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가끔 그렇게 형광펜으로 줄을 그은 신문기사를 편지봉투에 넣어 보내오곤 했다. 언젠가는 편지봉투를 뜯어보니 조선일보기사가 나왔다. 그때까지 나는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거나 조선일보에 글을 실은 적이 없었다. 펼쳐보니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유미리에 관한 기사였다. 아버지는 유미리라는 이름에, 그리고 ‘방황과 절망이 빚어낸 문학성‘이라는 홍사중씨의 칼럼 제목에 각각 붉은 형광펜 칠을 해놓았다. 동봉한 편지에 아버지는 "나는 너를 믿는다. 네 소신껏 희망을 갖고 밀고 나가거라. 어짜피 人生이란 그런것이 아니겠냐"라고 써놓은 뒤, ‘아니겠냐‘의 ‘겠’과 ‘냐‘ 사이에 ‘V자‘를 그려놓고 ‘느‘를 부기했다.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아니겠냐‘ 라고 쓴 뒤에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중간에 ‘느’자를 삽입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이가 생긴 뒤에야 나는 그게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알게 됐다. - P74

나중에 나는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인생은 그런 게 아니었다. 점점 자기 그림자 쪽으로 퇴락해가는 뉴욕제과점 구석 자리에서 나이가 스무 살 정도는 더 많은 사람을 앞에 두고 앉아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바로잡는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자라는 만큼 이 세상 어딘가에는 허물어지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바로 인생의 본뜻이었다.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는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사이에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제아무리 견고한 것이거나 무거운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거나 녹아내리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안에서는 부식된 철판에서 녹이 떨어져나가듯이 검고 붉은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죽어서 떨어져나갔다. 밀려드는 파도에 모래톱이 쓸려나가듯이 자잘한 빛들이 마지막으로 반짝이면서 어둠 속으로 영영 사라졌다. 내가태어나 어른이 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말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운운하는 바보 같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때였으니까 나중에 신문을 받아들고는 무슨 신문기사에 ‘역전파출소 옆 뉴욕제과점이 집이기도 한 작가‘ 같은 표현이 다 실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는 또 누구란 말인가? 지금은 경기도에 사니까, 또 뉴욕제과점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누군가를 만나 나를 소개할 때면 "소설을 쓰는 아무개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아직도 고향에서 나는 ‘역전 뉴욕제과점 막내아들’로 통한다. - P75

직선제 개헌이 받아들여지고 대통령 후보들의 선거 유세가 한참일 때, 나는 세상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었지. 웃긴 생각이었어.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어. 영양을 덮치는 들개들처럼 사람들은 아름답고 소중하고 정의로운 것이라면 달려들어 추하고 더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려. 짓밟고 때리고 뭉개고 나면 아름다움이란 그저 찰나에만 존재해 영원한 것은 더럽고 야비한 것들뿐이야. 푸른빛이여, 바다라면, 바다의 한때나마 꿈일 수나마 있다면, 정의란, 아름다움이란, 사랑이란 바다의 한때나마 꿈에 불과한 거야. - P1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북선, 은하수, 솔~ 추억의 담배이름.
장미, 도라지, 백자, 한라산, 88도 기억난다 ㅎㅎ

1. 게이코
눈보라가, 검은보랏빛 어둠 속으로 두서없이 쏟아졌다. 그 눈보라 깊은 속까지 들어간 연통 끝, 위로 솟구치는 하얀 연기 아래로 누런 물방울 몇 맺혀 있겠다. 비스듬하게 물방울이 떨어지는 꼴을 눈여겨보지 않더라도 창으로 밀려와 부딪치고는 다시 허공으로 흩어지는 눈송이들만으로 바람의 세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삽시간에 천지사방이 그 바람 타고 올라선 자우룩한 눈안개였다. 눈기운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오토바이 뒤에 낚싯대를 싣고 떠나 갓밝이 날파람들이 서로 수런거리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말 못 하고 내일 오후까지는 이렇게 눈이 온다 했다.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마침 와뜰하던 차였다. 고립의 감정도, 무기력의 마음도 아니었고 다만 그 꺼물거리는, 혹은 반득이는 눈보라 앞에서 무너지는 가슴. 장막을 둘러친 그 시간을 잔드근하게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 P9

김씨가 뭐라고 더 퉁명부리기 전에 태식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된바람이 훅 얼굴로 밀어닥쳐 절로 두꺼비상이 됐다. 눈은 그쳐 있었다. 동 트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바닥에 깔린 눈 덕분에 주위가 희슥했다. 어디선가 닭 갖추는 소리가 들려와 소름이 돋았다. 태식은 주머니에서 거북선을 꺼내 물었다. 나라에서는 은하수도 만들고 솔도 만들었지만, 어쨌거나 태식은 거북선이었다. 거북선으로 담배를 처음 배웠으니까. 그러고 보니까 태식이 매캐한 담배연기를 처음 들이켰던 것도 열다섯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가고 싶은 곳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고작 제빵 기술자가 된 것뿐이지만. - P16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2-10-27 23: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뜰하다-꺼물거리다-반득이는- 잔드근 하게

우리 말 너무 좋네요!

한국어 사릉하는 연수옹 만쉐!^^

햇살과함께 2022-10-27 23:58   좋아요 2 | URL
와. 첫 단락부터 깜짝 놀랐어요~
모르는 순우리말 단어들 잔뜩^^
 

마거릿 풀러 찾아보자. 다미여에도 나오고.

하지만 영국 독자가 숙고하게 되는 것은 지성에 대해서이니, 지성은 우리 소설에서 어쩌면 가장 드문 자질이기 때문이다. 지성이란 정의하기 어려운 무엇이다. 단순히 총명함이나 지적인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감각, 즉 인생의 묘미란 사람들이 무엇을 하느냐, 혹은 그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하지만 설득 가능한 상대인 제3자, 다시 말해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과 소통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고 보는 감각이다. 그것이 『기후』의 인물들을 그토록 합리적으로 만드는 이유이다. 이자벨의 말은 이런 관계를 잘 보여 준다. - P92

왜냐하면 영국인이 아니라는 것이야말로 미국인이 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미국 작가의 교육에서 첫걸음은 그토록 오랫동안 죽은 영국 장군들의 지휘 아래 행군해 온 영국 단어들의 전 부대를 물리치는 것이다. 그는 <작은 미국 단어들>을 길들여 자기 명령에 따르게 해야 한다. 그는 필딩과 새커리의 학교에서 배운 것을 다 잊어버리고, 자기가 시카고술집의 사람들에게, 인디애나의 공장 사람들에게 말하듯이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첫걸음이다. 하지만 다음 걸음은 훨씬 더 어렵다.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 결정한 다음에는 자신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단계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 P101

그가 남들처럼 생계를 꾸리기 위해 처음으로 해본 일은 초등학교 선생이 되는 것이었는데, 생도들을 매질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만두고 말았다. 그는 매질 대신 말로 훈계하기를 원했다. 위원회에서 <그런 관대함>이 학교에 폐를 끼친다는 점을 지적하자, 소로는 엄숙하게 여섯 명의 생도에게 매질을 하고는 학교 운영이<자신의 방식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임해 버렸다. 무일푼의 젊은이가 실천하고자 했던 생활 방식이란 아마도 몇 그루 소나무와 웅덩이, 야생 동물, 그리고 인근에서 발견되는 인디언 화살촉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그는 벌써부터 그런 것들에 끌리던 터였다. - P120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보기에 이 새로운 희망에 도달할 기회를 주는 삶의 방식은 두 가지로, 하나는 브룩 팜같은 공동체 생활이요, 다른 하나는 자연 속에 홀로 사는 것이었다. 선택의 시간이 오자 소로는 단연 두번째를 택했다. <공동체로 말하자면, 나는 천국에서 기숙사에 가느니 지옥의 독신자 구역을 택하겠다>라고 그는 일기에 썼다. - P122

그의 강인하고도 고귀한 책, 모든 말이 성실하고 모든 문장이 작가의 기량을 보여 주는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묘한 거리감에 사로잡힌다. 그는 소통하려 애쓰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의 눈은 땅바닥 아니면 지평선을 향해 있다. 그는 결코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지 않으며, 반쯤은 자기 자신을 향해, 반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한 무엇인가를 향해 말한다. <내가 나 자신에게 말한다는 것이 내 일기의 모토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그는 썼으며, 그의 모든 책이 사실상 일기이다. 다른 사람들, 남자들과 여자들은 감탄할 만하고 아름답지만 그와는 거리가 멀었고 달랐으며, 그는 그들의 행동거지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초원의 개만큼이나 신기한> 존재들이었다. 다른 인간들과의 모든 교제가 그에게는 극도로 힘들었고, 한 친구와 다른 친구 사이의 거리는 측량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관계는 아주 불안정하고 실망으로 끝나기 십상이었다. 자신의 이상을 낮추는 것만 아니라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태세가 되어 있었지만, 소로는 그 어려움이 애쓴다고 극복될 성질의 것이 아님도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태어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동료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북소리가 박자에 맞든 종잡을 수 없든, 들려오는 음악에 맞추어 걷게 하라.> - P128

그는 야생적인 사람이었고, 결코 길들여지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에게 독특한 매력을 느끼는 것도바로 이 대목이다. 그는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다. 자연이 그에게는 우리와 다른 본능을 불어넣었으니, 우리가 모르는 비밀들을 속삭여 주었을지도 모른다. - P12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2-10-26 22: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리아 포포바의 책 <진리의 발견>에 마거릿 풀러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다른 책은 저도 본게 없네요

햇살과함께 2022-10-26 23:16   좋아요 0 | URL
알라딘엔 안나오고 네이버 검색하니 말씀하신 <진리의 발견>만 나오네요~ 번역된 책이 없나봐요. 진리.. 엄청 유명한 책이라 이름만 들어봤는데^^ 일단 도서관 검색해서 발췌해 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콰이어트 (10주년 스페셜 에디션) -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
수전 케인 지음, 김우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내가 읽는 분야의 책은 아닌데(자기계발서 느낌의 책^^), 이 책의 원서 한 단락에 꽂혀서 읽기 시작했다. '외향성이  롤모델인 세상'에서 내향인이 자신의 내향성을 유지하면서도 조화롭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팁을 알려주고 격려하는 책이다. 특히, 전세계에서 가장 외향성이 높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는 내향인 작가가 쓴 책이다.


극 내향인(얼마 전 MBTI 검사에서 100% 'I'가 나왔다. 이제 사회적 자아 따윈 걷어찰 나이!)인 내가 20대에 이 책을 읽었다면 책의 광고처럼 "이 책은 마침내 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었다"라고 감동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나의 내향성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추어 살고 있어서 특별히 감동적이진 않았다. 그래도 여기 나오는 많은 실험 사례에서 외향인 보다 내향인을 더 칭찬하는(?) – 책의 목적상^^ - 결론들을 보면서 내향인의 기분이 좋아진다. 그동안 내향인으로서 받은 설움(?), 무시(?), 차별(?), 상처(?)가 생각나면서. 목소리 높은 사람이 이긴다 처럼. 면접에서도 외향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면접관에서 더 긍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처럼.


이 책에서 흥미로웠던 부분들 몇 가지 열거하면,


- 미국에서 인격의 문화에서 성격의 문화로 변모한 이야기. 카네기의 예를 들며, 그때부터 성공학, 처세술 바람이 불며 가치관의 변화와 함께 외향성 이상이 부상한다(아. 우리 집에도 내가 20대에 읽었던 <카네기 인간관계론> 책이 있네. 자기계발서 부류 책들 다 팔거나 버렸는데, 이건 나름 고전이라 모셔뒀다는^^ 읽지 않을 것 같지만^^).


- 브레인스토밍의 폐해. 한동안 기업이나 학교에서 브레인스토밍이 엄청 유행이었는데, 별로 효과 없단다. 목소리 큰 사람 의견만 반영되어 결과가 더 안 좋게 나온단다.


- 기질과 성격의 차이. 외향성 강화에 맞춰진 자녀교육, 학교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비판한다.


- 동양과 서양의 차이.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생각의 지도>가 생각나는 부분이다. 모든 문화가 외향성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인데, 이젠 동양도 서양화되고 있는데 말이다.


- 자유특성이론. 이 책에 나오는 설명 중 가장 중요한 – 어쩌면 당연한 – 개념인 것 같은데, '자유특성이론'이란 내향적인 사람들도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 자기가 아끼는 사람 혹은 다른 귀중한 것을 위해 외향적인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다(319p)는 것이다. 또, '자유특성계약'을 통해 우리가 일정 시간은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되, 나머지 시간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지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337p). , 우리는 돈을 벌어 가족을 돌보고 자기를 돌보기 위해 회사에 나가 일해야 하며, 일하면서 필요한 외향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퇴근 후에는 자기의 성향에 맞는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카프카의 멋진 문장. 너무나 와 닿는 말이다. 밤조차 충분히 밤이 아니라니.


예를 들어 카프카는 일하는 동안 사랑하는 약혼녀가 옆에 있는 것조차 못 견뎠다.


당신은 언젠가 내가 글을 쓸 때 옆에 앉아있고 싶다고 말했죠내 말 잘 들어요그러면 나는 전혀 쓸 수가 없어요글쓰기란 자신을 과도하게 드러낸다는 뜻이에요그 궁극의 자기표현과 투항그 순간에 한 인간이 다른 사람과 관계한다면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느끼고 따라서 제정신인 한 언제나 그런 일에서 움츠러들게 돼요...... 바로 그래서 글을 쓸 때는 결코 충분히 혼자일 수도 없고글을 쓸 때는 결코 충분히 고요할 수도 없고심지어 밤조차 충분히 밤이 아닌 거예요. - P142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곡 2022-10-25 1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00% 내향인 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저도 본 책인데요 저는 비율이 많이 높지는 않은 내향인입니다)

햇살과함께 2022-10-25 23:16   좋아요 1 | URL
코로나로 사회적 자아 팽개치니 더 강화되는 것 같아요 ㅎㅎㅎ

책읽는나무 2022-10-26 2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극 내향인!!!ㅋㅋㅋ
저도 조금 그런 편인지라...
근데 요즘은 극 내향인에서 살짝 내향인으로 바뀌어가는 것 같아요.
그럼 이 책 읽어도 되는 거죠??
아닌가? 나도 안 읽어도 되는 건가??^^

햇살과함께 2022-10-27 09:42   좋아요 1 | URL
재미있는 사례가 많아서 내향인 기분이 좋아지나, 내향성으로 고민하시는 게 아니라면 안 읽으셔도~
 

플로베르(59p), 순박한 마음
체호프(76p), 개를 데리고 있는 여인, 우편
도스토옙스키(79p),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악령
톨스토이(83p),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소설은 책이라는 물건 안에 갇혀 있고, 우리 독자의 눈길은 너무나 재빨리 그 위를 스쳐 가므로 그 형태를 오래 기억할 수가 없다>고 말이다. 바로 그 점이다. 무엇인가 항구적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고, 견고한 무엇을 짚어 낼 수 있다. - P57

여기서 러복 씨는 책 그 자체가 형식과 등가적이라고 말하며, 소설가들이 자기 작품의 최종적이고 지속적인 구조를 축조하는 방법을 감탄할 만한 섬세함과 명료함으로 추적해 낸다. 하지만 책의 형식이라는 이미지가 그렇게 맞아떨어지게 말해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정말로 그렇게 딱 맞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갖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미지를 떨쳐 버리고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고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최상이다. 이야기를 한 편 읽으면서 우리의 인상들을 적어 보기로 하자. 그러면 아마도 러복 씨가 형식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거슬리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플로베르보다 더 적당한 작가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면이 한정되어 있으니 단편인 [순박한 마음Un Coeur simple]을 골라 보자. - P59

그러므로 <책 그 자체>는 당신이 보는 형식이 아니라 당신이 느끼는 감정emotion이며, 작가의 느낌feeling이 강렬할수록 그것은 더 정확하고 실수 없이 말로 표현된다. 러복 씨가 형식에 대해 말할 때마다, 마치 우리와 우리가 아는 작품 사이에 무엇인가가 끼어드는 것만 같다. 무엇인가 이질적인 것이 우리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 위에 얹히며 시각화기를 요구하는 듯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느끼고, 단순하게 이름 짓고, 그것들을 상호간에 느껴지는 관계를 바탕으로 재배열한다. 말하자면, 감정으로부터 바깥쪽으로 작업하여 「순박한 마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읽기가 끝나면, 무엇이 보인다기보다 모든 것이 느껴진다. - P61

자유가 있는 곳에는 방종이 있다. 소설은 누구나 팔 벌려 맞이하지만, 다른 문학 형식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다. 하지만 승리자들을 바라보자. 우리는 실로 그들을 공간이 허용하는 이상으로 가까이서 많이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그들이 작업하는 것을 보면 모두 달라 보인다. 새커리는 항상 곤란한 장면을 피하려고 노심초사하고, 디킨스는 (『데이비드 코퍼필드』에서만 빼고) 항상 그런 장면을 찾아다닌다. 톨스토이는 기초도 놓지 않은 채 이야기의 한복판으로 뛰어들며, 발자크는 기초를 어찌나 든든히 놓는지 이야기 자체는 도무지 시작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러복 씨의 비평이 개별 작품들을 읽는 데 적용되면 어떻게 될지 보고 싶은 마음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전반적인 시각이 더 볼 만하니, 전반적인 시각에 머물기로 하자. - P65

물론 이런 식의 일반화는 러시아 문학 전체에 적용될 때 어느 정도 진실이기는 하겠지만, 천재적인 작가가 작업에 착수하면 크게 달라질 것이다. 대번에 다른 질문들이 떠오른다. <태도〉라는 것이 단순치 않으며 극히 복잡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철도 사고를 당해 외투뿐 아니라 예의범절까지 잃어버린 사람들은, 사고 탓에 생겨난 체념과 단순성 때문이라하더라도, 거친 말, 잔인한 말, 불유쾌하고 하기 힘든 말을 내뱉기 마련이다. 체호프에게서 드는 우리의 첫 느낌은 단순함이라기보다 당혹감이다. 도대체 요점이 뭔가, 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인가? 우리는 그의 단편들을 한 편씩 읽어 나가면서 줄곧 자문하게 된다. 한 사람이 결혼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지만, 결국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참을 수 없는 속박〉에서 풀려날 수 있을지 이야기하는 데서 끝난다. - P75

체호프를 읽을 때면 우리는 <영혼>이라는 말을 되뇌게 된다. <영혼>이라는 말이 그의 책 곳곳을 누비고 있다. 늙은 주정뱅이들도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쓴다. 〈너는 군대에서 아주 높아져서 아무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게 됐지만, 네게는진짜 영혼이 없어. (………) 네 영혼에는 아무 힘도 없어.> 정말이지 러시아 소설에서 주된 등장인물은 영혼이다. 체호프에게 있어 영혼은 섬세하고 미묘하며 무수한 기질과 장애에 달려 있는 반면, 도스토옙스키에게서 영혼은 한층 깊이 있고 풍부한 것이 되며 격심한 질병과 신열을 불러일으키지만 여전히 주된 관심사이다. 아마도 영국 독자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이나 『악령』을 재차 읽을 때 그토록 노력이 필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P79

도스토옙스키에게는 그런 제약들이 없다. 그에게는 당신이 귀족이든 평민이든, 부랑자이든 귀부인이든 매한가지이다. - P82

당신이 누구든 간에 영혼이라는 저 당혹스러운 액체, 뿌옇고 거품 나는 소중한 것이 담긴 그릇일 뿐이다. 영혼은 어떤 장벽에도 구애되지 않는다. 그것은 넘쳐흐르며 다른 사람들의 영혼과 섞인다. 포도주 한 병 값을 치르지 못한 은행원의 이야기가 어느 곁에 그의 장인과 장인이 형편없이 다루는다섯 명의 정부들의 삶 속으로, 우편배달부의 삶과 날품팔이 여자의 삶 속으로, 그리고 같은 구역에 사는 귀족 여성들의 삶 속으로 퍼져 나간다. 도스토옙스키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지쳐도 쉬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 그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한다. 우리를 덮치는 이 뜨겁고 펄펄끓어오르는 것, 마구 뒤섞이고 경이롭고 끔찍하고 숨 막히는 것 - 이것이 인간 영혼이다. - P83

영혼이 도스토옙스키를 지배하듯이, 톨스토이를 지배하는 것은 삶 그 자체이다. 모든 찬란하고 빛나는 꽃잎의 중심에는 항상 이 <왜 사는가>라는 전갈이 숨어 있다. 책의 중심에서는 항상 올레닌, 피에르, 레빈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모든 경험을 자신 안에 거둬들이고 세상을 손가락 사이에서 굴려보며, 그것을 즐기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그 모든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우리의 욕망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산산조각내는 것은 사제가 아니라 그 욕망들을 아는 사람, 자신도 그것들에 탐닉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그것들에 조소할 때, 세상은 발밑의 먼지요 재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의 즐거움에는 두려움이 섞여 든다. 세 사람의 위대한 러시아 작가 중 가장 우리를 매혹하면서도 반발하게 하는 것은 톨스토이이다. - P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