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로 빠져나왔을 때는 안개가 더욱더 짙어져 있었다. 그래서 내가 주변의 모든 사물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모든 사물이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 같았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 이것은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들판의 출입문과 도랑과 강둑 들이 안갯속에서 내 앞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와 "다른 사람의 돼지고기 파이를 훔쳐 가는 소년이다! 잡아라!"하고 있는 힘껏 또렷하게 소리치는 것처럼 여겨졌다. 풀을 뜯는소들도 똑같이 갑작스럽게 내 앞에 불쑥 나타났는데, 콧구멍으로 김을 뿜으면서 커다란 눈으로 빤히 쳐다보는 모습이 마치 "어이, 꼬마 도둑놈!" 하고 부르는 것 같았다. 그중에는 목에 장식용 넥타이 모양의 하얀 반점이 있는 검은 수소가 양심에 찔려 예민해진 나에게 그 모습은 어딘지 꼭 목사님 같은 인상을주었다. 한 마리 있었는데, 그 소는 아주 완고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을 뿐만 아니라, 빙 둘러 돌아가려는 나를 따라 자신의 무뚝뚝한 머리를 함께 돌리면서 몹시 책망하는 듯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울먹이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아저씨! 내가 먹으려고 훔친 것이 아니에요!" 하고 소에게 말했다. 그러자 소는 머리를 수그리며 코에서 한 줄기 콧김을 뿜어 내더니,양 뒷다리를 한 번 높이 내지른 다음 꼬리를 휙 한 차례 휘젓고는 사라졌다. - P33
지난 주말에 <제국주의와 남성성> 목차를 보니 6장에 <위대한 유산>을 통한 영국 신사되기에 대한 내용이 있네. 디킨스 전작 읽기도 해야하니 6장 읽기 전에 읽으려고 올해의 첫 책으로 주문했다. 쿠폰 쓰려 쫀득하갱 팥데이도 같이 구매.이 책은 고등학교 때 축약본으로 읽었다. 축약본의 문제는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고 완역본을 읽을 생각이 안든다는 것(읽을 책은 많으니 ㅠㅠ).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소설도 대부분은 축약본을 읽어서 다시 읽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시리즈를 사줄 때도 축약본 완역본 고민이 있었지만 안 읽는 것 보단 낫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구매헸다.오늘 출근길엔 재밌는 디킨스 읽기.
캐딜락, 미로, 기억 궁전, 신곡
5장 미로와 캐딜락: 상징으로 걸어 들어가다이미 만들어져 있는 길은 그곳의 풍경을 지나는 가장 좋은 방법에 - P116
대한 앞사람의 해석이다.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먼저 간 사람의 해석을받아들인다는 것, 학자나 탐정이나 순례자처럼 먼저 간 사람의 뒤를 밟는다는 것이다.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 중요한 일을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이다. 같은 공간을 같은 방식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같은 생각을 하는 방법, 같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따라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행동을 흉내내는 연기가 아니라, 그 누군가의 영혼을 닮기 위한 노력이다. 순례가 다른 모든 보행과 다른 점은 이렇게 반복과 모방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신을 닮기란 불가능하지만, 신이 걸어간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일은 가능하다. 예수가 인류의 실족(Fall)을 대속하는 과정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 발을 헛디디고 진땀을 흘리고 상처입고 세 번 넘어지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14처에서다. 하지만 이 14처가 어느 성당에서나, 아니, 아무 데서나 볼 수있는 일련의 그림이 되면서, 신도들이 따라가는 것은 이제 수난의 장소가 아니라 수난 이야기가 되었다. 성당에 그려진 14처는 신도들이 예루살렘으로 걸어 들어가는 통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속으로들어가는 통로이다. - P117
미로가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언제나 모종의 여정을 상징한다. 통과의례의 여정 또는 죽음과 부활의 여정을 상징할 때도 있고, 구원의 여정 또는 구혼의 여정을 상징할 때도 있다. 그저 여정의 복잡함(길을 찾아가는 어려움, 길을 깨닫기까지의 어려움)을 상징할 때도 있는 것 같다. 고대 그리스의 문헌에는 미로가 많이 등장한다. 크레타 섬에 미노타우로스가 갇혀 있었다는 전설의 미로가 존재했던 적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곳에서 쓰는 동전에는 크레타 미로의 형상이 찍혀 있다. 실제로 발견 - P120
된 미로들도 있다. 사르데냐에는 바위 미로가 있고, 애리조나 남부와 캘리포니아에는 돌사막 미로가 있다. 로마인들의 모자이크 미로도 발견되었다. 스칸디나비아에는 땅에 돌을 놓아 만든 유명한 미로가 500개가량 있다.(20세기까지 어부들이 출항하기 전에 미로를 걸으면 고기가 많이 잡히고 순풍이 분다는 믿음이 있었다.) 잉글랜드에는 잔디 미로가 있다. 미로는 젊은이들이 에로틱한 놀이를 즐기는 장소였다. (예컨대 여자가 중앙에 가 있으면 남자가 여자를 향해서 달렸다. 미로의 굽이굽이 도는 길은 구애의 복잡함을 상징했다.) 잉글랜드에서 훨씬 더 유명한 미로로는 르네상스 정원의 미로를 후대에 귀족적 형태로 변형한 산울타리 미로가 있다. 미로에 대한 글을 쓴 많은 저자들은 미궁(maze)과 미로(labyrinth)를 구별하면서 대부분의 정원 미로를 미궁(maze)에 넣는다.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면서 혼란스럽게 만드는것이 미궁의 목적인 반면에, 미로(labyrinth)의 길은 하나뿐이라서, 누구든 계속 걷다 보면 중앙의 낙원에 도달할 수 있고, 돌아서서 걷다 보면 들어갔던 곳으로 나올 수 있다. 미궁이 분명한 목적지가 없는 자유의지의 혼란스러움을 뜻하는 반면에 미로는 구원으로 가는 확고한 여정을 뜻한다는 것도 미로와 미궁의 차이다. - P121
이제는 책이 기억 궁전 대신 정보 저장소가 되었지만, 아직 책에는기억 궁전의 몇 가지 패턴이 간직돼 있다. 길이 책을 닮을 수 있듯, 책도 길을 닮을 수 있다는 뜻이다. 길을 닮은 책은 걷기라는 ‘읽기‘를 통해 세계를 그려나간다. 단테의 신곡은 그 최고의 예다. 영혼이 죽어서 가게 되 - P130
는 세 장소를 여행하면서 베르길리우스라는 가이드의 도움을 받는 일종의 저승 여행기라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단테는 여행자의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멋진 장면과 흥미로운 인물을 하나하나 짚고 넘어간다. 예이츠는이 걸작이 실은 기억 궁전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실제로 이 책은 지형지물을 대단히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신곡의 여러 판본에 저승의 지도가 포함돼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신곡을 여행기(『신곡보다 먼저 나오거나 늦게 나온 무수한글들을 포함하는 방대한 장르)로 볼 수도 있다. 등장인물이 걸어가는 길이 곧이야기의 길이 되는 것은 『신곡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P131
책을 내면서그러나 이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농업은 사양산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 농업은 산업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유무역 이데올로기는 농업에 산업의 논리를 강요해왔고, 바로 그런 연유로 제3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선진국에서도 농업의 생산기반이 꾸준하게 약화돼온 것이다. 물론 선진국 대부분은 놀랍게도 표리부동하게 자유무역에서 농업을 예외로 두고 식량자급률 100% 이상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물론 농업이 경제의 토대이고 주권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일부를 제외한) 서방세계의 농민들까지 오늘날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일까? 초국적기업들이 호시탐탐 농업의 기반을 훼손하면서 독점적 이익을 누리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의 후안무치는 끝이 없다. 3년 가까이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특수를 누린 것은 방위산업만이 아니었다. 초국적 농기업들은 전시상황을 이용하여 우크라이나신자유주의 정부로부터 옥토 중의 옥토, 우크라이나 농토에 대한 장악력을 상당하게 넘겨받는 데 성공했다.농업이 끝내 사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또다른 이유는-이 자명한 사실을 현대 도시인들만 모르는 것 같은데-인간은 먹지않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의 과학기술은 실험실에서 햄버거를 만들어내면서 연금술의 비밀을 알아낸 것처럼 우쭐대지만, 대체육처럼극단적으로 가공이 된 ‘식품‘이라고 해도 그 원재료는 땅에서 나온다. 농업은 인류가 결코 손을 놓을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초국적 자본도 마지막까지 지배욕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 P8
농업에서는 최대화가 아니라 최적화가 기본원칙이다. 농부들은 무턱대고 수확량을 늘리려고 하지 않는다. 농업의 목표는 지속성의 확보이고, 그것은 최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투입물도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고 산출물도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다. 비료가 적정 수준을 넘어가면 작물은 허약해지고 지력은 훼손되며 이듬해의 수확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삭에 낟알이 지나치게 들어찬벼는 가을 태풍에 취약하다. 순환의 원리, 지속성의 가치를 최우선으로두고, 착취나 추출로 인해 근본이 손상되지 않도록 보살피는 것이 합리적인 농사방식이다. 수십 년에 걸친 녹색혁명 이데올로기 공세와 자유 - P9
무역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 70% 이상의 인구를 소농들이먹여 살리고 있고, 또한 가장 생산성이 높고 땅을 잘 보호할 수 있는 영농은 가족농의 방식이라는 것도 밝혀졌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 P10
백승종알다시피 동학은 1860년(철종 11년)에 탄생했다. 그러고는 한 세대가지난 1894년(고종 31년)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소농들이 들고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오랫동안 암묵적으로 유지되어온 ‘사회적 합의‘가깨졌기 때문이다. - P13
박맹수수운이 천명한 동학의 핵심 사상은 시천주, 그 가운데에서도 ‘시‘ 한 글자에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 한 글자는 곧 인간생명의 주체인 영)의 유기적 표현으로서 인간과 우주의 자연적 통일, 인간과 인간의 사회적 통일, 인간과 사회의 혁명적 통일이 ‘시‘ 한 글자에다 통일되어 있다. 시(侍) 안에는 최수운 선생의 인간과 우주의 자연적 통일로서의 시천(天)사상뿐만 아니라, 뒷날 최해월 선생의 인간과인간의 사회적 통일로서의 양천(天)사상, 나아가 동학혁명 민중 전체와 전봉준 선생, 3·1운동 민족 전체와 손병희 선생 등의 인간과 사회의혁명적 통일로서의 체천(天)사상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김지하, <인간의 사회적 성화-수운사상 묵상>, <남녘땅 뱃노래>, 두레, 1985, 112쪽). - P26
김용휘또한 해월의 철학은 "모든 만유가 무궁한 우주생명을 내면에 모시고있다"는 근본적 생명원리와 "한울이 한울을 먹고 산다"는 이천식천(天食天)의 생명원리를 제시했다. 이천식천은 만물의 상호의존성을 알고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모시고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먹는 것의 신성함과 공생의 삶을 내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천식천은 적자생존의 논리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몸을 언젠가는 기꺼이내놓아야 한다는 자기헌신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나라는 개체 생명에 한정된 의식을 벗고 우주의 전체 생명이라는 보다 초월적 시각에서 생과 사를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 P37
누군가에겐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게 투쟁임을. 누군가에겐 출근길 10분의 지체가, 다른 누군가에겐 20년의 외면된 기다림임을. 겨우(!) 이동권이 아니라 존재로서의 노동권 거주권 평범하게 살 권리를 말하는, 보이는 존재가 되기 위한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처절한 몸부림이다.헌법 제10조를 다시 읽어보자.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국가는, 우리는 그들의 헌법적 권리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