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스 초이스 마지막 권!

"그 외에는요?"
"음・・・・・・ 그러니까..... 그레이 양을 넣었으면 합니다."
그 이름을 말하면서 그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오! 그레이 양?"
이 세상에서 한두 마디 특정 단어로 살짝 비꼬는 듯한 눈치를 주는 데 푸아로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른다섯인 프랭클린 클라크를 어린아이로 만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는 갑자기 수줍은 어린 학생이 된 것 같았다. - P178

"말을 위한 말이군요!"
메건 바너드가 외쳤다.
"예?"
푸아로는 묻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이 하고 계신 말씀 말이에요. 말을 위한 말에 불과해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절박한 강렬함 같은 것이 담겨 있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뚜렷한 개성을 느낄 수 있었다.
"말이란 건 말입니다, 마드무아젤, 생각이 걸치는 유일한 옷이랍니다." - P182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아가씨에요."
내가 말했다.
"그리고 무척 사랑스러운 옷을 입고 있지. 고급 크레이프에 은빛 여우털 깃이 달려 있는 데르니에 크리(최신 유행) 옷 말이야."
"여자 옷 디자이너라도 되는 것 같군요, 푸아로 난 사람들이 뭘입고 있는가 하는 것을 눈여겨 본 적이 없어요."
"자네는 나체촌으로 가야 할 사람일세."
내가 발끈 해서 무어라 반박하려는 순간, 그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 P199

"이야기를 하는 거지! 주부 자쉬르(단언하는데) 헤이스팅스, 뭔가 숨겨야 할 것이 있는 사람에게 대화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네! 언젠가 어떤 현명한 프랑스 노인이 내게 말해 주길, 숨기는 것을 내놓게 하는데 오래 얘기하게 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수단도 없다는 거야. 인간이란 말일세, 헤이스팅스, 대화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개성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를 뿌리치지 못하는 존재라네. 그럴 때마다 사람은 스스로를 드러내게 되지."
"커스트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해 줬으면 하나요?"
에르퀼 푸아로가 미소를 지었다. - P303

"거짓말을 하기를 바라네. 그러면 그것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될 테니까 말일세."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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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복잡할 땐 추리소설!
푸아로와 화자인 친구 헤이스팅스.
홈즈와 왓슨 같은 케미가 있다~!

결론적으로 내가 이 기묘한 연쇄 살인에서 파생된 부차적이고 사적인 관계를 이 글에서 지나치게 자세하게 설명했다면, 그것은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요소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노라고 말하련다. 에르퀼 푸아로도 언젠가 아주 극적인 태도로, 범죄는 로맨스를 낳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 P9

"지난 번 자네가 한 말을 기억하나. 만약 저녁 식사를 주문하듯 범죄를 주문할 수 있다면 어떤 걸 선택하겠나?"
나는 그에게 장단을 맞추어 응수했다.
"글쎄요. 우선 메뉴를 봅시다. 강도사건? 위조 사건?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 건 채식주의자의 메뉴에 가깝죠. 반드시 살인이어야 합니다. 피로 얼룩진 살인 말입니다. 물론 속임수도 곁들여야겠죠."
"물론 그렇지. 그런 것들은 오르되브르(전채 요리)일세."
"희생자가 어떤 사람이면 좋을까요? 여자가 좋을까요, 남자가 좋을까요? 남자가 좋을 것 같습니다. 거물 말입니다. 미국인 백만장자나 수상, 신문사 소유주 같은 사람 말입니다. 범죄의 현장은, 음………. 멋지고 고풍스런 서재가 안성맞춤이겠네요. 분위기로는 그만한 데가 없지요. 무기는 단검으로 하고 그걸 기묘하게 비틀어 찌르는 겁니다. 아니면 둔기나 석상 같은 것도 좋고요……………"
푸아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 P28

"소설 속에서 두 번째 살인이 줄거리에 활기를 불어넣는 일이 많다는 걸 인정해야 하지 않겠어요? 만약 살인이 1장에서 일어나고, 그 사건에 관계된 모든 이들의 알리바이를 거의 마지막까지 추적해야 한다면 좀 따분할 것 같습니다." - P30

나는 약간 원기가 되살아났다. 구질구질하긴 하지만 이 사건은 어쨌든 ‘범죄‘였다. 범죄나 범인을 대하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가.
나는 푸아로의 다음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이건 시작일 뿐일세."
에르퀼 푸아로가 말했다. - P32

"맙소사. 그것은 ABC 철도 안내서였습니다."
경위가 대답했다. - P41

그는 잠시 말을 멈춘 다음 비난 서린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는 도대체 상식이란 게 없나, 헤이스팅스? 내가 ‘뭐든 사게‘라고 한 건 맞아. 그런데 하필이면 딸기를 고르다니! 벌써 딸기물이 배어 나와 자네의 멋진 양복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것 같군."
실망스럽게도 사실이 그러했다. - P59

"푸아로!"
내가 다시 외쳤다. 이번에는 비난이 섞인 어조였다.
"몬 아미, 왜 그러나? 자네는 내가 셜록 홈즈처럼 이번 사건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군!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범인의 인상이나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물론, 도대체 어떻게 수사를 시작해야 할지조차도 모르고 있다네." - P75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우리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아는 것이 없었다. - P135

"맙소사, 푸아로, 이건 지금 사람이 살고 죽는 문제입니다. 우리옷 따위가 잘못된들 대수겠습니까?"
"자네는 균형 감각이란 게 없군, 헤이스팅스 기차는 정해진 시간이 되어야 떠날 테고, 누군가의 옷을 망쳐 놓는 건 살인을 막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네."
단호한 태도로 내게서 여행가방을 받아들고 그는 다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 P141

"자네 말이 맞고말고, 친구. 이제까지는 줄곧 ‘내부’로부터 수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었네. 중요한 것은 희생자의 개인사였단 말일세. 중요한 쟁점은, ‘그 죽음으로 누가 이익을 보는가? 피해자 주변에서 범죄를 저지를 만한 기회는 어떤 것인가?‘하는 것이었네. 언제나 ‘사적인 범죄‘였지. 하지만 이번에는 우리가 함께 일한 후 최초로 냉혹한 범죄, 특정 개인과 상관이 없는 살인이 등장한 걸세. ‘외부‘로부터의 살인 말일세."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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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 뉴스의 조회 수가 곧 회사의 수익으로 직결되는 환경에서 일부 기자들은 하루에 수십 개의 기사를 쏘기도 한다. 2021년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등록된 기자 7600명의 기사 작성 건수를 수집해 분석했다. 한 연예부 기자는 30일간 1212건의 기사를 작성했는데, 이는 하루에 50~60건의 기사를 썼다는 의미다. 기자는 연예인의 인스타그램 업로드 소식이나 연예인이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한 발언 등을 기사로 송고했다. 어쩌면 기자 입장에서도 기사 대신 콘텐츠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양질의 기사를 작성하기보다 기사의 양에 집중하는 데 대한 죄책감을 덜 수도 있을 것이다. - P171

최근 많은 언론인들은 기사를 작성하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뉴스레터를 작성하고, 회사 SNS와 함께 자신의 SNS에 기사를 올리고 브런치 같은 플랫폼을 통해 취재기를 작성하기도 한다. ‘기자는 기사로 말해야지!‘라고 생각하며 새로운 얘기를 캐내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기보다는, 자신이 이미 캐낸 이야기를 널리 퍼뜨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퍼졌다. 어떤 매체에 속해 있는가보다 기자 개인이 어떤 기사를썼는지가 더 중요해진 시대다. 기자 개인의 브랜드가 독자에게 각인될 기회가 많아졌다. 기자가 훗날 회사를 떠나서도 말 그대로 콘텐츠 크리에이터로 살려면 이러한 흐름을 알아야 한다. - P172

그의 답변은 좋은 콘텐츠란 결국 시청자의 삶에 하나의 선택지를 더하는 일임을 알게 한다. 어떤 방향이든 한쪽의 관점만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상상력을 더하는 것이 좋은 콘텐츠다. 이야기란 적절한 시간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에, 새롭거나 다른 관점을 추가하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 P176

당시 IPCC가 예측한 1.5도 상승 시점은 불과 몇 년 사이에 10여 년이 줄어 2022년 현재 2021~2040년도까지 앞당겨졌다. 멸종 시계는 점점 빨리 가고 있다. 이처럼 섬뜩한 예측에도 사람들은 기후 재앙을 자기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행동해야 바뀔 수 있다는 기후과학자의 외침은 역설적으로 나 하나가 관심을 가져봤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낳는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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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 생각나네.

그런데 법정화 현상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을까? 우리는 이미 법정화 현상의 외부를 상상하기 힘든 상황에 놓인 것일까? 이에 답하려면 콘텐츠와 관심경제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관심경제란 관심에도 비용과 효과가 있다는 것을 전제해 이를 경제적 논리로 파악하는 개념이다. 관심의 산출물은 정보인 만큼 정보와 관련이 큰 정치, 경제, 군사 분야에서 발전한 개념이었는데, 누구나 정보 처리 전략을 고민해야 하는 정보 과잉시대가 도래하면서 관심경제의 논리가 대중의 일상에도 침투하게 되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의사 결정에서 개인이 참조할 수 있는 정보량은 이전 시대의 소박한 실천 지침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 P115

수입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뒤늦게 상업 출판이 고개를 들었다. 방각본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제작된 방각본은 최소 500부 이상을 찍었다. 품질은 조악했지만 관원들에게 내리기 위한 국가의 출판물이나 친척과 이웃에게 나누어 주기 위한 개인 출판물과 달리 서적 보급에 기여했다. 다만 필독서조차 구하기 어려워 베껴 써야 하는 열악한 현실의 대안이었을 뿐 강고한 도덕주의가 여전히 출판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 P131

그러면서 원하는 정보에 접근하기 위해 길을 둘러 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었던 거시적 관점과 부가적 정보는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텍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부가적으로 획득하는 정보가 오히려 더 가치 있을 가능성을 간과하면 곤란하다. - P136

한 영화가 특정 장면을 지루하게 묘사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시간 끌기가 아니라 어떤 예술적 의도를 담고 있다. 따라서 상영시간을 온전히 사용할 때 제대로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러닝 타임은 결코 자의적으로 조절해서는 안 되는 절댓값인 셈이다. 그렇다면 유튜브나넷플릭스는 왜 그런 기능을 굳이 집어넣은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겠지만, 간단히 말하면 예술작품이기 이전에 콘텐츠이기 때문이다. 콘텐츠는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소비의 대상으로, 소비에서 중요한 것은 가속이다. 20세기가 무의식을 발견한 감속의 시기였다면, 21세기는 데이터를 대량으로 소비하는 가속의 시대다. - P155

심지어 자신의 입장이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여긴다. 우리 자신이 특정 콘텐츠의 생산물일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없다. - P158

영화가 특정 공간에서 집단적으로 수용된다면 콘텐츠는 모든 공간에서 개인적으로 수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콘텐츠는 1979년에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1979년은 하루키의 첫 소설이 발표된 해이지만 워크맨이 출시된 해이기도 하다. 이후 우리는 음악을 어디서 - P160

든, 홀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배경 음악이 깔린 세상을 발견한 것이다. 하루키 소설이 가진 독특함은 관객이라는 대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데 있다. 그의 주인공들은 혼자 묵묵히 눈을 치울 뿐이다. 때로는 집중하면서 때로는 분산되면서.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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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5-27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의 폰트 디자인이 넘 맘에 들어요!! (음,, 딴 얘기 하고 있는;;;)

햇살과함께 2022-05-27 23:32   좋아요 0 | URL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듯한 풍성함과 유기적 곡선이 특징인 블레이즈페이스 한글이라고 설명하네요 ㅎㅎ
매 호마다 주제에 어울리는 표지 글꼴!
 

미디어학자 헨리 젠킨스는 "결국 팬덤은 매혹과 좌절이 균형을 이룬 지점에서 생겨난다."라고 했다. 나 역시 팬덤 연구자로서 팬덤에 매료되고 그 문화적 가능성에 가슴 설레면서도, 동시에 팬덤의 한계를 느끼거나 팬덤이 오해받아 잘못 이야기될 때의 좌절 사이에서 연구한다. - P83

팬덤의 소비 방식이 누군가에게는 광적으로 보일 수 있고, 팬덤에 대한 과도한 역능 부여가 부정적인 행동들의 면죄부가 될 수 있다. 팬 활동을 하면서 헌신했던 대상이 사회적인 사건에 휘말리는 순간을 직면할수도 있다. 그러나 팬덤은 그런 장면을 스스로 직면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나는 만약 한계를 극복할 방법이 있다면, 그 가능성을 다른 누구도 아닌 팬덤의 내부 구성 주체인 팬들에게서 찾고 싶다. 그게 내가 팬덤을 존중하는 방법이다. 팬덤을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연구의 한계를 알면서도 가능성의 지점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이유다. - P85

실제와 허구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차이는 의문을 자아낸다. 어떤 지점에서 이런 감정의 차이가 유도된 것일까? 철학자 애덤 모턴은 악의 기본 특징을 분석하면서 ‘이해 불가능하다는 관점‘을 든다. 악의 이해 불가능성은 잔인한 행위를 한 타인을 이해하려 할 때 인간이 빠지는 혼란에 주목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연쇄 살인범을 대할 때 곧장 살인범의 쾌감을 상상하는 어려움에 빠진다. 그렇다면관객으로서 범죄 콘텐츠를 즐긴다는 것은 살인범의 쾌감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 바꿔 말하면 그에게 공감하게 된다는 것일까? - P93

철학자 애덤 스미스는 실제로 벌어진 사건에 공감하는 인간의 도덕적 감정 체계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데에도 적용된다고 말한다. 불행한 사건에 연루된 지인의 사정에는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그러한 불행을 일으키는 범죄자에는 분노하는 바로 그 공감 체계가 작품의 주인공과 서사를 대할 때 그대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 P97

스미스는 더 나아가 관객이 작품 속 인물에 공감하는 정도가 클수록 미적으로 더 훌륭한 작품이라 평가받는다고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훌륭한 이유는 작품의 서사가 사람들의 공감을 잘 이끌어 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분법적인 선과 악의 구도가 바탕인 스미스의 논의를 인물과 상황의 다면적인 관계를 취급하는 현대의 범죄 콘텐츠에 바로 적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도덕과 예술의 관계를 연결지은 스미스의 철학은 범죄 콘텐츠를 비평할 때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단초를 제공한다. - P98

형사사법에서 피해자중심주의란 범죄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피해자의 진술과 관점을 고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범죄 사건의 처리 과정은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범죄자가 저질렀는지, 범죄자가 그 행위를 책임져야 하는지, 죄가 있다면 어느 정도의 벌을 받아야하는지 등 범죄자의 죄와 벌을 정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기 쉽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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