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2 - 한니발 전쟁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199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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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전투를 얘기 하자면 포에니 전쟁을 빼놓을 수 없고, 포에니 전쟁을 얘기 하자면 한니발이 빠질 수 없다. 

포에니란 라틴어로 '페니키아인의'라는 뜻이다. 따라서 포에니 전쟁이란 페니키아인의 전쟁 또는 페니키아인과의 전쟁을 의미한다. 역사가들은 대략 기원전 264년 부터 201년 까지 있었던 로마와 카르타고의 두 차례의 전쟁을 통틀어 포에니 전쟁이라 부른다. 물론 중간에 휴전 기간이 있기는 했다. 편의상 이 기간을 기준으로 전쟁을 둘로 나눠 기원전 264년 부터 241년 까지를 제 1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9년과 201년 사이를 제 2차 포에니 전쟁이라고 부르게 됐다. 

제 1차 포에니 전쟁은 바다에서 결판이 났다. 아테네 이후 최강의 해운국이 되어 있던 카르타고는 싸움이라곤 육지에서 치고 박는 것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로마의 개미떼들을 바다로 끌어 냈다. 승리는 카르타고의 것이 분명했다. 병력 상으로 봐도 카르타고의 해군은 로마의 1.5배에 달했다. 항해술은 말할 것도 없지.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배를 일렬로 세우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로마군을 보고 지중해 최강의 해군은 배를 잡고 웃었다. 웃고 즐기는 사이 두 선단은 얼굴을 마주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윽고 로마군의 뱃전에서 '까마귀'라 불리는 덫이 내려지자 두 대의 배는 그대로 하나로 엉켜 육지가 되었다. 이 육지 위로 유럽 최강의 군단, 로마의 중무장 보병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제 1차 포에니 전쟁은 바다를 육지로 만들어 버린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그날 로마 해군의 엉성함을 비웃던 군사들 사이에도, 패배로 인해 시칠리아를 떠나야 했던 카르타고인들 사이에도 한니발은 없었다. 카르타고의 군신(軍神). 고독한 전술의 대가 한니발은 기원전 219년, 로마인들이 '한니발 전쟁'이라 부르는 제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역사의 첫 장을 장식한다.






제 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개인과 로마 제국 전체의 승부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엔 아무런 깜냥이 없는 나이지만, 그래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건 있다. 이 전쟁은 한니발이라는 사자를 광장에 풀어 놓은 뒤 수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 창으로 찌르는 형국이었다. 처음에 이 사자는 힘이 세고 아주 젊었다. 도저히 군대가 넘을 수는 없다고 여겨진 알프스를 그것도 코끼리를 이끌고, 겨울에 넘었다. 냉혹의 산을 넘어 이탈리아에 발을 딛자 마자 광장의 사람들은 속수 무책으로 쓰러져 갔다. 사자는 단 한 개의 창도 자신의 살갗에 닿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로마는 참패했다.

참패한 곳은 시칠리아나 스페인같은 속주 도시가 아니었다. 이탈리아 본토. 로마의 앞 마당이었던 것이다. 파죽지세로 조국을 파괴해 오는 한니발을 막아 세운 건 평민 출신의 집정관 샘프로니우스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로마는 한니발의 위력을 과소평가 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극심한 패배를 당한 직후라도 절대 평정심을 잃지 않고 비상 상황에 대응하는 로마다. 전투에는 졌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에게는 제 1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자심감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니발은 달랐다. 한니발은 지금껏 로마가 상대해왔던 그저그런 장군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군신. 신에게 이기기 위해 인간은 그저 필승의 마음을 다지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그야말로 총체적 역량, 조국의 역사 전부를 거는 심정으로 싸움에 임해야 한다.


<한니발>


트레비아에서 군신을 두 번째로 맞은 로마군은 2만명의 전사자를 냈다. 집정관은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카르타고 군의 피해는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헤아릴 가치도 없을 만큼 적었다'고 한다. 로마에 종말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니발은 전투 뿐만이 아니라 정치에도 능했다. 붙잡힌 수 만의 포로 중 유독 로마군에게만 혹독했다. 로마 연합의 일원으로 병력을 제공했던 동맹국 군사들에게는 충분한 음식과 따뜻한 모닷불이 제공됐다. 강력한 개미 군단을 거느리는 여왕도 휘하의 개미들을 잃고 나면 한낱 무력한 곤충일 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한니발은 동맹국 포로들을 조건없이 풀어 줌으로써 카르타고의 적은 오로지 '로마'임을 천명했다.

로마 공략이 시작된 지 2년 째, 30세가 된 한니발은 로마 연합의 커다란 축인 에투르리아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토스카나 지방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세 번째 싸움터는 안개가 짙게 깔린 트라시메노 호수였다.

아침 안개를 틈타 기습에 돌입한 한니발의 군대는 플라미니우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에게 배수진을 치게 했다. 그곳은 곧 사지였다. 전투보다는 살육에 가까웠던 그 날의 싸움은 로마군의 전멸로 끝이 났다. 집정관 플라미니우스도 전사했다. 민회를 소집한 법무관이 로마 시민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완패당했다'는 말 뿐이었다.





그대로 수도 로마를 공략할 수도 있었지만 한니발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한다. 한니발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을 속이기 위해선 자기편 부터 속이라는 말도 있지만 한니발은 자기편 장교들에게까지 철저히 본인의 의중을 속였던 모양이다. 나는 이런 대목에 이르러선 도무지 상사의 속내를 알 수 없어 답답하기 그지 없는 부하들의 심정을 헤아리기 보단, 연승으로 일기충천해 있으나 여전히 거대한 적군이 버티고 있고 심지어 본국의 원조조차 전무한 전쟁을 묵묵히 이끌어 나가는 한 남자의 지독한 고독을 느끼게 된다.

한니발은 제 2차 포에니 전쟁을 치르는 동안 끝내 혼자였다. 이미 아프리카의 비옥한 땅을 차지하고 있던 카르타고인들은 한니발의 전쟁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원은 지지부진, 가까스로 결정된 지원군 파병 마저도 상륙할 항구를 확보하지 못해 번번히 실패했다. 한니발은 이런 싸움을 20년이나 지속했다.

씁쓸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다시 환호에 휩싸인 한니발의 군대를 만나보기 위해선 기원전 216년 8월로 돌아가야 한다.

평상시 보다 전력을 증원한 로마의 4개 군단(로마는 집정관 한 명이 2개 군단을 이끈다), 총 87,200명의 병력은 한니발의 5만 병력이 있는 칸나이로 향했다. 서로를 앞에 둔 두 군대가 포진을 마치자 이윽고 전투가 벌어졌다. 먼저 각 진의 좌, 우익을 담당하는 기병들이 뒤엉켜 혈전을 벌였다. 잠시 후 중앙에 위치하고 있던 로마의 보병들이 쏟아져 나오자 한니발 군의 선봉 갈리아 보병들이 좌우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틈으로 로마의 자랑 중무장 보병들이 치고 들어왔다. 보병끼리의 전투는 확연히 로마의 우세로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기병은 달랐다. 한니발 전술의 핵심은 뭐니뭐니해도 기병이었다. 지난 세 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도 바로 이 기병의 활약 덕분이었다. 전술 뿐만 아니라 수적으로도 우세였던 한니발의 기병은 로마 기병을 물리친 뒤 로마군의 배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때 전투 초반 좌우로 도망쳤던 갈리아 보병들이 로마군의 좌우를 막아 세웠다. 로마군은 완전히 포위 당했다. 

이튿날, 전사자에게서 빼앗을 물건을 추리는 데만 한니발의 5만 병력이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하니 이 날 한니발 군이 거둔 전과는 실로 어마어마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로마에 모여든 패잔병의 수는 채 1만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에서 보여준 포위 전술


내리 4연승을 이끌어낸 한니발의 군대가 이후 어떻게 됐는지는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몫으로 남기고 싶다. 다만, 이후 한니발과 로마 집정관 스키피오 사이에 있었던 일화는 꼭 소개하고 싶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은 전쟁의 최후를 짐작할 수도 있으니 독서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여기서 그만 리뷰 읽기를 멈추시기 바란다.

(본문 364~366p. 일부 내용 생략)
12세 연상인 한니발에게 스키피오가 정중하게 물었다.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요."
스키피오가 다시 물었다.
"그러 두번쨰로 뛰어는 장수는 누굽니까?"
한니발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요."
스키피오는 다시 질문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세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카르타고의 명장은 이 질문에도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건 물론 나 자신이오."
자마 전투를 승리로 이끈 업적으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까지 받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 말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장군께서 자마에서 나한테 이겼다면?"
한니발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 순위는 피로스를 앞지르고 알렉산드로스도 앞질러 첫번째가 되었을 거요."

이 일화에 등장하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한니발이 대승을 거둔 네 번의 전투 중 세 번의 전투에 참여했고 세 번 모두 가까스로 살아 남은 로마의 귀족이었다.

이런걸 보면 역사란 정교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따분한 기계같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 세번의 전투 중에 스키피오가 전사했다면, 그리하여 이후 자마 전투에 참전한 집정관이 스키피오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세계의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흔히 역사에 가정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역사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가정이야 말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라는 것 또한 절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역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수 많은 우연이 모여 굴러가기에, 가정은 결코 의미없는 일이 아니다. 애초부터 그렇게 되리라고 결정되어 있는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세상은 그저 거대한 우연 덩어리. 후세의 우리들이 생각하는 수 많은 가정들은 실제로 몇 개의 변수만 작동했더라면 충분히 현실이 되고도 남았을 것들이다. 그러니 이렇게 우연의 체스판 위로 끊임없이 말들을 움직이며 가정해 보는 것, 이게 바로 역사를 공부하는 진정한 재미가 아닐까?




로마인 이야기 1권 이후로, 사실 나는 더 이상 로마인 이야기를 보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우선 재미가 없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전매 특허인 르네상스 시대의 지중해와는 다르게 로마인 이야기에는 좀처럼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딱딱함과 건조함이 있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뇌까지 누렇게 변색시켜 버릴 것 같은 지중해의 햇빛이 내리쬐는 것 같아 심히 권태로웠다. 하지만 2권의 제목은 무려 '한니발 전쟁'이다. 역사에 재미를 갖는 사람치고 어찌 전쟁 이야기를 마다할 수 있겠는가.

아직 로마인 이야기 전권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2권 '한니발 전쟁'을 읽어본 사람으로서 평하건데, 이 시리즈는 이 한권의 책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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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1-12-19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로 조금 오래된 책을 중심으로 읽으신가 봅니다. 로마인이야기를 읽은지 언제인지 까마득한데 님의 리뷰를 읽으며 다시 한번 한니발이라는 인물, 로마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리뷰 감사합니다.

한깨짱 2011-12-20 13:12   좋아요 0 | URL
네 저는 공짜로 생기지 않는 한 신간을 사서 보지는 않습니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건 아니고 쿠폰 적용이 안되서요! 한니발은 딱 제 스타일에 맞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고독하고, 최후가 쓸쓸했던... 아무튼 좋게 읽어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팜북 2012-04-21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마인 이야기는 5권 카이사르 까지 100미터 달리기 하듯 읽히다가 6권부터 갑자기 마라톤이 되더군요^^;
아! 5권까지 스토리가 아직 제 머리에 버티고 있을때 얼렁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한깨짱 2012-04-21 18:33   좋아요 0 | URL
시오노 나나미는 정말로 글을 잘 씁니다. 재미에 관한한 이 사람에 대해 이론을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책만큼은 그렇게 재미있는 편이 아니더라고요. 그게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전 2권에서 멈췄어요.
 
프로파간다 - 대중 심리를 조종하는 선전 전략
에드워드 버네이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공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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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aganda라는 말은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 즉 '신앙 선전실'이라고 번역되는 가톨릭교의 부서 이름에서 유래했다. 1622년,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가 급속하게 확산되는 프로테스탄티즘 세력을 억제하고자 로마 교회에 '신앙 선전실'이라는 이름의 선교 부서를 개설했던 것이다. 

이처럼 '프로파간다'라는 말에는 처음부터 나쁜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 단어는 성스러운 로마 교회의 - 과연 당시의 교회를 성스럽다고 해야 할지 의문이지만 - 선교 부서가 그 뿌리였다. 이 단어가 본격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한 것은 역시 1차 세계대전, 인간의 욕망과 협잡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던 20세기 초였다. 

 

 

<광부 아들 돼지. 마틴 루터> 

 

미국은 원래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미합중국의 대선 후보 우드로 윌슨이 '승리 없는 평화'라는 슬로건으로 대통령에 당선됐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막대한 권력과 이권이 걸려 있는 전쟁, 그것도 전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최초의 빅마켓을 어찌 미국이 가만 두고 볼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참전을 결정했다. 이제 미국은 참전에 걸림돌이 되는 한 가지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노암 촘스키는 이 과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지만 그는 전쟁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전쟁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어떻게 광적인 반독일 미치광이로 만들어 모든 독일인을 죽이러 가고 싶어 하도록 만드느냐 하는 문제가 생겼다.' 

얼마전까지 반전을 외치던 국민들을 어떻게 전쟁광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프로파간다(propaganda, 선전)가 필요했다. 미국은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연방 선전 기관을 설치했다.  

태생은 고귀했으나 성장이 비천했다. 전쟁이 끝나자 타락한 선전을 입양한 것은 기업들이었다. 경영자들은 선전이 전쟁에서 이룩한 빛나는 전과에 주목했다. 그들은 선전이 미국 국민을 전쟁광으로 만들었듯이 소비자의 기호 또한 자신이 원하는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객을 최면에 걸어 더 많은 물건을 사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최종 목표였다. 

 

 

 

이 책의 저자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이 같은 시대의 요구에 영웅처럼 응답한 선전계의 선구자였다. 특히 그는 선전에 노출된 사람이 그것이 선전인지 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은밀한 선전술의 창시자였다. 버네이스 이전의 홍보가 '값싸고 맛 좋은 베이컨을 사드세요'였다면 버네이스의 홍보는 보다 간접적이고 치명적이었다. 우선 신뢰성있는 의사를 확보한다. 그런 다음 의사가 라디오 방송에 나와 이렇게 말한다. '오랫동안 건강한 생활을 하기 위해선 올바른 식습관이 필수다. 특히 아침이 중요한데, 매일 아침 섭취하는 풍부한 단백질이야 말로 무병장수의 근원이다'. 버네이스는 커피와 토스트 일색이던 당시 미국인들의 아침 식사를 모조리 베이컨과 달걀로 바꿔 버렸다.  

버네이스는 군중심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주변의 열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은 그 열 사람의 생각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집단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물건을 고르거나 음악을 듣거나 아니면 책을 보거나. 사람들은 이 모든 것들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한다고 믿지만, 천만의 말씀. 당신의 취향은 철저히 강요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화뇌동하는 군중들을 이끄는 것은 누구일까? 연예인, 의사, 변호사, 고위 관료, 기업의 최고위 임원, 이른바 공인이라 불리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바로 그들이다. 오늘날 많은 기업들이 드라마 주인공들의 손에 휴대폰을 쥐어주고 열심히 그들의 의상을 협찬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들에게 수 많은 대중을 이끌어 갈 파괴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5년 만에 귀국한 서태지의 파격적 공항 패션과 검거당시 신창원의 티셔츠가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사실을 거론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선전의 위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선전의 무서운 점은 심지어 선전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에게조차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거다. 신자유주의와 물신만능주의, 지나친 상업주의를 비판하는 젊은이들은 유행을 거부하고 공정 무역을 주장하며 대량생산과는 거리가 먼 개성있는 '상품'에 눈길을 돌린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상에 길들여 지지 않은 야생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풍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누구인가?  

모든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기존의 상업은 반대급부마저 모조리 포섭할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선전은 기존 상업의 퇴폐성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그것에 반대하는 수 많은 사람들을 충동질한다. 이 세계는 잘못 되었다. 우리는 다른 것이 필요하다. 우리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 보자. 이렇게 해서 체 게바라의 사진이 박힌 커피잔과 티셔츠가 팔리고 DIY 가구 붐이 일어난다. 한국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몇몇 수입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홍대를 중심으로 수공예품 시장이 형성된다. 자유와 개성을 되찾는 싸움? 그것이 누구를 위한 싸움인지, 우리는 평생을 가도 알지 못할 것이다.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대중이 소수의 엘리트들에 의해 조종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사람이다. 권력자들의 목표는 대중을 아무런 생각없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는 좀비로 만드는 것이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런 세상을 개선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점을 철저히 활용하려 든다는 점에서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선전론은 너무나 불쾌하고 화가난다. 

에드워드 버네이스가 뿌려 놓은 선전의 씨앗은 결국 히틀러를 만들어냈다. 그 누구보다도 선전의 위력을 알고 있던 히틀러는 나치를 위한 선전 기구 책임자로 에드워드 버네이스를 영입하려 했다. 비록 그는 거절했지만 그에게 영감을 받은 히틀러는 라디오 연설과 정치 영화로 대중을 선동하는데 성공했고, 그리고는 2차 세계대전이 있었다. 

오늘날의 히틀러들은 군대와 의회가 아닌 기업과 언론의 꼭대기에 앉아 있다. 그들은 더욱 막강해졌고 우리는 보다 더 약해졌다. 우리가 그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유로운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5년이나 10년 뒤에도 우리의 세상이 이 질문에 답 할 수 없는 세상이 될까봐, 너무나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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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1-12-15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방향에서 보면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자체가 기본적으로 좀비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머릿속에 채워져야 살아갈수 있는 필연적인 존재죠. 생명체의 속성이 생존과 종족보존의 본능을 프로그램된 로보트와 별다를게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나갔는지는 모르지만 저도 최근 제모습을 보면사 좀비와 별다를게 있을까 싶습니다.

한깨짱 2011-12-16 20:37   좋아요 0 | URL
세계를 과학적으로 환원하다 보면 결국 인간은 물리 법칙 안에서 돌아가는 자동 기계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군자란님의 생각에 동의해요.

하지만, 이 부질없는 껍데기 안에 재미나고 신나는 일을 가득 채워 예기치 못한 사건들을 무한 발생, 그리하여 이 딱딱하고 재미없는 세상에 빅엿을 날려주는 게 우리 인간이 가진 진정한 잠재력이자 의무 아닐까요?

저는 최근에 회사를 때려치고 사회적 기업을 창업하여 운영 중인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애정으로 불끈 불끈 힘이 솟곤 한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커트 보네거트의 `타임 퀘이크`를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군자란님과 아주 잘 어울리는 책이 될 것 같아요.

군자란 2011-12-17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오정환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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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얼마 전 창덕궁 후원(비원)을 다녀오고 많은 것을 느꼈다. 요즘 사람들에게 창덕궁이니 덕수궁이니 이제는 시멘트 바닥이 깔리고 미술관으로 변해버린 옛 건물에 전혀 감흥이 생기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나, 그것이 역사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야기가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국 사람이 한국의 고궁을 탐방하면서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것은 어쩐지 쑥쓰러워, 감상이란 대상과 자신의 내면 사이에 일어나는 은밀한 대화인 법이지, 그러니 이것저것 알아볼 필요없이 그냥 둘러보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역사는 과묵하다. 과묵한 상대와의 대화는 언제나 힘들 수 밖에.  

게다가 당신의 눈썰미는 생각보다 날카롭지 못하다.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액자로 만들어 주는 정자 기둥의 장식과 다른 문들과 적어도 두 단 이상은 높이 올라있는 솟을 대문의 미묘함을, 당신은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칠 확률이 높다. 설령 그 차이를 가까스로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담긴 의미까지는 아무리 애를 써봐도 나오지 않는다. 당신에게 가이드가 필요한 시점이다. 

 

 

시오노 나나미로 따지자면 지중해 역사, 그 최고의 가이드다. 로마, 콘스탄티노플, 베네치아, 피렌체, 메디치 가, 가톨릭 교회와 교황, 그리고 투르크인. 한 마디로 지중해와 연관된 모든 국가 모든 인물들을 매의 눈으로 철저히 해부하는 외과 의사(그녀는 이탈리아인 외과 의사와 결혼했다!). 만일 우리가 시오노 나나미를 읽지 않은 채 혼자 이탈리아를 여행한다면 그 유구한 역사를 눈으로 보면서도 '이게 뭐야?'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왜냐구? 우리는 가이드가 필요한 사람들이니까. 

이런 점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행운이다. 만일 그녀가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 혹은 독어로 책을 썼다면 우리는 이토록 유려한 가이드를 이토록 쉽게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연 아시아인으로서는 도저히 견줄자가 없을 정도의 식견. 게다가 이런 역사책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수 백권의 역사 자료(원서에다 따분한!)를 검토해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수 십권에 쏟아야할 에너지를 단 한권에 쏟아 붓는 작가 치고 다작을 하기 힘든 법인데, 이 70세가 넘은 노파는 소시적부터 어마어마한 집필욕을 보여줬다. 1988년, 이런 여인의 감성을 자극해 기어이 펜을 들게 만든 주제가 바로 피렌체의 마키아 벨리다. 

렌체로 말할 것 같으면 칠흑같은 중세를 깨부순 르네상스의 요람이다. 당시의 피렌체에는 최후의 만찬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천지 창조의 미켈란젤로가, 비너스의 탄생의 보티첼리가 있었다. 이름만 들으면 역사를 모르는 사람도 아하!하고 무릎을 칠 금융업의 대부호 메디치 가(家)도 있었다. 그러나 시오노 나나미의 마음을 뒤흔든 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 칭송받는 예술가도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두 손에 놓고 주물럭 거리던 대부호도 아니었다. 그 당시 피렌체에는 또 한 명의 유명인이 살고 있었다. 오늘날에야 유명인이지만 당시에는 말단 공무원에 불과했던 남자. 1988년, 피렌체 근교의 한 산장에는 눈을 지그시 감은채 이 산장의 주인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곰곰히 그리고 있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시오노 나나미의 여타 지중해 시리즈와는 달리 소설이 아니다. 구체적 사실을 늘어 놓는 다는 점에선 '로마인 이야기'와 닮아 있지만 그 보다 훨씬 부드럽고 따뜻하다. 이는 시오노 나나미가 평생을 걸쳐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사모했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에게 있어 마키아벨리는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그녀는 60년대 일본의 학생 운동이 실패로 그치자 이탈리아로 넘어와 역사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혁명 실패로 인한 사상의 공허, 헛헛한 마음의 공백을 인간성의 현실을 잔인할 정도로 냉철하게 그리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채웠던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에 대해 '자신의 전부'라고 말했다. 그녀는 목적과 수단을 단칼에 분리하는 명쾌함에, 악한 일을 해 놓고 '악한 일을 했다'고 말하는 솔직함에 마키아벨리의 팬이 되었다.  

사실 마키아벨리라 함은 우리에게 있어 협잡과 기회주의, 아첨과 아부를 상징하는 전형이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며 이를 부끄러워 할 필요 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뻔뻔함. 권력층의 비위를 맞춰 한 몫 잡아보려는 천박한 공명욕. 그러나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입신양명을 위한 뇌물같은게 아니었다. 물론 공직에서 파면된 후에 평생 복직을 바라며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마키아벨리가 그토록 복직을 원하던 직책은 피렌체 제2서기국 서기관,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오늘날 행정 부처의 실무 과장쯤되는 말단직에 불과했다. 고작 정부 부처의 말단 행정직을 얻어내기 위해 그토록 위험한 책을 썼단 말인가? 군주론은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의 미래를 걱정했던 한 남자의 뛰어난 정치사상서였다. 

 

<군주론의 모델이 되었던 체사레 보르자> 

 

 편집증에 가까운 시오노 나나미의 디테일은 이러한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저명한 사실에서부터 저명하지 않은 사실까지, 모조리 잡탕된 역사의 웅덩이 안에서 그녀는 사실과 정황적 증거를 조합해 조목조목 마키아벨리에 대한 변론을 시작한다. 이 디테일은 실로 놀라울 정도인데, 특히 계약금을 챙긴 뒤 그림을 완성하지 않고 밀라노로 튀어버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계약금 반환을 요청하기 위해 출장을 떠나는 모습, 그리고 출장비가 적다고 끊임없이 자신의 상사에게 출장비 증액을 요청했던 마키아벨리의 일화를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감탄하게 된다. 

오늘날에야 '군주론'의 유명세 탓에 마키아벨리를 굉장한 엘리트로 오해하기 쉽지만 사실 마키아벨리는 대학을 나오지도, 집안이 훌륭하지도 못했다. 그는 평생 일을 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 이런 가장이, 귀족들의 눈에는 코끼리 눈꼽만치도 못한 말단직을 얻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실을, 400년이 지난 오늘날 취업과 승진을 위해 이보다 더 뻔뻔한 일도 서슴치 않는 우리가, 과연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마키아벨리의 절친이었던 프란체스코 베트리는 로마 주재 피렌체 대사로서 교황을 보필하는 직책에 있었다. 또 다른 절친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 또한 명문가 출신의 스페인 대사였다. 둘 모두 피렌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지만 끝내 피렌체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다. 행정 실무가로서, 외교관으로서, 정치사상가로서 이 두 귀족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능력을 지녔던 마키아벨리의 직책은 파면당한 제2서기국 서기관이었다.  

파면당한 제2서기국 서기관이지만 타고난 재능까지 폐기된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마키아벨리의 독이었다. 능력은 있지만 쓰임 받지 못하는 남자의 괴로움을 안다. 누구보다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지만 끝끝내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배우의 눈물을, 나는 안다. 마키아벨리 자신은 그다지 큰 야망이 있었던 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원했던 직책은 끝까지 로마 대사도 스페인 대사도 아닌 제2서기국 서기관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소박한 꿈조차 이루지 못했기에 그의 절망은 더더욱 처참했던게 아닐까? 

 

<니콜로 마키아벨리> 

1527년 5월, 자신을 중용하지 않았던 메디치가가 피렌체에서 실각했다는 소식을 듣자 당시 구이차르디니의 부탁으로 교황군에 합류해 있던 마키아벨리는 친구에게 상황을 알리지도 않은 채 곧장 고향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해 6월 마키아벨리는 부활한 피렌체 공화국의 제2서기국 서기관으로 입후보한다. 결과는, 

찬성을 의미하는 흰 강낭콩을 던진 자 12명.
반대를 의미하는 검은 강낭콩을 던진 자 555명. 

반대표를 던진 사람 중 하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知)의 사람이 아니라 충(忠)의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p. 564) 

지(知)의 사람 마키아벨리는 그로부터 10일 뒤 병으로 쓰러진다. 이틀 뒤인 1527년 6월 22일, 마키아벨리는 죽었다. 세상의 빛을 본지 58년 하고도 1개월이 되던 해였다.  

나는 마키아벨리의 죽음이 뛰어난 평민의 능력을 시시콜콜하게 여긴 귀족들의 간접 살인이었다고 생각한다. 평민 하나가 죽든 말든 그 놈이 능력이 있었든 없었든 부모 잘 만난 탓에 온갖 혜택을 누렸던 귀족들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대체할 사람이야 얼마든지 넘쳐나니까. 이 무관심과 무책임함에 나는 분통이 터지고 치가 떨린다. 

내가 400년도 더 된 한 남자의 죽음에 이토록 광분하는 이유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고 생각되는 그가 웬지 우리 시대에 태어났더라도 반드시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걸 요즘 어렴풋이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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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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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역학 제 1법칙과 2법칙은 물질 문영의 한계를 규정하는 과학 법칙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 1법칙,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다. 

제 2법칙, 엔트로피 총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제 1법칙을 살펴 보자. 우주는 광활한가? 광활하다. 그렇다면 우주는 무한한가?  

무한하지 않다!  

우주는 광활하지만 무한하지는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별은 끊임없이 생성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창조가 아니다. 별은 다른 차원의 우주로부터 '뿅'하고 나타나는 게 아니다. 별은 우주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수 많은 물질을 재료로 탄생한다. 

이처럼 에너지는(또는 물질)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할 뿐 창조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우주는 생성될 초기에 갖고 있던 에너지에서 한 톨의 가감도 없이 평생을 살아간다. 가난하게 태어난 우주는 평생 가난하게 살아야 하고 부자로 태어난 우주는 평생 부자로 살 수 있다. 삼라만상의 빈부 법칙은 우주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만약 인간에게 열역학 제 1법칙만 존재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자원 고갈이나 환경 문제로 골치를 썩지 않아도 됐을 거다. 문제는 열역학 제 2법칙이다. 열역학 제 2법칙은 우리의 우주에서 엔트로피의 총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고 말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기아 자동차의 모닝은 1리터의 휘발류로 19km를 주행할 수 있다. 휘발류 1리터는 모닝의 엔진 내부에서 격렬하게 연소하며 수백 킬로그램의 쇳덩이를 19km 전진 시키고 추가로 그 쇳덩이로 하여금 바닥과 마찰을 일으켜 열과 소음을 발생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의 휘발류는? 일산화탄소와 질소산화물, 탄화수소와 아황산가스로 변신하여 대기 중으로 날아가 버린다.  

바이 바이 블랙 버드.(Bye bye black bird) 

우리는 일산화탄소와 질소산화물, 탄화수소와 아황산가스 그리고 이미 변환된 운동, 열, 소음 에너지를 거꾸로 돌려 휘발류 1리터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마디로 낙장불입. 특유의 유용함으로 어디에 사용되더라도 제 몫을 다할 수 있었던 휘발류 1리터는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매연이 되버렸다. 열역학에서는 이같은 매연, 유용성 제로의에너지들을 엔트로피라 부른다. 정리해 보자. 

휘발류 1리터라는 에너지는 자동차의 엔진 내부에서 연소하며 다양한 찌꺼기와 각종 에너지로 변환된다. 이 변환된 에너지들의 총량은 언제나 이전의 에너지, 즉 석유 1리터의 에너지량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다'는 열역학 제 1법칙이다. 

한편 휘발류 1리터가 유용성 제로의 에너지로 변환되는 것. 그리고 이 에너지는 결코 휘발류 1리터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바로 '엔트로피 총량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 2법칙이다. 

 

 

 

열역학 제 1, 2법칙이 인류에게 제시하는 미래는 참으로 암울하다. 자원은 언젠가 고갈된다. 인류의 역사 또한 언젠가 그 바퀴를 멈출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진보라 불러왔던 모든 일들, 자연을 정복하고 그 위에 올라 승리의 노래를 불렀던 지난 날들이 사실은 우리의 몸을 짓밟고 우리의 생명을 태워 전진시킨 폭주 기관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제레미 러프킨은 그동안 우리 인간이 가져왔던 진보에 대한 맹신이 기계론적 사고관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지구에 기계론적 사고관을 최초로 끌어 들인 것은 누구인가? 17세기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다.  

베이컨의 관점은 명확했다. 관찰을 통해 객관적 지식을 발견해 내고 일체의 추상적 관념을 배제하는 것. 베이컨은 장도를 휘둘러 자연과 인간 사이에 놓인 평화의 다리를 싹뚝 잘라 버렸다. 베이컨은 인간과 자연의 평등 관계를 주체(관찰하는 자)와 객체(관찰 당하는 것)라는 주종 관계로 전복시켰다. 

베이컨이 기계 패러다임의 초석을 닦자마자 그 위에 집을 지은 것이 바로 데카르트였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 이후 인간의 이성은 유례없이 지위가 향상 된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이라는 세 단어로 이 세상 전부를 연역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치 잘 익은 과일을 정성스레 포장해 차곡차곡 상자에 담듯 데카르트는 이 세계를 자신이 짜 놓은 이성의 틀 안에 쓸어 넣기 시작했다. 틀 밖으로 삐져 나온 가지들은 무참히 잘려 나갔다. 변화 무쌍하고, 그리하여 예측 불허였던 이 세계는 데카르트의 상자에 담겨 매끈한 상품이 되었다. 이 상품을 대량 생산해 전 세계에 보급한 사람은, 고전 역학의 창시자 아이작 뉴턴이었다. 

아이작 뉴턴에게 있어 세계란 '수'였다. 뉴턴에게 중요한 것은 떨어지는 사과, 그 하나하나가 가진 고유성과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적, 구체적으로 측정 가능한 사과의 위치와 속도였다.  

뉴턴의 방정식에서는 좌변과 우변이 얼마든지 자리를 바꿀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이 특정 방향으로 진행했다면 그것을 그대로 거슬러 올라가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한게 아니었다. 모닝이 생산한 엔트로피는 정확히 그 반대 작용을 통해 1리터의 석유로 돌아갈 수 있다! 뉴턴에게 있어 세계란 힘과 운동량, 위치와 속도로 기술 될 수 있는 정교한 기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고 방식은 현실 세계에 닥친 문제를 다음과 같이 풀어낸다. 자동차가 늘어나 교통 정체가 심해졌다고? 그럼 도로를 만들면 되지. 도로를 만들어 농경지가 없어졌다고? 그럼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들어! 바다가 메워져 갯벌이 사라졌다고? 그럼...  

기계 패러다임의 사고 안에선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또 다시 문제를 일으켜 결국 거대한 문제의 누더기로 변해버린다. 안타깝지만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대다수는 아직까지 이 패러다임 안에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똑똑이들의 아버지 아이작 뉴턴>

엔트로피 법칙이 소개된 것은 무려 수 십년도 전의 일이지만 우리의 세계는 이제서야 겨우 그 법칙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있는 듯 하다. 전 세계에 불어 닥친 대체 에너지 개발 붐과 환경 보호의 목소리는 확실히 10년 전과 비교해 봐도 놀라울 만큼 커졌다.  

하지만 우리의 지구는 여전히 기계 패러다임에 심취한 근대적 엘리트들이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 그들은 쇼핑몰을 운영하고 도시를 계획하며 자동차와 석유를 생산한다. 그들은 제일 먼저 당신에게 자동차를 권한다. 자동차가 불필요한 이동 시간을 줄여주고 더 많은 여가를 보장해 준다고 속삭인다.  

자동차를 가진 우리들은 아주 신이 난다. 이제 이동에는 자신있다. 비교적 먼 거리도 자동차만 있다면야 어려움 없이 왕래할 수 있다. 이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도심에 집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근대적 엘리트들은 두 번째로 대도시 인근에 베드 타운을 만들어 자동차를 가진 우리를 그 곳으로 인도한다. 두 도시를 잇는 8차선 왕복 도로는 자동차와 수도권 신도시 아파트에 딸린 사은품이다. 이 사은품 위로 쉴새 없이 석유가 쏟아진다.  

한편 베드 타운 안에는 대형 쇼핑몰이 들어선다. 예전에는 집 앞 마다 슈퍼마켓이 있었다. 그 때는 자동차를 가져갈 필요도 없이 걸어서 그때 그때 필요한 물건을 사 오면 됐었다. 요즘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사은품 위로 석유를 질질 흘리며 대형 쇼핑몰로 향한다. 매번 오는 건 귀찮기 때문에 카트 안에는 일 주일동안 다시는 오지 않아도 될만큼 충분한 물건들이 담긴다. 이 와중에 식료품 점에선 1팩에 2천원하는 냉동 만두가 무려 2팩에 3천원으로 1+1 판촉 행사가 벌어진다. 알뜰한 주부는 무려 천원이나 아낄 수 있다며 냉동 만두 2팩을 집어든다. 그렇게 알뜰한 주부의 식탁엔 공짜 만두 한 팩이 간식으로 올라오고 만두 한 팩의 칼로리를 사이 좋게 나눠 먹은 그 집 식구들은, 전부 돼지가 된다.  

이것이 바로 도시와 자동차와 석유와 도로, 그리고 쇼핑몰을 지배하는 자들의 마스터 플랜이다. 이 놀이에 놀아나는 동안 도시는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괴물이 되고 그 안에서 인간은 피둥피둥 살이 찐 돼지로 전락한다. 우리는 지금 초 고엔트로피 사회에 살고 있다. 

 

 

 

제레미 러프킨의 주장은 당연히 우리 사회를 저엔트로피 구조로 바꾸자는 것이다. 자동차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쇼핑몰을 몰아 낸 뒤 소상 공인의 슈퍼 마켓을 다시 내 집 앞에 들이는 것. 아주 좋은 생각이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열역학 제 2법칙과 제레미 러프킨의 '엔트로피'가 왜 향락 주의자와 낙관론자들의 관심을 피해갔는지, 이 책을 읽는 내내 의아스러웠다. 무슨 소리 하는건지 모르겠다고?  

열역학 제 2법칙은 인류의 미래에 드리운 암울한 묵시록이다. 우리가 아무리 저엔트로피 사회를 지향한다 하더라도 끝내는 우주의 에너지 고갈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해,  

태양도 언젠간 식는다.  

그 때가 오면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졌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무리 저엔트로피 사회를 탄탄하게 구축했더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레미 러프킨의 걱정은 뭘까?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50억년의 시간을(태양이 에너지를 모두 소비하는 시간) 다 쓰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 미안하지만 태양도 언젠간 죽는다. 그렇다면 그 날이 오기 전까지 흥청망청 즐겨 보자는 생각이 정말 그렇게 잘못된 것일까? 

나는 현재처럼 고엔트로피 사회를 유지하려는 낙관론자와 향락주의자들이 열역학 제 2법칙을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 의아하다. 그 먼 미래를 생각하기엔 우리에게 닥친 위기가 너무나 실감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지구를 살리자는 둥 자연을 보호하자는 둥 그 모든 훌륭한 생각들은 사실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게 분명하다. 언젠가 지구가 멸망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이면 곤란하지'라는 생각. 어쩌면 이같은 인간의 이기심이, 지구를 구하려는 행동의 원동력인지도 모르겠다. 

p.s - 이 리뷰가 횡설수설 갈피를 못 잡는 이유는 이미 엇나간 문장에 또 다시 애꿎은 문장을 추가하는, 이른바 고엔트로피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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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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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는 존재의 가벼움이 도무지 참을 수 없어 이 책을 썼다. 하지만 그 존재의 가벼움이 되려 무거운 바위가 되어 읽는 사람의 가슴에 내려 앉는건, 존재의 무게가 가진 최대의 아이러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있으면 마치 눈 내리는 사막을 걷는 기분이 든다. 주변은 온통 반복되는 모래 언덕 뿐이다. 모래 언덕을 넘고 넘어 드디어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면 그 뒤에 펼쳐지는 것은 광활한 모래의 바다. 사막의 뒤에는 사막이 있다. 그런데 이 곳에 온기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뜨거운 모래 위로 차가운 눈이 내린다. 발 밑에는 정신을 태우는 화염이요 머리 위는 온 몸을 굳게 만드는 얼음이다. 누울 수도 설 수도 돌아갈 수도 계속 갈 수도 없다. 막다른 골목이라면 힘껏 온 몸을 부딪혀 보기라도 하겠건만 이건 사방이 뻥 뚫려 있는 공허의 사막이다. 

 

 

소설 속에서 사막역을 맡은 것은 체코다(그 당시 체코 슬로바키아). 1960~70년대의 체코라고 생각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된 지구. 강력한 소비에트 연방의 힘으로 동유럽은 온통 공산화 된다. 그러나 낫과 망치가 그려진 소비에트 연방의 적색기는 결코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 세계를 자기 것으로 차지하고 싶은 추할 정도로 탐욕스러운 한 남자의 가면이었다. 그는 이 적색기로 얼굴을 가리고 다른 나라를 유린한다. 

체코의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라는 정치 계획을 발표하고 개혁에 착수했다. 언론과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경제면에서는 시장 경제와 통제 경제가 적절히 혼합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프라하의 봄'이다. 시덥잖은 드라마의 제목이 아닌 것이다. 

체코에서 불어오는 봄기운은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프라하의 봄은 공산 주의를 수술하려는 날카로운 메스 같았다. 소련은 체코의 국경에서 협상을 진행했다. 개혁을 중지하거나 제약하려는 목적. 그러나 협상은 결렬됐다. 1968년 8월 20일 밤, 20만명의 군대와 2,000대의 탱크가 체코의 국경을 넘었다. 8월 21일 아침, 체코는 완전히 점령당했다. 

개혁 정치를 시작했던 둡체크와 정치인들이 모스크바로 체포되었다. 애시당초 둡체크를 실각시키려는 소련의 목적은 체코의 저항이 광범위해지자 당초의 계획을 포기했다. 둡체크는 극심한 심리적 압박감 속에서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한다. 체코로 돌아와 굴욕적인 연설을 했다.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둡체크와 당시 소련 수상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 

이 책의 주인공 프란츠와 사비나와 테레자와 토마시가 바로 이 시대에 살았다(밀란 쿤데라의 시대기도 하다). 굴욕의 시대였고 천박한 시절이었다. 같은 시대를 살던 40대의 소설가 얀 프로하즈카는 체제를 비판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언론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소설가를 씹어 먹었다. 그럴수록 얀 프로하즈카에 대한 국민의 사랑은 더해갔다.  

어느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프로하즈카와 한 대학 교수가 나눈 사적인 대담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대담 속에는 소설가가 그의 친구들을 비웃는 대목이 여럿 있었다. 방송은 특히 둡체크를 비웃는 대목을 두드러지게 하려고 애썼다. 대화는 집안에 설치된 도청기에 의해 녹음된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인간의 권위와 사생활을 유린한 비밀 경찰의 야비함보다 그들이 사랑했던 소설가를 더욱 미워했다. 굴욕의 시대였고, 천박한 시절이었다. 

이런 세상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건 말 그대로 인간이다. 인간이 가장 인간적일 수 있을 때는 서로를 신뢰하고 있을 때다. 서로를 이해하고 있을 때다. 하지만 프란츠와 사비나와 테레자와 토마시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토마시는 실력있는 외과 의사였다. 토마시는 첫 번째 아내와 결혼하기 전과 후 그리고 심지어 결혼 기간 중에도 수 많은 애인을 갖고 있었다. 토마시는 두 번째 아내와 결혼하기 전과 후 그리고 심지어 결혼 기간 중에도, 역시 수 많은 애인을 갖고 있었다. 두 번째 아내는 테레자였다.  

토마시는 섹스와 사랑은 별개라고 말했다. 테레자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토마시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테레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소련의 침공 후 제네바로 도피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테레자는 체코에 남기로 했다. 제네바에 홀로 도착한 토마시는 얼마 후 체코로 되돌아 온다. 토마시는 체코로 향하는 차 안에서 마음으로 부터 울려 퍼지는 이런 소리를 듣는다. '그래야만 하는가?' 토마시가 대답한다. '그래야만 한다!'  

토마시는 자신의 아파트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이윽고 테레자가 나와 토마시를 만났다. 테레자는 토마시가 체코로 돌아온 이유를 알지 못했다. 토마시는 체코로 돌아온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토마시는 귀향을 후회하고 있었다. 

<밀란 쿤데라> 

프란츠는 저명한 대학교수로서 아내를 배반하고 제네바에 애인을 갖는다. 사비나는 체코 시절에 토마시가 사랑한 수 많은 애인 중 하나였으나 제네바에서는 프란츠의 애인으로 살아간다. 프란츠는 사비나를 사랑했지만 사랑이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군인'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장이 해제된 채로, 온 몸을 내 맡긴 뒤 '언제 공격당할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불안에 떠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었다.  

프란츠는 아내 마리클로드를 찾아가 이혼을 통보한다. 애초에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이 없었다. 프란츠는 아내에게 필요한 것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 그리고 경제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프란츠는 아내에게 모든 재산을 양보한다. 프란츠에게는 사비나만이 삶의 무게를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에 그 외의 모든 것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리클로드는 이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란츠는 마리클로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리클로드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프란츠를 이해하지 못했다. 마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사랑은 '영원한 투쟁'이라고도 말했다. 프란츠는 자신에게는 싸울 마음이 털끝 만큼도 없다고 소리 쳤다. 

프란츠는 사비나를 만나러 제네바로 갔다. 프란츠는 사비나를 사랑하며 그녀와 결혼할 거라고 말했다. 프란츠는 완벽한 미래를 꿈꾸며 사비나의 아틀리에를 나섰다. 사비나는 그날 밤 파리로 떠났다. 두 사람은 이후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토마시와 테레자와 프란츠와 사비나의 세계는 그 밀접한 육체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몰이해의 향연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몰이해를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적극적 해명은 이 세상의 무게를 재는 천칭의 한 쪽 편에 자신의 존재를 올려 놓는 것이다. 천징의 다른 한 쪽에는 거대한 똥 무더기가 올려져 있다. 존재의 합은 우리가 아무리 기를 쓰고 더해 보아도, 결코 똥 무더기의 무게를 이길 수 없다. 해명은 무의미한 것인가? 무의미한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처음 읽은 것은 아마 스물 한살 때일 것이다. 그 때 난 온 몸을 강타하는 허무의 박력에 한 동안은 넋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 허무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 때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럼 이제는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글쎄, 허무란 사방에 가득 차 있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걸 두 손으로 꼭 쥘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얼굴을 똑똑히 마주할 수 있다면 그걸 허무라 부를 수 있을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가슴 속에 가득 들어찬 빈 공간이다. 빈 공간이기에 손으로 꽉 잡아 내던져 버릴 수도 없고 또 이미 그것으로 가득찬 가슴이기에 다른 것을 채워 넣을 수도 없다. 허무를 아는 사람들은, 이처럼 공허한 포만감으로 가득찬 채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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