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캐니 밸리(불쾌한 골짜기): 인간이 로봇 등 인간이 아닌 존재를 볼 때, 그것과 인간 사이의 유사성이 높을수록 호감도도 높아지지만,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오히려 불쾌감을 느낀다는 이론이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 P9

전등은 할아버지의 친구를 위한 것이었다.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 용품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가업으로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서도 안 된다. 대대로 저주 용품을 만드는 우리 집안의 불문율이다. 토끼는 단 한 번의 예외였다. - P10

그런 법은 없지만 그런 세상은,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나도 저주 용품을 만드는 걸로 직업을 삼고, 그걸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미 몇 번이나 들어 익숙하게 알고 있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 P17

그녀는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비틀비틀 화장실로 갔다. 변기 앞에 주저앉아 그 티 하나 없는 순백의 물체와 그 안에 고인 맑은 물, 그리고 그것들에 가려진 검은 구멍을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있을 존재와 그 구멍이 이어지는 곳을 상상하면서. - P49

그러면 그녀는 혼자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아이가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도, 남편이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도, 가족들이 모두 잠든 후에도 그녀는 혼자 애국가가 울릴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았다.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움직이는 화면에 집중하면서 마음 한구석에 언제나 자리 잡은 공간을 조금이나마 줄여 보기 위해서였다. 텅 빈 듯하기도 하고 꽉 찬 듯하기도 하고 쓰린 듯 저린 듯하기도 한 그 야릇한 공간은 잠시라도 잊어버리고 있으면 이내 더럭 커져서 그녀를 점령하곤 했다. 그래서 그녀는 텔레비전을 보았다. 의미 없이 움직이는 화면을 보면서 마음을 비우고 머릿속을 비웠다. 그러나 생각의 샘은 하염없어서 퍼내고 또 퍼내도 다시 흘러나오곤 했다…. - P51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란 인공 존재의 외모뿐 아니라 행동을 받아들일 때도 적용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 P125

화면에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가운데 1호는 영화의 마지막 삽입곡을 배경으로 나를 안고 느리게 부드럽게 춤추며 거실을 돌았다. 기계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달콤하게 슬픈 음악에 맞추어 춤추며 천천히 거실을 한 바퀴 돌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를 ‘인공‘ 반려자가 아니라 ‘반려자’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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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사샤는 엘리엇이 말한 객관적상관물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진짜 이상한 점은 내슬픈 감정이 외부 대상을 통해 격하게 표출되었다는 점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서구적, 아니 아메리카적, 아니 코메리카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였다면 결코 그런 육체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의 감수성이 나도 모르게 얼마만큼 벌써 미국화되었단 말인가? 엘리베이터까지 따라가 엘리베이터에 탄 사샤에게 잘 가라 하며 손을 흔드니까, 같이 타고 있던 식료품 쇼핑 가는 사람들이 좀 놀란 얼굴이 되는 것 같았다. - P297

나는 왜 여기 있나. 무슨 역마살이 붙어서 내가 여기까지 와 있나 하는 생각. 그러나 그다음 순간에 내 의식이 힘차게 그것을 짓밟아버린다. 요즈음의 나는 슬퍼지는 게 싫다. 모두가 한껏발랄한 얼굴을 하고 다니는 세상에서 나만 혼자 서글픈 생각, 서글픈 표정을 갖고 다니는 게 구저분해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골초이기 때문에 항상 내게서 담배 냄새가 나서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이 프로작의 나라에서 말이다. - P322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나는 의식 상태에서 보자면 큰 혼란을 겪지 않는 사람인데, 언제나 내 무의식은 저 혼자서 커다란 혼란과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내 의식은 그것조차 접수하기 싫어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결국은 내 몸과 내 몸을 통해 보이는 현상들이 내가 얼마나 보이지 않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 P336

이 사람들은 항상 나로부터 전체로 나아가고,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나아간다. 우리와는 반대이다. 내 시의 영어 번역에서도 그런 점이 드러났는데 내 시점은 항상 큰 것으로부터 나를 향해 좁아져 들어오는데 비해, 내가 영역한 시를 읽고서 자기 나름대로 번안한 한 학생의 시를 읽어보면 그는 시점을 완전히 뒤집어버려서 자기 자신이 처해 있는 지점으로부터 자기 외부로 확대되어나가도록 만들어놓았다. - P337

이번 해외여행 중에 절실히 하나 깨달은 것은 우리 한국 사람들은 입는 데 너무 신경을 쓴다는 거다. 한국에서 옷 잘 못 입기로, 아니 입을 옷이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정도이면 그건 심각한 현상이다. - P362

아이오와와 두 시간의 차이가 났다. 시계를 다시 두 시간 앞으로 당겨야 했다. 갑자기 아이오와는 완전히 물러나고 샌프란시스코가 내 의식 속으로 들어왔다. 아이오와가 스몰타운 시골이라면 샌프란시스코는 대도시이다. 그런데이 샌프란시스코가 내게는 더 익숙하다. 내 감수성에는 아마도 나는 완전히 전형적인 도시인의 센서빌리티를 갖게 된 것일까. 아이오와가 동화 같은, 꿈결 같은 도시였다면, 샌프란시스코는 현실이다. 고가도로와 고속도로와 수많은 차와 다운타운에 밀집해 있는 높다란 고층 건물들이 오히려 내게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왜 그런 감정 있지 않은가, 시골에서 좀 오래 머물다가 서울한복판으로 돌아왔을 때 느끼는 친근감, 아 돌아왔구나 하는 느낌 말이다. - P364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의 것들을 되돌아보게 된, 그러니까 이미 나의 것이 아니게 된 것들을 객관적으로 되돌아보았을 때의, 그러니까 사후의 추체험을 통해 다시 느껴보려 할 때의 공포감, 아 내가 그런 사회 속에서 살았었구나(그 안에서 살 때는 오히려 그걸 느끼지 않았었는데)하는 공포감과, 이제 다시는 그것을 몰랐을 때의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그리고 되돌아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는 공포감을 내 세포들이 느꼈고 그 세포들의 집합인 내 육체가 그 증세를 앓았고, 그 두려움의 감정을 내 세포들은 내 무의식에 부지런히 타전했고, 내 무의식은 그것들을 하나씩 접수하면서 아직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불안감을 느꼈고, 내 무의식은 그것을 부지런히 내 의식에 타전했고, 내 세포들과 내 무의식이 타전해준 그 정보들을, 그 감정들을 하나씩 접수하여 차곡차곡 쌓아놓았다가, 오늘 새벽 내가 깨어났을 때 내 의식이 드디어 하나의 완벽한 문장으로 만들어내게 제시한 거다. 그리고 그 문장은 바로 이렇다. "나는 프로그램화된 사회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 문장의 배경을 이루는 감정은 이런 거다. 나는 이 프로그래밍에 더이상 적응하지 않겠다. 나는 더이상 프로그램화되지 않겠다. - P369

이상하게 두 사람과 금방 친해졌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미국에서는 친구 사귀기가 아주 쉽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자기와는 다른 것, 낯선 것을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다. 남의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건 일상생활의 대화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부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받아들인다는 건 네가 옳다 그르다의 차원에서 받아들인다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논의 자체를 개방한다는 거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다른 부문은 고사하고 문학 부문만 보더라도 그렇다. 아니 문학 분야가 그리고 학계가 가장 고답적이고 가장 보수적이다.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게 페미니즘에관한 논의이다. 우리나라처럼 페미니즘에 관한 논의가 겉돌고 있는 나라도 없을 거다. 아니 겉돌고 자시고 할 만큼의 논의로서의 공식적 세력도 확보하지 못했다. 그건 무슨 이유인가. 아무도 페미니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우리 문화, 문학의 프로그래머들이 대부분 남성이기 때문이다. - P375

여성 작가가 페미니즘 운운하면, 대뜸 나온다는 말이 "그거 부르주아 여자들이 하는 거 아니오?"이다. 그러면 그 여성 작가는 입을 다물어버리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반격을 시작한다 해도 그 반격을 정식으로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지 않고 농짓거리로 만들어버릴 우려가 있고, 반격을 가한다면 참으로 골치 아픈 여자라는 딱지가 붙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게 우리나라 여성 작가들이 갖고 있는 자기검열, 우리 사회가 우리 여성들에게 프로그램화시킨 자기검열의 소프트웨어다. 도대체 논의를 좀 해보자는데, 그건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뭔지 논의의 소재, 논의의 주체 자체를 장악하고 한정시키고 조종한다. 그러면서도 가끔씩은 또 개방한다. 그건 완전한 개방이 아니다. 문을 좀 빠끔 열어놨을 뿐이다. 왜 열어놨나? 그건 자기네들이 그렇게 독선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그 빠끔히 열린 틈으로 들어가려 하면 갑자기 그 문이 쾅 닫혀버리고 들어가려던 사람은 문에 머리를 부딪히게 된다. - P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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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라야 내가 보기엔 정말 대단할 게 없었지만, 그렇게 적은 사람들이라도 모여서, 그리고 그 작품들이 별볼일 없는 것 같아 보임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것, 이게 놀라운 거다. 사실 나처럼 대도시에서 산 사람들은 그런 자그마한 공연에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질 못하고 시시하다는 느낌만 받기 일쑤이지만, 한 가지 부러운 것은 그런 작은 공연들, 작은 행사들을 위해서도 다양한 종류의 지원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아무리 적은 숫자의 사람이라도 와서 그걸 즐기는 사람들이 있고, 아이오와시티에서도 보면 거의 모든 사람이 뭔가를 하고 있다. 예술이라는 이름을 건 뭔가를 하고 있다. 그게 참 신기해 보인다. - P120

아트 뮤지엄에 가서 내가 또 속았다는 걸 알았다. 도대체 그걸 전시회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건지. 내가 대도시에 살아서 우선 물량적으로 큰 행사에 익숙해서인지 모르지만, 이곳에서 내가 가본 전시회나 공연들은 우선 그 크기가 나를 실망시키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제목이 엄청 거창하고 멋있어서 따라온 건데 겨우 그림 몇점,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울음소리와 우는 표정만이 있는 비디오 공연이 전부이다. - P137

전문가가 아니니까 모를 일이지만, 내가 보기엔 별로 대단할 게 없는 전시회다. 그런데 제목도 멋지고, 팸플릿도 멋지고, 무엇보다 멋진 일은 이 별것 아닌 것 같은 전시회의 후원자들이 엄청 많다는 거다. 무려 아홉 곳으로부터 후원을 얻고 이루어진 전시회다. 패밀리 재단이 둘 있고, 아이오와대학도 끼어 있다. 내가부러워하는 게 이런 거다. 국내 예술가에 대해서든 외국인 예술가에 대해서든 지역사회 내의 유력한 단체, 조직들이 후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 외국인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은 결국은 국내 예술가들과 자기네 나라 사람들에 대해 후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전시회나 공연을 보고 즐기고 그것으로부터 뭔가를 얻는 건 자국 사람들이니까. - P138

(그런데 나는 솔 벨로의 작품은 많이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에게서는 내 존재의 어떤 것,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건드리는 요소가 적다. 그는 사회화된 - 이런 말이 가능한가? - 작가이다). "To be a Jew is bad, to be ayoung Jew is worse, to be a young educated Jew is a crime." 그런데 이 에드몽 자베스라는 작가는 폴 오스터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모든 작가가 어떤 면에서는 유태인 조건이라는 것을 체험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작가, 모든 창작자는 일종의 추방 상태에서 살기 때문이다." 폴 오스터가 왜 이 작가에게 끌렸는지 알겠다. - P159

여기서 별소리가 다 오갔다. 아니 이 구절이 문법적으로 틀린 것도 아닌데 왜 이해가 안 가냐? "Would you teach me English?"라는 문장이 가능한데 왜 "Would you teach me a bird?"라는 문장은 불가능하냐고 물으니까, 캐럴라인은 문법적으로는 틀리지 않지만 말이 안 된다는 거다. 그래서 내가 그러면 "Would you teach me sea?"라는 문장은 그러면 어떠냐 하고 물으니까, 그건 또 느낌이 들어오고 가능하다는 거였다. 그래서 내가 이 문장은 한국어로 말해도 역시 좀 이상하게 들리는 문장이다. 그런데 그 이상한 낯선 효과, 일상적인 어법과 마찰을 일으키는 바로 그것이 이시에서 새의 무한 자유라는 이미지를 더 부각시켜준다고 말했다. 나는 이 시에서 새라는 단어를 다른 어떤 단어로 고칠 의향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러면 이 문장에서 새는 죽은, 갇힌 새가 되기 때문이다. 결국 나중에 캐럴라인이 묘책을 내놓았다. 그 묘책이란, "Would you teach me; a bird?"였다. 세미콜론 하나를 집어넣은 것이었는데, 캐럴라인은 자기가 고친 게 흡족스러운지 아주 좋아했다. 나는 번역자의 그런 마음을 안다. 내가 번역하는 사람이니까. 한 구절을 멋있게 번역해놓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아지는지 꼬박 네 시간 동안 화장실 한번 가지 않고 한자리에 앉아 열일곱 편을 검토해 완결지었다. 이건 아주 좋은 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 P165

오늘 오후 세시쯤에 김도일씨 가족과 쇼나와 함께 사과밭에 가서 사과를 땄다. 자기가 딴 분량만큼의 사과를 아주 싼값에 살 수 있다고 했다. 그 사과밭은 너무 아름다웠다. 저절로 떨어진 사과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거기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쇼나와 나는 각기한 양동이씩 사과를 땄고 그걸 다 샀다. 아이오와를 떠날 때까지 매일 먹어도 다 못 먹을 만큼 많은 사과를 사과밭 주인은 노부부였는데 사과밭 한가운데 있는 그들의 하얀 집도 너무 아름다웠다. 그리고 윈드차임이 바람 불 때마다 내는 그 소리도 너무 아름다웠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그냥 아름답다고 말할 수밖에는 이상하게도 나는 아이오와에서 단 한 편의 시도, 아니 단 한 줄의 시구도 얻지 못했다. 모든 게 너무 다르기 때문에 내 감수성이 문 꽉 닫아버리고 있는 걸까. 그렇긴 하지만 안타깝지는 않다. 내가 체험하는 것들 모두가 착실하게 내 내부로 가라앉고 있을 거다. 그리고 어느 날 시로 나오겠지. - P172

다른 모든 일상생활 방식에서도 다른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들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내가 똑같이 하면 내 자신이 보기에 아주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것과 똑같은 이치인 것 같다. - P179

분명 누군가가 새벽에 들이밀어 넣고 간 쪽지다. 그 종이에는 이런 글귀가 타이핑되어 있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들은 우리에게 하나의 misfortune처럼 작용하는,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어떤 이의 죽음처럼 우리를 괴롭게 만드는, 마치 자살 직전에 있는 것처럼 혹은 사람이 사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숲에서 길 잃은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그런 책이다. 책이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기 위한 도끼 구실을 해야 한다. - 프란츠 카프카

식상할 만큼 너무도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 P182

그녀의 방문에는 이런 쪽지가 붙어 있다.

When you get there,
there is no there, there. - Gertrude Stein - P182

나는 마틴을 볼 때마다 젊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물론 그는 이십대는 아니고 삼십대이긴 하지만 내가 삼십대라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하지만 그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이라는 것도 안다. 중요한 것은 시작한다는 것이지 언제 시작하느냐가 아니니까. 이대로 살다가는 아마도 10년 후 오십대에 가서 나는 또 사십대만 되어도 뭐든 시작할 수 있을 텐데라고 중얼거리고 있을 것이다. 이 삶의 염치없음. 이 삶의 무기미. 오늘은 정말 날씨가 너무 좋다. 진짜 날씨가 좋은 게 아니라 멜랑콜리한 기분에 푹 빠지기에 아주 좋은 날씨라는 얘기다. 그래서 결심을 했다. 오늘의 중요 행사인 인터내셔널 센터에서 열리는 토론과 파티에 참석하지 않기로 말이다. 가봐야 잘 알아듣지도 못할 테지만 말이다. - P199

결국은 내가 보기엔 아이덴티티 찾기의 문제이다. 백인 위주의 사회에서 흑인으로서,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일반 성생활자의 사회에서 특별한(여기서는 주로 ‘queer peopl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차별적 언어이기 때문에 쓰지 않기로 되어 있는 용어다) 성생활자로서의 아이덴티티 찾기. 그와 마찬가지로 각 종족, 각 민족이 이 사회에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들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흑인들의 아이덴티티 문제가 끝나면 그다음엔 스페인어군 출신자들, 그다음엔 코리안들이 이 사회에서의 아이덴티티 찾기 문제가 핫이슈로 등장할 것이다. 그렇게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의 문화가 끊임없이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그것들을 껴안으면서그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형성해가는 것이 아닐까. - P213

한국인 2세, 3세들이 이곳에서 영어로 쓴 작품들이 커다란 문학적 평가를 받게 되는 날까지는 미국 내에서의 코리안들의 문제가 명확한 문화적 안건으로서 등장하기는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 P215

스피킹이 딸리니까, 나는 어떤 이즘을 깃발로 달든 간에 그것이 단순히 사회운동으로서가 아니라 문학 자체로서의 위력을 갖기 위해서는 개인주의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해야 되며 또한 동시에 개인주의와 휴머니즘의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페미니즘문학이 사회운동이 아닌 하나의 문학작품으로서 독자에게그 힘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즘 자체보다는 개인주의적인, 실존주의적인, 휴머니즘적인 것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만 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으면 페미니즘은 단순한 휴머니즘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말만 하고 그걸로 끝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의문은 아직도 남아 있다. 뭐냐 하면, 그렇다면 그 여성 체험이라는 것은 (이것은 나로서도 너무나 뼈저리게 느껴온 것이니까,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페미니즘적 관점에만 얽어매어야 하나의 사회적 의미로 환산되어 나오는 거냐, 그것을 다른 관점에서는 얽어맬 수 없는 거냐, 페미니즘은 언제나 한 가지 시선만 갖고 있느냐 등등을 묻고 싶었다. 그러나 내 스피킹 실력으로는 더듬거리다가 망신만 당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 P223

실제의 작품은 그 세부 하나하나가 모두 한 독자 내부에서 그 독자라는 한 개인과 한 인간 존재의 세부들과 만나 서로 갈등하고 마찰하고 교통하면서 전달될 수 있을 때 그 문학작품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 P225

미시시피강을 건너 쿼드시티로 입성할 적에 우리가 지나가는 다리 말고 가까이에서 불이 환하게 켜진 수많은 아치가 있는 다리를보았는데 그때 내가 저 다리가 한국의 제1한강교라는 다리와 흡사하다고 말했었던 것을 기억했는지 마크가 그 다리를 건너서 아이오와시티로 돌아가자고 했다. 그런데 쿼드시티에서 그 다리로 나가는길을 찾기가 쉽지 않은지 계속 뱅뱅 돌길래, 내가 마크에게 다리 하나 찾는 데 한평생이 다 걸리겠다고 말했더니 갑자기 뒷좌석에 앉았던 리오넬이 승자, 고맙다. 방금 시 한 줄을 얻었다. 그거 내가 써먹어도 되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마크가 그것을 과거 시제로 쓰면 멋진 소설로 들어가는 첫 구절로 썩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럼 각기그 구절을 써먹어라, 나도 그 구절을 한번 써먹겠다고 말했다. - P245

한국에서 고속도로로 어느 낯선 시골 지역을 통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평온하고 쓸쓸하고 조금은 서글픈 느낌. 이 고질적인 서글픈 느낌은 뭘까. 나는 언제나 아늑함 평온함 그리고 아름다운 것에서 서글픈 느낌을 받는다. 그 이유가 뭘까. 가령 내가 옛날에 대학다닐 때 썼었던 시, 「사랑하는 손」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가 바로 그런 것을 잘 보여준다. - P246

1한시 반에 마지막 패널 디스커션에 참석. 공식적 행사들이 이번주로 모두 마지막이 된다. 패널 디스커션의 주제는 ‘Lost in the Fun House‘이다. 미국에 와서 얻은 미국에 관한 이미지를 얘기하라는 것인데, 그 제목 자체가 주최 측 미국인들이 비미국인들에 대해 기대하는 것이 무언가를 보여준다. 그들은 우리 비미국인들이 미국을 펀 하우스로 보아주길 바라며 그 속에서 우리가 길을 잃고 당황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 무의식적인 우월감. 그런데 이 제목은 기억할 수는 없지만 분명 어떤 작가의 소설 제목이다. 사실은 나 자신 존 바스도 이 주제에 관해서 흥미를 느끼고 있었고 같은 참가자인 비미국인들이 느낀 것이 얼마나 같고 얼마나 다른지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참석한 것인데, 연사들의 얘기가 너무 개인적인 차원이라 실망했다. 아니면 내가 너무나 진지한, 엄숙한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여기 와서 느낀 것 중의 하나는 내가 정말로 굉장히 엄숙한, 경직된 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구나 하는점이었는데 그것을 패널 디스커션에서 또 한번 확인한 셈이다. - P262

내가 대답한 내용인즉슨, 나는 이곳 사회와 문화 속에서 여러 가지 갈등, 이를테면 흑백간의 갈등(이건 구식 갈등이 되었고), 수많은 소수민족 집단의 미국 체제와의 갈등, 지금 최고조에 이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남성과 여성 간의 갈등, 그리고 특수 성생활자들(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이 이 사회 속에서 인정받으려 애쓰고 드디어 인정받기 시작해가는 과정에서 겪는 갈등들, 이 모든 - P263

갈등이 그 모든 개인과 개별적인 집단이 이 미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들이며 이 문화를 가만있지 못하고 자꾸만 앞으로 나가게 만드는 추진력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나는 미국 문화가 아직 자기 아이덴티티를 확립하지 못한 문화로 보는데 그 이유가 바로 그 다양한 개인적 · 개별적 집단들이 자기ㅌ아이덴티티를 아직도 찾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고, 그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다양한 개별적 집단들이 끊임없이 이 사회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립하려는 노력이 시도될 것인데, 그게 바로 이 사회와 문화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본다, 끊임없이 세분화·개별화되는 집단들의 자기 아이덴티티 확보를 위한 노력들이 이 사회와 문화 속에서 갈등들을 일으키면서 한 개의 커다란 아이덴티티, 미국 문화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해나가게 만드는 것이라는 게 내 느낌의 전부였다는 것이었다. - P264

내가 미국 문화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측면이다. 가장 큰 집단으로부터 가장 작은 집단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개별화·세분화되면서 인간의 진정한 인간화를 위한 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그들 하나하나의 자기 아이덴티티를 찾기 위한 노력과 논의가 허용되고 그것이 놀라울 만한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이 레즈비게이 문제는 이미 중심적인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되어 있고, 그 단계에서 벌써 다시 세분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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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를 영어로 옮기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 한 일인데 그것도 시를, 그것도 내 시를 영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정말로 힘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시에 나오는 단어 하나가 가진 여러 가지 뉘앙스의 비율까지 느낄 수가 있는데(왜냐하면 내가 쓴 시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아 슬픔이여‘라고 썼다면 그 슬픔이라는 단어는 그 컨텍스트 안에서 풍자 30프로, 경멸감 30프로, 진짜 슬픔 30프로 등등으로 그 뉘앙스의 비율이 나누어질 수 있기 때문에 그 비율까지 딱 맞는 영어 단어를 고르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다. 완전한 번역이란 불가능하다는 걸 그때 뼈저리게 느꼈다(그전에도 물론 알고 있었지만). - P17

강의실에 빙 둘러앉아서 학생, 작가할 것 없이 돌려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는데 작가들의 경우엔 자기소개도 길었고 문제제기도 많았다. 특히 아프리카 작가들은 자국 내의 언어 문제, 즉 공용어는 영어인데 토착어는 수없이 많고 그래서 생기는 문제들에 대해서 자기네들끼리 치고받고 있었다. 대영제국이 만들어낸 사생아들이 세계 곳곳에서 언어를 통한 자기 아이덴티티를 얻지 못하고 언제나 이방인으로 머물면서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우리나라 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정신적으로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알 수가 있었다. - P35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계속 얼굴에 웃음을 띠고서 하이, 헬로하고 돌아다니려니 얼굴에 탈바가지를 쓰고 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떻게 언제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활짝 미소 지으며 돌아다닐수 있는 건지, 미국 사람들이 놀랍다. 나로서는 그게 더 힘들다. 차라리 무뚝뚝하게 인사하거나 아니면 아예 그냥 지나치거나 하는 편이 더 쉽다. 아직도 인사하는 습관이 붙질 않아서 인사를 할 때마다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메이플라워 맨 꼭대기 8층에 약 30개국에서 온 약 서른 명의 작가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내 방문을 나서기만 하면 언제나 한두 명의 작가와 마주치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얼굴을 환하게 하고서 하이 하고 인사를 해야 하는데, 어떤 때는 인사하는 것을 잊어버리고서 상대방이 저만큼 가버린 뒤에야 아 참 내쪽에서는 인사를 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무튼 이 미소 탈바가지가 내게는 무지무지 무겁게 느껴진다. - P37

오늘 아침 부엌 식탁에서 피자를 먹으면서(아침부터 어떻게 피자를 먹을 수 있는 건지) 쇼나가 내 시에 대해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첫마디가 네 시는 ‘not enjoyable‘하다, 네 시는 ‘destructive‘하다였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그런 말 많이 들었다고 대답하자, 내가 삐진 줄 알았는지 그러나 내 시가 마음에 든다고 덧붙였다. 어제 번역워크숍에 함께 가며 오며 뉴질랜드의 베릴도 비슷한 말을 했다. 아마 쇼나가 베릴에게 내 시들을 보여준 모양이었다. 베릴 역시 파괴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내 시가 파괴적 에너지로 가득차 있다고 말했다. - P38

그녀는 언제나 공식적으로 자기 자신을소개할 때 나는 페미니스트 소설가이다라고 말하고 모든 것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보는 버릇을 갖고 있다. 그녀는 내 시도 그런 관점에서 보았을 게 분명하다. 시 창작자로서보다는 시 번역자로서의 즐거움이 더 컸다. 어쨌거나 내가 번역한 시가 그들에게 얼마큼 통할수 있다는 게 기뻤다. 그리고 그들이 나이든 한국 여성 시인들과 얼마나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언젠가 김혜순에게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원로 여성 시인이 무슨 상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추천을 위해서 김혜순과 내 시집을 어렵사리 구해 읽었는데, 김혜순의 시집을 펼쳐보니 첫 페이지부터 이놈 저놈 소리가 나오고 최승자의 시집을 펼쳐보니 첫 페이지부터 웬 배설물(그 시인은 차마 똥이라는 말도 발음하지 못하고 배설물이라는 단어로 대치했다) 타령이 나오는가, 그래서 자기 낯이 뜨거워져서 추천조차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나누면서 김혜순과 나는 낄낄거리며 웃었더랬다. - P39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겠다. 향수병을 치유하는 데는 쌀밥보다 라면이 더 즉각적인 효력을 갖고 있다. - P42

클라크의 설명에 의하면 이미 백인이 쓰는 영어는 그 새로운 언어 생성력의 힘이 소진되었고, 지금 새로 만들어지는 언어들은 흑인들이 쓰는 영어가 그 주요 원천이고 그다음이 히스패닉이란다. 지금도 물론 굳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이미 유러피언 백인이 소수민족으로 전락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클라크의 국적은 캐나다인데 그의 조상은 프랑스에서 건너온 모양이었다. 아무튼 미국 역사의 초창기부터 아메리카의 주인 행세를 했던 유러피언 백인들 자체가 이제는 마이너리티로 전락해가고 있고, 더이상 생동하는 미국문화 창조의 주역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펑키‘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흑인 사회에서나온 말이고, 원래의 뜻은 남녀 간의 정사로 인해 이불에서 나는 냄새라고 했다. 흑인 아이들이 (흑인들은 가난하니까 방이 많은 집에서는 살 수 없었을 테고 적은 숫자의 방에서 몰려 살면서 부모의 정사에서 나오는 그 냄새를 더 많이 맡았을 것이다)이 빌어먹을 펑키 시트 좀 치울 수 없어요? 하고 항의하곤 했던 배경에서 나온 단어라고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한번 각광을 받게 된 단어는 원래의 뜻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혹은 번져가는 문화 속에서 자꾸만 다른 의미로 변화해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펑키는 더이상 원래의 냄새를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가령 젊은이들이 머리와 몸에 무슨 장식들을 주렁주렁달고 다니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로 변했다는 것이다. - P47

오늘은 메이플라워 맞은편 잔디밭을 가로질러 아이오와 강변으로 갔다. 잔디밭에 달맞이꽃들이 피어 있었다. 강변 벤치에 누워 오리들이 떠 있는 강물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건 로드 맥퀸이라는 싱어송라이터가 쓴 시집 중에 나오는 구절로 대학교 1학년 때 그의 시집을 읽다가 기억해둔 것인데, 이상하게도 몇십 년이 지나면서 그의 다른 시들은 다 잊어버렸으면서도 그 구절만큼은 잊히지 않고 내 기억의 서랍 속에 그대로간직되어 있다. 글쎄 오늘은 좀 외로웠나, 아니면 나의 앞날이 불안해졌나. 그 구절은 이렇다. "Lonely rivers going to the sea givethemselves to many brooks." 이건 내가 슬며시 외로운 생각이 들 때마다 나 자신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다시 되살려보곤 하는 구절이다. "바다로 가는 외로운 강물은 많은 여울에게 저를 내준다." - P49

어떤 나무들은 바다를, 바다의 소금기를 그리워하여 바다 쪽으로, 그 바다가 아무리 멀리 있어도, 바다 쪽으로 구부러져 자라난다고 한다. 그런 나무들이 생각났다. - P51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세 사람이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게 모두 국민학교 들어가면 배우는 노래였다. 서로 다른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대영제국의 사생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교육과정에서 똑같은 노래들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 노래들 중에는 영어 가사는 모르지만 멜로디는 아는 노래들도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대영제국의 사생아들 중의 하나는 아니지만 아마도 대영제국의 후손의 사생아의 친구쯤 되는 건가 뭔가. - P57

내가 성적으로 얼마나 폐쇄된 사회에서, 아니 성에 관해 벌어질 수 있는 일은 다 벌어지면서, 아니 성적 행위와 성적 논의가 거의 일방에서만 이루어지는 그러니까 남자들 편에서만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살았다는 것을 실감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 P59

여기 와서 갖게 된 생각 중의 하나는 한 사회가 그것이 소속되어 있는 보다 큰 사회 내에서 살아남으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언어로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적·사회적 면도 중요하지만, 그 자체의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 있으려면 우선 언어로 표현해야 되는데, 그것이 사회학자의 언어 혹은 경제학자의 언어가 아니라 문학가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을 때 그 작은 사회 내에 소속된 사람들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아이덴티티를 그보다 큰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도 인식시켜줄 수 있다는 얘기다. - P68

영어로 쓰인 한국인의 작품이 나오지 않는 한 한국인은 문화적으로는 미국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민족이 된다. 지금 미국에선 순수 유러피언 백인들의 문화, 문학이 무너져가고 있다. 최근에 노튼출판사에서 나온 최신 작가들의 『New Worlds of Literature』라는 책을 사서, 작품들은 아직 읽지 못했지만, 거기 실린 작가들의 이력을 대충 훑어보았는데 이 책이야말로 그런 각도에서 만들어진 책이었다. 거기엔 순수 백인들의 작품은 별로 없고 거개가 이민 온 혹은 국적을 바꾸지 않고 영주권만 갖고 미국에서 사는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그런 작가들의 작품은 그 작가 개인의 아이덴티티를 얻는 데그치는 게 아니라 그 민족의, 그 국적의 아이덴티티를 미국 사회에서 획득하게 해준다. 미국은 이제 순수 유러피언 혈통을 가진 백인의 나라가 아니라 ‘nobody‘s land‘이며 동시에 ‘anybody‘s land‘로 변해가고 있고, 그런 사회 안에서 문화적 시민권을 얻자면 다른 무엇보다도 문학가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사회 내에 사는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에 사는 한국인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 P69

작가가 자기 작품을 써놓고서 이건 내 게 아니다라는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처럼 낭패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내 자식인 줄 알았는데 내 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처럼. 그러나 그렇지 않은, 그 반대인 사람들도 있다. 이게 헬레나와 남서태평양 세 자매 간의 차이일 것이다. 누가 좋고 나쁜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 P79

아메리칸 섹스라는 게 어떤 건지 감은 안 잡히지만 어쨌든 성에 관한 논의 자체는 엄청나게 개방되어 있다. 우리 같은 한국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런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싶지만, 그런 말을 여자든 남자든 꺼낼 수 있고 논의할 수 있다는 건 어쨌거나 좋은 일이다. 논의 자체가 경직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경직되어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이득을 보는 집단이 있고 억압을 당해야 하는 집단이 있다. - P92

거기 함께 갔던 모든 사람에 대한 언급이 한구절씩 나왔다. 그 모든 언급은 지금은 기억이 나질 않고, 다만 아미르에 관해서는 보이 역시 그의 섹시한 특성에 주목하고 있었고, 마크에 대해서는 "자연의 수도승 마크"라고 표현했고, 승자에 대해서는 "승자는 행복을 두려워한다"라고 쓰여 있었다는 게 기억날 뿐이다. 내가 보기엔 보이가 행복을 두려워하는(두려워한다기보다는 거부하는) 것 같은데, 바로 그 보이가 나에 대해 그런 말을 하다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나도 우거지상을 하고 다니는 건가? 나의 미소 마스크를 다시 한번 윤나게 손질해야겠다. - P99

사실 나도 대부분의 파티에서 솔직히 말해 지겨움 밖에 느끼는게 없고 이 미국인들은 왜 이리 쓸데없는 말들을 열심히 지껄이는 걸까 하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고, 그러다가 급기야는 내가 하릴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쇼나는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걸 느낀다 하더라도 파티에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건 옳지 않다고, 이성으로 판단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녀의 감수성 자체가, 그게 옳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런 행동은 자연히 나오지 않을 거였다. 모르겠다. 정확히는 하지만 분명 아시아인과 백인 간에는 센서빌리티와 멘탈리티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걸 여기 와서 한두 번 느끼는 게 아니다. 그런걸 들어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겪는다는 건 때때로 이상한 충격을 준다.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가 있는 건지.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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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임솔아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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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봄 유일하게 챙겨 읽는 수상작품집이다. 개인적으로 작년보다 좋았다. 김병운 작가의 게이 정체성 화자가 에이섹슈얼 친구에게 갖는 편견 이야기는 시스젠더 헤테로에게 신선한 해방감(?)을 준다. 요즘 뜨는 김지연 작가의 진한 현실감도 좋고, 마지막 서이제 작가의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실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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