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오래된 자료를 들여다보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한글자한 글자씩 읽어나가는 게 마치 원채의 장부를 들여다보는 일 같았다. 지도교수인 박선생은 오익이 논문에서 간과한 부분을 오익 스스로 알아채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를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자신이 알아챘다면 간과했겠는가. 마찬가지로 오익은 오숙이 얼마만한 분노가 있었기에 자신을 ‘너‘라고 부르며 의절을 통보하는 문자를 보냈는지 알지 못했다.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까운 이에게 그런 분노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몰랐다. 알았다면 그렇게 했겠는가. 무지는 가장 공격받기 쉬운 대상이지만, 무지한 자는 공격 앞에서 두려워 떨 뿐 무지하여자기 죄를 알지 못하므로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 없다. 차라리 자신이 딸이었다면, 모든 걸 희생하고 차별받고 살아온 그런 존재였다면 오숙처럼 무섭게 돌변할 기회라도 있었으련만, 그는 한없이 - P199

억울했고 뭔지 모를 어떤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만 그런 게 아니라 자신도 어머니를 닮아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고, 자신이 오숙처럼 되기를바라느냐고, 앞으로 자기가 다 포기하고 희생하고 살면 되겠느냐고, 어머니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 P200

기억의 왈츠

그건 무엇이었을까. 내 속에서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발사된 것은.
지금의 내 생각에 그건 아마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어두운 정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물네 살의 삶이 품을 수밖에 없던 경쾌한 반짝임 사이에서 빚어진 어떤 비틀림 같은 것, 그 와중에 발되는 우스꽝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어지간한 고통에는 어리광이 없는 대신 소소한 통증에는 뒤집힌 풍뎅이처럼 격렬하게 바르작거렸다. 턱없이 무거운 머리를 가느다란 목으로 지탱하는 듯한 그런 기형적인 삶의 고갯짓이 자아내는 경련적인 유머가 때때로 내 삶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사된 건 아니었을까. - P218

죽어 버릴까………… 죽어 버릴까…...
나는 여자의 말투를 흉내낸 게 아니라 내 속에 오랫동안 고여있던 가래 같은 말을 내뱉은 것이다. 학대의 사슬 속에는 죽여버릴까와 죽어버릴까밖에 없다. 학대당한 자가 더 약한 존재에게 학대를 갚는 그 사슬을 끊으려면 단지 모음 하나만 바꾸면 된다. 비록 그것이 생사를 가르는 모음이라 해도.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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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1-03 1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햇살과함께 2024-01-03 23:30   좋아요 0 | URL
서곡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슴벌레식 문답

정원의 질문에 주인이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득도한 듯 인자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디로든 들어와.
그리고 가버렸다. 사슴벌레를 대변하는 듯한 그 말에 나는 실로감탄했다. 너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사슴벌레의 의젓한 말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치 가부좌라도 튼 듯한 점잖은 자세로 그런데 나의 상상과 달리 정원의 말에 따르면방에 있던 사슴벌레는 몸이 뒤집힌 채 계속 버둥거리며 빠른 속도로 움직여 다녔다고 했다.
약을 쳐서 그랬나봐. 정원이 사슴벌레에 빙의된 듯 양 손가락을바르르 떨며 말했다.
그렇다면, 하고 내가 말했다. 사슴벌레의 등에 작은 휴지를 대고 양쪽 다리에 빗자루 싸리를 몇 개씩 매달아 너 대신 청소를 시켰으면 어땠을까.
정원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
나 어떻게든 그렇게 잔인해정원이 씩 웃으며 해보자는 건가 했고 우리는 해보았다.
인간은 무엇으로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 P21

아무리 차근차근 생각해보려 해도 추모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때문인지 취기 때문인지 내 정신은 급격히 혼탁해지고 제대로 된사고를 할 수가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다가 문득 그럴수도 있지, 한다. 인간의 자기 합리화는 타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없는 비합리적인 경로로 끝없이 뻗어나가기 마련이므로, 결국 자기 합리화는 모순이다. 자기 합리화는 자기가 도저히 합리화될 수없는 경우에만 작동하는 기제이니까.
술을 한 잔 마시며 나는, 어떻게 치아 교정을 하나, 탄식하다가또 한 잔을 마시며,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같이 활동하던 동료이자 친구의 남편을 감옥에 팔 년 동안 갇히게 한 진술을 하고도 자신의 입매나 치아 배열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쉰이 넘고도 치아 교정기를 몇 년이라도 달 수 있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조직 사건 연루자로 조사를 받으면서도 지켜낸 교수 자리인데 뜻밖의 법인화 문제로 규정이 바뀌어 자리가 위태로워지면 곳곳에 전화를걸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방도를 알아볼 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과 바꾼 자리인데 지키지 않을 수 있을까. 필요하면 무슨 법사도만나고 무슨 포럼에 패널로 갈 수도 있는 것이다. - P36

실버들 천만사

우리 있잖아, 아빠랑 오빠도 이름 부를까? 병석씨, 명운씨 이렇게.
그러자 그래야 내가 흥분해도 감정의 거리가 생길 것 같네.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평해지는 게 좋지.
반희가 채운을 보았다. 채운은 반희가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내가 좀 멋진 말을 했나 싶어 어깨가 으쓱했다. - P53

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채운씨. 반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지금도 고개를 못 돌리는 건 아닌데 무서워서 못 돌아보는 거잖아. 경추가 빙빙돈다고 돌아볼 수 있을까?
그래? 그럼 아까 그 물고기처럼 뇌를 젤리화하는 수밖에 없는건가?
그렇지. 그리고 제대로 보려면 머리카락도 반은 밀어야 할걸.
와, 그러네. 그 풍경 참 기괴한데. 여자들이 외계인처럼 머리 절반이 그렇게 돼서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면.
채운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엄마, 우리가 먹을 거 놓고 마음껏 싸우지도 못하게 된 건 뭐 땜에 그런 걸까?
음, 반희가 생각하다 말했다. 그것도 물고기랑 같은 이유겠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세상 뭐 다 이렇게 슬픈 얘기야, 젠장. 채운이 맥주를 벌컥 마시고 말했다. 나는 원래 생겨먹은 데서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반희는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 P73

하늘 높이 아름답게

그날 새벽 내내 잠을 설친 탓에 베르타는 마리아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몸부터 일으키자 하니일어나졌고 일어나니 이내 침대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욕실로 가자 하니 욕실 쪽으로 발이 움직였다. 신기하게도 마리아의 말대로였다.
몸이란 게 움직이자 달래면 움직여져요, 사모님. - P103

자신이 왜 그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왔는지가 분명히 이해되었다.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 않구나 우리는…… 베르타는 카디건 앞섶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쳤다.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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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피닷 2024-01-01 0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햇살과함께 2024-01-01 21:05   좋아요 1 | URL
루피닷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려주시는 시 잘 읽고 있어요!
 
제법 엄숙한 얼굴 소설, 잇다 2
지하련.임솔아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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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여전히 남성의 시선으로 ‘저 여자 왜 저러지?‘하고 ‘그녀‘를 불신하며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내 안의 학습된 남성성이 ‘남편‘의 ‘오라버니‘의 불온한 시선으로 ‘아내‘나 ‘누이‘인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음을 또 한번 들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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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그는 여자의 이러한 대담한 이야기가 일종 징하**게 느껴졌다거나 반대로 무슨 감동을 주었다기보다도 흔히 서양 여자들에게 많다는 무도병舞蹈病*이란 병처럼 이 여자에게도 무슨 고백병告白病이라는 게 있지나 않나 싶어서 차라리 의아할 정도였으나 역시 한편으론 언젠가, ‘걔는 제가 남을 사랑할 때라도 무사한 편보다는 까다로운 편을 취하는 성격이래요’ 하던 아내의 말이 생각나서 어쩐지 한 소녀의 당돌한 욕망이 이보다는 훨씬 사나운 현실에 패한 그 페허를 보는 듯해서 싫었다. - P148

에세이-약간의 다름과 미묘한 같음
스프링 노트 한 권을 펼친다. 종이를 후루룩 넘기다 멈춘다.
‘나는 슬픈 고향의 한밤,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 - P259

그날의 감정이나 특별한 일화일 때도 있었지만, 잊고 싶지 않은 문장이나 다진 같은 것일 때가 더 많았다. 적어둔 문장은 임화의 시 「해협의 로맨티시즘」의 한 구절이다. 나는열아홉 살 때 그 구절을 외웠다. - P260

친구는 그런 게 잘 되지 않는다고 했다. 말을 흘려듣는 것이 안 돼서 자랑을 끝까지 다 들어야만 했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건 자랑이 아니야. 자랑 끝에 달려 나오는 씁쓸함이지. 지식인 남성들은 자랑만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들도 아는 것이었다. 자랑하는 남자가 별로라는 것을. 그러나 자랑을 포기할 수는 없었으므로, 자기가 자랑하고, 자기가 자기 자랑을 씁쓸해하고, 그 씁쓸함도 자랑했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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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별

갑작이 밀물처럼 고독이 온다. 드디어 형예는 완전히 혼자인 것을 깨닫는다. - P56

체향초

‘사람이 누구에게나, 무엇에나, 가장 성실해보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그건 가장 성실할 수 없는 것을 안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어쩐지 외로웠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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