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적인 경험, 실상 쓰라린 경험을 통해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있었다. 모든 연애는 처음엔 삶을 다채롭게 변화시켜 사랑스럽고 가뿐한 모험으로 만들어주지만, 점잖은 사람들, 특히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모스크바사람들에게는 아주 복잡한 문제로 커져버려 결국에는 곤혹스럽게 되어버린다는 것을. 그렇지만 새로운 매력적인 여자와 만날 때마다 이런 경험은 어쩐 일인지 기억에서 전부 사라지고, 그냥 삶을 즐기고 싶었다. 그러면 또 모든 일이 순탄하고 유쾌하게 여겨졌다. - P11

오레안다에서 그들은 교회 근처의 벤치에 앉아 말없이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아침 안개 속에서 어렴풋이 얄타가 보였고 산꼭대기에는 흰 구름이 걸려 있었다.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고 매미들만 소리 내 울었다.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단조롭고 먹먹한 파도 소리만이 우리를 기다리는 평온과영면에 대해 말해주고 있었다. 이곳에 알타도 오레안다도 존재하지 않던 때에도 그렇게 아래쪽에서는 파도 소리가 울렸을 것이다. 지금도 그 파도 소리가 울리고 있고, 우리가 모두 사라진 후에도 그렇게 무심하고 먹먹하게 - P26

계속 울릴 것이다. 이런 항구성에, 우리들 각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 완전한 무관심 속에, 아마도 영원한 구원의 약속, 지상에서의 삶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완성을 향한 무한한 진보의 약속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여명을 받아 더 아름다워 보이는 젊은 여인과 나란히 앉은 구로프는 바다와 산, 구름, 넓은 하늘이 내다보이는 풍경에 흠뻑 빠져 있었다. 구로프는 우리가 존재의 고결한 목적과 인간적 존엄을 잊은 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이 실상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고 생각했다. - P28

기차는 빠르게 떠났고, 그 불빛도 곧 사라졌다. 잠시 후에는 기차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이 달콤한 미망과 광기에서 빨리 벗어나라고 모든것이 일부러 꾸며진 듯했다. 플랫폼에 혼자 남겨진 채 멀리 어둠을 응시하던 구로프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느낌으로 귀뚜라미 우는 소리와 전선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인생에 또 한번의 무모한 장난 혹은 모험이 있었으며, 이제 이것도 다 지나가고 추억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심란하고 슬펐으며 가벼운 회한을 느꼈다. - P31

그런데 이제야, 머리도 세기 시작하는 지금에 와서야 난생처음으로 진짜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 P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년 4월 북촌 나들이 & 서점 비화림

4월이 되니 하늘과 공기가 3월과 다르다. 날이 좋아 오랜만에 산책가기로.

3월 한달 다이어트 하느라 주말 외출 자제했고, 고기 과일 과자 빵 라면 밀가루 음식 안먹고 회사에서 점심을 거의 샐러드만 먹었다(그래도 맥주는 가끔 먹었지 ㅎㅎ).

다이어트 끝나면 가장 먹고 싶은 건 라면! 이었다. 라면 좋아하는 1인이라. 최관의 선생님 책에 나온 정독도서관 얘기하다 추억의 정독도서관과 라땡 생각나서~ 다이어트 종료 기념으로 맛있는 라면 먹으러 북촌 산책 갔다.

10시에 라면 먹고 정독도서관 마당 잠시 산책. 아직 벚꽃이 안피어서 썰렁하네. 목련만 살짝 피고. 삼청공원까지 걸어갔다 다시 계동으로 내려와서 자주가는 낮맥 까페 가기 전에 근처에 비화림이라는 서점이 있길래 찾아가는데. 낯익은 길이네. 가보니 요조님의 책방 무사 자리다. 제주도 가기 전에 있던. 입구에서 밥 먹는 고양이들. 책 사고 까페 갔는데 이런, 오늘 주인장 개인사정으로 휴일:;; 아쉽지만 그냥 집으로..

지하철에서 우리가 우리를~ 잠깐 읽는데 추천사만으로도 울컥…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괭 2022-04-03 18: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게 진정 라면인가요? 너무나 맛있어 보입니다..ㅜㅜ

햇살과함께 2022-04-03 19:45   좋아요 2 | URL
엄청 맛있습니다! ㅎ 짬뽕라면 유명한데 저는 매운 거 못먹어 떡만두라면^^

청아 2022-04-03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독도서관 저도 그립네요. 고등학교때 끝나고 자주 갔었어요~♡ 파송송 떡라면!!!

햇살과함께 2022-04-03 19:48   좋아요 1 | URL
미미님은 고등학교 때 가셨군요~ 근처 여고 다니셨나봐요. 저는 20대에 자주 갔어요^^ 떡만두라면은 진리죠!!

cyrus 2022-04-03 19: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살짝 기울어진 오르막길에 있는 동네 책방이 정겨워 보여요. 저런 곳에 가면 힘들지 않을 것 같아요. ^^

햇살과함께 2022-04-03 19:50   좋아요 1 | URL
북촌 상업화가 많이 되었지만,, 다정한 골목길 책방 까페 산책 좋습니다^^

다락방 2022-04-03 2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오 너무 좋네요. 라면이요… 🙄

햇살과함께 2022-04-03 21:37   좋아요 0 | URL
그쵸~ 저도 또 먹고 싶네요 ㅎㅎ

새파랑 2022-04-03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뚝빼기 라면 신기하네요 ^^ 면이 확 퍼지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ㅎㅎ 저 서점들 가보고 싶네요. 정겹게 느껴집니다~!!

햇살과함께 2022-04-03 21:39   좋아요 1 | URL
면이 꼬들꼬들하게 나오기 때문에 퍼지기 전에 먹어야 더 맛있습니다^^ 세번째 사진은 라면집입니다 ㅎㅎ

scott 2022-04-03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북촌!
주말에 이토록 한 적하다니!ㅎㅎ
뚝배기 라면! 한 사발
면역력이 업!
될 것 같습니다
햇살님 서점 탐방기 애독자 🖐^^
라면 사진에 침이 꼴깍 ^^

햇살과함께 2022-04-04 08:58   좋아요 1 | URL
오전에 일찍 갔더니 한산해서 좋더라고요~!

페넬로페 2022-04-03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이어트 독하게 하셨네요.
물론 결과가 대성공일것 같습니다.
정독도서관과 삼청동~~
봄에 저도 한번 다녀와야겠어요^^

햇살과함께 2022-04-04 09:02   좋아요 1 | URL
이번엔 좀 독하게 해서 목표 달성했습니다 ㅎㅎ
어지러워 많이 누워있고 식구들에게 짜증을 좀 많이 내긴 했지만^^
벚꽃 필 때 가보시길 추천드려요~
 

"내가 말이 길었구먼, 지금 전라도 광주나 여기저기서 일 벌어지는 거 보니 지금이 전쟁이여. 지금은 전쟁 때나 다를 것이 없어. 오늘 텔레비전 보니께 또 불쌍한 사람들 수도 없이 죽고 있단 말이여. 전쟁이라면 군인들끼리 총 대포로 쌈질하다 죽는 줄 아는디 아니여. 그냥 멀쩡히 농사짓는 사람들, 정치가 뭔지 모르고 하루하루 착하게 하늘 보고 농사지으며 살던 사람들을 마구 끌 - P126

어다 쏴 죽이고 생매장하고 겁탈하고 죽이고 그런 게 전쟁이여. 광주만이 아니여. 서울이랑 사방천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거여. 살아남아야 혀. 이 어려운 시국을 잘 넘어야 혀." - P127

선생님은 말없이 몇 걸음 옮기더니 무겁게 말씀을 이어 가.
"지금 들어온 사람에게 누구냐고 묻지 마라. 얼굴도 보려고 하지 말고 그냥 책만 읽으며 그대로 수업 시간을 때우자. 그리고 이번 시간이 마지막 수업이니 학생들이 학원 나갈 때 조용히 섞여서 나가. 건강해야 한다. 살아남거라."
난 그날 맨날 조는 듯한 표정에 느리게 걷는, 젊은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는 날카롭고 섬광 번뜩이는 쌈박한 느낌이라고는 찾을수 없는 시골 형님 같은 역사 선생님에게 푹 빠지고 말았어. 역사라는 과목을 아주아주 좋아하게 된 건 말할 것도 없고. - P130

‘그래, 나는 없는 집 자식이야. 쟤네들처럼 힘껏 날 도와줄 사람은 없어. 그냥 내 힘으로 내 길을 열어야 해. 내가 정신을 못 차렸지. 어떻게 시작한 공부인데……. 아니야, 아이들하고 어울리지 않고 어떻게 살아? 사람이 어떻게 공부만 하고 일만 하고 살아? 그래도 이제 남은 두 달은 죽은 듯 공부한다. 쟤네들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없는 집 자식이 술이나 마시고 이리저리 흔들리면 안 되지.‘
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교실로 들어가다 몸을 돌려 대진이와 신석이가 탄 자가용이 떠난 자리를 다시 쳐다봤어. - P158

"제가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다가 공장 다니고 그런 것도 어쩌면 어머니 아버지 잘못이 아니라 세상의 흐름과 관련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 청춘을 보냈고 전쟁을 겪었어요. 그런 아픔을 겪은 것과 제가 힘들게 살아온 게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도요. 그래서 그 공부를 하고 싶기도 해요. 단순히 개인 잘못으로만 보기에는 뭔가 풀리지 않아요." - P162

세상에! 눈이 번쩍 떠지고 등골이 오싹해져. 술에 취해 나오는대로 떠든 말을 다 기억하는 선생님 앞에 앉아 있는 게 어렵기도 하고 좋기도 해. 이런 자리에 앉아 있는 내가 자랑스러워. 나는 얼른 가부좌를 틀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뱉고를 천천히 했어. 공장 다닐 때 만난 철룡이 형이 가르쳐 준 말, ‘공부는 평생 도 닦는 거다. 공부하면 안 보이던 게 보인다‘고 한말이 떠올라 술김에 선생님한테 했거든. - P169

엄마 말을 들으며 역사 선생님 말씀이 떠올랐어. 빈대떡집 아주머니 말씀도 떠올라. 물방울이 바위 뚫듯 평생 꾸준히 멈추지 않고도 닦는 마음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국어 선생님이 노자 이야기하다 들려준 말도 생각나네. 젊어서는 직업마다 다 다른 것 같지만 결국 흐르는 세월 속에서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 거기서 큰 도를 깨우친다는 말. 어떤 일을 하든 정성을 다해 하루하루 살다보면 세상 이치를 깨달아 막힘이 없다고. 그래, 돈이나 뭐 그런 거에 얽매이지 말고 그냥 가자. - P191

"어려운 결정 했다. 그런데 집안 형편 봐서 결정한 거지? 그러지 않아도 된다. 너는 니 길을 가야지. 아무도 너를 대신해 주지 못혀. 엄마가 그랬지? 엄마 아버지는 엄마 아버지 몫이 있는 거고 형제들은 형제들 몫이 있는 거여. 니가 다 지고 가려고 하지 마라. 할 만큼 했다. 무역 쪽이 좋으면 가. 난 니가 채소 장사 할 때장사 수완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 내 새끼라서가 아니다. 사람은 감이라는 게 있어. 그건 책으로 공부해서 만들어지는 게아니여. 갖고 있는 게 있단 말이다. 넌 그 뭣이냐 너만의 그 무엇이 있어." - P195

사람들이 눈에 들어와.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으로 뛰듯이 걸어지나가는 사람들, 광화문이라 그런가? 세상을 움직이는 주인공 같아 보이네. 엄마는 환자고 나는 보호자. 넥타이 매고 예쁘게 차려입고 바쁘게 움직이는 저 사람들도 집에 가면 엄마 같은 환자가 있을까? 하긴 사람이 태어나면 늙고 아프고 죽는 게 너무나 당연한 건데 그런 사람이 왜 없겠어.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지. 그런데 왜 그당연한 것이 슬프고 마음이 칼로 에이듯 아프고 그럴까? - P208

"그러지. 그런디 너무 마음에 짐 지고 살 거 없다. 사랑이란 게 다 내리사랑이라고 너는 나중에 니 도움이 필요한 사람 만나거든 두 분 만난 줄 알고 챙겨. 타지에서 온 어린아이한테 목숨 같은 소 빌려주는 거,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녀. 잊으면 안 되지." - P218

"시방 하는 일에 마음을 줘야 혀. 지금 만나는 사람, 지금 하는 일이 중한 거여. 모자란 놈이 지난 일에 매달리는 거라고, 감옥살이도 그런 감옥살이가 없지. 지난 일에 갇혀 살면 살아도 사는것이 아녀."
"네, 안 그래도 마음속으로 미워하고 그랬는데 이렇게 만나 보니까 좀 풀리는 거 같아요."
"그려. 어째 안 그러겠냐. 어려서야 부모나 어른 잘못 만나 그러려니 하지만 어른이 되면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져야 혀. 누구탓도 아니여. 이제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 말이여. 니야 앞가림을 하니 걱정 없다만……." - P233

산이 가팔라지자 엄마는 힘든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시네.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도 나도 말없이 걸었어. 엄마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하겠다 싶어 천천히 걸어 거리를 벌렸지. 자식 키우며 남편과 살아온 시간 속에서 당신만의 삶은 얼마나 누려봤을까? 엄마 안에서 저절로 솟구쳐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는 욕망, 희망, 꿈 뭐 이런 걸 얼마나 누리며 살아왔을까 싶어.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이런 거 말고, 주민등록에 올라 있는 이름으로 불리는 우주에 단 하나뿐인 사람으로 존중받고 자기 자신을 마음껏 활짝 펼쳐보며 살아 봤냐는 거지.
부모는 저 낙엽처럼 떨어져 땅을 덮어 주고 거름이 되어 새끼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다 주고 가는 거라고 말하지만, 그건 말하기 좋아 하는 말이고, 어떻게 사람한테 그런 희생을 강요해? 봄과 여름을 마음껏 누리지도 못한 채 스러져 가는 아픔을 강요할 수는 없어. 그건 너무 잔인해. - P245

그때 엄마가 그랬어요. 세상 나무나 풀은 봄이 오면 다 같은 때 잎 나고 꽃피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고. 대추나무처럼 늦되는 나무는 소리 없이 물과 양분을 가지 끝까지 끌어올리며 기다린다고. 그러다 때가 오면, 자기한테 맞는 때가 오면, 잎 트면서 꽃 피고 열매 맺고 그런다고." - P2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 성매매라는 착취와 폭력에서 살아남은 한 여성의 용감한 기록
봄날 지음 / 반비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이라는 제목을 보고 기억이 떠올랐다. 벌써 20년 전이다. 회사에 처음 입사 면접을 왔던 날이다. 면접이 끝나고 늦은 점심이었는지, 이른 저녁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회사에 계신 학교 선배분께서 밥을 사주신다고 해서 따라갔다. 회사를 나와서, 지금은 없어진 육교를 건너서, 식당으로 향하던 길의 양쪽으로 이상한 천막이 쳐져 있고 빨간 불빛의 유리문들이 즐비하고 여자들이 있었다. 너무 놀랐다. 소위 사창가라고 하는 곳이었다(이 책에서 유리방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반성매매 활동에서는성매매 집결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지하철역에서 겨우 10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 곳은 허름하고 구석진,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어, 남성들이 몰래 몰래 찾아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버젓이 길 한복판에 있다니. 지나가던 아이들도, 학생들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있으리라고 상상을 못했다. 길 하나만 건넜을 뿐인데 딴 세상이 있었다.



저자는 한 인간이 여성으로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과 고통을 겪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지속적인 폭력, 옆집 언니 삼촌의 성추행,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중학교를 그만두게 한 부모, 항상 돈 타령을 하고 돈 버느라 힘든 어머니의 푸념, 열 여섯 살 미싱공장에서의 관리자들의 상습적 성추행, 미싱공장 셔틀버스기사에게 당한 여러 차례의 성폭행, 다른 공장에서 만난 동생의 삼촌과의 잠깐 행복했던 연애와 임신, 그 남자의 낙태 요구, 이후 남자의 변심. 겨우 열 일곱 살이었던가.


어느 날 공장이 끝나면 기숙사에서 사라지는 친구를 호기심에 따라갔다. 그냥 술 마시는 남자들 옆에서 술 주면 먹고 노래 부르면 박수만 쳤는데, 남자들이, 아저씨들이 돈을 쥐어준다. 그날 하루에 9만원. 공장에서 잔업까지 하며 한달 힘들게 일해서 받는 월급이 겨우 15만원인데, 하루 밤에 9만원이라는 돈이 손에 쥐어진다. 그 날 집에 가서 엄마에게 돈을 주니 엄마가 함박 웃음을 짓는다. 업주는 친절하고 다정하게, 언제든 놀러오라고, 와서 편하게 밥 먹고 쉬다 가라고, 언니처럼 편하게 생각하라고, 그냥 술만 따라주면 되고, 2차도 없고, 돈 많이 벌어서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그 이후 이 레퍼토리는 모든 업주에게서 듣게 된다. 그들은 그런 말로 순진한 여성들을 꼬드기고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자기에게 충성하게 한다.


그날 이후 아픈 친구를 대신해 한번 아르바이트를 가게 되고, 또 하루 밤에 돈을 많이 벌고, 엄마에게 갖다 주고, 엄마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저자는 엄마와 동생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 이후 어떤 일이 닥칠지 알기에는 너무 어리고 순진한 겨우 열 여덝 살.


가라오케와 단란주점, 유리방, 보도방, 티켓다방까지 이름은 다르지만 여성의 몸을 돈으로 쉽게 사는 모든 곳을 옮겨 다니고, 경상도와 전라도와 제주도까지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업주들은 선불금이라는 제도로 여성들을 옮아 매고 탈출하지 못하도록 한다. 지각비, 결근비, 화장품, 옷값, 미용실, 목욕비, 숙소비 라는 온갓 명목으로 선불금을 늘리고, 선불금에 대해 1할이나 2할의 이자를 매기고, 술값을 외상으로 하거나 분란을 일으키고 술값을 내지 않는 남성들의 미수금도 접대한 여성의 선불금으로 올려서 선불금이 점점 늘어난다. 정말 지옥이 따로 없다.


저자는 정말 독하게 마음먹고 돈을 아껴 써가며 적금을 들고 선불금을 갚아나가서 마침내 선불금을 다 갚고 적금으로 조그만 방을 얻어서 정말 꿈 같은 시간을,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먹고 자고 하는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결국 돈은 떨어지고 그런데 결국은 그 지긋지긋한 곳을 제 발로 다시 찾아간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 세계 이외의 세계를 모르고, 중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는지 몰랐던, 두려웠던 저자는 결국 너무 힘들고 괴롭지만 자기에게 익숙한 세상으로 다시 찾아간 것이다. 도와줄 누군가가 있었다면, 엄마가 좀 더 다정했다면 그때라도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을 텐데,


다시 보도방이라는 이름으로 단란주점에, 다시 시골의 티켓다방으로, 결국 저자를 탈출시켜 준 것은 티켓다방에서 만난 남자였고, 그 남자는 이혼남으로 어머니와 아이들과 살고 있었고, 저자의 선불금을 갚아주고 그녀를 탈출 시켰지만 그 집 또한 지옥이었다. 그 어머니의 지독한 구박과 그 남자의 반복되는 폭력에 저자는 결국 도망치게 된다.


저자는 집으로 가지만 집에서는 부모님도 동생도 반기지 않는다. 그녀가 왜 집으로 왔는지, 어디가 아픈지 묻지 않고, 며칠 쉬는 것을 보지 못하고 언제 돈 벌러 갈 거냐는 얘기만너무 척박하게 살고 있어서 저자의 아픔에 일말의 동정도 가지지 못하는 가족. 그녀에게는 의지할 곳이 하나도 없다. 어떤 일이 있었는데 묻지 않는다.


집에서 나와 여성인권지원센터의 도움으로 쉼터에서 기거하며 육체적, 정신적 아픔을 치료한다. 그리고 반성매매활동 상담가라는 새로운 삶을 산다. 자기의 아픔을 보듬으며 성매매 탈출 여성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고 있다. 20년의 그녀의 삶이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겠지만 그녀는 발언하고 책을 쓰고 그녀가 일했던 업소들을 찾아가보며 그때의 삶을 보듬으려 한다.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성을 구매하는 남성들이, 여성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업주들이, 불법을 눈감아주고 허용하고, 성매매 여성만 탓하고 문제의 본질의 보지 않는 국가와 사회가 문제라는 것을.


저자에게 좀 더 다정한 엄마가 있었다면 저자가 그 길로 가지 않았을까. 이 책을 보면 저자의 엄마를 많이 원망했다. 딸에게 너무 무심하고 돈 타령만 하고 다정한 말 한마디나 걱정하는 물음이 없다. 하지만 그 엄마도 아픈 몸으로 폭력적이고 무능력한 남편을 대신해서 생계를 책임져야만 했다. 그러므로 엄마를 원망하는 것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원망의 마음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임권택 감독의 '노는 계집 창'과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가 계속 생각났다. 그 영화들을 볼 때 엄청난 충격이었는데, 저자의 삶은 그게 과장이 아닌 현실임을 말한다. 나쁜 남자는 그 당시 무지하게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폭력적인 소재의 영화인 것 같다. 그 자극적인 포스터 하며, 그 여배우가 그 영화로 인해 얼마나 큰 트라우마를 가졌을까.



20년 전 그곳은 지금은 모두 재개발이 되어 사라지고, 높고 번쩍거리는 주상복합 건물들이 즐비하다. 여성들은 또 어디로 갔을까. 장소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게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관의 선생님이 검정고시 준비하며 공부하는 정독도서관^^ 반갑다. 도서관 마당에 나무, 잔디, 덩굴에 벤치도 많아서 공부하다 쉬기도 좋고 그냥 산책하기도 좋은 곳~

공부는 스님이 날마다 목탁 두드리고 불공드리듯, 신부님이나 목사님이 틈만 나면 기도하듯 죽는 날까지 하는 거라고. 그러면서 깨달아 가는 거라고, 깨달아? 깨닫는다고 밥이 나와 돈이 나와? 아니야, 그것도 아닌 거 같아. 돈많다고 행복한 것 같지도 않아. 그러면 난 왜 공부를 하는 거지? 생각 속으로 빠져들수록 힘은 빠지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그러다 장사 시작할 때 마음이 떠올랐어. 장사 첫날, 채소 사라고 외쳐야 하는데 목소리가 안 나와 혼자 울먹이던 모습. 큰돈을 들여받아온 채소를 채소 사라는 말이 안 나와 당황했지만 여하튼 다 팔았어. 나는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뻤고 결국 그 힘으로 어둠에서 빠져나왔지. - P11

"야! 이거 가져가."
의자 옆에 세워 둔 비닐우산을 내게 내밀었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잔말 말고 들고 가. 책 다 젖어."
그러면서 쓰고 있던 우산을 내게 씌워 줬어.
"갖고 가. 내 동생도 너처럼 공장 다니며 공부해. 동생 생각나서 주는 거야."
무섭게 쏟아붓는 빗소리에 말이 잘 안 들리네.
"……."
"왜 싫으냐?"
"아뇨, 고마워요. 잘 쓸게요. 고맙습니다." - P25

민우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해. 나도 일어섰어. 그러고는 우리 둘은 나란히 서서 공원 오솔길을 천천히 걸었지.
"야 인마, 울긴 왜 울어. 네가 뭘 잘못했다고."
"그냥……. 사는 게 힘들어. 어려서부터 자꾸 힘든 일이 생겨."
"민우야! 난 안 울기로 했다. 우리가 왜 우냐? 독하게 살자."
"알아. 나도 그러려고 하는데 자꾸 약해져. 엄마도 불쌍하고."
"난 검정고시 공부한 뒤로 울지 않기로 했어. 공부를 하든 뭐를 하든 나를 위해서 뭔가 할 거야. 가만히 무기력하게 쓰러지지 않을 거라고." - P46

"지금은 음악이 밥 먹여 주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음악, 그거 참 좋은 겁니다. ‘먹고살기 힘들어 검정고시 하는 놈이 무슨 음악이야‘ 이런 생각 하면 안 돼요. 나중에 어려운 시기 넘어가면, 아니지 어렵고 힘들수록 꼭 음악이나 미술 이런 거, 그러니까 예술을 가까이 하세요. 먹고살기 힘든데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고 할 수있지만 우리 인생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고 꼭 봐야 합니다. 그냥 모르고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 아까워요. 나중에라도 꼭 예술을 가까이하세요." - P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