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아시아인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짐승이라는 것
우리가 제일 모르는 것, 우리가 끝끝내 여자라는 것 - P9

나의 ‘시하기‘, 여행하기는 일종의 ‘여자하기’와 ‘짐승하기‘이다. 나의 시는 여자하기와 짐승하기라는 끝없는 ‘하기‘의 도정 속에 있는 일종의 작용이다. 나의 시는 한사코 나이면서 나와 다른 것, 나 아닌 것, 낮은 것, 분열된 것, 작은 사람들을 향해 가는 하기의 작용이다. 만약 - P10

시인이 이 과정에 개입하지 않거나 이 과정을 멈춘 자리에 붙박여 있다면, 그가 설사 리얼리스트라 자부하더라도, 그는 리얼하지도, 시하지도 않는 것이리라. 그는 다만 명언 제조자이거나 은유가, 아니면 센티멘털이 리얼이라 믿는 자일 것이다. 물론 이 하기의 과정은 감응하기의 선을 타고 간다. 하지만 그 도착은 끝없이 유예되어서 시하기는 어딘가를 향해 열린 채 그저 강물처럼 흐르면서 실재할 뿐이리라. - P12

여자하기와 짐승하기, 아시아하기는 이미 나에게 와있었으나 여행 이전에는 알 수 없었다. 이들의 부재하는 듯 존재하는 속성은 시 텍스트에서 시가 재현의 지연을 통해 결국 하나의 시적 구성체로서 드러내고야 마는 ‘시성詩性‘처럼 소리 없는 포효와 같았다. 이미 도래해 있었으나 알 수 없었던 것, 그것의 발자국 내딛음이 곧 부재의 운동이 되는 것, 미지가 되는 것. 설인처럼, 죽은 시인처럼, 부처와 쥐처럼 존재하는가 하면 부재하고, 부재하는가 하면 존재하는 것. 미지이면서 괴물이고, 괴물이면서 안개인 것. 그리고 유령인 것. 그러나 분자적이면서도 연결망인 것. - P15

여자하기는 일종의 여행이다. 이 여행은 여자의 몸으로 겪는 복수적이고, 관계적인 경험이다. 몸의 경험을 사유하기이다. 사유하기는 공동체하기이다. 여자하기의 여행은 그 나름의 궤적이 있다. 이 여행은 길 아닌 길로 가는, 다방면으로 준동하는, 이분법의 고착을 넘어서는 가기이다. 수직적인 것들과 중앙제동장치와는 상관도 없는, 여행하는 나라의 정부로부터도, 떠나온 나라의 정부로부터도 이방인인 사람, 바리공주처럼 이쪽에서 저쪽을 여행하는 자, 지금 있는 여기에서 지금 떠나갈 거기로 접속해나가는 길이 있을 뿐, 그 길의 증식이 있을 뿐, 사이를 건네주는 뱃사공인 여행자, 일종의 무정부상태, 계보도 조상도 없는, 모국어가 낯설어지는 상태. - P18

짐승하기는 퇴행이나 미성숙이 아니다. 일탈이나 (역)진화가 아니다. 내가 쥐를 썼다고 해서 내가 쥐로 퇴행하거나 쥐의 미성숙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 아닌 존재와의 모든 ‘하기‘이다. 벌거벗은 생명하기이다. 스스로 그러하기,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라는 두 겹(인간짐승)의 이미지하기. 짐승하기는 정서적 유대다. 짐승하기는 짐승으로 취급하기, 인간 이하로 보기와의 자리바꾸기이다. 나는 짐승하기를 통해 사람과 짐승 혹은 유령 사이의 어딘가에 있게 된다. 나와 짐승이 서로 흐릿해져서, 어떤 비인칭 지대를 만들고 다시 그곳을 우리가 통과해 간다. 서로에게 서로를 조금씩 내어주는 다른 주파수의 세상을 만들어가면서, 그 세상에서 서로의 삶을 변용해간다. 그리하여 짐승하기는 분열하기이다. - P19

여자짐승아시아하기는 나의 글쓰기를 이루었다. 여자짐승아시아하기는 짐승하기에서 식물하기와 풍경하기, 색깔하기 등등으로 점점 나아갔다. 이것은 내가 글쓰기를 통해 근원을 찾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위계 없고 본질없는 평평한 네트워크의 세계, 잠재적인 것을 실재의 세계로 만난다는 것이다. 나의 글쓰기는 짐승과 사물과 풍경의 비밀을 운송하는 여행자처럼 나를 아시아라는 외밀의 광활로 떠밀었다. 나는 마치 제물인 나, 여자짐승을 실어 나르는 매개자인 나로서 아시아를 여행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나는 바리공주처럼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연결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 같다. 바리공주는 미리 죽은자로서, 혹은 ‘나‘에게서 ‘나‘를 밀어내버린 자로서 이미 - P22

짐승이 된 죽은 자의 세계를 여행해왔다. 죽은 자와 사물들로 이루어진 교감의 세계를 여행해왔다. 나는 여자짐승아시아라는 미지의 장소에 사는 희미한 얼굴들, 아직 여행해보지 않은 감각들을 나의 글쓰기로 만나보고자 했다. - P23

나는 이곳에 비행기를 타고 왔다. 이곳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뾔 (토하다)‘라 하고 자신들을 ‘뾔뽜(토하는 사람)‘라 부른다. 하긴 이곳에 도착하면 누구나 토하기 쉽다. 산소 결핍 때문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제국의 수도에서 출발해 이곳에 도착하는 기차가 개통되기 전이었다. 이곳에서도 그 냄새가 난다. 제국의 통치를 경험한 혹은 경험하는 국가들에서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냄새. 가설무대 곁에서 맡은 것 같은 값싸고, 날것이며, 가벼운 휘발성의 냄새. 날림공사로 세운 벽에서 솟아오르는 시멘트 가루의 냄새. 간판마다 씌어진 두 나라의 문자들, 현란한 색채의 깃발들, 가난의 남루와 살아남은 자들의 오염된 실상을 가린 차량들에서 나는 찌든 버터 냄새. 푸석한 낯빛의 얼굴들이 하릴없이 서성거리고, 거듭된 좌 - P27

절로 인해 깊은 슬픔이 드리운 검은 눈동자가 이방인을 쏘아본다. 추위에 튼 살갗에선 살비듬이 떨어져 날리는 것도 같고, 오랜 배반의 딱지가 덕지덕지 숨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꼭 내 나라 내 고향의 가축 시장에서 나는 냄새가 여기에서도 난다. 상대적으로 제국의 도시들에서는 무거운 쇠냄새, 우중충한 돌냄새, 석조 건물들의 하중을 몇백 년째 견디고 있는 땅 아래 켜켜이 묻힌 오래된 시체들의 냄새, 우람한 나무들이 땅 밑에서 끌어올린 물냄새, 곰팡이 냄새가 났었는데 말이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짙푸른 하늘, 우주 공간 어디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은 희박하면서도 싸늘하게 투명한 공기가 나를 감싼다. 먼저 동공이 열리는가 싶더니 두통이 몰려온다. 숨 쉬기가 힘들다. 힘껏 공기를 빨아들이는데도 양에 차지 않는다. 공기를 향한 갈증, 나는 언젠가 다른 대륙에서의 고산증을 교훈 삼아 용하다는 이뇨제를 복용해두었지만 여전히 두통과 구토가 몰려온다. - P28

13人의兒玹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1의兒侅가무섭다고그리오.
第2의兒侅도무섭다고그리오.
第3의兒侅도무섭다고그리오.
第4의兒侅도무섭다고그리오.
第5의兒侅도무섭다고그리오.
第6의兒侅도무섭다고그리오.
第7의兒侅도무섭다고그리오.
第8의兒侅도무섭다고그리오.
第9의兒侅도무섭다고그리오. - P32

第10의兒侅도무섭다고그리오.

第11의兒侅가무섭다고그리오.
第12의兒侅도무섭다고그리오.
第13의兒侅도무섭다고그리오.
13人의兒侅는무서운兒侅와무서워하는兒侅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 1人의兒侅가무서운兒侅라도좋소.
그中에2人의兒侅가무서운兒侅라도좋소.
그中에2人의兒侅가무서워하는兒侅라도좋소.
그中에 1人의兒技가무서워하는兒侅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適當하오.)
13人의兒技가道路로疾走하지아니하여도좋소.
— 이상, 「烏瞰圖 詩第一號」 전문 - P33

지독한 매연과 콜타르의 악취와 기계의 소음이 진동하는 공사 중인 길을 따라가노라면 이 나라 유목민 인부들의 참혹상이 온몸을 후벼 판다. 봉건 체제가 지나가자 제국이 달려왔다. 봉건체제가 손발을 묶어놓더니 제국은 손발을 강제 노역에 동원한다. 감옥이 열리니 공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 P35

그 책의 이름은 『바르도 퇴돌』이었다. 풀이하면 ‘둘do 사이bar를 듣다thos 그리고 깨우치다grol‘의 뜻이다. 둘 사이는 모든 사이를 일컫는다. 이를테면 황혼 직후의 보랏빛 시간을 듣는 것. 그 사이, 틈을 ‘들을 수 있으면‘ 영원히 자유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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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한 당신"은 트랜스젠더의 건강권을 본격적으로 조사한 국내 유일무이한 연구보고서가 아닐까 싶다. 그동안 국가 차원에서 한번도 시행하지 않은 트랜스젠더의 삶과 건강에 대한 설문조사 및 인터뷰, 국내외 자료조사, 관련 의료인 인터뷰 등을 통해 트랜스젠더가 차별없는 삶을 살고 차별없는 의료 접근권을 가질 수 있도록 제언한다.


얼마 전에 팟캐스트에서 듣은 휠체어 위의 유투-바 '구르님 김지우'님의 장애인 '오줌권'에 대한 얘기와 이 책의 트랜스젠더의 화장실 접근 문제가 겹친다. 구르님도 장애인 화장실이 없거나, 있더라도 접근이 쉽지 않다며 기본적인 '오줌권'에 대해 강조했는데, 트랜스젠더도 역시 화장실을 편하게 가지 못한다. 트랜스남성이든 트랜스여성이든. 남자 화장실을 갈 수도, 여자 화장실을 갈 수도 없다. 당사자 인터뷰를 보면 대부분 화장실을 참거나, 사람들이 없을 틈을 타서 급하게 다녀온다. 화장실도 맘 편히 갈 수 없는 삶이란. 젠더중립화장실, 가족화장실이 만들어져야 한다.


우리나라는 트랜스젠더에게 필요한 정신과 상담, 호르몬 요법, 성전환 수술(제거 및 재건 수술) 어느 것 하나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법적 성별 정정을 위해서는 성전환 수술이 반드시 필요하다. 성기 형성 수술 뿐만 아니라 성기 제거 수술까지 되어야 성별 정정이 이루어져 사실상 트렌스젠더의 몸을 국가가 통제하고 있다. 트랜스젠더이지만 수술까지는 원하지 않는 경우, 성기 형성 수술은 원하지만 성기 제거 수술까지는 원하지 않는 경우 등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는데 법적 성별을 일치키시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김승섭 교수님과 레인보우 커넥션 프로젝트의 노력으로 아마도 작년에 대학병원 최초로 고려대안암병원에 젠더 클리닉이 생기는 좋은 변화가 이루어진 것 같다. 이 책에 나온 추혜인 원장님의 살림의원이나 녹색병원 이외에도 더 많은 트랜스젠더 친화적인 병원이 생겨야 한다.


그 동안 의과대학에서 의대생을 위한 성소수자, 트렌스젠더 교육이 거의 전무하다고 언급되었는데, 얼마 전 휴머니스트에서 출판된 "차별 없는 병원"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개설된 <성소수자 건강권과 의료> 강의를 바탕으로 성소수자 의료 가이드를 담은 책이다. 이제 더 많은 의대에서 관련 강좌가 생겨나야 한다. 의대 차원에서, 학회 차원에서 이런 논의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소수자의 건강권에 대해 계속 연구, 조사하고 있는 김승섭 교수님 및 그 팀을 응원하며, "아픔이 길이 되려면"과 다른 책도 읽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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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22 1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수자들에게는 이런 기본적인 권리조차도 싸우고 주장하고 해야 얻을 수 있다는게 안타깝네요. 이런 책들이 많이 읽히고 문제제기 되면서 함께 사는 세상이 모두에게 좀 더 편해져야 할텐데 말이죠. 사실 트렌스젠더 분들이 화장실 가기가 어렵다는건 저도 얼마전에야 알았거든요. 관심이 없으니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거겠죠. 반성합니다.

햇살과함께 2022-08-22 17:39   좋아요 1 | URL
이 책 서두에도 ˝연구를 하며 가장 자주 떠올린 단어는 ‘무지‘였다˝라는 문장이 있어요. 저도 이 책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관련 책을 보면서 취업 같은 큰 문제 뿐만 아니라 화장실 가는 문제, 은행이나 관공서 등 신분 조회가 필요한 상황 등 기본적인 일상생활 조차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요... 계속 관심을 가지고 관련 책을 보려고 합니다~!
 

문제는 무엇을 참작할지가 전적으로 판사에게 맡겨져 있으며, 이 재량권을 악용하는 경우 견제 장치가 전무하다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 현실에서 정상참작감경은 재벌이나 권력자 피고인을 위해 기능하이 되어 상하의 베이스까고, 성범죄 가해자들의 사회 복귀를 돕는다. 판사들의 재량은 강자, 다수자, 가해자를 위해 발휘된다. - P115

이제 한국 판사들이 쥔 강력한 무기인 정상참작감경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어야 한다. 판사들은 정상참작감경이 부당한 권력에 대항해 시민들을 지키기 위한 무기, 특별법의 남발로 인한 형벌 불균형을 조정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 무기가 지키는 대상은 피해자, 약자, 소수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판사들 손에 쥐어준 그 무기의 주인이 판사가 되는 것이 합당한가? 입법 미비, 양형기준 미설정,
수사 과정 문제 등 외부로만 책임을 돌리는 판사들에게 자발적 변화를기대할 수 있을까? 권한은 빼앗기기 싫고 책임은 외부로 돌리면서 언제까지 그 무기의 주인으로 서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사법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 그저 무지몽매한 시민들 때문인가? 판사들은 그 무기의 주인이 아니다. 그 무기는 시민들이 판사들에게 빌려준 것이다. 따라서 무기를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언제든 ‘진짜 주인’이 그 무기를 찾을 것이다. - P121

‘보낼 수 있지만 안 보낸다.’
2020년 7월 6일, 세계 최대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사이트의 운영자 손정우를 미국에 송환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재판부(서울고법 형사20부: 강영수, 정문경, 이재찬)의 입장을 한마디로 요약해보면 이렇다. 또 ‘재량‘이다. 그동안 디지털 성폭력 범죄자들을 선처해왔던 한국 법원의 재량이 이번에 또 반영되었다. 재판부는 법대에서 엄중한 목소리로 "면죄부가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범죄인에게 적극적 수사 참여를 독려했지만, 법원의 선언은 틀렸다. 법원은 늘 그렇듯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었고, (예비) 범죄자들에게는 아무리 악질적인 디지털 성범죄를 저질러도 처벌이 약한 한국에서 재판받을 수 있으며, 몇 년(징역) 살겠다는 각오만 하면 수억 원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한국 법원이 디지털 성범죄를 양산한다고 비판받는 이유다. - P129

그러나 이것으로 한국 법원이 정말 변했다고, 변하고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위험하다. 시민들의 사법 감시가 소홀해지면 법대 위의 그들은 언제든 변화 전으로 돌아가려 할 것이다. 변화의 가능성은 백래시backlash를 부르기 마련이며, 그런 의미에서 변화를 위한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실제로 나는 2019년 말, 연대 활동 중단을 계획하면서 주변에 백래시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당시는 과거부터 이어져온 반성폭력 운동이 여론의 형성과 오프라인 시민운동의 활성화로 이어지는 중이었고, 입법적 보완을 포함해 수사와 재판 등 형사사법 절차의 전반에서 변화의 요구가 힘을 얻고 있었다. 물론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기는 여전히 힘이 부족했기에 가능성을 열어둔 것에 불과했지만, 그 가능성이 바로 가해자-강자-다수자를 움직일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 P144

2022년 5월 2일, 미국에서는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례를50년 만에 뒤집으려는 대법원 다수의견 1차 초안 전문이 공개되었다. "미약한 추론으로 이뤄진 ‘로 대 웨이드‘ 사건은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며, 두 사건(나머지 하나는 1992년 ‘가족계획연맹 대 케이시‘ 판례)은 임신중지 문제의 국가적 해결로 이어지기는 커녕 논란을 악화시키고 분열을 깊게 만들었다"는 게 초안의 주요 내용이었다. 긴즈버그Ruth BaderGinsburg 대법관의 사망 이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 합류하면서 보수색이 짙어진 연방대법원이 50년 전으로 역사의 시계를 돌리려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2022년 6월 24일, 결국 연방대법원은 대법관 9명 중 5명의 다수의견으로 ‘로 대 웨이드‘ 판례를 폐기했다. 심지어 보충의견을 통해 피임 (그리스월드 대 코네티컷), 동성혼(로런스 대 텍사스), 동성 성관계(오버게펠 대 호지스) 등을 인정한 대법원 판례도 재검토해야한다고 주장해 역사적 후퇴를 선언했다. - P145

"현재 형사사법절차에서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닙니다."
2010년 성폭력 피해를 입은 후 만나는 전문가들마다 내게 한 말이었다. 왜 피해자인 내가 수사·재판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범위가 좁은지, 어째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지 물으면 내가 당사자가 아니니 당연하다고 했다. 난 범죄 피해를 입었는데, 피해로부터 회복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왜 당사자의 지위에 있지 못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분과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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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비현실적으로 잘생기긴 했다. 얼굴이 정말 하얗고, 뭘 먹고 자랐는지 키도 정말 컸다. 떡 벌어진 어깨에 작은 얼굴이 조화롭게 어울릴 건 또 뭐란 말인가. 가끔 그런 인간들이 있다. 신이 여러 사람에게 공평하게 나눠 주어야 할 것들을 실수로 몰아준 것같은 인간들, 공부도 잘하고 집도 좀 살고 목소리도 달콤하고 노래도 곧잘 하는데 얼굴까지 훌륭한 사람.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좀 얄미운 사람. - P9

바닥은 말 그대로 냉골이야. 정말 추워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게 어떤 건지 몸소 알게 돼. 조금 자다가 다시 깨고 조금 자다가 다시 깨기를 반복해. 그러다가 잠이 몽땅 달아나 버리면 새벽의 한기 속에서 눈을 떠. 그러면 바로 코앞에 내가 저지른 일이 보여. 내가 저지른 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다가와. 눈을 질끈 감고 잘못했다고 아무리 외쳐도 잘 사라지지가 않아. - P51

엄마는 늘 내게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나는 늘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어 허덕인다. 엄마가 나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는 걸 알지만, 나는 한 가지 질문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왜 엄마는 나를 믿지 못할까. 나를 치켜세우는 듯한 엄마의 말 아래로 흐르는 더 큰 욕심과 내 가능성에 대한 의심을 왜 나는 매번 느끼고야 마는 걸까. "네가 하고 싶은 거 해야지."라는 엄마의 말은 내 귀에 이렇게 들린다. "단, 성적이 좋으면. 좋은 결과를 가져오면." - P58

실습생들은 모두 페란을 존경해. 페란과 마주치기만 해도 소름이 돋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을 정도로 말이지. 한 실습생이 간신히 용기를 내 질문했어.
"요리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입니까?"
페란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짐작이 가니? 이 문장을 필사하는 이순간에도 발끝부터 전율이 올라온다.
"모방하지 않는 것이죠."
되돌아보면 나는 그동안 늘 남을 모방해 살아왔던 것 같아. 한 번도 나답게 살지 못했어. 나다운 모습이 어떤 건지 관심조차 없었지. 만약 내가 단단히 중심을 잡고 살았다면 이렇게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수 있었을까? - P80

이 상상 놀이를 시작한 뒤로 시간이 정말 빨리 흘러. 여기에서 가장 힘겨운 일이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을 견디는 거거든. 시간이 빨리 흐르는게 어떤 의미인지 이곳에 들어온 적 없는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 엘불리를 알게 되고 조셉을 만난 덕분에 요즘 나는 천국에 잠깐 들어온 기분이야. - P82

"미래를 바꾸는 것도 좋지만 난 어떤 미래가 오든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인생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잘 헤엄치는 사람. - P90

"개학날 네가 내 이름 기억해 줬잖아."
아름은 책상에 올린 팔에 한쪽 턱을 괴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너 공부 잘하잖아.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건 고마운 게 아니라 미안해할 일이지. 같은 반이었는데도 넌 내 이름 몰랐잖아."
말문이 막혔다. 누구와 이야기하든 이렇게 말문이 막힌 적은 없었는데, 아름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너 그거 병이야."
"뭐?"
"모든 사람한테 사랑받아야 하는 거. 아니, 미움이나 무관심은 조금도 용납할 수 없다는 그 마음." - P105

아름의 말이 사실인 걸까. 아름이 혼자 다니는 게 마음에 걸리는 게 아니라 아름이 우리 반에서 내 가치를 몰라주는 단 한 사람이라 걸렸던 걸까. 다른 아이들처럼 아름에게도 인정받고 고맙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걸까.
아름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아름은 나를 이토록 예리하게 간파할 수 있었을까. 때로는 나 자신을 열렬히 탐구하는 일이 무색할 만큼 나를 단번에 간파하는 상대방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옛 성인들이 타인의 존재를 강조했는지도 모른다. 거울처럼 나를 비춰 주고 나의 음습한 부분에 빛을 비춰 주는 사람에게 숨기고 싶은 나의 일부분을 들켜 버리는것. 필요한 과정이겠지만 적잖이 당황스럽고 적잖이 불쾌한 일이다. - P107

연약한 마음을 잘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했지? 모든 사람이 다 강해지기만 하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겠지. 그렇지만 이곳에서 나는 강해지자고 많이 읊조려. 나는 신에 대해서 잘 모르고 종교도 없지만 이곳에서는 매일 기도해. 어떤 신이든 들어 달라는 마음으로. 내 잘못을 똑똑히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싸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여기를 나가도, 여기보다 더 무섭다는 사회에서도 잘 견딜 수 있게 강인함을 달라고. - P110

녀석에게 무슨 말을 더 해 주고 싶었느냐고? 조금 더 기다려 보라고 말해 주고 싶었어. 조금 더 기다리면 미안함과 죄책감과 후회와 원망이 파도처럼 몰려들 거라고. 나도 그랬으니까. 죽 도망만 다녔기 때문에 더 큰 폭풍이 되어 몰려들 거라고. 그 폭풍에 알몸으로 맞서는 건 죽을만큼 힘들겠지만, 견디다 보면 폭풍은 언젠가는 잠잠해진다고. 그러니이 악물고 견디라고. 내가 안다고. 온몸으로 겪어 봐서 잘 안다고. 그런 말을 해 주고 싶었어. - P114

그 좁은 곳에 갇혀 있는 동안 깨달았어요. 나 자신을 가장 괴롭힌 사람은 바로 나였다는 걸. 내가 나의 이미지, 평판, 외적인 평가에 휘둘리는 동안 내 안의 진짜 나는 외롭고 힘들었다는 걸, 완벽해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잡다한 생각이 끊이질 않았고, 그 잡다한 생각을 하느라 정작 중요한 생각을 할 기운이 없었다는 걸. - P137

"시 쓰는 거야."
아름의 목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시? 시인이 되고 싶은 거야?"
"글쎄, 그건 아직 모르겠어. 다만 내가 아는 건 시가 좋다는 거야. 시를 쓰는 것만으로도 나는 완전해지거든."
완전해진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저 한 단어를 들었을 뿐인데, 그 단어에 담긴 여러 의미와 형상이 열매처럼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 ‘완전‘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뿐인데 동주 생각이 났다. 영화가 끝났을 때 동주가 기다란 몸을 쭉 펴는 모습이 생각났고 물을 마실 때 움직이던 동주의 목울대가 생각났고 내 손을 잡은 동주의 보드랍고 따뜻한 손이 생각났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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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8-21 11: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첫째가 효자네요 ㅋ 덕분에 책도 구매하시고~!!! 우주점 구경가는거 정말 재미있는거 같아요~!!

햇살과함께 2022-08-21 13:58   좋아요 2 | URL
네~ 마침 주말 20프로 할인 쿠폰 있어서 뭘살까 고민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