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월담 공동대표 리조의 몸

움직임의 시작은 내 몸이지만 계속 움직이게 하는 건 관계예요. 자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건강과의 관계, 또는 예기치 못했던 관계. 저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관계의 중요성을 알아가는 경험을 해요. 함께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교육이 가능했고요. 그래서 우리는 늘 동료를 찾고 있습니다. 배움을 풍성하게 하고 삶을 지탱하는 힘을 나눌 수 있는 동료를 찾는 게 저희에게 항상 필요한 것 같아요. - P116

암 생존자 정지혜의 몸

저는 암을 치료한다기보다는 암에 대한 인식과 싸운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제 투병은 인식과의 투쟁이에요. 아픈 사람에게도 욕구가있고 아픈 사람에게도 일이 필요해요. 아파도 일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고요. 저도 아직 임금노동을 못 하고 있어요.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거든요. 젊은 암환자 중에는 완치 판정을 받았음에도 일자리 구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아팠던 사실을 숨기는 분들도 많고요. 이런 공감대를 가진 분들끼리 일을 서로 품앗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도 그런 모임에 나가볼까 알아보고 있어요. 임금노동을 못할 거면 차라리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생각에 최근엔 여성 노동자 인터뷰 프로젝트 ‘WSW‘를 하고 있어요. ‘We are still working‘의 약자로, 한가지 일을 오랫동안 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요. - P131

대중음악평론가 김윤하의 몸

다만, 그룹에 속해 있거나 신인일 때는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솔로활동을 하면서 시작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어요. 아이돌이라는 직업 특성상 조금만 움직여도 반응이 뜨겁게 나타나기 때문에, 어려운상황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목소리를 내는 여성 아티스트가 늘고 있다는 것이 무척 긍정적이고 고맙죠.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얼마나 어려운 환경인지 너무 잘 알아서 조금이라도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하는여성 아티스트를 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응원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 P146

배우 김꽃비의 몸

배우 김꽃비는 커다란 헬멧을 옆구리에 낀 채 녹음실에 나타났다. 그의 별명은 바이크 전도사로, 운전자 성별, 바이크 기종, 운전기량 등으로 서로를 차별하지 않는 바이크 문화를 꿈꾸고 있다. 김꽃비의 이야기 중 내 마음 깊이 박힌 표현은 "바이크가 페미니즘적 수행처럼 느껴진다"는 말이었다. 사륜차들이 달리는 도로위에서 바이크 운전자는 ‘어디 감히 이륜차가!‘라는 차별적 시선을 받는다. 이는 ‘어디 감히 여자가! ‘와 비슷한 인식 아닌가. 여성운전자라는 게 드러나는 순간 위협을 당하기도 한다. 반면 페미니즘적 해방의 순간도 있을 것이다. 온몸에 힘을 실어 기체를 통제하며 질주할 때의 터질 듯한 희열은 그가 말할 때 표정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김꽃비의 수행을 칵테일로 표현한다면 어떨까. 아일랜드의 바 메뉴 중에서 골라보았다. 탐험가, 등산가, 사진가로 활동했던 여성들을 기억하기 위한 술이다. 오래 숙성해 풍미가 깊어진 럼에 시럽과 각종 향신료를 섞은 뒤 큼직한 사각 얼음을 빠뜨린다. 잔에는이런 문구가 함께 적혀 있다. "밧줄을 짧게 매고 도끼를 꽉 쥔 채깊은 심호흡을 한다. 발걸음을 내딛는다. 저 비명을 지르는 허리케인의 한가운데로!" - P161

군인권센터 활동가 방혜린의 몸

그런데 어느 날 상급자가 저를 부르더니 "넌 남자냐여자냐?" 물어보는 거예요. 그 질문이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나는 남자일까, 여자일까? 나는 뭐지? 나를 고쳐야 하나? 군생활 끝날 때까지 고민했죠. 제 몸을 그대로 인정하기까지 페미니즘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제몸과 제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고, 군생활 내내 답답했던 부분들에 대한 답을 줬어요. 질서가 모두 만들어진 것이고 이를 깨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거잖아요. 페미니즘 활동에서 시작해 활동가의 삶으로 이어진 것도 내가 나일 수 있는 세상에 보탬이되고 싶은 욕망이 담긴 거죠. - P181

대학원생 김유빈의 몸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용기에 관한 것이에요. 제가 최근에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기 시작했거든요. 처음 다가갔을 땐 아이들이 저를 피했어요. 그런데 나중엔 저멀리서 제가 나오는 모습만 봐도 막소리를 지르면서 뛰어오는 거예요. 제겐 용기를 내야 하는 일이었어요.
밥을 한 번 주면 계속 줘야 하잖아요.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부담도 생기고, 또 제가 며칠 놀러가는 일이 생기면 그 아이들은 굶어야하는 거잖아요. 지역 주민들과의 마찰도 있고요. 나이드신 분들은 이해를 못하시고 화를 많이 내시죠. 이런 상황에 맞서야 할 때 용기가많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계속해서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는이유는,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가 너무 신기했어요. 물론 그들은 제가 주는 밥을 좋아하는 것 같지만요. 하지만 제가 밥을 주지 않아도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고양이들은 - P198

밥을 먹고 나면 배를 보여주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거든요. 그런모습을 볼 때 기분이 좋아요.
우리는 다 달라요. 많이 다르냐 조금 다르냐 정도의 차이일 뿐이죠.
스펙트럼이 있을 뿐이에요. 남과 다르다고 생각해도 그게 자기 자신을 슬프게 할 이유는 못 되는 것 같아요. 너무 자기계발서 같은 이야기지만, 용기를 내셨으면 좋겠어요. 용기를 내면 기쁜 일도 많이 생기거든요. - P199

사진가 황예지의 몸

사진을 찍을 땐 무조건 피사체에 맞추려고 해요. 그들이 불편해하는 순간 무조건 카메라를 내려요. 나중에 그들이 사진을 봤을 때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을 느끼는 기색이 보인다면 그 사진을 삭제해요. 당연한 것이에요. 여태까지 잘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고요. 많은 여성 모델들이 남자 사진가가 자기 몸을 만지거나 여기서 더 벗으면 사진이좋아질 거라고 강요했다고 제게 말했어요. 그런 말들을 듣고 명확해졌어요. 내가 하지 않아야 하는 일은 그런 것이구나. - P223

다큐멘터리 감독 김보람의 몸

내 몸을 받아들이려 노력해도 쏟아지는 광고들, 길 가다가 마주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내 몸이 부족하고 완벽하지 않고 아름답지않다는 생각에 다시 빠지게 되더라고요. 몸을 중립적으로 바라보고, 혐오하거나 불만을 갖지 않고, 다른 사람과 내 몸을 비교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해도 허기는 밀려오죠. ‘그래도 나는 아름다워‘라는 생각은제게는 좋은 방법 같진 않았어요. 다만 매일매일의 싸움이란 생각이들었어요. 어느 순간 깨닫고 끝나는 게 아니라 매일 나의 욕망과 싸우는 과정의 반복이 아닐까.
허기를 느끼는 제 모습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생각과매일매일 싸우는 게 저를 훨씬 더 외모 중립적으로 바라보게 하더라고요. 광고나 드라마, 영화 같은 이미지와 맞서려면 그것과 싸우는 말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읽고 보는 것이 중요해요. 그런 의미에서 미국 시트콤을 좋아하는데, 끊임없이 다른 몸과 다른 존재들이 나오거든요. - P230

월경컵 사업가 심윤미의 몸

‘페미니즘‘이란 학문을 처음 만난 건 2015년이었다. 그 무렵 대학 내 독립언론 기자로 교내 성폭력 사건을 취재중이었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성 언론 기사가 없었다. 한계를 느낀 나는 책의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때 읽은 책은 정희진 작가가 쓴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이었다.
내가 여성으로 살면서 겪은 일들이 이미 글과 학문으로 질서정연하게 설명돼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동안 겪었던 적지 않은일들이 내 잘못이 아니었으며 오로지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겪은 것이었단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됐다.
책에는 군사주의를 남성성과 연결하여 여성주의적 시선으로분석한 챕터가 있는데, 그 대목은 내 시야를 확장해주었다. 여성주의는 마구 가지를 치면서 평화학으로까지 뻗어나갔다. 그러니까여성주의로 나와 같은 여성의 개인사를 설명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군사주의와 폭력 같은 거대 담론도 설명할 수 있었다. 처음 여성주의라는 세계에 발을 디딘 나는 여기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주의는 어떤 목표를 위해 도달해야만 하는 종착지가 아니라 하나의 시선으로서 세상을 넓게 바라보게 해주는 통로에 가까웠다. 책을 읽고 여성주의자로서 궁극적으로 남성성으로 대변되는 군사주의적 문화에 저항하고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는 폭넓은 해석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 P305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저지르세요. 제가 저지르는 인생을 47년 살았는데요, 큰 사고는 안 나요. 물론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인가, 이것이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일인가, 이런 고민은 충분히 해야겠지만 누군가가 말린다는 이유 때문에 고민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사고 치세요. 다가오는 해에는 사고친 여성들의 기사가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 P313

작가 정지민의 몸

저는 결혼하면 남편이 가사를 안 도와주거나 시가가 저를 충분히존중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결혼해서 살아보니까 제 안에 내재된 ‘한국 남자‘ DNA를 발견했어요. 아빠에게 배운 걸 그대로 집에서 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밖에서 일하고 남편이프리랜서로 집에 있는 상황인 게 큰 이유일 텐데요. 밖에서 일하는 입장이 되니까 저도 별다를 바 없이 다른 남성들처럼 이야기하더라고요. 단순히 여성이라서 페미니스트가 되는 게 아니듯이 자기가 조금더 많은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자리에서 성찰 없이 행동하면 누구나 다 가부장적인 남성처럼 될 수 있구나 생각했어요.
남편이 전기밥솥에 밥을 넘칠 정도로 해둬요. 밥을 조금만 더 하면 밥솥이 폭발하겠더라고요. 그러다보니까 맛이 없었어요. 한번은 짜증을 냈어요. "왜 이렇게 밥을 한 번에 많이 해, 나눠서 하지." 그런데 남편도 집에서 일을 하거든요. ‘나눠서 하면 밥을 너무 자주 해야한다. 나는 한 번에 많이 해놓는 게 좋다‘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순간 "우리 엄마는 이렇게 안 했는데, 우리 엄마는 맨날 밥해줬어" 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이야기를 하고 남편 얼굴을 봤더니 ‘매우 빡침‘이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저한테 "네가 한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봐라"라고 했어요. 그게결국 남편들이 아내에게 ‘우리 엄마는 이렇게 안 해줬다. 우리 엄마처럼 해달라‘고 하는 말이랑 똑같다는 걸 깨달았어요. 큰 반성을 했죠. -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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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mère stroked my head and hugged me.
"Julian," she said softly. "You are so young. The things you did, you know they were not right. But that does not mean you - P83

are not capable of doing right. It only means that you chose todo wrong. This is what I mean when I say you made a mistake. It was the same with me. I made a mistake with Tourteau.
"But the good thing about life, Julian," she continued, "is that we can fix our mistakes sometimes. We learn from them. We get better. I never made a mistake like the one I made with Tourteau again, not with anyone in my life. And I have had avery, very long life. You will learn from your mistake, too. You must promise yourself that you will never behave like that with anyone else again. One mistake does not define you, Julian. Doyou understand me? You must simply act better next time."
I nodded, but I still cried for a long, long time after that.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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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연구자 염운옥의 몸

도대체 불법과 합법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일까. 이렇게 서류 한 장으로 불법과 합법의 인간이 갈리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생겼어요. UN 인권위원회, 국제노동기구, 한국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불법illegal‘이라는 말을 인간에게 쓰지 말아야 한다고 권고해요. ‘불법 체류‘ 대신 ‘미등록undocumented‘ 혹은 ‘초과 체류overstayed‘라는 말을 쓰자는거예요.
이주자에게 체류자격은 너무나 중요해요. 체류 자격이 흔들리면 노동을 제대로 할 수 없고, 아이 양육을 제대로 할 수 없죠. 아이를 학교에보낼 수도 없거든요. 체류 자격이라는 것은 등록되는 서류잖아요. 이서류를 갖고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구분해서 ‘당신의 몸은 오늘까지는 합법이지만 내일부터는 불법이야‘ 이렇게 말하는 게 맞는 걸까요?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요? - P18

여성학자 권김현영의 몸

제가 충격을 받았던 건, 백화점 같은 경우엔 3천여 명 정도 되는 직원들이 있는데요. IMF 이후엔 90퍼센트 정도가 아웃소싱되어서 파견직으로 바뀌게 됩니다. 2700명 정도가 파견직 노동자가 되는 거죠.
백화점에 소속된 게 아니라 입점 매장에서 각각 따로 계약을 맺어 파견직으로 근무하게 하거나, 아니면 백화점 안에서 단기 고용으로 일용직 노동자처럼 활용하면서 백화점 정규직의 지위는 주지 않았죠. 이 파견직 여성 노동자 그룹은 거의 대부분 담배를 피워요. 반면 정규직 여성 300명 중에서는 흡연자가 한 30명, 10퍼센트밖에 안 됐는데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에게 정규직 여성 노동자들 중 담배 피우는 사람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더니 한 명도 본 적 없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승진에 대한 기대가 있고 직장 안에서 인사 평가와 관련된부분을 의식하는 여성들은 사람들과 같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얘기죠. 혹은 담배를 피우지 않거나 그런데 언제 잘릴지 모르는 취약한지위에 있는 여성들은 담배를 굉장히 많이 피워요. 콜센터 같은 경우에는 담배 피우는 시간을 확보해주기도 해요. 그것이 가장 쉽게 스트레스를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이거든요. 이런 식으로 여성의 흡연이 완전히 계층화되어 있는 거죠. - P29

작가, 뮤지션 요조의 몸

말랑말랑하게 늙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살아가면서 신념이라는것이 되게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이 신념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다보면 이게 사람을 딱딱하게 만들고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 같아요. 언제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갖되 그것이 나를 딱딱하게 만들지 않게끔 말랑말랑해지려는 노력을 실천하면서 늙으면 참 좋겠어요. 정치적 입장뿐만 아니라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들이 있잖아요. 페미니즘, 환경, 생명, 종교, 여러 가지 다양한 입장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너무너무 거대해지고, 강해지고, 유일한 진리처럼 될 때 그것이 또다른 혐오를 낳고 또다른 공격으로 이어지면서 ‘나는 맞고 너는 다 틀려‘ ‘너희는 정의가 아냐‘라는 식으로 더 좁아질 수 있겠더라고요. 저부터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 P43

피디 김영미의 몸

신입 피디 시절, 김영미를 섭외한 적이 있었다. 스튜디오 출연을부탁했는데, 조금 곤란해하는 기색이었지만 끝내 수락했다. 그런데 다리를 절뚝이며 등장하는 것이 아닌가.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한 상태였다고 했다. 거절하시지 왜 나오셨냐 물으니 그는 이렇게답했다. "어린 피디가 고생하는데, 섭외 물먹으면 안 되잖아요. 이 시절엔 하나씩 성취해보는 게 중요한데."
김영미의 모든 선택과 결정의 근거는 단순하다. ‘나는 저널리스트다‘라는 생각. 그 생각으로 몸이 아파도 인터뷰를 하러 나오고, 멀고도 위험하지만 분쟁지역으로 떠난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단순히 용기가 아니다. 단 하나의 중요한 태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낯설고 위험한 곳으로 주저 없이 발을 내딛는 것이다. - P68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의 몸

여성은 머리 없는 살덩이라고 느끼는 것이 강간 문화의 아주 밑바 - P79

닥에 깔린 의식이죠. 고기를 집어먹듯 여성의 몸을 만지고, ‘그냥 만진 것뿐인데‘라며 그게 성폭력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성과의 성관계를 ‘먹다‘라고 표현하고요. 남의 살을 함부로 대하는게 습관이 된 상황이에요. 문화화된 차별이 정말 무섭죠. 그래서 우리는 정말 ‘말하는 몸‘이 되어야 해요. 내 몸 세포 하나하나에 차별이배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툭 나와요. 저도예외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수없이 다짐하고 스스로 주의하려고 노력하지만, 저도 이 문화 속에서 차별을 공기처럼 마시고 밥먹듯이 먹으면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조심하기에 좋아요. ‘나는 절대 그런 말을 할 리 없고 그런 말을 들은 적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위험하죠. 우리가 차별적인 언어들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하는 게 서로 조심하도록 만들더라고요. - P80

기타리스트 반향기의 몸

머리를 그냥 한번 밀어보고 싶었어요. 짧은 머리는 워낙 많이 해서 정상성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20대가 가기 전에 삭발을 해보고 싶더라고요. 어차피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니까 별생각없이 밀었죠.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또 밀고 싶어져서 한 번 더 밀었더니, 이번엔 아빠가 막……… 저를 안 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좀 놀라기도 했는데, 저는 "그런 이유로 안 볼 사람이면 아예 안 보는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사과를 받아냈습니다. - P87

생리중단시술 경험자 임의 몸, 제의 몸

서랍에서 생리대를 꺼내서 여봐란듯이 들고 가는 것, 여성 휴가를 쓰는 것, 그냥 몸이 안좋다고 말하기보다 ‘생리통 때문에 몸이 안 좋다‘라고 말하는 것은 생리 가시화를 위한 나의 작은 노력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생리를 멈추는 시도를 한 여성들이 있다. 피임 시술을 통한 것인데 목적이 ‘생리 중단‘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몸에 장치를 삽입하는 게 마냥 가벼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고작 생리 때문에 그런 시술을 해?"라고 묻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는 생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솔깃하게들렸다. 이 고통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선택지가 주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생리를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리도 내 생활의 일부인데 왜 나는 그것을 사랑하지 못할까. 생리 자체가 초래하는 불편과 고통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생리하는 채로 살아가기 어려운 사회에 속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리할 때 들어가는 비용, 시간, 에너지가 아깝고, 그 때문에 어느 정도는 경쟁선상에서 뒤처지는 기분을 느낀다. 그렇다면 나의 고통과 불편을 줄이는 선택지를 통해 이 사회에 맞춰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리중단시술은 여성의 생리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사회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타협이기도 하다. 저항과 타협, 우리는 그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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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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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함, 잔잔함, 단순함에서 이야기와 삶, 경이와 기쁨 (때론 슬픔)을 찾아내는 자연의 이야기꾼 메리 올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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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산문과 시. 오드리 로드가 <시스터 아웃사이더>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워즈워스
랄프 왈도 에머슨
너대니얼 호손 <주홍 글씨> <일곱 박공의 집> [젊은 굿맨 브라운]
헤밍웨이의 「두 개의 심장을 가진 큰 강」

프로빈스타운
김연수 소설가

서문

나는 언제 어디서나 산문보다는 시를 쓰게 된다. 하지만 산문은 산문 나름의, 시는 시 나름의 힘을 갖고 있다. 산문은 용감하게, 그리고 대개는 차분히 흐르며 서서히 감정을 드러낸다. 모든 인물, 모든 생각이 우리의 관심을 자극하여 결국복잡성이 자산이 되고 우리는 그 저변과 이면의 전체적인 문화를 느끼기 시작한다. 시는 그보다 덜 조심스럽고, 시의 목소리는 홀로 남는다. 그것은 살과 뼈를 지닌 목소리로 스르르 미끄러져 둑을 뛰어넘어 아무 강으로나 들어가 예리한 날로 작디작은 얼음 조각에 착지한다. 산문 작업과 시 작업은 심장박동 속도가 다르다. 둘 중 하나가 나머지 것보다 느낌이 더 좋다. 어떤 걸까? 나는 장시간 산문을 쓰면 작업의 무게를 느낀다. 하지만 시 작업은 그 말 자체가 오류다. 다른 노동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시는 성공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창조된 느낌만큼 전달된느낌도 강하다. - P13

흐름

이날 물 위를 미끄러져 나아가는 내내, 다른 많은 날들에도 그랬듯이 작은 노래 하나가 내 마음에 흐른다. 음악적이라 노 - P26

래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냥 말들이다. 이상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하나의 생각이다. 사실 그런 오후에 그런 생각을 안 한다면, 머리와 몸에 그런 음악이 흐르지 않는다면 얼마나 이상한일인가. 그 말들은 이렇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건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난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세상에 주어야 할 선물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걸까? - P27

완벽한 날들

셸리(Percy Bysshe Shelley, 조지 고든 바이런, 존 키츠와 함께 영국의 낭만주의3대 시인으로 불린다)가 몽블랑에 대해, 그 무시무시한 풍경과 끊임없이 재배열하고 다듬는 바람들에 대해 많은 작품들을 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자신은 거기서 안전한 거리를 두고 있어서 펜은 잉크가 마르지 않고 종이는 젖지 않고 정신은 사색에 몰두할 수 있었다. 흥분의 옹호자들도 있지만, 나는 2년 전인가 3년 전 여름에 베닝턴의 토네이도를 놓친 걸 애석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때 (보도에 의하면) 하늘은 섬뜩한 초록으로 변하고 숲과 길가 나무들이 전장의 병사들처럼 쓰러졌다고 한다.
문제는, 삶에서든 글쓰기에 있어서든 이야기가 필요하다는것이다. 그리고 혹독한 날씨는 이야기의 완벽한 원천이다. 폭풍우 때 우리는 무언가 해야만 한다. 어디론가 가야만 하고, 거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기쁨을 느낀다. 역경, 심지어 비극도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스승이 된다. - P61

호손의 <낡은 목사관의 이끼>

호손은 악과 그 부하들이라고 할 수 있는 무기력, 의심, 절망, 지독한 야심 등 양심이 성취한 것을 파괴하는 모든 형태의 인간적 나약함과 허영에 관한 최고의 상상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주요 주제는 악의 다양한 얼굴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호손은 세일럼의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집만 - P92

거기 있었던 게 아니라 그의 고조부 윌리엄 해손은 세일럼의거리에서 앤 콜먼과 네 명의 퀘이커 교도들에게 매질을 하도록명령했고, 증조부 존 해손은 세일럼의 치안판사로서 마녀들을재판했다. 이러한 역사의 검은 그림자는 19세기에까지 닿아 너새니얼 호손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선조들이 삶 속에서 실천했던 청교도적 전통은 그에게 숙고와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거기서 나온 소설이 『주홍글씨』와 『일곱 박공의 집』이다.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단편이라고 할 수 있는 격동적인 「젊은 굿맨 브라운」 역시 그 역사의 무시무시한 장막에서 나왔다. 이 작품에서는 영혼이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왜 함락되는지 밝혀내기 위해 그 역사의 그림자를 집어넣는다. 젊은 굿맨 브라운은 모종의 볼일을 보러 숲으로 떠난다. 우리는 그게 어떤여행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가 그동안 믿었던 사람들과 사물들이 거짓으로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비참한 불안감에 시달리는걸 느낀다. 존재를 뒤흔드는 불안감. - P93

호손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가볍고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대해 더 이야기해야 한다. 그의 이야기들이 잠시 숨을 돌리고아 있을 수 있는 건 그런 감미로운 글로 가상의 배경을 만들어내는 능력 덕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글에서는 이야기의 진전이 약하거나 뻔할 때가 많고 인물들의 묘사도 충분치 못하다. 하지만 배경은 세세한 내용까지 깊고 풍부하게 묘사된다. 헨리제임스는 호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 어느 것도 함축적이기엔 너무 하찮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런 양식은 호손이나 19세기의 전유물이 아니다. 포의 일부 작품들도 이렇게 그늘지고 경치와 배경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러한 묘사가 이야기전개 못지않은 비중을 지닌다. 고자질하는 심장」과 「검은 고양이」그리고 저승과 진자가 거기 속한다. 헤밍웨이의 「두 개의 - P96

심장을 가진 큰 강」도 그런 예다. 한 남자가 낚시를 가는 단순한 이야기지만 배경을 이루는 잎사귀 하나, 잔물결 하나가 작품의 의미, 무게, 사실성에 보탬이 된다. 우리 시대엔 더 복잡한 플롯(혹은 플롯들)이 전개되고 배경은 대부분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기는, 더 활기찬·형태의 작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물론 그런 다름은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니며 독자들이 고전이라는 매력적인 산을 오르기 시작할 때 수용해야 할 차이점 중 하나일 뿐이다. - P97


아침 산책

감사를 뜻하는 말들은 많다.
그저 속삭일 수밖에 없는 말들.
아니면 노래할 수밖에 없는 말들.
딱새는 울음으로 감사를 전한다.
뱀은 뱅글뱅글 돌고
비버는 연못 위에서
꼬리를 친다.
솔숲의 사슴은 발을 구른다.
황금방울새는 눈부시게 빛나며 날아오른다.
사람은, 가끔, 말러의 곡을 흥얼거린다.
아니면 떡갈나무 고목을 끌어안는다.
아니면 예쁜 연필과 공책을 꺼내
감동의 말들, 키스의 말들을 적는다. - P128

위안

그런 때 나는 그 물의 몸체들을 생각하며 마음의 방랑을 떠난다. 나는 기쁨과 생산적인 찬미로 나를 가득 채웠던 사건, 시간, 생물체 들을 100가지쯤 댈 수 있다. 체험! 체험! 비, 나무들, 그런 모든 것들과의 체험은 내게 위안과 겸허함, 세상의 모든산에 묻힌 모든 금과도 바꿀 수 없는 일체감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처음엔 단순한 기쁨만을 느끼다가 생각을 하고 신념을 갖게 되었다. 세상이 제공하는 그런 아름다움에는 위대한 의미가있으리란 신념. 그리하여 나는 세상이 사실적일 뿐 아니라 상징적이기도 하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밀과 백합이 자라는 것처럼 확실하게, 세상은 우리에게 고결한 꿈을 준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날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참을성 있는 초록 얼굴을 가진 거북을 만날때마다. 매가 날아가며 내는 금속성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연못에서 노는 수달들을 지켜볼 때마다. 나는 피와 뼈로 이루어진 존재지만 특별한 체험과 생각에 의한 신념들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신념들을 빚어내는 건 세상에서의 시간(거칠든 온화하든 충분히 친밀하고, 시적이고, 꿈같고, 단호하고, 사납고, 애정 깊고, 삶을 빚어내는)이다.
아침이 가까워지면서 빗줄기가 약해졌다. 나는 옷을 입고 서둘러 세상으로 나갔다. - P133

옮긴이의 말_민승남
존재의 온전한 기쁨

메리 올리버는 소설가 김연수의 단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 시 「기러기 Wild Geese」가 실려 국내에도 널리 알려졌지만 작품집이 정식으로 번역, 소개되긴 이 책이 처음이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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