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도쿄. 간토대지진과 우장춘, 베를린의 황진남과 이극로

1925년 9월 1일, 도쿄는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기록했다. 역사에서 ‘간토대지진‘으로 불리는 이 재난에 이어 끔찍한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한다. 당시 조선 언론은 도쿄 교민들의 피해를 취재하기도 하고, 9월 27일 자 (동아일보》에는 상대성이론의 스타였던 도쿄제국대학 유학생 최윤식이 무사하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당시 도쿄에 살고 있던 우장춘의 집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 무렵,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농림성 산하 농업시험장에 재직 중이던 우장 춘은 일본인 여성과 사귀고 있었다. 한때 우장춘은 어느 변호사의 아이들 과외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부인이 우장춘의 사람됨을 보고 교사 생활을 하던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한 것이다. 이듬해 26세의 우장춘이 22세의 일본인 고하루와 결혼했다.
아버지 우범선이 고영근에게 암살되었을 때 우장춘은 다섯 살이었다. 한동안 그는 방황했고, 보육 시설에 맡겨지기도 했다. 사정을 알게 된 조선총독부의 주선으로 1916년 도쿄제국 대학 농학실과(일종의 전문학교)에 겨우 진학한다. 이때까지 우장춘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다. 우장춘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는 유일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녀는 아들에게 늘 아버지는 조선 혁명가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일본인 어머니에게 자란 그는 혼란스러웠다. - P114

한편,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도쿄가 초토화되었지만 ‘제국 호텔‘만은 멀쩡히 살아남으며, 호텔을 설계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명성이 높아진다. 이 호텔 건축을 위해 일본에 방문한 라이트는 재벌 오쿠라 기하치로의 별채에 초청받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바닥이 따뜻했다. 이 별채는 경복궁의 자선당을 뜯어 가서 만든 것이었다.
여기에 감명받은 라이트는 한국 전통의 온돌 개념을 제국 호텔에 넣었다. 온돌은 데워진 공기는 상승하고 차가운 공기 는 가라앉는 중력 법칙을 이용한 것이다. 서양의 라디에이터 와 다른 이 바닥 난방 방식을 그는 ‘Gravity Heat(중력 난방)‘라 고 불렀다. 미국에 돌아간 그는 좀 더 발전된 개념의 온돌을 연구해 1937년 제이콥스 하우스에 적용한다. 2019년 이 건물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오쿠라가 뜯어 간 경복궁 자선당은 간토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 남아 있던 기단은 정원석 등으로 쓰이다가 여러 사람의 반환 노력으로 1995년 경복궁 경내로 돌아왔다. - P119

박문사 건축을 위해 역대 임금의 어진이 모셔진 경복궁의 선원전이 뜯겨 오고, 광화문을 해체한 석재들이 쓰이고, 원구단 일부가 뜯겨 왔다. 박문사의 정문으로는 경희궁의 정문인 홍화문이 뜯겨 왔다. 이 공사는 경복궁 자선당을 일본으로 뜯어 간 오쿠라쿠미토목이 맡았다. 1939년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박문사를 참배하고 여기서 이토의 아들을 만나 ‘아버지의 죄를 대신 사죄한다‘라고 말했다. 이후 준생은 각종 친일 행사에 대대적으로 동원된다. 안중근의 딸 안현생도 1941년 박문사를 참배하고 각종 친일 행사에 동원되었다. 격분한 김구는 안준생의 암살 명령을 내렸다. - P120

그는 더 나아가 한국어를 표현하는 한글이 왜 과학적인지를 언어학적으로 설명한다. 한글의 원리는 자음-모음-받침으 로 이어지는 체계가 하나의 ‘실러(syllable, 음절)‘을 구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결국 한글 과학화의 완성이 이를 체계화하는 맞춤법 통일이라는 점으로 이어갔다. 영어를 배워야 했던 미주 동포들은 영어 표기에서 실러블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극로는 ‘실러블‘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근본적으로 음절 구조로 되어 있는 한글 표기가 얼마나 과학적인지 설명한 것이고, 동포들은 이를 직관적으로 이해 할 수 있었기에 그의 강연에 열광했다. - P124

그는 귀국 후 조선어학회를 만든다. 가로쓰기 등 현대 한국어의 거의 모든 틀을 마련한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감옥에 있던 중 해방을 맞이한다. 그의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영화가 <말모이〉(2019년)로, 영화 초반 서울역에 도착하는 윤계상이 바로 베를린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이극로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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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조선 전역. 상대성이론 강연회

1923년 여름, 이여성, 한위건의 주도로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조선 전역을 순회하며 개최한 ‘상대성이론‘ 강연의 열기는 대단했다. 7월 7일 부산항에 도착한 당일, 부산 강연(500명)을 시작으로, 8일 마산(300명), 9일 진주(800명), 10일 밀양(300명) 강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공주와 청주를 거쳐 무려 1,000여 명이 참석한 14일 수원 강연 후 15일 서울에 도착한다. 연일 강행군으로 진행된 이들의 강연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 다. 대구에서 이여성이 시국 강연을 하고 있을 때, 경찰이 들 어와 해산을 명하고 이여성은 체포되었다. 그들의 강연은 곳곳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 P99

특히 최윤식의 상대성이론 강연은 어려웠지만, 청중은 끝까지 경청했다. 7월 17일의 인천 강연을 기록한 《동아일보》 기사는 짠하기까지 하다.

세 시간 동안을 계속한 최윤식씨의 강연은 첨부터 끗까지 수학 공식으로 발견되여 나갓슴으로 수학 지식이 잇는 사람에게는 그리 어렵지 안타 하나 대부분은 역시 알어듯지 못하는 헛정성만 보엿다. 그러나 텅중의 대부분을 뎜령한 학생들이 끗끗내 필긔를 계속함은 보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으로 하야금 저윽히 마음을 진덧게 하엿다.

강연은 계속되어 18일 개성(500명), 19일 연백(600명)을 거쳐, 20일 해주와 21일 사리원, 22일 평양, 24일 진남포, 25일 정주, 26일 최윤식의 고향 선천에서의 마지막 회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 달간 조선 전역을 달구었다. - P101

이 흐름은 1930년대까지 이어졌다. 1932년 11월 《동광》에 한 익명의 기고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영국 과학자 에딩턴의 책 《공간• 시간•인력》을 읽어보라고 추천한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과 독일은 맞서 싸웠지만, 평화론자로 병역거부까지 했던 에딩턴은 적성국 독일의 아인슈타인 이론을 적극 받아들였다. 아인슈타인 역시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에딩턴이 일식 관측을 통해 상대성이론으로 예측한 빛의 중력 굴절을 증명한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에딩턴의 1923년 저서 《공간• 시간•인력》은 상대성이론을 설명하는 최신 도서였다. 익명의 기고자는 이 책을 《동광》에 소개하며 이렇게 마무리한다.

"웨 권하느냐고요? 조선 사람은 과학을 등한히 하니 그 폐를 교정하자는 것과 무엇보다도 시대에 낙오되지 말어야지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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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위적 마녀사냥
마녀 재판은 ‘인간의 피에서 금을 만들어낸 새로운 연금술‘
여성 노예의 출산 파업
프롤레타리아 반페미니즘

3장 식민화와 가정주부화

머천트는 유기체로서의 자연을 파괴한 것 - 그리고 근대과학과기술이 발전하면서, 남성 과학자가 새로운 고위 성직자로 성장한 것-은 약 4세기 동안 유럽 전역에서 전개되었던 마녀사냥 기간 동안 여성에 대한 폭력적 공격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나란히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 P177

엥겔스는 진보와 퇴보 사이의 이런 대립적인 관계를 사유재산의 등장과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착취 때문이라고 했다. 1884년 그는 이렇게 썼다.

완전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착취가 문명의 기초가 된 이래, 그 전체적 발전은 계속 모순적으로 움직인다. 생산에서의 모든 진보는 착취당하는 계급, 즉 대다수 사람의 조건에서 보면 퇴보이다. 한 쪽에 혜택이 주어지면 다른 쪽에는 필연적으로 파멸이 온다. 한 계급에게 새로운 해방이 오면, 다른 계급에게는 새로운 억압이 가해진다(Engels,
1976:333). - P178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이 전략의 논리적 결함이다. 모순적이고 착취적인 관계에서, 착취자의 특권이 모두의 특권이 될 수는 없다. 중심부의 부가 식민지 착취에 기초한 것이라면, 식민지는 자신도 식민지를 갖지 않는 이상 부를 획득할 수 없다. 남성의 해방이 여성의 종속에 기초한 것이라면, 여성은 남성과 평등한 권리를 획득할 수 없다. 여기에는타인을 착취할 권리가 필수적으로 포함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따라서 해방을 위한 페미니스트의 전략은 이런 퇴보적 진보의 관계들을 완전히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남성의여성에 대한 착취, 남성의 자연에 대한 착취, 식민주의자의 식민지 주민에 대한 착취,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착취를 모두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착취가 일부 사람들의 전진(발전, 진화, 진보, 인간화 등)을 위한 조건으로 남아있는 한, 페미니스트는해방 혹은 ‘사회주의‘를 말할 수 없다. - P179

하나는 유럽에서 마녀 처형과 신흥 부르주아와 근대과학의 발전,
그리고 자연의 종속 사이의 연결이다. 이는 이미 여러 학자가 다룬 바있다(Merchant, 1983; Heinsohn, Knieper, Steiger, 1979; Ehrenreich, English, 1979; Becker et al, 1977). 다음 분석은 이들의 연구에 기초한것이다.
이 과정과 일반적인 식민지인, 그리고 특히 식민지 여성에 대한 착취와 종속 사이의 역사적 관련은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역사를 좀 더 광범하게 다뤄보려고 한다. - P181

산파를 마녀로 기소하고 화형에 처하는 것은 근대 과학의 등장과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의술이 전문직이 되었고, 의학이 ‘자연과학으로발전했으며, 과학과 근대 경제가 발달했다. 마녀사냥꾼의 고문실은 실험실이었다. 이곳에서 인간의 몸, 주로 여성 몸의 조직, 구조, 내성 등을 탐구했다. 근대 의학과 다양한 분야에서의 남성 헤게모니는 부서지고, 망가지고, 찢기고, 훼손되다가 마침내 화형을 당한 수백만 여성의몸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와 국가는 계획적인 분업을 통해 조직적인 마녀 대학살과 테러를 진행했다. 교회에서 파견된 이들은 마녀를 식별해내고, 신학적논리를 제공하면서 심문을 주도했다. 국가의 ‘세속 부대‘는 고문을 수행하고 마지막으로 마녀를 장작더미 위에서 처형하는 일을 했다. - P192

마녀재판은 ‘인간의 피에서 금을 만들어낸 새로운 연금술‘이었다는 루스Cornelius Loos의 말로 요약할 수 있다(Hammes, 1977:257). 그리고 여기에 우리는 그 금이 여성의 피에서 나온 것이라고 덧붙일 수 있다. 신흥 부르주아 계급과 구지배층에 의한 마녀사냥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자본축적은 당대 경제사학자의 어림이나 계산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마녀 사냥의 피 묻은 돈은 파산한 제후, 변호사, 의사, 판사, 교수 등의 사적인 부를 위해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전쟁비용, 관료제 수립, 기반시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절대주의국가 등의 공적인 일에도 사용되었다. - P199

머천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자연에 대한 심문의 상징인 마녀에 대한 심문, 문초의 모델인 법정, 혼란을 진압하는 수단인 기계를 사용한 고문 등은 권력이기도 한 과학적방법론에서 근본적인 것이다(강조는 저자)(Merchant, 1983:172).

여성과 자연에 대한 이 새로운 과학적이고 가부장적인 지배를 통해 이득을 본 계급은 발전하고 있던 개신교, 상인 자본가 계급, 광업기업가, 의류업계 자본가 등 이었다. 이 계급에게 꼭 필요한 것은 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재생산 능력에 대해 갖고 있던 자율성을 와해시키고 여성들이 더 많은 노동자를 낳도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비슷하게 자연도 이 계급이 착취하여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물질적 자원의 거대한 저장소로 바꾸어 버렸다.
따라서 교회, 국가, 신흥 자본가 계급, 근대 과학자는 협력하여 여성과 자연을 폭력적으로 종속시켰다. 19세기의 연약한 빅토리아 여성은 이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조해낸 ‘여성적 자연상을 따라 폭력적 수단을 통해 만들어낸 산물이다(Ehrenreich, English, 1979). - P202

18세기 말, 서아프리카는 노예사냥을 할 만큼 인구가 많지 않다는점이 분명해졌다. 게다가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아프리카 자체를 제국의 일원으로 병합하여 원료와 광물의 보고로 사용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좀 더 ‘진보적인‘ 영국 부르주아 일파는 노예무역을 폐지하고, ‘지역 출산‘을 장려하자고 주장했다. 노예무역은 1807년 폐지되었다. 식민지 정부는 농장에서 여성 노예가 노예를 낳아 지역적 차원에서 노예 재생산을 하는 것을 지원한 18세기 말과 19세기의 노예법이 여러 모로 이득이 될 수 있다고 예견했다. 그러나 이런 갑작스러운 정책 변화는 여성 노예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레독이 지적한 것처럼, 긴 노예제 기간 동안 노예 여성은 노예제 - P208

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로 반모성적 태도를 내면화했다. 그들은 19세기 중엽까지 일종의 출산 파업을 지속했다. 임신을 하면 독한 약초를먹어 유산을 했고, 출산을 하면 ‘자녀가 노예가 되어 평생을 노예주의 부를 위해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죽이는 것을 용납받기도 했다‘(Moreno-Fraginals, 1976, Reddock,
1984:17에서 인용). 레독은 이런 노예 여성의 반모성적 태도가 ‘억압받는 이들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다른 물질적 이유 때문이기는 하지만, 받아들이는 방식‘의 한 예라고 했다(Reddock, 1984:17). - P209

남성과 여성의 평등은 후진성의 표식이며, 식민지 여성의 독립성을훼손하고 식민지 남성에게는 성차별주의와 군사주의의 ‘미덕‘을 가르치는 것이 영국 식민주의자의 ‘문명화 사명‘의 일부라는 생각은 홀Mr.
Fielding Hall의 책, 『교육받는 민중』 People at School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홀은 1887~91년 사이에 버마에 있는 영국 식민행정부에서 정치담당 장교를 지냈다. - P211

하인, 크니퍼, 그리고 스타이거가 지적한 바대로, 자본주의는 맑스와 엥겔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가족을 파괴하지 않았다. 반대로, 국가와 국가 정책의 도움을 받아, 자본주의는처음에는 유산 계급 사이에서, 나중에는 노동계급 사이에서, 가족을창조했고, 이와 함께 가정주부를 하나의 사회적 범주로 만들었다. 또한, 초기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구성과 조건을 고려하면, 가족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규범이라고 하기에는 일반적으로 믿는 것보다 많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 P235

하인손과 크니퍼는(1976) 19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이 과정을 연구했다. 이들의 주된 논지는 경찰 조치를 통해 프롤레타리아에게 ‘가족‘을 강제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재산이 없는 프롤레타리아가 다음 세대 노동자를 위해 충분한 아이를 낳지 않을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일어나고 있던 영아살해를 범죄화한 이후, 가장 중요한 조치 중 하나는 재산 없는 사람에 대한 결혼금지를 없애는법이다. 이 법은 1868년 북부독일연맹에서 통과되었다. 이제 프롤레타리아도 결혼을 하고 ‘가족‘을 갖는 것이 허용되었다. - P236

그들의 프롤레타리아 반페미니즘은 주로 여성이 산업생산에 들어가면서 남성의 임금과 일자리를 위협하는 것에대한 걱정이다. 노동자 협회의 여러 회의와 정당 회의들에서 여성이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시키라는 요구가 반복적으로 제기되었다. 공장의 여성 노동력 문제는 1866년 제네바에서 열린 제1차 인터내셔널 총회에서도 논의되었다. 제네바 총회로 가는 평의회 대표들에게 지침을작성해주기도 했던 맑스는 근대 산업이 여성과 아동을 생산으로 끌어오는 경향을 발전적 경향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프랑스 대표와 독일 대표 일부는 가정 밖에서 여성이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독일 대표는 사실 다음과 같은 각서를 제출했었다.

모든 성인 남성이 아내를 가질 수 있고, 가족을 꾸릴 수 있으며, 안정된 일자리를 보장받는 조건을 만들라.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스스로와 자연에게 죄를 범하는 희생자가 되고, 성과 인간의 살을 거래하면서 오염되는 불쌍한 피조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조건을 만들라・・・・・・ 아내와 어머니는 가족과 가정의 일만 할 수 있도록 하라. 남성이 중대한 공무와 가족을 위한 의무를 대표한다면, 아내와 어머니는가정생활의 안락함과 시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은 우아함과아름다움으로 사회적 예절을 순화시키고, 인간이 좀 더 품위 있고 고상한 수준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Thönnessen, 1969: 19, 영어번역은 저자). - P239

동시에 가정주부화는 이 숨은 노동자의 완전한 원자화와 파괴를의미한다. 이는 여성의 정치력이 부족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여성의 협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가정주부와 임금노동 부양자의 관계는 자유롭지 않은 노동자가 ‘자유‘ 프롤레타리아에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노동력을 팔 ‘자유‘는 가정주부의 자유롭지않음에 기초해 있다. 남성의 프롤레타리아화는 여성의 가정주부화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힘이 약한 백인 남성도 자신의 ‘식민지‘, 즉 가족과 가정에길들여진 가정주부를 갖게 되었다. 무산계급인 프롤레타리아가 마침내 ‘문명화된 시민의 지위에 오르고, ‘문화국가‘의 온전한 구성원이 된것이 그 표식이었다. 그러나 그런 성장에는 같은 계급 여성의 종속과가정주부화라는 희생이 필요했다. 부르주아 법이 노동계급까지 확대되는 것은 무산자 가정에서도 남성이 지배자이자 주인이 된다는 것을의미했다.
식민화와 가정주부화의 두 과정이 밀접하게 인과관계로 연결되어있다고 하는 것이 나의 논지이다. 외부 식민지에 대한 지속적인 착취, 전에는 직접 식민지를 통해, 현재는 새로운 국제노동분업을 통한 착취가 없이는 남성 ‘부양자가 부양하는 핵가족과 여성이라는 ‘내부 식민지‘가 수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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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인기는 식민 조선에서도..

1922년 도쿄.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

아인슈타인이 일본에 간다는 소식을 접한 우리 언론들은 아인슈타인의 방문 일정을 시시각각 보도하고, 민립 대학을 추진하던 세력은 급히 일본으로 사람을 파견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히브리대학을 세운 아인슈타인을 조선에 초청하려던 것이다. 비록 성사되지 못했지만,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은 나라 잃은 민족 유대인이 어떻게 과학으로 나라를 되찾는지 파고들었고,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과학 스타 아인슈타인에 주목하고, 또 열광했다. - P81

11월 10일, 민립 대학 설립을 준비 중이던 ‘조선교육협회‘가 파견한 일행이 서울역을 출발해 일본으로 향했다. 그들의 목적은 일본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나 조선으로 초청하는 것이었다. 10월 프랑스에서 출발한 아인슈타인은 이 무렵 홍콩을 지나고 있었다. 유럽에서 일본으로 가는 여정은 길고 험했다. 11월 13일, 아인슈타인이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이로 인해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이 더욱 떠들썩해졌고, 조선교육협회 일행은 다급해졌다. - P82

4회에 걸친 그의 상대성이론 소개는 매우 정확했다. 황진남의 설명은 나경석과 거의 동일하다. 첫 번째 기사에서 그는 빛의 파동설과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은 에테르를 가정하지만, 마이컬슨이 에테르의 상대운동 관측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 P83

그럼에도 조선의 언론들은 아인슈타인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상세한 현지 분위기를 전하며 아인슈타인 봄을 이끌었다. 무려 한 달이 넘게 지속된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은 이처럼 엄청난 관심 속에 진행되었고, 이제 조선에서 아인슈타인과 상대성이론은 지식인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소양으로 인식되었다. 이 열풍은 다음 해 조선 전역에서 열린 상대성이론 강연회로 이어진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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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상대성이론 등장…

1921년 서울. 조선에 등장한 상대성이론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은 나라 잃고 떠도는 유대인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보다 ‘대학‘을 먼저 설립한 것이다. 대체 아인슈타인이라는 과학자가 어떤 인물이길래, 상대성이론‘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나라도 없는 터에 대학을 세우는지 궁금해했다. 그 이후 갑자기 아인슈타인에 조선 사회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다.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비로소 모두가 새로운 학문에 대한 교육, 즉 과학을 외쳤고, 해결책은 오로지 과학이었다. 나라를 뺏긴 이유가 서구의 과학기술에 무지했던 때문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 P67

이어지는 1922년 2월 23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드디어 상 ㅣ대성이론의 본격적인 소개가 시작된다. 저자는 ‘(공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민‘이라는 필명은 화가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을 말한다. 도쿄공업대학 출신인 나경석은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을 총동원하여 상대성이론에 대해 무려 7편에 걸친 시리즈로 상세히 설명한다. 참고로 도쿄공업대학은 나중에 노벨상을 두 명 배출하는 명문 대학이다.
우선, 나경석은 아인슈타인이 유대인이라는 점부터 강조한 다. 세계를 뒤바꾼 유대인 ‘괴물‘로 당시 지식인들에게 잘 알 려져 있던 로스차일드, 레닌, 마르크스를 차례로 언급하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역시 못지않은 파괴력을 가진다고 설 명했다. 과학이 경제체제의 대변혁이나 정치혁명과도 같은 힘을 가진다고 본 것이다. 계속되는 상대성이론에 대한 해설은, 비록 부분적으로 잘못된 서술이 있긴 하지만, 100년 전 신문 기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그는 천문학의 혁명, 에텔(에테르) 부인설, 철학상 의의, 최대 속도, 시간과 공간의 관념 등 총 5부로 나누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자세히 소개했다. - P71

이들이 꿈꾸던 연구소는 훗날 명성 황후 묘소를 옮기면서 비워진 청량리 홍릉 자리에 세워지며 실현되었다. 1965년 박정희 정부는 홍콩에 대한민국 최초의 과학 연구소를 설립한다. 1920년대 대학 야구 스타로,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되어 서울대학교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최규남이 준비 위원장이었고, 한국인 최초의 화학 박사로 미국 유타대학 교수로 있던 세계적인 석학 이태규가 자문을 맡았다. 초대 소장 최형섭의 노력으로 연구소가 본궤도에 이르자 이곳에 과학원 설립이 추가로 추진된다. 1970년 우리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은 고등과학교육기관 설립 자문단을 파견한다.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탠퍼드대학 프레더릭 터먼(Frederick Terman) 교수가 자문단장을 맡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터먼 보고서’에 기초해 탄생한 과학원은 기존의 연구소와 합쳐져 KAIST가 되어 대전으로 이사했고, 남은 홍릉의 연구소는 KIST가 되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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