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과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 양 극단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인생의 순간들은 서로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영원불멸의 것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인간적 조건에 기인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늘 모자란 인식도 그중 하나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희망이라 불리고 어떤 때에는 불확실한 내일이라 불린다. 모든 기쁨과 고통에 한계를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도 그중 하나다. 어쩔 수 없는 물질적 근심들도. 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만큼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 P18

10분도 채 안 돼서 튼튼한 남자들이 한데 모이게 되었다. 다른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노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당시에도 그후에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밤은 아주 깔끔하고 간단하게 그들을 삼켜버렸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도 있다. 그 신속하고 간략한 선택의 과정 속에서 우리 각자가 제3제국에 유용한 일꾼인지 아닌지판단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그렇게 해서 남자 96명과 여자 29명이 모노비츠(부나)와 비르케나우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다른 사람들, 즉 500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 중 이틀 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밖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또 있다. 이렇듯 건장한 사람과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는 보잘것없는 원칙마저도 늘 준수된 것은아니고, 나중에는 새로 도착하는 사람들에게 미리 알리지 않은 채 객차의 문을 둘 다 여는 더 간편한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우연히 객차의 이쪽 문으로 내린 사람은 수용소로 들어갔고 다른 쪽 문으로내린 사람은 가스실로 향했다. - P23

이것은 지옥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지옥이 틀림없이 이럴 것이다.
우리는 크고 텅 빈 방에 지친 채 서 있고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똑똑 떨어지는데 그 물을 마실 수 없다. 물론 우리는 훨씬 끔찍한 무엇인가를 예상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계속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더 이상 생각을 할 수도 없다. 우리는 죽은사람들 같다. 누군가 바닥에 주저앉는다. 시간이 한 방울씩 흐른다. - P27

우리의 삶은 그와 같을 것이다. 매일, 정해진 리듬에 따라 아우스뤼켄Ausrticken(나가다) 아인뤼켄Einricken(들어가다), 나갔다가 들어올 것이다. 일하고 자고 먹고, 아팠다가 낫거나 죽을 것이다.
…… 언제까지? 이런 질문을 하면 고참들은 웃는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수용소에 갓 들어왔음을 알아차린다. 그들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미래의 문제는 몇 달 전부터, 몇 년 전부터 빛을잃었다. 눈앞의 급박하고 구체적인 문제 앞에서 먼 미래의 중요성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눈이 오지 않을까, 부려놔야 할 석탄이 있을까, 오늘은얼마나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들 앞에서. - P49

그의 분명하고도 단호한 말들을,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하사관으로서 1914~1918년 전쟁에서 철십자훈장을 받은 슈타인라우프의 말들을 잊어버려 마음이 아프다. 그의 서툰 이탈리아어와 훌륭한 군인다운 단순어법을 믿음 없는 인간인 나 자신의 언어로 옮겨야 하다니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에나 나중에나 그 말의 뜻만큼은 잊지않았다. 그건 바로 이런 뜻이었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 P57

낯선 외국어가 모든 사람들의 정신의 밑바닥으로 돌덩이처럼 떨어진다. ‘기상‘, 따뜻한 담요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경계, 잠이라는 튼튼하지못한 갑옷, 고통스럽기도 한 밤으로의 탈출, 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 우리는 다시 무자비하게 잠에서 깨어나 벌거벗고 연약한 상태에서잔인하게 모욕에 노출된다. 이성적으로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다른 날과 똑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너무나 춥고 너무나 배고프고 너무나 힘이 들어 그 끝은 우리와 더 멀어진다. 그러므로 회색빛 빵한 덩이에 우리의 관심과 욕망을 집중시키는 것이 더 낫다. 빵은 작지만한 시간 후면 틀림없이 우리 것이 된다. 그것을 집어삼키기 전까지 5분동안 그것은 이곳에서 우리가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변할 수 있다. - P94

부나 한가운데 서 있는, 꼭대기가 거의 항상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카바이드 탑을 쌓은 건 바로 우리다. 부나의 벽돌들은 mattoni, Ziegel,
briques, tegula, cegli, kamenny, bricks, téglak이라고 불렸다. 그것을 쌓아올린 건 증오였다. 바벨탑처럼 증오와 반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탑을 바벨투름, 보벨투름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탑에 담긴, 우리의 주인들이 꿈꾸는 위대함을, 신과 인간, 우리 인간들에 대한 그들의멸시를 증오한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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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성서> 속의 혐오에 대한 기호학
5장 …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자여

4장 <성서> 속의 혐오에 대한 기호학

《성서》에 나타나는 부정(不淨)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흐름으로나누어진다. 첫번째는 로버트슨 스미스(《셈족 종교에 관한 강의》,1889)의 해석으로서, 부정이란 신의 뜻에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에《성서》의 부정을 운명적인 의지에 복종하는 유대 유일 신앙에 나타나는 내면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부정은 신성함과는 이질적인 악마적인 힘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관점에서 터부에 대한 일종의 중화 작용(더러움에 대한의식 고유의 것)이다.
바루크 A. 레빈‘에 따른 또 하나의 해석은 부정은 성스러움을 위협하는 악마적인 힘의 지표이다. 그에게 부정함은 성스러움과 독립해서 작용하는 것으로서 악의 정신의 자율적인 힘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대립되는 두 해석을 통해, 사실은 부정에 관련된 《성서》의 사상이 복잡한 역동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코자 한다. - P143

처음부터 《성서》의 텍스트는 인간과 신의 차이가 그 음식물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 P149

혐오의 대상(l‘abominé)이란 결국 성스러움에 대한 맞장구이다. 동시에 성스러움의 고갈, 즉 종말이다. - P169

5장 …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자여

더러움은 내재화 운동을 통해 《성서》 속에 이미 내재하는 상징성이나 도덕률에 관련된 죄의식과 혼동된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인 가증함과 보다 대상 지향적인 융합으로부터 새로운 하나의범주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죄이다. 삼켜지고 흡수되었다고 말할수 있을 그리스도교의 더러움은 이교주의의 앙갚음이자 모성적 원칙과의 화해이다. 프로이트는 《모세와 유일 신앙》에서 그리스도교란 이교주의와 유대적 유일 신앙 사이의 협약이라고 밝히면서 그같은 사실을 강조한다. 《성서》의 논리는 전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성서》의 기만적인 논리는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그대로 지속된다. 우리는 《성서》의 논리가 지속됨을 차이화의 과정·분리·분할의 작용들 속에서 발견한다. - P179

그리스도만이 이같은 이질성을 성공시켰으므로 죄 없는 육체이다. 신성한 심판에 거역해서 안으로 부정한 자들은 그같은 잘못을 고백하고 예수가 성취한 승화에 가까이 가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존재가 환상으로의 도피임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범우주적 신앙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신도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각자가 유일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승천을 갈망해도 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너희 죄는 용서받았느니라."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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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1-25 0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성서 부분 읽었어요. 이 책에서 저는 현재까지 성서 부분이 제일 재미있어요. 그렇다고 이해를 하는 건 아니지만 좀 그랬어요.

햇살과함께 2024-01-25 08:5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성경 읽기도 하셨으니!
저도 그나마 앞 장들보다는 성경 문구는 조금 익숙한 문장들이라..
그러나 정신을 똑바로 차려도 이해가 안되는 마당에 감기약 먹고 몽롱한 상태로 비몽사몽...
자꾸 남은 날과 남은 페이지를 비교하고요 ㅎㅎ

다락방 2024-01-25 11:28   좋아요 1 | URL
저도 오늘 뒤에 얼만큼 남았나 안읽어도 되는 부분은 얼마나 되나 한 번 들춰봤어요. ㅋㅋ 같은 마음 ㅋㅋㅋ
 

Dad cleared his throat. "Chris, please don‘t beat yourself up," he said slowly. "Mom knows you love her so much. Listen, this wasa scary thing that happened today. It‘s natural for you to be upset. When something scary like this happens, it acts like a wake-up call, you know? It makes us reassess what‘s important in life. Our family. - P169

Our friends. The people we love." He was looking at me while hewas talking, but I almost felt like he was talking to himself. His eyeswere very moist. "Let‘s just be grateful she‘s fine, okay, Chris? Andwe‘ll take really good care of her together, okay?"
I nodded. I didn‘t try to say anything, though. I knew it wouldjust come out as more tears.
Dad pulled me close to him, but he didn‘t say anything, either. Maybe for the same reason.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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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가족 중심 관점에서 여성 인권 관점으로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글의 초점은 가족이라기보다 폭력이다. 즉 본 연구가 밝히고자 한 것은 가족이 해체되어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 ‘아내 폭력‘이 재생산되는 구조에 관한 것이었다. 이 연구는 가족 관계에서는 폭력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에서는 폭력이 발생할 리가 없다‘는 담론에 대한 비판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 관계가 권력 관계라면, 어떤 의미에서 폭력은 불가피한 인간 문제이다. 나의 관심은 부부 간에 폭력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부부 간에는 폭력이 발생할 리 없다고 믿게 하는 사회적 권력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아내 폭력‘이 문제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폭력이 가족 관계에서 발생해서라기보다는 가족 내 성 역할 규범을 통해 폭력이 정상화, 사적화(私的化, privatization)되기 때문이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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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폭력 남편이 인식하는 아내 폭력

기존의 여성 폭력 가해자 연구들은 이들의 폭력 부정을 방어 기제 혹은 정당화로 설명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폭력을 나쁘다고 보는 연구자의 생각으로서, 폭력 남성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드러내주지 못한다. 원래 자아방어기제 (ego defencemechanism)란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발전된 것으로서 자아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개념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타(我他)의 경계로서 자아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방어할 자아가 없다. 세상이 모두 자기(남성)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자신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폭력 부정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는 바, 생각하는 바 그대로이기 때문에 다른 문제로 치환(置換)하여 인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정당하기 때문에 굳이 합리화‘, 정당‘화‘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의 폭력 부정은 방어 기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인식 구조를 확실히 하는 일종의 공격 방법이다. 자아가 없다는 것은 자신의 자아가 타인의 자아와 부딪칠 때 생기는 갈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행위를 남편의 권리와 의무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내를 구타한 후 죄책감이나 연민, 아내의 고통에 대한 반응(sensitive)이 없다. 이제는 남편으로서 ‘옳은 행동‘(폭력)을 법으로까지 제재하는 세상이 왔으므로 여자들이 ‘무서운‘ 지경이 된다. 자신이 폭력을 행사했다는 아내와 이 사회의 주장은 자신의 신념을 억압하는 것이다. - P112

아내를 어머니의 대체물로 보고 모성성을 요구하는 ‘한국적‘ 남성성의 특성은 조혜정 (1988)과 신용구(2000)의 연구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신용구는 <박정희 정신분석, 신화는 없다》에서 육영수가 박정희의 충동성을 조절하는 강력한 초자아(超自我)이자 구강기적(口腔期的) 욕구를 채워주는 어머니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 P126

성 역할 구분은 ‘사소한‘ 폭력에서 범죄로 명명될 수 있는 극단적인 폭력에까지 모두 작동한다. ‘부부 싸움‘이나 가부장적 테러리즘은 결국 같은 사회 구조와 논리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는 ‘아내 폭력‘이 부부 관계의 극단적, 예외적 일탈적 사건이 아니라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일상적인 ‘정상‘ 규범임을 말해준다. ‘맞을 짓‘이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과 남성이 가족 제도를 통해아내와 남편이 되었을 때만 발효된다. 현재의 가족 제도에서 ‘맞을짓‘은 남녀의 역할 규범 그 자체에서 발생한다. - P152

5장 폭력을 수용하는 아내의 심리

남편은 가족 없이 살아가지 못한다. 결혼 관계에서 폭력은 남편이관계의 유지를 위해서건 청산을 위해서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위해 가장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다. 두 사람 간의 이해 갈등 상황에서 남편은 아내보다 훨씬 쉽게 폭력을 선택할 수 있다는점에서 폭력은 남성적인 자원이다. 가정 외 폭력에서도 폭력 행위주체가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에서 폭력은 성별화된 사회 현상이다. - P156

사례의 폭력 남편들은 자신의 남자다움을 위해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돈을 벌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본 연구의 50사례 49명)의 남편 중 약 40퍼센트인 19사례가 무직이었다. 직업이 있다 해도 부인과 함께 자영업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 아내 혼자 일했다. 이 문제로 아내가 불만스러워하거나 항의하면 남편은 폭력으로 대응한다. 이는 현대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근본 원리인 성별 분업‘ 논리가 실제로는 분업이 아니라 협박과 강제 속에서 여성의 이중 노동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실제로 여성은 세계 공식 노동력의 3분의 1, 비공식 노동력의 5분의 4를 담당하면서, 전 세계수입의 10퍼센트만을 받으며 세계 재산의 1퍼센트만을 소유한다.) - P158

아내는 자신이 당한 폭력을 참아야 하는 -> 참을 수밖에 없는 -> 참을 만한 폭력으로 인식한다.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면한 현실을 일시적, 우연적인 것으로 만들어 폭력 사건을 특수한 경험으로 축소해야 한다. 특히 남편의 폭력이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아내들이 나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보시기에 몇 퍼센트나 고쳐지나요? 우리 남편이 고쳐질 타입인가요? 그것을 어떻게하면 알 수 있나요?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겠지요?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또 때리지는 않겠지요?‘ 등이다. 아내는 자신이 당한 폭력을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는다. 폭력을 ‘있는 그대로‘ 해석할 수 있는 언어도 없지만, 있는 그대로 해석한다면 남편/가족을 떠나야 하는 더 큰 문제와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을 분열과 혼란, 끝없는 고민과 질문 속으로 밀어 넣는다. - P166

딸한테는 ‘아빠가 아파서 그런 거다. 저건 술 먹으면 생기는 병이다.‘ 아이한테 그렇게 안정을 시켜요. (34세, 대학원졸, 전문직, 여성)

아이들이 너무 충격을 받으니까 ‘지금 아빠는 깊은 병에 걸렸단다.
우리가 아빠를 도와서 어서 낫게 해 드려야 돼, 너희들은 아빠를 미워하면 안 돼.‘ (41세, 고졸, 자영업, 여성) - P173

이러한 사고방식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갈등 상황에 직면했을 때 대응하는 익숙한 방식이기도 하다. 남성은 문제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투사) 여성은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크다(내사內射). 투사로 인한 분노가 남성의 질병이라면, 내사(introjection) 심리는 여성적 질병인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이다.
아내는 남편의 규범을 자신의 인격 내부로 받아들임으로써 남편에 대한 적의를 자신의 문제로 만든다. 아내가 ‘맞을 짓‘을 해서 폭력이 발생했다는 논리는 남편만의 주장이 아니라 아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는 허위 의식이 아니라 성별 관계에 의해 폭력이 정당해진다는 진리 체계가 작동한 결과이다. 투사나 내사는 같은 문제에 대한 성별화된 심리 현상이다. 모두 타인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해 나타나는 것으로 아내의 주체성과 개별성에는 혼란이 올 수밖에 없다. - P180

6장 아내 정체성과 가족 정치학

공적 영역에서 여성의 참여가 봉쇄되는 대신, 가정에서 여성의 책임과 역할은 극대화된다. 이른바 한국적 가부장제에 대한 많은 연 - P192

구들은 한국 사회 가부장제의 특성을 공사(내외) 유별(有別) 의식에 기초한 사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지나친 권력‘이라고 본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은 철저히 배제되었지만 사적 영역에서 아내, 어머니로서의 권력은 혹독한 가부장제를 견디게 하는 중요한 동인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적 영역에서 여성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한 한국 사회에서 왜 그토록 아내 구타가 많은가이다. 이 질문은 언뜻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치한다. 사적 영역에서 여성의 권력은 사실 권력이라기보다 역할과 의무이다. 여성이 사적 영역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여성이 사적인 존재로 인식되는 한, 그리고 가정이 권력 작용이 일어나는 정치적 공간이 아니라 자연적안식처라는 생각이 지배하는 한, 사회는 가정 폭력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므로 ‘아내 폭력‘은 지속될 것이다. - P193

‘아내 폭력‘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의 몸을 남성의 의지대로 규율하는 (아마도 가장 극단적인 상태이다. 폭력은 개인을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권력이다. 폭력당한 사람은 그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고통(trauma)의 생존자들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의지로 할수 있는 영역이 제한되는 것을 경험한다. 남편의 폭력을 기억하고있는 여성의 몸은 주체의 의지대로 이동하지 못한다.
공간 지각 능력은 개인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에서 능동성과 관련이 있는데, 특히 오랫동안 폭력당한 여성들은 공간 지각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수학자들에 의하면 수학에서 성별 능력 차이가 가장 현격히발견되는 분야는 공간 지각력인데 이는 여성이 수동적으로 사회화되었기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한다 혹은 살아 있다는 근거는, 곧인간의 몸이 공간의 어느 구체적인 장소에 실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이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로부터 ‘객관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공간이 인식 주체자의 몸을 기준으로 삼아서만 특정하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몸이 없다면 공간도 인식되지 않는다. 폭력으로 인해 몸의 주체성을 상실한 여성은 자신의 육체가 머물고 있는 공간과 자기와의 관계성(공간에서 자기 몸의 위치성)을 파악하기힘들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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