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하고 모호하면서도 강렬한 은유를 심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에는 서래마을에서 살며 고급 외제차를 굴리고 수시로 사람들을 불러 와인 파티를 여는 교양 있는(?) 벤(스티븐 연)이 등장한다. 벤은 F. S. 피츠제럴드 단편소설 [부잣집 아이] 전형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우리가 까다롭게 구는 일을 그는 부드럽게 대하며 ‘우리가 신뢰를 보일 때 그는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부류다. 부자로 태어나지 않고서는 그것을 이해하기 아주 어렵다고 피츠제럴드는 화자의 입을 빌려 말했다. - P54
영화의 모티브가 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에서 거슬러 올라가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타오르다Barn Burning』에서 실마리가 될 글귀를 찾았다."다른 사람에게 쇠나 폭약이 그렇듯, 아버지에게는 불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 깊이 내재한 주요한 요소, 그것이 없다면 숨을 쉬어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요소를 온전히 지켜 낼 수 있는 무기였다는 것을, 그래서 존중하고 때때로 신중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윌리엄 포크너, 세계문학단편선02, 현대문학, 2020년) - P56
뿌리에서부터 질문하기 - 김종철 선생님의 창간사, 1주년, 10주년, 20주년 권두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품고 있는 맹목적인 숭배나 신뢰는 과학은 거짓이 없고 실패가 없다는 전연 근거 없는 미신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런 터무니없는 미신이 널리 유포된 데에는 이 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비역사적 사고가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과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과학의 진리에 대한 관계는 언제나 잠정적이고 모색적인 것이었지 결코 항구적인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진정하게 과학적인 태도는 그러니까 늘 열려 있는 겸손한 태도일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현재 능력이나 인식방법으로써 포착할 수 없는 경험이라고 하여 그것을 무시하거나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참다운 과학정신과 인연이 먼 태도라 해야 옳다. - P113
따지고 보면, 현대 기술문명의 기저에는 정복적 인간의 교만심이 완강하게 버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도를 따르는 순리의 생활을 우습게 여기면서, 모든 것을 자기자신의 통제와 조종 속에 종속시키려고 하는 야만적인 폭력이 끝없이 창궐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자연적 환경이든 인문적 환경이든 나날이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와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남고, 살아남을 뿐 아니라 진실로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 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과 같은 생태학적으로 건강한 생활을 조직하는 일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생활의 창조적 재조직이 가능하려면, 자기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겸손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정신적 자질을 갖추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보인다. (창간호, 1991년 11-12월) - P116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에서 《녹색평론》은 단순한 기술이나 ‘녹색산업주의‘로는 문제 해결이 근본적으로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아직은 소수의 의견을 대변하고자 노력해왔다. 오늘날 우리의 지배적인 삶의 양식, 즉 산업문화가 근본문제이며, 그 산업문화를 진보나 발전으로 보는 근대화 이데올로기,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이분법적 유물주의의 세계관 - 이런 것이 본질적으로 재고되지 않는 한, 이 전대미문의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말하려고 하였다. - P118
그러나 이러한 구조에 다가가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그동안 개발 이데올로기 또는 산업문화의 지배하에서 우리자신도 모르게 두텁게 쌓여온 인간중심주의적 교만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되는 것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주생명과 내 생명이 다른 것이 아니며, 만물이 나의 부모형제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보편적으로 확대된 문화를 누릴 필요가 있다. 불필요하게 생명체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없이는 산업주의적 생활방식에 대한 중독상태로부터 벗어나올 수도 없고, 설사 의도적인 노력을 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금욕적 생활의괴로움만을 안겨주기 쉬운 법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와 기쁨으로 하지 못하는 행동은 뿌리가 약할 수밖에 없다. - P119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생명을 부정하는 모든 사회적 목표와 권력체계를 폐기해야 하고, 경쟁의 논리에 세뇌된 우리 자신의 내면을 해방시켜야한다. 일찍이 미국의 문명비평가 루이스 멈퍼드가 갈파한 바와 같이,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장래는 결국 한 가지 조건에 달려 있다. 그것은 "모든 수준에서 또 온갖 종류의 공동체에서 권력의 강화가 아니라 상부상조와 애정 어린 연대와 생명의식의 강화를 통해서 이 행성이 생명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재천명하는 방향으로 살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는 조건이다.(제7호, 1992년 11-12월) - P120
지난 10년 동안 《녹색평론》을 통하여 우리가 일관되게 이야기해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끝없는 성장, 팽창을 내재적인 요건으로 할 수밖에 없는 산업경제, 산업문화가 물러나고, 새로운 차원의 농업 중심 사회가 재건되는 것만이 생태적, 사회적 위기와 모순을 벗어나는 유일하게 건강한길이라는 논리였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이 근본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해지고, 또 평등하게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공존공영(共存共榮)이 아니라 공빈공락(共共樂)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는 것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 P122
따라서 타자들 - 사람이든 아니든 - 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우리가 인간다운 위엄과 자유와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난하게,겸손하게 사는 도리밖에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내가 목소리를 낮추어야 딴 사람이 말을 할 수 있고, 사람이 조용해져야 새들이 노래를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 P122
그러나, 실제로 미국적 생활방식 또는 미국적 문명이란 대체 오늘날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 전체 인구의 5%에 해당되는 인구가 세계 전체 자원의 대부분을 독점적으로 점유, 소비함으로써 유지되고 있는 그러면서도 인종적, 계층적, 성적 불평등의 문제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이른바 미국적 생활방식이란 결코 부러워할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전체의 평화와 생태계를 위협하는 재앙일 뿐이다. 석유의 낭비를 무한정 자극하는 미국적 생활방식이 아니라면 중동을 비롯한 세계 도처의 무고한 사람들의 자주적인 삶이 터무니없이 유린되지도, 토착민들의 땅이 무참히훼손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 P127
일찍이 간디는 서구문명에 대하여 그것은 ‘문명‘이라는 이름에 값할 만한 게 못된다고 일갈한 바 있다. 간디에 의하면, 참다운 문명이란 자발적으로 물욕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 P128
간디는 사람들의 기본욕구의 충족을 위해서는 이 지구는 극히 풍요로운 곳이지만, 탐욕 앞에서 지구는 지극히 결핍된 곳이라는 뜻의 말을 하였다. 이 지상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 이보다 더 간명한 진리를 드러내는 말은 없을 것이다. - P128
《녹색평론》 독자들 중에는 ‘평론‘이라는 이름에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평론‘이라고 굳이 고집해온 까닭이 없지 않다. 그것은 이 잡지 창간의 주요 목적이 ‘저항‘에 있었기 때문이다. ‘평론‘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대상을 상대화하면서 철저히 의심하고, 질문하는 행위, 따라서 근원적인 의미의 저항을 뜻한다. 처음부터 《녹색평론》이 의도한 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 한국사회와 세계 전체가 직면한 위기에 맞서서, 이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질문하는 것이었다. 올바른 질문을 통해서만 올바른 방책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에는 실로 다양한 의견 - 현실에 대한 분석과 진단, 해법들이 개진되고 있다.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분석, 진단, 해법들이 과연 안심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좌우의 이념과 논리를 가지고는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정당하게 설명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다는 판단 밑에서 작업해왔다. - P131
그러나 문제는 그 ‘경제문제‘가 이제는 ‘에콜로지‘를 고려하지 않고는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국면에 지금 우리 모두가 처해 있다는 점이다. - P133
드디어 젋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마지막 권을 이번주에 끝냈다. 마지막 2권은 너무 숙제처럼, 대충 읽었다는 것이 문제.2013년 작품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정용준 작가의 당신의 피가 가장 와닿았다. 어머니를 살해한 아버지가 이십사년만에 아들에게 연락하고, 아들이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병원 신장투석실에 치료를 받으러 불쑥 찾아온다. 알고보니, 그는 교도소에서는 치료할 수 없는 신부전증을 앓았던 것.일주일에 3번씩, 한번에 5시간 동안 기계를 통해 피를 여과시켜 다시 몸속으로 집어넣은 혈액투석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오래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2~3년 동안 혈액투석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혈액투석하실 때 병원에 한번 갔던 기억이 난다. 자주 못뵙다가 오랫만에 뵈었는데, 그때의 충격이란, 늘 불호령을 내리는 무섭던 할아버지가 목소리에 힘이 없으시고 몸도 작아지셨고 기계에 의지하여 피를 거르는 일은 일주일에 3번씩 해야 살 수 있다니. 그때의 할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작품 속 아들은 그 사건과 아버지라는 존재가 이미 자신의 기억 속에 없으며, 자신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아버지라는 존재가 주기적으로 자기 앞에 나타나자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감정이 다름을 알고 혼란스러워 한다. 아무런 존재도 아니라고 되뇌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흔들리는 그 마음, 이해가 갈 것 같다.신장투석을 통해 더러운 “피”를 여과하여 몸속에 새로운 깨끗한 “피”를 집어넣는 것과 아버지와 같은 “피”라는 혈연관계를 부인하고자 하는 작중 화자의 심리상태가 잘 어우러진 단편이다.
이 포스터 보니 바로 박막례 할머니 책 표지 떠오른다. 이 포스터 패러디했나 보다!!
절망감까지 가지 않고 아쉬움을 느끼는 데 그쳤던 것은 앞선 경험들 덕분이다. 이전에 방문했던 병원에서 "원인을 못 찾으면그냥 아픈 대로 사는 법을 익히는 것도 방법일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 P75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은 환생을 믿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유난히 용감한 수컷 사자는 인간 남성의 모습으로 환생할 수 있는 반면, 용감하지 못한 남성은 여성의 몸으로 환생할수 있다. 즉,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은 부족한 남성성에 대한 벌이라 여겼다. 심지어 아버지의 정액이 충분히 강하면 남자아이를 낳지만, 약하면 여자아이를 낳는다고 믿었다. 여성의 평등한 정치 참여 가능성을 이야기한 플라톤조차 여성을 남성의 결핍이자 잔여, 나약함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 P93
19세기에 에테르 마취제가 개발되면서 드디어 무통분만이 가능한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일부 의사들이 반대했다.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것" (창세기)이라는 성경 구절을 근거로 무통분만이 신의 뜻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신이 여성에게 내린 원죄에 대한 처벌을 의학이 감면해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 P103
의료에서 여성의 통증 호소가 좀 더 쉽게 심인성으로 취급되는 것은, 여성을 대하는 사회적 태도의 반영이다. 여성의 경험과 말은 사소하고 이성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문화가 아직도 팽배해 있다는 뜻이다. 여성은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존재라는 규정도 여전히 견고하다. 여성이 불편함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그야말로 ‘히스테리’(이 단어는 자궁을 뜻하는 그리스어 ‘히스테리아hystera‘에서 유래했다)라고 비하해온 그 뿌리 깊은 규정이 여전히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 P106
아픈 사람을 차별하는 표현. 나도 모르게, 농담이라고, 걱정한다고, 자주 쓰게 되는 것 같다. 특히, 건강 중심성 표현들..
가족과 지인들은 갑상선암 수술을 독촉했지만, 결정하기 어려웠다. 의사들은 숫자와 데이터로만 내 몸을 읽는 듯했다. 여러 검사에도 불구하고 증세와 통증은 그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원인이 없다는 이유로 내 증세와 통증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되기도 했다. 갑상선센터 의사는 내 몸에서 갑상선만을, 내과 의사는 내 몸에서 현기증만을 보는 듯했다. 의사들 각자의 전문 분야가 있어서겠지만, 총체적으로 연결된 내 몸을 보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의료 전문인은 의사지만, 결국 내 몸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며 고민하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고 두려웠다. - P26
식이요법을 지도해준 분은 "질병은 몸에 찾아온 손님"이라며, 극진히 대접해서 떠날 수 있게 해주라고 했다. 질병은 죽음으로 쉽게 미끄러지지 않도록 몸에서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며, 몸을 쉴 수 있게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 덧붙였다. 엄격히 생활을 관리하며 사는 게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몸을 이토록 극진히 돌봐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음을 떠올리며, 소중한 시간으로 여기려 했다. - P28
우리는 죽음을 떠올려봄으로써 삶을 다시 묻고 이해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사색이 확산되면서 중환자실이 아니라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려 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죽음의 질을 고민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질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질병을 질문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혜안을 얻을 수 있는지 이야기해볼 때다. 동일한 질병도 사회적 준비와 개인의 지혜에 따라 다르게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사소하고 평범한 질병 이야기를 꺼내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P32
따라서 건강만을 중심에 두는 것은 아픈 몸이 평등하게 함께 사는 과정을 방해한다. 아픈 몸이 동정과 시혜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의 주체로 온전히 살아가려면 건강한 몸이 중심이고, 아픈몸이 주변이어서는 안 된다. 건강을 선으로 규정하고, 질병을 절망과 악으로 규정해서도 안 된다. 건강한 몸과 아픈 몸 사이에 발생하는 위계가 해체될 때, 아픈 몸도 차별과 배제 없는 삶을 누릴수 있다. - P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