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피해를 비롯한 많은 환경피해사례가 발생했을 때 정부는 피해를 확인하고 지원하려면 법적인 근거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초기에 전문가들이 참고할 수 있는전문 지식은 거의 없었다. 전문가들이 맞닥뜨린 공백은 제도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법적 근거의 부재‘, ‘이미 있는 법을 적용할 근거 없음‘ 등은 재난이나 환경피해 사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표현이다. 일단 상황이 벌어진다면 거의 매 순간에정부의 신속한 지원과 개입이 요구되지만, 사람들이 정부에게 대책을 요구할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평소에는 특별히 문제 되지 않는 제도의 허점은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야 드러난다. 애초에 법이규정을 촘촘히 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도 있다. 제도의 공백은 피해나 재난을 야기하는 동시에 재난 이후의 사회 복구에 걸림돌이 된다. - P121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10년 넘게 일하며 입법과 정책 실무를 해 온 이보라는 각각의 법에는 법을 만드는 데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수많은 사람의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법에도 표정이 있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재난안전법)에는 차오르는 눈물과 입 앙다문 결심이배어 있고,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가습기살균제법)에는 살균제를 산 가족들의 자책을 국가책임으로 전환하겠다는 회한 섞인 단호함이 있으며, ‘2050 탄소중립법‘에는 곧 닥쳐올 미래에 대한 아슬한 두려움이, ‘차별금지법‘에는 허리를곧추세우게 하는 단정한 존엄이 있다. - P122
재난의 인식 범위를 넓혀 보는 느린 재난의 관점에서 사회적 재난의 원인과 해결은 어떤 절대적인법 조항에 따라 매끄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부가 가습기살균제 피해를 책임지기로 하고 이러한정치적 결정을 현실로 옮기기까지 모든 단계에서가습기살균제 피해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에 대 - P138
한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졌다. 재난에 맞서는 과학그리고 법과 제도는 피해자의 요구, 노력과 합의, 어떤 순간에 이르러서야 나오는 결단과 의사결정, 예산 확보, 문구 제정 등의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했다. 법과 제도는 사회가 재난에 의한 상처를 회복하는 과정에서도 특히 한발 늦게 온다. 그런데 우리는 단지 피해자의 고통을 인정하고 돌보기 위해서만 기나긴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법을 제정하고 개정하려는 데에는또 다른 재난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피해자와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골든 타임이 지난 후법이 재난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어떤 식으로 힘을발휘하는지를 또렷이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 P139
재난 사례 하나하나는 발생 원인, 피해 범위, 책임주체 등에서 고유하게 예외적이다. 재난을 느리게 - P146
보는 관점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각각의 재난에 대응하며 쌓아 온 우리 사회의 역량이 시공간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학자 전치형은 재난의 핵심은 사건이 ‘뜻밖에‘ 발생한다는 예외성이 아니라 그것이 ‘누구에게나 발생한다는 보편성에 있다고 짚는다. 그는 우리가 재난에 따른 피해 사실뿐 아니라 재난에서 회복하기 위한 사회적 관계와 제도에 주목해야한다고 말한다. 피해 사실을 확인하고 드러내는 것보다 사회적 관계를 만드는 길이 훨씬 어렵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희망을 놓지 않은 때에만 반전의 기회를 노릴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를사회적으로 재고한 5년간의 과정은 괄목할 만한승리를 얻어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느리고 단단하게 성숙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기에더욱 소중하다.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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