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은 노란색. 오프라인 서점용인가.

휴머니즘, 인간이 나와 인간을 만나 인간에 대해 사유하는 문학. 인간이 인간에게 감동받는 문학. 인간에 대한,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문학. 오직 인간만을 위한 문학. 인간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문학.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으로서의 문학. 인간이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문학. 망각의 문학. 의인화. 닭에게 인격을 부여하는 건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붙잡아 쓸 수 없음. 문장을 이어갈 수 없음. 닭에게 인간의 목소리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닭의 목소리가 부여될 수 있기를 바람.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쓰기. - P290

건설 현장 부근, 가로수에 까치 두 마리가 집을 짓기 시작했다. 요즘 같은 때, 까치라니. 더군다나 저렇게 눈에 띄는 곳에 집을 짓는 건 미친 짓이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집을 짓고 있었다. 나는 일을 하다가 지칠 때면 고개를 들어 까치를 보았다. 까치 두 마리는 번갈아가며 나뭇가지를 물어 온다. 물어 오고 있다. 가로수 나무 위에 물어 온 나뭇가지를 올린다. 떨어진다. 올린다. 떨어진다. 반복한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나뭇가지를 물어 오고, 올리고, 떨어뜨렸는지. 나는 그 반복을 계속 무의미하게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건 때때로 내게 힘이 된다. 큰 힘이 된다. 저기 좀 봐요. 까치가 집 짓는 걸 보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말이 말이 있어요, 한국에서는, 속설 같은 거? - P293

새 인간‘의 형상은 이질적인 존재와의 결합으로 인간 이후의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는 최근의 포스트휴먼적 논의와도 그 맥락을 같이하는 듯 보인다. 반려종이나 기계와의 결합을 통해 인간 고유의 물성을 뒤바꾸려 하는 해러웨이의 ‘키메라‘나, 근대 체계가 만들어놓은 사회적 구속을 분열시키고 인간의 언어가지각할 수 없는 어떤 양태가 되기를 꿈꾸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동물-되기‘ 등은 유사한 맥락에서 잘 알려진 사유들일 것이다. - P3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 소수자의 사회적 가시화나 시민권 획득, 동성혼 법제화에 대한 책을 주로 읽는 모임 안에서 주호는 낯선 존재였다. 젠더 다양성이나 해체를 운운하는 주호를 다들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가슴으로는 아니었고, 그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게 힘겹게 받아들인 정체성을 공고히 할 수 있는 경험이지 다시 혼란해지거나 불안해지는 경험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려온 사람들을 직접 만나야만 느낄 수 있는 위안과 위로, 소속감이 절실했고, 모임은 모든 성별과 정체성을 환영한다는 기조를 내걸기는 했으나 어쨌든 게이 정체성을 핵심 동력으로 삼고있었으니까. - P118

나는 언젠가 주호에게서 그 모임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들은적이 있었다. 무슨 트라우마가 있느냐는 질문을 한 번 이상 받아본 적 있고, 아직 제대로 된 사람을 못 만나 그런 거라는 위로를 여러 번 들어본 적 있으며, 섹스를 안 해봤거나 원치 않기 때문에 어딘가 모자란 사람 취급받는 게 익숙한 사람들이라고 했지. 이쪽에서는 너희가 총기 난사를 당하는 것도 아닌데 왜 성 소수자냐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저쪽에서는 안 하고 사는 게 무슨 대수라고 특별한 척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눈총받는 사람들. - P121

나는 황급히 책을 펼쳤다. 그리고 297쪽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기어코 커밍아웃을 했으나 그 이후로 날마다 쏟아지는 원색적인 비난과 악성 댓글에 결국 공황장애를 앓게 된 배우 김학수가 어느 날 백오십만 명이 지켜보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피드에 남긴 울분의 메시지였다.

차라리 무성애자였으면 좋겠어. 아무 감정도 못 느꼈으면 좋겠고 누구도 사랑할 수 없으면 좋겠어.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책속에 이런 무지와 혐오를 보란듯이 전시해놓고도 까맣게 몰랐는지, 어떻게 이런 걸 써놓고도 출간 직후 주호에게 다정한 인사말을 적어 책을 선물했으며, - P133

하지만 그날에 대해 쓸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내 한계를 확인하고는 지운다. 어느 날은 내가 너무 투박한 나머지 우리를 흐릿하게 뭉개놨다는 판단에 지우고, 어느 날은 내가 너무 성급한 나머지 우리를 매끄럽게 정리해버린 것 같다는 생각에 지우며, 또 어느 날은 내가 쓴 것들이 모두 궁색한 자기변명 같다는 느낌에 지운다. 그리고 그렇게 지우고 또 지우다보면 어김없이 어떤 대사를 마주한다. 끝내 지우지 못하는, 아니 모조리 지워도 속절없이 다시 쓰게 되는 그 대사를. - P135

그뒤로 기영의 집에 갈 때는 대로변 대신 공원을 가로지르는 쪽을 선택했다. 공원에 가는 날이 많아질수록 점점 더 공원이 좋아졌다. 도시에 왜 공원이 필요한지도 알 수 있었다. 건물들로 빈틈없이 빽빽한 곳에는 반드시 녹지가 필요했다. 내 얘기를 들은 기영이 공원에 가끔 사람이 없을 때도 있다며 그 길은 위험하니 대로변으로 다니라고 했지만 나는 어어, 고개만 끄덕이고는 공원으로 갔다. 그러면 공원에 십분 정도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건 이상한 기분이었다. 기영이 보고 싶어 죽겠으면서도 혼자서 공원에 앉아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 P153

나는 그제야 비명을 질렀다. 나는 늘 늦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할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지 결정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 모든 과정은 아주 더디게 진행되고 그만큼 반응 속도도 늦다. 나는 때맞춰 지르지 못한 늦은 비명을 질렀다. 비명만큼 압축적으로 많은 의미를담고 있는 언어가 있을 수 있을까. 비명은 나의 언어였다. 그 순간 내게 가장 논리적이고 합당한 말이었다. 나는 사력을 다해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를 돌아보았고 무언가를 직감한 듯 남자가 열린 하차 문으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사람들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다 알았다. 순식간에 추론해냈다. 너무 흔하고 상투적인 일이었으니까. 계속 반복되는 일이었으니까. - P167

때로는 비장하게까지 여겨져서 사정을 잘 모르는 미애조차 숙연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런 모습들이 놀랍고 얼마간 감동적으로 다가올 때가 없지 않았으나 미애의 눈에 점점 더 또렷하게 보이는 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들의 열망이었다. 그들에겐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고, 그렇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그 확신을 지켜나갈 여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자신을 그 모임에 끼워준 진짜 이유라는 것을 미애는 모르지 않았다. - P1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을 쓰면서 지유는 종종 시작점을 잊어버렸다. 어떤 생각이나 장면으로부터 소설이 시작된 것인지에 대해서. 이유는 분명 있었다. 그 소설을 써야만 한다고 결심하게 만든,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런 게 있었다는 것만 기억이 났다. 소설을 처음 쓰게 된 이유라거나, 작가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왜 소설을 쓰기 시작했더라. 지유는 이유를 지어냈다. 이제 지유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잊어서는 안 되었던 무언가가 아니라, 중요한 것을 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시장은 트렌드에 맞춰 글을 써줄 것을 은근히 요구하고 있었고, 작가들은 기민하게 다음 책을 출간하고 있었다. 다음 이야기, 그다음 이야기로 더 빨리 뛰어야만 했다. 그래야 잊히지 않을 수 있었다. 매번 시험대에 올라서는 기분이었다. 정신없이 글을 쓰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면, 무엇인가 잊어버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뭐였더라. - P19

그 이야기야말로 인터넷 기사에서 많이 본 것 같다고 지유는 답했다. 원영은 다른 이야기도 들려줬다. 텔레마케팅 사무실에서 헤드셋 너머로 종일 욕설을 듣는 여자 이야기. 평생 자기 책상을 가져보지 못해서 아프기 시작한 여자 이야기. 식기세척기를 구입하면 어떻겠냐고 물으면서도 책상이 필요하지 않으냐고는 한 번도 묻지 않는 가족 이야기. 밀가루가 체질에 맞지 않아 늘 위무력증에 시달렸지만 남편이 국수를 좋아해서 삼십 년 동안 국수를 먹은 여자 이야기. 체할 때마다 그러게 왜 국수를 먹느냐고 다그치던 딸 이야기. 그러면서도 일요일 저녁이면 와, 국수다, 라며 손뼉을 치던 딸 이야기.……… 원영은 조금씩 이야기를 바꾸어가며 말했다. 거의 소설이 되어갔다. 원영은 너무 사소해서 오히려 무시했던 일화들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었다. 지어내다시피 한 이야기지만 속이 후련했다. - P29

치온은 그제야 자신이 말한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아! 소리를 냈다. 한참을 생각에 빠져 있다 온몸의 땀이 마르고 선득함이 느껴질 때쯤 치온이 입을 열었다.
"이유를 잊게 되는 원인이 있을 거예요. 스트레스 상황이 반복되면서 단기 기억력이 나빠진 것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유를 잊어야만 하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워진 게 아니라 필요에 의해 치워졌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원인과 이유가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을 종내는 알게 돼요. 그 불일치가 나한테는 원인인 것 같아요." - P33

어디에도 쓰일 수 없어야 진정으로 아름답다. 쓸모 있는 모든 것은 욕망의 표현이라 추하며, 인간의 욕망은 그 비루하고 나약한 본성처럼 비열하고 역겹다.*

* 테오필 고티에, 『모팽 양의 한 구절로, 마거릿 애트우드의 『글쓰기에 대하여(박설영 옮김, 프시케의숲, 2021)에서 재인용. - P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명소녀 투쟁기 - 1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현호정 지음 / 사계절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에게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강렬한 표지 그림이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을 거라는 말에 ‘싫다면요?‘ 라고 내뱉는 듯한 저 표정! 이 책이 재미없는 것은 아직 판타지를 사랑할 재능이 없는 나의 부족함인 것으로, 해리포터도 실패했으니(죽기 전에 사랑하려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이고 싶은 아이 - 2021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 죽이고 싶은 아이 (무선) 1
이꽃님 지음 / 우리학교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장 강력한 용의자는 범인이 아니라는 클리셰를 생각하며 읽어도 마지막까지 설마?! 하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우리는 보여주는 것만 볼 수 있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마지막 페이지의 “Fact is Simple”이 독자를 바라본다. Fact는 정말 단순한가, Fact는 진실과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