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제럴드만이, 세상의 불편한 문제를 대담하게 문학적으로 대면했다. 그가 다룬 문학적 주제는 계급이다. - P14

근대사회까지의 계급 결정 요소는 토지, 자본, 교육이었다. 현대사회에서는 자본, 지식, 사회적 위치에 취향까지 더해졌다. 자본, 지식, 사회적 위치는 입신양명한다면 개인적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있다. 하지만 개천에서 용 나듯 성공한다 해도, 인생을 오로지 즐기는 대상으로 여기고 살아온 사람과의 취향 차이가 좁혀지는 것은 아니다. - P15

"처음에는 당신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급기야 술이 당신을 마신다."
술이 피츠제럴드를 마신 시기가 있다면, 바로 이때부터였다. 그는 이제 술 때문에 불면증은 물론, 자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공황에 빠지는 야경증까지 겪게 됐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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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공개적인 교육과 연구가 수행되는 기관이라는 대학의 이상 말이다. 이 이상은 공동체의 결정과정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능동적인 시민들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지속시키기 위한 자양분을 공급해왔다. - P109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매슈 아놀드가 사심이 개입되지 않은 지식(disinterested knowledge)을 강조한 것은("어떤 결과를 낳고, 어떻게 응용할 것인지 등등 모든 실용적인 고려"를 떠난 비평적 기준에 의해서 결정된 "이 세상에서 알려지고 생각되어진 것 중 최량의 것을 아는 것") 비록 엘리트적이기는 하지만,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 P109

그러나 시장경쟁이라는 조건하에서의 개인적인 선택이 사회적 목적을 이루는 최선의, 심지어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은 시장자유주의의 신화이다. - P112

웬디 브라운이 주장한대로 "인간존재, 공민권, 경제생활, 정치에 다른 형체를 부여하는 대항-합리성"을 분명하게, 의식적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대항 합리성은 약아야 한다. 신자유주의 자체 내의 모순을 끄집어내야 한다. 그런 것에는 시장은 언제나 스스로 조정이 된다는 모순된 믿음도 있지만, ‘보다 깊은’ 비논리성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경제적 목적이 다른 모든 사회적·정치적·문화적 목적보다 우선한다는 신념이다. 바로 이것이 ‘합리성‘이나 거기서 파생된,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가치들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공식적 슬로건들을 비호하고 있다. 더욱이 그 경제적 목적이라는 것은 본래 경제가 복무해야 할 인간 삶의 향상과는 무관하며 오로지 ‘경제적 기능‘에 국한해서 독립적으로 결정된다. - P115

그리고 센이 나중에 <합리성과 자유>(2002)에 썼듯이, ‘시장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두고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로 축소되어버린 자유 개념은,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와 대조적으로, 센이 생각하는 자유란 "한 사람이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할 만한 근거를 가진 그런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실제적 능력"이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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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어떻게 아프고 돌보고 죽을 거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 현장에 가보면 죽음은 ‘어떻게’의 문제라기보다는 ‘언제‘의 문제입니다. 타이밍이 주요 쟁점이 됩니다. 언제 죽느냐, 언제까지 살 수 있느냐. 이 타이밍을 제대로 측정해야 어떤 치료를 할 것인지, 시설로 이동을 할 것인지, 가족이나 보호자는 어떤 준비를 할 것인지 등등이 정해집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연명의료결정법이 있으니 ‘내가 원하는대로 죽을 수 있겠지‘ ‘존엄사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은 다시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죽음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를 위시한 실존적 결단이기보다는 당사자들(환자·보호자·의료진)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난한 협상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 P54

이제는 ‘우리는 다르게 죽기로 했다‘ 같은, 잘 죽을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삶 못지않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더 밝고 진지하게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 P58

연명의료 중단이 윤리적으로 문제 없는지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수많은 서류작업과 행정 절차들이 오히려 의료진과 병원 관계자들에게 부담을 주어 ‘그냥 하지 말자‘는 식으로 일이 흘러 가게 만들어요. 환자가 연명의료를 중단해달라고 할 때 임종 과정에 들어갔다는 것을 판단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래서 의사 혼자 판단하지 말고 윤리위원회를 만들어서 판단하라고 하는 거죠. 가장 쉬운 방법이거든요. 연명의료 중단을 다수결로 결정하면 그건 윤리적인 것이라고 길을 열어놓은 것이죠. - P71

현재는 윤리위원회가 대학병원이나 대형 병원에만 있습니다. 권역별로 공용윤리위원회가 만들어지면 훨씬 더 많은 병원이 참여할 수 있을 텐데 아쉽습니다. - P72

보호자 입장에서는 ‘불효를 저지른다’는 생각이 들 수 있어요. 제가 그때마다 꼭 하는 말이 있어요. 이 계획서를 작성했다고 해서 환자를 포기했다거나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환자가 더 편안하게 생의 마지막을 보낼 수 있도록 치료의 방향을 ‘완화’로 바꾼 것이니 죄책감 갖지 말라고요. - P74

연명의료결정법의 취지대로 자기결정권이 존중될 수 있도록 의사결정 능력이 있을 때 논의가 되고 작성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 P75

의사도 사람이라 취약하고 흔들리거든요. 거기다 죽음과 삶을 바로 앞에서 목도하기 때문에 환자의 상황이 자기에 대한 불안으로 전이돼요. 죽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려니 그게 의사라는 정체성에 대한 배신이기도 한 거예요. - P82

보호자가 잠적해도 장기요양보험등록이 되면 한 명당 정해진 수가를 받을 수 있으니 냉정하게 말하면 일종의 ‘죽음 산업’ 입니다. 이게 사람들이 악랄해서가 아니에요. 사회가 급속히 변하면서 대비하지 못한 일을 사실상 요양원이란 공간으로 우리 모두가 몰아 넣은 거죠. - P86

‘우리’의 이야기를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런데 그동안은 목숨 살리는 거 하나만 이야기해왔기 때문에 이런 논의가 우리 사회에 전무했죠. 의료인들도 마찬가지죠. 마치 십자군전쟁 때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 한마디에 무조건 뛰어갔던 것처럼 살리는 일에만 몰두해요. 좀 도발적인 질문이 필요한 때인 거 같아요. 그렇게 생명이 중요한가,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는가, 죽음이 꼭 나쁜가에 대한 이야기들이요.

사실 우리는 의학을 큐어(cure)로만 이해하지만 의학 안에는 케어(care)도 있고, 환자를 편안하게 하는 컴포트(comfort)라는 가치도 있습니다. - P87

간병이 특히 사각지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의사는 치료를 하는 사람, 간호사는 의사의 치료 지시를 수행하거나 환자-의료진 간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환자의 일상은 치료행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화장실도 가고 밥도 먹고 옷도 입고 세수도 하고 산책도 하고 대화도 해야 하죠. 이런 일상적 돌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 P90

호스피스에서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 못지않게, 때로는 그보다 더 많이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호스피스 단계 이전에는 ‘고통‘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병의 진단과 치료를 거치는 과정에서 고통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전문가들이 부족하다. 사회적으로는 환자와 가족들이 가지고있는 질병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질병은 오직 치료해야 할 대상이며 삶의 장애물로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환자가 고민하는 삶의 의미는 파편적으로 부서지거나 위축되고 만다. - P97

호스피스를 담당할 완화의료 전문가의 확충과 말기돌봄 시설의 개선을 지속적으로 정부에게 요구하자.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가능하면 끝까지, 고통을 최소화하여, 의미 있게 잘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잘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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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컴퓨터는 또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술의 생태적 영향력을 무시하는 대응이다. 기술은 절대로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기술은 하나의 환경 속에 있는 모든관계를 재편성하여, 어떤 점은 개선시키고 또다른 측면은 악화시킨다. 컴퓨터는 특정한 유형의 학습방식만을 홍보하고 지지하면서 다른 방식은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기술비평가 닐 포스트먼이 지적한 바와 같다. "우리가 컴퓨터에 관해서 고려해야 할 점은, 교육적 도구로서 그것이 효율적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컴퓨터가 학습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떤 식으로 바꾸어놓고 있는가 하는 점을 알아야 한다." - P98

만약 아이들이 감독을 받지 않은 사회적 활동에 발을 담궈보지 못한다면, 그들은 어른이 된 뒤에도 공민적 책임감의 바다에서 결코 헤엄을 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아이들이 흙을 파고, 거미, 벌레, 새, 그리고 포장이 되지 않은 운동장 한구석에 나 있는 잡초를 발견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자연을 탐험하거나 고마워하고 보호할 가능성이 적을 것이다. - P100

랭던 위너는 《고래와 원자로》의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자기값어치를 하는 기술철학이라면 어떤 것이든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 우리는 최량의 인간성과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계에 부합하도록 현대의 기술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학교들은 오히려 그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 - 우리는 어떻게 기술이 그 역량을 마음껏 펼치고, 기술이 건설할 세계에 조화될 수 있도록 인간에게 제약을 가할 것인가? 그 결과 우리 아이들은 텅 빈 내면으로 불구가 된 삶을 물질로 채우려는 헛된 시도를 되풀이하면서 이 소외의 과정(자기 자신과 타자, 지구를 하나의 수단으로 대하는)을 계속해서 감내해야 할 공산이 크다. 아이들이 그들의 개인적·사회적 문제들을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거나 공동체 구성원들로부터 용기와 지지를 구해서 풀어나가려고 하지 않고, 마약, 총, 인터넷상의 혐오 표출, 그 밖에도 다른 강력한 ‘도구‘들에 의존하여 해결할 때, 우리는 놀라서는 안될 것이다. 결국 바로 그것이 우리가 가르친 것이니까 말이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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