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벌레식 문답

정원의 질문에 주인이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득도한 듯 인자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디로든 들어와.
그리고 가버렸다. 사슴벌레를 대변하는 듯한 그 말에 나는 실로감탄했다. 너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사슴벌레의 의젓한 말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치 가부좌라도 튼 듯한 점잖은 자세로 그런데 나의 상상과 달리 정원의 말에 따르면방에 있던 사슴벌레는 몸이 뒤집힌 채 계속 버둥거리며 빠른 속도로 움직여 다녔다고 했다.
약을 쳐서 그랬나봐. 정원이 사슴벌레에 빙의된 듯 양 손가락을바르르 떨며 말했다.
그렇다면, 하고 내가 말했다. 사슴벌레의 등에 작은 휴지를 대고 양쪽 다리에 빗자루 싸리를 몇 개씩 매달아 너 대신 청소를 시켰으면 어땠을까.
정원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나 어떻게든 그렇게 잔인해정원이 씩 웃으며 해보자는 건가 했고 우리는 해보았다.
인간은 무엇으로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 P21

아무리 차근차근 생각해보려 해도 추모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때문인지 취기 때문인지 내 정신은 급격히 혼탁해지고 제대로 된사고를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다가 문득 그럴수도 있지, 한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
술을 한 잔 마시며 나는, 어떻게 치아 교정을 하나, 탄식하다가또 한 잔을 마시며,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같이 활동하던 동료이자 친구의 남편을 감옥에 팔 년 동안 갇히게 한 진술을 하고도 자신의 입매나 치아 배열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쉰이 넘고도 치아 교정기를 몇 년이라도 달 수 있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조직 사건 연루자로 조사를 받으면서도 지켜낸 교수 자리인데 뜻밖의 법인화 문제로 규정이 바뀌어 자리가 위태로워지면 곳곳에 전화를걸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방도를 알아볼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과 바꾼 자리인데 지키지 않을 수 있을까. 필요하면 무슨 법사도만나고 무슨 포럼에 패널로 갈 수도 있는 것이다. - P36

실버들 천만사

우리 있잖아, 아빠랑 오빠도 이름 부를까? 병석씨, 명운씨 이렇게.
그러자 그래야 내가 흥분해도 감정의 거리가 생길 것 같네.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평해지는 게 좋지.
반희가 채운을 보았다. 채운은 반희가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내가 좀 멋진 말을 했나 싶어 어깨가 으쓱했다. - P53

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채운씨. 반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지금도 고개를 못 돌리는 건 아닌데 무서워서 못 돌아보는 거잖아. 경추가 빙빙돈다고 돌아볼 수 있을까?
그래? 그럼 아까 그 물고기처럼 뇌를 젤리화하는 수밖에 없는건가?
그렇지. 그리고 제대로 보려면 머리카락도 반은 밀어야 할걸.
와, 그러네. 그 풍경 참 기괴한데. 여자들이 외계인처럼 머리 절반이 그렇게 돼서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면.
채운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엄마, 우리가 먹을 거 놓고 마음껏 싸우지도 못하게 된 건 뭐 땜에 그런 걸까?
음, 반희가 생각하다 말했다. 그것도 물고기랑 같은 이유겠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세상 뭐 다 이렇게 슬픈 얘기야, 젠장. 채운이 맥주를 벌컥 마시고 말했다. 나는 원래 생겨먹은 데서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반희는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 P73

하늘 높이 아름답게

그날 새벽 내내 잠을 설친 탓에 베르타는 마리아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몸부터 일으키자 하니일어나졌고 일어나니 이내 침대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욕실로 가자 하니 욕실 쪽으로 발이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마리아의 말대로였다.
몸이란 게 움직이자 달래면 움직여져요, 사모님. - P103

자신이 왜 그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왔는지가 분명히 이해되었다.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 않구나 우리는…… 베르타는 카디건 앞섶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쳤다.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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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4-01-01 0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햇살과함께 2024-01-01 21:05   좋아요 1 | URL
루피닷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려주시는 시 잘 읽고 있어요!
 


<공포의 권력> 2024년 1월 ‘여성주의책 같이 읽기’ 책. 제목도 작가 이름도 어려워 보이는 책. 그러나 다행히 글자 크기는 작지 않네.

<일 년 내내 여자의 문장만 읽기로 했다> 이후북스 정희진 샘 북토크 가서 구매한 책. 시사인에 연재된 글은 몇 편 읽었다. 읽고 나면 읽고 싶은 책이 가득할 책. 희진 샘 북토크는 수하님의 페이퍼 참고.

* 강풍주의보인, 바람 겁나 부는 경주에서 한 해를 마감하며.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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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12-31 23: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첨성대 예쁘네요 ㅎㅎ 오늘 밤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햇살과함께 2024-01-01 21:18   좋아요 1 | URL
서곡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경주는 조명의 도시더라구요. 유물이 있는 곳마다 조명이 어찌나 멋진지요

건수하 2023-12-31 2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경주가 바람이 엄청나더라구요~ 저도 작년 연말에 갔는데 따뜻한 남쪽나라 기대했건만 느무 추웠… 그래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

햇살과함께 2024-01-01 21:20   좋아요 0 | URL
원래 바람이 많이 부는 도시였나요? 저는 겨울엔 처음 가봐서.. 서울보다 온도가 4-5도 높아서 방심했는데 칼바람 엄청 맞았어요 ㅎㅎ

건수하 2024-01-03 09:49   좋아요 1 | URL
저도 몰랐는데… 그렇다더군요 ^^ 건설 제한으로 높은 건물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도 있더라구요.

얄라알라 2024-01-01 00: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북토크 현장에서 사오신 책이라 더 의미가 크시겠어요. 동문선 출판사 번역은 어떠한지 궁금하네요^^ 예전에 힘들었던 적이 좀 있어서.

사진으로는 바람이 느껴지진 않지만 상상하며~~~ 햇살과 함께님
2024년 첫 책도 곧 올려주시와요
23년 마지막 책 잘 보고 갑니다요~~~^^

햇살과함께 2024-01-01 21:21   좋아요 1 | URL
동문선 저는 처음 도전하는데 표지부터 어려워보이네요 ㅎㅎ 얄라알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독서괭 2024-01-01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첨성대 사진이 멋집니다.
햇살님 해피 뉴 이어!^^

햇살과함께 2024-01-01 21:23   좋아요 1 | URL
야간모드로 찍었더니 실제 조명보다 더 블링블링 핑크로 나왔어요 ㅎㅎ 괭님도 해피 뉴 이어^^

cyrus 2024-01-0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

햇살과함께 2024-01-01 21:24   좋아요 0 | URL
cyrus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멋진 책 리뷰 기대할게요!
 

올해의 최고로 뿌듯한 일 중 하나는 작년 11<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시작으로,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를 1년 동안 완수한 것이다. 그리고, 작년 10<The Story of the World> 1권을 시작으로 영어 읽기를 꾸준히 한 것도.


두 가지 다 내년에도 쭈욱~


너무 많지만 올해 최고의 책을 두서없이 나열해 본다(, 지방으로 떠나야 해 마음이 바쁘다…).


여성주의책같이읽기 책은,

대부분 좋았지만 그중에서도 몇 권만 뽑아보자면,,




















그외 개인적으로 읽은 책 중에서는,



















영어 책은,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내년에도 함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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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12-30 17: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성주의 책 주르르 모아두면 이렇게 멋지군요. 저는 초반 책들은 모여 있는데 최근 책들은 다 흩어져서ㅋㅋㅋㅋ 이산 가족도 아니구요.
햇살과함께님~~ 내년에 더 자주 뵈어요^^
2023년 남은 시간도 마무리 잘하시길요.... (눈 많이 오는데 어디 가시나요?.......)

햇살과함께 2023-12-31 15:47   좋아요 0 | URL
책등이 알록달록 너무 예쁘죠? ㅎ 내년에도 단발머리님의 멋진 사유 글 기대할게요.
눈 전혀 오지 않은 - 그러나 바람이 엄청 부는 경주입니다….

얄라알라 2023-12-30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넘쳐나는 책장. 시스터 아웃사이더가 누울 수 밖에 없는 촘촘한 공간이네요^^

햇살과함께님 연말 마무리 잘 하시고, 자주 뵈어요!

햇살과함께 2023-12-31 15:49   좋아요 1 | URL
시스터 아웃사이더는 아직 읽지 않은 책이라 껍데기만 위에 올려놓은 ㅋㅋ
얄라알라님 자주 뵙겠습니다~ 감사했어요!

다락방 2023-12-31 0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함께해서 너무 좋았습니다!! 내년에도 쭈욱 함께해요!!

햇살과함께 2023-12-31 15:50   좋아요 0 | URL
네!! 내년에도 다락방님을 쭈욱 따라가겠습니다!!

독서괭 2023-12-31 1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은책이 여럿 보여 신나네요~^^ 햇살님과 함께 읽은 제2의성! 백래시! 저도 매우 뿌듯합니다~~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햇살과함께 2023-12-31 22:57   좋아요 1 | URL
독서괭님 덕분에 좋은 책 읽었네요 감사해요 괭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은오 2024-01-01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성주의 책읽기 1년동안 완수.... 크.... 다 만만치 않은 놈들이던데 너무 멋지십니다!! 🥹 햇살님이랑 같이 읽은 <백래시>, <페이드 포> 저도 너무 좋았어요! <제2의 성>은 중도하차했지만.... 언젠간 다시 도전하리라 햇살님 페이퍼에서 결심해봅니다. ㅋㅋㅋㅋㅋ
햇살님! 한해 동안 너무 감사했고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 올해도 같이 놀아주세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햇살과함께 2024-01-01 21:29   좋아요 1 | URL
은오님 <제2의 성> 읽을 때 재독해야겠네요! 설마 잠자냥님처럼 며칠 만에 혼자 독파해버리는 거 아닐지 ㅋㅋ
저야 말로 은오님 덕분에 즐거운 북플/서재 생활이었어요!! 올해도 두분 사랑 변치않기를!! 해피 뉴 이어!!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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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반세기만에 다시 읽었다. 하루키의 책과 음악 취향을 보여주는 책. 이렇게 많은 책과 음반이 소개되는 줄 몰랐다. 하루키의 청춘에 대한, 섹스와 여성에 대한 환상과 로망을 보여주는 책이다. 여전히 청춘의 아이콘이라는 하루키의. 그때도 지금도 청춘을 즐기지 못한 나의 오글거림은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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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30 15: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의 오글거림도 저의 몫이겠죠. ㅋㅋㅋㅋ

햇살과함께 2023-12-31 15:42   좋아요 0 | URL
나만 오글거리는 거 아니어서 안심…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12-30 15: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니글거림은 제가!!! 제가 이 책 상실의 시대 시절 읽고, 반딧불이 읽고, 집에 서너시리즈?권? 모셔둔 거 같은데 하루키 못 읽어(다들 좋다는데 나만 왜이래 하고…)병이네요…

잠자냥 2023-12-30 15:37   좋아요 2 | URL
유열님 동병상련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12-30 15:39   좋아요 1 | URL
하루키 리뷰대회 우승 예비자의 발언은 무효입니다. (이상 하루키 못 읽어서 리뷰대회 못 나가는 반놈이었습니다. )

잠자냥 2023-12-30 15:40   좋아요 2 | URL
열님! 저 은바오에요!🐼

반유행열반인 2023-12-30 15:42   좋아요 2 | URL
은바오 사칭범! 그치만 잠자냥님이라 다 용서되요! 결혼만 해주시면!!! 이러실 듯… 햇살님 여기서 이러고 폐가 많습니다…

햇살과함께 2023-12-31 15:44   좋아요 1 | URL
열반인님도 그러시다니 반갑네요!
오글거림에도 리뷰 대회 참여하시는 잠자냥님의 그 인내심을 리스펙ㅋ
 

"설마 자기가 한밤중에 우리 침실로 숨어 들어와서 차례로강간하지는 않겠지?"
"물론 안 해요, 그런 짓."
"그렇다면 아무 문제 없어. 우리 방에 머물면서 천천히 이야기하도록 해. 그러는 편이 좋아. 그러면 서로의 기분도 잘알 수 있고, 내 기타 솜씨도 자랑할 수 있고, 나, 꽤 잘 치거든."
"정말로 귀찮지 않겠어요?" - P176

"나오코는 자주 저렇게 돼요?"
"응, 가끔." 레이코는 씨는 이번엔 왼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주 그래. 감정이 차올라서 울어. 괜찮아, 그건 그것대로.
감정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거니까. 무서운 건 그걸 바깥으로드러내지 못할 때야. 감정이 안에서 쌓여 점점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거지. 여러 가지 감정이 뭉쳐서 몸 안에서 죽어 가는거. 그러면 큰일이야." " - P201

"알아요. 어쩐지 알 것 같아요."
"그 애가 악보를 가져오더니 한번 쳐 봐도 되겠느냐는 거야. 괜찮다고, 쳐 보라고 했지. 그러자 그 애는 바흐의 「인벤션(Inventionen)」을 쳤어. 그런데, 그게 꽤 재미있는 연주였어. 재미있다고 할까 참 이상하다고 할까, 분명히 평범하지는 않았어. 물론 높은 수준은 아니었어. 전문 학원에서 배운 것도 아니고 레슨도 받다가 안 받다가를 반복하다 보니 자기 식대로 연주한 거니까. 제대로 훈련을 받은 음은 아니었어. 만일 음악 학교 입학 시험에서 그렇게 연주하면 그냥 떨어지고 말 거야. 그렇지만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어, 그게 다시 말해 전체의 90퍼센트는 말도 안 되지만, 나머지 10퍼센트의 중요한 포인트를나름대로 해석해서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 그것도 바흐의 「인벤션」을! 난 그것 때문에 그 애한테 관심이 생긴 거야. 얘 도대체 뭐야, 하고. - P216

"그건 가 봐야 알 수 있어. 그나저나, 오늘 정말 짧은 스커트를 입었네."
"보기 좋죠?"인할
"계단 오를 땐 어떡해, 그거?" 의사가 물었다.
"그냥 올라가요. 시원하게 보여 주는 거죠." 미도리의 말에뒤에 선 간호사가 키득키득 웃었다.
"자네도 곧 입원해서 머리를 열어 보는 게 좋을지 몰라." 의사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 병원에서는 가능한 한엘리베이터 타도록 해. 환자가 더 늘어나면 곤란하니까. 요즘그렇지 않아도 바빠." - P315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
"친척이 문병 와서 여기서 같이 밥을 먹잖아, 그러면 모두반은 남겨. 너처럼. 그래서 내가 덥썩 다 먹어 치우면 ‘미도리는 건강해서 좋겠네. 난 가슴이 먹먹해서 도저히 다 먹을 수가없어.‘라고 해. 그렇지만 간병하는 사람은 바로 나야. 농담이아니야. 남은 그냥 찾아와서 동정할 뿐이야. 화장실 수발도 들고 가래도 받고 몸을 닦아 주는 건 바로 나야. 동정만 해도 대소변이 처리된다면, 그 사람들보다 오십 배는 더 동정할 거야. 그런데도 내가 밥을 다 먹어 치우면 나를 비난 섞인 눈길로 바라보며 ‘미도리는 건강해서 좋겠네.‘라고 해. 나를 무슨 짐수레나 끄는 당나귀 같은 걸로 생각하는 건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 가지고서는 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를까, 그 사람들? 입으로는 무슨 말인들 못 하겠어. 중요한 건 대소변을치우느냐 치우지 않느냐 하는 거거든. 나도 상처받을 때가 있어. 나도 지쳐서 축 늘어질 때가 있어. 나도 울고 싶을 때가 있어. 나을 가능성도 없는 사람을 잡아다 의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머리를 열고 마음대로 주무르고, 그걸 몇 차례 반복하는사이에 몸은 점점 더 나빠지고, 정신 상태도 이상해지고, 그런걸 두 눈으로 오래 지켜보고 있어 봐, 견딜 수 없다고. 게다가저축한 돈은 점점 줄어들고, 앞으로 삼 년 반 더 대학에 다닐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고, 언니도 이런 상태로는 결혼식도 못할 거고." - P317

그 사람 연극의 특징은 이것저것 마구 뒤엉켜 꼼짝도 못 하게 돼 버린다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이런저런 사람이 나오는데 그 모두에게 각각 사정과 이유가 있고, 모두가 나름대로 정의와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 탓에 모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못하는 상태에 빠져요. 그건 그럴 수밖에요. 모든 사람의 정의가 실현되고 모든 사람의 행복이 달성되는 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니까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카오스 상태에 빠지고말죠. 그러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이게 정말 간단합니다. 신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교통정리를 하는 거죠. 넌 저쪽으로, 넌 이쪽으로, 넌 저놈이랑 같이, 넌 거기서 잠깐 가만히 있어, 그런 식으로요. 배후 조정자 같은 거라고 할까요. 그리고 모든것이 완벽하게 해결돼요. 이것을 ‘데우스 엑스마키나‘라고 합니다. - P323

미도리 아버지를 생각하노라니 점점 애절한 기분이 들어, 나는 서둘러 옥상 위 빨래를 거둬들이고 신주쿠로 나가 거리를 걸으며 시간을 죽이기로 했다. 혼잡한 일요일 거리는 나를오히려 푸근하게 해 주었다. 나는 통근 열차처럼 붐비는 기노쿠니야 서점에서 포크너의 『8월의 빛』을 사서 음악을 크게 틀어 줄 것 같은 재즈 카페에 들어가 오넷 콜먼이니 버드 파월의 레코드를 들으면서 뜨겁고 짙고 맛없는 커피를 마시며 방금산 책을 읽었다. 5시 반이 되어 나는 책을 덮고 바깥으로 나와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불현듯 앞으로 이런 일요일을 도대체 몇십 번 몇백 번 반복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고독한 일요일."이라고 나는 입으로 소리 내어말했다. 일요일에 나는 태엽을 감지 않는다. - P337

그게 무엇인지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십이삼 년이 지난 뒤였다. 나는 어떤 화가를 인터뷰하기 위해 뉴멕시코 주 산타페에 갔고 저녁에 근처 피자 하우스에 들어가 맥주를 마시고 피자를 씹으며 기적처럼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내 손이며 접시며 테이블이며눈이 닿는 모든 것이 빨갛게 물들었다. 마치 특수한 과즙을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쓴 것처럼 새빨갰다. 그 압도적인 저녁노을 속에서 나는 문득 하쓰미 씨를 떠올렸다. 바로 그 순간 그녀에게서 비롯한 떨림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했다. 그것은충족되지 못한, 앞으로도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소년 시절의동경 같은 것이었다. 나는 가슴을 델 것 같은 무구한 동경을이미 오래전에 어딘가에 내려놓았기에, 그런 게 내 속에 존재했다는 것조차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하쓰미 씨는 내 속에 오랫동안 잠들었던 ‘나의 일부‘를 뒤흔들어 깨워 놓았던 것이다. - P356

"더 멋진 말 해 봐."
"네가 정말로 좋아, 미도리.
"얼마나 좋아?"
"봄날의 곰만큼 좋아."
"봄날의 곰?" 미도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뭔데, 봄날의 곰이?"
"네가 봄날 들판을 혼자서 걸어가는데, 저편에서 벨벳 같은털을 가진 눈이 부리부리한 귀여운 새끼 곰이 다가와. 그리고네게 이렇게 말해. ‘오늘은, 아가씨, 나랑 같이 뒹굴지 않을래요.‘ 그리고 너랑 새끼 곰은 서로를 끌어안고 토끼풀이 무성한언덕 비탈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루 종일 놀아. 그런 거, 멋지잖아?"
"정말로 멋져."
"그 정도로 네가 좋아." - P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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