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이미경 지음 / 두드림미디어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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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힘든 시기를 보낸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고통은 이겨내야 할 삶의 과정이라고 책에 쓰여 있다. 어떤 고난이나 고통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온다는 말도 우리 삶의 진리처럼 느껴진다. 독자는 이런 삶의 격언 등을 '삶의 진리'를 표현한 말들이라고 믿는다. 독자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삶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또 그만큼 극복하는 과정의 이야기도 들었다. 대부분의 책은 고통을 이겨내야만 달콤한 과일을 딸 수 있다는 사실을 진리처럼 말한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성경이나 불교 경전에서도 같은 의미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고 한다. 철학서나 위대한 예술 작품들도 또한 같다. 인간의 삶은 고통·고난과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 같다. 연예인, 스포츠 스타 등도 훌륭한 업적의 이면에는 늘 힘든 시간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수없이 듣고, 읽고, 배웠지만 막상 자신에게 찾아오는 고통·고난은 더 크고 무겁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독자뿐만 아니라 누구든 그럴 것이다. 살면서 삶의 명언을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다. 하나만 말해보라고 해도 누구든지 한두 개쯤은 술술 읊을 수 있다.

"고난과 눈물이 나를 높은 의지로 이끌어 올렸다. 보석과 즐거움은 이것을 이루어주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교육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페스탈로치는 말했다. "고통은 깨달음을 준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성장할 수 없다. 고통과 슬픔을 경험한 후에 우리는 진리 하나를 얻는다. 만약 지금 당신에게 슬픔이 찾아왔다면 기쁘게 맞이하고 마음속으로 공부할 준비를 갖추어라. 그러면 슬픔은 어느새 기쁨으로 바뀌고 고통은 즐거움을 바뀔 것이다"는 대문호 톨스토이의 말이다. 우리가 잘 아는 헬렌 켈러도 "쉽고 편안한 환경에선 강한 인간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만 강한 영혼이 탄생하고, 통찰력이 생기고, 일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며, 마침내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불교계의 달라이 라마도 "좋은 시절은 우리의 적이다. 우리를 잠들게 만든다. 역경은 우리의 친구다.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고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철학자 니체도 삶의 고통에 관한 사유의 결과를 내놓았다. "등산의 기쁨은 정상에 올랐을 때 가장 크다. 그러나 나의 최상의 기쁨은 험악한 산을 기어 올라가는 순간에 있다. 길이 험하면 함할수록 가슴이 뛴다. 인생에 있어 모든 고난이 자취를 감췄을 때를 생각해보라! 그 이상 삭막한 것은 없으리라."



이 책 『이제부터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의 저자 이미경도 살아오는 동안 유달리 고통의 순간을 많이 겪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15년차 싱글맘이자 보험설계사로 살아왔다. 어렵게 시작했지만 최단 기간 내 ‘백만달러원탁회의’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저자는 자신이 '아홉수'에 걸렸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고백한다. 아홉수란 숫자 '9'의 아홉을 이르는 말로, 마지막 관문, 대격변 직전의 상태 등을 상징한다. 보통 19세, 29세, 39세 등 끝자리가 아홉(9)일 때 극심한 고난이 닥쳤을 때 붙이는 말이다. 저자의 경우 9살에 알게 된 이복동생의 존재, 19살에 길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29살 받은 불임판정, 39살 어머니의 죽음과 이혼으로 시작된 싱글맘으로의 삶(이혼에 따른)으로 자신의 처지를 비하하는 말로 사용한 듯하다. 

이 책에는 우리 주변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시련을 저주라 할 만큼 많이 겪어야 했던 저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자서전적 자기계발서로 분류된다. 그 시련들을 지나온 저자는 이제 시련은 삶의 동반자이자, 성장의 촉진제임을 밝힌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련보다 한 차원 높은 곳에 올라서, 시련이 가져다 줄 성장의 기회를 기대하는 저자의 모습이 잘 적혀 있다. 이 책이 지금 시련에 힘들어하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저자는 〈프롤로그〉를 통해 "평범하고 싶다는 것을 앞세워 고난과 시련으로부터 최선을 다해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고 말한다. 삶을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일 것으로 털어놓는다. 몇 차례의 시련이 반복되고 마침내 종교로 피신처럼 숨어 들었다. 저자는 성찰과 깊은 생각을 통해 자신이 고난과 시련 앞에 비겁했고 무릎을 꿇는 비루한 삶을 살아왔다고 깨달았다. 이겨내는 삶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도망치는 삶이었다는 것이다. 고난과 시련은 저자에게 깨달음과 지혜를 주고자 반복적으로 찾아왔는데도 어떻게든 고난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후회에 진저리칠 정도로 부끄러웠다. 고난이 자신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똬리를 틀 정도로 익숙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삶 속에 박혀 있는 고난과 시련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힘듦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련은 피하고 싶다고 피해질 것도 아니며 잠시 피해간 것처럼 보여도, 더 크게 더 아프게 저주처럼 돌아온다."고 깨달음에 이르렀다. 



저자는 삶의 시련을 이겨내야 제대로 살 수 있다고 깨닫는 순간부터 오직 고난을 벗어난 데에 열정과 노력을 다했다고 한다. 사실 평범한 가정주부가 어느 한 순간 두 아이를 돌보는 싱글맘이자 보험설계사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이겨낼 역경은 아니다. 더욱이 보험설계사로서 수백~수천 명 중 한 명 나올까말까한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사실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저자는 이제 삶의 시련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이야기할 정도로 성숙한 삶에 이르렀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삶의 모든 고개를 넘어 인생이라는 산을 정복한 저자는 이제 삶에 닥친 시련과 싸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선사하고 싶다는 생각에 책쓰기에도 도전했다. 이 책이 첫 결과물이다. 이 책은 모두 5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나는 전생에 어떤 죄를 저질렀을까?」, 2장 「보통의 삶이 가장 어려운 삶이다」, 3장 「지독한 시련은 내게 변형된 축복이었다」, 4장 「반전 있는 드라마가 더 재미있다」, 5장 「나는 오늘도 한 뼘 더 성장했다」 등이다. 

1장에서는 저자가 겪었던 아홉수의 저주를 담담하게 돌아보며, 자신이 태어나기 전 쌓아놓은 전생의 업(業)에 관해 살펴본다. 그리고 그 업조차 자신의 성장을 위해 스스로 설계한 장치임을 깨달은 저자는 이제 스스로 인생에 끌려가지 않고, 인생을 ‘업고 간다’고 말한다. 2장에서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보통의 삶과 행복이 스스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이야기한다. 스스로 최선이라 믿었던 선택에 배신당하고, ‘착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어리석은(?) 날들을 떠올리며 저자는 보통의 삶, 보통의 행복이 아닌, 스스로 정의한 자신의 삶을 살라고 독자들에게 권유한다. 3장은 ‘시련’이다. 남편과의 이혼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한순간 싱글맘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날들. 그러나 저자는 오히려 그 시련들이 병들었던 자신에게 내려진 ‘삶의 극약 처방’이라고 회고한다. 4장에서는 인생 후반전에 새롭게 삶의 방향키를 거머쥔 저자의 인생 꿀팁이 이어진다. 죽음의 공포와 시련 속에 괴로워하던 모습에서, 책 쓰는 보험설계사이자 ‘국민작가’를 꿈꾸게 된 저자의 삶과 꿈, 돈을 대하는 태도까지 엿볼 수 있다. 마지막은 작가가 보내는 따뜻한 위로의 말들이다. ‘모든 것의 중심은 오늘 처음 만나는 나’이니 자신에 집중하라는 말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나’를 사랑하고 나의 ‘삶’을 사랑할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저자는 삶의 희망을 깨닫고 용기를 내 다시 시작할 때까지 지혜를 준 종교에 대해 잠깐 언급한다. 저자가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아서 독자의 추정한 바로는 "답답한 마음에 타로카드라는 서양 점을 보기도 했고, 여기저기 염험하다는 만신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들의 말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아니면 버려야 할지··· 보면 볼수록 머리가 명쾌해지기는커녕 복잡함만 더했다. 그래도 나의 전생에 관한 그들의 말에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었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 중에서 저자가 기억하고 있는 내용을 1장에 적고 있다.

"나는 전생에 인도의 고승으로 살았던 때가 있었고, 그때 나는 자신만의 진리를 찾아 가족을 버리고 홀연히 가출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나 또한 풍류를 즐기고 신변잡기에 능했던 한량으로 정인을 배신하고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빼앗았단다. 또 한때는 프랑스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욕심 많은 여자로, 소싯적 은혜를 베풀어준 적이 있는 배고픈 친구와 그의 가족을 매몰차게 내쳤다고 한다. 이 정도라면 전생에 정말 악업이 쌓여도 아주 겹겹이 쌓였던 것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악업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중에 약간의 선업도 있었다. 나는 유관순 열사의 친구로 살았던 적도 있었다고 하낟. 그녀와 동시대에 존재하면서 나는 적극적인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것은 아니어도, 태극기를 제작하고 밥을 해주는 것 따위를 도왔던 사람이었단다. 이 대목이 안타깝다. 나도 유관순 열사처럼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어야 한다. 그랬더라면, 나의 현생은 전생의 선업으로 조금은 편안하게 누리는 삶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p.15)

불확실한 점성가들이 한 말들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면 저자의 당시 마음 상태가 매우 공허하거나 혼란스러웠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독자는 알 수 있다. 특히 앞의 말에 이어 뒷말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닌 듯하다. 나는 명상과 자아성찰을 좋아하며,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할 때면 마음이 끌리는 사찰에 다녀온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어 후자에 더 가까울 것이란 추정도 해본다. 그러나 불확실한 말을 굳이 저자가 이 책에 써둔 것은 '업보'란 말을 되새기기 위해서인 듯하다. '카르마'는 업보인 것과 동시에 인간의 정신적인 의지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자신의 삶이 굽이굽이 우여곡절이 너무 많았다고 돌이켜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왜?'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를 반복하며, 자책하고 자존감을 무너뜨렸다고 한다. 부모님도 원망하고, 신(神)조차도 원망했다고 저자는 털어놓는다. 이런 이야기를 첫 장에 꺼내든 것은 다음 말을 독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다. "나는 더 이상 내 삶과 연결된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내 삶의 주체는 영적인 나이므로 내가 주인이 된다. 누구에 의한, 누구로 인한 시련과 불행이 아니었다. 고통 또한 누군가 내게 넘겨준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세상에서 나의 삶을 사는 것이고, 카르마로 연결된 그들도 그들의 세상을 사는 것이다. 이것으로 내가 지금을 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나는 전생에 어떤 죄를 저질렀을까?’에 대한 질문을 바꿔본다. ‘나는 다음 생에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답은 그 안에 있었다.(p.17)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면며 철학자 쇼펜하우어를 자주 떠올렸다. "삶이 곧 고통"이란 그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어떤 욕망이든지 채워지고 나면 즉시 새로운 욕망이 일어나고, 반대로 어떤 고통에서 벗어났다 싶으면 곧바로 새로운 불행이 찾아든다고 말하고, 고통이야말로 삶의 본래 모습이며, 쾌락이나 행복은 고통이 없어졌을 때 잠깐 찾아오는 소극적인 것, 즉 고통의 부재(不在)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인생은 고통이요, 이 세계는 최악의 세계”라고 본다는 자신의 철학을 역설했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삶이 곧 고통"란 주장을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첫째, 우리는 자기가 갖고 있을 때에는 그것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할 줄 모르다가 그것을 잃고 나서야 그 가치를 실감한다. 건강이나 맑은 공기나 사랑하는 사람 등 모든 것이 그렇다. 둘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끊임없이 고통이라는 몽둥이가 다가오고, 이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에게는 권태라는 또 다른 채찍이 떨어진다. 삶은 마치 시계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인생은 이렇게 고통과 권태라는 두 박자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6일간의 고통과 제7일째의 권태라는 일주일의 생활 패턴은 우리의 삶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셋째, 고독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누구나 혼자일 뿐이다. 또한 인류의 역사는 피로 얼룩진 전쟁의 역사이며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 단어에는 다툼과 전쟁, 학살과 약육강식 등이 있다. 이것은 정글법칙이 지배하는 동물계나 인간 세계나 마찬가지다. 저자가 쇼펜하우어를 인용하거나 이 책에 설명한 적은 없지만 독자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쇼펜하우어가 떠올랐다. 저자는 삶 자체를 쇼펜하우어가 정의한 대로 살아왔다는 생각이 독자의 머릿속에 계속 떠오른 이유이다.


오늘은 처음 만나는 날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나도 처음 만나는 나인 셈이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의 경험을 생각해 보자. 얼마나 설렜던가? 또 얼마나 나를 꾸미고 치장하며 함께할 시간을 상상하고 즐거워했던가? 매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의 기분으로 자신을 대해 보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데도 많은 공을 들이고 마음을 쓰는데, 하물며 자신을 만나는 것에는 아무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자존감은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자신을 사랑해주고 대접해주는 것이 기본이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저항 없이 남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p.231)


저자 : 이미경


작가, 15년 차 우수인증 보험 컨설턴트, 바리스타&감독관, 빛의 일꾼. 《이제부터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의 저자이자, 15년 차 우수인증 보험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월드커피 바리스타협회 소속 바리스타&감독관으로 활동하며, 재능기부를 통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023년 11월 찾아온 지구별 사명인, 빛의 일꾼들을 깨우고, 모으는 일을 수행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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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칼로레아 철학 수업 - 논리적 사고를 위한 프랑스식 인문학 공부
사카모토 타카시 지음, 곽현아 옮김 / 현익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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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게 말한다면 독자는 '바칼레러아'란 단어를 처음 들어본다. 이 책 『바칼로레아 철학 수업』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우리는 선진국이 아닌 시절) 서양 선진국에선 고등학교부터 '철학'이란 커리큘럼이 들어 있다고 말은 들었지만, 어떤 식으로 배우는지, 뭘 배우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었고(배우는 것을 제대로 소화하기에도 어려웠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과목이 아니었기에 선생님들도 더 이상의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까맣게 잊고 지낸 동안 수십 년이 지났다.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프랑스 대입에 필요한 '바칼로레아'란 단어를 알고부터 "아하, 그런 것이었구나" 싶다. 한마디로 프랑스 철학 수업은 논리적 글쓰기로 귀결된다. 논리적 사고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지만 결국 대입 때는 글로 써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 사카모토 타카시는 이 책에서 200년 넘도록 시대의 주요 이슈를 관통하는 철학적인 질문들을 제시해 온 프랑스 대학 입학 자격시험이 ‘바칼로레아’라고 밝힌다. 주입식 입시 교육의 대안으로 꾸준히 주목받는 바칼로레아에서는 철학적인 질문에 얼마나 합리적인 논거로 명료하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학생들은 ‘노동은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드는가?’, ‘기술은 우리의 자유를 증진시키는가?’, ‘권력 행사와 정의 존중은 양립 가능한가?’ 등의 질문에 철학자들의 논리를 바탕으로 탄탄한 구조를 갖춘 답을 내놓아야 한다. 그 답을 찾고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비판적 사고와 건전한 토론 의식을 함양하게 되므로 교양인이 되기 위한 효과적인 훈련법으로 세계에서 그 탁월함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는 것. 이젠 '아날로그 세대'로 사회 중심에서 밀려났지만 한때 우리 사회 발전에 중심 세대로의 몫을 다했던 오늘날 중년의 세대로선 많은 회한을 남긴다. 왜 우리는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철학'을 가르치지 않았을까? 여전히 일본식 교육의 답습이라는 비난을 지울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 사카모토 타카시는 현재 교토약과대학 교수로서 프랑스의 보르도 제3대학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고 한다. 전공은 〈20세기 프랑스 사상사(미셸 푸코) 및 철학 교육〉이다. 바칼로레아 및 철학적 사고에 관한 저서를 다수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책 『바칼로레아 철학 수업』은 입시제도를 설명하거나 문제를 단편적으로 소개하는 기존의 다른 책과 다른 점이 두드러진다. 바칼로레아의 실제 답안 작성 과정을 따라가며 논리적 사고를 전개하는 방법에 집중하고 있다. 이로써 아무리 까다로워 보이는 질문이라도 여러 각도로 쪼개고 분석하여 합리적인 답을 낼 수 있도록 이끈다. 그렇다면 왜 저자는 일본에서 이 책을 올해 출판했을까? 일본의 입시 제도를 전혀 모르는 독자로서는 일본 역시 아직 프랑스처럼 합리적인 철학 수업을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가르치지 않는다는 뜻일까? 확실하진 않지만 이런 철학 수업 제도를 일본에도 들여야 한다는 의미로 이 책을 썼을까? 아니면 채점의 공정성을 기할 수 없다는 등의 많은 의문이 뒤따른다. 

저자에 따르면 바칼로레아 문제에는 시험이나 논술에 등장하는 학술적인 질문을 비롯해 ‘이직을 할 것인가?’, ‘정부의 정책을 지지할 것인가?’ 등 실생활과 밀접한 고민까지 포함된다. 오랜 연구를 거쳐 만들어진 바칼로레아식 ‘사고의 틀’은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는 우리 사회에서 진정 발전적인 논의를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도구가 된다. 정해진 답이 없는 세상의 문제 앞에서 논리적으로 의견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싶다면 이 책과 함께 바칼로레아식 사고를 훈련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정의로운 사람은 법을 어겨도 되는가?’ ‘이성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등이 프랑스 대학 입학 자격시험 ‘바칼로레아’에 실제로 출제되었던 철학 문제들이다. 주어진 시간은 단 4시간. 문제를 푸는 고등학생들은 그 안에 충분한 논리로 뒷받침된 하나의 답안을 작성해서 제출해야 한다. 어떻게 프랑스의 교육은 학생들이 이렇게 난해한 질문에 답하도록 만들 수 있었으며, 왜 이런 교육을 지향하는 것일까?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바칼로레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바칼로레아의 모든 것을 이 책에 담아 제도 정착을 주장하고 있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는 나폴레옹 황제 시대부터 무려 200년 이상 이어져 왔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철학 시험은 그해의 가장 중요한 이슈를 다루는 경우가 많으며, 시험이 시작되고 문제가 공개되면 수험생이 아닌 일반 시민들까지도 각종 미디어를 통해 해당 주제를 두고 토론하기도 한다. 긴 역사 동안 철학 과목이 포함된 학교 교육을 받아 온 프랑스인들에게는 이러한 사회적 논의가 낯설지 않은 것이다. 이 책 『바칼로레아 철학 수업』에서 소개하는 프랑스 철학 교육의 목표는 다음 5개의 주제를 지향한다.

① 자기 생각이나 지식을 검토하여 그 타당함을 검증할 수 있을 것

② 곰곰이 생각하지 않으면 대답하기 어려운 복수의 질문을 만들 수 있을 것

③ 하나의 문제에 대해 복수의 시점을 비교 평가하고,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

④ 근거 있는 주장 및 지식에 기초한 논거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이 긍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

⑤ 철학 작품 독서, 발췌 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책에 따르면 이 교육 목표에서 알 수 있듯, 프랑스의 철학 수업에는 철학적 개념들과 주요 철학자들의 이론을 학습하는 과정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적 주장을 펼치는 방법인 ‘사고의 틀’을 배우는 일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 설득력 있게 의견을 개진하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도 반목 대신 생산적인 토의를 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바칼로레아의 주된 목적이다. 이처럼 주입식 암기 교육의 한계로 지적되는 비판적 사고력 함양과 건전한 토론 능력 증진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그리고 인공지능에 익숙하지만 대신 '생각의 힘'을 잃어가는 우리 사회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교육이 '생각'이라는 점에서 바칼로레아 교육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프롤로그〉를 통해 "물론 철학만이 사고하고 표현하는 것을 기초로 하지는 않는다. 분야에 따라 그 시점이나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학생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사고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다만 프랑스는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에 철학 교육을 통해 이를 배운다는 것이다. 그렇게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칼로레아를 취득한다는 것은 시민이 갖춰야 하는 기본 소양을 쌓았다는 의미이다. 이념상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 그 수준까지 도달한 사람은 많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바칼로레아는 고등학교 기간의 학습 성과를 평가하는 시험이라는 말이다. 즉, 1년 동안 철학을 얼마나 잘 배웠는지 평가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철학적 사고와 논리, 표현 등을 갖추었는지는 이 시험을 통해 드러난다는 의미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수험생들이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 문제를 풀 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쓴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런 훈련 덕분에 프랑스인은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펼친다는 주장은 얼핏 그럴 듯해 보이지만 사실과는 다르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은 '자유로운 사고'가 가능하지를 확인하는 시험이 아니고, 단순하게 의견이나 감상을 쓰는 시험도 아니라고 밝히면서 "에세이나 독후감과는 다르게 쓰기 교육에서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와 글쓴이의 개성이나 감성이 잘 표현된 글이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저자는 평가 내용의 정형화와 평가의 공정성이 사전에 전제돼야 함을 지적한다. 실제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에서는 사고의 틀에 숙달했는지를 평가한다고 답변을 대신한다. '사고의 틀'이란 무엇일까? 한 문장으로 표현된 시험 문제를 정해진 순서대로 분석하고, 답을 '도입-전개-결론'의 세 부분으로 구성해 작성하는 것이란 말이다. 프랑스 고등학생은 1년에 걸친 철학 수업을 통해 이 틀을 배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은 바로 그 틀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이다. 한 문장으로 출제된 문제에 4시간이나 걸려 답을 써 내게 되는 시험이다.



사실 '철학'과 '틀'이란 모순적이다. 철학에 필요한 것은 사물을 다른 각도로 보는 창의력이나, 하나의 질문에 대해 끈질기게 사고한 끝에 독창적인 답에 도달하는 재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철학을 생각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프랑스 철학 교육에서 틀을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일까?란 질문이 뒤따르게 된다. 저자는 프랑스 고등학교에서 철학 교육의 목적이 지식이나 학문으로써의 철학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철학 교육의 목적은 권위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발언하며 행동할 수 있는 시민을 육성하는 것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철학이다. 철학의 역사나 다양한 철학자의 주장을 이해하고 암기하는 것보다는 어떤 사고 방법을 활용하는지, 어떻게 그 방법을 활용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는 설명이다. 사고의 틀은 이처럼 시민이 익히는 것이며, 사고하고 표현하는 방법의 기초가 된다. 사고의 틀을 익히는 목표는 서양이 역사적으로 복잡한 사고의 본보기로 삼아온 철학을 학습함으로써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시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고'와 '틀'은 모순적이다. '틀에 박힌 사고'라면 일반적으로 모든 일을 형식에 맞춰 처리하는, 독창성이나 창조성과는 정반대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고의 틀'과 '틀에 박힌 사고'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안을 돌본다'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틀에 박힌 사고'이다. 이에 반해 프랑스 철학 교육이나 바칼로레아 철학 시험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사고의 틀은 다양한 의견을 표현하기 위한 '공통적인 양식'이다. 즉, '내용'이 아닌 '형식의 규칙'을 말한다. 그 형식에 따라 토론하고, 자기 입장을 표명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란 말로 저자는 풀이하고 있다. 

바칼로레아는 이처럼 틀에 따라 주장을 정리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한다. 그리고 이 틀 안에는 확실한 장점이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바로 자신의 주장과 대립하는 반대 의견에도 타당한 근거를 확실하게 표시하고, 반론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반대 의견을 존중하고 최대한 이해한 다음, 자기 입장이 정당함을 주장하는 절차가 강조되는 이유이다. 프랑스에서 실시되는 이런 철학 교육의 목표가 충분히 이뤄졌다고 보기에는 아직도 미흡한 점도 있다. 철학과 실천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며, 모든 사람이 전부 학교에서 철학적 사고를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현실과 이념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기에, 다시 철학으로 돌아가 방향성을 검토해 볼 수도 있다는 점은 남겨놓았기에 철학 교육은 이처럼 계속해서 우리에게 숙고의 기회를 제공해 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이 책은 모두 6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프랑스 철학 교육」, 2장 「사고의 틀이란 무엇인가?」, 3장 「사고의 틀 전체상」, 4장 「노동, 자유, 정의」, 5장 「사고의 틀로 철학을 하다」, 6장 「사고의 틀을 응용하다」 등이다. 1~2장은 바칼로레아에 대한 소개와 바칼로레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고의 틀을 살펴본다. 3장은 사고의 틀을 구성하는 요소, 즉 문제의 주제, 형식 식별, 용어 정의, 가능한 답안 열거, 질문 분석, 구성안 적성 등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4장에서는 서두에서 언급한 세 가지 문제에 답하는 데 필요한 철학자들의 핵심적인 주장을 소개한다. 5장에서는 앞의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예시로 삼아, 실제로 사고의 틀을 사용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특히 세 가지 문제에서 다루는 노동, 기술, 자유, 권리, 정의와 같은 개념은 프랑스 철학 문제 중에서도 반복해서 출제되는 주제이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필요한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능력과 자세'를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문제를 발견하는 힘,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익힌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답이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 주기도 합니다. 더욱이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 ‘답이 없는 것’, ‘의견이 바뀌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새로운 정보나 논거를 손에 넣음으로써 자신이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 실은 옳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때까지의 자기 의견에 집착하거나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고치기 쉽습니다. 새로운 조건으로 다시 한번 질문을 만들어 보고, 자기 의견을 절대시하지 않고, 몇 번이고 수정하며, 계속해서 의심해 보세요. 이 같은 태도야말로 ‘교양’이 주는 선물이며, 시민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강력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p.201) - 「6장 사고의 틀을 응용하다」 중에서


저자 : 사카모토 타카시


교토약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토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연구 박사과정 연구지도를 받았으며, 프랑스의 보르도 제3대학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 과정을 밟았다. 전공은 ‘20세기 프랑스 사상사(미셸 푸코) 및 철학 교육’이다. 바칼로레아 및 철학적 사고에 관한 저서를 다수 집필했다.


역자 : 곽현아


국민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전공하고, 일본학과를 부전공으로 졸업하였으며, 현재 일본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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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생각의 비밀 - 빼앗긴 집중력을 되찾고 당신의 뇌를 최적화할
김태훈.이윤형 지음 / 저녁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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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어! 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로 깊숙이 들어온 느낌이다. 독자는 아날로그 세대로 디지털 문화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인공지능, 빅데이터로 상징되는 4차 산업혁명 속의 시대에 이미 발을 들여놓았음을 뒤늦게 느낀다. 인공지능에 관심을 가진 지 불과 8년 만의 일이다. 디지털 시대는 아날로그 세대로서는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2016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에서 인공지능의 발전을 피부로 느낀 최초의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세돌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심지어 대국자인 이세돌 9단마저도 승리를 장담하고 있었다. 이때 들은 이야기로는 인공지능 바둑 '알파고'는 하루 3만 판의 연습 바둑을 둔다고 한다. 인간의 시간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바둑을 하루에 둔 것이다. 구글 알파고 담당자 측에서는 더 이상의 인간과 AI의 바둑 대결은 의미가 없다고도 밝힌 바 있다. 지금은 각 나라의 일류 바둑 기사들이 모두 인공지능이라는 하나의 스승 아래서 바둑을 연구하고 배우는 현실로 바뀌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에 역으로 지배당하는 상황을 우려했던 일들이 하나둘씩 현실화되어 가고 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생각하는 존재였던 인간은, 또 다른 생각하는 존재의 등장으로 위협받고 있고, 속도와 효율성 면에서 인간을 능가하는 초거대 AI의 등장으로 이미 인간의 일자리는 대체되기 시작했다. 더욱 인공지능을 주체적으로 이용하는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이 생각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해졌다. 그러나 인간은 OTT, 숏폼 영상을 종일 켜놓고 엄청난 양의 콘텐츠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기는 하지만 점점 스스로 생각하기를 소홀히 하고 있다. 궁금하거나 모르는 점이 생기면 즉각 검색을 시도할 뿐 유추하거나 추리하거나 상상해보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생각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과연 이대로 괜찮을까. 이런 우려가 이 책 『깊은 생각의 비밀』이 쓰여진 이유다.



공동 저자 김태훈과 이윤형(이하 저자)은 인지심리학자로서 수많은 대기업에서 ‘생각’에 대한 주제로 강연을 해왔다. 강연마다 늘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아마 '생각하지 않은' 많은 대기업 임직원들의 각성 탓이었을 것으로 독자는 추정한다. 저자는 강연을 바탕으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복합 사고 능력을 키우고 단련하는 법을 흥미로운 심리 실험과 함께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주도자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지금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생각 매뉴얼'이고 이 책이 길을 찾는 많은 방법을 제시할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최고의 판단력, 결정력, 문제해결력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랜 시간 곁에 두고 탐독해야 할 책이다.

오늘날의 이런 상황은 몇몇 전문가들에 의해 이미 예견되어 왔다. 20세기 말 인공지능이 현실화된다는 이야기가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곧 21세기 벽두부터 우리의 일자리를 컴퓨터와 인공지능에게 빼앗길 우려가 있다고 우려를 제기했다. 그러나 대부분 인공지능은 인간의 창의력을 따라올 수 없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애써 인공지능의 능력을 외면해왔다. 21세기 뉴밀레니엄과 함께 작은 통신기기 하나가 인터넷을 장착하고 우리 손에 쥐어졌다. PC 등에서나 가능했던 인터넷이 휴대전화에 장착된 것이다. '도서관을 들고 다닌다'고 표현할 만큼 강력한 무기를 언제 어디서나 꺼내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호기심을 넘어 외경심마저 들었다. 불과 20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이제 우리 인간은 스마트폰과 뗄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잠들기 전까지.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면 바로 SNS에 들어가 밤사이에 있었던 새로운 콘텐츠를 확인하며 씻으러 들어간다. 출근 준비하는 내내 유튜브 또는 OTT 영상을 시청하거나 음악을 듣는다. 회사까지 이동하는 시간에도 마찬가지다. 일을 할 때도 잘 안 풀리면 바로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찾아본다. 퇴근을 하고 잠들기 전까지도 스마트폰으로 다시 영상을 보거나 뉴스를 본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활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점점 정보를 미디어에 의지하고 점점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시대에 살며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다. 지금 이대로 생각하는 능력을 방치해도 괜찮은 걸까?



저자는 인간이 인간을 닮은 새로운 경쟁자보다 우위에 있는 면은 바로 '복합적으로 생각하는 능력', 그리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정보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단언한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의 본질은 이 두 가지 능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능력을 얼마나 열심히 갈고닦으며 잘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자문을 해본다. 생각 그리고 생각하는 힘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살마은 많다. 그런데 정작 '생각하는 방법'을 제대로 고민해보거나 생각의 특징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두 저자는 모두 인지심리학자이다. 인지심리학적 관점으로 '생각'해 대해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책에 따르면 일방적인 콘텐츠에 노출됐을 때 우리의 뇌는 생각하기를 멈춘다. 회사에서 회의를 하거나 가족이나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궁금한 것이 생겼을 때도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바로 스마트폰으로 검색부터 한다. 저자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검색을 통해 생존하고 있는 인간을 '호모 스키스켄스'로 부르며 이러한 현상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가 지구에서 유일하게 생각하는 존재였던 시절이 있었지만 또 다른 생각하는 존재, 초거대 AI가 등장했고, 인공지능의 생각 속도와 효율성은 이미 인간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인간은 위기와 위협을 느낀다고 하면서도 생활의 패턴이나 생각하는 방식은 여전히 그대로다. 이 대전환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깊은 생각’이다. 

깊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에서는 가장 먼저 생각의 특성과 원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생각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는지 등 생각의 작동 원리에 대해서 생각 CPR(입력, 처리, 인출)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쉽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흥미로운 심리 실험들을 소개하며 생각의 특성을 설명한다. 이러한 생각의 특성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인간이 자주 저지르는 생각의 오류와 오류의 극복 방법까지 전한다.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 발생하는 생각의 오류 문제도 지적하며 자연스럽게 독자들이 깊은 생각을 방해하는 문제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책은 모두 8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생각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2장 〈생각을 습관으로 만드는 법〉, 3장 〈문제의 정의와 개념화를 통한 생각 트레이닝〉, 4장 〈우리가 생각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 5장 〈현명한 판단과 의사결정의 심리학〉, 6장 〈유연한 생각을 위한 전략〉, 7장 〈집단 지혜의 힘〉, 8장 〈깊은 생각이 답이다〉 등이다. 이 책은 생각을 방해하는 문제 정의와 함께 재미있는 실험을 통해서 문제를 바로 잡고 독자들이 직접 생각하고 답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더 깊은 생각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장치도 실려 있다. 일상에서 생각의 방법을 적용하고 습관화할 수 있도록 훈련하기 위해 「생각해보기」와 「실천해보기」를 넣어 본문을 구성했다. 

현명한 판단과 의사결정, 유연한 생각을 위한 전략, 집단 지혜로 이르는 생각법까지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전부 담았다. 이렇게 직접 생각해보고 글을 쓰면서 정리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은 많은 독자들이 가볍게 읽고 위기를 느끼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게 탐독을 하면서 책을 읽기만 해도 깊은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저자는 본문에 들어가기 전 「생각하지 않는 사회」란 제목의 서문에서 "인간 세상을 지금껏 발전시킨 힘은 전문성과 협력이다. 과거 수렵 및 채집 시대에는 사냥 전문가, 음식 저장 전문가, 은신처 제작 전문가 등이 크게 대접받았다. 이후 자격증이라는 단어로 대변되는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전문가들은 20세기까지 사회의 중요 역할을 맡았고 그들이 사회를 전반적으로 이끌어왔다"고 전제한다. 이 시대의 리더는 사람들을 이끌 뿐 아니라 다른 구성원들에 비해 지식과 기술이 풍부해서 나누어줄 것 또한 많은 사람을 뜻한다. 이처럼 전문성을 갖고 조직을 이끌어가는 카리스마 있는 리더는 늘 주목받았지만, 이제는 이러한 리더가 여타의 조직 구성원들보다 더 많은 지식이나 숙력된 기술을 갖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시대다. 저자는 리더가 특정 분야의 지식이나 기술을 통해 조직을 이끌어가는 시대는 저물었다고 단언한다. 

미래에는 '스스로 깊게 생각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 중요하게 쓰일 것임은 분명하다고 강조한다. 깊이 생각하는 힘은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새로운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지식을 연결하는 일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따라서 나의 지식을 다른 사람의 지식과 연결하여 통찰하며 통섭에 능한 사람이 각광받을 수밖에 없다고 저자는 역설한다. 



이 책은 인문 교양서 혹은 심리학 에세이처럼 쓰였다. 그러나 책의 내용을 훑고 지나가다보면 인지심리학 논저에 가깝다. 각 장의 제목만 훑어봐도 논문식 저서라는 것이 금세 파악된다. "생각의 작동-생각을 행동(습관)으로 만들기-생각을 가로막는 것들-전략적(유연한) 생각하기-집단 지혜의 힘-(깊은) 생각이 답이다"로 하나씩 하나씩 계단들 밟아올라가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각 장의 뒷 부분에는 '생각을 습관으로 만들기 위한 생각 트레이닝'을 직접 할 수 있도록 생각을 직접 써보는 난도 마련돼 있다. 

생각을 방해하는 문제 정의와 함께 재미있는 실험을 통해서 문제를 바로 잡고 독자들이 직접 생각하고 답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또 더 깊은 생각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장치도 실려 있다. 일상에서 생각의 방법을 적용하고 습관화할 수 있도록 훈련하기 위해 「생각해보기」와 「실천해보기」도 첨부돼 있다. 현명한 판단과 의사결정, 유연한 생각을 위한 전략, 집단 지혜로 이르는 생각법까지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모두 담았다. 이렇게 직접 생각해보고 글을 쓰면서 정리할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은 많은 독자들이 가볍게 읽고 위기를 느끼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깊이 있게 탐독을 하면서 책을 읽기만 해도 깊은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인지심리학자이자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김경일, 성균관대학교 기계공학 교수이자 『포노 사피엔스』 저자인 최재붕, 지식생태학자이자 한양대학교 교수인 유영만, CJ ENM CP 정민식 등 많은 학자와 작가들이 극찬한 이 책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깊은 생각을 통해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이드가 될 것이다. 인간은 매 순간 생각하고 결정하며 문제를 해결한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시대에는 지금보다 더 복잡한 문제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미래를 준비하는 책으로 이 책은 매우 잘 쓰여진 책임을 한 번 읽은 독자들은 반드시 느낄 수 있다. 책 출간을 한 후 한 인터뷰에서 저자는 "책을 통해 독자분들께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대해 질문하자 "생각은 누구나 하지만 차별화된 생각은 극소수만 합니다. 이 책은 그동안 고민해보지 않았던 인간의 생각에 대해 함께 탐구해보고 이를 통해 생각을 차별화하고 싶은 분들에게 보탬이 되리라 생각합니다"라고 강조하는 부분에서도 명백해진다.



인간은 한번 자신의 입장을 정하고 나면 그와 반대되는 정보를 접해도 쉽게 기존 입장을 바꾸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증거는 지속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반대되는 증거는 애써 무시하는 사고방식을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표현을 흔히 쓰곤 하는데, 이것이 바로 확증편향을 의미한다.(p.135) - 4장 「우리가 생각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 중에서


자신의 분야를 다른 사람에게 잘 설명하려면 별도의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말로 바꾸고 그것을 스스로에게 설명해보자. 자기 생각의 중심적 의미를 잘 표현하는 정확한 단어 선택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을 통해 머릿속이 정리되기 때문이다.(p.236) - 7장 「집단 지혜의 힘」 중에서


저자 : 김태훈


경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심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 심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간의 움직임의 기저와 적용 가능성을 연구하였으며, 현재 메타인지, 인지적 편향 등 인간의 사고과정에 관한 연구를 주로 진행하고 있다. 육군사관학교 심리학과에서 전임강사로 재직하였으며, 현재 경남대학교 심리학과에 재직 중이다. 각종 기관 및 기업에서 강연을 하고 있으며, 〈역사저널 그날〉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 등 여러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옮긴 책으로 《전망하는 인간, 호모 프로스펙투스》 《혁신의 도구》(이상 공역)가 있다.


저자 : 이윤형


영남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실험심리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 학교에서 인지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구가톨릭대학교 심리학과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현재 영남대학교 심리학과에서 인지심리학과 뇌과학 강의를 하면서 인간의 언어, 기억과 학습, 인지와 정서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인지과학회와 학교심리학회에서 최우수논문상을 수상하였으며, 영남대학교에서 우수연구상 및 다수의 강의 우수교수상을 수상하였다. 다양한 기관과 기업에서 외부 강의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인지심리학을 통해 삶에 도움을 주려 노력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혁신의 도구』(공역) 『인지심리학의 기초』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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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행 고려사 : 고려거란전쟁 편 - 알고 봐도 흥미진진한 역사 이야기
박종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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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적의 침입을 받았지만 이를 극복하면서 5,000년을 이어온 역사 깊은 나라다. 태조 왕건이 삼국을 통일해 세운 고려시대에도 외적의 침입으로 전 국토가 전란에 휩싸인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고려는 인류사에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몽골의 칭기스칸 제국인 원(元)나라와의 전쟁을 제외하곤 어떤 전쟁에서도 패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려 시대는 옛 고구려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분 아래 만주나 몽골 지역을 틈틈이 엿보며 나라의 힘을 키웠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았나 싶다. 다만 우리를 침략한 거란이나 원나라도 나름 엄청나게 세력을 키워서 침략했기에 쉽게 이기지는 못했지만, 원 제국과의 전쟁에선 끝내 항복하고 말았다. 고려 시대의 역사는 교과서나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고는 쉽게 접하기 어렵다. 고려사는 조선시대 때처럼 〈조선왕조실록〉처럼 정사(正史)를 다룬 실록인 〈고려사〉가 있지만 역사적 전쟁이나 사실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아 상당 부분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전쟁의 경우 적국(敵國)의 역사서를 참고해야 할 때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은 기정 사실로 할 수 없게 될 경우 역사서는 물론 소설에서도 함부로 다루기 어렵다. 역사 왜곡 시비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 여부가 확실치 않으니 상상력을 동원하는 것도 쉽지 않을 일이다. 소설가들은 이에 따라 야사나 기타 개인적 기록에 의존하면서 본의 아니게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쉽게 다루지도 못할 것이다. 사극이나 소설에서 조선시대에 비해 전무하다시피 한 고려시대의 사극이나 소설이 로맨스나 풍습에 관한 일이 대부분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 대하드라마로 큰 인기를 끌었던 KBS가 〈고려거란전쟁〉을 방영함으로써 고려시대의 전쟁사가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출판계도 가세했다. 이 드라마에서 다룬 내용은 표제어대로 거란과의 세 차례 전쟁이다. 크게 다룬 대회전 같은 전투만 세 번에 걸쳐 26년 동안 이루어졌으나 국지전을 포함하면 10여 차례라고 알려지고 있다. 드라마는 극적인 부분을 강조해 시청자들의 몰입도를 높일 수 있기에 화면에 비춰지는 대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기는 힘들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침략 세력에 어떻게 싸워 이겼는지를 많은 국민이 알게 해주는 큰 역할을 했다. 이 드라마 방영 기간 앞뒤로 고려-거란전쟁을 다룬 많은 책들이 발간됐다.



이 가운데는 정사를 다룬 책도 있고, 소설로 극화한 책들도 있다.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은 고려-거란전쟁으로 고려가 이김으로써 고려의 국격은 상승했고, 거란은 패전으로 멸망의 길을 걷는다는 점이다. 고려든 거란이든 모든 국력을 쏟아 치러낸 전쟁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 책 『역주행 고려사-고려거란전쟁 편』은 우리 역사를 정사 차원에서 이야기 식으로 전해주는 유튜브 채널 〈역주행-조선왕조실록〉의 유튜버 박종민이 드라마 방영에 맞춰 펴냈다. '역주행'이란 단어 때문에 역사를 비틀어 쓴 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사를 바탕으로 저자 박종민이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매끄러운 구어체와 일러스트로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힘을 쏟았다. 

이 책 『역주행 고려사-고려거란전쟁 편』은 세력을 키워 고려를 침략했던 거란과 고려의 전쟁을 다뤘다. 뿐만 아니라 거란과의 전쟁이 벌어진 배경과 비하인드 스토리도 저자의 시선은 놓치지 않았다. 저자 박종민은 이를 위해 〈고려사〉는 물론 〈고려사절요〉, 〈요사(遼史)〉 등 고전 문헌들에 기록된 정확한 역사적 사실들만을 바탕으로 하여 객관성을 더했다고 밝힌다. 고려-거란 전쟁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태조 왕건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왕건이 나라를 세운(918년) 후 100년이 안 돼 일어난 전쟁이기에 건국 공신과 지방호족들이 그대로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1차 침공 때 외교적 성과를 거둔 서희와 3차 침공 때의 주인공 강감찬 장군 역시 고려 건국 때부터 공을 세운 가문의 사람들이다. 고려-거란 전쟁은 고려의 성장 전반과 거란, 중국 등 주변국과의 복잡한 관계가 총망라된 사건으로, 고려사에 끼친 영향 면에서도, 전쟁 자체의 규모 면에서도 역사적 존재감이 크다. 이 책은 고려의 북진정책 및 친송정책과 정안국에 위협을 느낀 거란이 993년(성종 12), 1010년, 1018년(현종 9)의 3차에 걸쳐 고려에 침공한 사건을 정사인 『고려사』를 바탕으로 다룬다. 

책에 따르면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거란족은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916년(발해 애왕 16) 요(遼)나라를 건국하였다.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고려 태조는 북진정책을 추진, 발해 유민을 포섭했다.



거란은 고구려 장수왕 때 출복부(出伏部) 등 일부가 예속되었지만 고려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 922년(태조 5) 야율아보기가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적대관계를 유지하였고, 942년 거란의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사신은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여버렸다. 이는 고려의 태조 왕건 때부터 추진한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그 뒤에도 계승되어 정종 때 광군(光軍) 30만을 조직한 것도 요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송이 건국하고 고려가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자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거란을 공격할 뜻을 비췄고,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定安國)도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에 요의 성종(聖宗)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威寇)·진화(振化)·내원(來遠)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략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바로는 거란의 1차 침공(993년) 때 활약한 고려의 서희는 담판의 대가로,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하자, 서희가 담판을 벌여 소손녕을 설득해서 물러가게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박종민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말로만 얻을 수 있는 평화가 과연 가능할까? 역사학자로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세게 역사 어디를 찾아봐도 말로 군사를 물려 되돌아가는 침략군은 없다. 저자는 오랜 연구와 자료 조사 끝에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이 장면을 다시 되돌려보도록 복원해냈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의 실제 모습을 살펴볼 때 서희가 적절히 군대를 움직여 거란군의 진격을 막아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담판이 없었더라도 거란군은 물러갔을 것이다.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은 전쟁 후 평화 조건을 정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파악해낸 것이다. 그 담판 때문에 소손녕이 물러간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잊지 않는 것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릇된 역사 서술로 잘못 배운다면 차라리 모르는 게 오히려 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역사 바로잡기의 역할도 함께 해낸 것이다.



이 책은 거란의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빌미로 40만 대군을 앞세워 고려를 침공하고, 고려는 수도 개경을 함락당하는 부분도 잘 기술되어 있다. 이 때가 거란의 2차 침공(1010년)이다. 당시 고려에서 활약한 주요 인물이 바로 양규와 김숙흥이다. 그들이 3,000여 명의 병력으로 40만 거란군을 상대했던 장면은 지금 보아도 눈부시다. 그런데 의문이 있다. 당시 현종은 어떻게 해서 많은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감찬의 항전 건의를 받아들였을까. 어떤 전략이 있었던 것일까. 반면, 말과 낙타, 무기 등 거의 모두를 잃고 사실상 패전과 다름없는 상황에 놓인 거란이 그럼에도 다시 고려를 침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거란은 그 뒤로도 총 일곱 번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다). 고려를 둘러싼 당대의 국제정세가 어떠했기에 거란은 이토록 긴 시간 동안 한 나라를 계속 침공했던 것일까. 귀주대첩(1018-1019)에서 고려의 승리를 이끈 사람은 강감찬 한 명이었을까···.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지난한 전쟁에 대해 품어볼 만한 의문은 이렇듯 한두 개가 아니다. 저자는 바로 이 같은 여러 가지 의문에 주목하여 ‘고려-거란 전쟁’에 대해 잘못 알려져 있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실, 그리고 진실한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썼다. 이 책의 출간 취지이고 제목에 알맞는 책이다.

이 책은 고려와 거란의 오랜 전쟁에 대한 진실과 사실,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를 밝힌다. 드라마를 보는 듯 현장감을 즐기게 해주는 일러스트와 당대의 지리적 요소 및 전투 상황의 이해를 높여주는 지도 배치로 역사서를 소설처럼 재구성한 것도 이 책의 독창성을 돋보이게 한다. 물론 기술도 많은 부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되었다. 물론 우리가 배운 『고려사』를 바탕으로 저자가 작가적 상상력을 가미한 것일 뿐 허구의 사실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역사적 사건에 몰입할 수 있는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 이해를 돕는 친절한 일러스트 등 영상에서 모두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과 지도 등의 보충자료를 풍성하게 더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쉽고 재미있는 역사 도서다. 여러 사건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한 「주요 사건 연표」와 각 전쟁별로 거란의 침입 경로를 지도로 표현한 「거란의 침입로」, 초기 고려 왕실의 복잡한 관계를 한 장으로 알기 쉽게 정리한 「고려 왕실 계보」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이 탁월한 점은 앞서 짧게 언급한 점이 있지만 세밀하게 기록한 정사가 없기에 전쟁의 상황을 자세하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고려사를 쓰는 학자라면 당연히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을 생략한 것은 역사서의 사실 기록을 의문이 들게 하는 원인이 된다. 가령 서희 담판으로 오히려 강동 6주를 얻고, 거란을 물러가게 했다고 역사서에는 기술되어 있다. 당시 서희와 소손녕의 대화로 엮어진 이 책에서는 조금 다른 해석을 기술한다. 80만 대군을 앞세워 1차 침공을 했지만 얻은 것 없이 철군했다는 사실이다. 저자 박종민은 의문을 갖는다. 세계 역사상 8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나라에서 전투 한 번 없이 다시 군사를 물린다는 역사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다. 저자는 주변 국가와 상황과 거란의 침공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고, 소손녕에게 담판을 통해 조공을 받치고 연호를 사용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은 우리 고려 입장에서 고개를 숙인 일이라는 점에서 슬그머니 빼거나 부각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주변국의 역학 관계 상 1차 고려 침공의 목적은 송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후방의 고려를 두고 전쟁을 벌일 수 없기에 당초 목적이 고려와의 친교였다는 사실이다. 또 거란의 군사 편제상 '도통'이 지휘관으로 갈 경우는 15만 명 이상의 대군일 때 가능한 일이지만 소손녕은 말로 80만 대군이란 말을 하지만 실상 '도통'의 지위가 아니었다는 말도 저자는 첨부하고 있다. 2차 침공시 도통인 소배압의 지휘권을 인정하고 있고, 황제도 함께 나섰다는 점에서 대군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이때 거란 측에서 주장한 40만 대군 중 실제 전투 요원은 10만~15만 명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근대 이전의 국가들은 군대 원정엔 보급로 확보, 보급부대 등 전투 병사를 지원하는 각종 잡무 등을 모두 포함하고, 이때 전투 요원은 파견 군대 수의 3분의 1정도로 보는 것이 전쟁사를 다루는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임을 저자는 덧붙인다. 이런 상황이라면 40만 명의 군사 중 실제 전투 요원은 10만 명 안팎이라고 분석하는 것이다. 이 논리는 고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돼 강조가 이끈 40만 명의 군사 중 전투병은 10만 명 남짓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셈법은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 당시 15만의 수군이 1,500여 척의 배로 침략했다고 돼 있지만 노젓는 잡역부, 취사, 행정, 의료와 잡일 등을 포함한 숫자인 것이다. 한 배에 승선한 인원이 100명 정도라는 것이 이런 계산에서 나온다. 저자의 셈법은 합리적이고 군사 문제를 다루는 학자의 시선이다.



3차 침공 때 소배압은 약 10만 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 이들은 강감찬과 대회전을 치를 생각이 아예 없었다. 이는 흥화진 등 강동 6주에 있는 진지가 천혜의 조건에 인공으로 불가침의 공력을 들인 성을 만들어 놓았기에 자칫 지난 침공 때처럼 강동 6주에 발이 묶일 경우 개경에는 침공조차 못하고 시간이 없어 되돌아가야 하는 우려가 있음을 경험 많은 지장 소배압은 아예 군사 1만을 이들 요새 공략처럼 희생시키고 곧바로 개경으로 향한다. 워낙 말을 잘 타는 유목민들이라 생각보다 빨리 개경 앞에 도착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강감찬이 뒤늦게 이를 알아채고 기병 1만으로 뒤쫒게 하고 강감찬도 전열을 정비한 뒤 개경으로 진군한다. 이때 개경 성을 지키는 군사의 수는 3,000명이었다고 한다. 왕 현종도 신하들의 몽진을 거절하고 끝까지 개경을 사수하겠다는 결의를 가진다. 백성들의 협조를 바라면서. 즉 마을의 약탈될 것, 특히 식량 등은 모조리 불태운다. 이 작전은 이른바 진공 작전이라 원정군에게 식량이나 전투에 필요한 물자 조달을 막기 위해 쓰는 '옥쇠 작전'이다. 이를 저자는 현종의 '신의 한 수'라고 말한다. 2차 침공 때 두 달이 걸려 개경에 도착했지만 이번 3차에는 20일 만에 개경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소배압이 아직 개경의 전쟁 대비 상태를 알지 못하기에 진을 친 채 100명의 척후병을 보내지만 이들이 단 한 명도 살아오지 못함으로써 개경 진입을 망설이다 결국 실기한다. 즉 개경까지 쳐들어온 9만 명의 군사를 진퇴양난에 빠진 것이다. 앞의 적은 얼마만큼의 전력인지 알지 못하고, 뒤를 쫓아온 고려 기병이나 강감찬이 거느린 대군은 바짝바짝 다가오니 그야말로 자칫 전멸의 위험을 느끼게 된다. 

결국 철수를 명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음은 강감찬이 퇴로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편한 길로 가지 않고 일부로 귀주로 돌아가는 험한 길을 택했지만 이번에 강감찬이 미리 쳐놓은 그물 속으로 걸어들어간 셈이다. 불과 수천 명이 뿔뿔이 흩어져 몇 백과 함께 소배압은 처절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후 거란은 고려를 다시 침범하지 못할 정도로 주변국들에게 둘러싸여 명맥을 유지하다가 틈을 노린 여진족(후에 청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전쟁 상황에 대해 설명한 저자는 전후 거란과 고려가 각각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정리해준다. 고려 침공해 실패한 거란이 바로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거란 황제 아율용서는 격노하지만 그를 죽이지는 않는다. 패전의 책임을 물어 삭탈관직했다. "역사를 알아야 한다"는 말은 언제 어디서나 일치하지만, "잘못 알려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는 말도 있다. 거란 침공에서 고려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까? 


저자 : 박종민


쉽고 재밌게 역사를 이야기하는 역사 전문 교양 채널 ‘역주행-조선왕조실록’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고려와 조선의 역사를 생생한 애니메이션 형식으로 만들고 있으며, 세계사나 일본사, 고려사를 함께 다루며 그 영역을 점차 넓혀가고 있다.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 방영 시기에 고려사 콘텐츠를 업로드하기 시작했으며, 고려사 콘텐츠의 영상 평균 조회수가 수십만 회를 웃돌며, 가파르게 성장 중이다.

가장 떠오르는 역사 유튜브 채널답게 역사적 사실 중에서 핵심만 쏙쏙 뽑아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듯 쉽게 풀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 초기 왕실의 복잡한 가계도를 한눈에 이해하기 쉽도록, 직접 만든 ‘고려 왕실 계보’를 일러스트와 함께 설명하는 등 다양한 시각적 자료들을 활용하고 있다. 고려사를 다룬 유튜브 채널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운 영상 콘텐츠가 풍부하다는 평이 쏟아지고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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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이상·백석·윤동주 소장용 세트 - 전4권 - 민족의 암흑기를 저항과 서정시로 위로한 한국인이 사랑한 시인들 전 시집
정지용 외 지음 / 스타북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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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2025년은 광복 80주년이다. 갑자기 해방을 말하는 것은 시인 윤동주를 말하기 위함이다. 윤동주는 우리나라가 해방되던 해 1945년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독립운동 혐의로 옥사했다. 때문에 윤동주 타계 80주년이 되는 해가 2025년이다. 이를 기념해 윤동주가 사랑한 3명의 시인들과 이들 4명의 시집에 수록하지 못한 시들을 신문, 잡지 등에서 발굴하여 '전 시집'으로 출간됐다. 이 시집과 시인들은 우리가 잘 아는 『카페 프란스』의 정지용, 『건축무한 육면각체』의 이상,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백석,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윤동주다. 이들 4명의 시인들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들로 이제는 해외에서도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 4명의 시인은 윤동주와 함께 일제 강점기인 우리나라와 민족의 '암흑기'를 함께 하면서 시를 통해 민족의 아픔과 설음을 대변했던 분들이다.

이들 시인은 때로는 저항의 시로 울분을 토하고 때로는 서정의 시로 위로해주기도 했다. 특히 이상과 백석은 윤동주가 너무 좋아하는 시인이고 정지용은 가장 존경하는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지용은 해방 후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있으면서 강처중이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며 건내 준 윤동주의 시를 읽고 부끄럽다며 절필선언까지 한 시인이다. 그는 윤동주를 적극적으로 세상에 알린 「향수」의 시인으로 일본 도시샤대학의 선배이기도 하다. 정지용은 1948년 윤동주 시집의 유고집이 나올 때 서문을 써가며 윤동주를 소개했던 인물이다. 정지용은 언론과 교육과 문학을 넘나든 인물이다. 특히 이 4권의 전 시집 시리즈는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이근배·나태주 시인과 4대 시인협회장이 추천해 주신 인문학 시집으로 초판본의 오리지널 이미지를 살렸고 양장본으로 소장가치를 더했다고 출판사 측은 밝히고 있다.

이동원, 박인수가 불러 유명한 노래의 가사 「향수」는 정지용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윤동주는 살아생전에 정지용에게 문학적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 인간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정지용 시집』은 윤동주 사후에도 여전히 보관되어 있을 만큼 윤동주는 정지용의 시를 아꼈다. 이 시집은 『정지용 시집』 『백록담』, 그리고 시집에 실리지 않았던 시들을 신문과 잡지 등에서 새로 발굴해 『카페 프란스』에 「미수록 작품」들로 구분하여 새로 실었다.



이들 가운데는 ‘천재’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두 명의 시인이 있다. 천재 이상과 백석이다. 그리고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윤동주. 윤동주를 가장 아껴 그의 사후에 윤동주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낸 주인공인 정지용. 이들에겐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 말고도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펜을 들고 꿋꿋하게 자유를 눌러 썼다는 점이다. 이상 전 시집 『건축무한 육면각체』는 『이상 전집』 제2권 초판본 순서 그대로 정리하여 첫 발간 당시의 의미를 살리되 표기법은 기존의 초판본 시집의 느낌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게 현대어를 따름으로써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었다고 출판사 측은 밝히고 있다.

이상은 시 「오감도」와 단편소설 「날개」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시는 난해하기 그지 없어 당시 신문에 연재하다 독자들의 항의로 중도하차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상은 건축학을 전공한 '문화예술계의 이단아'로 천재라는 수식어가 '박제'돼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시어를 무한 반복함으로써 독자들은 물론 당시 시인들에게도 문학론으로 구설에 오른 적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잘 이해하고 그를 끝까지 곁에서 지켜준 화가 구본웅의 보살핌이 있었다. 화가 구본웅과의 관계는 영화 〈금홍아, 금홍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영화는 천재 시인 이상과 야수파 곱추 화가 구본웅, 그리고 기생 금홍의 삼각 관계의 로맨스를 그린 시대극이지만 두 사람의 친분을 확인할 수 있다. 

시인 '이상' 하면 떠오르는 단어 '천재'와 '날개'다. 그의 시는 여전히 지금의 독자들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어쩌면 소설 「날개」의 작가로 더 익숙하다. 이 소설로 '박제된 천재'라는 말이 그를 칭하는 별명처럼 붙어다닌다. 이번 4인의 '전 시집' 중 이상의 『건축무한 육면각체』 「건축과 문학, 외국어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던 천재」란 제목의 〈서문〉에서 "이상의 작품들은 난해하고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이유로 생전에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다. 이상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오감도(烏瞰圖)」 역시 처음 조선중앙일보에 실렸을 때도 그 난해함과 추상성으로 인해 독자들의 거센 반발을 받았고 결국 15편을 끝으로 연재를 중단했다"고 썼다. 이 서문은 또 "그의 대표작 날개의 첫 줄인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글에서 묻어나오듯 이상은 자신을 여러 방면에서 천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그를 아는 지인들은 이상을 천재로 평가했으나 그때 당시엔 그의 천재성이 주목받거나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독자 생각으로는 이 서문은 명문을 하나 남겼다. "문학을 사랑하는 이상의 시대, 이상의 천재성, 이상의 개인사들을 탐색하며 한 발 한 발 그의 작품세계로 걸어나간다"며 "난해해서 읽히지 않았는데 이젠 그 난해함 덕분에 읽히고 있다."는 문장이다. 이에 따라 이상의 시에서 정답을 찾으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이 4인 시집 기획시리즈를 펴낸 출판사 측의 설명이다. 시가 어려운 이유는 정답이 있다고 믿고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는데 찾으려고 하니 당연히 시를 읽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이 서문은 말하고 있다. 시의 답은 시인에게 있지 않고 독자에게 있다. 독자들이 저마다의 답을 내리고 이상이 생전에 발표한 글, 그의 유고, 이상의 습작 노트, 그 외의 발굴 자료 등을 편안하게 읽어내려 가기를 당부하고 있다. 

이상은 그 천재성만큼이나 기행도 잦았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아니면 꿈도 꾸지 못한다는 서울공대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디자인 공모에도 1등으로 당선됐다. 예술 분야에서 독창적인 의식으로 시, 소설, 수필, 그림까지 유명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이 당시 이상과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이상은 '건축가 이상'으로 최근 재조명 되고 있기도 하다. 스물일곱이라는 짧은 생에서 그가 한 일은 너무나 많다. 다방과 술집을 경영하고, 떠들썩한 금홍이와의 사랑과 구본웅 화가의 사촌인 변동림과의 결혼(이상과 이혼한 뒤 김환기 화백과 재혼했다) 등 다사다난하고 바쁘게 살았다. 아마 지병 치료차 일본에도 갔던 것 같다. 그때 쓴 수필 「동경(도쿄)」가 남아 전해진다. "우리같이 폐가 칠칠치 못한 인간은 우선 이 도시에 살 자격이 없다. 입을 다물어도 벌려도 척 가솔린 냄새가 삼투되어 버렸으니 무슨 음식이고 간에, 얼마간의 가솔린 맛을 면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동경 시민의 체취는 자동차와 비슷해 가리로다. (중략) 나는 택시 속에서 20세기라는 제목을 연구했다. 창밖은 지금 궁성호리 곁-무수한 자동차가 영영(營營)히 20세기를 유지하노라고 야단들이다. 19세기 쉬적지근한 내음새가 썩 많이 나는, 내 도덕성은 어째서 저렇게 자동차가 많은가를 이해할 수 없으니까 결국은 대단히 점잖은 것이렸다."(p.246~247)



이상은 그러나 동경제국대학 부속 병원에서 1937년 4월 17일 새벽 4시에 27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변동림이 그의 유해를 화장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묻었으나, 돌보는 이가 없다가 6.25 전쟁 후 미아리 공동묘지가 사라지며 유실되었다고 한다. 이 책 『건축무한 육면각체』에는 「미발표 유고」 9편과 「기타 시」로 분류되는 3편의 시, 대표소설 「날개」와 대표 수필 「권태」 등 3편이 함께 실려 이번 시리즈 기획 출판의 의미를 더한다. 시에 대한 지식이 '문외한급'인 독자의 독서로는 그의 시 가운데 비교적 이해가 되는 시는 「거울」 한 편뿐인 것이 몹시 아쉽다.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 「거울」 중에서



공교롭게도 해방 전에는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인데도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다시 못 본 채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이들 4명의 시인들이다. 이상은 1937년, 윤동주는 1945년, 정지용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사망, 백석은 1996년까지 삼수군 관평리에서 농사를 짓다가 사망했다는 내용이 드러났지만 정확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한 시인들의 마지막이 안락하거나 비극적이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 가운데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백석의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을 것으로 판단되는 많은 징후들이 보인다. 먼저 그의 시의 색깔이다. 안도현의 『백석 평전』에 따르면 백석이 1963년 북한 문단에서 종적을 감춘 뒤, 한때 숙청설과 사망설까지 떠돌았다. 최근에야 그가 1996년 85세로 생을 마쳤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백석 평전』은 1912년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에서 태어나 1996년 삼수군 관평리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84년의 세월을 다룬다. 비록 1963년에서 1996년까지 30여 년의 세월은 알려진 자료가 없기에 공백으로 남겨뒀지만, 안도현 시인이 재구성해낸 백석의 삶을 따르다 보면 그의 문학 작품과 문학관은 물론 굴곡 많았던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

안도현은 "백석의 시는 여러 책을 통해 독자에게 알려졌지만, 산문은 그렇지 않다"며 "그래서 가능하면 전문을 다 수록하려고 했다. 산문으로 백석이 살아온 시간을 더듬을 수 있다. 스키장 탐방기라든지 양을 키우면서 쓴 산문을 보니 역시 백석은 천상 시인이다."고 평가했다. 

"어느 해’볕 따사로운 이른 봄 산 밑 감자밭에 두엄을 내노라고 소발구를 몰고 가던 나는 엄지들을 따라 방목지로 나온 수많은 새끼양들이 즐겁고 발랄하게 뜀질을 하고, 개닥질을 하고, 또 엄지들의 흉내를 내여 마른 풀’입사귀를 뜯고, 풀뿌리를 들추고 하는 것이 눈에 띄였다. 나는 이 때 나도 모르게 소를 내버리고 방목지로 달려 갔다. 그러자 매애애 소리치며 놀라 달아나는 새끼양들을 붙들어 안아 보고, 그 볼에 내 볼을 가져다 비비고, 등을 쓰다듬고...... 이렇듯 감격에 잠겼던 것이다. 그것들은 바로 내가 태’줄을 끊은 것들이며, 그것들은 바로 내가 구정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것을 안고 따스한 난로’가를 찾아 갔던 것들이다. 나는 이 새끼양들이 어서 무럭무럭 자라기만 간절히 념원하며, 그것들의 자지러진 울음 소리에 온 조합의 산과 골짝과 최’둑과 밭들이 한결 더 밝아 오는 것을 깨닫는 것이였다." (『백석 평전』 p.370에서 재인용)



한국전쟁 후 북한에서 활동했던 시인이었기에 백석은 철저히 가려진 인물이었다. 이념으로 갈라진 같은 나라 같은 겨레지만 북한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이유로 남한에서는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았던 인물이다. 이념 대결 상태를 지속해온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 때의 이야기다. 그러나 나라가 안정되고 소련이 붕괴된 후 백석은 비로소 일제 강점기 시와 함께 본연의 모습에 조명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백석은 동료 시인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높은 시인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우선, 잘생긴 외모 때문일 것이다. 서울을 시끄럽게 했을 정도의 연애담의 주인공 자야 여사뿐만 아니라, 최정희. 모윤숙 같은 모던 걸이 궁금해하던 대상이 백석이었다. 연애사는 다소 과장된 면이 있지만, 백석의 연애사는 자야 여사가 『내 사랑 백석』을 내면서 더 널리, 세부적으로 알려졌다. 안도현의 『백석 평전』에는 "사랑하면 데리고 살아야지, 부모가 기생이라고 반대한다고 포기했으니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화가 났는지, 3번 결혼하고 돌아왔다고 썼는데 아무리 읽어봐도 2번이다. 2번 결혼하고 돌아왔다는 것도, 증언할 사람이 자야 여사밖에 없다. 자야 여사와 연애를 인정은 하겠지만, 결혼 횟수는 2번으로 줄였다. 평전에 쓴 대로는 백석은 4번 결혼했다." 

백석의 사랑에는 시가 있고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평생을 기다린 시간뿐이었다고 그를 회고하는 시인들이 많다. 백석이 사랑했던 기생 김영한과의 러브 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더한 애절함이 백석을 좋아하는 이들을 슬프게 한다. 또한 ‘자야’라는 애칭과 함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가 탄생하여 평생 만나지 못한 그들의 이별 끝자락에 〈길상사〉가 세워진다. 시세가 수백억 원에 이르는 터와 건물을 포함한 요정 대원각을 자야 여사가 시주함으로써 〈길상사〉로 바뀐 것이다. 이때 자야 여사가 “그까짓 1000억 원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말했다고 하니, 과연 세기의 연애라 할 만하다. 

시인 백석은 인간의 삶에 직접 와 닿는 시어들을 사용하였는데, 그가 쓴 시어들을 보면 우리 전통의 생활과 풍습에 대한 시인의 애정이 드러나는 시들이 많다. 여러 지방의 고어와 토착어, 특히 평안도 방언을 시어로 가져와 썼고 이 책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고어와 토착어, 평안도 방언을 그대로 살려 각주와 해설을 달아 이해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해 놓았다. 본문에서 비슷한 시기의 발표작임에도 단어의 표기를 다르게 한 경우가 있는데 맞춤법을 통일하던 당시의 혼란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고 출판사 측은 밝히고 있다.



『카페 프란스』는 한때 이름 없는 시인이었던 정지용의 시집이다. 그의 시 「카페 프란스」를 그대로 표제어로 썼다. 정지용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하던 시인으로 해방 후까지 시작과 시집 발간에 몰두했으나 6·25 전쟁 중 납북되어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 시단에 모더니즘 시인으로 활동하며 적지 않은 시를 남겼다. 한국문단사에도 큰 업적을 남긴 당시 우리 시단의 대표적 시인이었다. 일도 많지만 6·25전쟁 중 납북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과 사망이 확인되지 않을 때까지는 시인의 이름은 '정O용'으로 표기됐다. 그는 시인이지만 정치색이나 친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어 어쩌면 북한 인민군이 자신들의 선전용으로 납치해 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지용은 특히 윤동주와의 관계가 돈독했고, 윤동주보다 연배여서 선배로 많은 역할과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해방 후 윤동주의 시집 발간에 앞장 서고, 윤동주의 일제 때의 행적을 가장 소상하게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쓴 시보다 윤동주의 시집을 펴내는 데 더 힘을 쏟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는 시인 이상을 문단에 등단시키기도 했으며, 조지훈, 박목월 등과 같은 청록파 시인들을 등장시키기도 한 주인공이었다. 그는 해방 후 경향신문 주간으로 재직하면서 윤동주의 시를 알리는 데 앞장섰으며 윤동주의 시집이 나올 때 윤동주를 대신해서 〈서문〉을 쓰기도 했다. 이 〈서문〉은 한국문단사에는 명문으로 기록되고 있다. 윤동주는 살아생전에 정지용에게 문학적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 인간적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의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은 1935년 발간됐다. 이 시집 『정지용 전 시집-카페 프란스』 1부에 그대로 전재됐다. 이 시집은 윤동주 시인의 유품으로 남겨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만큼 윤동주는 정지용의 시를 아꼈다. 책에는 1936년 3월 19일 ‘동주소장’이라는 글귀가 친필로 쓰여 있다. 윤동주 시인이 평양 숭실중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정지용 시인은 절제된 언어와 우리말을 감각적으로 활용한 신선한 시 작품들을 발표하며 이후 한국 시에 확연한 변화를 일으킨다. 이 책에는 정지용 시인의 작품들을 원본 그대로의 표기를 살려 실은 이유도 그에게서 탄생한 시에 담겨 있는 풍성한 우리말을 가능한 생동감 있게 전달하고자 한 데 목적이 있다고 출판사 측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지금과 다른 표현에는 각주로 설명을 해 놓아 이해에 어려움이 없도록 출판사가 배려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한국문단사에 따르면 정지용 시인은 절제된 언어와 우리말을 감각적으로 활용한 신선한 시 작품들을 발표하며 이후 한국 시에 확연한 변화를 일으킨다. 이 책에는 정지용 시인의 작품들을 원본 그대로의 표기를 살려 실은 이유도 그에게서 탄생한 시에 담겨 있는 풍성한 우리말을 가능한 생동감 있게 전달하고자 한 데 목적이 있다고 출판사 측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지금과 다른 표현에는 각주로 설명을 해 놓아 이해에 어려움이 없도록 출판사가 배려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이 시집 『정지용 전 시집-카페 프란스』는 1부 〈정지용 시집〉, 2부 〈백록담〉 그리고 시집에 실리지 않은 잡지 등에서 새로 발굴한 작품과 〈미수록 작품〉들로 구분하여 실었다. 1부에는 우리 전통의 서정성과 이국정취가 배합된 시들이 좀 더 특징적이라면, 2부는 자연의 신비와 경이로움이 그려져 정지용 시인의 변화도 알 수 있다. 한편 이 책은 가톨릭 신자인 그의 신앙이 드러나는 작품들을 통해서는 그가 받아들인 천주와 성모에 대해서 느끼도록 해 준다.

우리는 대부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그의 시를 처음 알게 됐다. 그가 납북된 이후 그의 시를 소개하는 것도,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도 매우 어려웠던 남북의 극한의 대치 상황 속에서 우리 역시 납북인사인지, 월북인사인지,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 여부가 드러나지 않은 인사들의 이름을 밝힐 수 없었기에 일어난 분단의 비극이 여실히 반영된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친일이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사상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시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터였는데도 말이다. 정지용의 시를 읽으며 당시의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다 보면 한국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그의 삶이 여실히 전달되는 감상을 하게 되면서 마음의 위로도 받을 것이다. 그의 시는 모더니즘 경향의 시들을 주로 발표했지만 향토색 짙은 우리의 언어와 사투리, 자신의 신조어 등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등 시작에 한계를 두지 않았다. 

우리는 대부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그의 시를 처음 알게 됐다. 그가 납북된 이후 그의 시를 소개하는 것도,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도 매우 어려웠던 남북의 극한의 대치 상황 속에서 우리 역시 납북인사인지, 월북인사인지,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 여부가 드러나지 않은 인사들의 이름을 밝힐 수 없었기에 일어난 분단의 비극이 여실히 반영된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친일이나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비교적 사상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시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터였는데도 말이다.



한국시사에 그의 시는 크게 세 시기로 특징이 구분된다. 첫 번째 시기는 1926년부터 1933년까지의 기간으로, 이 시기에 그는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이미지를 중시하면서도 향토적 정서를 형상화한 순수 서정시의 가능성을 개척하였다. 특히 그는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다듬은 절제된 표현을 사용하여 다른 시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을 받는 「향수」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두 번째 시기는 그가 〈가톨릭청년〉의 편집고문으로 활동했던 1933년부터 1935년까지이다. 이 시기에 그는 가톨릭 신앙에 바탕을 둔 여러 편의 종교적인 시들을 발표하였다. 「그의 반」, 「불사조」, 「다른 하늘」 등이 이 시기에 발표된 작품들이다. 세 번째 시기는 1936년 이후로, 이 시기에 그는 전통적인 미학에 바탕을 둔 자연시들을 발표했다고 한국시사는 기록하고 있다. 「장수산」, 「백록담」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들로, 자연을 정교한 언어로 표현하여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고 해서 산수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정지용은 이처럼 참신한 이미지와 절제된 시어로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한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분단 이후 오랫동안 그의 시들은 다른 납북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다 수많은 문인의 청원으로 1988년 3월 비로소 해금되어 대중에게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고, 1989년에는 〈지용 시문학상〉이 제정되어 박두진이 1회 수상자로 선정된 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향수」 중에서


이 책의 표제어가 된 「카페 프란스」는 정지용이 지상(紙上)에 발표한 최초의 작품이자 그가 쓴 초창기 시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향토적 서정의 상징인 「향수」와 상반되는 모더니즘의 색채를 띠고 있다. 


옴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빗두루 슨 장명등,

카페·프란스에 가쟈.


이놈은 루바쉬카

또 한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압장을 섰다.


밤비는 뱀눈 처럼 가는데

페이브멘트에 흐늙이는 불빛

카페·프란스에 가쟈. 


- 「카페·프란스」 중에서



마지막으로 국민시인 윤동주의 시집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서시」의 원제(原題)이다. 윤동주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 실험으로 살해당한 이후 그의 시집을 낼 때 강처중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서문 성격에 맞는다고 해서 서시로 바꾸고 제목까지 함께 바꿔 냈다. 윤동주 시인은 이 시집의 제목을 『병원』이라고 지었다. 초판본에 보면 병원이라는 한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걸 볼 수 있다. 윤동주 시집은 초판본 이후 증보판이 나올 때마다 서문과 발문이 교체되거나 추가되었는데 이 책에는 모두 한곳에 모아 9부에 실었다. 모두가 윤동주에 대한 회고와 존경을 담은 명문들이다.

한글로 시를 쓰는 것이 '죄인 시대'에 윤동주는 오로지 한글로만 시를 썼다. 게다가 윤동주는 자신이 일본식 이름으로 바꾼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시 「참회록」을 남겼다. 시대의 강요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윤동주는 그러지 않았다. 부끄러워하고 참회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그들의 시를 알지 못하는 것 역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윤동주가 사용한 시어들은 '순결하다'는 점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그것은 그의 품성과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이 순결한 시어들은 윤동주의 시를 더욱 빛나게 해준다. 생애가 짧아 많은 시를 남기지 못한 윤동주 시인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고 아쉬움이 많지만 남아 있는 것이라도 잘 보존해 수시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읽는 것만이라도 다행스럽다. 윤동주의 시는 일제 지배에 저항하는 저항 시인의 시어들처럼 격렬하거나 힘이 들어가 있지눈 않다. 순수하고 여린 심성이 드러나는 고결하고 순결한 단어를 자주 사용하기 때문에 더욱 끈질긴 생명력을 갖는 것이라는 생각은 독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도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서의 윤동주는, '시'를 꼽는 설문조사에도 그의 시 몇 편이 꼭 들어간다.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우리나라도 이른바 참여 문학 논쟁이 가열됐다. 이른바 순수문학이냐 참여문학이냐에 대한 논쟁이었다. 70~80년대까지도 이어진 문학논쟁이었다.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닌데 굉장히 오랫동안 서로를 반목할 정도였다. 이때의 논쟁에 참여한 시인이나 문인들의 주장의 끝에 이미 윤동주의 시가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1941. 11. 20)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중 「서시」 전문


저자 : 윤동주(尹東柱)


일제강점기 저항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일제 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족시인. 우리 것이 탄압받던 시기에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썼다. 윤동주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 실을 가슴 아파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사상은 짧은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윤영석과 김룡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윤동주는 청춘 시인이다. 절친한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시 「동주야」에 의하면 아직 새파란 젊은이로 기억되고 있었다. 한글을 구사하면서 작품을 발표한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만주 용정과 경성 신촌 일대에서 문학청년들과 몸을 부대끼며 시를 썼기에 청춘의 고뇌가 담겨 있다. 1925년(9세) 4월 4일,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다. 1927년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했다. 1931년(15세)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16세)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18세) 12월 24일, 「삶과 죽음」, 「초한대」, 「내일은 없다」 등 3편의 시 작품을 썼고 이는 오늘 날 찾을 수 있는 윤동주 최초의 작품이다. 

1935년(19세)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했다. 같은 해 평양 숭실중학교 문예지 〈숭실활천〉에서 시 「공상」이 인쇄화되었다. 1936년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하고 〈카톨릭 소년〉에 동시 「병아리」, 「빗자루」를, 1937년 〈카톨릭 소년〉에 동시 「오줌싸개 지도」, 「무얼 먹고 사나」, 「거짓부리」를 발표했다. 1938년(22세)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서울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했고 1939년 조선일보에 「유언」, 「아우의 인상화」, 〈소년(少年)〉지에 「산울림」을 발표하였다. 처음 윤동주 시들은 노트에 봉인된 채, 인쇄되지도 않았고 신문 지면에 발표되지 않았다. 그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지고 난 후 동문들이 그의 노트에 있던 시를 모아 정음사에서 출판한다. 유해가 안치된 지 3년 후, 그러니까 1948년, 조선은 대한민국으로 국호가 바뀌어 혼란한 시기에 청춘 시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자필로 3부를 남긴 것이 광복 후에 정병욱과 윤일주에 의하여 다른 유고와 함께「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만주 북간도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 「달을 쏘다」, 「자화상」, 「쉽게 씌어진 시」를 발표하였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복역 중이던 1945년 2월 16일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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