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콤플렉스는 외국인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존재로 보지 않게 한다.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매우 선택적이고, 심지어 차별적이다. 우리의 서양 콤플렉스와 강자숭배주의가 얼마나 기막힌 수준까지와 있는가는 네팔 여성 찬드라 꾸마리 구릉이 겪은 참혹한 이야기에서선명하게 볼 수 있다.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일하던 찬드라 구릉이어느 일요일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돈을 내지 못했다는 죄때문에 경찰에 연행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행색이남루하고, 경찰이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말을 한다는 이유로 주거불명의 정신병자로 오인되고, 그 후 6년 반 동안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정신병원에서 갇혀 지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 P156

아마 찬드라 구릉이 영어를 말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터무니없이정신병자 취급을 받지는 않았을 게 틀림없다. 우리가 찬드라의 이야기에서 큰 절망을 느끼는 것은 설령 경찰이나 정신병원에서 시초에 본의아닌 오인이 있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 여성이 적어도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밝혀졌을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오래 방치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실제로, 찬드라가 수용되어 있던 병원 쪽에서는 얼마 있지 않아 이 여성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였고, 그래서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병원에서 잘못 파악한 이름ㅡ찬드라 고름 - 이 법무부에 비치되어 있는 외국인 노동자 명부에 보이지 않는다는 컴퓨터 조회의 결과 때문에 다시몇 년을 허무하게 정신병원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찬드라 고름‘이 ‘찬드라 구릉‘을 잘못 발음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약간의섬세한 배려만 있었던들 이 여성과 딸의 행방을 몰라 애태우던 네팔의가족들의 비극은 좀더 일찍 마감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 P157

문제는 가난이 아니라, ‘풍요로운‘ 소비문화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경제성장 없이는 인간다운생활을 할 수 없으리라는 어리석은 착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박멸해야 할 바이러스처럼 가난을 무조건 혐오해왔다. 그 결과 ‘품위있는‘ 가난과 그 의미에 관한 성숙한 인식은 이 사회에서극도로 축소되었고, 우리의 삶은 외형적인 풍요에도 불구하고-혹은그 때문에-내면적으로는 심히 병들고 공허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극적인 것은, 자립적인 생존의 기반이자 도덕적 삶의 원천인농경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감각이 상실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식량자급률 25퍼센트 수준 - 그나마도 석유에 의존해서 - 이라는 한심한 농업현실로는 한 사회공동체의 장기적인 존속이 명백히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목전의 이윤추구에 혈안이 되어, 마치 내일이 없는사람들처럼, 땅을 죽이는 일에 광분하고 있다. - P162

그들이 그렇게 되었던 것은 그들이 현상을 넘어 볼 수 있는 비전이나상상력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텐데, 그러한 상상력의 결핍은그들이 엘리트로서의 자각 이전에 당대의 밑바닥 풀뿌리 민중과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었던 점에 연유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신채호나 한용운의 경우, 최초에 얼마간의 사상적 혼란기가지난 다음에 그들이 끝끝내 사회진화론의 함정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자신이 늘 민중과 함께 있겠다는 철저한 평등주의 사상, 혹은 근원적 자유의 사상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P168

아마도 밑바닥에서도 가장 밑바닥으로 밀려난 소외의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 어머니에게는 "근대적인 교육이 가져다준 지식이나 이론은 없었지만 근대적인 개념에 지배당하지 않는 지혜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서경식은 말하고 있다. 요컨대, 그 어머니의 삶을 이끈 것은 흔히 지식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근대, 전근대,
탈근대 따위의 관념적 언어로써는 절대로 포착할 수 없는 생명에 대한본능적인 감각과 의식이었을 것이다. - P169

이 경쟁지상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출산과 보육과 교육 과정에서 단계단계마다 부모나 자식이나 어김없이 겪을 엄청난 시련과 스트레스를 사전에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떤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를 엄두를 내겠는가. 이것은 결코 출산장려금 따위로 해소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지금 출산율 저하라는 현상은 사람들이 대부분 무의식중에 행하는 ‘보이콧‘ 행위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 보이콧은 그동안 한국의 경제적발전의 성과를 긍정하고 미화해온 무수한 ‘교육받은‘ 엘리트들의 논리가 한마디로 허위이며 거짓말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 P171

일찍이 간디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정치적으로 해방되더라도,
만약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생존양식을 그대로 답습한다면, 그것은인도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지배자의 피부빛깔이 달라진 것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간디의 정치적 후계자 네루는 간디의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네루는 산업주의적 생산양식은 시대의 필연적인 추세라고 생각했고, 그의 지도 밑에서 인도는 현대적인 산업국가가 되기 위한 수많은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형 댐이 아직도 건설 중인 국가가 되었고,
교육받은 소수 엘리트들과 대다수 민중 사이의 소득 및 생활수준의 격차는 갈수록 심화되어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독립이전보다도 풀뿌리 민중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이 참담한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 P1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활동하다 보면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장애인 대표로서 어떤 마음으로 활동하고 있나?"라고. 나는 그 질문에 늘 당황하고 만다. 대표 자리에 올라가본 적도, 그럴 마음도 없는데 자꾸만 누군가는 나를 그 자리에 앉혀버리곤 한다. ‘대표‘의 자리에 쉽게 올려지는 것은 대단한 권리인 동시에, 사회적 소수자에겐 그 자체로 소수자성을 재확인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평범한 이야기를 했을 뿐임에도 사회에서 잘 들리지 않는 이야기라는 이유로(그것은 대부분 듣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또는사회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뿐이다) 대단한 용기를 가진 대표의 말하기가 되는 것이다. - P8

이 이야기는 대부분의 순간 운이 좋아서 어떻게든 우당탕탕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다. 글을 읽다가 자꾸만 울고 싶거나 성찰하고 싶다면 책을 덮고 잠깐 산책을 하는 것을 추천한다. 내가 개그를 해본답시고 쓴 건데 재미가 없거나(그렇다면 사과한다) 아니면 이제까지 ‘대표‘의 글을 소화하는 방식에 익숙해져서 사회적인 관념이 자꾸만 당신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일 테니까. 누군가를 일깨우거나 반성하게 만드는 역할에는 이제 신물이 난다. 많은 이가 편안한 마음으로,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앉지 않고 책갈피 사이로 들어오길 희망한다. - P9

현미는 어떤 아이가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어디라도 찾아 나섰다.

**장애는 완치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닌데, 어떻게 ‘나아’질 수 있을까? 장애가 있는 아이가 ‘나아진다‘는 말은, 종종 ‘비장애인과 비슷해진다‘는 욕망을 함축할 때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장애에서 ‘나아짐‘이라 함은 ‘걷게 됨‘이었다. 내가 받은 여러치료의 목적이 ‘조금 더 예쁘게 걷기, 오래 서 있기’에 맞춰져 있던 것처럼. 그때 현미와 나에겐 그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한 발자국 더 걸으면, 조금 더 예쁘게 서 있을 수 있게 되면 그것보다 기쁜게 없었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고, 내 몸을 좀 더 오래 쓸 수 있도록 치료를 받는다. 걷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연습한다. - P18

그렇게 현미는 서른의 시작부터 마흔을 훌쩍 넘어서까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았다. 그런 현미에게 언젠가 나는 ‘좋아지는 것‘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더는 걷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오랜 시간 내 몸과 마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내가 걸음을 연습하는 것보다, 걷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게 우선이라고 느꼈다. 이미 60대의 그것이 된 관절을 희생하면서까지 노력하고 몸을 바꿔가며 혼자 걷게 되는 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현미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다. 조금이라도 걸어야 하지 않겠냐고, 나중에 엄마가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고 조금 화를 냈다. - P19

하지만 난 정말 더는 걷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두 다리로 서 있는 것보다 휠체어에 앉아있을 때 해낼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비장애인 되기‘에서 벗어나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며 운동하고 싶었다. - P20

나 때문에 거부를 경험한 비장애인은 전 애인밖에 없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인생 거부의 시초에 현미가 있었다. 나는 순진하고 어렸을 20년 전의 현미를 떠올린다. 갑자기 삶에 떨어진 ‘장애‘를 가진 나로 인해, 이전까진 경험해보지 못한 거부를 온몸으로 감내했을 그를 상상해본다. - P22

때로는 창피하고 무서워서 내가 엉엉 울며 말리더라도 현미는 일단 싸우고봤다. 나를 키우는 건 싸움의 연속이었다. 현미는 원하지 않았는데도 활동가가 되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 P23

그때 현미가 말했다.
"어우 씨, 진짜 한 대 칠 뻔했네."
그렇게 그 문장은 내 마음속에 남아 부당함을 마주할 때 튀어나오곤 한다. 현미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장애를 숨기거나 집 안에 있게 한 것이 아니라, ‘한 대 때릴‘ 기백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 말은 내게 숨을 필요 없다고, 여차하면 그냥 ‘한 대 때리면서‘ 살아가면 된다고, 잘못은 내 존재에 있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 P25

현미 허락받고 가지 않았나? 몰라, 몰라. 기억이 안 나. 이런 거 쓰면 안 된다. (잠시 정적) 술도 몰래몰래 닭발이랑 시켜가지고 받아서 먹기도 하고. 엄마 술 걸려서 뺏기기도 하고 그랬어. (함께 웃음) 근데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그런 간호사들도 있었지. 왜냐하면 엄마들이 정말 애들한테 거의 매여 있으니까, 하루 종일 그러니까 "안 걸리게 잘하세요" 뭐 이런 간호사 선생님도 있고…… 하여튼 이런 거 쓰면 안 될 텐데. 보바스(병원이름)에서는 골뱅이 요리 잘하는 애가 있어서 골뱅이 무치고 쫄면 해서 나눠 먹고. 저녁 시간에 같이 둘러앉아가지고. - P35

카카오 웹툰 <열무와 알타리>와 네이버 베스트도전 <제제와 함께>처럼, 장애아와 함께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에 자꾸만 눈이 간다. 그들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안에 납작한 인물은 없다. 또 확실한 비극이나 희극도 없다. 그저 살아남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있을 뿐이다. 분명 누군가는 그들의 삶에서 자신의 삶을 읽고 또 살아갈 것이다. - P37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은 그 ‘관계‘로만 삶이 설명될 때가 많다. 장애인의 엄마, 장애인의 형제, 장애인의 친구처럼. 물론 관계로서의 인간도 아주 중요하지만, 종종 그것에 너무나 매몰되기도 한다. 그래서 관계로 다 설명되지 않는 개인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곤 한다. 나 역시 이번 인터뷰에서 그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현미의 용기와 사람을 살리는 살림력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현미는 나를 빼고도 충분히 다른 존재들을 살릴 수 있고,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이다. - P39

나 역시, 연구소에서 제품을 개발하면서
수없이 들었던 그 낯익은 단어가
귀를 울리고 가슴을 찢어놓는 거 같았다.
ABNORMAL, Abnormal, abnormal
어쩌란 말인가, 어떡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우리 가족은 abnormal한 삶 속으로
빠져야 한다는 말인가?
이 abnormal한 case를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건지…….….
난 정말 알수가 없었다.

abnormal, abnormal, abnormal 작성자 태균 2005.04.25 - P45

태균은 같은 맥락에서 언젠가 내가 몸에 대해 절망하고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때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여러 번 시뮬레이션도 해봤지만 결국에는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아쉽게도(?) 태균이 내게 사과하는 날은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내 몸에 대해 절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태균이 모르는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내가 ‘만약‘이라는 단어에 갇혀 원망할 대상을 찾아다녔던 순간을 하지만 결국에는 그 단어를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평화를. - P50

어쩌면 장애인들은 ‘만약‘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갈등에 빠지는 것을, 자신의 장애에 대해 절망하는 행위를 강요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갈등과 절망을 경험하는 게 장애인의 삶에서 마치 일생일대의 분기점이라도 되는 것마냥 미디어에서 초점을 맞추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만약‘이라는 말은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만 빛을 본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 달콤하면 달콤할수록 극대화되는 환상 같은 단어다. 나는 장애에 대해 절망할 시간에 구겨진 책을 다시 소중히 펴고 다른 이야기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 P54

어쩌면 걸음은 내게 그저 두 발이 교차하며 지면을 밀어내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정상‘으로써의 갈망일 수도 있겠다. 여전히 ‘비장애인처럼 보일‘ 수록 좋다는 가치 평가가 만연하기에, 보행이 가능한 장애인들은 휠체어를 졸업하고 목발이나 지팡이를 짚고, 혹은 걸음을 보조하는 로봇을 차고 걷길 권유받는다. 그것이 자신의 생활과 몸에 잘 맞는 경우도 있겠지만, ‘휠체어를 탐‘과 ‘걷는 것을 포기함‘이 대응하는 것처럼 여겨져 휠체어를 타지 않거나 그러길 강요받는 이들도 있다. - P58

"그래서 항상 나를 인식할 때, 그리고 유튜버로서의 나를 생각할 때 힘들어질 때가 많아요. 어쩌면 ‘보기 좋은 장애인‘이 아닌가 하고요"라고 내가 말했다. 이 고민은 유튜브를 시작하면서부터 날 괴롭혔다. ‘보기 좋은 장애인‘, ‘잘 팔리는 장애인‘으로서 영상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듣기 좋을 정도의 말만,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모습만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 평생을 비장애인 사회 속에서 살아온, 적당히 학력도 좋고 적당히 상냥해 보이는 착한 장애인 시청자들의 관심을 받고 일을 할수 있는 건 그 때문이 아닐까 하는 죄책감과 답답함이 늘 마음속에 존재했다. - P59

태균은 대답했다. "아빠는 그래서 지우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구분 짓는게 아니라 그 사이를 연결하는 사람이면 좋겠어." - P59

글을 슬프게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지원은 나의 결심을 쉽게 망가뜨리는 인물이다. 게다가 비극의 끝도 너무나 상투적이었다. 현미는 엉엉 우는 나를 안아주고, 전화기를 다시 바꿔 "지원아, 엄마랑 언니 네 밤만 더 자고 갈게. 할머니랑 잘 지내고 있어"라고 달랬다. 완벽한 대사다. 고전소설에 등장해도 될 것만 같은 이야기다. - P64

지원을 떠올리다 보면 자꾸만 어릴 적 순간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애는 격하게 부정하지만 나는 꽤 좋은 언니였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동생의 눈높이에 맞춰 그 애를 돌봤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멋지게 써두었는데, 그냥 같이 기어 다녔다는 말이다. 지원이가 막 뒤집기에 성공하고 ‘네발’로 기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 나의 이동 방식 역시 네발 기기였다. 덕분에 우리 집 바닥에는 기어 다니는 6개월과 일곱 살이 있었다. - P67

그리고 이런 건 절대 지도에 나오지 않는다. 나는 또 어떻게든 환승을 하고, 죽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 뒤 리프트를 타거나 휠체어로 한 정거장을 굴러 다음 역에서 타든 하면서 대충 살아간다. 그래서 도통 계획적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나도 1분 1초를 귀하게 쓰고 싶은데, 이 세상이 자꾸만 나를 리듬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든다. - P83

지하철은 ‘대중교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꾸 대중이라는 말 안에 장애인이 있는 것은 까먹는 모양이다(버스는 아예 모르는 게 확실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혜화역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불법시위‘(역사 안내문의 말을 빌리면 휠체어 승하차)를 막는답시고 역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막아버렸다. 만약 내가 오늘 혜화역에 갈 일이 있었다면, 나는 혜화역에 내렸다가 영문도 모르고 다시 전 역으로 돌아가 한 정거장을 휠체어로 건너고, 지각을 사과하느라 연신 굽신거려야 했을 것이다. - P85

그런데 승강장에 도착해서야 휠체어 리프트를 연결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휠체어 리프트는 탑승 30분 전까지 요청해야 하며, 그마저도 연결되는 칸은 휠체어석이 있는 칸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KTX를 개통한 지 20년이 넘었다는데, 어느 칸에나 휠체어 리프트를 연결할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관계자는 단 한 명도 없는 걸까? - P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의 유일한 방비는, 그 딱딱한 상태 속에 피신하여 자신의 내부에 형성되어 있는 그 매듭을 다시 한 번 단단히 졸라매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만이 계속 견뎌 내기에 가장 좋은 방법임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환상을많이 품지도 않았고, 또 피로 때문에 품고 있던 환상마저도 잃어버렸다. 왜냐하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 기간 중에 자기가 맡은 역할이 이미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역할은 진단하는 일이었다. 발견하고 보고 기록하고 등록하고, 다음에 선고를 내리고 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 P251

피곤하기라도 한 것이 차라리 행복이었다. 만약 리유에게 더 힘이 있었다면, 도처에 퍼져 있는 그 죽음의 냄새는 그를 감상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잠을 네 시간밖에 못 잤을 때, 사람이 감상적이 될 수는 없다. 만사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즉 정의의 눈으로, 끔찍하고 바보 같은 정의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즉 선고를 받은 사람들도 역시 그것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페스트가 발생하기 이전에는 그는 구세주 같은 대접을 받았다. 알약 세 개와 주사 한 대면 모든 것을 다 바로잡을 수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의 팔을 붙들고 복도까지 따라 나왔다. 그것은 흐뭇한 일이었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 P252

자리에서 일어서기만했던 코타르와 타루는, 당시 자기들의 삶 자체의 이미지인 그 광경들을 눈앞에서 보면서 그저 외로이 서 있었다. 무대 위에는 전신의 관절들이 풀려 버린 광대의 모습으로 분장한 페스트, 그리고 관람석에는 붉은 의자 덮개 위에 잊어버린 채 놓고간 부채며 질질 늘어진 레이스 세공품들의 모습으로 지금은 아무 쓸모가 없어진 사치. 그것이 바로 그들 삶의 이미지였다. - P262

"그렇습니다." 랑베르가 말했다. "그러나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 P272

"이 세상에 자기가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몸을 돌릴 만한 가치가 있는 건 하나도 없어요. 그렇지만 나 역시 왜 그러는지 모르는 채 거기서 돌아서 있죠."
그는 쿠션에 다시 몸을 푹 기대었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입니다. 그뿐이죠." 하고 그는 지친 듯말했다. "그것을 그대로 확인해 놓고, 거기서 결론을 끌어내 봅시다." - P273

"결국 죽는 거면서, 남보다 고통을 더 겪는 셈이지."
리유가 갑자기 그에게로 몸을 돌려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리다가 그만두었다. 자신을 억제하려고 애쓰는 빛이 역력히 보였다. 그러고는 다시 시선을 어린애에게로 돌렸다. - P280

"인간의 구원이란 나에게는 너무나 거창한 말입니다.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원대한 포부는 없습니다. 내게 관심이 있는것은 인간의 건강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건강이지요." - P2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년 9월 1빠

아침 먹으며 한 컷! 영롱한 표지!
이 책 저도 따라 읽기 하렵니다.
우선 집에 있는 <맨스필드 파크> 먼저.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2-09-02 08: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아직 못받았는데 와 엄청난 두께네요! ㅠㅠ

햇살과함께 2022-09-02 09:02   좋아요 2 | URL
저도 아침에 택배 와서, 표지 사진만 찍고 나왔어요.
이거 지하철에서는 절대 못읽겠는데요....

그레이스 2022-09-02 09: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터널증후군이 걱정되는 두께입니다 ㅋ

햇살과함께 2022-09-02 12:36   좋아요 2 | URL
네;; 함부로 들고 다니면 안되고 책상에서 읽어야 합니다 ㅎㅎ

수이 2022-09-02 09: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우람하네요 🙄

햇살과함께 2022-09-02 12:37   좋아요 1 | URL
우람하면서 우아하고요~

단발머리 2022-09-02 10: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아!!!!!! 이쁘고 산뜻하고 두껍네요!!

햇살과함께 2022-09-02 12:38   좋아요 1 | URL
두껍지만 산뜻할 수 있다!!! ㅎㅎ

scott 2022-09-02 1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햇살님이 올려주신 실물판 다락방 책 보니
제가 갖고 있는 원서
급 초라 ㅎㅎㅎ

햇살님에게 땡투하고
요책! 장바구니로 ~@@@@

햇살과함께 2022-09-02 12:39   좋아요 2 | URL
오~ 감사^^ 역시 1빠가 좋네요 ㅎㅎ
저도 집에 가서 실물을 자세히 뜯어봐야겠어요~~

책읽는나무 2022-09-02 1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예상보다 더 두꺼워 보여 후덜덜~~
그런데 왜 이렇게 책이 품격있어 보이죠?
사진을 잘 찍으셨나요??ㅋㅋㅋ

햇살과함께 2022-09-02 16:05   좋아요 1 | URL
표지가 품격있어서겠죠? 저는 사진 엄청 못찍어요 ㅎㅎ
새 책이라 표지 겉싸개가 부풀어서 더 두꺼워보일까요??

mini74 2022-09-02 13: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오후에 온답니다.ㅎㅎ 진짜 베고 자기 딱 좋네요. ㅎㅎ

햇살과함께 2022-09-02 16:07   좋아요 1 | URL
ㅋㅋㅋ 너무 높아서 목이 아플 것 같아요;;;
 

이러한 것들이 그 질병이 가져온 극단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질병이 그 후 더 기승을 부리지 않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각 기관의 기발한 대응책이나 도청의 처리 능력이나 나아가서는 화장장의 소화 능력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당국은 시체를 바다로 내던져 버리는 것과 같은 절망적인 해결 방법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리유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푸른바닷물 위에 일어나는 시체들의 징그러운 거품을 쉽사리 상상했다. 또 만약 통계 숫자가 계속해서 상승한다면 어떠한 조직도, 그것이 제아무리 우수한 것이라 해도, 거기에 견딜 수는 없을 것이고, 도청이라는 것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첩첩이 죽어서 쌓일 것이고, 거리에서 썩을 것이고, 또 공공장소에서는 죽어 가는 사람들이 당연한 증오심과 어리석은 희망이 뒤섞인 심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붙잡고 매달리는 꼴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 P235

무시무시한 불행은 오래 끌기 때문에 오히려 단조로운 것이다. 그런 나날을 겪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페스트를 겪는 그 무시무시한 나날들이 끝없이 타오르는 잔혹하고 커다란 불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발바닥 밑에 놓이는 모든 것을 짓이겨 버리는 끝날 줄 모르는 답보 상태 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 P236

즉, 그 시기의 커다란 고통, 가장 심각한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고통은 바로 생이별의 감정이었으며 페스트의 그 단계에 나타나는 생이별의 감정에 대해 새로운 기록을 남겨 놓는 것이 양심적으로 필요 불가결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당시에 있어서 - P236

고통 자체는 그것의 비장감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 P237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들은 빈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페스트의 지배 속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도시에서는 이제는 아무도 거창한 감정을 품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은 단조로운 감정만 느끼고 있었던이다. "이젠 끝날 때도 되었는데." 하고 시민들은 말하곤 했다. 왜냐하면 재앙이 계속되는 기간 중에 집단적인 고통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또 실제로 그들은 그것이 끝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말들은, 초기에 있었던 열정이나 안타까운 감정은 찾아볼 수 없는 채, 다만 우리에게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는, 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성이 비쳐 보이는 말들이었다. 처음 몇 주일간의 그 사나운 충동이 사그라지자 낙담이 뒤따랐는데, 그 낙담을 체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역시 일종의 일시적인 동의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 P238

다른 사람들로 말하면, 그들은 밤낮으로 자기네들의 일에 몰두하고 있을 뿐 신문도 보지 않고 라디오도 듣지 않았다. 그리고 혹 누가 어떤 결과를 알려 줄라치면 거기에 흥미가 끌리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딴 데 정신이 팔린 채 무관심한 태도로 듣고 있었다. 그것은, 고역에 지칠 대로 지쳐서 그저 일상적인 자기 일에 과오나 없으면 그만으로 여기다 보니 결정적인작전도 휴전의 날도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된 대규모 전쟁의 전투원에게서나 상상할 수 있는 무관심이었다. - P2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