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 이상의 하루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하루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키나와 인들은 일본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일본인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던데. 그녀가 애매하게 뇌까렸다. 그때 하루오가 던진 농담은 이런 것이었다.
말하자면,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어딘지 다른 하루오이다 - 라고. - P66

결혼 후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나는 자꾸 밖으로 돌았고, 아내는 그런 나를 견디지 못했다. 절반 이상의 나는 어디 다른 곳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건 아마도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P72

보통의 경우 일상은 주체가 고정된 자리에서 세계와 맺는 관계들로 주조되는 데 비해, 여행은 일상을 타자화한 채 낯선 자리에서 편입되는 새로움을 통해 이루어진다. 일상의 시간이 주체만의 한정된 경험으로 어떤 세계를 일군다면 여행의 시간은 오랜 기간 축적되어온 주체 중심의 세계를 잠시 소거함으로써 인식의 자리를 넓힌다. 즉 여행은 차이‘의 실감을 통해 삶을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 P89

그러니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내일 죽는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죽기 전까지 매 순간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이 부질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 살아 있는데도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게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 P1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 제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정지돈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5년 젋은작가상 대상은 정지돈 작가의 건축이냐 혁명이냐. 정지돈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다. 이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다 한국에 들어와서 살았다는 정도만 알았고, 미국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한국에서 건축사로 일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는 자세한 사항은 몰랐다. 후장사실주의자라는 타이틀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작가의, 마치 소설인 듯, 기사인 듯 모를 소설이다?(소설이 아니다?). 이구의 인생을 따라가는 한편의 다큐멘터리 같기도 하다. 젋은작가상이라는 취지에 맞게 전통적인 서사방식이 아닌 신선하고 독특한 구조와 전개방식의 이 소설에 많은 심사위원들이 손들어 준 것 같다(물론, 만장일치는 아니다). 작가의 말에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참고했다는 책, 문헌, 기사, 방송 등등이 언급된 것을 보고 놀랐다. 장편도 아닌 이 짧은 단편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자료들을 찾아보고 공부하다니, 소설에 대한 사랑인가? 다시 정지돈 작가의 소설을 읽어볼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직 이 작품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한 심사위원의 말처럼, 나도 아직 정지돈 작가의 진가를 알아내지 못한 독자이기 때문에(그러므로 더 읽어봐야 하나??). 수상작품 중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은 소설은 김금희 작가의 조중균의 세계.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12-11 11: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가장 핫한 작가 정지돈!
햇살님 덕분에 2015년 젊작품집 찜!👆^^

햇살과함께 2021-12-11 13:27   좋아요 2 | URL
스캇님은 소화가능 하실 듯^^ 정지돈 작가님 말씀도 잘 하시고 적당한 사투리가 벤 허스키 보이스가 매력적^^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반복되었던 잘못된 선택, 착각, 부질없는 기대, 굴복이나 패배 따위에 대해 생각했다. 언제나 그런 식이지. 그녀는 항상 그게 용기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녀는 그게 용기가 아니라는 걸 깨닫곤 했다. 그렇다면 그건 무엇이었을까? 때때로 무엇인가를 붙잡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삶이, 그녀 앞에 놓인 삶이 버둥거림의 연속이고, 또한 기도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더이상 기도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 제발 내가 또다시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게 도와주세요. 그녀는 얼마나 자기 자신이 기도를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던가. - P2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마주앉은 사람의 피부 한 겹 아래까지 닿을 듯 꼿꼿한 시선이 있었고 말로 사람들을 이끄는 사람답게 동굴 안에서부터 울려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가 있었으며 주목과 주시 속에서 살아온 사람 특유의 피로한 윤기가 지우다 만 분장처럼 얼굴 여기저기에 묻어 있었다. - P122

추석이면 아버지는 집에 온 나를 데리고 뒷산으로 나갔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를 걸으며 그래서 너는 변하지 않는 거니? 언제 변할 건데? 하고 한 점도 변함없이 기다리는 어조로 묻는 아버지의 지친 목소리를 들으면 당장 늑대로 변해 아버지 앞에서 닭의 목을 물어뜯으며 피를 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시간들을 종합해보면 내게는 모두의 앞에서 나를 분명히 밝힌 경험이 영원한 회한으로 남지는 않았다. 문이 열린다는 것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용기보다는 침묵이, 대담함보다는 소심함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이 나였으므로 더욱 그랬다. - P126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에는 그 모든 것들이 관여하고 있었다. 나와는 달리 네가 신의 말씀을 들으며 자라났고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대학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관계되어 있었고 네가 네의 신에 대해 갖고 있던 불편하지만 온전히 떠날 수는 없다는 태도가 관계되어 있었다. 네가 가진 형제들과 내게는 없는 형제들이 관계되어 있었다. 너의 교회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 대해 했던 말들이 관계되어 있었고 내 동료들이 너의 교회 같은 교회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 하는 말들이 관계되어 있었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기 위해 너의 경제적 도움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능 사실이 관계되어 있었고 그 사실에 대해 내가 품는 감정이 관계되어 있었다. 네가 나를 위해 포기한 것들이 나를 건드리는 방식이 관계되어 있었고 그런 나를 보는 너의 표정이, 무엇보다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두 사람이 동시에 도달하는 침묵의 농도와 빛깔, 어떻게 해도 건너갈 수 없는 그 여울의 세찬 물살이 관계되어 있었다. - P146

커밍아웃이나 퀴어활동을 통해 퀴어로서의 자기인식을 수행하는 것이 퀴어담론의 핵심적 장치이긴 하다. 하지만 성소수자 인권운동가 한채윤의 지적처럼, 커밍아웃을 개인의 선택 문제로 인식하는 순간 차별의 사회·역사적 맥락은 사라진다. 딸기는 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고 싶어하는 루카에게 딸기만을 "유일한 시민"으로 삼는 세계에 살도록 요구한 것, 즉 퀴어세계에서만의 안존을 강요하는 것이 또다른 ‘클로젯팅(벽장 안에 가만히 숨어 있기)‘일 수 있음을 알지 못했다. - P1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후장사실주의자의 소설에 후장사실주의자의 해설. 난해하다..
어떤 관점에서 봐야하는가.

우리는 하와이에서 일 년간 함께 살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행복했고 행복할 땐 행복한 줄 모른다는 사실을 행복하지 않은 뒤에야 알게 되었지요. 그렇지만 이후 영원히 행복하지 않을 줄은 몰랐습니다. - P16

김원은 이구가 공적인 공간에서 얼마나 자신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고 서울은 그에게 얼마나 어색한 공간이었는지. 일상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싸움과 투쟁, 연기의 연속이었나 하는 것을 미국에 가서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 P28

내가 지은 건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제금 지어지고 있는 건물과 앞으로 지어질 건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하면 벌써부터 숨이 막혀오고 정신이 아득해집니다. 나는 선 하나 제대로 그을 수 없는 지경에 사로잡히지만 임박해온 마감 날짜와 시공 날짜 때문에 스스로를 기만하며 그림을 그리고 설계를 하는데 그런 다음에는 견딜 수 없는 자기혐오와 좌절에 사로잡히지요. - P48

진실함은 진실함이 아니라 진실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이성복은 말했다. 그는 또 허구로서의 진실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보호하고 삶을 기획하게 한다고도 말했다. 시험 때 만화를 보면 더 괴롭다. 그럼 공부할 수밖에 없다. - P56

하지만 그 생각은 (다행히) 이내 폐기되었다. 다른 원고를 쓰기 위해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를 읽다가 키르케고르를 다룬 카를 달라고의 출판물에 대한 카프카의 촌평을 기록한 구스타프 야누흐를 인용한 바르트의 강의록을 변광배가 우리말로 옮긴 문장을 만났기 때문이다. - P63

작가가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삶을 써라. 대화를 기록하고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라. 그것뿐이다 라는 당선 소감으로 자신의 지향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 P66

귀보씨는 ……… 멀리 있어야만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 P76

안녕, 아름다운 동화에서 한 페이지를 찢어냈는데도 이야기가 연결되는 느낌으로, 그렇게 살아갈게..
이 고별사는 조영숙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슬픈 동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잠겼다. 영원히 찢어진 한 페이지라는 로맨틱한 비극의 세계로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그것은 쓸쓸하면서도 달콤한 고독의 감정을 그녀에게 남겨주었다. - P77

죽음은 삶 전체를 드러내는 무한한 거울이다〉
〈죽음은 단순한 없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소유할 수없는 신비이자, 무한한 사건의 발생 가능성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을 것이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등등. - P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