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교사를 빠뜨리셨군요."
"아, 그렇군요. 가정 교사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으니까. 잘은 아니지만 희미하게는 기억이 납니다. 평범한 중년 여자였지만 꽤 유능한 교사였죠. 심리학자라면 그녀가 크레일에게 삐뚤어진 연정을 품어서 그를 살해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군요. 억눌렸던 노처녀의 히스테리 때문에요! 하지만 그건 아닐 겁니다. 아니에요, 희미하긴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바로 그 여자는 신경질적인 타입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일이죠." - P46

"무엇이 그렇게 선명하게 보이십니까? 증인? 변호사? 판사? 피고석에 앉아 있던 피고?"
포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바로 그겁니다! 제대로 짚으셨어요. 전 언제까지라도 그녀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낭만이라는 건, 그녀에겐 낭만적인 분위기가 풍겼습니다. 그녀가 정말 아름다웠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다지 젊지도 않았고, 피곤해보이는 데다 눈 주위도 거뭇거뭇했죠. 하지만 마치 그녀가 세상의 중심인 것 같았습니다. 모든 관심, 모든 소란의 중심에 있었어요. 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몸만 그곳에 남겨 둔 채 정신은 어디론가 아주 먼 곳으로 떠났죠. 입술에 살짝 예의 바른 미소만 띤 채 침묵을 지키고 듣기만 했습니다. 그녀는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인지 완벽한 몸매에 아름다운 얼굴, 생생한 젊음을 가진 그 아가씨보다도 더 생동감이 넘쳐 보였죠. 저는 배짱 두둑히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과 당당히 맞서 싸우며 결코 기죽지 않았다는 점에서 엘사 그리어에게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했다는 점에서 캐롤라인 크레일에게도 감탄했습니다. 그녀는 싸우지 않았으므로 결코 패배하지 않았죠." - P47

자리에서 일어난 조너선 씨는 책장으로 가, 책 한 권을 꺼내 펼치더니 큰 소리로 한 구절을 읽었다.

당신의 애정이 진정이고 결혼할 생각이시라면
내일 사람을 보내겠으니 언제 어디서 결혼식을 올릴 것인지 알려주세요.
그러면 운명을 송두리째 당신 발밑에 내던지고
당신을 남편으로 삼아 이 세상 어느 곳이라도 따라가겠어요.

"줄리엣은 사랑을 젊음과 동일시하고 있어요. 조심성도 없고 망설임도, 여자다운 정숙함도 없지요. 사랑은 용기이고 집념이며 무자비한 젊음의 혈기에요. 셰익스피어는 젊음이 무엇인지 잘 알았던 겁니다. 줄리엣은 로미오를 선택하고, 데스데모나는 오셀로를 사로잡습니다. 이 젊은이들에게는 의심도 두려움도 자존심도 없었던 겁니다." - P62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렇게 덧붙였다.
"젊음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무슈 푸아로, 그건… 정말이지 지독할 정도로 감동적이죠." - P128

아이를 위한 최선은 부모가 모두 어느 정도 아이를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가족에서 자라는 아이와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에게는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이죠. 그런 가정의 경우 어머니는 말 그대로 아이들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어 내버려 두게 되니까요. 하지만 아이들은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어머니가 관심을 충분히 보일 수 없는 상황도 이해하죠. - P177

부유한 영지의 소유자가 "볼셰비키란…."이라고 말하듯이, 골수 공산주의자가 "자본주의자들이란……."이라고 말하듯이, 성실한 가정주부들이 "바퀴벌레란……." 이라고 말할 때처럼 윌리엄스 양은 "남자들이란!" 이라고 말했다.
오랜 독신 생활과 가정 교사 생활을 통해 과격한 페미니즘에 사로잡힌 모양이었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윌리엄스 양은 남자들이란 모두 적이라고 말을 이었을 게 분명했다.
"남자에 대한 동정심은 없으신가요?"
푸아로의 질문에 윌리엄스 양은 냉담하게 대꾸했다.
"남자들은 이 세상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죠.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 P1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직 멀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제프리에게 묻는다.
"하워드는 테레사의 성장 배경에 대해 왜 그렇게 많이 이의를 제기한 거예요?"
제프리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답한다.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배심원들의 동정심을 사려고 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었나요?"
"아닙니다. 나는 테레사가 어떤 사람인지, 산자 같은 놈이랑 어울리는 그런 류의 여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드리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만약 테레사가 꼬투리 잡힐 만한 성격이었으면, 그녀의 성장배경을 들먹일 사람은 오히려 하워드 재피였겠네요."
"당연합니다.
제프리가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있다. 나는 좀더 많은 설명을 듣고 싶었지만 그 이상 설명은 없었다. - P240

"형사 사건에서는 수학적 정확성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상할 수 있는 의심 이상으로 유죄를 입증할 필요는 없습니다."
난 그 말을 들으면서 판사가 수학을 좋아하는 나에게 말하고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재판 내내 산자의 범죄를 완벽하게 입증하는 한 방의 증거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갈망이었다. 그런 건 없다. - P283

마티가 헝겊 인형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그들은 배심원들에게 산자가 피해를 주지 않는 부류의 남자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던 거요. 깔끔하게 생긴 여자가 계속 그한테 매달려 있을 정도로."
내가 바깥에서 법정 안을 쳐다보고 복도를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재판은 후끈 달아올랐다. - P332

제프리는 증인 대기실로 서둘러 갔고, 어머니와 수잔, 샌디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들은 "머피가 시종일관 이의를 제기했어. 모든 단어 하나하나."라며 머피에게 화가 나 있었다. 샌디가 덧붙였다.
"그는 커다란 도깨비 상자에서 계속 튀어나오는 것 같았어요." - P335

증거 철회라는 건 다시는 할 짓이 아니다. 내가 재판을 망친 게 아닌가. 나는 증언대에서 방청석의 자리로 돌아왔고, 퍽 빌딩의 사람들이 증언에 나서 재판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증언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는 법정 바깥에 있는 것이 나았다.
내가 제프리에게 물었다.
"내가 잘못한 거죠? 그러니까 그 반지와 관련해서요."
제프리가 밝게 답했다.
"아닙니다. 나라면 그런 것은 걱정 안 할 겁니다. 모든 것이 괜찮습니다. 내일은 또다른 날이니까."
제프리가 나를 위로해 주는 말은 고마웠지만 기분은 편하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그날 밤 잠을 잘 잤고 아침에 일어나자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우리는 일찍 법원에 가기 위해 나왔고 문을 열기도 전에 법정 앞에 도착했다. 나는 어머니, 수잔, 엘리자베스와 함께 밖에서 기다렸다. - P346

우리가 자동차에 대한 말싸움과 같은 평범한 하루의 일들을 삶과 죽음에 관련된 것으로 너무 쉽게 전환시키고 말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 P400

나는 그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했고 14까지 숫자를 세었다. 그리고 놓아 줬다. 하지만 나는 상상일지라도, 그의 목을 계속 조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내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다고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내가 균형감을 회복하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 해독제를 처방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 P422

너는 고개를 새침하게 돌리곤 자꾸 웃는다.
나는 그게 그렇게나 뜨거울 줄 몰랐던 거다. 너는 웃더니 나한테 묻는다. 그냥 뜨거워 hot-hot? 아니면 많이 매워HOT-hot?
아니, 아니. 그 질문은 네가 아니라 네 언니 엘리자베스가 했던건가?
중복된 이미지들. 나는 단어들을 듣고, 너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너의 얼굴은 보지 못한다. 나는 너의 얼굴을 본다. 네가 웃자 긴 검은 머리카락과 높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너의 조금 튀어나온 광대뼈가 흔들린다. 나는 숨을 참고얼굴을 찡그린다. 그리고 숨을 내쉬고 무지 뜨거워‘라고 말한다. 나는 내 말을 수정한다, 뜨겁고 동시에 매워서.
너는 얼굴을 찡그린다. 난 너의 얼굴이 나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반사한다고 상상한다. 그리고 동시에 너는 웃는다. - P4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미니즘 철학 입문 - 우리가 서로를 찾을 때까지
김은주 지음 / 오월의봄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페미니즘도 모르고 철학도 모르는 입문자를 위한 정말 정말 좋은 책이다! 항상 입문서라고 구라치는(?) 책 읽고 좌절한 나. 이 책은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다. 오드리 로드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구어를 풀어서인지, 오타가 많은 것이 유일한 단점. 이 책은 따로 정리해야지 김은주 샘도 계속 읽어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하하이고
실키 지음 / 현암사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모두 저마다 비정상이므로 모두 정상이다. 한 컷, 네 컷 만화에 이토록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