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을 만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걱정이 앞서잠을 못 잔 날도 많았다. 잠을 자다가 이불을 걷어차며 깬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기대가 되는 만큼 두려움도 많았던 것이다. 기대감이 앞설 때는 미소가 지어졌고 두려움이 커질 때는 울상이 지어졌다.
그래서였을까, 내 독백이 끝나자마자 무대가 떠나갈 만큼 큰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믿기지 않았다. 터질 거라고 생각 못 했던박수였는데 관객들은 나를 보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난 알고 있다. 그것은 내가 잘해서도 아니고, 내가 독백을 잘 써서도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십 대인 내가 꿈을 갖고 용기 내어 대중들 앞에서 무언가를 말한다는 것이 진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며, 그리고 나 같은 소년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일것이다. - P71

여의도, 한국말로 ‘너섬‘이라는 이 섬에는 여러 지역의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모인다. 첫 번째로 여의도, 그다음이 마포, 다음은 신길동, 대방동, 그리고 문래동, 당산동도 섞여 있다. 너섬이라는 섬에서 멀어질수록 학생들의 집안 환경도 차이가 난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소재도 우리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을 다 섞어 보기로 했다. 부익부빈익빈만이 아닌, 환경의 차이로 시작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따돌림, 그리고 입시제도에 갇혀 개인주의 성향을 갖는 청소년들. 이러한 개인주의 때문에 집단 따돌림을 직접 나서서 막지 못하고 지켜만 보게 되는 문제들을 얘기해 보자고 했다. 어느새 우린 이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때 문수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 P101

어쩌면 선생님은 처음부터 극장 후원을 허락해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공연을 하는 사회적 의미를 생각할 수 있도록 보는 눈을 넓힐 수 있게 해 준 것 같다. 선생님이 말씀해 주지 않았다면 우린 개인적 영역 안에서만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하는 문학의 밤이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 밤새도록 고민했다.
그러면서도 극장 대관이 안 될 수도 있다는 불안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음 미팅 때까지 잘 준비한다면 분명 극장을 빌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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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10-03 0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하! 101쪽이나 가서 ‘너섬‘ 지명 유래가 나오나봐요?^^
101쪽 몇 문장을 보아도, 작가가 어떤 경험을 했을지 조금 상상이 되네요

햇살과함께 2023-10-03 07:43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예전에 여의도 사시는 분한테서 여의도 학교가 출신별로 계급(?) 차이가 있다는 얘기 들은 적 있어요…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쓰고읽고고친다쓰고읽고고친다쓰고읽고고친다쓰고읽고고친다쓰고읽고고친다쓰고읽고고친다쓰고읽고고친다쓰고읽고고친다쓰고읽고고친다쓰고읽고고친다쓰고읽고고친다쓰고읽고고친다쓰고읽고고친다쓰고읽고고친다.
되풀이하는 것만이 살아 있다.
되풀이만이 사랑할 만하다.
되풀이만이 삶이다. - P162





<초급 한국어>의 마지막 장면에서 문지혁은 미국 뉴욕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던 학기가 끝난 후 탑승 비행기 안에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하며 한국으로 돌아온다.


<중급 한국어>에서는 문지혁이 결혼을 하고아이가 태어나고아이를 양육하며강의를 하고글을 쓰는 되풀이되는 일상과 강원도 한 대학교의 글쓰기 강의에서 다루는 문학작품 이야기와 코로나를 겪으며 나로 돌아가는 소설을 쓰는 과정이 담담하게잔잔하게소소한 웃음과 함께(주로 딸 은채가 주는^^) 펼쳐진다.





"지혁아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선생님은 내 말을 잘랐는데말을 잘랐다는 사실보다 이 말은 보통 정말로 기분 나쁜 말을 하기 전에 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나는 긴장했다.
"난 솔직히 걱정된다니가 책 낸 사람이 될까 봐."

솔직히 나는 그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무슨 말이지난 이제 책 낸 사람이 될 건데그가 말한 ‘책 낸 사람 ‘작가의 반대편에 있는 멸칭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책을 내면 작가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적어도 그의 세계에서책을 낸 모든 사람이 작가는 아닌 것이다제대로 등단해서제대로 된 출판사에서제대로 된 작품(아마도 장르문학은 아닐)을 내지 않는 사람은 책을 낸다 하더라도 작가가 아닌 책 낸 사람에 머문다책 낸 사람과 작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존재한다. - P150


지혁은 그가 낸 소설에 대해 애매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의 위치에 대해 애매하다는 말을 듣는다. 등단하지 않은 작가로서 작가 책 낸 사람’ 사이의 경계에 선 애매한 위치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다.



제가 추천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일상을 쓰는 거예요. 우리가 글을 쓸 때 실패하는 이유는 자꾸만 멋지고 근사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플롯을 짜고, 비유를 고민하고, 문장을 다듬고………… 이런 게다가 아니에요. 좋은 글은 거기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좋은 글은 뭐예요? 내가 잘 아는 글입니다. 나를 잘 드러내는 글입니다. 거짓말하지 않는 글이에요. 그러러면 어쩔 수 없이 나 자신, 내 주변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곧 텍스트예요. - P154


에세이 같은 소설이다. 문지혁이라는 이름으로, 주변인을 반영하여 소설을 쓴다는 건, 본인과 주변인을 소설 속에 가둘 수 있는, 소설적 이미지에 고착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문지혁 작가는 본인의 삶을 텍스트화하여 마침내 경계를 넘어 '작가'의 세계로 이동한 것인가.




문지혁의 글쓰기 강의 과정에서 다루는 문학작품들에 대한 얘기가 좋았다특히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도움이 되는], [A Small, Good Thing]에 대한 이야기가 좋았다거기 나오는 세가지 빵에 대한 해석첫번째 빵인 케이크와 두번째 빵인 시나몬롤은 기억이 나는데 검은 덩어리 빵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인상이 깊지 않은 빵이지만 문지혁이 설명하듯우리 인생을 구성하는 다수의 시간을 나타내는 것 아닐까특별한 생일 케이크나 달디단 시나몬롤처럼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하지만 매일 무난하게 특별한 맛없이 그냥 먹는 검은 빵이 우리 인생이라고이게 인생이라고되풀이되는 일상 같은 빵이라고.


두 번째 빵은 늦은 밤 앤과 하워드 부부에게 빵집 주인이 대접하는 시나몬롤빵입니다찾아가지 않은 스코티의 케이크를 두고 부부와 감정 대립을 벌이던 빵집 주인은 스코티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부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죠그리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오븐에서 갓 구운 따뜻한 시나몬롤빵과 방금 내린 커피를 대접합니다이렇게 말하면서요.
"아마 뭘 좀 먹는 게 좋을 겁니다여기 갓 나온 따뜻한 롤빵을 드셔 보세요계속 먹고 힘을 내야 합니다이럴 땐 먹는 게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도움이 되는 법이니까요."

어 스몰 굿싱(A Small, Good Thing)‘이라는 소설의 원래제목이 바로 여기서 나왔어요우리말로는 이렇게 번역할 수 있겠죠작지만 좋은 것대단치 않지만쓸모가 있는 것이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시나몬롤빵인 셈이죠. - P215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위로는 오래가지 않습니다단 걸 많이 먹으면 물리거든요롤빵으로 잠깐의 배고픔을 해결한다 해도 결국은 더 큰 허기와 갈증이 찾아옵니다이전보다 더 공허해지기도 하죠그렇다면 그 다음 단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거기에 검은 덩어리가 있습니다.
뜯어 먹기 힘들지만맛은 풍부한 인생 그 자체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이 단계에서는 기쁨도 슬픔도 행운도 불운도 쾌락도 고통도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그러니까 좋다싫다가 아니라 ‘풍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희망도 절망도 없이그냥 사는 것입니다일어난 일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부부는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은 이 빵을 먹죠더 이상 먹지 못할 정도로 먹습니다먹는다는 건 그걸 내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거잖아요이 검은 덩어리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그건 바로 - P220


<초급 한국어>를 쓸 때는 후속편에 대한 생각 없이 썼지만, <중급 한국어>는 후속편을 생각하고 있다고아마 <고급 한국어>는 아니고 <실전 한국어>가 되지 않을까 한다고제목 진짜 한글 교본 같지만ㅎㅎ <중급 한국어마지막 페이지에서 잉태된 둘째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을까.



한 학기 글쓰기 수업을 같이 들은 듯한 재미난 소설이.


문지혁의 강의에서 다룬 소설들과 수강생이 선물한 그림책 첨부.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애러비]

안톤 체호프의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트 보니것의 소설 <5도살장>

카프카의 <변신>
요르크 슈타이너요르크 뮐러의 그림책 <난 곰인 채 있고 싶은데…>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폴 오스터의 짧은 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도움이 되는]


* 문지혁 작가는 오스카 와일드를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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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9-21 16: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그러게요 제목은 정말 교본 같은데
표지가 두 권다 너무 예뻐요

햇살과함께 2023-09-21 17:05   좋아요 1 | URL
알라딘에서 소설 제목 검색하면 한글 교본이 검색된다는 문제 ㅋㅋ
표지 이쁘죠? 저는 책 실물 보기 전까지 <초급 한국어> 표지 사람이 아니라 나무인 줄 알았어요 ㅎㅎ
 

한 학기 글쓰기 수업을 같이 들은 듯한.

문지혁의 강의에서 다룬 소설들 외.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 [애러비]
안톤 체호프의 단편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
카프카의 <변신>
요르크 슈타이너, 요르크 뮐러의 그림책 <난 곰인 채 있고 싶은데…>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폴 오스터의 짧은 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인생이란 고약한 농담을 즐기는 친구 같아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예기치 못한 표지를 과거로부터 길어 올려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 너, 이거 아직 기억하니? 하고 묻는 것처럼.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맥베스」의 대사를 떠올리던 2012년의 여름에도 나는 그 단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은 날마다 아주 느린 속도로 기어가 기록된 마지막 음절에 다다른다는 그 대사에서, 셰익스피어가 쓴 ‘마지막 음절‘이란 구절의 원래뜻은 죽음이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의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나의 ‘세월의 책‘에 기록된 마지막 음절은과연 뭘까?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그 몇십 분이 나에게는 영원히 흐르지 않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 P14

그렇다면 한국어에서는 어떨까요?
생명과 인생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한글 단어 ‘삶‘을 보면 흥미로운 자음들이 보입니다. ㅅ,ㄹ, ㅁ인데요. 미국에서 한국어 수업 시간에 이 단어를 처음 알려 주었을 때 학생들이보였던 반응이 생각납니다. 간단한 단어에 뭐가 이렇게 많이 들어 있냐는 거였죠. 어떤 학생은 그러더군요. 압축파일 같아요! 맞습니다. ‘생(生)‘이라는 한자어도 있지만 ‘삶‘은 보다 복잡하고 복합적이죠. 정보값이 많습니다. 네모 칸을 꽉 채우잖아요. 이걸 풀어 볼까요? - P21

만약 A가 제대로 된 여행을 다녀왔다면 아마 A는 A‘가 되어 있을 거예요. 작지만 분명한 변화를 겪게 되는 거죠. 진짜여행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이야기는 결말에 변화가 들어 있어야만 해요. 작품의 주제,작가의 최종 메시지가 거기 들어 있으니까요. 왜 직접 말하지 않냐고요?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않습니다. 그래선 안 돼요. 그저 주인공의 마지막 변화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독자와 관객에게 ‘보여 주는‘ 거죠. 돈텔, 벗 쇼. 앞으로 지겹게 듣게 될 말일 거예요. 말하지 말고 보여 줘라. 직접 들이밀지 말고 간접적으로 넌지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소설이란 하고싶은 말을 끝까지 하지 않는 거예요. 다른 좋은 예술도 마찬가지고요. 설명하거나 가르치려 들면 끝나는 거죠. - P38

우리의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글을 쓰는 한 우리는 모두 영웅이에요. ‘써야 한다‘는 소명을 갖고 책상 앞에 앉지만, 언제나 써야 하는 이유보다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죠. 소명을 거부하다가 어찌저찌 ‘문지방‘(학교 다닐 때 제 별명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참 못됐죠.)을 넘어 글 속으로 들어가면 거기에서부터 진짜 고난과 시련이 시작됩니다. 세상에 술술 써지는 글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우리의 영웅, 나의 글 쓰는자아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옛 용사들이 용과 싸워 이긴 것처럼 용보다 더 무섭고 포악한 ‘하얀 여백‘ 혹은 ‘데드라인‘ 아니면 ‘성적‘ 같은 괴물들과 맞서 싸운 다음 승리를 거두죠.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나면 여러분은 문지방을 넘어 다시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빈손이라고요? 아닙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약이 여러분의 두 손에 쥐어져있어요. 쓰기 전의 나와 쓴 다음의 나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말했잖아요? 우리는 A에서 A‘가 되었으니까요.
..... 저기, 저기 자고 있는 영웅 좀 깨워 주시겠어요? - P47

2주 차 수업에서 나는 앞으로 다시 말할 기회가 많지 않을 글쓰기의 기본 원칙들을 강조한다. 그중 하나는 문장부호에 관한 것인데, 이를테면 느낌표(!)나 물음표(?), 말줄임표(………), 심지어는 쉼표(,)조차 너무 많이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 P48

것은 문맥을 통해 의미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부호를 통해 손쉽게 ‘말해 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복하거나(!!!!!!) 섞어 쓰는 것(?!?!)은 당연히 더욱 좋지 않고, 이런일이 반복되면 글의 수준은 처참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문장부호는 마침표뿐입니다. 제가좋아하는 말이 하나 있어요. ‘제자리에 찍힌 마침표는 총알보다 강하다." - P49

나는 내가 해야 할 말을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전달했다. 공은 학생들에게 넘어갔고, 이제 이해하고 말고는 그들의 영역이 되었다. 못 알아들으면 니네 손해지 뭐. 나는 생각했고 실제로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수업의 주제이자 목표이자 모든 것인 ‘한국어와 한글‘에 있어 내가 그들 누구보다 권위 있는 존재라는 점도 도움이 됐다.
그런데 여기에선 아니었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했고, 같은 문화를 공유했다. 무슨말을 하면 학생들은 내 말에 숨겨진 희미한 뉘앙스, 여백, 서브텍스트까지 모두 파악했고, 심지어는 말하지 않은 것까지 알아차렸다. 서울에서 오느라 늦었다는 내 변명을 듣고 어느 학생은 말했다.
선생님, 저희도 서울에서 와요. - P53

이 짧은 소설의 자서전적 요소들과 그 레퍼런스를 발견해내는 것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사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닐 겁니다. 중요한 건 이 글을 쓰고 있는 작가, 즉현재의 조이스가 자신의 유년 시절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문제일 거예요. 어린 소년을 화자로 선택해서 조이스가 보여 주려고 하는 것은 단순한 기억의 나열이 아닙니다. 사실관계의 확인도 아니죠. 그때의 나는 몰랐지만 지금의 나는 알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통찰, 깨달음, 더 나아가서는 내 과거에 대한 해석과 논평일 겁니다. 커넥팅 더닷츠, 인생이란 점을 선으로 잇는 과정이라고 하잖아요? 과거를 돌아본다는 것은 그런 겁니다. 점과 점을 잇는 것. 선을 그리는 것. 그 선이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내는 것.
…… 여러분의 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요? - P62

물론 2021년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 소설이 적어도 안나에게만큼은 불공평하게 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마다 나는 1899년이라는 ‘시대 보정‘이 필요하며, 이제 여러분이 안나의 이야기를 써야 할 때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느 학기 강의 평가를 열어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이런 문장이었다.
- 여혐 가득한 빵은 텍스트를 골라 놓고서 변명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수업. - P94

사춘기 시절 내 주된 괴로움 중 하나는 부모가 나에게 각자 털어놓는 서로에 대한 비방이었다. 아빠는 엄마의 집요함과 강박과 히스테리컬함을, 엄마는 아빠의 게으름과 무심함과 계획 없음을 비난했다. 이런 비방들은 부엌에서, 문 앞에서, 조수석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서점과 목욕탕에서, 아무런예고와 맥락 없이 이뤄졌다. 내 반응은 대개 심드렁했는데(당시 나는 이러한 태도가 내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중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야기를 마친 엄마와 아빠는 신기하게도 꼭 같은 말을 했다.
-넌 꼭 니 아빠/엄마를 닮아 가지고.
나는 늘 중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별거 아닌 일 - P114

은 별거 아닌 일로, 보통 일 아닌 일은 보통 일 아닌 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중간 네모나 동그라미 말고. 세모 삼각형.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는 그들이 끝내 이혼하지 않았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직선이 아니라 삼각형이었고, 내가 몰랐던 그들의 세 번째 꼭짓점은 바로,
나였다. - P115

조금 오래된 영화지만 셰익스피어 인 러브라는 영화를 보면 이 과정이 다소 과장되기는 했으나 잘 드러나 있습니다. 게다가 당시 무대에는 여자가 올라갈 수 없었어요.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죠. 여러분의 동심을 파괴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은 남자였다는 겁니다. 「햄릿」의 오필리어도, 「십이야」의 바이올라도, 「리어왕」의 코딜리어도 모두모두 남자 배우가 연기해야 했어요. 소년이거나, 여자 흉내를 잘 내거나, 운좋게 변성기를 피해 간 배우들이 이런 역할을 맡았죠. 그래서 셰익스피어 인러브」에서는 무대에 올라가고 싶어서 남장을 하는 허구의 셰익스피어의 여자 친구가 등장합니다. 남장을 한번 하고, 무대에 올라가 다시 여자를 연기하는 거죠. 그러다 누군가에게 발각되는데요, 그가 여자라는 것을 알아챈 관객이 소리를 지릅니다. "저 여자, 여자예요! (That woman, is a woman!)" - P116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에는 ‘평온의 기도‘로 알려진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의 기도문이 두 번 등장한다.

하나님, 우리에게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언제나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 P122

라이언은 과묵해 보이는 거구의 사내였지만 실제로는 달변이었고, 심지어 서툰 한국어도 한두 문장씩 섞어가며 능숙하게 이야기를 이끌었다. 미국에서 끝까지 힘들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스몰토크였는데, 저렇게 별것 아니면서 무해한 이야기를 처음 만난(그것도 말이 잘 안 통하는) 사람들과 두 시간 넘게 계속할 수 있다니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31 - P141

"지혁아,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선생님은 내 말을 잘랐는데, 말을 잘랐다는 사실보다 이말은 보통 정말로 기분 나쁜 말을 하기 전에 하는 말이라는점에서 나는 긴장했다.
"난 솔직히 걱정된다. 니가 책 낸 사람이 될까 봐."
솔직히 나는 그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지? 난 이제 책 낸 사람이 될 건데? 그가 말한 ‘책 낸 사람‘이 ‘작가‘의 반대편에 있는 멸칭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었다. 책을 내면 작가가 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적어도 그의 세계에서, 책을 낸 모든 사람이 작가는 아닌 것이다. 제대로 등단해서, 제대로 된 출판사에서, 제대로 된 작품(아마도 장르문학은 아닐)을 내지 않는사람은 책을 낸다 하더라도 작가가 아닌 책 낸 사람에 머문다. 책 낸 사람과 작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 존재한다. - P150

제가 추천하는 방법 중 하나는 일상을 쓰는 거예요. 우리가 글을 쓸 때 실패하는 이유는 자꾸만 멋지고 근사한 무언가를 만들어 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플롯을 짜고, 비유를고민하고, 문장을 다듬고………… 이런 게다가 아니에요. 좋은글은 거기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좋은 글은 뭐예요? 내가 잘 아는 글입니다. 나를 잘 드러내는 글입니다. 거짓말하지 않는 글이에요. 그러러면 어쩔 수 없이 나자신, 내 주변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곧 텍스트예요. - P154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쓰고, 읽고, 고친다. 쓰고, 읽고, 고친다. 쓰고, 읽고, 고친다. 쓰고, 읽고, 고친다. 쓰고, 읽고, 고친다. 쓰고, 읽고, 고친다. 쓰고, 읽고, 고친다. 쓰고, 읽고, 고친다. 쓰고, 읽고, 고친다. 쓰고, 읽고, 고친다. 쓰고, 읽고, 고친다. 쓰고, 읽고, 고친다. 쓰고, 읽고, 고친다. 쓰고, 읽고, 고친다.
되풀이하는 것만이 살아 있다.
되풀이만이 사랑할 만하다.
되풀이만이 삶이다. - P162

팩트 체크 :
사실 내 책상에는 다른 문구가 붙어 있다.

"이 세상에는 오직 두 가지 비극만이 존재하네.
하나는 자기가 원하는 걸 갖지 못하는 비극이고, 다른 하나는 마침내 갖는 비극이지.
두 번째가 훨씬 나빠 이게 진짜 비극이라고!"*

*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 중에서. - P167

두 번째 빵은 늦은 밤 앤과 하워드 부부에게 빵집 주인이대접하는 시나몬롤빵입니다. 찾아가지 않은 스코티의 케이크를 두고 부부와 감정 대립을 벌이던 빵집 주인은 스코티가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부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죠. 그리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오븐에서 갓 구운 따뜻한시나몬롤빵과 방금 내린 커피를 대접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요.
"아마 뭘 좀 먹는 게 좋을 겁니다. 여기 갓 나온 따뜻한 롤빵을 드셔 보세요. 계속 먹고 힘을 내야 합니다. 이럴 땐 먹는게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도움이 되는 법이니까요."
‘어 스몰 굿싱(A Small, Good Thing)‘이라는 소설의 원래제목이 바로 여기서 나왔어요. 우리말로는 이렇게 번역할 수있겠죠. 작지만 좋은 것. 대단치 않지만, 쓸모가 있는 것. 이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시나몬롤빵인 셈이죠. - P215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위로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단걸 많이 먹으면 물리거든요. 롤빵으로 잠깐의 배고픔을 해결한다해도 결국은 더 큰 허기와 갈증이 찾아옵니다. 이전보다 더공허해지기도 하죠. 그렇다면 그다음 단계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거기에 검은 덩어리가 있습니다.
‘뜯어 먹기 힘들지만, 맛은 풍부한 인생 그 자체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 이 단계에서는 기쁨도 슬픔도 행운도 불운도쾌락도 고통도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니까 ‘좋다, 싫다‘가 아니라 ‘풍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희망도 절망도 없이, 그냥 사는 것입니다. 일어난 일을 두 팔 벌려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부는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은 이 빵을 먹죠. 더 이상 먹지 못할 정도로 먹습니다. 먹는다는 건 그걸 내 몸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거잖아요? 이 검은 덩어리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건 바로…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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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9-20 1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중급보다 초급이 더 좋기는 했어요. 훗.

햇살과함께 2023-09-20 13:34   좋아요 0 | URL
저는 문학 얘기가 많아서 중급이 조금 더 좋네요^^
좋아하는 카버 단편이 자세히 나와서 더 좋아요.
세 번째 검은 빵은 잘 기억이 안나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초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30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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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님이 책을 읽고 이승우 작가(나는 아직 1 밖에 읽지 않아 모르겠다, 아니 1권 밖에 안읽은 거 보니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안들었다..) 이후 두 번째로 다음 책도 읽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 한국 남성 작가라고 해서 궁금해하던 차에 밀린 책읽아웃 팟캐스트를 듣다가(요즘 정희진의 <공부> 영어원서 팟캐/유투브 듣느라 밀렸네) 문지혁 작가 편을 들었다. 4월에 <중급 한국어> 출간에 맞추어 나온 것이다.


일단 목소리가 반듯하다. 말투도, 태도도, 말하는 문장도 반듯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얼굴도, 옷차림도 반듯하다. ' 모범생이라고  붙이지 않아도 누구나 모범생으로 알 수 있는 이미지다. 학벌까지(!) 반듯하다.


책엔 이런 모범생 기질과 반듯함에 대한 주인공(이자 작가) 문지혁의 절망과 분노가 나온다. 나름 반듯한 길을 벗어나 소설이라는 일탈을, 소설가라는 험한 길을 가고 있으나, 여전히 자신을 반듯하게 만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절망과 분노.


몇몇은  개인의 성향을 문제 삼기도 했다 담배  하고 주말에 교회 가는  같은 애가 무슨 소설을 쓰냐  우아한 빈정거림도 있었다 글은 《좋은생각》 같은 잡지에 실리면 딱일  같아《좋은생각》은 물론 좋은 잡지지만  시절 나에게  말은 모욕적으로 들렸다세상에는 진짜’ 예술가가 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너는 절대 아니야나를 모범생이라고착하다고선비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아래에는 그런 말이 숨어 있는  같았다.

노력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벗어나려고탈피하려고, ‘진짜’ 예술가가 되려고 발버둥 쳤다그때부터 소설에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밤을 새우고 진짜’ 소설을 읽고 삐딱한 마음을 품었다. 술  마시면서 술자리에 억지로 참석했다끝까지 버텼다그러면 어디선가 바퀴벌레처럼 숨어 있던 상처성애자들이 나타났다 상처는 뭐야너한테 무슨 결핍이 있어 같은 애가 소설  자격이 있나?

절망적이었다. – P104~105


지혁  글은너무 반듯한  탈이에요.”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을 주겠다는  아니라그래서 상을   없다는 말이었다나는 몹시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상을  받아서라기보다는  반듯하다  때문이었다그건 마치 너는 결코 진짜 예술가가   없다는 비아냥처럼 들렸다 딴에는 남들이 정해 놓은 길을  그대로 반듯하게’ 가다가  일탈을 결심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속이 뒤집어졌다그럼 어떡할까그냥 그만둘까죽을까? ‘순진하고 찌질하며 뻔하다 평가 미치게 만들었던 그동안의 이야기들이 어지럽게 겹쳤다.

말대답하는 성격은  되지만그날 나는 분노를 담아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앞으로 비뚤어지겠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선생님들도 웃었다 사람만 웃지 않고 있었다거울을 보지 않아도 머리끝까지 벌겋게 달아올랐음이 분명한 나와 소설가 선생님.

웃음이 잦아들자 그녀는 정색하며 말했다.

지혁 씨가 그렇게 대답하면  되죠.”

소설가는 덧붙였다.

반듯한  어때서요,라고 해야지.”

말문이 막혔다. – P148~149



문지혁은 그의 반듯함을 벗어나려 하지만, 어쩔 없다. 그건 그의 성정이다. 받아들이며 밖에. 그에겐 다소 썰렁한 농담과 함께하는 다정한 문학의 길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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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9-19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 작가들은 대개가 반듯한 이미지가 강하죠.
여성 작가들도 반듯하고 다들 착하구요.
그래서 때론 외국소설처럼 다이나믹한 소설로 발전이 안되는 건가? 욕을 먹더라도 불륜 소설이라도 쓰는 게 진정한 작가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작가들이 고민이 많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어쨌거나 응원하는 독자들이 많은 건 사실이에요.
저도 이 책 재미나게 읽었어요.
중급도 읽어야 하는데..^^

햇살과함께 2023-09-19 23:05   좋아요 1 | URL
반듯한 척 하는 작가도 있을거고 문지혁 작가처럼 삐뚤어질테다하는 작가도 있을테고요 ㅎㅎ
자기스타일을 찾아가는 어려운 길인 것 같습니다
중급도 비슷하면서도 문학 얘기 많아서 좋아요!

잠자냥 2023-09-19 2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반듯한 제가 심히 공감 가는 문장이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왜 웃음이 ㅋㅋㅋㅋㅋㅋ

햇살과함께 2023-09-19 23:07   좋아요 1 | URL
일단 술에서 탈락입니다만??
잠자냥님 글은 반듯한 걸로 인정!
그외는 실물영접을 못해서 판독불가이고요 ㅎㅎ

잠자냥 2023-09-19 23:24   좋아요 1 | URL
오늘도 마신 반듯한 잠자냥~

햇살과함께 2023-09-19 23:57   좋아요 0 | URL
반듯하게 주무시와요 ㅋㅋㅋㅋㅋㅋ
 

서른을 앞둔 지금에서야 나는 깨닫는다. 그녀는 책방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러 나를 데려갔던 것이 아니라, 나를 서점에 데리고 가기 위해 책방 아주머니와 친해져야 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목적은 대화가 아니라 책이었고 아들이었다. 아이가 자연스레 책을 읽는 그 몇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어머니는 별다른 내용도 없는 수다를 몇 시간이고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유년의 기억 때문일까. 아직도 나는 어디든 책을 파는 곳에 들어서면 마음 한구석이 이유 없이 설레 온다. 그리고 그때마다 생각한다. 이 설렘을 선사하기 위해 숨겨야만 했던 어머니의 작은 비밀을. - P118

한국어에서 시간은 ‘시간‘이라는 단어 하나뿐이지만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을 세 가지 단어로 구분했다. 아이온(aion), 크로노스(chronos), 그리고 카이로스(kairos). 아이온은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 무한하고 신성하고 영원한 시간, 그러므로 신의 시간이다. 크로노스는 양적이고 균질한 시간, 수동적이고 무관심하며 무의미한 시간,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이다. 마지막 카이로스(kairos)는 질적이고 특별한 시간, 구별되고 이질적이며 의미를 지닌 시간, 말하자면 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는 아이온에 둘러싸인 채 크로노스 속을 살아가는 존재다. 무심하지만 규칙적으로 흐르는 크로노스를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시간 감옥의 죄수이기도 하다. 하지만 삶에는 가끔씩 카이로스가 찾아오는데, 이를테면 화살이 날아가거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전과 이후가 갈 - P127

라지고, 한번 일어나면 결코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따라서 시간을 묻는 방법은 두 가지여야만 한다.

1. 크로노스를 물을 때: 지금 몇 시예요?
2. 카이로스를 물을 때: 그건 어떤 시간이었나요? - P128

세상 어디에도 나의 자리는 없었고,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바닥을 파고 있었다.
그런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A라는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나중에 B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런데 그 B는 내가 A보다 먼저 만났다면 사랑하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는 이야기. 내게 있어 그 B는 바로 커트 보니것의 문장이었다.

만일 부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싶은데
게이가 될 배짱이 없다면 예술을 하는 게 좋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다시 2000년 여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 그 애는 폴 오스터가 아니라 커트 보니것을 적어 주었어야 했다. - P147

"지혁 씨 글은, 너무 반듯한 게 탈이에요."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을 주겠다는 - P148

게 아니라, 그래서 상을 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몹시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상을 못 받아서라기보다는 그 ‘반듯하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건 마치 너는 결코 진짜 예술가가 될수 없다는 비아냥처럼 들렸다. 내 딴에는 남들이 정해 놓은 길을 말 그대로 ‘반듯하게‘ 가다가 큰 일탈을 결심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속이 뒤집어졌다. 그럼 어떡할까? 그냥 그만둘까? 죽을까? ‘순진하고 찌질하며 뻔하다‘는 평가, 날 미치게 만들었던 그동안의 이야기들이 어지럽게 겹쳤다.
말대답하는 성격은 못 되지만, 그날 나는 분노를 담아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앞으로 비뚤어지겠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선생님들도 웃었다. 두 사람만 웃지 않고 있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머리끝까지 벌겋게 달아올랐음이 분명한 나와, 그 소설가 선생님.
웃음이 잦아들자 그녀는 정색하며 말했다.
"지혁 씨가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되죠."
소설가는 덧붙였다.
"반듯한 게 어때서요,라고 해야지."
말문이 막혔다. - P149

마지막 단어 때문이었을까? 은혜의 말이 떠올랐다.

거기는 낮이겠네. 여긴 밤이고, 니가 볼땐 어제야. 있잖아, 니가 미국에 간 뒤로는 항상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그 이유를 오늘에서야 알겠어. 내가 늘 과거에 남겨지는 느낌이라서그랬나봐. 넌 어느새 저만큼, 미래에 가 있는데, 과거의 목소리는 여기까지만 듣는 걸로 해.

나는 갑자기 뭔가 생각나서 핸드폰을 꺼내 세계 시간을 찾았다.
[서울, 내일 +13시간]
은혜가 틀렸다. 서울의 시간은 뉴욕보다 늦지 않다. 오히려 열세 시간이나 빠르다.
서울은 뉴욕의 미래다. - P166

이를테면 플롯이나 개연성, 복선과 반전 같은? 그건 혹시 편견이나 선입견이 아닐까? 삶은 평범하고 소설은 특별하다는 고정 관념만큼이나 해로운 것은 아닐까? 현실과소설 사이에는 대체 어떤 벽이 세워져 있기에?
나는 자주 가던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에 [미니픽션]이라는 말머리를 달아 이 소설을 올렸다. 새로운 전자 제품과 연예계가십, 정치 이슈들 사이에서 내 소설은 (예상대로) 아무런 반응 없이 금방 뒤 페이지로 밀려났다. 마침내 딱 하나의 댓글이 달렸는데, 그걸 확인하고 나는 뭔가를 들킨 기분이었다.
미국 섭웨이가 한국보다 더 맛있나여???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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