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한다고 생각해보자. ‘이성애자‘라고 소개하는 일은 드물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고 맺어지는 일이 당연한 사회에서 ‘이성애’는 사랑이나 로맨스라는 이름으로 대체된다. 이성애라는 정체성은 언급될 필요가 없다. 당연하기에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보편(적인 정체성)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편의 또 다른 이름이 특권이라는 사실도 잊는다. - P9

성소수자의 노동을 취재하기 시작한 것은, 나 자신의 ‘여자 노동‘이 한창일 때였다. 여자가 더 잘할 것이라 기대되는 역할과 그에 부응해 연출해야 하는 이미지. 공식적인 업무 분장에는 없지만, 여자들이 다 하고 있는 그런 일. 그래서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노동에 숨이 막혔다. 호흡을 위협받는 순간까지 ‘여자로’ 생각하고 말하고 웃는 내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고개를 들어 책상 파티션 너머를 봤다. 수그린 동료들의 뒤통수가 보였다. ‘정상‘ 시민들 모르게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할 마피아 동료가 필요했다. - P13

《젠더 무법자》에서 케이트 본스타인은 모욕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모욕은 젠더 수호자가 쥔 채찍 중 하나다……. 우리는 모욕에 신경쓰라고 배운다." - P19

법학자이자 성소수자인 켄지 요시노는 저서 《커버링》에서 패싱을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되 타인에게 숨기고자하는 욕구"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벽장 속에 숨어 지내는 것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전기충격요법보다는 낫다고 말한다. 거짓말이 아무리 힘들어도 굶어 죽는 것보다 낫다. 무대의상을 입고 면접장으로 가야 한다. - P34

"애인 있습니까?" 단 여섯 글자로 이뤄진 질문이 이토록 힘을 갖는다. 질문 하나 받았을 뿐인데 누군가(남성)는 한 가정의 부양-책임자로서 책무를 되새긴다. 누군가(여성)는 출산과 육아라는 자신의 역할을 떠올린다. - P37

이들은 드러내지만 드러나지 않는다. 나를 표현하는 동시에 나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세상을 앞에 두고 거짓을 말한다. 숨길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도 스스로를 인정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그 욕구 때문에 성소수자들은 드러냄과 숨김 사이에서 줄타기 중이다. - P49

"나는 꽤 여러 가지 세일즈 일을 해봐서 어떻게 설득해야 구매하게 되는지 안다. 물론 남자로 일할 때 얘기다. 여성이 되어 일했을 때 고객들은 나의 ‘전문가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어머나, 저보다 훨씬 더 잘 아시네요, 존슨 씨,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라고 묻는 수밖에 없었다." - P97

초국적 기업이 개발도상국으로 진출할 때 고려하는 지점 중 하나가 여성차별 문화라는 이야기가 있다. 여성차별이 심하다는 것은 ‘여자가 있을 자리는 가정‘이라는 논리가 더 강하다는 뜻. 집 밖의 여성노동은 부차적으로 여겨진다. 바로 이때 가격 ‘후려치기‘가 가능하다. - P102

‘자본주의 체제가 사람들의 불안을 먹이 삼아 성장한다‘는 류의 이야기는 고용절벽 앞에서 정설로 자리 잡는 중이다. - P107

"보이지 않은 손이 닿지 않은 곳에 보이지 않은 성이 있었다." 기존 경제학을 여성의 관점으로 비튼 카트리네 마르살은 이렇게 묻는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하는 동안 식탁에 따뜻한 스프 접시를 놓는 손은 누구의 것이었냐고, 그의 어머니인 마거릿 더글러스, 즉 여성의 보이지 않는(보려 하지 않은) 노동이 있었다. - P117

‘우리에겐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해시태그운동이 일어났을 때 청소년 인권활동가 공현이 지적한 대로, 학교에 정말 필요한 것은 좋은 스승인 페미니스트 교사 한두명이 아니다. "페미니즘적 학교, 페미니즘적인 교육 환경, 페미니즘적인 교육제도" 이를 시스템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P1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회색 인간 김동식 소설집 1
김동식 지음 / 요다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관 반납일 맞춰 빨리 읽었다.
김동식 작가의 회색 인간은 몇년 전부터 여러 지면에서 추천의 글을 봐서 읽어봐야지 하다 책읽아웃에 나온 거 듣고 더 읽어보고 싶었다.
디스토피아를 말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을 안겨주면서도 인간과 지구에 희망을 보여주는 작품도 많아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통조림 몇 개 때문에 한 노인을 죽이려고 했을 때, 저희는 짐승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 노인을 살려주고 나니, 그제야 저희는 사회 속에 사는 인간이 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저희는 살았습니다." - P32

그날 인류는 너무나도 당연하였던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똑같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똑같다는 사실을. - P75

지금의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 무엇이든 차별을 하는 것들은 희대의 몰상식한 것들이고, 매장당해 마땅한 것들이었다.
그러자,

"뭐야? 가능하잖아?"

세상에 모든 차별이 사라졌다. 사람들 스스로도 놀랐다. 세상에서 차별을 없애는 게 가능했다니?

시간이 흘러 신인류 아이들이 자라난 뒤에도, 아이들의 여섯손가락을 놀리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 스스로도 창피해하지 않았다.
그냥 별것 아닌 당연한 일이었다. - P94

"저는, 건강한 소나무가 되고 싶어요!"

피노키오는 나무였다. 다시 예전처럼 건강한 나무가 되고 싶은 게 당연했다.
행복한 피노키오는 다시, 소나무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충격에 빠진 인류는, 피노키오를 위해 한마음으로 자연보호를 약속했다.
나무들은 쑥쑥 자랐다. 마치 인간의 거짓말을 알고 있는 것처럼. - P3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라고 가는 미구를 다시 만나러 갔다.
"잘 있그래이." 가가 말했따.
"잘 가그래이." 미구가 말해따. "내 비밀은 이기다. 아주 간단테이. 맘으로 바야 잘 빈다카는 거. 중요한 기는 눈에 비지 않는다카이."
"중요한 기는 눈에 비지 않는다쿠네." 애린 왕자는 기억할라고 되풀이해따.
"니 장미를 그마이 소중하게 만든 기는 니가 니 장미한테 들인 시간 때문아이가."
"내 장미한테 들인 시간 때문이데이." 애린 왕자는 기억할라고 되풀이해따.
"사람들은 이 진실을 이자뿐제." 미구가 말해떼이. "그니까 니는 잊으모 안된데이. 니가 질들인 거에 니는 끝까지 책임이 있으이. 니는 니 장미한테 책임이 있는기라………"
"나는 내 장미한테 책임이 있다카이……" 애린 왕자는 기억할라꼬 되풀이해따. - P7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물론 ‘양성성‘이라는 표현조차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분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양성성 지수‘라고 표현된 어떤 태도나 성향은 충분히 다른 언어로 대체될 수 있으며, 애당초 성별과 관련이 없다. 하지만 이 방송의 메시지는 확실하다. 성평등교육이 가정과 학교에서 자리 잡을 때, 아이들은 성별에 상관없이 자기만의 성격과 가치관을 발견하고 정립할 수 있다는 것, 성별로 상징되는 선택지 말고도 수많은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는 것, 그것이다. - P33

이외에도 최근의 많은 뇌 과학 연구는 인간의 뇌는 구조와 기능에 큰 차이가 없으며 주변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고 결론 내린다. 즉, 뇌에는 성차가 없으며 성차별주의가 만연한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과학적으로도 우리는 인간으로 나서 ‘남자‘와 ‘여자‘로 길러지고 있는 셈이다. - P41

무엇을 옳다고 말할 것인지, 왜 그런 것인지 알고 나니 아이들에게 무엇을, 왜 가르쳐야 하는지도 명확해졌다. 다른 사람의 외모에 대해 말하는 것, 상대방이 싫어하는 별명을 부르는 것, 같은 성별끼리도 타인의 동의 없이 신체를 접촉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사소한 폭력은 없다고, 어떤 폭력도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말한다. 초등학생이라고 예외는 없는 것이다. 어쩌면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에 더욱 정확하고 단호하게 말해줘야 하는지도 모른다. - P93

하지만 범죄 발생의 원인은 피해자에게 있지 않다. 2016년 5월에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은 개인이 아무리 조심해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절망하고 분노했다. 누구와 다녔든, 어떤 시간대에 어느 장소에 있었든, 무엇을 입었든, 범죄 발생의 원인은 가해자에게 있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가해자 발생 예방 교육‘이다. - P107

교사가 교실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라고 믿으며 자신의 말과 행위의 정치적 함의를 성찰하지 않는 것이 좋은 교육일 수 없다. 좋은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교사가 더 치열하게 정치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중립적이라고 믿는 모든 규범과 행위 속의 정치적 의미를 더욱 면밀히 탐구하고 밝히며 무엇이 더 정의로운 것인지를 부단히 고민해야만 한다. 페미니즘적 시선에서 학교를 해석하는 것은 그첫걸음이다. - P129

"페미니스트 교사로 활동하면서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나는 "다른 힘든 건 별로 없고요. 일할 사람이 부족한 게 힘들어요"라고 대답한다. 그만큼 더 많은 선생님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학생들이 더 많은 페미니스트 교사와 만나며 학창 시절을 보내길 바라본다. - P1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