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단체, 패키지여행, 이 세 가지가 결합해서 빚어내는 어떤 편견. ‘여행부심’과 ‘예술부심’이 이중으로 빚어내는 어떤 오만. 거기에는 후세대에 비해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전시를 생활 밀착적으로 관람하는 문화를 경험하기 힘들었고, 그래서 예술에 관심을 갖고 취향이라는 걸 만들어가기 어려운 조건이었으며, 지금처럼 여행이 보편화되기 이전에 젊은 시절을 보냈고, 그래서 여행을 가기까지 거쳐야 하는 복잡한 절차들이 쌓은 심리적 장벽을 패키지여행의 형태로 넘어보려는 세대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었다(중년 안에서도 경험치와 감수성이 천차만별일 거라는 고려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미술관에 가는 건 ‘경험’을 쌓는 걸로 봐주지만, 그래서 당장은 지루해하고 별 감흥을 느끼지도 못해도 그런 경험들 끝에 돌아올 ‘무언가‘를 기다려주지만 5, 60대 중년이, 이제 와서, 떼를 지어, 박물관 - P27

과 미술관에 가는 건, 단지 패키지여행 일정에 포함되어있으니 별생각 없이, 유명하다고 하니까, 그 앞에서 사진이나 찍고 싶어서,라고 쉽게 단정 지었다. 그들에게는 쌓을 ‘경험‘도 미래의 ‘무언가‘도 없을 거라는 듯이. - P28

그냥 수박 겉만 즐겁게 핥다가 오면 안 되나. SNS를 잠시 끊고 고즈넉한 여행을 즐기는 즐거움과 그때그때 SNS 친구들과 여행의 순간을 활발히 나누는 건 엄연히 다른 종류의 즐거움인데. 뭣도 모른 채 그냥 가보고 싶던 곳에서 먹고 싶은 거 먹고 나오면 안 되나. 그래서 맛이 없었다면 그건 실패한 경험인가. 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정원 사진을 찍고, 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미술관에 가면 좀 어떤가. "유명한 스폿에서 사진 한 장씩 박고 가는 게 여행의 전부"면 또 어떤가. 타인이 더 나은 경험을 해보길 진심으로 바라서 하는 조언과, 무작정 던져놓는 냉소나 멸시는 분명 다르다. ‘세상의 빛을 보자‘는 게 ‘관광(觀光)’이라면, 경험에 위계를 세워 서로를 압박하기보다는, 서로가 지닌 나와 다른 빛에도 눈을 떠보면 좋지 않을까. - P30

하지만 그 후로도 나는 이 비슷한 말들을 자주 듣게 된다. 후반전 시작 무렵부터 벌써 힘에 부쳐 내가 공을 차는 게 아니라 공에 내가 차이는 것에 가깝게 해롱대다가 결국 교체되어 축구장 밖에 나와 있으면, 전후반 풀타임을 거뜬히 뛰고 나온 4, 50대 언니들이 "나도 네 나이 때는 전반 겨우 뛰었어. 너도 내 나이쯤에는 후반까지 버틸 수 있을 거야!"라고 위로를 한다든지, 며칠 전다 같이 받은 특훈의 결과로 종아리에 알이 잔뜩 배어다리를 모으지도 못하고 후들대며 걷고 있는데, 그 옆으로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며 언니들이 "네가 아직 하체 단련이 덜 돼서 그래. 나도 너만 할 때는 그랬어. 너도 웨이트 몇 년만 더하면 내 나이쯤 돼서는 다음 날 조금 쑤시다 말 거야"라고 격려를 한다든지. 이쯤 되니 나도 이 거꾸로 인간들에게 동화되어 축구장 밖 세상에서
‘나이가 많아서 난 이제 안 돼‘의 의미로 쓰이는 "내 나이 돼봐"에 적응이 안 될 지경이다. - P36

그런데 그라운드에서 몸싸움을 하면서 ‘맞는‘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고통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고, 그렇게 고통이 구체성을 띠고 다가오니 그게 또 두려움을 한결 줄였다. 적어도 나를 집어삼킬 정도로 커지지는 않았다. 이것만도 굉장한 발전이었다. 우리는 보통 폭력에 제압당하기 전에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 먼저 제압당하니까. 수비수한 명을 제친 기분이었다. - P48

‘좋은 사람’을 목표로 삼고 좋은 사람인 척 흉내 내며 좋은 사람에 이르고자 하지만 아직은 완전치 못해서 ‘가식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누군가의 부단한 노력의 과정. 그러니까 내 앞에서 저 사람이 떨고 있는 저 가식은, 아직은 도달하지 못한 저 사람의 미래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 사람이 가진, 저기서 더 앞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누군가가 "넌 가식적이야"라는 말로 섣불리 가로막을까 봐 지레 초조할 때도 있다. 실제로, 특히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이들 중에 "내가 너무 가식적으로 느껴져서 자기혐오가 생긴다"라고 고민 상담을 해오는 경우가 많아서이다. - P63

내가 책을 어디까지 자기중심적이고 감정 과잉적으로 읽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예가 있는데, 한창 되는 일도 없고 하는 일마다 망해서 나 자신이 너무나 하찮고 쓸모없게 느껴져 괴롭던 시절,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닌 맞춤법 책을 읽다가 운 적이 있다. ‘쓸모 있다’는 띄어 쓰고 ‘쓸모없다’는 붙여 써야 문법에 맞으며, 그건 ‘쓸모없다’는 표현이 ‘쓸모 있다’는 표현보다 - P71

훨씬 더 많이 사용되기에 표제어로 등재되어 그렇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그래, 세상에는 ‘쓸모없다’를 쓸 일이 더 많은 거야! 쓸모없는 것들이 더 많은 게 정상인 거야! 나만 쓸모없는 게 아니야! 내가 그 많은 쓸모없는 것 중 하나인 건 어쩌면 당연한 거라고, 그러니 괜찮다고 멋대로 위로받고는 눈물을 쏟은 것이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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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는 소위 ‘객관적 지식‘의 전제가 죽은 백인 유럽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음을 폭로하면서,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개념은 모든 사람(그룹)의 비전이 그 사람(그룹)의 시시각각 변하는 정체성에 의해서 구성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상황적 지식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참인 것이 아닌,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의 한계인식을 포함하는 지식이다. - P105

사이보그 이미지는 우리에게 이원론의 미궁 밖으로 나가는 길을 암시할 수 있다. (…) 나는 여신보다 차라리 사이보그가 되겠다.

해러웨이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책은 1991년에 출판된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다. 이 책은 1980년대 캘리포니아에서 써 내려갔던 다양한 주제의 논문 묶음으로, 특히 「사이보그 선언」(1985)이 유명하다. - P110

실해러웨이의 이러한 사이보그 개념은 여성을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사이보그를 통해서 해러웨이는 질문한다. 정말 ‘여성‘이라 자연스럽게 묶일 그러한 본질과 범주가 존재하는가? 실상 젠더, 인종, 계급 같은 단일한 정체성은 가부장제, 식민 자본주의의 모순된 사회현실들이라는 끔찍한 역사적 경험에 의해 우리에게강요된 성취다. 이때 ‘우리‘로 묶은 이는 누구이고, 그 ‘우리‘에 속하는 이는 누구인가? 이 ‘단일한 우리‘라는 묶음으로써 이득을 누리는 이는 누구인가? ‘우리’라고 불리는 강력한 정치적 신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사람들이, 어떤 정체성들을 이용했는가? - P112

오히려 해러웨이는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는 의미를 이야기한다.
"죽음의 긍정이 절대적인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찬미한다는 의미에서의 긍정이 아니라, 솔직히 말해서, 죽어야 할 운명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특히 현대의 문화는 인간의 정상 상황을 고장 나지않은 상태, 즉 건강으로 삼는다. 건강에 대한 찬미는 죽음에 대한 감춤과 질병에 대한 혐오로 나타난다. 그러나 고장과 질병은 그저 부정적인 것일까? - P115

시몬 베유는 중력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조건을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검토한 인물이다. 그는우리를 중력에 묶어두는 구속력과 이에서 벗어나려는 정신의 운동에 관해 사유한다. 시몬 베유에 따르면, 두가지 힘이 우주를 통치한다. 빛과 중력. 두 힘은 물리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 P121

베유는 공장 노동에서 스페인 내전 참전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뿌리 없는 자들의 문제"라 진단한다. 이들은 소외와 박탈로 일상을 영위하는 노동자 계급이며, 소속감을 상실한 채 표류하는 사람들로서 공허한 상실감이나 무료한 권태감 속에 생을 영위한다. 이들은 정신적으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 P133

시몬 베유의 주된 사상은 중력과 은총에 나타나있다. 시몬 베유는 인간을 폭력과 고통으로 이끄는 ‘중력의 삶’에 대해 사유한다. 당대의 과학 지식을 수용했던 베유는 물리적 세계와 마찬가지로 정신의 에너지 역시도 중력의 법칙과 무관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은 완전히 구분될 수 없으며, 인간은 홀로 자족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외부의 에너지에 의탁하여 삶을 영위한다. 인간에게 외부의 에너지는 언제나 욕망의 대상이며,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외부의 에너지를 사용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중력의 법칙은 특히 인간이 궁핍한 상태에 놓여 있을 때 더 생생하게 드러난다. - P135

고통받는 자는 누구나 자기 고통을 사람들을 괴롭힘으로써 혹은 동정심을 유발함으로써―남들에게 알리려고 애쓰게 된다. 이것은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한 것이며, 실제 이러한 방법으로 고통은 줄어든다. 아주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또 어느 누구도 괴롭힐 힘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고통은 자기 안에 그대로 남아 그를 독살시키게된다. - P137

시몬 베유를 평생 시달리게 한 것은 자아라는 딱딱한 알맹이였다. 그에게는 스스로를 세계의 심판관처럼 여기며 자신만을 위하고 자신의 고통만을 울부짖으며 타인을 도구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고통받는 이들을 그저 바라보기만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죄책감이라는 이중의 칼날을 지닌 검은 때로 사람을 외부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게도 하지만, 판단과 결합한 죄책감은 자신이 돕지 못한 사람을 도울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여기면서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또는, 오히려 죄책감은 아무와도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방어적 행동으로 변질되어 폭력의 상황에서 침묵으로 일관하는 무기력으로 사람을 침잠시키기도 한다. 시몬 베유는 그렇게 살 수 없었다. - P140

크리스테바는 존재의 언어를 남성의 것으로 독점하거나, 육체와 무관한 순수한 정신적인 활동으로보는 전통적 언어관에 이의를 제기한다. 말하는 존재는 언제나 추상의 세계와 육체의 세계 사이에 존재하고,
그 불가사의한 접면에서 말한다. 언어는 육체로부터 흘러나오고, 섹슈얼리티가 침투하면서 작동한다.
크리스테바는 ‘보편적 인간‘의 지위를 갖고 말하기와 글쓰기를 행하는 목소리가 실은 ‘특정 남성’의 목소리임을 잘 알고 있다. 크리스테바는 남성의 말하기라는 경계를 넘어, ‘여성의 목소리로 말하고 글쓰기‘를 사유한다. 그리고 이 여성의 말하기와 글쓰기가 경계를 위반하여, 과잉으로 흐르고 분출하는 것을 목도한다. - P148

크리스테바는 구조의 완결성과 자족성에서 벗어난, 역동적 의미 생산에 대한 탐구를 상호텍스트성이라는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상호텍스트성은 무엇보다도 텍스트의 유일한 소유자이자 창조자로 여겨져온 작가의 위상을 비판하는 개념이다. 상호텍스트성은 텍스트의 의미가 텍스트를 서술한 작가의 독창적 의도에서 비롯된다고 보지 않는다. 모든 텍스트는 우선 기존의 개별적 텍스트들 그리고 서술의 규율과 관습에의존하며, 그 자체로 완결적이지 않다. - P155

정신분석적 경험은 말하는 존재와 언어의 야수성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나에게 충격을 던져주었다. 정신분석이 솔직하게 드러내는욕망과 증오의 배경에 대항하는 정치적 모델들이 내게는 거리가 그것들을 변화시키는 방식인 것처럼보인다. 공포의 힘과 아브젝시옹처럼 말이다.

아브젝시옹은 비체(卑體)로 번역된다. 이는 언어상징계가 요구하는 적절한 주체가 되기 위해, 이질적이고 위협적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들을 거부하고 추방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 P161

크리스테바는 비체를 통해 사람이 나와 다른 타인, 이방인들에게 매혹되면서 동시에 혐오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동질적인 소속감 강화를 꾀하는 내집단은 비체와 타인을 소비할 수 있을 때는 받아들인다. 언제나 모호한 경계를 가진 존재에게 끊임없이 어느 편에 속하는지 질문하고, 같은 편이면 포섭하고 다른 편이면 배척한다. 그러나 비체는 언제나 경계 근처에 있고 동질의 내부로 결코 들어올 수 없기에,
이것이 동질성을 위협한다고 여겨질 경우 격렬한 열광으로 뭉친 내집단에게 곧장 극단적 혐오와 박해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 P164

나는 여성들이 복수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단수로 말해질 수 없다. 여성은 복수다. 여성주의운동은 추상적인 단일 여성 서사와의 동일시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처지와 위치에 있는 여성이 투쟁의 역사를 거쳐 확인한 가부장제의 분명한 차별에 함께 저항할 수는 있다. 하지만, 함께 싸운다는 것은 나와 비슷한 고통에 바로 공감하여 연대하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동일시에서 비롯된 고통은, 내가 느껴본 고통에만 민감한 데 그쳐버릴 수도 있다. 고통에 공감하여 연대한다는 말을 내가 느껴본, 혹은 나와가까운 이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로만 오인할 경우,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의 서사 일부로 통합하는 근대적 습관에 빠지기 쉽다. 고통의 가치를 규정하는 최종 심급을 ‘나‘라는 자기중심으로 수렴하는 방식을,
여성주의운동은 지양해야 한다. - P174

자기중심적 서사 구축에서 벗어나, 차이를 사상하지 않으면서, 차이에서 의미 있는 실천을 이끌어내기 위한 윤리적 태도와 서사의 방법이 분명히 필요하다. 이것은 결코 종결될 수 없는 여성주의의 과제이기도 하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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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마리 아기 돼지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원은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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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6년 전 사건을 의뢰받아 파헤치는 푸아로 탐정. 역시 욕심 많은 아기 돼지가 문제야. 유명한 화가인 독살된 남편에게서 자꾸 디에고 리베라가 겹쳐보이네. 예술가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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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8호 도착. 지난 호 복습 노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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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에어’ 다시 읽어보기
진 리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읽기

제인 에어의 독자라면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 버사 메이슨. 우리는 오랫동안 손필드에 감금되었다가 집에 불을 질러 죽은 버사메이슨을 잊고 있었다.
버사 메이슨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진 리스 덕분이다. 진 리스는 흑인 원주민과 백인 사이의 자손인 크리올계 어머니와 웨일스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16살 때까지 서인도제도 도미니카에서 자랐다. 그는수많은 크리올 상속녀가 영국 남자와 결혼한 후 광녀로 낙인 찍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쓰기 시작한다. 진 리스는 말했다. "나는 그(버사메이슨)에게 하나의 삶을 써주도록 하겠다." - P43

스피박이 스스로를 여행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자신을 지나온 길로 설명한다는 것은, 그의 정체성을 하나로 이야기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스피박은 1942년인도 콜카타에서 태어나, 한곳에 머무르다 다시 다른곳으로, 끊임없이 길 위에서 그다음 여정을 시작해왔다.
스피박은 자신의 정체성을 다양한 출처를 지닌 인용들로 이루어진 글로 이해했다. 스피박의 인용들은 그가 지나온 장소와 역사를 보여준다. 스피박에게 있어 ‘나’라고 말해지는 것들은 완벽하게 매끈한 하나가 아니라, 누빔 이불처럼 누벼지고 다시 누벼진다. - P47

스피박은 특히 소위 서구의 지식인들이 서발턴들을 말하는 것이 결국 서구의 시각에서 붙잡은 재현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단일하고도 매끈한 타자로 재현된 제3세계의 민중은 서구 주체의 욕망이 만든 허상이다. 서발턴은 결코 투명한 존재로 재현될 수 없다. 서발턴으로 단일하게 호명되는 존재들 사이에는 흐르는 균열이 존재한다. - P55

즉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란 주장은 그저 서발턴의 발언 불가능성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 아닌, 실존하는 거대한 인식적 폭력을 넘어서 그 이질성을 인정하기이며, 서구 중심적 배움을 벗어나 그들과의 관계 수립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 P60

‘제3세계‘로 불리는 단일한 타자를 설정하는 것은 서구 사회가 타자를 재현하고 소비하는 방식의 일환이다. 서구의 이런 방식은 자신과 ‘다른‘ 다양한 차이를 모두 제3세계라는 뭉툭한 범주 안에 몰아넣는다. 이런 범주에서 소비되는 타자는 결국 근대의 대문자인간 개념을 공고히 해주는 타자성이다. 그것은 일종의 환상이다. 근대적 자아를 정의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야만적 타자성을 상정함으로써만 유지되는 서구 근대주체의 환상이다. - P61

이러한 타자성을 드러내는 방식이 곧 타자에 대한 책임이며, 타자에 대한 반응이다. 여기서 스피박은 책임있는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그는 타자를 서구의 인식 틀로 환원하지 않으면서 그것의 표현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불가능한 것의 경험으로서의 윤리학‘을 요청한다. 이러한 윤리학은 타자를 서구의 언어와 지식으로 구성하기란 불가능함을 받아들이며, 타자를 완전히 알 수 있다는 아집에서 벗어나는 태도를취한다. ‘제1세계‘의 지식인이 ‘제3세계‘ 혹은 타자를 대변할 수 있다는 발상은 일종의 오만이다. 오만에서벗어나 단일한 타자를 넘어서는 무한히 다른 타자에반응할 수 있을 때, 타자에 대한 책임감을 모색할 수 있는길이 열린다. - P63

버틀러는 사춘기 시절부터 헤겔의 저작을 읽어왔고, 특히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다룬 인정에 관한논의는 버틀러에게 중요한 주제였다. 인정은 욕망을 인식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욕망을 승인하도록 하는활동이다. 즉, 인정은 욕망에 머물러 있지 않고 욕망을표현하면서 내가 나의 욕망을 인정하고, 그 욕망을 타인에게 인정받으면서 욕망의 자리를 사회 안에 놓는일이다. 내가 내 욕망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나의욕망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자기 자신이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 욕망이 혼자의 것에 그친다면 결국 그 욕망은 억압당할 뿐이다. 나의 욕망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때, 사람은 욕망을 표현할 수 있고 펼칠 수 있다. - P76

그러나 규범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세운다면, 그냥 죽을 수는 없다. 규범과 더불어서 살기 위해서라도, 규범을 비판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한것이다. 버틀러가 인정 개념을 중요시한 것은 사회와 동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인정에 대한 성찰은인정 규범을 비판하면서, 같아지기만을 요구하는 사회에 저항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넓히고 확립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 P78

버틀러의 사유가 지닌 혁명성은 젠더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행위하는 것 즉 수행성(performativity)임을 밝힌 데 있다. - P83

즉 젠더를 수행성으로 이해할 경우에, 누군가를 여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신체를 가졌다는 의미보다는 당대가 이상적 여성성이라 여기는 규범적 특질을 지녔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이상적 여성성은 담론에 의해, 문화와 정치의 영향속에서 형성된다. - P85

버틀러는 여성의 범주가 어떻게 생산되는지와 관련해 페미니즘적 주체가 전제한, ‘하나의 여성‘이라는 보편적·통일적 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단 하나의 여성을 주창할 경우 여성은 가부장적 남성의 반대 항으로 기능하게 되어, 비판과 저항을 한다 해도 가부장제의 구속장 안에 갇히게 된다. 페미니즘은 남성과 같은 권리를 지닌다는 의미의 평등권을 주창하는 것 또는 여성이 남성과 같은 능력과 위상을 지녔음을 증명하는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 혹은 이를 거부하고, 여성만의 특질로서 감성, 모성, 수동성을 훌륭한 위상으로 치켜세우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결국 - P86

인간의 기준은 남성인 채로 여성은 명예 남성으로서 인간이 되거나, 그 인간 남성에 저항해 그 인간 남성에 의해 ‘결핍’이라 불리는 ‘여성적’ 특징들을 옹호하는 방식으로 빠지거나 할 수밖에 없다. - P87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이라는 허구성에 머물러선 안 된다. ‘여성’이 공통적인 특징과 관심사를 가진집단이라는 주장은 인간을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는 성 관계의 이원적 관점을 강화하면서 무의식에서부터 성 역할을 규제하고 성별화를 수행한다.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이 단 하나의 여성을 그리고 정체성의 정치에 얽매여 보편적·통일적 여성상을 재현할수록, 다양한 차이를 주창하는 여성은 지워진다. - P87

지금도 버틀러는 수업을 하고 있고, 같은 대학 정치학 교수이자 파트너인 웬디브라운과 함께 살고 있다. 오랜 시간 파트너로 지내온 버틀러와 브라운은 버틀러가 전 남편과 낳은 아이 이삭을 함께 키웠고, 성년이 지난 이삭은 현재 음악을 공부하고 있다. 버틀러는 이삭이 어렸을 때, 여자 둘이 부부인 우리 가족이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삭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저에게 이상하거나 어려운 게 아니고요, 진짜 어려운 건 집안에 두 명의 학자가 있다는 거예요." - P86

해러웨이와 제이는 함께 살았지만 몇 년 후 별거에들어간다. 제이는 필리핀계와 멕시코계의 혼혈인로버트와 사귀었고 해러웨이는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그의 수업 청강생이었던 러스틴을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하지만 해러웨이와 제이는 각기 애인이 생긴 뒤에도 계속 함께하기를 결정했다. 제이와 그의 연인 로버트 그리고 해러웨이와 러스틴 네 명은 캘리포니아 주 힐즈버그 외곽 지역의 토지를 함께 구입해 공동생활을시작한다.
제이와 해러웨이는 섹슈얼한 사랑의 관계는 아니었을지라도, 삶의 지향점을 공유하는 유대감으로 연결되어 그 누구보다 친밀한 애정을 나누고 있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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