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서른이 다 되어갈 무렵, 단아는 연애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더는 누구를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얼마 못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였다. 그리고 단아는 누구를 만나고 있을 때보다, 지금 훨씬 편안하고 단단해 보인다. 언젠가 외롭지 않냐고 물었더니, 단아는 말했다. 누구를 만나고 있을 때가 더 외로웠다고, - P184

"수진아, 사람 믿지 마라. 네 남편도 믿지 마라. 지금은 널 아끼니까 뭐든지 해주고 싶고, 하려고 하겠지. 하지만 사람은 자기가 준 건 절대 안 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호의를 절대 잊지 않아. 상대가 어떻게 느끼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을 보렴. 할머니가 일한다고 생각하는 건 너와 나뿐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도와준다고 생각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빚을 진 거다. 너 그 사람이랑 평생 빚진 기분으로 살고 싶냐. 네게 준 것들이 많다고 생각할수록 ‘이정도는 요구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정도’가 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현규는 좋은 사람이지. 나도 알고 있다. 그렇게 변하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사람의 인생에는 늘 만일이 있는 법이다. 결혼은 저울과도 같아. 지금 네 저울에는 아무것도 없어. 처음부터 이렇게 기울어진 채로 시작하는데, 여기에 더 무게를 얹을 필요는 없다. 세상은 변했지. 여자들은 달라졌어. 할머니도 알아. 하지만 그건 변한 세상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과 배경이 있는 여자들의 몫이야. 할머니는 해당되지 않아. 덕 보고 살 생각 없다. 그건 네가 다 가져. 너는 빚지는 거 없이 시작하는 거야." - P223

개소리다. 이강현은 오빠를 믿었다는 여학생들의 울음소리 못지않게 남자는 아랫도리가 빳빳해지는 걸 참는 게 힘들다는 말을 경멸한다. 이건 욕구를 참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욕구를 참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데서 발생하는 문제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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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내 이야기가 알려지고 나서, 누군가에게 실제로 이런 말을 들었다. 내가 그럴 줄 몰랐다고, 그런 일을 당할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맞을 것처럼 보이는 여자란 대체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그는, 내가 만났던 사람은, 만나는 여자를 때리며 죽여버리겠다고 속삭이던 이진섭은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일까. - P17

그가 나를 구겨진 옷더미처럼 대할 때마다 그 감정을 기억했다. 그는 나를 분명 사랑했다. 그는 단지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또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이전처럼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는 조금 피곤한 건지도 모른다.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 탓에 조금 우울해진 걸지도 모른다. 내가 그를 외롭게 한 건 아닐까. 그러면 내 잘못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걸 헤아리지 못했으니, 먼저 알아채지 못했으니, 잘못한 것이다. 노력하자. 내가 그에게 잘한다면, 그가 나를 보고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끼게 한다면 우리는 처음처럼 행복해질 것이다. - P22

저항하지 않았으니까. 싫다고 안 했으니까. 하지만 계속 짓밟히고 있는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비참한 기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용서를 했다. 그러면 마음이 나아졌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어서? 아니. 지저분하고 굴욕적인 그 상황을 내가 그나마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역겨운 상황에 들어온 것이 내 선택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면, 언젠가는 내 선택으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할 수 있었다. - P44

나는 이진섭에게 맞으면서도 맞지 않을 방법만 생각했다. 그의 비위를 맞추고, 기분을 좋게 해서 손찌검을 피할 방법을.
하지만 진짜 필요했던 건 내 목소리였다. 하지 마.

나를 때리지 마.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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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서점에서 산 독립출판물이라 알라딘에는 안 뜨네.
강화길 작가 소설은 음복 밖에 안읽어봐서 아직 내 취향인지
모르겠으나, 강화길 추천 고딕 스릴러는 다 탐난다.
앞 페이지 3권은 읽었고 뒤 페이지 4권은 다 읽을 책에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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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01 12: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강화길 작가가 추천하는 고딕 소설 목록 넘 ㅎ 흥미로운데여 ㅎㅎ
읽고 싶은 책들이 더더욱 넘쳐 나는 달! 9월
행복한 책읽기님 멋지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ㅅ^

햇살과함께 2021-09-01 12:54   좋아요 2 | URL
알라딘 중고서점에 1권씩 밖에 없어서 수시로 검색하려구요~ 구매 가능 지점에 재고 뜰 때까지 기다리는 재미~
 

글도 좋지만 그림이 압권이다!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으로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고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가 자라지 않는 것도 별문제는 아니지. 코가 긴 코끼리는 많으니까. 우리 옆에 있으면 돼. 그게 순리야." - P12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 P15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 P16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예전 일들을 수없이 돌이켜 보고는 해. 그러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때 바깥세상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야." - P18

가끔씩 노든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풍경들이 있었다. 저 멀리서 몰려오는 시커먼 먹구름이라든가, 그 속에서 번쩍이는 번개, 아침 해가 떠오를 때 주변의 풀들이 반짝이는 광경, 하늘에서 떨어지는 첫 빗방울이 남긴 자국, 그리고 키가 큰 풀들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에 노든은 압도되었고, 시간을 충분히 들여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했다. - P19

노든은 목소리만으로 치쿠가 배가 고픈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발소리만으로 치쿠가 더 빨리 걷고 싶어 하는지 쉬고싶어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 P63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것도 있어. 이제 나는 뿔이 간질간질할 때 그 기분을 나눌 코뿔소가 없어. 너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오늘은 바다를 찾을 수 있을지, 다른 펭귄들을 만날 수 있을지 기대가 되겠지만 나는 그런 기대 없이 매일 아침 눈을 떠." - P87

처음에는 호수 가장자리에서 천천히 헤엄쳤다. 몸이 이렇게 가볍게 움직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또 한 번 알을 깨고 나온 것만 같았다. 물살을 가르는 기분은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기쁨이었다. 물속에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 P95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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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1-08-28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책 너무 좋았는데 너무너무 좋아서 더 표현을 못하겠더라고요… 표지만봐도 벅찹니다
 

책 먼저 읽고 서평 읽기.. 문학평론가의 평론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비판적인 서평이다

황정은 문학도 굳이 분류하자면 소수문학 또는 소수자문학의 갈래에 속한다. 중산층 계급의 작가가 자기 계급에 혐오감을 갖게 되면 미학적 모더니즘으로 방향을 잡게 된다. 보들레르나 플로베르가 대표적이다. 또한 그렇다고 노동자계급의 세계관을 완전하게 내면화한 것은 아니어서 그에 대한 회의든 거부감이든 거리를 두게 되면 특이한 ‘환상문학‘ 같은 것이 탄생하게 된다. 이런 요소들이 황정은 문학의 토대다. - P275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황정은 소설에서는 아직 작가 황정은이 세계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로 아직 나아가지 않은 단계다. - P278

"계속해보겠습니다"는 나나의 반복적인 문형인데, ‘포뮬라‘라고도 한다. 들뢰즈가 멜빌의 〈바틀비〉를 평하면서, 버틀비가 "안 하고 싶습니다" 라는 문형을 반복하는 것이 멜빌의 포뮬라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계속해보겠습니다"를 버틀비의 "안 하고 싶습니다" 에 해당한다고 보는 평자도 있는데, 말은 된다고 생각한다. - P280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면서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는 데서 의미를 찾는다. - P280

미국 소설에서 ‘보이지 않는 인간‘이라고 하면 흑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흑인은 존재하되 존재한다고 여겨지지 않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런 사회적인 규정이 가능하다. - P292

이 작품에서 소라, 나나, 나기도 ‘나‘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자신을 가리킬 때조차 "나나는", "소라는"이라고 말한다. 확실한 자기 주체성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라는 1인칭 대명사는 그냥 갖다 쓰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어떤 실질이 충족돼야 한다. 아무나 ‘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격을 필요로 한다. ‘나‘라는 것은 책임성 혹은 주체성의 자리고, 그런 역할을 떠맡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1인칭은 대단한 인칭이다. 3인칭은 이런 역할을 피해갈 수 있다. 그래서 이름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은 면피하는 것이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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