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파간다 -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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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aganda라는 말은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 즉 '신앙 선전실'이라고 번역되는 가톨릭교의 부서 이름에서 유래했다. 1622년,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가 급속하게 확산되는 프로테스탄티즘 세력을 억제하고자 로마 교회에 '신앙 선전실'이라는 이름의 선교 부서를 개설했던 것이다. 

이처럼 '프로파간다'라는 말에는 처음부터 나쁜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단어는 성스러운 로마 교회의 - 과연 당시의 교회를 성스럽다고 해야 할지 의문이지만 - 선교 부서가 그 뿌리였다. 이 단어가 본격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한 것은 역시 1차 세계대전, 인간의 욕망과 협잡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던 20세기 초였다. 

 

 

<광부 아들 돼지. 마틴 루터> 

 

미국은 원래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미합중국의 대선 후보 우드로 윌슨이 '승리 없는 평화'라는 슬로건으로 대통령에 당선됐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막대한 권력과 이권이 걸려 있는 전쟁, 그것도 전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최초의 빅마켓을 어찌 미국이 가만 두고 볼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참전을 결정했다. 이제 미국은 참전에 걸림돌이 되는 한 가지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노암 촘스키는 이 과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지만 그는 전쟁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전쟁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어떻게 광적인 반독일 미치광이로 만들어 모든 독일인을 죽이러 가고 싶어 하도록 만드느냐 하는 문제가 생겼다.' 

얼마전까지 반전을 외치던 국민들을 어떻게 전쟁광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프로파간다(propaganda, 선전)가 필요했다. 미국은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연방 선전 기관을 설치했다.  

태생은 고귀했으나 성장이 비천했다. 전쟁이 끝나자 타락한 선전을 입양한 것은 기업들이었다. 경영자들은 선전이 전쟁에서 이룩한 빛나는 전과에 주목했다. 그들은 선전이 미국 국민을 전쟁광으로 만들었듯이 소비자의 기호 또한 자신이 원하는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객을 최면에 걸어 더 많은 물건을 사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표였다. 

 

 

 

이 책의 저자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이 같은 시대의 요구에 영웅처럼 응답한 선전계의 선구자였다. 특히 그는 선전에 노출된 사람이 그것이 선전인지 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은밀한 선전술의 창시자였다. 버네이스 이전의 홍보가 '값싸고 맛 좋은 베이컨을 사드세요'였다면 버네이스의 홍보는 보다 간접적이고 치명적이었다. 우선 신뢰성있는 의사를 확보한다. 그런 다음 의사가 라디오 방송에 나와 이렇게 말한다. '오랫동안 건강한 생활을 하기 위해선 올바른 식습관이 필수다. 특히 아침이 중요한데, 매일 아침 섭취하는 풍부한 단백질이야 말로 무병장수의 근원이다'. 버네이스는 커피와 토스트 일색이던 당시 미국인들의 아침 식사를 모조리 베이컨과 달걀로 바꿔 버렸다.  

버네이스는 군중심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주변의 열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은 그 열 사람의 생각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집단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물건을 고르거나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책을 보거나.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한다고 믿지만, 천만의 말씀. 당신의 취향은 철저히 강요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화뇌동하는 군중들을 이끄는 것은 누구일까? 연예인, 의사, 변호사, 고위 관료, 기업의 최고위 임원, 이른바 공인이라 불리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바로 그들이다. 오늘날 많은 기업들이 드라마 주인공들의 손에 휴대폰을 쥐어주고 열심히 그들의 의상을 협찬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들에게 수 많은 대중을 이끌어 갈 파괴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5년 만에 귀국한 서태지의 파격적 공항 패션과 검거당시 신창원의 티셔츠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사실을 거론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선전의 위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선전의 무서운 점은 심지어 선전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에게조차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거다. 신자유주의와 물신만능주의, 지나친 상업주의를 비판하는 젊은이들은 유행을 거부하고 공정 무역을 주장하며 대량생산과는 거리가 먼 개성있는 '상품'에 눈길을 돌린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에 길들여 지지 않은 야생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풍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누구인가?  

모든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기존의 상업은 반대급부마저 모조리 포섭할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선전은 기존 상업의 퇴폐성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그것에 반대하는 수 많은 사람들을 충동질한다. 이 세계는 잘못 되었다. 우리는 다른 것이 필요하다. 우리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 보자. 이렇게 해서 체 게바라의 사진이 박힌 커피잔과 티셔츠가 팔리고 DIY 가구 붐이 일어난다. 한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몇몇 수입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홍대를 중심으로 수공예품 시장이 형성된다. 자유와 개성을 되찾는 싸움? 그것이 누구를 위한 싸움인지, 우리는 평생을 가도 알지 못할 것이다.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대중이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조종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사람이다. 권력자들의 목표는 대중을 아무런 생각없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좀비로 만드는 것이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런 세상을 개선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점을 철저히 활용하려 든다는 점에서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선전론은 너무나 불쾌하고 화가난다. 

에드워드 버네이스가 뿌려 놓은 선전의 씨앗은 결국 히틀러를 만들어냈다. 그 누구보다도 선전의 위력을 알고 있던 히틀러는 나치를 위한 선전 기구 책임자로 에드워드 버네이스를 영입하려 했다. 비록 그는 거절했지만 그에게 영감을 받은 히틀러는 라디오 연설과 정치 영화로 대중을 선동하는데 성공했고, 그리고는 2차 세계대전이 있었다. 

오늘날의 히틀러들은 군대와 의회가 아닌 기업과 언론의 꼭대기에 앉아 있다. 그들은 더욱 막강해졌고 우리는 보다 더 약해졌다. 우리가 그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유로운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5년이나 10년 뒤에도 우리의 세상이 이 질문에 답 할 수 없는 세상이 될까봐, 너무나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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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1-12-15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방향에서 보면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자체가 기본적으로 좀비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머릿속에 채워져야 살아갈수 있는 필연적인 존재죠. 생명체의 속성이 생존과 종족보존의 본능을 프로그램된 로보트와 별다를게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나갔는지는 모르지만 저도 최근 제모습을 보면사 좀비와 별다를게 있을까 싶습니다.

한깨짱 2011-12-16 20:37   좋아요 0 | URL
세계를 과학적으로 환원하다 보면 결국 인간은 물리 법칙 안에서 돌아가는 자동 기계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군자란님의 생각에 동의해요.

하지만, 이 부질없는 껍데기 안에 재미나고 신나는 일을 가득 채워 예기치 못한 사건들을 무한 발생, 그리하여 이 딱딱하고 재미없는 세상에 빅엿을 날려주는 게 우리 인간이 가진 진정한 잠재력이자 의무 아닐까요?

저는 최근에 회사를 때려치고 사회적 기업을 창업하여 운영 중인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애정으로 불끈 불끈 힘이 솟곤 한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커트 보네거트의 `타임 퀘이크`를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군자란님과 아주 잘 어울리는 책이 될 것 같아요.

군자란 2011-12-17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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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창덕궁 후원(비원)을 다녀오고 많은 것을 느꼈다. 요즘 사람들에게 창덕궁이니 덕수궁이니 이제는 시멘트 바닥이 깔리고 미술관으로 변해버린 옛 건물에 전혀 감흥이 생기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나, 그것이 역사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야기가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국 사람이 한국의 고궁을 탐방하면서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것은 어쩐지 쑥쓰러워, 감상이란 대상과 자신의 내면 사이에 일어나는 은밀한 대화인 법이지, 그러니 이것저것 알아볼 필요없이 그냥 둘러보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역사는 과묵하다. 과묵한 상대와의 대화는 언제나 힘들 수 밖에.  

게다가 당신의 눈썰미는 생각보다 날카롭지 못하다.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액자로 만들어 주는 정자 기둥의 장식과 다른 문들과 적어도 두 단 이상은 높이 올라있는 솟을 대문의 미묘함을, 당신은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칠 확률이 높다. 설령 그 차이를 가까스로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의미까지는 아무리 애를 써봐도 나오지 않는다. 당신에게 가이드가 필요한 시점이다. 

 

 

시오노 나나미로 따지자면 지중해 역사, 그 최고의 가이드다. 로마, 콘스탄티노플, 베네치아, 피렌체, 메디치 가, 가톨릭 교회와 교황, 그리고 투르크인. 한 마디로 지중해와 연관된 모든 국가 모든 인물들을 매의 눈으로 철저히 해부하는 외과 의사(그녀는 이탈리아인 외과 의사와 결혼했다!). 만일 우리가 시오노 나나미를 읽지 않은 채 혼자 이탈리아를 여행한다면 그 유구한 역사를 눈으로 보면서도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왜냐구? 우리는 가이드가 필요한 사람들이니까. 

이런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행운이다. 만일 그녀가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 혹은 독어로 책을 썼다면 우리는 이토록 유려한 가이드를 이토록 쉽게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연 아시아인으로서는 도저히 견줄자가 없을 정도의 식견. 게다가 이런 역사책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수 백권의 역사 자료(원서에다 따분한!)를 검토해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수 십권에 쏟아야할 에너지를 단 한권에 쏟아 붓는 작가 치고 다작을 하기 힘든 법인데, 이 70세가 넘은 노파는 소시적부터 어마어마한 집필욕을 보여줬다. 1988년, 이런 여인의 감성을 자극해 기어이 펜을 들게 만든 주제가 바로 피렌체의 마키아 벨리다. 

렌체로 말할 것 같으면 칠흑같은 중세를 깨부순 르네상스의 요람이다. 당시의 피렌체에는 최후의 만찬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천지 창조의 미켈란젤로가, 비너스의 탄생의 보티첼리가 있었다. 이름만 들으면 역사를 모르는 사람도 아하!하고 무릎을 칠 금융업의 대부호 메디치 가(家)도 있었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의 마음을 뒤흔든 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 칭송받는 예술가도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두 손에 놓고 주물럭 거리던 대부호도 아니었다. 그 당시 피렌체에는 또 한 명의 유명인이 살고 있었다. 오늘날에야 유명인이지만 당시에는 말단 공무원에 불과했던 남자. 1988년, 피렌체 근교의 한 산장에는 눈을 지그시 감은채 이 산장의 주인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곰곰히 그리고 있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의 여타 지중해 시리즈와는 달리 소설이 아니다. 구체적 사실을 늘어 놓는 다는 점에선 '로마인 이야기'와 닮아 있지만 그 보다 훨씬 부드럽고 따뜻하다. 이는 시오노 나나미가 평생을 걸쳐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사모했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에게 있어 마키아벨리는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그녀는 60년대 일본의 학생 운동이 실패로 그치자 이탈리아로 넘어와 역사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혁명 실패로 인한 사상의 공허, 헛헛한 마음의 공백을 인간성의 현실을 잔인할 정도로 냉철하게 그리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채웠던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에 대해 '자신의 전부'라고 말했다. 그녀는 목적과 수단을 단칼에 분리하는 명쾌함에, 악한 일을 해 놓고 '악한 일을 했다'고 말하는 솔직함에 마키아벨리의 팬이 되었다.  

사실 마키아벨리라 함은 우리에게 있어 협잡과 기회주의, 아첨과 아부를 상징하는 전형이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며 이를 부끄러워 할 필요 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뻔뻔함. 권력층의 비위를 맞춰 한 몫 잡아보려는 천박한 공명욕. 그러나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입신양명을 위한 뇌물같은게 아니었다. 물론 공직에서 파면된 후에 평생 복직을 바라며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마키아벨리가 그토록 복직을 원하던 직책은 피렌체 제2서기국 서기관,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오늘날 행정 부처의 실무 과장쯤되는 말단직에 불과했다. 고작 정부 부처의 말단 행정직을 얻어내기 위해 그토록 위험한 책을 썼단 말인가? 군주론은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의 미래를 걱정했던 한 남자의 뛰어난 정치사상서였다. 

 

<군주론의 모델이 되었던 체사레 보르자> 

 

 편집증에 가까운 시오노 나나미의 디테일은 이러한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저명한 사실에서부터 저명하지 않은 사실까지, 모조리 잡탕된 역사의 웅덩이 안에서 그녀는 사실과 정황적 증거를 조합해 조목조목 마키아벨리에 대한 변론을 시작한다. 이 디테일은 실로 놀라울 정도인데, 특히 계약금을 챙긴 뒤 그림을 완성하지 않고 밀라노로 튀어버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계약금 반환을 요청하기 위해 출장을 떠나는 모습, 그리고 출장비가 적다고 끊임없이 자신의 상사에게 출장비 증액을 요청했던 마키아벨리의 일화를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감탄하게 된다. 

오늘날에야 '군주론'의 유명세 탓에 마키아벨리를 굉장한 엘리트로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 마키아벨리는 대학을 나오지도, 집안이 훌륭하지도 못했다. 그는 평생 일을 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 이런 가장이, 귀족들의 눈에는 코끼리 눈꼽만치도 못한 말단직을 얻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실을, 400년이 지난 오늘날 취업과 승진을 위해 이보다 더 뻔뻔한 일도 서슴치 않는 우리가, 과연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마키아벨리의 절친이었던 프란체스코 베트리는 로마 주재 피렌체 대사로서 교황을 보필하는 직책에 있었다. 또 다른 절친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 또한 명문가 출신의 스페인 대사였다. 둘 모두 피렌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지만 끝내 피렌체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다. 행정 실무가로서, 외교관으로서, 정치사상가로서 이 두 귀족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능력을 지녔던 마키아벨리의 직책은 파면당한 제2서기국 서기관이었다.  

파면당한 제2서기국 서기관이지만 타고난 재능까지 폐기된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마키아벨리의 독이었다. 능력은 있지만 쓰임 받지 못하는 남자의 괴로움을 안다. 누구보다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지만 끝끝내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배우의 눈물을, 나는 안다. 마키아벨리 자신은 그다지 큰 야망이 있었던 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원했던 직책은 끝까지 로마 대사도 스페인 대사도 아닌 제2서기국 서기관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소박한 꿈조차 이루지 못했기에 그의 절망은 더더욱 처참했던게 아닐까? 

 

<니콜로 마키아벨리> 

1527년 5월, 자신을 중용하지 않았던 메디치가가 피렌체에서 실각했다는 소식을 듣자 당시 구이차르디니의 부탁으로 교황군에 합류해 있던 마키아벨리는 친구에게 상황을 알리지도 않은 채 곧장 고향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해 6월 마키아벨리는 부활한 피렌체 공화국의 제2서기국 서기관으로 입후보한다. 결과는, 

찬성을 의미하는 흰 강낭콩을 던진 자 12명.
반대를 의미하는 검은 강낭콩을 던진 자 555명. 

반대표를 던진 사람 중 하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知)의 사람이 아니라 충(忠)의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p. 564) 

지(知)의 사람 마키아벨리는 그로부터 10일 뒤 병으로 쓰러진다. 이틀 뒤인 1527년 6월 22일, 마키아벨리는 죽었다. 세상의 빛을 본지 58년 하고도 1개월이 되던 해였다.  

나는 마키아벨리의 죽음이 뛰어난 평민의 능력을 시시콜콜하게 여긴 귀족들의 간접 살인이었다고 생각한다. 평민 하나가 죽든 말든 그 놈이 능력이 있었든 없었든 부모 잘 만난 탓에 온갖 혜택을 누렸던 귀족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대체할 사람이야 얼마든지 넘쳐나니까. 이 무관심과 무책임함에 나는 분통이 터지고 치가 떨린다. 

내가 400년도 더 된 한 남자의 죽음에 이토록 광분하는 이유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생각되는 그가 웬지 우리 시대에 태어났더라도 반드시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걸 요즘 어렴풋이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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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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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역학 제 1법칙과 2법칙은 물질 문영의 한계를 규정하는 과학 법칙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 1법칙,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다. 

제 2법칙, 엔트로피 총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제 1법칙을 살펴 보자. 우주는 광활한가? 광활하다. 그렇다면 우주는 무한한가?  

무한하지 않다!  

우주는 광활하지만 무한하지는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별은 끊임없이 생성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창조가 아니다. 별은 다른 차원의 우주로부터 '뿅'하고 나타나는 게 아니다. 별은 우주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수 많은 물질을 재료로 탄생한다. 

이처럼 에너지는(또는 물질)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할 뿐 창조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우주는 생성될 초기에 갖고 있던 에너지에서 한 톨의 가감도 없이 평생을 살아간다. 가난하게 태어난 우주는 평생 가난하게 살아야 하고 부자로 태어난 우주는 평생 부자로 살 수 있다. 삼라만상의 빈부 법칙은 우주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만약 인간에게 열역학 제 1법칙만 존재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자원 고갈이나 환경 문제로 골치를 썩지 않아도 됐을 거다. 문제는 열역학 제 2법칙이다. 열역학 제 2법칙은 우리의 우주에서 엔트로피의 총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고 말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기아 자동차의 모닝은 1리터의 휘발류로 19km를 주행할 수 있다. 휘발류 1리터는 모닝의 엔진 내부에서 격렬하게 연소하며 수백 킬로그램의 쇳덩이를 19km 전진 시키고 추가로 그 쇳덩이로 하여금 바닥과 마찰을 일으켜 열과 소음을 발생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의 휘발류는? 일산화탄소와 질소산화물, 탄화수소와 아황산가스로 변신하여 대기 중으로 날아가 버린다.  

바이 바이 블랙 버드.(Bye bye black bird) 

우리는 일산화탄소와 질소산화물, 탄화수소와 아황산가스 그리고 이미 변환된 운동, 열, 소음 에너지를 거꾸로 돌려 휘발류 1리터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마디로 낙장불입. 특유의 유용함으로 어디에 사용되더라도 제 몫을 다할 수 있었던 휘발류 1리터는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매연이 되버렸다. 열역학에서는 이같은 매연, 유용성 제로의에너지들을 엔트로피라 부른다. 정리해 보자. 

휘발류 1리터라는 에너지는 자동차의 엔진 내부에서 연소하며 다양한 찌꺼기와 각종 에너지로 변환된다. 이 변환된 에너지들의 총량은 언제나 이전의 에너지, 즉 석유 1리터의 에너지량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다'는 열역학 제 1법칙이다. 

한편 휘발류 1리터가 유용성 제로의 에너지로 변환되는 것. 그리고 이 에너지는 결코 휘발류 1리터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엔트로피 총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 2법칙이다. 

 

 

 

열역학 제 1, 2법칙이 인류에게 제시하는 미래는 참으로 암울하다. 자원은 언젠가 고갈된다. 인류의 역사 또한 언젠가 그 바퀴를 멈출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진보라 불러왔던 모든 일들, 자연을 정복하고 그 위에 올라 승리의 노래를 불렀던 지난 날들이 사실은 우리의 몸을 짓밟고 우리의 생명을 태워 전진시킨 폭주 기관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제레미 러프킨은 그동안 우리 인간이 가져왔던 진보에 대한 맹신이 기계론적 사고관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지구에 기계론적 사고관을 최초로 끌어 들인 것은 누구인가? 17세기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다.  

베이컨의 관점은 명확했다. 관찰을 통해 객관적 지식을 발견해 내고 일체의 추상적 관념을 배제하는 것. 베이컨은 장도를 휘둘러 자연과 인간 사이에 놓인 평화의 다리를 싹뚝 잘라 버렸다. 베이컨은 인간과 자연의 평등 관계를 주체(관찰하는 자)와 객체(관찰 당하는 것)라는 주종 관계로 전복시켰다. 

베이컨이 기계 패러다임의 초석을 닦자마자 그 위에 집을 지은 것이 바로 데카르트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 이후 인간의 이성은 유례없이 지위가 향상 된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이라는 세 단어로 이 세상 전부를 연역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치 잘 익은 과일을 정성스레 포장해 차곡차곡 상자에 담듯 데카르트는 이 세계를 자신이 짜 놓은 이성의 틀 안에 쓸어 넣기 시작했다. 틀 밖으로 삐져 나온 가지들은 무참히 잘려 나갔다. 변화 무쌍하고, 그리하여 예측 불허였던 이 세계는 데카르트의 상자에 담겨 매끈한 상품이 되었다. 이 상품을 대량 생산해 전 세계에 보급한 사람은, 고전 역학의 창시자 아이작 뉴턴이었다. 

아이작 뉴턴에게 있어 세계란 '수'였다. 뉴턴에게 중요한 것은 떨어지는 사과, 그 하나하나가 가진 고유성과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적, 구체적으로 측정 가능한 사과의 위치와 속도였다.  

뉴턴의 방정식에서는 좌변과 우변이 얼마든지 자리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이 특정 방향으로 진행했다면 그것을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한게 아니었다. 모닝이 생산한 엔트로피는 정확히 그 반대 작용을 통해 1리터의 석유로 돌아갈 수 있다! 뉴턴에게 있어 세계란 힘과 운동량, 위치와 속도로 기술 될 수 있는 정교한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고 방식은 현실 세계에 닥친 문제를 다음과 같이 풀어낸다. 자동차가 늘어나 교통 정체가 심해졌다고? 그럼 도로를 만들면 되지. 도로를 만들어 농경지가 없어졌다고? 그럼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들어! 바다가 메워져 갯벌이 사라졌다고? 그럼...  

기계 패러다임의 사고 안에선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또 다시 문제를 일으켜 결국 거대한 문제의 누더기로 변해버린다. 안타깝지만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대다수는 아직까지 이 패러다임 안에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똑똑이들의 아버지 아이작 뉴턴>

엔트로피 법칙이 소개된 것은 무려 수 십년도 전의 일이지만 우리의 세계는 이제서야 겨우 그 법칙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있는 듯 하다.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대체 에너지 개발 붐과 환경 보호의 목소리는 확실히 10년 전과 비교해 봐도 놀라울 만큼 커졌다.  

하지만 우리의 지구는 여전히 기계 패러다임에 심취한 근대적 엘리트들이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 그들은 쇼핑몰을 운영하고 도시를 계획하며 자동차와 석유를 생산한다. 그들은 제일 먼저 당신에게 자동차를 권한다. 자동차가 불필요한 이동 시간을 줄여주고 더 많은 여가를 보장해 준다고 속삭인다.  

자동차를 가진 우리들은 아주 신이 난다. 이제 이동에는 자신있다. 비교적 먼 거리도 자동차만 있다면야 어려움 없이 왕래할 수 있다. 이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도심에 집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근대적 엘리트들은 두 번째로 대도시 인근에 베드 타운을 만들어 자동차를 가진 우리를 그 곳으로 인도한다. 두 도시를 잇는 8차선 왕복 도로는 자동차와 수도권 신도시 아파트에 딸린 사은품이다. 이 사은품 위로 쉴새 없이 석유가 쏟아진다.  

한편 베드 타운 안에는 대형 쇼핑몰이 들어선다. 예전에는 집 앞 마다 슈퍼마켓이 있었다. 그 때는 자동차를 가져갈 필요도 없이 걸어서 그때 그때 필요한 물건을 사 오면 됐었다. 요즘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사은품 위로 석유를 질질 흘리며 대형 쇼핑몰로 향한다. 매번 오는 건 귀찮기 때문에 카트 안에는 일 주일동안 다시는 오지 않아도 될만큼 충분한 물건들이 담긴다. 이 와중에 식료품 점에선 1팩에 2천원하는 냉동 만두가 무려 2팩에 3천원으로 1+1 판촉 행사가 벌어진다. 알뜰한 주부는 무려 천원이나 아낄 수 있다며 냉동 만두 2팩을 집어든다. 그렇게 알뜰한 주부의 식탁엔 공짜 만두 한 팩이 간식으로 올라오고 만두 한 팩의 칼로리를 사이 좋게 나눠 먹은 그 집 식구들은, 전부 돼지가 된다.  

이것이 바로 도시와 자동차와 석유와 도로, 그리고 쇼핑몰을 지배하는 자들의 마스터 플랜이다. 이 놀이에 놀아나는 동안 도시는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괴물이 되고 그 안에서 인간은 피둥피둥 살이 찐 돼지로 전락한다. 우리는 지금 초 고엔트로피 사회에 살고 있다. 

 

 

 

제레미 러프킨의 주장은 당연히 우리 사회를 저엔트로피 구조로 바꾸자는 것이다. 자동차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쇼핑몰을 몰아 낸 뒤 소상 공인의 슈퍼 마켓을 다시 내 집 앞에 들이는 것. 아주 좋은 생각이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열역학 제 2법칙과 제레미 러프킨의 '엔트로피'가 왜 향락 주의자와 낙관론자들의 관심을 피해갔는지, 이 책을 읽는 내내 의아스러웠다. 무슨 소리 하는건지 모르겠다고?  

열역학 제 2법칙은 인류의 미래에 드리운 암울한 묵시록이다. 우리가 아무리 저엔트로피 사회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끝내는 우주의 에너지 고갈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해,  

태양도 언젠간 식는다.  

그 때가 오면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무리 저엔트로피 사회를 탄탄하게 구축했더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레미 러프킨의 걱정은 뭘까?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50억년의 시간을(태양이 에너지를 모두 소비하는 시간) 다 쓰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 미안하지만 태양도 언젠간 죽는다. 그렇다면 그 날이 오기 전까지 흥청망청 즐겨 보자는 생각이 정말 그렇게 잘못된 것일까? 

나는 현재처럼 고엔트로피 사회를 유지하려는 낙관론자와 향락주의자들이 열역학 제 2법칙을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 의아하다. 그 먼 미래를 생각하기엔 우리에게 닥친 위기가 너무나 실감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지구를 살리자는 둥 자연을 보호하자는 둥 그 모든 훌륭한 생각들은 사실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게 분명하다. 언젠가 지구가 멸망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이면 곤란하지'라는 생각. 어쩌면 이같은 인간의 이기심이, 지구를 구하려는 행동의 원동력인지도 모르겠다. 

p.s - 이 리뷰가 횡설수설 갈피를 못 잡는 이유는 이미 엇나간 문장에 또 다시 애꿎은 문장을 추가하는, 이른바 고엔트로피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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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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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는 존재의 가벼움이 도무지 참을 수 없어 이 책을 썼다. 하지만 그 존재의 가벼움이 되려 무거운 바위가 되어 읽는 사람의 가슴에 내려 앉는건, 존재의 무게가 가진 최대의 아이러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있으면 마치 눈 내리는 사막을 걷는 기분이 든다. 주변은 온통 반복되는 모래 언덕 뿐이다. 모래 언덕을 넘고 넘어 드디어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면 그 뒤에 펼쳐지는 것은 광활한 모래의 바다. 사막의 뒤에는 사막이 있다. 그런데 이 곳에 온기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뜨거운 모래 위로 차가운 눈이 내린다. 발 밑에는 정신을 태우는 화염이요 머리 위는 온 몸을 굳게 만드는 얼음이다. 누울 수도 설 수도 돌아갈 수도 계속 갈 수도 없다. 막다른 골목이라면 힘껏 온 몸을 부딪혀 보기라도 하겠건만 이건 사방이 뻥 뚫려 있는 공허의 사막이다. 

 

 

소설 속에서 사막역을 맡은 것은 체코다(그 당시 체코 슬로바키아). 1960~70년대의 체코라고 생각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된 지구. 강력한 소비에트 연방의 힘으로 동유럽은 온통 공산화 된다. 그러나 낫과 망치가 그려진 소비에트 연방의 적색기는 결코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 세계를 자기 것으로 차지하고 싶은 추할 정도로 탐욕스러운 한 남자의 가면이었다. 그는 이 적색기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나라를 유린한다. 

체코의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라는 정치 계획을 발표하고 개혁에 착수했다. 언론과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경제면에서는 시장 경제와 통제 경제가 적절히 혼합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프라하의 봄'이다. 시덥잖은 드라마의 제목이 아닌 것이다. 

체코에서 불어오는 봄기운은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프라하의 봄은 공산 주의를 수술하려는 날카로운 메스 같았다. 소련은 체코의 국경에서 협상을 진행했다. 개혁을 중지하거나 제약하려는 목적. 그러나 협상은 결렬됐다. 1968년 8월 20일 밤, 20만명의 군대와 2,000대의 탱크가 체코의 국경을 넘었다. 8월 21일 아침, 체코는 완전히 점령당했다. 

개혁 정치를 시작했던 둡체크와 정치인들이 모스크바로 체포되었다. 애시당초 둡체크를 실각시키려는 소련의 목적은 체코의 저항이 광범위해지자 당초의 계획을 포기했다. 둡체크는 극심한 심리적 압박감 속에서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한다. 체코로 돌아와 굴욕적인 연설을 했다.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둡체크와 당시 소련 수상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 

이 책의 주인공 프란츠와 사비나와 테레자와 토마시가 바로 이 시대에 살았다(밀란 쿤데라의 시대기도 하다). 굴욕의 시대였고 천박한 시절이었다. 같은 시대를 살던 40대의 소설가 얀 프로하즈카는 체제를 비판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언론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소설가를 씹어 먹었다. 그럴수록 얀 프로하즈카에 대한 국민의 사랑은 더해갔다.  

어느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프로하즈카와 한 대학 교수가 나눈 사적인 대담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대담 속에는 소설가가 그의 친구들을 비웃는 대목이 여럿 있었다. 방송은 특히 둡체크를 비웃는 대목을 두드러지게 하려고 애썼다. 대화는 집안에 설치된 도청기에 의해 녹음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인간의 권위와 사생활을 유린한 비밀 경찰의 야비함보다 그들이 사랑했던 소설가를 더욱 미워했다. 굴욕의 시대였고, 천박한 시절이었다. 

이런 세상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건 말 그대로 인간이다. 인간이 가장 인간적일 수 있을 때는 서로를 신뢰하고 있을 때다. 서로를 이해하고 있을 때다. 하지만 프란츠와 사비나와 테레자와 토마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토마시는 실력있는 외과 의사였다. 토마시는 첫 번째 아내와 결혼하기 전과 후 그리고 심지어 결혼 기간 중에도 수 많은 애인을 갖고 있었다. 토마시는 두 번째 아내와 결혼하기 전과 후 그리고 심지어 결혼 기간 중에도, 역시 수 많은 애인을 갖고 있었다. 두 번째 아내는 테레자였다.  

토마시는 섹스와 사랑은 별개라고 말했다. 테레자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토마시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테레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소련의 침공 후 제네바로 도피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테레자는 체코에 남기로 했다. 제네바에 홀로 도착한 토마시는 얼마 후 체코로 되돌아 온다. 토마시는 체코로 향하는 차 안에서 마음으로 부터 울려 퍼지는 이런 소리를 듣는다. '그래야만 하는가?' 토마시가 대답한다. '그래야만 한다!'  

토마시는 자신의 아파트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이윽고 테레자가 나와 토마시를 만났다. 테레자는 토마시가 체코로 돌아온 이유를 알지 못했다. 토마시는 체코로 돌아온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토마시는 귀향을 후회하고 있었다. 

<밀란 쿤데라> 

프란츠는 저명한 대학교수로서 아내를 배반하고 제네바에 애인을 갖는다. 사비나는 체코 시절에 토마시가 사랑한 수 많은 애인 중 하나였으나 제네바에서는 프란츠의 애인으로 살아간다. 프란츠는 사비나를 사랑했지만 사랑이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군인'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장이 해제된 채로, 온 몸을 내 맡긴 뒤 '언제 공격당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불안에 떠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었다.  

프란츠는 아내 마리클로드를 찾아가 이혼을 통보한다. 애초에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없었다. 프란츠는 아내에게 필요한 것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 그리고 경제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프란츠는 아내에게 모든 재산을 양보한다. 프란츠에게는 사비나만이 삶의 무게를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에 그 외의 모든 것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리클로드는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란츠는 마리클로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리클로드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프란츠를 이해하지 못했다. 마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사랑은 '영원한 투쟁'이라고도 말했다. 프란츠는 자신에게는 싸울 마음이 털끝 만큼도 없다고 소리 쳤다. 

프란츠는 사비나를 만나러 제네바로 갔다. 프란츠는 사비나를 사랑하며 그녀와 결혼할 거라고 말했다. 프란츠는 완벽한 미래를 꿈꾸며 사비나의 아틀리에를 나섰다. 사비나는 그날 밤 파리로 떠났다. 두 사람은 이후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토마시와 테레자와 프란츠와 사비나의 세계는 그 밀접한 육체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몰이해의 향연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몰이해를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적극적 해명은 이 세상의 무게를 재는 천칭의 한 쪽 편에 자신의 존재를 올려 놓는 것이다. 천징의 다른 한 쪽에는 거대한 똥 무더기가 올려져 있다. 존재의 합은 우리가 아무리 기를 쓰고 더해 보아도, 결코 똥 무더기의 무게를 이길 수 없다. 해명은 무의미한 것인가? 무의미한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처음 읽은 것은 아마 스물 한살 때일 것이다. 그 때 난 온 몸을 강타하는 허무의 박력에 한 동안은 넋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 허무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 때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럼 이제는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글쎄, 허무란 사방에 가득 차 있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걸 두 손으로 꼭 쥘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얼굴을 똑똑히 마주할 수 있다면 그걸 허무라 부를 수 있을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가슴 속에 가득 들어찬 빈 공간이다. 빈 공간이기에 손으로 꽉 잡아 내던져 버릴 수도 없고 또 이미 그것으로 가득찬 가슴이기에 다른 것을 채워 넣을 수도 없다. 허무를 아는 사람들은, 이처럼 공허한 포만감으로 가득찬 채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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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 라캉 - 무의식의 초대 지식인마을 34
김석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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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라캉 

이드, 자아, 초자아로 구분되는 프로이트의 2차 정신 기구 모델은 후계자들의 격렬한 의견 대립을 통해 크게 두 가지 흐름으로 분화된다. 하나는 생명의 본질을 이드에서 찾으며 인간이란 이드, 자아, 초자아가 끊임없이 대립하고 상호작용하는 역동적 실체라는 주장이다. 나머지 하나는 자아의 자율성과 방어 기능을 강조하는 흐름으로 정신분석은 결국 자아의 강화와 이를 통한 현실 적응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후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프로이트의 여섯 번째 딸 안나 프로이트고 전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자크 라캉이다. 

 

상계 

라캉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를 상상계로 지칭하는데, 이는 이 세계가 가상이라는 말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식이 이미지를 매개로 이뤄진다는 말이다. 라캉은 이를 '거울 단계'의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거울을 처음 본 어린 아이는 거울 속의 이미지가 '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는 '나'를 알아본다. 이 때가 바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최초로 인식하는, 즉 자아가 발견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나'라는 정체성이 나를 비춘 '대상'을 통해 밝혀진다는 것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 한낱 이미지에 불과한 대상을 통해 나를 인지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진짜 나'의 소외를 초래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코 진정한 '나'를 알지 못한다. 우리의 자아는 대상화된 '나'를 통해 인지되기 때문에 그것은 근본적으로 타자이며 수 많은 오해의 씨앗이 심어진 불완전의 토양이다. 

 

한편 '나'의 이미지에 매료되는 거울 단계의 매커니즘은 나르시즘의 기원이 되기도 한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자아의 발견은 안정된 자기 인식의 시작이 아니라 '진짜 나'와 '나를 비추는 이미지' 사이의 분열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를 비추는 이미지'는 그 특성상 완벽한 이상향을 지향하면서 실제의 '나'와의 괴리를 가속화 하는데 그 이유는 거울 단계에서 지각되는 신체적 미숙함이 원인이다.  

실제로 생후 6개월~1년 된 아이는 운동 신경의 발달이 미숙해 아직 자신의 몸을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하며 몸이 주는 감각들도 파편화된 형태로 느낀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모습은 이상화된 전체로 나타나기 때문에 아이는 자신의 몸이 보여주는 완벽한 조화에 환호하면서 끌리게 된다. 그러나 아이가 이미지에 끌리면 끌릴수록 아이가 느끼는 실제 몸의 현실은 완벽한 자아의 상에 균열을 낳는다. 이렇듯 실제 몸의 불완전성과 이미지의 완벽함이 최초의 분열과 불안을 낳으면서 자아의 일체감을 위협하는 게 거울 단계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때 불완전한 육체와 이상적 이미지를 봉합하는 것이 바로 나르시즘이다. 나르시즘은 '완전'에 대한 욕망으로 철저히 이상화된 자아를 만들어내지만 대상화된 자아의 불완전함은 엄연한 현실이다. 나르시즘은 우리를 환상 속에 가둬두려는 마술의 집이다. 환상은 컴컴한 암막이 되어 현실을 가려 보지만 실제와 환상 사이의 균열은 점점 커져만 가고 그 안에선 썩은 내가 풍겨 나온다.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결국 연못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신화는 썩은 내를 풍기는 나르시즘의 불길한 묵시록이다. 

상징계 

대상화된 자아가 속하는 곳이 상상계라면 실제 주체가 거하는 곳이 바로 상징계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란 곧 '말하는 주체'다. 따라서 상징계는 언어에 의해 구조화되는데 라캉은 소쉬르의 기호론을 차용하여 이를 설명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여기서 부터 두 손을 들었다. 소쉬르의 기호론이라는게(시니피에-시니피앙의 관계를 설명하는) 절대 쉬운 개념이 아닌데 여기다 라캉의 새로운 생각까지 덧붙여 지니 이건 완전히 암흑이다. 중요한건 시니피앙(기표: 말해지는 것. 단어를 발음과 의미로 나눌 수 있다면 그 중 발음에 해당하는 것이 시니피앙이다.)이 자율적, 독자적으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정해지는 방식은 결국 상상계에 의존하기 떄문에 결국 주체는 소외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좀 더 들어가보자. 

라캉의 언어론에서 시니피앙은 시니피에보다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라캉은 둘 사이에 거대한 가로막 하나를 질러 놓고 위에는 시니피앙을 아래에는 시니피에를 위치시키는데 시니피에는 이 가로막에 막혀 끝없이 침잠한다. 이때 시니피앙은 시니피앙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연쇄 사슬을 구성하는데 이 연쇄사슬이 바로 언어의 체계다. 이 때문에 언어의 체계는 그 자체로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왜냐하면 시니피앙 간의 구분은 단순히 말(발음)의 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여자'라는 시니피앙은 '남자'라는 시니피앙을 만나 서로 구분된다. '여자'를 '여자'이게 만드는 것은 '남자'를 포함한 다른 모든 시니피앙들이 '여자'와는 다르게 발음되기 때문이다. 시니피앙은 이렇게 상호 구분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립한다.  

하지만 소리만 가지고는 의사소통이란 것이 이뤄질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가 발생시키는 소리의 다름을 통해 의미의 다름을 인지하는데 이는 소리가 특정 의미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캉의 이론에서 이 소리와(시니피앙) 의미(시니피에)의 만남을 주재하는 것이 바로 '주체'다. 문제는 이 주체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자'라는 단어가 사전적으로 생물학적인 여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만약 수 십차례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경험한 남자라면 여자를 '인정머리 없는 냉혈한'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우리가 여자라는 단어에서 어머니의 풍요로움과 따뜻함을 느낄 때 이 남자는 가슴을 찌르는 한기를 느낄 것이다.  

이처럼 시니피앙은 시니피에와 일대 다 심지어 다대 다로 결합하면서 고정된 실체를 형성하지 못한다. 확실한 '나', '절대적인 기준'의 부재는 '이것이 진짜 주체인가?'라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 없다. 이것은 상징계의 구성 조차 상상계의 근본적 결함인 오인 구조를 - 대상화된 자아를 진짜 나로 착각하는 -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주체는(진짜 주체) 상징계에서조차 소외 당한다.  

사실 상징계에 대한 설명은 이후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다. 책은 상징계를 '선험적 질서로서 주체를 벗어나는 타자의 영역'이라고 설명하고 '이를 상상계의 소타자와 구별하여 대타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며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론'이라는 라캉의 핵심 이론이 전개되는데, 나는 '선험적 질서로서 주체를 벗어나는'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 시니피앙와 시니피에의 관계 - 그것이 왜 '타자의 영역'이 되는지는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어 결국 줄줄이 사탕으로 이어지는 핵심 이론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말았다.  

이렇듯 알쏭달쏭 장님 문고리 잡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 그나마 느낀 바가 있어 한 마디만 더 하자면,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라는 주장은 라캉의 이론 중 현대인의 실체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이론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거울 단계의 매커니즘에서 살펴봤듯이 우리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명석판명하게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무언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사실 내가 나라고 '착각하는 존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라든가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체와 자아(대상화된 주체)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나-타자의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내가 진짜 원하는게 뭔지 모르겠어'라는 말은 '네가 진짜 원하는게 뭔지 모르겠어'라는 말과 사실상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수 많은 인간들이 '진짜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게 아닐까? 

안되겠다. 한 마디만 더 하자.  

나-타자의 관계에서 타자란 '대상화된 주체'를 의미하지만 말 그대로 '타인'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린 아이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아를 확인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 형상이 자신을 그대로 흉내내는 허구의 이미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어른의 세계에서 거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타자, 나와 더불어 사회, 문화를 형성하고 관습과 질서에 순종하는 타인을 의미한다. 

확실히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비춰진 나의 모습을 통해 나를 확인한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받아들여 질지 요리조리 눈치를 보며 이 사회를 살아간다. 중요한건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근본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추구한다. 동창회에 들고 나간 싸구려 백을 은근 슬쩍 가리게 되는 순간 당신의 마음 속에는 루이비통과 에르메스와 샤넬의 욕망이 싹 튼다. 그러나 그 욕망의 씨앗은 '나'로 부터 잉태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곳으로 부터 뿌려진다.  

문화와 관습의 이름으로 포장된 사회는 인간의 일탈을(진짜 '나'를 찾는 행위) 감시하는 거대한 감옥이다. 우리는 감시자를 자청하며 서로의 욕망을 서로에게 투영한다. 이 안에 진짜 나는 없다. 

 

실재계 

상징계는 언어를 통해 구조화 된다. 이 말은 상징계에 진입한 인간이 언어를 매개로 세계를 추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어를 매개로 세상을 추상'한다는 말 속에는 결코 언어가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렇다. 매개는 그저 매개일 뿐이다. 언어 자체가 실재는 아닌 것이다. 

우리는 마치 언어 때문에 이 세계가 존재하고 언어가 아니면 실재를 드러낼 방법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언어와는 무관하게 실재는 우리 눈 앞에 존재한다. 우리의 우주가 고작 언어가 만들어지고 난 뒤에야 태어날 수 있었던 부차적 개념에 불과했던 것일까? 아니다. 우리가 구름을 연기라고 말하든 나무라고 말하든 구름은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위에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구름이란 말에는 구름의 실재를 보여줄 수 있는 어떠한 단서도 없다는 것이 오히려 납득할 만한 설명 아닐까?  

그렇다. 언어는 세상을 해설하는 도구일 뿐 결코 이 세상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더군다나 해설은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느끼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그리고 듣는 사람의 지식에 따라 얼마나 다양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따라서 언어와 실재와의 관계는 이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실재에 드리워진 거대한 장막이다.  

라캉의 실재계는 언어의 장막 뒤에 숨어 있는 보드라운 속살을 말한다. 상징계는 끊임없이 이 속살을 사진 찍어 세상에 드러내려 하지만 그것이 언어라는 암실을 통과하는 순간 빛바랜 흑백 사진이 되버리고 만다. 그러나 흑백 사진에서 드러난 '색'의 결여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색'의 실재를 확신하게 만든다. 누가 그랬던가? 존재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다름아닌 부재라고! 

 

우리의 욕망이란 결국 결여된 것을 채우려는 갈망, 어두운 장막을 들춰내고 실재에 가 닿으려는 간절함이다. 하지만 실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을 통해서는 이 세계에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얻을 수 없는 것을 소망하고 있을 뿐이다.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눈을 감고 싶지만 부정의 강도가 높아갈 수록 존재의 크기는 커져만 간다. 그래서 또다시 욕망의 돌을 굴린다. 시지포스의 형벌은, 아마도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을 은유한 것이리라. 

무의식과 실재 

실재는 상징계의 작용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마치 고요한 화산 밑에서 이글거리는 용암처럼 실재는 끊임없이 이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길 갈망한다. 그렇다면 이 화산을 폭파시킬 수 있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말장난 같지만, 실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글은 절대 그 방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실재의 끝자락이라도 잡아 그 모습을 글로 옮기려 하지만 손 끝으로 타자를 누르는 순간 실재는 언어의 어두운 장막에 가려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래도 굳이,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화 되지 못한 것 논리적이지 못한 것 비언어적인 것이 우리의 실재다. 꿈에서 겪은 기괴한 이야기, 마음 속 깊숙히 숨어 있는 원초적 욕망들이 바로 우리의 실재다. 

식의 흐름 기법이나 초현실주의 화법의 작품들이 범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표현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은 그들이 미치광이기 때문이 아니라 실재를 직관하는 초인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이드'가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자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을 담고 있는 원초적 에너지 덩어리라면 라캉의 실재가 자리하는 곳이 바로 무의식이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실재는 존재한다. 우리는 끝까지, 이 실재를 '이해'하려 들기 때문에 실재는 영원히 우리 앞을 배회할 뿐이다. 

 

 

 

캉과 프로이트, 그리고 지식인마을 시리즈 

프로이트가 어려운건 정평이 난 사실이지만, 그래도 프로이트의 저작 몇 권을 훑어 본 뒤 내리는 판단에 따르면, 라캉이야 말로 난해의 극치다. 평생 정신과 의사로서 임상에 근거한 정신 분석학을 창시한 프로이트와 달리 라캉은 철학을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정신 분석학을 이론적으로 세련되게 다듬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 때문에 난해함은 배가 되었다. 프로이트를 이해하기 어려운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개념의 문제라기 보다는 일종의 심리적 거부감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부모에 대한 성애와 거세 컴플렉스를 근간으로 하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등 인간의 모든 삶을 성적 문제로 환원하는 태도).  

반면 라캉은 개념 자체가 너무나 어렵다. 실재계와 상징계의 대립은 수 천년간 철학계를 전쟁터로 만들어 온 관념론-유물론의 대립을 연상케 하며 '실재(존재)의 드러냄' 같은 개념은 악명 높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떠올리게 한다. 고작 한 권의 책으로 라캉을 판단하기엔 이를 수 있지만, 어쨌든 내 첫 느낌은 그렇다.  

정신 분석학이 흥미로운 분야인 것은 사실이지만 책 한 권을 읽고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이렇게 힘이 들어서야 앞으로 이 분야의 책을 선뜻 집어들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참,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게 하나 있는데, 그렇다고 이 책 자체가 어렵다는 말은 아니다. 이 책은 지식인마을 시리즈의 모든 책이 그렇듯 아주 친절하고 쉽게 씌여져 있다. 이런 책을 내준 김영사에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정신 분석학은 잠시 시간을 두고 다시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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