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부터 강렬하다. 역시 정희진 선생님이다. 강렬함을 금방 망각하는 인간이기에 자주 읽어야 한다.
"읽을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것"이라는 김영하 작가의 말을 내 식으로 바꾸면 책은 보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 P11
공부, 자기 언어를 갖는 것은 피억압 집단에게 가장 필요한 투쟁이다. 남성, 백인 문화는 피억압자의 언어를 두려워하고, 이는 여성 혐오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여성들 스스로 내면화하고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제 페미니즘은 가치관이 아니라 자기 계발의 하나가 된 것뿐일까. - P14
비평 자체의 독자성, 내용, 다양성에 따라 그 사회의 창작 활동은 큰 영향을 받는다. 창작과 비평을 나누는 사고는 창작이 상상이라는 통념 때문이다. 하지만 ‘상상‘도 사회 안에서 기존 언어를 기반 삼아 나오는 것이다. - P15
문학은 현실에 대해 말하되, 현실을 다르게 보이게 만든다. 하나의 비유는 열 개의 해석을 낳는다. 비유를 통해 기존 개념은 이동하고 분화한다. 전이(轉移), 전의(轉意, 轉義)다. 은유(metaphor)는 meta(over) + phora(carrying)를 합친 단어로서 ‘뜻을 나른다‘는 의미다. 시인과 소설가들은 오만할 자격이 있다. - P15
내게 글쓰기는 입장과 표현이 가장 중요하다. 장르가 곧 내용인 것은 분명하지만 입장 없는 글쓰기는 어느 장르나 불가능하다. 창작으로서 비평, 예술로서 비평을 지향하는 나는 서평과 그 외 글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개는 서평, 독후감에 형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 P15
줄거리 요약이 분량의 반을 차지하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줄거리 정리는 독후감을 쓰기 전에 해야 할 일이다. 세미나나 공부 모임, 대학원 수업에서 읽을거리를 요약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식으로는 공부가 늘지 않는다. 텍스트의 내용과 맥락은 참석하기 전에 숙지하고, 모여서는 ‘토론‘을 해야 한다. - P16
서평 쓰기의 첫 번째 훈련은 글의 서두에 한두 줄 정도로 책의 내용을 집약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책의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고, 그것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해야 한다. 육화된 책의 내용을 몸속에서 ‘뽑아내는’ 작업이다. - P17
불안한 상황 자체는 병이 아니다.《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는 책 제목 그대로 불안에 대한 재해석이다. 불안이 질병일 경우에도 단지 아픈 것이지 ‘미친‘ 것이 아니다. - P27
피억압자이면서 억압자들을 치료했던 파농의 딜레마는 이후 그의 탈식민주의 사상의 핵심이 되었다. ‘치료‘(해방)란 예전으로 돌아가는 정상으로의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이다. 고문 경찰 스스로 자기 위치성을 사유하지 못하면 치료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극심한 불안이 따른다. - P27
폭력을 증언하다 보면 여러모로 외로워진다. 나 또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성으로서 내가 겪은 폭력을 증언해 왔으나 종종 아득해졌다. ‘피해자‘로 호명되는 순간, 내가 가진 다른 정체성들은 빠르게 사라진다.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사건만큼이나 나 자신 또한 납작해지는 일을 감수해야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료하게 나뉘고 선과 악의 구도가 명확해질수록 또다시 외로워진다. 내가, 아니 우리가 겪은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나는 모순적인 두 가지 상태를 동시에 얻으려 애쓰고 있다. 피해를 인정받되, 피해자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받기. 이것이 내게 고통이었음을 말하되, 나를 무너뜨릴 정도의 고통은 아니었음을 말하기. 별일이 있었으되, 별일이 아니었음을 드러내기. - P161
나는 사람들이 명료해지기보다 함께 흔들리길 바란다. 연루되길 바란다. 선 긋고 피해자와 자신을 분리하는 대신 자신이 이미 선 안에 있던 존재임을 깨닫기를 바란다. 이것은 더 어려운 일이겠지만, 세상에 많은 좋은 것들이 그렇듯 더 보람찰 것이다. - P162
주디스 허먼 Judith Herman은 그의 책 『트라우마』(2012, 열린책들)에서 성인기에 외상을 경험하면 이미 형성된 성격이 파괴되지만, 아동기에 외상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 성격이 파괴되는 것만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 P172
여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일대일 로맨틱 연애 서사의 해로움을 절감했다. 우리는 한 사람과의 로맨틱한 사랑에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한다. 애인은 성적으로 매력적이면서도, 부모처럼 헌신적으로 날 돌보아 주어야 하고, 친구처럼 흥미로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이 일관적으로 지속되길 바란다. 사랑의 열정은 무척 달콤하고 짜릿한 것이지만 금세 사라지고 흘러가 버리며, 사실 바로 그 속성 때문에 달콤하고 짜릿하다. - P182
사랑을 받는 일은, 사랑을 주는 이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거나 곁에서 사라지면 멈춰진다. 사랑을 주는 일은, 우리 마음안에 타인을 향한 사랑이 남아 있는 한,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히 외로워지지 않는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 마음산책)에서 신형철이 썼던 글을 인용하며 이번 장을 마무리하고 싶다.이제 여기서는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이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P186
이삼십 대 여성은 도대체 왜 우울할까. 시민건강연구소 젠더와건강연구센터 김새롬 연구활동가(예방의학 전문의)는 "이삼십 대 여성은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과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 사이의 균열이 가장 큰 세대, 그래서 추락하기도 쉬운 세대"라고 봤다. - P191
그러나 반복되는 가난은 공동체가 베푸는 호혜마저 두렵게 만든다. 호혜를 되돌려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에도 정말 돈이없을 때는 타인의 도움을 받기가 어려웠다. 그것을 갚을 수 없을 같았다. 또한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에 그 상황이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한 달 뒤, 두 달 뒤를 바라볼 수 있는 비상금이 쌓인 후에야 조금씩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가난은 일상의 모든 부분에 침투한다. 필요한 소비에도 죄의식을 느끼게 하고, 인간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삶을 개선해 보려는 모든 시도를 주저앉힌다. - P215
"지하철 1호선에서 화가 난 할아버지들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세상에 참 나 말고도 아픈 사람이 많다. 나만 되게 힘든 줄알았는데, 아프고 힘든데도 어찌해야 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구나.’ 특히 앞 세대를 보면 더더욱 느껴요. 아빠들이 그렇게 술 마시고 뭐 부수고 그러잖아요. 저 사람들이 참 외롭고 아프고 어찌할 바를 몰라서 분노하는구나….불안이나 결핍이 오래 쌓이면 망상이나 피해의식이 심해지죠. 분노도 강해지고, 어떤 사람은 분노로, 어떤 사람은 무기력으로, 양극단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여자들 나와서 행동하잖아요. 혜화역 시위에서 목소리 내잖아요. 폭발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많이 쌓였구나 싶어요.항상 생각하지만 여자들이 똑똑해요. 지금 이삼십 대가 병원에 찾 - P221
아가고 심리 상담하고 책 찾아보고 하는 것이 ‘내게 문제가 생겼다‘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만큼 예민한 촉이 있기 때문이에요. 부정적으로 기사화되는 게 많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치료는 빨리 시작할수록 좋은 건 맞으니까요. 자기 가정사나 사생활도 거리낌 없이 쓰잖아요. 그런 용기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거죠.어떻게 내가 나의 보호자가 될 것인지, 스스로를 컨트롤하면서 자립할 수 있을지 고민해요. 그럴 때 부모에게도 의지해 보고, 남자친구나 회사에도 의지해 보지만 ‘결국에 다 소용없구나, 내 주관대로 살아가야지‘ 하고 가장 먼저 깨우치는 사람은 이삼십 대 여성인 것 같아요." - P222
산다는 이 일초판이 출간된지 30년이 넘었고, 책에 수록된 최초의 글은 무려 45년이 지난 것도 있지만, 전혀 낡은 느낌이 없다. 이토록 쓸쓸하면서도 최승자 시인을 계속 살게 한 것은 무엇일까. ‘담배와 커피와 외로움과 가난과 그리고 목숨을 하루종일 죽이면서도 그대로 살아있기로’ 한 것은 무엇일까.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실체화된 죽음이, 관념의 죽음에 대한 환상을 죽인 것인가. 삶과 연결된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잊어버리기에 지쳐, 마침내 몸과 마음이 쓰러져 누울 때, 그때 고요히 떠오르는 질문들이 있다. ‘나의 삶이 이래도 될까?‘ 하는 질문들이. 그때야말로 그 한 해의 삶의 의미를, 삶의 결실을 거둘 때이다.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그야말로 뿌린 대로 거둘 때이다.한 해의 끝에서 녹초가 된 몸, 녹초가 된 정신과 더불어 고요히 떠오를 그러한 질문에 합당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언제나 또 한 해를 새로이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986) - P99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게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그점에서 보자면 나는 낭만주의자이다. 그러나 그 단 한 가지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믿지 않는 것들 속으로 천연덕스럽게, 어기적거리며 되돌아온다. - P128
그 점에서 보자면 나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내가 낭만주의적 사실주의자, 혹은 사실주의적 낭만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면, 어쩌면 나는 시를 쓰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행복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행복에 대한 믿음이있었다면, 그 믿음만으로도 나는 시를 물리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 P129
그러나 개인적 정체성을 가진 한 개인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훨씬 생산적이지 않을까. 그렇게 할 수 있는데도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제한을 가하는 것은 사회 전체로 볼 때 비생산적인 일인 동시에 어느 시점에 가서는 자신의 전 인생에 대한 회의까지 불러올 수있다. - P147
그리고 그 더 큰 싸움의 출발은 분명 여자 자신의 의식적 자각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 P148
벽때때로 불안이 나의 목을 조른다. 그럴 때면 벽에 붙은 마야콥스키의 사진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죽는 수도 있어, 죽는 방법도 있어"라고 말한다. 나는 로르카를 힐끗 바라본다. "죽임을 당하는 방법도 있긴 있지"라고 그는 말하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의 입술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윽고 나는 파베세를 생각한다. 산다는 이 일, 산다는 이 수수께끼로 물불 안 가리고 괴로워했던 그를. 그러면 불안이 한번 더 거세게 나의 목을 조른다. 이러고 누워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당장 바람 부는 거리로 나가 정처 없이 쏘다녀야만 할 것 같은 느낌. 그러나 나는 내 목을 조르는 불안의 모가지를 한 손으로 비틀어 쥔 채 여전히 누워있기만 한다. - P20
그리고 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년필은 서랍안에 녹슨 채 그대로 들어 있고, 새 울음소리는 책갈피 속에 더러더러 끼어 있고, 닫힌 책과 열린 책 사이로, 말하는 입과 듣고 있는 귀 사이로 시간은 허망하게 빠져나가고, 담배와 커피와 외로움과 가난과 그리고 목숨을 하루종일 죽이면서 나는 그대로 살아 있기로 한다. 빙글빙글 넉살 좋게 웃으며 이대로, 자꾸만 틀린 스텝을 밟으며 이대로. - P22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내가 이전에 죽음에 대해 품고 있었던 막연한 환상, 어떤 해결 혹은 해답에 대한 기대가 깨져버렸다. - P51
낳그리고 내가 그리도 오랫동안 죽음에 환상과 기대를 품어왔던 것은 내가 나의 삶에서 충분한 만족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나는 실제의 한 죽음을 통해, 죽음은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죽음은 다만 한 문제 자체를 도중에 종결시켜버릴 뿐이며, 더 나아가 그 문제에 해답이 없을지도 모르며, 더 더 나아가 아마도 그런 문제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이전엔 죽음이란 내게 막연하게나마 어떤 관능과 연결된 것이었다. 집요한 불면 끝에 어느새 가볍고 감미롭게 찾아드는 달콤한 잠처럼, 혹은 보다 적극적으로는 고통의 결정에서 느끼는 쾌락처럼, 죽음은 깊고 짙고 강렬하며 무르익은 관능과 연결된 것이었다. - P52
그러한 행사 절차 가운데에는 내가 여태껏 기대하고 있었던 감미롭고 관능적인 어떤 충족감, 해결감 따위는 없었다. 어쩌면 나는 삶의 편에서 죽음을 짝사랑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죽음의 관념은, 어머니의 실제의 죽음을 통해 죽임을 당했다. - P53
어머니가 내게 남겨주고 간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갖고 있었던 죽음의 관념 혹은 죽음의 감각을 산산이 깨뜨려 나로 하여금 이 일회적인 삶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게끔 해주고, 그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잘살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용기와 각오를 갖게 해준 것이리라. - P53
이제 나는 무차별적 불행의 이상화 대신에 선택적 행복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
존 스타인벡은 우리가 어디를 향해 떠나는가가 중요한 게아니라 우리가 어디로부터 떠나는가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 P57
글쎄, 시인 이성복의 시(다시 정든 유곽에서)를 인용하자면, 철들면서 변은 변소에서 보지만마음은 변 본 자리를 떠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만일 변 본 자리가 우리의 현실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왜가볍게 떠날 수가 없는가. 그것은 떠나기 전에 그 자리를 치워야 하는데, 그 치운다는 일이 겁나게 힘들고 어려워 그냥 그 자리에 퍼질러앉아 있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P58
어쩌면, 행복이란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불행이 없는 것이 행복이라는, 조금은 쓴, 그러나 넉넉한 인식뿐일는지도 모른다. - P59
‘문을 찾을 수 있어 그 앞에서 울 수 있는 자는 아직 행복하여라. (기유빅)’ - P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