그나마 느낀 바가 있어 한 마디만 더 하자면,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주장은 라캉의 이론 중 현대인의 실체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론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거울 단계의 매커니즘에서 살펴봤듯이 우리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명석판명하게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무언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사실 내가 나라고 '착각하는 존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라든가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체와 자아(대상화된 주체)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나-타자의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내가 진짜 원하는게 뭔지 모르겠어'라는 말은 '네가 진짜 원하는게 뭔지 모르겠어'라는 말과 사실상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수 많은 인간들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게 아닐까? 

안되겠다. 한 마디만 더 하자.  

나-타자의 관계에서 타자란 '대상화된 주체'를 의미하지만 말 그대로 '타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린 아이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아를 확인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 형상이 자신을 그대로 흉내내는 허구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어른의 세계에서 거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타자, 나와 더불어 사회, 문화를 형성하고 관습과 질서에 순종하는 타인을 의미한다. 

확실히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비춰진 나의 모습을 통해 나를 확인한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 질지 요리조리 눈치를 보며 이 사회를 살아간다. 중요한건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근본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추구한다. 동창회에 들고 나간 싸구려 백을 은근 슬쩍 가리게 되는 순간 당신의 마음 속에는 루이비통과 에르메스와 샤넬의 욕망이 싹 튼다. 그러나 그 욕망의 씨앗은 '나'로 부터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곳으로 부터 뿌려진다.  

문화와 관습의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는 인간의 일탈을(진짜 '나'를 찾는 행위) 감시하는 거대한 감옥이다. 우리는 감시자를 자청하며 서로의 욕망을 서로에게 투영한다. 이 안에 진짜 나는 없다. 

 

실재계 

상징계는 언어를 통해 구조화 된다. 이 말은 상징계에 진입한 인간이 언어를 매개로 세계를 추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어를 매개로 세상을 추상'한다는 말 속에는 결코 언어가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렇다. 매개는 그저 매개일 뿐이다. 언어 자체가 실재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마치 언어 때문에 이 세계가 존재하고 언어가 아니면 실재를 드러낼 방법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언어와는 무관하게 실재는 우리 눈 앞에 존재한다. 우리의 우주가 고작 언어가 만들어지고 난 뒤에야 태어날 수 있었던 부차적 개념에 불과했던 것일까? 아니다. 우리가 구름을 연기라고 말하든 나무라고 말하든 구름은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위에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구름이란 말에는 구름의 실재를 보여줄 수 있는 어떠한 단서도 없다는 것이 오히려 납득할 만한 설명 아닐까?  

그렇다. 언어는 세상을 해설하는 도구일 뿐 결코 이 세상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더군다나 해설은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느끼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그리고 듣는 사람의 지식에 따라 얼마나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따라서 언어와 실재와의 관계는 이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실재에 드리워진 거대한 장막이다.  

라캉의 실재계는 언어의 장막 뒤에 숨어 있는 보드라운 속살을 말한다. 상징계는 끊임없이 이 속살을 사진 찍어 세상에 드러내려 하지만 그것이 언어라는 암실을 통과하는 순간 빛바랜 흑백 사진이 되버리고 만다. 그러나 흑백 사진에서 드러난 '색'의 결여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색'의 실재를 확신하게 만든다. 누가 그랬던가? 존재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다름아닌 부재라고! 

 

우리의 욕망이란 결국 결여된 것을 채우려는 갈망, 어두운 장막을 들춰내고 실재에 가 닿으려는 간절함이다. 하지만 실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을 통해서는 이 세계에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얻을 수 없는 것을 소망하고 있을 뿐이다.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눈을 감고 싶지만 부정의 강도가 높아갈 수록 존재의 크기는 커져만 간다. 그래서 또다시 욕망의 돌을 굴린다. 시지포스의 형벌은, 아마도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을 은유한 것이리라. 

무의식과 실재 

실재는 상징계의 작용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치 고요한 화산 밑에서 이글거리는 용암처럼 실재는 끊임없이 이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길 갈망한다. 그렇다면 이 화산을 폭파시킬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말장난 같지만, 실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글은 절대 그 방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실재의 끝자락이라도 잡아 그 모습을 글로 옮기려 하지만 손 끝으로 타자를 누르는 순간 실재는 언어의 어두운 장막에 가려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래도 굳이,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화 되지 못한 것 논리적이지 못한 것 비언어적인 것이 우리의 실재다. 꿈에서 겪은 기괴한 이야기, 마음 속 깊숙히 숨어 있는 원초적 욕망들이 바로 우리의 실재다. 

식의 흐름 기법이나 초현실주의 화법의 작품들이 범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표현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은 그들이 미치광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재를 직관하는 초인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이드'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자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담고 있는 원초적 에너지 덩어리라면 라캉의 실재가 자리하는 곳이 바로 무의식이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실재는 존재한다. 우리는 끝까지, 이 실재를 '이해'하려 들기 때문에 실재는 영원히 우리 앞을 배회할 뿐이다. 

 

 

 

캉과 프로이트, 그리고 지식인마을 시리즈 

프로이트가 어려운건 정평이 난 사실이지만, 그래도 프로이트의 저작 몇 권을 훑어 본 뒤 내리는 판단에 따르면, 라캉이야 말로 난해의 극치다. 평생 정신과 의사로서 임상에 근거한 정신 분석학을 창시한 프로이트와 달리 라캉은 철학을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정신 분석학을 이론적으로 세련되게 다듬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 때문에 난해함은 배가 되었다. 프로이트를 이해하기 어려운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개념의 문제라기 보다는 일종의 심리적 거부감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부모에 대한 성애와 거세 컴플렉스를 근간으로 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등 인간의 모든 삶을 성적 문제로 환원하는 태도).  

반면 라캉은 개념 자체가 너무나 어렵다. 실재계와 상징계의 대립은 수 천년간 철학계를 전쟁터로 만들어 온 관념론-유물론의 대립을 연상케 하며 '실재(존재)의 드러냄' 같은 개념은 악명 높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떠올리게 한다. 고작 한 권의 책으로 라캉을 판단하기엔 이를 수 있지만, 어쨌든 내 첫 느낌은 그렇다.  

정신 분석학이 흥미로운 분야인 것은 사실이지만 책 한 권을 읽고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앞으로 이 분야의 책을 선뜻 집어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참,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게 하나 있는데, 그렇다고 이 책 자체가 어렵다는 말은 아니다. 이 책은 지식인마을 시리즈의 모든 책이 그렇듯 아주 친절하고 쉽게 씌여져 있다. 이런 책을 내준 김영사에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정신 분석학은 잠시 시간을 두고 다시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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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 라캉 - 무의식의 초대 지식인마을 34
김석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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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초유의 글 길이 탓에 부득이 하게도 두 편으로 나눠 게재한다.  

 

프로이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프로이트에 대한 오해는 대부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온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근친에 대한 성욕을 인간의 본성으로 설명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과 역겨움을 선물했다. 남자 아이의 
성장은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벌이는 성적 전쟁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대한 오해는 바로 이 성적 전쟁을 성인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시작된다.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사랑은 성인 남녀의 충동적 욕망과는 다르다. 그것은 갓 태어난 아이가 어머니의 육체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면서 애정을 갈구하는 생존 본능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이는 어머니를 영원히 소유하려 하지만 둘 사이에 아버지가 개입한다. 아이는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와 경쟁하지만 아버지의 권위와 힘에 억압되어 자신의 감정을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 때 아버지의 권위는 '거세 컴플렉스'라는 형태로 다가오는데 이것은 아이가 여성과 남성의 해부학적 차이를 점점 인식하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성기가 없다는 것을 본 남자 아이는 거세에 대한 아버지의 위협이 실현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이제 아이는 어머니와의 사랑을 포기하고 점차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면서 자신을 한 명의 독립적인 남성으로 규정한다. 

한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아버지의 권위로 대표되는 각종 사회적 규범, 관례, 질서, 금지를 수용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용인 받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하는 것. 이것은 남과 더불어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극복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준비가 됐다는, 일종의 인생 라이센스를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차지하겠다는 실제적 욕망의 발현이 아니다. 그것은 성장기 아이들이 최초로 경험하는 억압을 설명하는 장치일 뿐이며 하나의 생명이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해설하는 모델일 뿐이다.  

이드, 자아, 초자아 

이드, 자아, 초자아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함으로써 나타나는 분열된 인격 구조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아이는 사회적 질서와 금지를 수용함으로써 사회화 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서와 금지의 수용이 욕망의 소멸을 의미하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사회적 터부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욕망들을 강력하게 억압하여 마음 속 깊이 가둬버린다. 통제되지 않은 정념과 의지의 집합소. 심해처럼 어두운 마음의 근원. 이것이 바로 이드다. 

이렇게 보면 이드란 절대 열어봐선 안되는 판도라의 상자, 더럽고 무서운 역병의 소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인간의 삶은 대부분 이드가 발현하는 욕망을 원료로 움직인다. 인간은 먹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 음식을 섭취하고 자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 휴식을 취하며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 열심히 일한다. 인간 활동의 근원은 모두 욕망이다. 

이드가 굶주린 늑대라면 자아는 교활이다. 자아는 무제한의 쾌락원리를 추구하려는 이드가 세상과 부딪히면서 점차 현실의 요구를 수용하게 되는 과정에서 분화한다.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굶주린 늑대가 식욕을 채우기 위해 광장으로 뛰쳐 나갔다고 상상해보자. 

처음에 늑대는 광장에 깔린 무수한 인간들을 아무나 잡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늑대의 공격을 방어한다. 일부는 막대기를 휘두르고 또 일부는 돌을 던지며 소리친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걸 깨달은 늑대는 기가막힌쇼를 준비한다. 늑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꼬리를 흔들며, 마치 개처럼 애교를 핀다. 사람들의 손을 핥고 그 앞에서 배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이 귀여운 늑대에게 먹이를 던져준다. 

이처럼 늑대를 개로 변장시키는 것이 바로 자아다. 자아는 이드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현실 원칙을 받아들여 이드의 욕망을 통제한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통제는 심각한 욕구 불만을 일으켜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기에 자아는 그 욕망을 현실 조건 안에서 분출할 수 있는 법을 궁리한다. 이 때문에 욕망은 때때로 지연되거나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할 경우 꽤 오랫동안 억압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욕망의 에너지는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욕망은 자아의 빗장을 부수고 스스로 탈출한다. 사람들이 갑작스레 보이는 폭력 행위나 뜬금없는 기행동은 이처럼 빗장을 부수고 탈출한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자아가 현실 세계와 이드를 오가며 끊임없이 타협안을 내놓는 정치인이라면 초자아는 광기어린 독재자다. 초자아의 기원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하면서 등장했던 아버지의 권위와 위협인데, 여기서 아버지란 닮고 싶은 대상인 동시에 처벌하는 자다. 이 때문에 초자아 또한 '이상적 자아'로서의 역할과 '양심의 근원이자 감시자'로서의 역할로 분화된다. 

 

 

인간은 초자아의 강력한 통제를 받으며 초자아가 부과하는 이상적 자아를 닮기 위해 노력한다. 한편 초자아는 금지를 양심과 도덕으로 자리잡게 함으로써 인간의 맹목적인 충동을 억제하고 그 표현 방식을 감시하고 비판하게 만든다. 얼핏 초자아는 빡빡한 규율과 통제만을 강요하는 철저한 이성의 왕국으로 보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드와 접촉하지 않았을 때의 얘기다. 모든 독재자들은 자신의 독재가 어디까지나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드의 어두운 욕망은 이 착각의 틈을 비집고 스며든다.  

우리는 폭력과 광기가 신념과 이상에 의해 정당화되는 사례를 수 없이 봐왔다. 십자군 전쟁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따르려는 숭고한 신앙심으로부터 발발했다. 선을 쫓고 악을 멀리하라고 가르쳤던 하나님은 피에 굶주린 아귀가 되어 이교도의 육체를 짓밟는다. 그들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애썼을 뿐이다. 이 더러운 정당화가 죽음을 순교로 학살을 정의로 바꿔 놓는다. 한편 조국과 민족에 충성하라는 국가적 이념은 카미카제의 제로센에 탑승하고 600만 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쳐넣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초자아가 이드와 결합할 때의 특징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인간의 행동이 잔인해 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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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과 책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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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란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지럼증과 함께 심한 두근거림을 느낀다.  

보르헤스가 그려내는 비상식적인 세계는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던 세계를 송두리째 갈아 엎는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머리 속에서 지울 수 없는 시간의 연속성과 공간의 절대성이 보르헤스의 필치 앞에선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만다. 보르헤스를 읽는다는 것은 친모와의 안녕을 고함과 동시에 바로 계모를 받아 들여야만 하는 충격적 상황과 마주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충격은 그 내용에만 있는게 아니다. 나는 프로이트를 읽으며 독일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보르헤스를 읽고 있으면 나의 모국어가 스페니쉬(Spanish)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하게 된다(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인이며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을 공용어로 한다).  

독자를 절망 속으로 빠뜨리는 건 보르헤스의 모호한 알레고리이며 동시에 그 알레고리 앞에서 갈팡 질팡,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 번역이다. 우리는 이렇게 알레고리와 번역의 사이에서 두 번의 절망을 맞는다. 이제 이 절망들은 보르헤스 포기를 종용하는 암묵적 메시지가 된다. 평생 단편만을 고집하여 결코 두꺼운 법이 없는 보르헤스의 책들은, 그렇게 우리 손을 떠나 영영 찾을 수 없는 바벨의 도서관에 보관된다. 

보르헤스 세계의 특징은 상호 반영을 통한 이미지의 무한 복제다. 쉽게 마주보고 있는 거울을 생각하면 된다. 거울이 서로를 비추며 무한의 이미지를 반복하듯이 보르헤스는 '세상의 만물이 그려진 지도', '모든 책이 씌인 책' 등으로 세계를 언어화 한다. 만물이 그려진 지도라든가 모든책이 씌인 책은 그 자체가 전체이면서 동시에 부분일 수 밖에 없는 패러독스를 잉태하므로 그의 문학은 '나는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라든가 '돈키호테를 읽고 있는 돈키호테' 같은 기이한 불확실성을 마음껏 유희한다. 보르헤스는 이 책의 열 번째 챕터 '돈키호테에 어렴풋이 나타나는 마술성'의 마지막을 칼라일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1833년에 칼라일은 말했다. 우주의 역사라는 것은 모든 이들이 쓰고 읽고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런 그들 스스로가 묘사되어지고 있는 무한으로 이어지는 성스러운 한 권의 책이라고. 

<듀안 마이클> 

보르헤스의 또 다른 특징은 끊임없는 이야기와 인용 그리고 그에 따른 방대한 주석이다. 보르헤스는 엄청난 독서가였다. 39세에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겪은 뒤 거의 실명 상태로 지내왔음에도 그는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살아 생전에 읽었던 책은 거의 2만권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보르헤스의 글엔 엄청나게 많은 인용구와 책과 작가들이 등장한다. 마치 20세기의 '세헤라자드'가 된 듯이 보르헤스는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끼워 넣고 책 속에 책을 삽입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그리고 어김없이 방대한 주석이 뒤따른다.  

주석이란 보통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나 편집자가 추가하지만 보르헤스의 경우 작자인 자기 자신이 많은 양의 주석을 추가한다. 독자는 이처럼 방대한 주석 앞에서 비선형적 독서를 경험한다. 우리는 여타의 책을 읽어 나가듯 정해진 순서에 따라 편안히 책장을 넘길 수 없다. 독자는 본문을 읽은 뒤 주석을 찾고 때때로 이를 따라 다음장으로 이동하지만 이내 끊어진 본문을 찾아 다시 앞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은 현대의 하이퍼텍스트를 닮아 있다. 특정한 줄거리의 탐색없이 'Back', 'Forward'를 연발하며 정보를 탐색하듯이 보르헤스의 독자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조각을 찾아 부유한다.  

<에셔>

 

'만리장성과 책들'은 보르헤스의 산문집이다. 일기를 암호로 쓰는 사람이 없듯이 보르헤스의 산문은 그의 소설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뿐만 아니라 보르헤스 문학의 원형과 그 원형이 창조되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볼 수 있기에 그 동안 그의 소설을 읽으며 불편해 했던 독자들은 한층 더 가까이 보르헤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쉽다'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방대한 독서, 무한의 지식, 그리고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 차원의 비평들. 인간이란 딱 아는 만큼만 보이기 마련인데 설령 이름이 익숙한 오스카 와일드나 나다니엘 호손을 평했다 한들 이제 막 지식의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네 눈 높이에 보르헤스의 사상이 그 털끝 만큼도 보일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 책을 읽었으나 읽었다고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읽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지금의 내 심정과, 이렇듯 얼렁 뚱땅 글을 마쳐야만 하는 내 무력함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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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 시절 - Art 020
마쓰오 바쇼 외 지음, 가츠시카 호쿠사이 외 그림, 김향 옮기고 엮음 / 다빈치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하이쿠는 5, 7, 5 총 17자로 이루어진 일본의 정형시다. 그 유래는 렌카와(連歌) 하이카이에서 찾을 수 있는데, 렌카란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어지는 노래를 뜻하고 하이카이는 렌카의 형식을 그대로 지키되 내용면에서 해학을 담아 서민적으로 발전시킨 대중시를 말한다. 렌카와 하이카이는 모두 5, 7, 5로 이뤄진 앞구와 7, 7로 이뤄진 뒷구를 갖추고 있어 보통 두 세명에서 여섯 명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번갈아 가며 시를 읊는 형태였다. 오늘날 가요의 역할을 당시엔 렌카와 하이카이가 맡았던 셈이다.  

카와 하이카이의 첫 구는 홋쿠(發句)라 불리는데, 여기엔 반드시 계절을 상징하는 계어(季語)를 넣어야 했고 노래가 지어진 배경을 읊어야 했으며 그 구 자체만으로 완결성을 갖추고 있어야만 했다. 이것이 나중에 여러 사람이 모여 시를 읊어야 한다는 번거로움을 없이 혼자서 즐길 수 있는 하이쿠로 발전된 것이다. 

하이쿠의 형식엔 계어, 5, 7, 5의 엄격한 자수 제한과 더불어 '기레지'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하이쿠 자체가 짧은 시인만큼 한 번에 읽어 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련한 쉼표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읽는 이들은 이 쉼표에 잠시 머무르며 시의 여운과 경탄을 충분히 감상하게 된다(기레지의 예로 '~이여', '~로다', '~구나' 같은 것들이 있다).   

 

시란 다양한 심상과 주제를 압축된 언어에 담아 냄으로써 짧지만 긴, 적지만 많은 것을 표현하는 문학 장르다. 하이쿠는 이것을 더욱 고도로 압축해 체계화한다. 흔히 압축과 요약을 오해하기 쉬운데 이 둘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행위다. 요약이 생략과 삭제를 통한 가지치기라면 압축은 이 세상 모든 것을 품에 안은 태초의 우주다. 크기는 작지만 매우 밀도 높은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 이게 바로 압축의 정수다.  

따라서 압축된 세계의 겉모습은 일견 고요해 보이나 그 안에선 강렬한 에너지가 끊임없이 도약하고 있다. 하이쿠를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그 짧은 마디마디에서 무한한 감성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하이쿠 한 편을 감상해 보자. 

두 사람의 생애, 그 가운데 피어난 벚꽃이런가 - 바쇼  

 

두 사람이 서 있고 그 사이에 벚꽃이 피었다. 서로 아무련 관련없이 살아온 두 사람의 인연이 활짝 핀 벚꽃에 의해 연결된다. 이 시를 보고 있으면 따뜻한 봄 빛이 온 몸에 스며드는 것 같다. 벚꽃이(계어) 주는 구체적인 심상 때문에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의심할 여지 없이 구체적인 심상이 우리가 생각하는만큼 단단한 토대 위에 서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좀 더 얘기해보자. 

불을 지른 듯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마는게 벚꽃의 속성이다. 이런 벚꽃이 두 사람의 생애를 가로 질러 피어났다. 불현듯 뜨겁게 타올랐다 어느새 차갑게 식어 버리는 젊은 사랑의 한계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렇게 볼 때 벚꽃은 두 사람의 앞날을 희망으로 비춰주는 등대가 아니라 파멸을 예고하는 흉흉한 들불이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건 두 사람의 '표정'이다. 만일 두 남녀가 서로를 쳐다보고 활짝 웃고 있다면, 연인은 반드시 오고야말 이별을 눈치채지 못하는 철부지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순간의 행복만을 바라보겠다는 쾌락주의자이거나.  

나는 담담하지만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두 남녀가 떠오른다. 앞으로 우리 앞에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일이 어떻게 되든 중요한건 지금 이 순간이다. 나는 두 사람의 미소에서 헤어짐이라는 숙명을 받아들이는 담담함을 느낀다. 그래서 두 남녀는 헤프게 웃지 않는다. 지금은 벚꽃이 피었고, 연인은 아직 봄날 한 가운데 서 있다.   

 

마지막으로 '생애'라는 단어를 살펴보면, 그 안에 담긴 너무나 많은 일들이 떠올라 쓰기가 벅찰 정도다. 이 세상엔 각기 다른 수십 억의 인생이 존재한다. 그 인생들이 각자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활짝 핀 벚꽃 사이로 두 사람이 걸어간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 이 길은 단지 생업으로 향하는 도로일지도 모른다. 잠시 멈춰 벚꽃을 바라볼 만한 여유는 없다. 두 남녀는 수 없이 스쳐 지나 가지만 결코 서로를 알아 보지는 못한다. 숨막힐 듯이 흐드러진 아름다움도 삶의 고단 앞에서는 무기력할 뿐이다. 

봄날 한철 피고 지는 벚꽃의 생명은 무한한 시간, 그 막막한 무게 앞에 놓인 우리의 생애를 닮아 있다. 이 찰나의 순간을 잡아채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두 사람의 생애, 그 사이에 무심히 피어난 벚꽃 눈송이. 나는 어서 빨리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 봤으면 한다. 벚꽃 사이로 지나가는 저 여자가, 그리고 그 옆을 스쳐가는 저 남자가, 서로의 짧디 짧은 생애 그 한 가운데 피어난 봄날의 꽃이라는 사실을, 어서 빨리 깨달았으면 한다.  

 

더 많은 하이쿠를 소개하고 싶지만 도무지 글이 끝날 것 같지 않아 여기서 멈춘다. 그래도 책을 구매하려는 사람을 돕는다는 기본의 취지로 돌아가 한 마디 덧 붙이면, 번역의 한계상 모든 시가 17자로 번역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감상에 무리가 따르진 않는다. 이 후에도 많은 하이쿠 선집을 찾아 보겠지만, 이 하이쿠들에서 받은 감동은 오랫동안 잊혀질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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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 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김훈의 글은 종이 위에 연필로 씌여진다. 김훈은 종이위에 연필로 써야만 한줄 한줄 온 몸으로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글쓰기를 강도 높은 육체 노동으로 비유하는데, 김훈의 문장을 보고 있으면 매초 매시 거대한 삶을 밀고 가는 순교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순교자의 모습에서 보는 이를 초죽음으로 만드는 피로가 쏟아져 나온다. 김훈의 문장은 사람을 녹초로 만든다. 

이 글은 김훈이 자전거 여행을 하고 놀고 누군가의 글 위에 평을 하고 또 누군가와 인터뷰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모두 김훈의 에세이에서 익숙한 풍경들이다. 또 다른 산문집 '자전거 여행'과 '바다의 기별'을 짬뽕해 놓은 듯 하다. 삶의 스펙트럼이 그렇게 넓은 사람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이미 나와있는 에세이가 너무 많거나. 

김훈의 문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없다'이다. 그의 문장에는 '수 많은 역사가 담겨 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수 많은'이라는 단어로 일단락 짓기에 김훈의 문장은 너무나 '깊고 넓다'. 내가 어떻게 이 책을 말할 수 있을까? 굳이 말한다면 '말할 수 없다'이다. 나의 평은 이토록 초라하고 민망하다. 

 

 

<이미지출처: http://bonjo6z.egloos.com/5251946

 

훈의 문장에선 거친 마초의 냄새가 난다. 문장은 섬세하디 섬세한데 여성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김훈의 얼굴은 사랑방에 눌러 앉아 온종일 침묵하는 가부장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는 온 몸으로 밀고 나가며 문장을 쓴다라고 했는데, 내가 생각엔 밀고 나가는게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거다. 기계에 들어간 반죽 덩어리가 고운 면발이 되어 나오듯 그는 온 몸으로 눌러 문장을 낸다. 이렇게 나온 문장은 뜨거운 물에 빠져 한 동안 삶아지다 이내 시원한 물에 식혀져 차가운 놋쇠 그릇에 담겨 나온다. 김훈의 문장은 '깊고 넓으며' 또한 '차갑고 뜨겁다'. 

김훈의 문장엔 아스라히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회한과 상념이 담겨 있다. 김훈은 여름 내내 시끄럽게 울어 대다 찬바람이 불자 울음을 멈춰 버린 벌레들의 시체를 찾아 숲으로 간다. 늦가을 기나긴 여행을 떠나는 철새의 주검을 찾아 들판으로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끝끝내 벌레와 새의 시체를 찾을 수는 없다. 김훈의 문장은 '뜩'하고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들의 과거를 더듬는다. 

그러던 김훈은, 어느날 강둑에 앉아 나비의 최후를 목격한다. 나비는 꽃 위에 앉아있다 바람에 씻겨 사라졌다. 벌레가 시체를 남기지 않는 이유는 바람 때문이었다. 벌레는 바람에 날려 무로 되돌아 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새는 어디에서 죽는가? 새들은 따뜻한 곳과 먹이를 찾아 바다 위를 나른다. 그러나 바다에는 오로지 바다 뿐이다. 바다는 잠시 쉬어갈 틈도 주지 않는다. 기진한 새는, 바다뿐이 없는 바다 위에 떨어져 시체가 된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면 새의 시체가 만든 최후의 물결마저 지워지고, 차가운 바다가 시체를 삼킨다. 

김훈의 문장엔 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동경과 한계 지워진 땅에 대한 경탄이 담겨있다. 김훈은 자전거로 여행한다. 자전거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바다를 건널 수 없는 자전거는 바다 너머 저 곳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주저 앉는다. 그리고 주저 앉은 그 자리에서 소금이 듣는 염전을 바라보거나 만선에 흐트러진 밧줄을 본다. 만선과 염전의 수확은 풍요와 결실의 상징일진대, 김훈의 문장은 이 모든 것들을 쓸쓸히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더 나아갈 수 없는 자전거의 비애와 더 나아가지 못하는 곳에서 피어나는 거룩한 생명의 신화가 짬뽕된 결과일 것이다.  

어느날 김훈은 자전거를 버리고 10일로 계획된 어선을 탔다. 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최초의 여행. 하지만 흔들림에 익숙하지 못한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흐트러진 밧줄을 부여 잡고 그물을 끌어 당기려 했지만 선원들은 번거로운 그를 만류했다. 결국 흔들림에 이기지 못하고 김훈은 돌아오는 배로 갈아탔다. 10일로 계획된 어선에는 4일만 머물렀다. 

 

 

 

김훈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김구의 수발을 들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무협지를 써 밥을 벌었다. 하지만 밥을 벌었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던 것 같다. 김훈은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하게 사는 게 싫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젊었을 때의 가장 큰 고민이 '먹고사는 데 대한 공포'였다고도 했다. 일제 시대, 독립운동가 김구의 수발을 들었던 아버지의 아들, 가난한게 싫었던 그 아들은 소설가가 되었다. 

밥벌이는 지겨운 것인가? 김훈은 '노는게 신성하다'고 했다. 노동은 숭고하지만, 인간의 삶에있어 불가피하기 때문에 존속되는 것이다. 김훈은 오늘도 종이 위에 연필로 글을 쓴다. 악전고투, 한줄 한줄 온 몸으로 밀어낸 문장이 폭염 속, 한톨 한톨 돋아나는 소금처럼 쌓여 글이 된다.  

김훈은 이 글을 팔아 밥을 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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