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로 긴 타원의 섬 지도가 화면에 떠올랐다. 1948년 미군 기록물이라는 자막 위로, 해안선에서부터 오 킬로미터를 표시하는 경계선이 두드러진 굵기로 그어져 있었다. 한라산을 포함하는 그 안쪽 지역을 소개疏開하며, 해당지를 통행하는 자를 폭도로 간주해 이유 불문 사살한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자막으로 이어졌다. 놀라울 만큼 노이즈 없이 선명한 흑백 무성 영상이 뒤따라 들어왔다. 초가지붕들이 불탔다. 검은 연기가 불꽃과 함께 하늘로 치솟았다. 검이 장착된 장총을 멘 옅은 색 제복의 병사들이 현무암 밭담을 뛰어넘었다.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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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에 김치를 덜어 식탁에 올려놓는 인선의 얼굴이 서울에서보다 평온해져 있다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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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을 다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인선의 옆얼굴을 나는 보았다. 특별한 미인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녀가 그랬다. 총기 있는 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성격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 때문일 거라고.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있었다. 피투성이 손에 헐렁한 환자복을 걸치고 팔뚝에 주렁주렁 주삿줄을 매달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약하거나 무너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 P44

문제가 있는 인터뷰이를 만나거나 섭외된 장소에 말썽이 생겨 내가 허둥거리면 동갑내기 인선은 그렇게 선선히 말하곤 했다.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게. 내가 문제를 해결하든, 절반 정도만 해결하든, 마침내 실패하고 돌아오든 그녀는 장비들을 세팅하고, 현장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놓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뷰 영상을 녹화해야 할 경우에는 캠코더를 고정시켜놓고, 스틸 사진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들고서 웃으며 말했다.
시작하고 싶을 때 시작해.
그 웃음에 문득 전염되어 내 마음이 밝아지면, 내 밝아진 얼굴에 안심한 인선의 눈이 더 환해졌다.
뭐,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 테니까.
그 말이 주문처럼 나를 안심시키곤 했다. 아무리 까다로운 인터뷰 상대를 만나도, 예기치 못한 돌발 변수가 생겨도,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의 침착한 얼굴을 보면 더이상 당황할 필요도, 허둥거릴 이유도 없다고 느껴졌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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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이 되지 않게 하려고……… 나 같은 애한테라도 축하를 받으면…… 네가 엉망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지만…… 너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 P36

"생일 축하해."
"다 끝났어."
"생일 축하해."
"필요 없어."
"생일 축하해."
나는 감히 반장에게 소리를 버럭 내지르고 말았다.
"다 끝났다고! 다!"
반장이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밀며 옆에 있던 목발을 들었다. 그러더니 고통스럽게 움직이며 목발을 겨드랑이에 꼈다. 반장은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와 말했다.
"끝나지 않았어. 조금 늦으면 어때? 넌 여전히 이렇게 살아있는데, 네 세븐틴 생일을 정말 정말 진심으로 축하해. 그리고 오늘은…… 내 최고의 생일이야." - P38

동규는 나직이 말하고는 또 달리기 시작했다. 재민은 뛰어가는 동규의 뒷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3년 전 선우가 죽고 나서 단 한 번도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선우의 죽음과 무관하다는 것을 밝히는 데 급급해 선우 생각은 조금도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친구가 하루아침에 영영 사라졌는데도 마음 아파하지 않았다는 것을, 재민은 멀리 어둠 속에 솟아 있는 아파를 올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선우야, 김선우. - P90

하지만 이제 그런 두려움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 어느 한 세계가 무너진다고해서 다른 쪽 세계가 무너지는 건 아니다. 양쪽에 기대지 않으면 두 세계가 무너져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 혼자라도 단단히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으면 세상이 무너져도 견딜 수 있다. 왜 이제야 그걸 깨닫게 된 걸까? 어느 쪽에도 기대지 말자고 결심하자 마음이 한층 홀가분해졌다.
나는 새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기 위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편의점은 됐고, 이젠 갈빗집 서빙 자리를 알아볼까?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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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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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폭력이라는 달콤한 수사로 포장되는 폭력, 상해, 살인이 너무 많다. 원래 많았는데 이제 우리 의식 속에 들어온 거겠지..

요즘 정말 길을 지나가다 젊은 남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있거나 말다툼을 하거나 큰소리를 내거나 울거나 팔을 잡고 뿌리치는 것만 봐도 걱정이 된다, 겁이 난다,,

우리는 다면적 인간인 피해자를 단편적으로만 보려고 한다. 피해자다움. 나도 쉽게 판단하게 된다. 쉽게 비난한다. 피해자가 무조건 선해야 피해자인 건 아닌데.. 이 책은 그런 부분을 잘 나타낸다. 욕망하는 피해자, 거짓말하는 피해자, 남들이 싫어하는 피해자..

수진과 그 남편 사이의 이야기가 훅 마무리되어 뭔가 급히 마감한 듯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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