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사체, 신고합니다! - 총알과 폭탄 그리고 까다로운 윤리

코허는 - 라가드 역시 어느 정도는 - 사체들을 상대로 하는 탄도학 연구가 좀더 인도주의적인 형태의 총격전으로 이어지기를 바랐다. 코허는 전투의 목표가 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싸울 수 없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총알 크기를 제한하고 재료로는 납보다 녹는점이 높은 물질을 사용하라고 권했다. 변형이 덜 되면 인체조직을 덜 파괴하기 때문이다.
무력화, 군수업계의 용어로 ‘저지능력’이 탄도학 연구의 지상목표가 되었다. 적이 나를 불구로 만들거나 죽이기 전에, 내가 먼저 적을 확실히 저지시키면서 가능하면 불구로 만들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는 방법! 실제로 1904년에 라가드 대위와 매달린 사체들이 다시 무대에 올랐 을 때의 목표는 저지능력 향상이었다. - P151

"그것은 무게가 다양한 물체들을 매달아놓고, 그것들의 운동량을 서로 연관지어 측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게 저지능력과 관련하여 뭔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가정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의심스러운 실험으로부터 의심스러운 자료를 추정해내는 작업이었다."
라가드 대위는 총이 사람을 어떻게 저지시킬지를 알아보려면 이미 영구적으로 저지된 대상을 상대로 실험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는다. 다시 말해 살아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라가드는 "대상으로 결정된 짐승 들은 시카고 도축장에서 도살될 예정인 비프들이었다"고 기록했다. - P152

만일 내가 옛날 전쟁부의 결정권자였다면, 사람들이 총에 맞고도 가끔씩 그 자리에서 쓰러지지 않는 까닭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토록 쉽게 쓰러지는 까닭에 대해 연구하게 했을 것이다. 출혈로 인해(그래서 결국 뇌에 산소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의식을 잃기까지 10~12초가 걸린다 고 한다. 그렇다면 총에 맞은 사람 대부분이 바로 그 자리에서 쓰러지 는 까닭은 뭘까? 텔레비전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나는 이 질문을 덩컨 맥퍼슨에게 해보았다. 그는 탄도학 전문가로 존경받고 있으며 로스앤젤레스 경찰서의 고문이기도 하다. 맥퍼슨은 그게 순전히 심리적인 효과라는 입장이다. 쓰러지느냐 마느냐는 마음 상태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동물들은 총에 맞는다는 게 뭔지 모르고 따라서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 쓰러지는 경우가 드물다. 그는 총알에 심장을 관통당한 사슴 대부분이 40~50미터 달아난 다음에야 쓰러진다고 지적한다.
"사슴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조금도 모릅니다. 그래서 10초쯤 그대로 사슴답게 행동하다가 더 이상 그러지를 못하는 거죠. 좀더 성질이 포악한 짐승이라면 그 10초라는 시간을 이용해 우리에게 달려들겠지만요."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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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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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관통하는 올곧은 사랑과 신념. 지금도 세상 어디엔가 고통받고 저항하고 투쟁하고 사랑하는 아이다와 사비에르가 있다. 그들이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재회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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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블랙박스를 넘어 - 승객들의 시신이 추락사고의 진실을 말해주어야 할 때

샤나한이 800기 사고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신체의 대부분이 비교적 온전했다는 것이다.
"멀쩡한 신체는 그렇지 않은 신체보다 더 마음에 걸립니다." 우리 대부분은 다루는 것은 고사하고 보는 것조차도 상상하기 힘든 잘린 손, 다리, 살점조각 등이 그로서는 대하기 더 편하다는 것 이다.
"그렇게 되면 그건 그냥 조직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제 할일을 하는 거죠."
처참하지만 슬프지는 않다. 처참함에는 익숙해지지만 망가진 인생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샤나한은 병리학자들이 쓰는 방법을 쓴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부분에 초점을 맞춥니다. 부검 동안 그들은 눈의 상태를 설명하고 그런 다음 입을 설명하죠. 뒤로 한 걸음 물 러서서 ‘이건 아이가 넷 있는 가장의 시체입니다‘라고 말하지는 않는 거죠. 감정적으로 살아남으려면 그 길뿐입니다." - P134

나는 이 책을 읽은 다음, 비행기를 탈 때마다 비상구 앞에 쌓인 시체 가운데 하나로 최후를 맞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사람들에게 충고할 만한 게 있는지 샤나한에게 물었다. 그의 대답은 주로 상식적인 것들이다. 비상구 가까이에 앉아라. 열과 연기를 피해 몸을 낮춰라. 독한 연기에 허파가 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오래 숨 을 참아라. 또 그는 창가 좌석을 더 좋아하는데, 복도 쪽에 앉는 사람들은 비교적 가벼운 사고에도 머리 위 짐칸에서 떨어지는 옷가방 벼락을 맞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란다. - P147

식사가 끝나고 청구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샤나한에게 또 질문한다. 지난 20년 동안 그가 칵테일파티에 나갈 때마다 받은 질문이다. 추락할 때 살아날 확률이 비행기의 앞쪽에 앉아 있는 게 높은가, 아니면 뒤쪽인가? 그는 참을성 있게 대답한다.
"그건 어떤 식의 추락이 될지에 따라 다르죠."
나는 말을 바꿔 묻는다. 비행기 안 어디든 마음대로 골라 앉을 수 있다면 어디에 앉을 건데요?
"1등석이죠."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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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나무 동산

류보피 안드레예브나 그렇다면 나는 분명히 사랑보다 낮은 데 있겠군요. (몹시 초조해서) 왜 레오니드가 오지 않을까? 영지가 팔렸는지 아닌지, 그것만이라도 알았으면! 너무나도 있을 법하지 않은 불행이 닥쳐왔기 때문에 대체 그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넋이 빠져 있어요....... 당장 소리칠지도 모르고....... 어리석은 짓을 할 수도 있어요. 나를 구해 주세요, 페챠. 뭐든 좋으니까 말해 봐요, 말을 해보세요.…………….
트로피모프 오늘 영지가 팔리든 아니든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영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겁니다. 돌이킬 방도가 없어요. 길은 잡초로 무성합니다. 진정하십시오, 부인.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세요.
류보피 안드레예브나 어떤 진실 말인가요? 당신은 진실이 어디 있고, 거짓이 어디 있는지 보이겠지만, 나는 시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당신은 모든 문제를 대담하게 결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당신이 젊고, 그래서 어떤 문제든지 많은 고생을 겪어보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닌가요? 당신은 대담하게앞을 응시하지만, 그것은 인생이 아직 당신의 젊은 두 눈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무시무시한 것도 보지 못하고 기다리지도 않아서 그런 게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보다 더 대담하고, 정 - P706

직하고 깊이가 있어요. 하지만 깊이 생각하고, 손끝만큼이라도관대해져서 나를 용서하세요. 나는 여기서 태어났고, 여기에서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가 사셨어요. 나는 이 집을 사랑하고, 벚나무 동산이 없으면 내 인생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러니 만일동산을 팔아야 한다면, 나도 동산과 함께 팔아주세요....... (트로피모프를 끌어안고 그의 이마에 키스한다) 내 아들이 여기에서 익사했어요....... (운다) 나를 불쌍하게 생각해줘요, 착하고 선량한 페챠.
트로피모프 아시다시피 저는 진심으로 동정하고 있습니다. - P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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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두달째 그들이 편지를 압수하고 있다. 오늘 오후에 작업장에서 두리토가 자신의 감방 벽에 붙어 있던 복제화를 주었다. 그녀의 편지가 다시들어올 때까지 자네가 가지고 있어, 그가 말했다. 언젠가는 다시 들어오겠지. 오늘 밤 그 그림은 내 방의 거울과 오스트레일리아 지도 사이에 붙어 있다. 한밤에 감옥에 면회를 온 여인을 그린 조르주 드 라 투르 *의 그림. 죄수는자신의 감방 안에 앉아 있고 여인은 서 있다. 그녀가 오른손으로 들고 있는촛불의 빛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서로의 소식이 너무 궁금한 두사람은 미소를 지을 생각도 못 하고 있다. 여인은 왼손으로 막 자신의 머리를정리한 직후의 모습이다.

* Georges de La Tour (1593-1652). 프랑스의 화가. - P156

이런 텅 빈 밤에 ‘사랑해요‘ 라고 말하고 나면, 커다란 무언가가 내게 찾아오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침묵은 언제나처럼 압도적이죠. 내가 받는 것은 당신의 응답이 아니에요. 있는 건항상 나의 말뿐이었죠. 하지만 나는 채워져요. 무엇으로 채워지는 걸까요. 포기가 포기를 하는 사람에게 하나의 선물이 되는 것은 왜일까요. 그걸 이해한다면, 우리에겐 두려움도 없을 거예요, 야 누르, 사랑해요. - P183

우리는 절대 군인들에게 저항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랬더라면그들이 우리를 어디론가 끌고 갔겠죠. 탱크는, 우리 주위를 돌면서, 의도적으로 조금씩 거리를 좁혀 왔어요. 서서히 올가미를 조여 온거죠.
고양이들이 뛰어오르기 전에 어떻게 거리를 재는지, 어떻게 자기가 계산했던 바로 그 자리에 네 발을 한데 모은 채 착지할 수 있는지알아요? 그게 그때 우리들 각자가 해야 할 일이었어요, 계산 말이에요, 얼마나 뛰어야 할지를 계산하는 게 아니라, 정반대였죠.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꼼짝하지 않겠다는 무서운결심을 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의지력이 필요할지를 계산해야 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에요. 필요한 의지력을 과소평가하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대열을 깨고 나가기 십상이죠. 두려움이 떠나지 않은 채 커졌다 작아졌다 했어요. 그 두려움을 과대평가하면 일찍 지치게 되고, 그러면 끝을 보기 전에 쓸모없는 존재가 돼 버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해요. 서로손을 잡고 있었던 게 도움이 됐어요. 계산된 에너지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질 수 있었으니까요. - P194

당신의 편지를 자주 다시 읽어 봐요. 밤에는 안 읽죠. 밤에는 그편지들을 다시 읽는 게 위험할 수 있거든요.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일하러 가기 전에 그것들을 읽어 봐요. 밖으로 나가 하늘과 지평선을 바라보죠. 가끔은 지붕 위에 올라갈 때도 있어요. 어떤 때는 밖으로 나가 길 건너 쓰러진 나무에 걸터앉기도 하고요. 거긴 개미들이 많아요. 그래요, 아직 많아요. 그렇게 자리를 잡고 얼룩진 봉투에서 당신의 편지를 꺼내 읽는 거죠. 그렇게 읽는 동안, 사이의 날들이 기차의 화물칸처럼 툭툭 끊어진 채 스쳐 가요! 사이의 날들이무슨 의미냐고요? 지금 읽고 있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읽었을 때와 - P207

지금 사이죠. 그리고 당신이 그 편지를 썼던 날과 그들이 당신을 잡아간 날 사이이기도 해요. 또 교도관들 중 누군가가 그걸 부쳤던 날과 내가 지붕 위에 앉아 그걸 읽고 있는 날 사이이고, 우리가 모든것들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런 날과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진 다음 그것들을 잊어버려도 되는 날 사이예요. 그날들이 바로, 내 사랑, 사이의 날들이고,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선로는 이백 킬로미터떨어져 있죠.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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