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좋은 책인데, 각 잡고 읽어야 하는 책이라, 완독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막연히 감정적으로 건드려서 읽기 힘들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상상하던 내용의 책이 아니었다. 철저히 법률적인 관점에서, 법조전문가보다 더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에 기반하여,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을 적시한 책이다판사들이, 검사들이, 변호사들이, 경찰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출소한 가해자로부터 보복범죄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고 호소하자 경찰은 ‘당하면‘ 오라고 했다. 내가 ‘당하면 여기 이 자리로 와서 말할 수 있겠냐고 했지만, 자기들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더라. - P20


이런 안일한 경찰의 태도에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이 보복을 당하고 오지못하게 되었던가.



형사사법 절차는, 사법 시스템은 성폭력 피해 이후 피해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길 중 하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길은 험로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길을 따라 걸어도 목표한 곳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도 그 길에서 말, 시간, 자리를 되찾지 못하고 도착 지점에서 승소했다는 판결문 하나만을 받았다. 이렇게 ‘법대로‘는 최선의 선택지가 되기엔 아직 불안하고 거칠며 좁은 길이다. - P521


D님은 경찰 수사, 검사 조사, 재판과 재판 이후 까지, 사법 절차 과정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에 대해 조목조목 기술하고 있다. 또한, 가해자 및 그 주변인들의 2차 가해, 보복성 고소, 가해자의 죽음 문제,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 모욕, 합의 강요 등 피해자가 피해 회복을 위해 재판이라는 사법 절차를 선택하기로 결정할 경우 가야할 길을 정확하고 처절하게 안내한다.



피해자가 숨을 고르고 사회 복귀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데, 사회는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이 없다. ‘회복적 사법 restorative justice‘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정작 피해자의 실질적 회복에 대한 관심은 적은 것이다. 신변보호, 주거와 생활비 등 경제적 지원, 신체적·정신적 건강과 관련된 각종 의료적 지원, 직업교육 등 사회 복귀를 위한 지원, 안전망 구축 등 아주 기본적인 회복 지원도 여전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긴 ‘응보적 사법 retributive justice‘ 역시 제기능을 못하는 상황에서 아직은 지나치게 큰 기대일 수 있다. 그렇기에 ‘법대로‘하는 것은 피해자가 여전히 많은 상실을 각오해야 하는 선택지다. 법적 절차가 종료된 후 피해자가 사회로 복귀하기까지 사법 시스템은, 사회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 P89


설령 피해자는 재판에서 승소하더라도 그 기쁨도 잠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상처투성이인 상태에서 새로운 출발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 D님은 회복적 사법이 필요하나, 아직 우리는 응보적 사법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말한다.



"현재 형사사법절차에서 피해자는 당사자가 아닙니다."
2010년 성폭력 피해를 입은 후 만나는 전문가들마다 내게 한 말이었다. 왜 피해자인 내가 수사·재판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범위가 좁은지, 어째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지 물으면 내가 당사자가 아니니 당연하다고 했다. 난 범죄 피해를 입었는데, 피해로부터 회복을 해야 하는 사람인데, 왜 당사자의 지위에 있지 못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분과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 P161


형벌은 범죄자에 대한 국가 형벌권의 발동, 즉 범죄행위에 상응하는 형벌을 가함으로써 재범 방지와 사회 복귀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형사사법 절차는 가해자(피의자/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하고 형량을 정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피해자는 가해자의 범죄행위를 밝힐 ‘증인‘으로서 부수적 · 주변적 · 수동적 지위에 놓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응보‘는 제대로 되고 있는가? 아니다. 수사와 재판의 과정에서 당사자의 지위도 아닌 피해자에게 과도한 입증책임을 안긴다. 결과 역시 범죄의 피해와 해악이 불균형을 이루고 있어 제대로 된 응보도 되지 않는다. 결국 형사사법 절차를 거친 많은 피해자들은 피해를 온전하게 회복하지도, 사회에 복귀하지도 못하고 사라졌다. - P171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이고 뼈저리게 다가온 사실은 피해자가 사법절차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동안 막연히 검사가 피해자를 대변한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렇지 않다. 피해자는 사건의 증인일 뿐, 사건 정보를 제대로 받지도, 판결문을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따라 법적 절차는 철저히 가해자와 가해자 변호사의 주장에 따라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나서더라도, 경찰도, 검사도, 판사도 제대로 확인하거나 챙겨보지 않고, 가해자의 주장과 가해자의 사정만을 고려하여 다양한 정상참작을 통해 아주 가벼운 형을 결정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피해자가 동의했다/피해자가 동의했다고 가해자가 인식할 만했다

피해자는 당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피해자는 원래 이상했다

진짜 피해자라며 그럴 수 없다

모든 것이 피해자를 조종하는 배후의 음해와 모험이다

피고인의 정신 상태가 불안하다/피고인은 심신미약이다

피고인의 가정환경, 혼인 경험, 사회적 유대관계 등을 고려해달라

피고인의 나이를 고려해달라

신문 기술로 피해자 제압하기

잘못된 정보로 사실관계 흐르기

자료. 정보를 짜깁거라 왜곡하기

피해자를 고소하기/국민참여재판 신청하기

최후변론을 활용해 피해자를 공격하고 변호인 자신을 변호하기

P224-235

 

이런 악질적인 성범죄 전담전문 변호사들의 전략을 보면 너무나 천편일률적이고 유치함에도 판결에, 양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너무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나는 이제 연대를 더 확장하려 한다. 사법 시스템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 교육, 국제관계 등 다양한 사회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연계를 통해서만 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사법 감시 형태를 다양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기 위해 당신의 연대가 필요하다. 당신도 피해자의 그림자가 될 수 있다. 당신이 내민 손이 피해자를 살릴 수 있다. 당신이 다듬는 길이 결국 이 사회를 바꿀 것이다. 그러니 길로, 광장으로 나오길. 나는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 P523


마지막 5장에서는 서울에서 제주까지 디지털 성범죄 재판 방청기를 통해더 이상 지역 구분도 모호하고피해자도 특정 되지 않는 디지털 성범죄의 철저한 처벌을 위해 많은 시민의 재판 모니터링과 연대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다. 마지막에 첨부된 'n번방', '박사방', '프로젝트n번방' 피고인들의 재판 과정 및 결과와 형량의 일목요연한 표에서 결연함이 느껴진다.


D님은 이제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 연대를 넘어서 시스템의 문제 해결에 더 주력하고 있다고 한다. 일반인을 상대로 한 재판 모니터링 교육, 온라인 세미나 뿐만 아니라 법조인이나 예비법조인을 대상으로 한 강의, 심포지엄 참석 등을 통해 법조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형사 사법 시스템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책도 그런 활동의 일환일 것이다.

 

한 개인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많은 일을 짊어지고 있는 D님이 아프지 않고, 개인적 여유도 가지는 삶을 살기 바란다.

 

이 책의 마지막 더 깊이 읽기를 위한 자료에 여러 책들과 자료, 기사 등이 소개되어 있는데, 여러 관심가는 책이 있지만, 그 중에서 존재를 몰랐던 이 책을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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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10 13: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사놓고 읽지 아직 읽지 않았는데 햇살님 리뷰를 보니 정말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책은 정말 법조계 사람들이 제일 먼저 읽어야 하는게 아닌지.... 아직도 성범죄에 대한 법원의 판결 같은걸 보면 정말 분노가 솟구치는 적이 한두번이 아니니 말이지요.

햇살과함께 2022-10-10 16:48   좋아요 2 | URL
n번방 사건 이후 박사방과 프로젝트n번방 사건에서는 판결이나 형량에서 고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하나 여전히 부족하고 언제 백래시가 일어날지 모르니 두눈 부릅뜨고 지켜보아야겠어요!!

청아 2022-10-10 17: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피해자가 사법절차상 당사자가 아니란부분 저는 훑다가 발견했는데 충격이었어요.
그런 말도 안되는 문제들이 곳곳에서 가해자들 아닌 피해자들을 압박하는것. 그런
것들을 먼저 개선해야할것 같아요. 이렇게 가해자에 유리한 점들이 군사정부의 잔재라는 설명을 어딘가에서 읽었는데 답답합니다.

햇살과함께 2022-10-11 12:21   좋아요 2 | URL
민사와 형사는 법리적 개념부터 다르구나 라는 것을 절절히 느꼈네요..
형사 사건이라도 사건의 성격에 따라 ‘피해자‘의 지위나 당사자성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을텐데, 너무 일률적인 적용은 아닌지, 이게 우리나라만의 문제인지, 다른 국가들의 형사 사법 제도나 피해자 지위는 어떤지 하는 궁금증이 생겨서, 더 알고 싶어졌어요!

2022-10-11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1 2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2-11-03 16:04   좋아요 3 | URL
우리 형사소송법이, 옛날 군사정권 시절에 하도 피의자들, 피고인들에 대한 고문 등 가해행위가 심했어서 이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쪽으로 계속계속 발전해 왔고,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피해자에 대한 보호는 미흡했던 점이 있는 듯합니다. 최근에 피해자 보호에 관해 문제제기도 많고 절차상으로도 여러 규정이 들어오긴 했는데 실제로는 갈길이 먼 것 같아요.

독서괭 2022-11-03 16: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다 읽고 햇살님 리뷰 읽으러 왔습니다. 저도 리뷰 써야하는데 책이 묵직해서 쉽지 않네요~ 햇살님 리뷰는 중요한 부분 콕콕 집어주신 듯요^^
저는 이 책과 함께 <디어 마이 네임>을 같이 읽었는데(이건 현재진행형) 이책도 참 좋습니다!

햇살과함께 2022-11-03 17:01   좋아요 2 | URL
정말 리뷰 쓰기가 쉽지 않은 묵직한 책입니다...
그렇지만 독서괭님은 멋진 리뷰를 쓰실 것이므로, 기다리겠습니다~
오 그 책도 흥미롭네요. 읽어보고 싶어요~~
 

이제 서문 읽기 완료..
12월까지 완독하려면 주당 최소 100페이지씩 읽어야겠다.

하지만 이들보다 우리 프로젝트에 더욱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엘런 모어스와 일레인 쇼월터의 새로운 논증이었다. 그들의 작업은 19세기 여성 문인에게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학과 문화가 있었음을, 다시 말해 19세기에 분명하고도 풍부한 여성문학의 하위문화, 즉 여성들이 의식적으로 서로의 작품을 읽고 관계 맺는 공동체가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모어스와 쇼월터가 이 공동체의 역사 전반을 매우 훌륭하게 추적한 덕분에 우리는 중요해 보이는 몇몇 19세기 작품을 파고들 수 있었다. 우리는 후속 집필을 통해 20세기의 핵심적인 작품들을 유사한 방식으로 읽을 계획이다. 그 작품들은 남성 문학의 주장과 강제에 대응했던 여성문학의 원동력을 이해할 시금석이 되어주었다. - P21

데니즈 레버토프가 열기로 가득한 교육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시낭송을 위해 블루밍턴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수정/개정의 도취라고 묘사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었다. 그것은 지금은 너무 쉽게 폐기해버리는, 1970년대의 많은 초기 2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처한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었고, 문학적인 것이 개인적이었고, 성적인 것이 텍스트적이었고, 페미니스트는 속죄하는 존재였고 기타 등등! (그것들은 진정 계시였고) 이런 계시들을 냉소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로고스 중심적인 권위를 몇몇 이론가들이 말했던 ‘기원의 순간‘ 탓으로 잘못 돌리는 위험을 무릅쓴다 해도 인정해야 한다. 그때 그곳에 있었다는 건 축복이었다고. 그리고 나는 그 축복 중 일부가 마치 맛있는 후식처럼 우리와 함께 개종의 여정을 떠났던 최초의 학생들에게 나눠지기를 희망한다. 수전이 언급한 ‘눈맞춤‘은 분명 전기 충격처럼 짜릿했고, 우리 사이를 지나간 계시와도 같은 이해의 네트워크 자체였다. 그것은 아마 레버토프가 「마음속에서」를 썼을때, ‘자신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데 우리 모두가 동의했다는 의미다. 말하는 사람을 결코믿지 마라. 페미니스트의 분석을 믿어라. 적어도 지금까지 그렇다. - P33

샌드라: 육아, 어머니 되기, 어머니! 우리가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연구하고 쓰던 때를 되돌아보면, 우리 프로젝트에서 항상 핵심이었던 것은 모성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가부장적 시‘와 ‘가부장적 시학‘에 저항하면서 우리 세대의 모든 페미니즘 비평가처럼 창조성에 대한 대안적 수사를 찾아보려고 애썼다. 펜이 은유적으로조차 음경을 말하지 않는다면(그리고 음경은 확실하게 펜이 아니었다!) 자궁은 어떨까? - P36

이 질문이 시사하듯, 페미니즘 비평을 위해 19세기 연구는 여전히 탐색할 만한 중요성을 지닌다. 한편으로 그 시대의 성이데올로기는 여러 면에서 특히 억압적이었다. 또한 버지니아 울프가 오래전에 설파했듯, 그 시대는 여자들을 코르셋에만 감금시킨 것이 아니라, 모든 박탈과 불만족과 함께 ‘사적인 집‘에 감금시켰다. 다른 한편으로 그 시대의 미학적 정치적 명령은 광범위한 혁명 운동뿐만 아니라 여성의 상상력에서 나온 가장 풍요로운 산물을 만들어낼 만큼 영향력이 컸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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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콜럼버스가 ‘신세계‘에 도착한 이후 20여 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스페인을 중심으로 일어난 이른바 ‘인디오 논쟁‘은 이른바 ‘국익‘이라는 것이 얼마나 끔찍스러운 만행에 직결되는 개념일 수 있는지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기억될 수 있다. 당시 스페인 왕실의 신대륙에대한 정책을 좌우할 만큼 중대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이 ‘인디오 논쟁‘의 핵심은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즉 인디오의 ‘인간성‘에 대한 해석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즉, 인디오를 서구 백인과 똑같이 하느님의 아들, 딸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노예와 황금을 가져다줄 풍부한 잠재력을 가진 이신세계의 원주민의 인간됨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아메리카 땅과그 원주민에 대한 거리낌 없는 학살과 착취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 P184

오늘날 되돌아볼 때, 아메리카 토착민의 ‘인간성‘ 여부를 놓고 벌어진 16세기의 이 논쟁은 처음부터 터무니없는 것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자의 인간성 자체를 무시하는 정신적 습벽은 대항해시대에 본격화하여 이후 제국주의 시대를 통해 훨씬 더 강화되어 근대적 세계의 핵심적인 생존의 원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 P185

지난 백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개화기 이래, 한국인들이 열심히 적응하려고 해온 근대세계의 질서란 근본적으로,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대로,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타자의 불행이 전제되어야 할것"을 필수적인 요건으로 하는 ‘어둠의 체제‘였다. - P185

그러나, 오늘날 자유무역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에서 세계의 다수 민중의 삶이 가혹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은 단순히 그들에게 개발과 발전의 열매가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자유무역체제하의 무자비한 경쟁논리 밑에서 민중의 오랜 삶을 지탱해온 온갖 종류의 공동체적 상호부조의 관계망이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어버린다는 데에 재앙의 핵심이 있다고 할수 있다. - P193

그는 토착농민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돈의 논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애와 환대의 원리임에 주목하고, 이러한 생활원리가 가령서구 근대의 핵심적인 가치 중의 하나인 관용(tolerance)과 어떻게 근본적으로 다른지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관용은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강자의 너그러움의 표시이다. 그것은 약자나 소수자가 강자가 지배하고있는 기성의 질서에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될 때는 언제든 돌변할 수 있는 덕목이다. 따라서 관용은 근본적으로 불관용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비서구 세계 토착민들의 삶을 오랫동안 특징지어온 환대(hospitality)의 원리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타자에게로 향하는 존경과 포옹이다. 따라서 타자는 단지 베풂의 대상이 아니라, 타자를 포옹하는 사람 자신의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없어서는 안될 동반자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토착민들의 삶은 서구적 개인주의와는 거리가 먼 공생공락의 삶을 성립시켜온 것이다. - P194

그러나 우리는 미국적 문화, 생활방식은 세계평화와도, 민주주의와도, 지구의 건강과도 양립할 수 없는 본질적으로 낭비와 수탈을 구조화하고 있는 체제, 즉 근원적인 의미에서 범죄적인 체제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 P196

민주주의는 몇몇 제도로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단계에 이르러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돌보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원점에서 다시 시작되고, 순간순간 되풀이하여 쟁취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트에 의한 권력독점 현상이 구조적으로 강화되기 쉬운 오늘의 상황에서는 민주주의의 생명은 풀뿌리 민중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거리로 나오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음이 분명하다. 정말로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민중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정당하게 요구하고, 그들의 민주시민으로서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것이 허용되고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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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만 시집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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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09 19: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밀리 브론테의 시를 햇살님 덕분에 읽네요. 왠지 에밀리 디킨슨이랑도 비슷한 분위기인것도 같고.... 이 시대 여성들의 시는 뭔가 내면의 소리를 계속 읊조리는 느낌이랄까? 꾹꾹 눌러온 감정을 하나씩 하나씩 겨우 겨우 토해내는 느낌이랄까 하여튼 좀 그런 느낌이에요. 그래서 읽을 때 저도 감정적으로 좀 힘들어지네요.^^

햇살과함께 2022-10-09 23:17   좋아요 1 | URL
맞아요~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꾹꾹 눌려진 울분과 절망과 죽음에 대한 얘기도 많아 희망이라는 단어가 희망적이지 않은 시들이에요. ‘상상력’이 생을 지탱하는 힘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디킨슨 시도 어려울 것 같지만 읽어봐야겠어요~
 
[전자책] 레슨 인 케미스트리 2 레슨 인 케미스트리 2
보니 가머스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6월
평점 :
판매중지


상업 방송의 성공 공식을 거부하였음에도 잘리지 않고(?) TV 요리 프로 진행자로 성공하는 엘리자베스. 마지막 출생의 비밀까지. 드라마로 딱이다. ‘여섯시 저녁식사’ 클로징 멘트는 좋다. “그럼 얘들아, 상을 차려라. 너희 어머니는 이제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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