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근력운동을 할 때는 등산에 가장 필요한 근육인 대퇴사두근과 걷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요근을 키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근육의 유연성도 중요하므로 올바른 스트레칭 방법도 알아두어야 한다. - P6
감수의 글《동의보감》의 저자 허준 선생은 "약보(藥補)보다는 식보(補)가 낫고, 식보보다는 행보가 낫다."라고 했고 다산 정약용 선생은 "걷는 것은 청복, 즉 맑은 즐거움이다."라고 했다. 결국 걷는다는 것은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해결해주는 행위이므로 관절이 고장나서 생기는 불편과 장애는 꼭 고치고 예방해야 한다. - P8
근육 회복에 염증이 필수다우리 몸은 손상된 조직이 있으면 스스로 치유하려 한다. 근육도 그렇다. 근육은 근섬유 다발이므로 손상되면 근섬유를 재생해 회복한다. 근육이 손상을 입으면 염증이 발생한다. 염증이 나타나면 새로운 근육 세포가 증가하고 성장하며, 근섬유가 재생하는 과정을 거쳐 회복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근육을 회복하기 위해 ‘염증‘이 생긴다는 점이다. 염증이라고 하면 통증이나 부기의 원인이라고만 생각할지도 모른다. 진통제가 항염증제이므로 사람들은 대부분 염증이 없어야 좋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염증은 근육을 회복하는 역할도 한다. 염증을 완전히 없애면 오히려 근육 회복 속도가 늦어진다고 한다. 다만 염증이 지나치게 오래 가면 치유하기 어려워진다. 즉 손상 초기에 나타나는 염증은 근육이 치유되는 데 필요한 증상이며 약간의 통증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자. 염증과 공생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염증은 보통 장기간 지속되지 않으므로 통증이 2~3주 이상 지속될 때는 염증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럴 때는 바로 병원에 가자. - P56
자연과 가까워질수록 병은 멀어지고,자연과 멀어질수록 병은 가까워진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 P58
부하를 줄이는 데에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등산 장비의 중량 줄이기, 체중 감량, 등산 스틱 사용이다. 장비 중량을 줄이고 등산 스틱을 사용하는 방법은 뒤에 자세히 설명하므로 참조하기 바란다.부하를 분산시키는 데는 대퇴사두근의 근력을 강화하는 방법이 있다. 대퇴사두근의 근력을 강화하는 트레이닝 방법은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 P63
(대처 방법) 몸을 깊게 숙이거나 갑자기 방향을 틀지 않는다반월상연골에 손상을 입은 사람이 등산할 때는 뼈와 연골을다쳤을 때처럼 부하를 줄이고 분산시켜야 한다. 또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채 몸을 깊이 숙이거나 급작스럽게 방향을 바꾸지 말아야 한다. 몸을 깊이 숙이면 반월상연골의 뒤쪽에 강한 힘이 가해져 다칠 수 있으며 갑자기 방향을 바꾸면 반월상연골이 마찰 때문에 끊어질 가능성이 있다.반월상연골에 손상을 입은 상태에서 상황이 더 나빠지는 일을 방지하려면 무리하지 말자. 부상과 과도한 사용 때문에 반월상연골에 손상을 입었다면 병원에서 정확한 진단과 적절한치료를 받아야 한다. 무릎관절 내에 통증이나 압통을 느끼거나 무릎이 부어올랐다면 반드시 병원을 찾아가자. - P66
등산을 할 때 인대 손상이 발생하는 원인은 오로지 ‘부상‘ 때문이다. 전방십자인대는 굴러서 무릎이 꺾였을 때, 후방십자인대는 굴러서 무릎을 구부린 상태에서 무릎 앞면으로 착지했을 때, 내측측부인대는 무릎이 안쪽으로 강하게 꺾였을 때 손상을 입는다. - P67
무릎 주변 근육, 장경인대, 슬개건, 그 밖의 연부 조직은 자주 무릎 통증의 원인으로 등장하는 부위로 많은 산악인이 해당부위에 통증을 경험한다. 모두 관절 외에 위치한 조직이므로병원에 가지 않아도 관리만 잘하면 자연스럽게 통증을 치유하거나 예방할 수 있다.등산을 할 때는 무릎관절 주위 조직 중에서 대퇴사두근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근육은 유연성이 중요하다. 유연성이 있으면 뼈와 붙은 부분에 통증이 나타나지 않고 근육도 손상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 - P71
(대처 방법) 휴식한다. 성큼성큼 걷지 않는다. 근육을 관리한다산에 오르다 대퇴사두근에 통증을 느낄 때는 바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천천히 스트레칭을 하고 나서 다시 걷자. 대퇴사두근의 스트레칭 방법은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또 근육에는 활동하기 좋은 온도가 있으므로 휴식하면서 추울 때는 근육을 따뜻하게 하고, 더울 때는 시원하게 하면 효과적이다.내리막길을 갈 때 다리 근력을 보존하려면 성큼성큼 걷지 말아야 한다. 걸을 때 다리가 착지하면서 받는 부하를 무릎관절이 흡수하기 때문에 성큼성큼 걸으면 근육에 심한 부담이 간다.너무 천천히 걷기도 권하지 않는다. 천천히 걸으면 근육이 수축하는 시간이 길어지므로 근육이 받는 부담이 증가한다. - P75
문제는 고도(Altitude)가 아니라 태도(Attitude)다.산행의 본질은 정상을 오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난과 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있다.-알베르트 F. 멈머리(Albert Frederick Mummery)- - P88
1937년 도쿄.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1935년, 우장춘의 논문 <종의 합성>이 발표된다. 다윈의 진화론이 수정되는 엄청난 논문이었다. 그때까지 일반적으 로 알려진 다윈의 이론에 따르면, 이종교배로 만들어진 새로운 종은 생식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학자들은 새로운 종은 동종 교배를 통해 태어난 개체들이 자연선택을 거치며 분화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우장춘은 배추와 양배추라는 서로 다른 종을 교배하는 과정에서 유채 같은 새로운 종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이 를 학계에서는 ‘우의 삼각형(U‘s Triangle)‘이라 부른다. 전문학교 출신인 우장춘은 이 논문으로 도쿄제국대학의 박사 학위를 받게 되며 단숨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다. - P181
1938년 7월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용된 리승기는 합성섬유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1939년 드디어 일본 최초의 합성섬유 ‘비날론‘ 개발에 성공했다. 나일론의 대항마로 여겨진 이 섬유로 리승기는 교토제국대학 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순식간에 일본 과학계의 주목을 받는다. 같은 해, 듀퐁은 나일론 스타킹을 출시하며 대박을 터뜨렸다.한편, 1938년 12월 이태규는 일본과 대결 중인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다. 일본 정부가 국비 지원을 거부한 가운데 이태규는 고집스럽게 아인슈타인이 있던 프린스턴대학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양자역학을 화학에 접목한 고분자화학의 대가 아이링 교수의 제자가 된다. - P185
이처럼 태평양전쟁은 합성섬유 전쟁이기도 했고, 그 중심에 교토제국대학의 조선인 과학자 리승기와 고분자화학 이론을 만들던 이태규 그리고 고무를 연구하던 박철재가 있었다. - P187
1940년 함흥. 황진남의 귀국황진남이 프랑스에서 귀국할 무렵, 과학 교육 등의 애국 계몽 운동이 일시에 무너지는 일이 벌어진다. 이것이 바로 일제가 안창호를 중심으로 엮은 ‘수양동우회 사건‘이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미국에서 만든 흥사단의 국내 조직이고, 안창호의 요청으로 이광수 등이 주도한 모임이다. 이들은 무력 투쟁이나 이념보다 교육과 계몽을 강조한 온건파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것마저 두고 보지 않았다.이 사건에서 안창호가 고문으로 1938년 사망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전향서를 써 살아남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데 그치지 않았다. 전쟁을 찬양하고 적극 지원을 독려한다. 존경받던 지도자 윤치호, 이광수 등의 이런 모습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 다. 그나마 소극적인 저항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최규남은 교단에서 쫓겨나 농사를 지었고, 최규남의 처남 채동선 역시 칩거하고 농사에 몰두했다. - P193
변절은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1923년 진주에서 시 작된 형평사 운동은 사회주의 운동과 결합하여 순식간에 전 국으로 퍼졌지만, 이 무렵에는 쇠퇴하고 있었다. 여전히 백정을 천대하던 농민의 반형평사 운동도 있었지만, 형평사 운동 지도부의 노선 분열도 있었다. 일본 유학파 장지필은 사회주의 노선을, 강상호는 민족주의 관점을 유지해 서로 갈라섰고, 이후 강상호는 형평사 운동에서 손을 뗀다. 게다가 1927년 고려혁명당 사건으로 장지필이 구속되고, 1933년 형평청년전위 동맹 사건으로 형평사 지도부가 무너지자 형평사 운동은 급 격히 위축되었다. 이에 장지필은 1935년 형평사를 대동사로 변경하는데, 대동사는 서서히 친일로 돌아서 1938년에는 비행기를 헌납하기에 이른다. - P195
하지만 친일파로 전향한 동지들과 어울리던 이현욱의 불편 했던 속내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40년. 임화를 간호하다 결핵에 걸린 그녀는 친정인 마산으로 홀로 내려가 요양하며, 글쓰기에 몰두했다. 글쓰기를 통해, 그녀는 자신을 깊이 성찰한다. 무엇보다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 한다. 1940년 12월, 그녀는 ‘임화의 부인‘이라는 딱지를 떼고 ‘지하련’이라는 필명으로 단편소설 <결별〉을 써서 등단한다. 그리고 변명으로 가득 찼던 동시대 지식인들과 결별 했다. - P199
많은 애국 계몽 단체가 친일로 돌아섰지만 조선어학회가 반일 운동을 유지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1940년 극적으로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이다. 경북 어느 고택 서가에서 발견된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 간송 전형필은 무려 1만 원이 넘는 거금을 주고 샀다. 당시 서울 시내 기와집을 열 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 P202
welling up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Scene No. 30[Monica‘s room / Friends are there]Ross Well? Isn‘t that amazing?Joey We‘ve gotta see now? What are we supposed to be seeing here?Chan: I think it‘s about to attack the Earth.Ross Monica, Are you welling up?Mon: No.Ross: You are, you‘re welling up.Mon: I am not!Ross You‘re gonna be an aunt.Mon: Oh shut up! - P142
오! 불쌍하고 불쌍한 올리버. 나약하고 어린 올리버를 유혹하고 옭아매는 악의 힘, 그 사이에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이어가는 삶. 죽음의 고비를 넘긴 올리버에게 또 어떤 일이 펼쳐질지, 출생의 비밀이 어떻게 밝혀질지 2권이 무척 궁금해진다. 소년소녀동화로 읽은 디킨스는 진정한 독서가 아니었다.
최규남과 도상록
1934년 과학데이. 양자역학의 도입1935년 조선 전역에 발명 붐이 일어나 ‘과학데이‘를 기점으로 특허 출원이 무려 5배나 증가하게 된다.다음 해인 1936년 드디어 조선에 양자역학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를 소개한 주인공은 최규남과 도상록이었다. 1923년의 ‘상대성이론‘ 전국 순회강연도 그렇지만, 이 무렵 대중 과학 운동이 보급한 지식의 수준은 꽤 높았다. 그들은 교양 과학 뿐 아니라 당시 최신 과학 이론도 소개한 것이다. - P157
1920년대 상대성이론이 조선을 휩쓸었듯이 조선의 지식인 들은 새로이 떠오르는 양자역학 도입에도 과감했다. 대중 잡 지였던 《별건곤》이 1934년 1월 세계 과학계의 최대 존재는 아 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막스 플랑크의 양자론이라고 소개 한 이래 당시 신문들은 이를 둘러싼 논쟁도 보도했다. 1935년 7월 9일 《동아일보》는 ‘상대성원리의 비약‘에서 아인슈타인이 두 이론의 통합에 노력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이어 10월 4일 ‘양자론에 관한 논쟁‘ 기사에서는 그해 가장 뜨거운 이슈였던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의 논쟁을 비교적 상세히 알렸다. - P160
1938년 1월 4일, 최규남은 ‘첨단 과학: 미래전의 신병기‘라는 장문의 《동아일보》 기고문에서 무인비행기, 즉 드론을 소개하며 미래는 무인 기술이 지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무선 조종을 위한 전자기파 기술의 최신 동향과 여기서 파생된 초기 형태의 레이저도 소개한다. 특히 로켓 발전에 주목하며 3단 로켓이면 달 탐사가 가능하다는 것과 대륙간탄도미사일도 예측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불과 1년 전이었다. - P171
두 사람 모두 김용관이 주장한 ‘이화학 연구소‘를 꿈꾸었고, 두 사람 모두 《동아일보>의 ’나의 백일몽‘이라는 코너에 안타까움 을 남겼다. 발명학회가 1934년 ‘과학데이‘를 이끌고, 다시 그 해 여름 과학지식보급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김용관은 산학협동 기반의 ‘이화학 연구소‘ 설립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1935년 제2회 과학데이의 대성공으로 그의 주장은 더욱 강해졌지만 과학데이의 성공은 당국의 탄압을 불러왔고, 명망가들의 지원은 소극적으로 바뀌었다. ‘과학데이‘ 운동이 독립 운동임을 간파한 일제는 1937년부터 옥외 집회를 금지하고, 1938년 다섯 번째 ‘과학데이‘를 마친 김용관을 체포하면서 ‘과학지식보급회‘는 해체된다.52 또한 발명학회가 일본발명학 회의 지부로 흡수되면서 과학 대중화 운동은 위축되고 친일화되었다. - P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