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서울.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된 야구 스타 최규남

1898년 개성에서 태어난 최규남은 어린 시절 윤치호의 아들과 가깝게 지냈다. 최규남은 윤치호가 교장으로 있던 한영서원(나중에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야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독립협회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진행되던 1899년 초, 윤치호는 ‘산업 학교(industial school)‘를 설립하기 위해 재산 일부를 남감리교회 재단에 기부한다. 1905년 을사 조약 이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윤치호가 이를 종잣돈으로 1906년 개성에 세운 학교가 ‘한영서원‘이다. 설립 목적에 맞게 이 학교는 이공계 교육을 강조했다. 조선에 아인슈타인 붐이 일던 1922년, 촉망받던 고교 야구 선수 최규남은 연희전문 수물과에 입학한다. - P128

1931년 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강의하던 성악가 채선엽에게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낸 항공우편이 도착한다. 발신지는 미국 미시간대학.

저는 미시건대학 물리과에서 피에이치디 과정을 밟고 있는 ‘최규남‘이라는 사람이올시다. 조선에서 온 신문에서 선엽씨에 대한 기사를 읽고 예가 아닌 줄 알면서도 글월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유학 간 야구 스타 최규남의 연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P130

최규남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무렵인 1928년, 서울에 조선인이 만든 최초의 카페가 등장했다. 그 주인공은 현앨리스. 황진남과 함께 임시정부 외교 활동을 이끌던 현순 목사의 딸인 그녀는 하와이와 미국 본토, 상하이와 서울을 넘나들었다. 현앨리스는 남편과 이혼한 뒤, 영화감독 이경손과 함께 카페 ‘카카듀‘를 열었다. 독일인 마리 앙투아네트 존타크(Matie Antoinete Sontag)가 서울에 ‘손탁 호텔(Sontag Hotel)‘을 세워 커피를 팔기 시작한 이후, ‘카카‘는 조선인이 만든 최초의 카페 였다.
카카듀라는 이름은 오스트리아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cler)가 1899년에 쓴 희곡 〈초록 앵무새(Der grine kakadu)》에서 따왔다. 슈니출러는 프랑스 좌파들이 모이던 가 상의 카페 카카듀를 무대로 1789년 바스티유가 무너지던 그 날을 다룬다. 슈니출러의 독일어 희곡을 읽은 이경손은 여기서 영감을 얻어 카페 이름을 카카듀라고 지었다. - P135

하지만 현앨리스는 박헌영과 함께 숙청된다. 미국은 그녀가 공산주의자 박헌영과 교류한다고 추방했고, 북한은 미군이던 그녀와의 친분을 구실로 박헌영을 미국 간첩으로 몰았다.
체코에 남은 현앨리스의 아들 정웰링턴은 의사가 되어 체코 여인과 결혼하지만, 공산당의 감시를 견디다 못해 1963년 자살했다. 현순 목사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지만, 그의 딸 현앨리스의 이야기는 정병준 교수의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2015년)에서야 다시 조명된다. 현순 목사의 아들이자 현앨리스의 동생이며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연출가로 활동하던 현피터의 이야기는 연극 〈에어컨 없는 방> (2017년)에서 다루어졌고, 정웰링턴의 이야기는 최근 정지돈 작가의 《모 든 것은 영원했다》(2020년)로 재현되었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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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도쿄. 간토대지진과 우장춘, 베를린의 황진남과 이극로

1925년 9월 1일, 도쿄는 지진으로 엄청난 피해를 기록했다. 역사에서 ‘간토대지진‘으로 불리는 이 재난에 이어 끔찍한 유언비어가 퍼지면서 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한다. 당시 조선 언론은 도쿄 교민들의 피해를 취재하기도 하고, 9월 27일 자 (동아일보》에는 상대성이론의 스타였던 도쿄제국대학 유학생 최윤식이 무사하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당시 도쿄에 살고 있던 우장춘의 집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 무렵,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농림성 산하 농업시험장에 재직 중이던 우장 춘은 일본인 여성과 사귀고 있었다. 한때 우장춘은 어느 변호사의 아이들 과외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부인이 우장춘의 사람됨을 보고 교사 생활을 하던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한 것이다. 이듬해 26세의 우장춘이 22세의 일본인 고하루와 결혼했다.
아버지 우범선이 고영근에게 암살되었을 때 우장춘은 다섯 살이었다. 한동안 그는 방황했고, 보육 시설에 맡겨지기도 했다. 사정을 알게 된 조선총독부의 주선으로 1916년 도쿄제국 대학 농학실과(일종의 전문학교)에 겨우 진학한다. 이때까지 우장춘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다. 우장춘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주는 유일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그녀는 아들에게 늘 아버지는 조선 혁명가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일본인 어머니에게 자란 그는 혼란스러웠다. - P114

한편, 1923년 간토대지진으로 도쿄가 초토화되었지만 ‘제국 호텔‘만은 멀쩡히 살아남으며, 호텔을 설계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명성이 높아진다. 이 호텔 건축을 위해 일본에 방문한 라이트는 재벌 오쿠라 기하치로의 별채에 초청받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바닥이 따뜻했다. 이 별채는 경복궁의 자선당을 뜯어 가서 만든 것이었다.
여기에 감명받은 라이트는 한국 전통의 온돌 개념을 제국 호텔에 넣었다. 온돌은 데워진 공기는 상승하고 차가운 공기 는 가라앉는 중력 법칙을 이용한 것이다. 서양의 라디에이터 와 다른 이 바닥 난방 방식을 그는 ‘Gravity Heat(중력 난방)‘라 고 불렀다. 미국에 돌아간 그는 좀 더 발전된 개념의 온돌을 연구해 1937년 제이콥스 하우스에 적용한다. 2019년 이 건물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오쿠라가 뜯어 간 경복궁 자선당은 간토대지진으로 소실되었다. 남아 있던 기단은 정원석 등으로 쓰이다가 여러 사람의 반환 노력으로 1995년 경복궁 경내로 돌아왔다. - P119

박문사 건축을 위해 역대 임금의 어진이 모셔진 경복궁의 선원전이 뜯겨 오고, 광화문을 해체한 석재들이 쓰이고, 원구단 일부가 뜯겨 왔다. 박문사의 정문으로는 경희궁의 정문인 홍화문이 뜯겨 왔다. 이 공사는 경복궁 자선당을 일본으로 뜯어 간 오쿠라쿠미토목이 맡았다. 1939년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박문사를 참배하고 여기서 이토의 아들을 만나 ‘아버지의 죄를 대신 사죄한다‘라고 말했다. 이후 준생은 각종 친일 행사에 대대적으로 동원된다. 안중근의 딸 안현생도 1941년 박문사를 참배하고 각종 친일 행사에 동원되었다. 격분한 김구는 안준생의 암살 명령을 내렸다. - P120

그는 더 나아가 한국어를 표현하는 한글이 왜 과학적인지를 언어학적으로 설명한다. 한글의 원리는 자음-모음-받침으 로 이어지는 체계가 하나의 ‘실러(syllable, 음절)‘을 구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결국 한글 과학화의 완성이 이를 체계화하는 맞춤법 통일이라는 점으로 이어갔다. 영어를 배워야 했던 미주 동포들은 영어 표기에서 실러블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이극로는 ‘실러블‘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근본적으로 음절 구조로 되어 있는 한글 표기가 얼마나 과학적인지 설명한 것이고, 동포들은 이를 직관적으로 이해 할 수 있었기에 그의 강연에 열광했다. - P124

그는 귀국 후 조선어학회를 만든다. 가로쓰기 등 현대 한국어의 거의 모든 틀을 마련한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감옥에 있던 중 해방을 맞이한다. 그의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영화가 <말모이〉(2019년)로, 영화 초반 서울역에 도착하는 윤계상이 바로 베를린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이극로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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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조선 전역. 상대성이론 강연회

1923년 여름, 이여성, 한위건의 주도로 조선유학생학우회가 조선 전역을 순회하며 개최한 ‘상대성이론‘ 강연의 열기는 대단했다. 7월 7일 부산항에 도착한 당일, 부산 강연(500명)을 시작으로, 8일 마산(300명), 9일 진주(800명), 10일 밀양(300명) 강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공주와 청주를 거쳐 무려 1,000여 명이 참석한 14일 수원 강연 후 15일 서울에 도착한다. 연일 강행군으로 진행된 이들의 강연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 다. 대구에서 이여성이 시국 강연을 하고 있을 때, 경찰이 들 어와 해산을 명하고 이여성은 체포되었다. 그들의 강연은 곳곳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 P99

특히 최윤식의 상대성이론 강연은 어려웠지만, 청중은 끝까지 경청했다. 7월 17일의 인천 강연을 기록한 《동아일보》 기사는 짠하기까지 하다.

세 시간 동안을 계속한 최윤식씨의 강연은 첨부터 끗까지 수학 공식으로 발견되여 나갓슴으로 수학 지식이 잇는 사람에게는 그리 어렵지 안타 하나 대부분은 역시 알어듯지 못하는 헛정성만 보엿다. 그러나 텅중의 대부분을 뎜령한 학생들이 끗끗내 필긔를 계속함은 보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으로 하야금 저윽히 마음을 진덧게 하엿다.

강연은 계속되어 18일 개성(500명), 19일 연백(600명)을 거쳐, 20일 해주와 21일 사리원, 22일 평양, 24일 진남포, 25일 정주, 26일 최윤식의 고향 선천에서의 마지막 회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 달간 조선 전역을 달구었다. - P101

이 흐름은 1930년대까지 이어졌다. 1932년 11월 《동광》에 한 익명의 기고자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영국 과학자 에딩턴의 책 《공간• 시간•인력》을 읽어보라고 추천한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과 독일은 맞서 싸웠지만, 평화론자로 병역거부까지 했던 에딩턴은 적성국 독일의 아인슈타인 이론을 적극 받아들였다. 아인슈타인 역시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에딩턴이 일식 관측을 통해 상대성이론으로 예측한 빛의 중력 굴절을 증명한 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에딩턴의 1923년 저서 《공간• 시간•인력》은 상대성이론을 설명하는 최신 도서였다. 익명의 기고자는 이 책을 《동광》에 소개하며 이렇게 마무리한다.

"웨 권하느냐고요? 조선 사람은 과학을 등한히 하니 그 폐를 교정하자는 것과 무엇보다도 시대에 낙오되지 말어야지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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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인기는 식민 조선에서도..

1922년 도쿄.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

아인슈타인이 일본에 간다는 소식을 접한 우리 언론들은 아인슈타인의 방문 일정을 시시각각 보도하고, 민립 대학을 추진하던 세력은 급히 일본으로 사람을 파견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히브리대학을 세운 아인슈타인을 조선에 초청하려던 것이다. 비록 성사되지 못했지만,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은 나라 잃은 민족 유대인이 어떻게 과학으로 나라를 되찾는지 파고들었고,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과학 스타 아인슈타인에 주목하고, 또 열광했다. - P81

11월 10일, 민립 대학 설립을 준비 중이던 ‘조선교육협회‘가 파견한 일행이 서울역을 출발해 일본으로 향했다. 그들의 목적은 일본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나 조선으로 초청하는 것이었다. 10월 프랑스에서 출발한 아인슈타인은 이 무렵 홍콩을 지나고 있었다. 유럽에서 일본으로 가는 여정은 길고 험했다. 11월 13일, 아인슈타인이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이로 인해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이 더욱 떠들썩해졌고, 조선교육협회 일행은 다급해졌다. - P82

4회에 걸친 그의 상대성이론 소개는 매우 정확했다. 황진남의 설명은 나경석과 거의 동일하다. 첫 번째 기사에서 그는 빛의 파동설과 맥스웰의 전자기이론은 에테르를 가정하지만, 마이컬슨이 에테르의 상대운동 관측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 P83

그럼에도 조선의 언론들은 아인슈타인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상세한 현지 분위기를 전하며 아인슈타인 봄을 이끌었다. 무려 한 달이 넘게 지속된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은 이처럼 엄청난 관심 속에 진행되었고, 이제 조선에서 아인슈타인과 상대성이론은 지식인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소양으로 인식되었다. 이 열풍은 다음 해 조선 전역에서 열린 상대성이론 강연회로 이어진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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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상대성이론 등장…

1921년 서울. 조선에 등장한 상대성이론

일제강점기, 우리 선조들은 나라 잃고 떠도는 유대인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유대인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보다 ‘대학‘을 먼저 설립한 것이다. 대체 아인슈타인이라는 과학자가 어떤 인물이길래, 상대성이론‘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나라도 없는 터에 대학을 세우는지 궁금해했다. 그 이후 갑자기 아인슈타인에 조선 사회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다.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비로소 모두가 새로운 학문에 대한 교육, 즉 과학을 외쳤고, 해결책은 오로지 과학이었다. 나라를 뺏긴 이유가 서구의 과학기술에 무지했던 때문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 P67

이어지는 1922년 2월 23일 《동아일보》 기사에서 드디어 상 ㅣ대성이론의 본격적인 소개가 시작된다. 저자는 ‘(공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민‘이라는 필명은 화가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을 말한다. 도쿄공업대학 출신인 나경석은 자신이 알고 있던 지식을 총동원하여 상대성이론에 대해 무려 7편에 걸친 시리즈로 상세히 설명한다. 참고로 도쿄공업대학은 나중에 노벨상을 두 명 배출하는 명문 대학이다.
우선, 나경석은 아인슈타인이 유대인이라는 점부터 강조한 다. 세계를 뒤바꾼 유대인 ‘괴물‘로 당시 지식인들에게 잘 알 려져 있던 로스차일드, 레닌, 마르크스를 차례로 언급하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역시 못지않은 파괴력을 가진다고 설 명했다. 과학이 경제체제의 대변혁이나 정치혁명과도 같은 힘을 가진다고 본 것이다. 계속되는 상대성이론에 대한 해설은, 비록 부분적으로 잘못된 서술이 있긴 하지만, 100년 전 신문 기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그는 천문학의 혁명, 에텔(에테르) 부인설, 철학상 의의, 최대 속도, 시간과 공간의 관념 등 총 5부로 나누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자세히 소개했다. - P71

이들이 꿈꾸던 연구소는 훗날 명성 황후 묘소를 옮기면서 비워진 청량리 홍릉 자리에 세워지며 실현되었다. 1965년 박정희 정부는 홍콩에 대한민국 최초의 과학 연구소를 설립한다. 1920년대 대학 야구 스타로, 최초의 물리학 박사가 되어 서울대학교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역임한 최규남이 준비 위원장이었고, 한국인 최초의 화학 박사로 미국 유타대학 교수로 있던 세계적인 석학 이태규가 자문을 맡았다. 초대 소장 최형섭의 노력으로 연구소가 본궤도에 이르자 이곳에 과학원 설립이 추가로 추진된다. 1970년 우리 정부의 요청으로 미국은 고등과학교육기관 설립 자문단을 파견한다.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탠퍼드대학 프레더릭 터먼(Frederick Terman) 교수가 자문단장을 맡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터먼 보고서’에 기초해 탄생한 과학원은 기존의 연구소와 합쳐져 KAIST가 되어 대전으로 이사했고, 남은 홍릉의 연구소는 KIST가 되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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