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가 이 책을 소환하였고, 나도 이 역병이 끝나기 전에(끝나기는 하나…) 다시 읽어보자 생각하였으나 계속 미루다가 올해 6월 중순경에 읽기 시작했다. 20대에 읽었는데, 그때의 죽은 쥐떼 이미지가 잊히지 않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던 와중에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6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 일어나니 목이 많이 부어있었다. 전날 다녀온 영화관과 저녁 먹은 식당의 에어컨이 세서 좀 추웠는데 냉방병인가. 워낙 냉방병에 잘 걸리는 인간인지라. 그날은 2년반 만에 처음으로 교회를 가야하는 아침이었다. 코로나로 좋았던 점 중에 단연 최고는 합법적으로(?) 교회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으나, 이젠 눈치상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인지라…. 다시 가기로 한 첫날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침 먹기 전에 진단키트를 했고 음성이었다. 냉방병이네, 하고 교회를 가서 반쯤 졸다가 집으로 왔는데 목이 더 아프고 약간의 두통과 근육통, 오한, 기침이 있었다. 그래서 낮잠을 자고 점심을 먹고 책을 좀 보다 다시 낮잠 자기를 반복. 계속 식은땀이 나고 저녁에는 목은 좀 괜찮고 열은 나지 않아서 냉방병에 의한 감기인가 보다 했다. 여름감기는 개도 안걸린다지만, 나는 여름이나 환절기마다 감기에 걸리고 한번 감기에 걸리면 한달씩 가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했다. 작년에도 5월에 열이 나서 코로나 검사를 했지만 음성이었고 감기와 비염 알레르기로 한달 동안 기침을 동반하고 약을 먹었기에. 올해도 또 올해의 감기와 왔나 보다. 이번에는 열이 나지 않고 특이하게 식은땀이 많이 나네 했다. 아무튼 일요일은 그렇게 기운없이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다행히도(?) 첫째 방에서 격리 아닌 격리를 하면 혼자 지냈다. 월요일 아침에 다시 목이 부었고 계속 식은땀이 나고 기침이 나는 와중에 출근해서 병원가기 전에 진단키트를 해야지 하고 진단키트를 챙겨서 회사로 갔다. 사무실 가서 노트북을 켜고 커피를 내리고 진단키트를 별 생각없이 하였으나 으잉? 기다릴 것도 없이 C가 아닌 T에 바로 선명하게 줄이 생겼다. 갑자기 멍해지며 이걸 어쩌지??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첫째가 수요일부터 기말고사인데 나 때문에 시험 보러 학교 못가면 어쩌지. 그리고 그날 오후에 엄마가 미국여행에서 돌아오셔서 오후 반차 내고 공항에 마중 갈 계획이었는데 망했네. 일단 바로 집으로 가서, 남편에게 전화하고, 집 근처 병원가서 양성 확인하고, 어제부터 머물던 첫째 방에 있다가, 마침 가족 중에 전세 일정이 맞지 않아 입주 전 비워 둔 아파트가 있어서 그곳에서 격리하기로 하고 짐을 싸고 저녁에 남편이 퇴근길에 마트에서 1주일치 식량을 사서 실어다 주었다. 그래서 1주일 동안 홀로 격리하고 지냈는데, 목이 아프고 두통과 기침하는 것 외엔 많이 아프진 않았고 약 때문에 너무 졸려서 수시로 자는 것 외엔 잘 지냈다. 다행히 회사에서 나를 찾는 일도 많지 않아서, 회사일과 집안일에서 해방된 1주일! 격리 기간 동안 5일 정도는 내내 비가 와서 밖에 나가지 못하는 답답함도 크지 않았다.



7일 격리이니 7(!) 챙겨간 책은 4권쯤 읽었나?.







나의 유러피언 스타일(?) 아침식사






비 온 후 화창하게 갠 하늘과 구름






그렇지만 나의 기침은 격리 이후에도 8주간 계속되었다처방약을 3주간 먹다가 항생제 과다복용으로 인한 복통과 설사로 중단하고 한약을 4주간 먹고 겨우 2주 전에야 기침이 멈추었다.


아무튼 페스트는 250페이지까지 읽다가 코로나로 중단하고 다른 책만 읽다가 며칠 전에 2달만에 다시 집어 들었고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200페이지부터 거슬러 올라가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의사로서의 직업적 소명과 냉철함, 성실함을 가진 의사 리유. 그 소명이라는 것이 거창한 대의가 아니라 매일 묵묵히 자기 앞에 주어진 환자를 돌보고 병세를 파악하고 사망을 선고하며 페스트를 직시하는 것이다. 리유라는 사람을 나타내는 이런 문장들이 너무 좋다.


리유는 머리를 흠칫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저 매일매일의 노동, 바로 거기에 확신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 나머지는 무의미한 실오라기와 동작에 얽매여 있을 뿐이었다. 거기서 멎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 자기가 맡은 직책을 충실히 수행해 나가는 일이었다. - P60


잠시 후, 의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 신문기자의 행복에 대한 조바심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리유에 대한 그의 비난은 정당했던가? ‘선생님은 추상적입니다.‘ 페스트가 더욱 성해져서 일주일에 사망 환자 수가 평균 오백 명에 달하고 있는 병원에서 보낸 그날들이 정말로 추상적이었을까? 그렇다, 불행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일면이 있다. 그러나 추상이 우리를 죽이기 시작할 때에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추상과 대결해야 한다. 다만 리유는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P120


리유는 갑자기 피로를 느낀 듯이 일어섰다."옳은 말씀이에요, 랑베르, 절대로 옳은 말씀이에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금 하시려는 일에서 마음을 돌려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일이 내 생각에도 정당하고 좋은 일이라 여겨지니까요. 그러나 역시 이것만은 말해 두어야겠습니다. ,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 하고 랑베르는 돌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
일반적인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 하고 랑베르는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어떤 것이 내직분인지를 모르겠어요. 아마 내가 사랑을 택한 것은 정말 잘못일지도 모르겠군요." - P216


"인간의 구원이란 나에게는 너무나 거창한 말입니다. 나에게는 그렇게까지 원대한 포부는 없습니다. 내게 관심이 있는 것은 인간의 건강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건강이지요." - P285

 

코로나를 겪었기에 카뮈가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욱더 사실적으로 이해되고, 페스트가 요동치는 기승전결의 과정들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아슬아슬하지만 끝내 종결이 선언되어 도시가 다시 개방되지만, 그러나 숨어 있던 페스트가 언젠가 어디선가 나타날 수 있음을 암시하며 소설은 끝맺는다. 우리는 아직 코로나도 끝나지 않았지만, 코로나 이후에 또 다른 바이러스가 올 것임을, 그 간극이 점점 더 짧아질 것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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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09-06 18: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3월에 나라 잃은 슬픔과 함께 코로나를 겪어서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잘 보내셨다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유러피언 스타일 넘 근사한데 양이 적네요. 하하하.

햇살과함께 2022-09-06 20:46   좋아요 1 | URL
단발님 심적 괴로움과 함께 더 힘드셨겠어요. 입맛이 없어지더라고요~ 약 먹으려고 세끼 챙겨먹긴 했지만요~

단발머리 2022-09-06 20:48   좋아요 2 | URL
근데 저 진짜 궁금해서 여쭤보는거에요. 상추에는 드레싱 없나요? (소스성애자)

햇살과함께 2022-09-06 20:5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저도 드레싱 없이 잘 안먹는데
미처 드레싱은 못챙겨와서 그냥 풀만 먹었어요 ㅋㅋㅋ

단발머리 2022-09-06 20:55   좋아요 2 | URL
어휴 다행입니다 ㅋㅋㅋㅋ드레싱 없이 잘 드시는 분인줄 알고 깜짝 놀랐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햇살과함께 2022-09-06 21:39   좋아요 1 | URL
ㅋㅋㅋ 샐러드는 소스맛이죠

독서괭 2022-09-06 19: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페스트 읽으시던 와중 코로나가 왔군요~ 후유증이 길어서 힘드셨겠어요.
그런데 전 유러피안 아침식사 넘 맛있어 보입니다.. 아 배고파~~ 얼른 저녁 먹어야겠어요 ㅎㅎ

햇살과함께 2022-09-06 20:52   좋아요 2 | URL
이제 코로나로 기억될 책이네요.
격리 땐 제 몸만 챙기면되서 괜찮았는데 후유증이 더 힘들었어요~ 제 주변에도 기침 한달씩 가는 분이 많더라고요. 괭님도 몸 관리 잘하세요!

바람돌이 2022-09-06 22: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에고 고생하셨어요. 근데 또 많이 아프지만 않다면 집안일에서 해방되고 온전히 혼자서 지낼 수 있는 곳이 있었던 것도 괜찮은듯요. ^^ 저도 얼마전에 페스트를 읽었는데 이 코로나 시국에 페스트를 읽는건 또 각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햇살과함께 2022-09-06 23:52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캠핑의자에 앉아 책 보며 졸며 혼자 여행 온 기분도 내고 ㅎㅎ 고생은 1주일 독박살림한 남편이 ㅎㅎ

책읽는나무 2022-09-06 23: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목이 많이 아프셨을텐데 유러피안 식사!!!
소스 빠진 상추!! 토스트!!
그래도 커피와 주스가 있어 다행입니다^^
상추를 토스트 안에 집어 넣어 드셨음 나았을래나? 생각했습니다.
제 아들 녀석 지난 달 코로나 걸렸을 때 일주일 내내 목이 아파 음식을 잘 못삼키는 것 같았거든요.ㅜㅜ
암튼 페스트 책은 햇살님께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강렬한 책이 되었군요^^

햇살과함께 2022-09-06 23:55   좋아요 2 | URL
네 커피랑 드리퍼는 잘 챙겨가서 다행이었어요~ 커피 안가져갔으면 탈출했을거에요^^:; 저도 아침에는 목이 많이 아프더라고요..

새파랑 2022-09-07 06: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저 기침이 멈추셨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코로나 하면 <페스트>를 떠올리시겠네요. 7권 책 모두 재미있어 보입니다~! 전 저중에 세권 읽었었네요 ㅋ

햇살과함께 2022-09-07 09:37   좋아요 2 | URL
기침은 너무 괴로운 후유증입니다...
그 이후에 7권 모두 다 읽었는데, 다 좋았습니다.
그래도 아플 땐 레베카가 최고네요~

mini74 2022-09-07 20: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7일 격리에 7권! ㅎㅎ 그 와중에 아침식사 넘 맛있겠어요 ~ 고생많으셨어요. ㅠㅠ

햇살과함께 2022-09-07 21:30   좋아요 1 | URL
ㅋㅋ 여행갈 때 항상 여행일수 만큼 책 가져가는 만용을.. 한권 밖에 못읽을 거 알면서도..
 

그때 벤뉘 스카케가 다급히 식당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서른 살인 스카케는 벌써 경사였다. 전에는 스톡홀름에서 살인수사과 소속으로 일했지만, 좀 멍청한 행동으로 상관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드는 짓을 벌인 뒤 스스로 말뫼 전출을 신청했다. 스카케는 성실하고 양심적이고 다소 순진한 청년이었다. 몬손은 스카케가 좋았다.
"스카케의 도움을 받아." 몬손은 바클룬드에게 말했다.
"흥, 스톡홀름 출신 따위를." 바클룬드는 꺼림칙한 듯 말했다. - P31

그런 가설도 가능하지, 근거가 좀 부실하기는 해도 스카케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말을 꺼내진 않았다.
"물론 이건 하나의 가설일 뿐이야. 좋은 수사관은 가설에만 의존하지 않아. 하지만 현재로서는 다른 수사 방향이 떠오르지 않는군." - P39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그리스."* 크반트가 대답했다.

* 스웨덴어로 ‘Polis, polis, potatisgris‘는 ‘경찰, 경찰, 돼지 같은 경찰‘이라는 뜻으로, 이 시절 스웨덴 시민들이 시위할 때 경찰을 조롱하며 외쳤던 구호다. - P51

아이가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그리스‘라고 말한 것도 아니었어.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라고 말했지. 아이는 아직 말을 제대로 못 하는 세 살짜리 꼬마였고.*

*스웨덴어로 ‘Polis, polis, potatismos‘는 ‘경찰, 경찰, 으깬 감자‘라는 뜻으로, 위에서 말한 유명한 구호와 발음이 비슷하긴 하지만 아무 뜻도 없는 말이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소시지란 스웨덴 거리에서 흔히 파는 평범한 간식으로, 으깬 감자나 새우 샐러드를 곁들인 것이 기본이고 빵에 끼워서 아예 핫도그처럼 먹는 경우도 흔하다. 따라서 아이가 "으깬 감자"라고 말했다는 대목은 영 난데없는 말이 아니라 경관이 먹고 있던 으깬 감자를 곁들인 소시지를 보고 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 P53

"네. 맙소사, 엄청 취했었죠. 게다가 어제도 진탕 마시는 바람에 아직까지 숙취가 있습니다. 이 빌어먹을 더위 때문이에요."
끝내주는군, 마르틴 베크는 생각했다. 숙취에 시달리는 형사가 숙취에 시달리는 목격자를 조사하다니, 아주 건설적이야. - P89

"최대한 빨리." 말름이 결연하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자네에게도 모자의 깃털처럼 자랑스러운 업적이 될 거야."
"저는 모자가 없습니다."
"농담할 일이 아니야."
"하나 사면 되기는 하죠."
"농담할 일이 아니라니까." 말름이 거듭 꾸짖었다. "급한 일이기도 하고." - P119

마르틴 베크가 방 열쇠를 맡기려고 그쪽으로 가자 파울손이마르틴 베크를 빤히 쳐다보았다. 완벽하게 공허하고 나른한 그 시선에 주변의 다른 세 사람까지 고개를 돌려서 마르틴 베크를 보았다.
비밀경찰은 이미 납시었다. - P123

"그럼 자네 덴마크어를 할 줄 안단 말이야?" 몬손이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그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스카케가 휘둥그런 눈으로 말했다. - P138

마르틴 베크에게는 상황을 잽싸게 파악하는 능력이 있었다. 스스로도 그 점이 자신이 선택한 직업에서 가장 큰 자산이라고 느꼈다. 몬손이 이쑤시개를 황동 재떨이에 버리고 남자와 악수하는 동안, 마르틴 베크는 핵심적인 요소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 P153

오전 10시 조금 전, 콜베리는 베스트베리아의 남부 경찰서를 나섰다. 경찰서는 조용하고 평온했다. 인력이 부족한 탓이었다. 반면 일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복지국가가 제공한 비옥한 표토에서 어느 때보다 다양한 범죄가 왕성하게 자라고 있었으니까.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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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 - 휠체어 위의 유튜-바, 구르님의 유쾌하고 뾰족한 말 걸기
김지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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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님의 당부의 말에도 불구하고, 자꾸 눈물샘이 자극되어 눈시울이 붉어졌으나, 그래도 울진 않았다고 밝힙니다. 더 많은 ‘관종력’을 장착하여 다양한 활동과 영상에서 ‘뾰족한‘ 구르기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개그 시도도 재미있었으니 안심하고 자꾸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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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그리고 그 당시에는 페스트가 비교적 안정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리유가 계획했던 조직이 손이 모자라 쩔쩔매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기진맥진하도록까지 노력을 쏟고 있던 의사들이나 조수들이었지만 그 이상의 노력을 요하는 상황을 상상해볼 필요는 없었다. 이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그들은 다만 규칙적으로 그 초인적인 일들을 계속해야만 했다. - P307

그들은 다시 옷을 주워 입고, 말 한마디 입 밖에 내지 않은채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은 똑같은 심정이었고, 그날 밤의 추억은 달콤한 것이었다. 멀리 페스트의 보초병이 보일 때 리유는, 타루도 역시 자기처럼, 페스트가 조금 아까 잠시 동안이나마 우리들을 잊고 있어서 좋았는데 이제 또다시 시작이군,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P335

진했다. 당국은 날씨가 추워지면 병세가 수그러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오히려 페스트는 며칠 동안 계속된 겨울의 첫추위에도 물러갈 줄 모른 채 기승을 떨었다. 더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사람이란 기다림에 지치면 아예 기다리지 않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도시 전체는 미래의 희망 없이 살고 있었다. - P336

"됐어요." 하고 그는 말하는 것이었다. "그놈들이 다시 나와요."
"누가요?"
"쥐 말이에요, 쥐!"
지난 4월 이후로 죽은 쥐는 단 한 마리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 다시 시작된다는 건가요?"하고 타루는 리유에게 물었다.
노인은 손을 비비고 있었다.
"놈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꼭 봐야 한다니까요! 정말 기분만점이죠."
그는 살아 있는 쥐 두 마리가 거리로 난 문으로 해서 자기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이웃 사람들의 말로는, 그들 집에서도 그놈들이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서까래 위에서 몇 달을 두고 잊고 살았던 바스락 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리유는 매주 초에 실시되는 총괄적 통계의 발표를 기다렸다. 통계는 병세의 후퇴를 표시하고 있었다. - P345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미온적인 고찰 밑바닥에는 동시에 무절제한 희망이 걷잡을 수 없이 꿈틀대고 있었는데, 그 정도가 심한 나머지 시민들도 그 사실을 자각할 때가있어, 그럴 때면 그들은 부랴부랴 무절제한 희망을 지워 버리고 아무래도 해방은 오늘내일에 올 것은 아니라고 자신을 타이르는 것이었다. - P350

월요일에는 희생자의 수를 부쩍 늘려 놓았다가 수요일에는 거의 대부분의 환자를 다시 살려 준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처럼 숨을 몰아쉬거나 허둥지둥 서둘러 대는 꼴을 보면 마치 페스트는 신경질과 싫증으로 붕괴되고 있는 것 같아 보였으며, 그것 자체에 대한 자제력과 동시에 그의 힘의 바탕이었던 그수학적이며 위풍당당한 효율성마저 상실해 가고 있는 듯싶었다. - P351

아닌 게 아니라 가장 보잘것없는 것이나마 주민들에게 희망이란 것이 가능해진 그 순간부터 이미 페스트의 실질적인 지배는 끝났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 P353

그러나 그런 예외들이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만족에 그 어떤 손상이 있었던 건 아니다. 아마도 페스트는 아직 다끝나지는 않았으며, 페스트가 장차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몇 주일을 앞당겨서 기차가 끝없이 긴 철로 위로 기적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고 선박들이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이튿날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이 진정되면 의혹은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당장에는, 도시 전체가 이제까지 돌의 뿌리를 박고 서 있던 그 어둡고 움직임 없는 밀폐된 장소를 떠나기 위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마침내는 생존자들을 만재한 채 전진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타루와 리유도, 랑베르와 다른 사람들도, 군중 틈에 섞여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땅에 발이 닿지 않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 P356

그것은 페스트에서 해방된 밤이었다. 그리고 추위와 햇빛과 군중에게 쫓긴 질병이 시내의 어둡고 깊은 곳들에서 빠져나온 다음 이 따뜻한 방 속에 숨어들어 와서 타루의 맥없는 몸을 향해 최후의 맹공격을 가하고 있는 듯싶었다. 재앙은 더 이상이 도시의 하늘을 휘저어 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방안의 무거운 공기 속에서 나직이 색색거리고 있었다. 리유가 몇 시간 전부터 듣고 있던 것이 바로 그 소리였다. 그는 그곳에서도 페스트가 멎고, 그곳에서도 페스트가 패배를 선언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 P372

그의 온몸은 발작적으로 경련하더니 이제는 그의 모습을 번쩍번쩍 비추던 번개도 점점 드물어졌고, 타루는 그 폭풍 속으로 서서히 표류해 가고 있었다. 리유 앞에는 미소가 사라진 채 이제는 무기력해져 버린 하나의 마스크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그에게 그렇게도 친근했던 그 인간의 모습이, 지금은 창끝에 찔리고 초인간적인 악으로 불태워지고 하늘의 증오에 찬 온갖 바람에 주리 틀리면서 바로 그의 눈앞에서 페스트의 검은 물결 속으로 빠져들어 갔지만, 그로서는 이 난파를 막는 데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빈손과 뒤틀리는 마음뿐, 무기도 처방도 없이 기슭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는 눈물이 앞을 가려 리유는 타루가 갑자기 벽 쪽으로 돌아누워 마치 몸 한구석에서 가장 근원적인 어떤 줄 하나가 툭 끊어지기나 한 것처럼 힘없는 신음 소리를 내며 숨을 거두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 P376

타루는 아마 그렇게 살아왔던 모양이어서 환상이 없는 생활이 얼마나 메마른 생활인가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희망 없이 마음의 평화는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아무도 단죄할 권리를 인간에게주지 않았던 타루, 그러면서도 누구도 남을 단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심지어는 희생자가 때로는 사형 집행인 노릇을 하게 됨을 알고 있었던 타루는 분열과 모순 속에서 살아왔던 것이며, 희망이라곤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스러움을 추구하고, 인간에 대한 봉사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고 했던 것일까? 사실 리유는 그런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 P379

"그냥요. 그분은 그저 무의미한 말은 하지 않으셨어요. 어쨌든 나는 그분이 좋았어요. 그냥 그랬다 이겁니다. 딴 사람들은 ‘페스트예요. 페스트를 이겨냈다고요.‘ 하고 난리를 치죠. 좀더 봐주다간 훈장이라도 달라고 할 판이죠. 그러나 페스트가 대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인생이에요. 그뿐이죠."
"찜질을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오! 염려 마세요. 나는 아직 멀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 죽는 것을 보고 죽을 거예요. 나는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단 말입니다."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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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지내던 특수교육 담당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장애학생들과 실습을 나갔다 돌아오던 때를 회상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학생을 집에 내려다주고 난 휠체어를 반납하려고 가 - P92

지고 돌아가는데, 다리가 너무 피곤해서 지하철에서 잠깐 휠체어에 앉아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 시선이 너무 많이 느껴지는 거야. 모든 사람이 지나가면서 한 번씩은 날 쳐다봤던것 같아. 너무 당황스럽고 부끄러워서 5분도 못 가서 다시 일어났어." - P93

‘정상성‘에서 벗어났다고 여겨지는 이들이 특히 그렇다. 누군가 내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할 때 그것은 당신의 오해이며, 나는 정당한 방식으로 삶을 살아왔고, 옳은 일을 했다고 끊임없이 말해야 하는 삶이다. 그 ‘오해‘라는 것이 타인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않으려는 그저 힐난일지라도 흥분하지 않고 점잖게 ‘설명‘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면 곧바로 ‘피해망상‘이라든가 ‘예민‘이라는 말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소수자의 경험과 감정은 자꾸 공적인 논의에는 포함될 수 없는 주관적이고 별거 아닌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 P107

나는 어릴 때 어른이 되면 내 ‘병‘이 나을 줄 알았다. 장애가 있는 어른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와 닮은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커가면서 내 ‘장애‘가 낫지 않는다는 것, 장애와 함께 평생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난 뒤 마흔 살이 되면 스스로 죽을 거라고 말하곤 했다. - P112

유튜브를 시작하기 전에는 주변에 장애인이 전혀 없었다. 나는 늘 비장애인 사회 속에서 살았고,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어디에도 나와 같은 몸을 가진 이는 없었다. 유튜브를 시작하고 나서야 나와 같은 몸,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 일인지를 처음 알았다. 장애인콜택시를 타면 허리가 울려서 아픈 것, 사람들의 무례한 행동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수학여행을 갈지 말지 고민하는 것등 평범하고 사소한 일이 나만 느끼는 게 아니라는 감각. 여태살아오면서, 나는 비슷한 ‘몸‘에 대한 공감을 처음 느껴본 것이다. 짜릿했다. - P114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싶어서‘ 영상을 만드는 것도 맞지만, 이 문장의 어느 한켠에도 장애인의 자리는 없다. ‘사람 - P115

들‘이라는 말, 그러니까 예상 시청자에 장애인은 포함되지 않으니까. ‘장애인들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어서‘라는 말은 이상하다. 나는 여태 예상 시청자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이들을 위한 영상을 만들고 싶었다. - P116

‘모두에게 따뜻한 세상‘을 외치는 ‘감동‘ 카메라 영상들은 정말 모두를 위한 영상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이 영상들이 전체하는 시청자의 자리에 장애인은 없다. 장애인이 피부로감각하는 수치와 불안은 고려하지 않았으니까. 앞과 뒤의 일은 모두 편집해버리고, 단지 ‘영웅 비장애인‘의 모습만을 보여주니까. 정말로 그 상황 속에서 장애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자 한다면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지,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원인은 무엇이며 우리가 어떤 사회구조를 바꿔야 비슷한 일이다시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지금 그대로의 평온한 일상이 뭔가 잘못되었으며 영상을 지켜보는 자신역시 그에 일조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불편한 장면은 없다.그것은 ‘보고 싶은’ 슬픔이 아니니까. - P121

또한 어떤 영상들은 장애인이 ‘나 자체‘로 살아가기 어렵게 만든다. 장애는 고난이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역경이라고생각한다는 말. 그 역경을 이겨내면서‘ 얻은 깨달음을 공유하는 이야기. 그 이야기에서 깨달음을 얻은 시청자들이 열광하는것은 영상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기보다 언젠가 장애를 벗어던지고 일어날 허구의 인물이다. 댓글창에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제 앞 스크린에 비치는 인간이 ‘정상‘의 인간으로 회귀하기를 바란다는 말이 쏟아진다. 꼭 노래를 들어보셨으면 좋겠어요, 세상을 보게 되시면 좋겠어요, 건강해지세요. 그들의 마음이 너무 선량해서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 P123

"다음에 나랑 거기 가보자. 며칠 전에 갔는데 길도 넓고 차도 많이 안 다녀서 네 생각났어."
친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앞만 보고 걷던 주영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길의 울퉁불퉁한 정도, 가게의 턱, 인도의 마감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떠올렸다. 한 사람을알아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시선을 배워가는 것이다. 생애 전체를 이해할 수는 없어도 세상을 마주하는 방법과 감각을 알아가고 서로에게 번져가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세계가 확장된다. - P129

‘장벽이 없는 극이란 무엇일까?‘ ‘이 모든 게 의미가 있는 일일까?‘ 하는 망설임이 우리 사이에도 있었다. 충분한 정보를모두에게 전달하겠다는 목표는 실패한 것일 수도, 애초에 허상 - P137

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판타지 안에서는 다양한몸을 상상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길 바랐다. 내가 느낀 안전함의 감각을 또 다른 타지의 몸들이 느끼길 바라면서. - P138

<소극장판-타지>는 막을 내렸다. 후련하다면 후련하고 아쉽다면 아쉬운 작품이었다. <소극장판-타지>는 국립극단의 첫장애연극, 나는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공연한 최초의 장애인 배우가 되었다. ‘첫‘이라는 타이틀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장애를 가진 이는 자꾸만 ‘최초‘ 혹은 ‘첫걸음‘이라는 메달을 목에 걸곤 하니까. 꾸준히 해도 자꾸 첫걸음만을 내딛게 된다고, 보름 연출은 말했다. - P138

그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전동 키트를 장착한 휠체어를 타게 되었다. 혼자 이동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의 태도, 하고 싶은 일, 눈높이와 세상에 맞서는 마음가짐이 급속도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 힘으로 휠체어를 움직이게 된 순간 세상이 확장되는 기분을 느꼈다. - P147

내가 몸을 생경하게 인식하게 된 것은 장애가 아니라 ‘여성‘의 몸에 관심을 가진 순간부터다. 어린이책 베스트셀러Why 시리즈는 《똥》 그리고 《사춘기와 성》 편만 유난히 닳아있다는 유머가 있는 것처럼, 나 역시 그러한 호기심 어린 발달 과점을 착실히 겪어온 어린이였다. 똥 이야기에 까르르 웃는 시기를 거쳐 가슴이나 생리 같은 것에 관심이 생긴 나는 <사춘기와 성》 편을 아주 (좀 많이) 정독했는데, 그 책에 나오는 여성의몸이 내 신체를 들여다보게 한 계기가 되었다. - P161

그러다 《어쩌면 이상한 몸》이라는 책을 만났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 그러니까 20년 전 장애인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많은 것들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장애가 있는 여성의몸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었다. 30대부터 60대까지의 ‘언니‘들 이야기였다. 이 책의 맨 앞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장애여성: ‘장애 여성’이라고 띄어서 표기할 경우에 ‘장애’가 ‘여성‘을 수식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장애여성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이야기하고, ‘수식어-명사‘라는 구분이 하나로 연결된 언어로 이해될 수 있도록 붙여서 ‘장애여성‘으로 표기했다. - P171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의 오해였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기록으로 남기는 데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해야 했던 ‘치료‘가 어떤 목적이었든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것은확실히 말할 수 있다. 다음 치료 자세로 넘어갈 때마다 "지우야, 선생님이 잠시 여기에 손을 올릴게"라고 내가 확인할 수 있도록 전달한 이후 동작을 이어가는 치료사들을 만난 뒤 나의해석을 좀 더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수혜자와 피수혜자의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치료 과정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 맺음이란 그런 것이다. - P180

혼자만의 질문으로 간직하기엔 물음표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나는 이 경험과 문제의식을 담아 영상으로 만들었다. 영상 속 나는 화재 대피 훈련으로 불 꺼진 텅 빈 교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져 있다. 이 영상이 업로드된 이후 우리 학교는엘리베이터가 비상시에도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거쳤다. 담임선생님은 내게 사과의 말씀을 전해주셨고, 나는 12년만에 처음으로 다음 비상 대피 훈련부터 아이들과 함께 참여했다. 소방청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대피 매뉴얼을 전달해주기도 했다. 나 말고도 모든 이가 ‘상식‘에 포함되는 대피 방법을 숙지할 수 있기를. - P206

"야, 뭘봐!"
소리를 친 것은 주영이었다. 나는 너무나 당황해서 주영을 바라보았다. 주영은 나를 오랫동안 응시하던 사람에게 정확히 시선을 두고 화를 내고 있었다. 붐비는 곳이었고 서로를 지나치는 상황이었기에, 날 쳐다보던 이는 이내 시선을 피하고갈 길을 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떤 균열을 느꼈다. 화를 내도 된다는 것, 불쾌한 시선의 원인은 내 몸에 있지않고 허락 없이 쳐다보는 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 마음에 단단히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야 뭐해, 싸움 나면 어떡해. 그 애를 말리는 척했지만 그 호통에 누구보다 신난 사람은 나였다. - P217

나의 소중한 공동체, 사회학과 ‘악반‘에서 ‘당연한 내자리‘를 찾는 경험도 했다.
"행사 진행 시 고려해야 할 신체적 특성이나 식이 지향 등의 사항이 있을까요?"
새내기 안내 전화를 받았을 때 내게 닿은 질문이었다. 이것이 나와 이상한 공동체, 악반의 첫 만남이었다. 장애를 언제 밝혀야 할지 망설이고 있던 나는 "네, 제가 휠체어를 타고 있어서요. 행사 장소에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대답했다. - P244

너무나 당연한 일. 가고 싶을 때 가고, 가고 싶지 않을 때가지 않는 것은 내게 당연한 일이 아니었는데, 그 순간 내게도 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함께하려면 뭔가 ‘더‘ 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세상의 많은 것이, ‘더‘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닌 이제까지 ‘덜‘ 준비해왔던 일인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 ‘덜‘들을 찾아 모두가 당연한 자리를 누릴 수 있도록 보충하는 일이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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