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는 돈이 든다. ㅎ 자기가 뭘 샀는지는 기억 못해도 남의 지출은 기억하는 귀여운 요코 할머니와 친구들 ㅎ 나도 20년 지나면, 아니 10년만 지나도 이러는 거 아냐?

나는 깨달았다.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 P5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꽃 한 송이의 생명조차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죽는다는 사실이다. - P9

나는 나름대로 그 장갑을 몹시 아꼈다. 소중히 다루면서, 손에 낄 때는 반드시 가게 여주인의 코웃음을 떠올렸다. 장갑이 없어지면 그 여주인의 코웃음도 기억에서 사라질까 했더니, 아쉬움과는 별개로 여주인의 코웃음은 뇌리에 계속 남아있었다.
내일은 곧바로 장갑을 사러 가야겠다. 치매는 돈이 든다. - P24

"뭐 해?" "아무것도 안 해. 근데 나 정말 치매인가 봐. 어제카드 명세서가 왔는데 전자 제품 매장에서 12만 엔 썼더라고, 뭘 샀는지 진짜 기억이 안 나는 거 있지. 자질구레한 걸 많이샀나? 심각하지?" 나는 어젯밤부터 찝찝했던 일을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너 그거, 냉장고!" 친구가 냉큼 대답했다. 아, 맞다. 머릿속의 뭉게구름이 말끔히 개었다.
"난 말이야, 통장을 봤더니 65만 엔이나 인출했더라. 어디에다 썼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나는 곧바로 말했다. "너 그거, 부동산취득세." "앗, 맞다." 어째서 남의 지출은 안 까먹는 것일까. 머릿속이 상쾌해져서 기쁘게 일어났다. - P30

‘한국식 때밀이‘라는 게 있어서 꼭 해보고 싶었다. 토토코 씨는 예전에한번 했는데 때가 테니스공만큼 나왔고, 다 밀고 나자 피부가 하얘졌다고 한다. - P40

"사노 씨랑 요요코는 찬합에 음식 넣는 거 맡아줘!"
"네에."
나와 요요코는 같은 미대를 나왔는데 나이는 내가 서른이나 더 많다. "둘 다 예쁘게 넣을 수 있지? 미대 출신이니까."
사사코 씨가 말했지만, 미대에서 설음식 넣는 방법 따윈 가르치지 않는다. - P46

어린애였던 나는 그때, 가장 비참한 것 속에 익살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나저나 메밀국수 두세 가닥은 어떻게 천장까지 날아간 걸까? - P51

토토코 씨가 집에 간 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린 시절 먹었던 귤 우무가 너무도 선명한 색상으로, 비현실적일 정도로 또렷하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눈앞에 있는 귤보다도 생생하게 팟, 팟.
아, 무섭다. 이건 혹시 내가 노인이 된 증거가 아닐까? 늙으면 어제 먹은 음식은 까먹어도 어릴 적 기억은 갈수록 선명해진다던데. - P53

돈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필요할 때는 필요한 물건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필요한 물건이 없다. 필요한 건 에너지다. - P66

언젠가 노노코에게 왜 그리 못되게 구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노노코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잘못해서 병에 걸린게 아니잖아. 내가 못된 게 아니라, 병이 못된 거야." - P70

눈을 떴는데 몇 시인지 모르겠다. 또 침대에서 발로 커튼을 열어젖혔다. 시험 삼아 해보았더니 아직 다리로 커튼을 열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병석에 드러눕기라도 하면 다리로 커튼을 열 수 있는 지금의 건강을 얼마나 눈물겹게 그리워하게 될까? 그런 상상이 멈추지 않는다. 문득 다리 힘이 서서히 약해지는 과정을 차분히 느끼고 싶다는 용감무쌍한 생각이 들었다. - P77

수도국 직원은 "재수가 없으려니까…… 갱년기 히스테리 할망구!"라며 내 험담을 늘어놓겠지. 미안하지만 갱년기는 끝난 지 오래다. 늙은이는 공격적이고 언제나 저기압이다. - P81

"셀러리 주세요." "셀러리 없수." "요전에 왔을 때도 없었잖아요." 가게 영감은 나와 동년배다. 그러고 보니 파슬리도 없었다.
"내가 싫어해서. 냄새가 고약하니까." 영감이 말했다.
"뭐라고요? 여긴 채소 가게잖아요." "냄새나는 건 싫다고 했잖수." 나는 깜짝 놀라 입만 우물거렸다.
"남는 건 집에 들고 가서 먹어야 한다고, 그래서 안 들여놓는 거요." "흠, 그럼 언제 오든 없겠네요." "내가 싫어하니까."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오는 영감이다. - P82

"나 예뻐?"
"넌 그걸로 충분해요."
또다시 웃음이 터져버렸다.
엄마도 따라 웃었다.
갑자기 엄마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여름은, 발견되길 기다릴 뿐이란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엄마, 나 이제 지쳤어. 엄마도 아흔 해 살면서 지쳤지? 천국에 가고 싶어. 같이 갈까? 어디 있는 걸까, 천국은."
"어머,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던데." - P109

눈을 떴더니 몸이 냅다 버리기 직전의 추잉 껌처럼 이불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 P110

나는 아줌마다. 아줌마는 자각이 없다. 미처 다 쓰지 못한 감정이 있던 자리가 어느새 메말라버렸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서야 그 빈자리에 감정이 콸콸 쏟아져 들어왔다. 한국 드라마를 몰랐다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인생이 다 그런 거라고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브라운관 속 새빨간 거짓말에 이렇게 마음이 충족될 줄 몰랐다. 속아도 남는 장사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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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4-26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사노 요코 닮은 거 같은데 제 주위엔 왜 그런 친구들이 없을까요?? 아닌가? 반대인가??^^;;;

햇살과함께 2022-04-26 17:26   좋아요 0 | URL
라로님은 사노 요코 보다는 더 다정하고 귀여운 할머니가 되실 것 같은데요?!
이 책을 보다 보면, 나이 들면 역시 친구랑 음식이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같이 음식 만들어 나눠 먹고, 같이 맛있는 거 사 먹을 친구가 필요합니다^^
 
구운몽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2
김만중 지음, 송성욱 옮김 / 민음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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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되도다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한바탕 꿈이로구나 8명의 선녀와 한바탕 희롱하며 잘 놀고 깨어난 성진. 해설에서 설명하듯 남주가 부귀영화보다 여인과의 애정을 중시한다는 것도, 남주를 둘러싼 8명의 여성 간 시스터후드를 볼 수 있다는 것도 독특하다. 김만중은 특이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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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4-25 2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성진의 여성관계 정리해서 써봤던 기억이 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ㅎㅎㅎ

햇살과함께 2022-04-25 21:47   좋아요 1 | URL
너무 많은 여인들이 나와서 엄청 헷갈려서 저도 이름 나온 페이지는 접어가며 읽었네요~ 꿈이라지만, 부러운 인생 ㅎㅎ
 
그럼에도 여기에서
실키 지음 / 현암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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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대학을 다니고, 프랑스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실키 작가의 삶의 단편들. 이방인으로서 ‘마이너 필링스’와도 겹치는 감정들. 특히, 코로나 이후 락다운 상황에서 더욱 커진 아시아인 혐오 상황들. 그럼에도, 여기에서, 계속, 살아가게 하는 실키 작가의 끈을 만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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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4-27 2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었군요!ㅎㅎ
장바구니 속으로 ~@@@

햇살과함께 2022-04-27 22:09   좋아요 2 | URL
도서관 신간코너에 있길래 빌려왔는데 이 작가님의 다른 책도 찾아보려고요~

그레이스 2022-04-28 00: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재밌게 읽었어요
시리즈로 !
위트있고 공감되는 이야기들이 많아요
하하하이고, 나 안괜찮아

햇살과함께 2022-04-27 23:29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 다 읽으셨군요~
저도 그 두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제목이 벌써 공감^^
 

"너 그거 아냐? 남편이라는 건 존재가 아니라 자리야. 그 자리에서 밀려나면 반려견보다도 더 못한 취급을 받지. 현실에선 절대로 존재가 본질을 앞서지 않아. 사르트르는 평범한 결혼생활을 안 해봐서 몰랐을 거야." - P222

이제 더 이상 아들을 괴롭히는 짓은 하지 않았다. 한때 그녀는 가정통신문 빈칸에 아들의 장래희망을 ‘의사‘라고 적기도 했었다. 크고 반듯하게 ‘의사’라고 쓰면서 그녀는 마치 그 꿈이 이루어진 것처럼 뿌듯해했었다. 가운 대신 앞치마를 두르고, 펜 대신 칼을 쥐고, 아들의 얼굴은 점점 제 아비를 닮아갔다. 그녀는 아들이 늙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런 것을 알아채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다. 하지만 받아들여야 했고 그녀는 그렇게 했다. 더 이상 기대를 갖지 않았다. 시간이 그들 모자의 얼굴 위로 공평하게 흐른다는 것을 이젠 인정했다. 아들은 자라나는 새싹도 될 성싶은 푸릇한 묘목도 아니었다. 다 컸다. 커버렸다. 반올림을 하면 마흔이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김밥을 말았다. 손님들은 여전히 그녀의 김밥을 찾아왔다. 그거면 족하지. 그런데 내 아들은 누가찾아와줄꼬, 그녀가 인생에 관해 아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누군가 끊임없이 찾아와주지 않으면 생계가 상당히 곤란해지고 만다는 사실이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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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한바탕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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